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5월 17일 부활 제6주일

Margaret K 2020. 5. 16. 19:10

2020 5 17일 부활 제6주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 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  

(요한 14,15-21)

 

 "If you love me,

you will keep my commandments.
And I will ask the Father, 
and he will give you

another Advocate to be with you always,


 

 

2020년 5월 17일 주일 부활 제6주일 매일미사_옥현진 시몬 주교 집전

https://www.youtube.com/watch?v=Y9hPwuJCZc8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병규신부-


사랑은 함께 머무는 일입니다. 아버지와 아드님께서 함께 머무시고 그 아드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는 사랑으로 하나가 됩니다. 이런 일치를 도와주시는 분께서 성령이십니다. ‘보호자’로 번역된 성령께서는 그 말마디의 본디 의미에 따라 ‘누군가를 돕기 위하여 불린 사람’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아 낙담하고 슬퍼하는 1세기 말엽의 신앙 공동체에, 요한 복음은 예수님께서 여전히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성령을 통하여 일깨웁니다.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우리 신앙인의 삶 안에는 홀로 버려지는 이들이 없어야 합니다. 한처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 사이를 ‘알맞은 협력자’로 규정하셨고(창세 2,20 참조), 성령께서는 서로서로 도울 수 있도록 교회 안에서 함께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사도 2장 참조). 성령과 함께하는 교회는 선과 악의 대립으로, 정의와 불의의 대립으로, 진보와 보수의 대립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선을 지향하되 악을 만나 회개로 이끌고, 정의를 외치되 불의함을 함께 아파하며 고쳐 나가고, 진보의 개혁을 보수의 가치로 함께 고민하는 것이 교회가 할 일입니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좋은 것이 좋다는 식이 아닙니다. 모든 이가 회개 안에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머물게 하려는 것입니다.
모든 이가 하느님과 함께 머물게 하시고 함께 살아가게 하시려고 오늘도 성령께서는 활동하고 계십니다. 성령을 가로막는 것은 하느님과 이루는 일치를 가로막는 것이고, 우리의 이분법적 사고와 단죄는 그 일치에 가장 큰 걸림돌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앞에는 물리쳐야 할 악마가 아니라 회개와 용서로 보듬어야 할 작은 이들이 있을 따름입니다. 


행동으로 드러나는 사랑

-키엣 대주교-


떠날 시간이 다가올수록 예수님의 사랑은 점점 더 간절하고 깊어지셨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언제나 아버지 하느님을 지향하고 계시지만 그 사랑 안에는 당신의 사람들에 대한 깊은 사랑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가장 소중한 사랑의 선물은 바로 자신을 바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삶을 아버지께 바치셨고 이제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끼는 사람들을 돌보아 주실 것을 간절히 비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당신을 바치신 것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예수님 당신 그리고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로 이어지는 사랑의 질서안에서 이루어지는 위대한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위의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당신과 인류의 근원이 아버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일깨워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하느님께서 주신 임무를 완수하심으로써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임무를 이어받은 주님의 자녀들입니다. 이제 그 임무를 완수하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해 드려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영광 속에 사랑은 더욱 더 높고 고귀해지고 인간의 행복 또한 깊어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의 영광을 바라셨습니다. 당신의 사람들이 고난 속에서도 언제나 주님의 뜻을 따르고 아버지 하느님께서 언제나 그들을 돌보아 주실 것을 기도드렸습니다. 베드로 사제는 당신의 영혼과 삶을 하느님의 도구로 쓰실 것을 기도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제 나는 성령께 사로잡혀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나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나는 모릅니다. 다만 투옥과 환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성령께서 내가 가는 고을에서 마다 일러주셨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 곧 하느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야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사랑은 실천하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믿음과 사랑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계명을 지키고 하느님을 사랑하여야 합니다.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과 영원히 함께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믿음과 사랑이 필요합니다. 믿음과 사랑은 초자연적인 진리를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입니다. 믿지 않는다면, 사랑하지 않는다면 볼 수 없습니다. 의사가 질병의 원인을 찾아 그에 적합한 치료를 하는 것처럼 믿음과 사랑도 그렇습니다. 믿음과 사랑은 예수님과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진리를 인식하고, 진실된 예수님을 이해함으로써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능력입니다.

믿음과 사랑은 하느님께 다가가는 길입니다.

진실된 믿음과 사랑을 갖게 된 제자들은 이제 하느님은 너무 멀리 계신 모호한 존재가 아니라 언제나 나와 함께 내 옆에 계신 분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진실된 믿음과 사랑으로 성체성사 안에서, 성경 속에서, 교회의 가르침 안에서, 형제 자매들 안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진실된 믿음과 사랑이 있다면 나의 마음 속에 성령이 임하심을 뜨겁게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주님의 자녀로서 내가 가는 모든 길을 비춰 주시고 몸과 마음을 다해 봉사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믿음과 사랑은 영적인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문은 바로 우리가 주님을 보고 주님을 만나는 문이며 ‘주님의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주님의 생명’은 바로 ‘하나됨, 곧 일치’를 이릅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아버지 하느님 안에 아드님이신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 안에 하느님이 계시는 것처럼 우리 안에도 삼위일체의 신비가 함께 계십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믿음을 잃은 사람은 그분을 보지 못하여 고아가 될 것입니다. 사랑의 문을 닫아버리는 사람은 그분을 만나지 못하여 외로운 삶을 살 것입니다. 믿음과 사랑으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만나고, 삼위일체 하느님의 새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깊은 상처와 절망이신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는 성령의 위로와 삼위일체 하느님의 고귀한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 은총이 헛되지 않게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들을 이루기 위해서 언제나 주님의 말씀을 되새기고 사랑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믿음은 사랑으로 표현되고 그 사랑은 행동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삶입니다.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나의 주님에 대한 사랑은 어떻습니까?

2. 주님의 뜻에 따라 실천하는 사랑은 무엇입니까?

3. 사랑과 봉사를 통하여 하느님을 드러내 보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까? 

성령, 하느님의 가장 근 선물

-임상만신부-


오늘 복음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얘들아,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너희는 나를 찾을 터인데, 내가 유다인들에게 말한 것처럼 이제 너희에게도 말한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요한 13,33)라고 하시며 당신께서 떠나실 것을 거듭 말씀을 하시자 제자들은 매우 큰 근심에 휩싸였다.

물론 주님과 함께 죽으러 가자는 제자도 있었고, 죽어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는 제자도 있었지만 하나같이 염려와 근심이 가득한 건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요한 13,16)라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근심하지 말고 하느님과 당신을 믿으라고 당부하신다.

우리나라가 OECD 국가에서 자살률이 제일 높다는 사실은 이미 많은 사람이 알고 있다. 대부분 인생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마지막에 하는 세 마디의 말이 있는데 ‘외롭다. 두렵다. 힘들다’라고 한다. 어쩌면 이 말들에는 인생의 슬픔과 아픔 그리고 절망이 전부 녹아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세 마디가 한 번에 모이면 자기의 삶을 놓아버리는 상황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외롭다’는 말은 모든 상황이 자기를 외면하고 자기 혼자만 남았다는 생각 속에 남은 인생길을 고독하게 홀로 가야 한다는 절박함에서 나오는 말이다. 또한 ‘두렵다’는 말 역시 어디에도 의지할 것이 없고,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인생길에 혼자 들어서는 것이 무섭다는 것이다. ‘힘들다’는 말도 세상살이가 너무 치열해서 이 어려운 인생길을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지 모르기에 너무나 고달프다는 표현이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우리도 살아가면서 늘 한두 번씩은 해본 말이다. 누구나 혼자 살아가는 인생이기에 똑같이 힘들고 고달프고 외롭긴 마찬가지일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많은 이들과 더불어 살아간다 해도 그 속성상 혼자일 수밖에 없기에 늘 외롭고 두렵고 힘든 존재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우리가 외로울 때 함께 하시겠다고 위로해주시고, 두려울 때 겁내지 말고 안심하라고 우리의 손을 잡아주신다. 그리고 우리가 힘들어 낙심할 때는 언제나 당신께서 편히 쉬게 해주시겠다며 늘 함께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더불어 우리에게 최고로 좋은 선물을 약속하시며 당신을 믿으면 성령의 사람이 되고, 성령으로 살게 되면 더 이상 외롭고 두렵거나 힘들지 않게 됨을 믿으라고 하신다.

우리가 성령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특권이고 자랑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령으로 살아갈 때 진정한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고, 성령을 가슴으로 모실 때 그 속에서 우리의 생명이 새로워지고 치유의 회복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귀하게 여기는 어떤 것 보다 성령의 사람이 되는 것이 우선이어야 한다. 그 후에 우리가 바라는 그 무엇이라도 되어야 그 의미나 정체성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성령님께 어떤 힘든 일이 있거나 필요한 지혜나 능력을 청하면 언제나 응답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도 절대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13)


하느님이 우리에게 빛을 비출 때

-임숙희-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긴 동굴을 지나 밖에 나오니 세상은 온통 푸르름, 꽃이 만발합니다. 꽃, 꽃, 꽃! 오랫동안 실내에 두었던 텃밭 상자의 상추와 치커리, 로즈마리도 햇볕을 쬐고 나니 놀랍게 푸르고 단단해졌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햇빛과 바람을 받아들이기만 했는데도 식물이 광합성 작용으로 변화됐습니다. 이 모습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빛을 비출 때 일어나는 우리 영혼의 광합성에 대해서도 성찰하게 합니다. 아멘!

■ 복음의 맥락
오늘 복음은 지난 주일에 이어 예수님이 아버지에게 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사랑과 가르침을 나누는 장소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예수님의 떠나심으로 산란해진 제자들의 마음(부활 제5주일)을 위로하고 예수님이 떠나셔도 그들이 그분 일을 계속 하도록 성령의 선물을 약속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이어질 주님 승천 대축일과 성령 강림 대축일을 준비하는데, 요한 복음서에 나오는 성령 약속에 대한 다섯 개 담화 중 첫 번째입니다.

■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이제 떠나시는 예수님은 아버지께 청하시어 ‘다른 보호자’를 제자들에게 보내셔서 그들의 동반자가 되게 하십니다.(요한 14,16) ‘청하다’라는 동사는 단순한 간청이 아니라 간절한 갈망으로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을 아버지의 아들이 되게 하는 것은 꾸준한 기도, 중요한 고비에서 그분 자신을 아버지께 온전히 내어맡기며 일치를 이루는 기도입니다. 아들의 순종을 보시고 항상 아들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아버지는 이제 예수님 이름으로 성령을 보내주실 것입니다.(요한 14,26) 인간의 행복을 위해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것을 아낌없이 주시는 것은 하느님의 본성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곁에 계시면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실 것입니다.(요한 15,26;16,7)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성령을 받아라”하고 말씀하십니다.(요한 20,22)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의 주도권으로 성령께서 세상에 오시는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성령을 받는데 맞갖는 자세를 갖출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거룩한 삶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한 전제로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받기 위해 선행을 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면 우리가 선해집니다.”(마틴 슐레스케, 「가문비 나무의 노래」)

미국 뉴욕 시어파크 시릴과 메토디우스 성당의 ‘성령’을 표현한 스테인드글라스.


■ 아버지께서 다른 보호자를
‘보호자’는 그리스어로 파라클레토스(Paràkletos)입니다. 요한 복음서에만 나오는데(요한 14,16.26;15,26;16,7;1요한 2,1) ‘가까이 불린’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 문학에서 원래 법정 용어로 사용했고 피고인 옆에 앉아서 그를 변호하는 변호자를 가리킵니다. 이 말에는 ‘위로자’라는 실존적인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힘든 순간에 어려움을 겪을 때, 근본적인 고독을 느끼며 세상에서 혼자라고 느낄 때 옆에서 우리의 나약함을 함께 짊어지는 ‘위로자, 협조자, 돕는 이, 보호자’를 뜻합니다. 제자들은 그들의 믿음을 적대시하는 세상에 어떤 변호자도, 위로자도 없이 고아처럼 버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요한은 ‘성령’을 다른 복음서와 달리 사용하는데 성령에 관한 여러 표현은 성령이 누구신지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을 말합니다. 공관복음서에는 성령의 활동이 예수님의 직무에만 해당됐다면 요한 복음서에서는 예수님 승천 후 제자들의 활동까지 확장됩니다. 요한의 성령 개념은 유다 전통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주님과 백성 사이에서 ‘변호자, 중재자, 위로자’ 역할을 한 인물이 많이 등장합니다. 요한은 유다 전통에서 이것을 가져와 자신의 복음서에서 적절하게 사용합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 청하시는 이 보호자는 ‘다른 보호자’입니다. 첫째 보호자는 이제 떠나시는 예수님이시고 ‘다른 보호자’, 곧 성령은 그분 청으로 우리에게 오시어 우리와 함께 계시는 동반자입니다.

■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예수님은 성령을 ‘진리의 영’이라고도 부르십니다. 이 영은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지난 주 복음에서 예수님은 토마스에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리의 영은 아버지와 같은 사랑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시는 예수님 안에 있는 제자들 곁에 머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1요한 4,16) 우리와 ‘함께’ 우리 ‘곁에’ 머무시는 분은 몇 시간 후에 ‘우리 안에’ 계실 것입니다.

‘진리의 영’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전달한 최고의 선물입니다. 이 영이 새로운 진리를 계시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진리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 하면서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의지, 영감, 실행할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치유, 아버지의 사랑을 드러내고 양들을 모으는 예수님 직무를 계속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해지기 때문에 여전히 예수님의 일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 계명을 지킬 때에만 그들의 소명을 완성할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들 안에 머무시는 성령의 힘으로 세상 끝까지 그리고 종말까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확장시킬 것입니다. 성령의 약속에 대한 예수님 말씀이 교회 역사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돼 가는 것을 제1독서와 제2독서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계획대로 복음은 예루살렘을 거쳐 사마리아에까지 전파되고 사도들은 사마리아인들에게 성령의 세례를 베풉니다.(1독서) 성령 안에 머무는 사람들은 고통 가운데서도 성령이 불어넣는 희망과 인내와 용기와 온유함으로 그리스도를 용기 있게 증언합니다.(제2독서) 하느님 아버지!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우리 내면 안에 함께 사십니다. 감사합니다. 성삼위께서 우리 안에 사시는데 우리가 어떻게 우리 삶을 헛되게 살 수 있습니까?


사랑과 계명

-유환민신부-


가끔 연락하는 부부가 있습니다. 설치 예술가인 남편은 작업의 특성 때문인지 언제나 군화처럼 생긴 작업화를 신 었는데, 예술가답게 작업화도 허투루 고르는 법이 없었습 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인이 가볍고 편한 운동화를 남편 에게 선물했습니다. 20여 년 작업화만 신던 남편은 부인이 선물한 운동화 덕에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길을 가던 남편은 진열된 운동화 한 켤레를 보고 맙니다. 그 운동화는 그의 마음을 온통 사 로잡았습니다. 홀린 듯 매장 안으로 들어가 운동화를 집어 든 그는 부인을 떠올렸습니다. ‘운동화를 사준 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 게다가 이거 가격이 만만치 않은데….’ ‘그래도…. 아예 몰랐으면 모를 까, 이렇게 마주쳐버렸는데 어떻게 이걸 포기해!’ 어떡하면 부인을 설득해 허락을 받을 수 있을지 찰나의 순간 억만 가지 수를 헤아린 남편은 결론을 내립니다. ‘이걸 사달라고 하면 야단은 야단대로 맞고 운동화는 운 동화대로 포기해야 할 테니, 차라리 저지르고 야단을 맞자. 그럼 운동화는 남을 거 아냐.’ 뿌듯한 마음에 운동화를 사 들고 귀가한 남편은 비장한 얼굴로 기꺼이 부인에게 이실직고했습니다. 이만저만한 이 유로 운동화를 샀으니 부인은 저를 벌하고 사하소서. 아멘! 자진신고를 마치고 고개를 든 남편은, 그러나 크게 당황 했습니다. 부인의 눈가에 깊은 슬픔이 맺혔기 때문입니다. 

이윽고 부인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이 운동화를 봤을 때 내 생각이 안 났어? 난 좋 은 걸 보면 늘 당신이 먼저 생각났는데….”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요한 14,15) 사랑은 대상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끊임없 이 서로의 사랑을 내보이며 친교를 이루는 가운데 일치에 로 나아가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을 사랑하셨 고 그래서 십자가를 통해 그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 고 이제 제자들이 사랑을 드러낼 방법을 가르쳐주십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 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요한 14,21) 계명을 지키는 것.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여 우리 삶 가운데 현존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 다. 계명은 사랑을 구실로 서로를 옭아매는 구속이 아닙니 다. 오히려 계명은 서로가 품고 있는 사랑을 드러내 주고 그것을 표현하고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사도 요한은 그의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1요한 5,3)이며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그것으로 우리 가 그분을 알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1요한 2,3)



문을 두드려라(마태 7,7)

박우성신부-


사랑하는 사람은 서로를 배려하며 도와줍니다. 사랑으로 통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 습니다. 이럴 때는 ‘왜 내 마음을 몰라주느냐?’합니다. 서로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 내가 다 알고 있는데, ‘왜 마음을 열지 않느냐?’합니다. 서로 일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쉬움이 있습니다. 마음을 열고 다가설 때 마음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함께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하시면서 성령을 약 속하십니다. 아버지께 청하여 다른 보호자를 보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진리의 영으로 영원히 너희와 함께하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마음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오시는 성령이십니다. 사랑의 관계로써 일치를 이룹니다. 우리 인간에 대한 사랑을 통하여 드러나는 삼위일체입니다. 삼위일체는 마음을 열고 사랑의 일치를 이루며 함께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일치하여 함께 하시는 것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을 모시려면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요한묵시록에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 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라고 합니다. 함께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의 영, 성령을 보내주시고 우리 문 앞에 서 계십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그분을 맞이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실 수 있도록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세상의 온갖 지식이나 생각만으로 예수님을 맞이할 수 없습니다.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지식과 생 각만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지킬 수 없으며 하느님과 통할 수도 없습니다. 결국 하느님을 저버리게 됩 니다. 예수님을 맞이하지 못하고 하느님을 저버린다면, 성령을 모시지 못하며 구원의 은총을 받지 못 할 것입니다. 마음에 허영심과 탐욕, 증오와 질투, 안일무사와 이기심 등이 가득차 있으면, 구원자 예수님을 기 억하면서 갈등과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마음의 문을 열려고 하지 않습니다. 한편, 우리 마음에 구원 에 대한 열정과 믿음, 희망, 사랑 등이 가득차 있으면, 예수님께 문을 활짝 열어드립니다. 예수님을 반갑게 맞이합니다. 예수님과 함께합니다. 우리는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마음의 방을 깨끗이 정리해야 합니다. 버릴 것은 버리고, 필요한 것 을 새롭게 채워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그럴 때 성령과 함께 하느님의 계명을 지 킬 수 있습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갈 때 성령께서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실 것 입니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마태 7,7)


나를 사랑하는 사람

-박병례신부-


  “교회에는 호교론자보다 증거자가 더 필요합니다.”(교황 비오 12세)   전임 신부님께서 집무실 벽에 붙여놓은 문구입니다. 말하기보다 직접 삶으로 실천하려고 무척 노력하셨다 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사는 것이 말하기보다 힘들다는 것을 경험으로 이미 알고, 절실하게 노 력하는 부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들을 지킬 것입니다.”(요한 14,15)  “내 계명들을 받들어 지키는 사람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요한 14,21) (200주년 기념 성경)  사람들은 ‘계명’이란 말을 들으면 어떤 느낌이 들까, 생각해 봅니다. 다른 사람들도 저처럼 부담스러울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계명’을 ‘인생사용지침’ 정도로만 생각하면 계명을 욕되게 하는 것일까라는 좀 뚱딴 지같은 생각도 해 봅니다. 그러면 계명이 덜 무겁게 느껴져, ‘가벼워지면 들고 다니기가 좀 수월할지도 모르 겠다.’ 그런 생각이지요.   요즘은 집에서 기르는 고양이들도 많지만, 길거리에 버려진 고양이, 또 야생 고양이들도 있습니다. 야생 고양이들은 입가가 빨갈 때가 많습니다. 금방 식사를 했다는 표시지요. 새들이 고양이에게 잡아먹히지 않 으려면 방심을 하면 안 됩니다. 늘 경계를 하고 민첩하게 움직입니다. 딱새는 작지만 모양도 예쁘고 지저귀 는 소리도 농부의 귀를 즐겁게 합니다. 인가 주위에 둥지를 틀고, 사람들과 좀 친근한 텃새라고 생각됩니 다. 주로 암수 두 마리가 함께 다니는데 한 마리만 있는 딱새를 보면 애틋한 마음이 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삶의 나침판, 삶의 지침이 ‘계명’이고, 우리 사람들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방 법이 계명을 사는 노력일진대 부활의 생명,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며 살아가도록 또 새로이 노력해야겠지요.   ‘오뚝이’는 넘어지는 것을 가정하고 만들어졌다는 게, 만든 사람의 인생에 대한 이해가 놀랍습니다. 주님 께서는 나약해 넘어지고, 잘못이 아파 눈물 흘리는 우리들을 돕기 위해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어쩌면 우 리들을 오뚝이로 이미 알고 계셨으리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그토록 사랑하시는 줄 몰랐습니다.” 어떤 책의 제목인데, 우리를 위해 살과 피를 내놓으시고, 하느님의 어린양이 되신 주님의 사랑을 참 잘 표현한 것 같습니다. 변명하지 말고 우직하게, 오뚝이같이 또 살 수 있 기를 염치 불고하고 기도합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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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스탠퍼드 대학교 심리학과 연구진은 호텔 청소원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습니다. 두 집단으로 나누어, 한 집단에만 청소가 건강한 삶을 위해 미연방 의무감이 추천하는 일이라는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두 집단은 똑같이 청소 작업을 했지만 4주 후 자기가 하는 일이 건강에 좋다고 믿은 집단에서만 체중, 혈압, 체지방, 허리-엉덩이 비율, 체질량 지수가 모두 감소했습니다.

생각을 달리 하는 것만으로도 체중을 줄이고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실험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라도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임했을 때 좋은 결과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마음에는 신체를 지배하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이렇게 놀라운 힘을 하느님께서 넣어주셨습니다. 따라서 부정적인 마음으로 그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를 위해 단어의 선택부터 다시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노래를 진짜 못해요.”라는 말보다는, “아직 노래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요.”라는 식으로 관점을 바꿀 수 있는 말이 필요합니다.

자기 불신의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대신 긍정적이고 성장 가능한 마음이 나의 마음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이 바로 주님의 뜻입니다.

주님의 수난과 죽음으로 인해 이제 더는 이 땅에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 제자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불안해 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보호자 성령을 약속하심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가라앉히십니다.

성령은 아들과 다른 방식으로 위로하십니다. 성자와 성령, 두 분의 본성은 같지만, 보호자요 위로자이신 성령은 특별히 고통받는 이들의 짐을 덜어주십니다. 즉, 성령을 통해 위로를 받아 불신의 마음을 종속시키고 대신 긍정적이고 성장 가능한 마음을 갖게 하면서 희망으로 나아가도록 해주십니다. 그래서 다양한 성령의 은사가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하지만 이 성령의 선물이 우리 안에 드러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사랑하고 주님의 계명을 철저하게 지켜나가게 될 때 가능합니다. 성령의 선물을 받을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라는 일본 속담이 있지요. 가치를 모르는 사람에게 가치 있는 것을 주어도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성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의 가치를 알고 있는 사람만이 성령의 활동이 내 안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내 마음부터 변화시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의 선물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으며, 이로써 이 세상 안에서 희망을 간직하면서 힘차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나는 항상 내가 강해지고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길을 내 밖에서 찾아왔다. 그러나 그 길은 내 안에 있다. 항상 거기에 있다(안나 프로이트). 


생명의 존중.

우리나라 나이와 서양의 나이는 다릅니다. 예를 들어, 2008년 12월에 태어난 아이가 있으면, 우리나라에서는 13살이라고 하지만 서양에서는 11살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나이가 적기를 바라는 어른들은 서양의 만 나이를 말하고, 나이가 많기를 바라는 어린아이나 젊은이들은 우리나라 나이를 말하곤 합니다.

사실 서양의 나이 계산이 합리적인 것 같지만, 이는 생명의 관점을 어디에 두느냐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우리나라는 어머니 뱃속에 태아로 생성될 때부터로 보고 있고, 서양은 이 세상에 태어나는, 어머니 배에서 나왔을 때부터로 보는 것입니다.

생명의 기준점 차이입니다. 그런데 이 생명의 기준점이 점점 서양화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태아의 생명을 소홀히 하는 모습도 점점 많아지는 것이 아닐까요?

나이가 들었어도 그래서 나이 먹는 것이 더는 싫다고 생각해도, 우리나라 나이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만큼 생명의 소중함을 한 번 더 떠올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루를 기분 좋게 끝내려면 음 이탈을 조심하라

-전삼용신부-


한 주일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제가 피정을 들어가는 날인 지난 월요일에 평화방송에서 녹화를 잠시 하였습니다. ‘오다주’(오늘 다시 주님께)란 프로그램인데 두 진행자가 있고 한 생활 성가 가수, 그리고 제가 초대손님으로 출연하는 것입니다. 주님 승천 대축일과 성령 강림 대축일 두 주 분량을 녹화하였습니다.

   

   녹화를 잘하였을까요, 아니면 후회스러운 게 많을까요? 녹화가 만족스러웠다면 제가 이 글을 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평화방송에 출연한 지 벌써 3년이 되어가서 또 출연하고 싶었는지, 물론 그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저도 모르게 제가 너무 저 자신을 튀어 보이게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녹화 끝나고 피정 기간 내내 조금 후회스러웠습니다.

   

   저는 함께 녹화하는 분들과 그것을 보실 분들을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해 줄까만을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분명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사랑하라,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저도 모르게 도를 넘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지나치게 저를 드러내려다 보니 힘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녹화된 것들을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그것을 보시는 분들이 ‘사제가 너무 튀어 보이려고 한다.’라는 생각이 드실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분들에게는 제가 한 말들이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본래 말하는 사람이 기분이 좋게 보여야 그 말도 잘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분명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려고 했는데, 후회스러운 결과가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그러나 저는 분명 그 계명을 지키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는 귀를 기울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계명을 내 힘으로 지키려다 보면 자기 자신이 드러나려고 하는 것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 사실 사랑이 아니고 자신을 위한 행위임에도 사랑한다고 착각하고 끝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리의 영’께서는 우리에게 어떠한 역할을 하시는 것일까요? 말 그대로 ‘진리’를 계속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이럴 땐 이렇게 행동하고 저럴 땐 저렇게 말하라고 끊임없이 코치하십니다. 마치 우리는 가수이고 예수님은 지휘자이시며 성령님은 악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크게는 예수님의 지휘에 따라야 하지만 대부분의 순간은 악보에 집중해야 합니다.

    

   저는 녹화하면서 지휘자만 보고 악보는 제 맘대로 불렀던 것입니다. 악보를 보지 않고 지휘자만 보면 음을 잘못 내기 십상입니다. 보통 ‘음 이탈’이라고 합니다. 정상적인 용어는 아니지만 이런 것을 ‘삑사리’라고도 부릅니다. 노래를 잘하다가 한 번 삑사리 나면 그 노래 전체는 망치고 맙니다. 만약 내가 가수라면 그 삑사리 하나 때문에 며칠, 혹은 몇 달의 행복을 빼앗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하루도 우리가 이러저러하게 살기를 바라시고 각자에게 맞는 악보를 주셨습니다. 그 악보대로 예수님의 지휘에 맞추어 잘 연주하면 모든 것이 잘 끝나서 잠잘 때는 참으로 기쁘고 보람될 것입니다. 그 악보를 받는 시간은 전날 저녁 잠자기 전이나 아침 일찍 기도할 때입니다. 그때 그날 그분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는지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분 오케스트라의 단원으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러고 나서는 악보를 잘 연주하는 하루를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악보대로 연주하지 못한다는 것을 어떻게 눈치챌 수 있을까요? 지휘자께서 신호를 주실 것입니다. 그 신호가 바로 우리 ‘기분’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 밭에서 일하시다가 저에게 막걸리를 받아오라고 돈과 주전자를 건네주신 적이 있습니다. 아이 걸음으로는 1시간은 족히 걸릴 거리였습니다. 저는 빨리 뛰어가서 막걸리를 받아서 다시 아버지께로 향했습니다. 그러다 주전자 뚜껑에 막걸리를 흘려 받아 마시던 어른들 흉내를 내보겠다고 저도 좀 마셨습니다. 한 번으로는 성에 안 차서 몇 번을 그러며 걸었습니다. 그런데 주전자의 막걸리 양이 줄어감에 따라 왠지 마음이 불안해졌습니다. 아버지께 혼날 생각이 엄습해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덕에 적어도 반은 가져다드렸고, 물론 그래도 혼이 났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분명히 ‘사랑’입니다. 사랑은 예수님의 계명입니다. 그 계명을 지키면 그분이 우리 안에 사시고 우리도 그분 안에 머물게 됩니다. 그런데 성령의 열매는 사랑뿐이 아닙니다. ‘기쁨과 평화’도 있습니다. 마음이 불안해지고 초조해지고 두려워진다면 분명 그것이 지휘자로부터 받는 지적입니다. 기쁘게 하루를 마치고 싶다면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자신의 감정을 잘 살피며 삑사리 나기 전에 내 안에서 매 순간 성령께서 찍어주시는 음표를 잘 따라 살아갑시다.


-조재형신부-


바둑을 두는 사람은 복기(復棋)’을 합니다. 복기하는 과정에서 잘 된 착점은 어디인지, 실수 했던 착점은 어디인지 확인합니다. 상대방은 어느 곳에서 잘 하였는지, 상대방은 어느 곳에서 실수 했는지를 확인합니다. 전체 판세의 흐름이 어디에서 변하였는지 확인합니다. 날씨는 수시로 변하지만 기후는 일정한 패턴이 있습니다. 저는 그 정도는 아니지만 고수는 전체 바둑의 흐름을 여러 방향에서 복기할 수 있습니다. 복기를 잘 하는 사람은 실수는 줄이고, 흐름을 탈 줄 알기에 실력이 향상 됩니다. 정치도 그렇습니다. 총선의 과정에서 상대방의 장점은 무엇인지, 나의 단점은 무엇인지 살펴보면 다음번 총선에 도움이 됩니다. 정치 평론가들은 총선의 결과를 놓고 냉철한 평가를 하였습니다.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평가에 인색한 사람은 다음번 총선에서도 승리하기 어렵습니다.

 

코로나19로 미사가 중단 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엄격한 방역 기준을 정하고 미사를 재개하였습니다. 오늘은 부활 제6주일입니다. 주님 부활의 기쁨과 주님 부활의 기쁨이 나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살펴보려합니다. 부활의 삶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이 아닙니다. 부활의 삶은 행복하고 평화로운 삶도 아닙니다. 부활의 삶은 현실의 삶과 동떨어진 삶이 아닙니다. 부활의 삶은 언제가 있을 미래의 삶이 아닙니다. 사도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고, 변화되었습니다. 당당하게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표징을 보여주었습니다. 사도들은 고난과 박해를 당당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오히려 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받는 박해를 영광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였던 식사를 재현하였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였습니다. 성체성사는 공동체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가진 것을 나누었고, 어려운 이웃을 기쁘게 도왔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삶입니다.

 

부활 성야의 주제는 빈 무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덤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했던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갈릴래아는 주님께서 복음을 전하신 곳입니다. 갈릴래아는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곳입니다. 갈릴래아는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신 곳입니다.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 복음의 기쁨이 있다면 바로 그곳이 갈릴래아입니다.

 

부활 제2주의 주제는 평화와 용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평화를 빌어 주셨습니다. 성령을 주셨습니다. 부활은 분노와 복수가 아닙니다. 부활은 평화와 용서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토마사도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되다.” 토마사도는 주님께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주님의 부활은 신앙의 신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나이다. 십자가와 부활로 저희를 구원하신 주님, 길이 영광 받으소서.”

 

부활 제3주의 주제는 엠마오입니다. 엠마오는 장소가 아닙니다. 엠마오는 우리의 마음이 자괴감에서 자부심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공포에서 열정과 희망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두려움에 숨어있던 다락방을 열고 세상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시작됨을 아는 것입니다. 빈 무덤은 텅 빈 것이 아니라 부활의 표징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에서 비록 넘어지셨지만 다시 일어나셨고, 십자가에 달려 죽음에 임박해서도 하느님께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으며, 죽으셨지만 죽음의 어둠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시기를 지내면서 그 부활의 기쁨과 부활의 영광을 우리 마음 안에 벅찬 감동으로 받아들이고, 우리 이웃에게 드러내고 증거해야합니다. 그런 삶이 바로 엠마오입니다.

 

부활 제4주의 주제는 착한목자입니다. 착한목자는 양들의 음성을 듣는다고 하십니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고 합니다.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음성을 잘 들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음성을 잘 듣기 위해서는 먼저 함께 사는 가족들의 음성을 귀담아들어야 합니다. 이웃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가난하고 병든 이들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배고픈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 억울한 이들의 한을 풀어주는 것, 병든 이들을 치료해 주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상처로 여러분은 병이 나았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신앙의 길, 회개의 길입니다.

 

부활 제5주의 주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입니다. 길은 고속도로가 아닙니다. 전용도로도 아닙니다. 벗이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 함께 가주는 희생의 길입니다. 자갈과 가시밭을 정리하는 개척의 길입니다.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이 드러나는 길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길입니다. 생명은 나만을 위한 생명이 아닙니다. 타인의 생명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하느님의 선물임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벗을 위해서 목숨까지도 바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진리는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희망입니다. 예수님의 진리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넘어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는 신앙입니다.

 

부활 제6주의 주제는 신앙인의 삶입니다. 신앙은 쉽고 빠른 길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때로는 가시밭길이고, 십자가의 길이고, 시련과 고통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길을 가셨고, 사도들이 그 길을 걸었고, 성인들이 걸었던 길입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이라면,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겪는 것이 악을 행하다가 고난을 겪는 것보다 낫습니다. 사실 그리스도께서도 죄 때문에 단 한 번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육으로는 살해 되셨지만 영으로는 다시 생명을 받으셨습니다.”

 

도종환 시인은 그의 시 흔들리며 피는 꽃에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비에 젖지 않고 피는 꽃은 또 어디 있으랴길가에 피어나는 작은 꽃들도 다 저렇게 흔들리며, 비에 젖는다고 시인은 말합니다. 우리들의 인생 또한 때로 갈등의 바람에, 유혹의 바람에, 욕심의 바람에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근심과 걱정의 비가 내리고, 좌절과 고통의 비가 내리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또한 충실하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면 행복의 꽃이 필 것입니다. 사랑의 꽃이 필 것입니다.

 

세상의 흐름에 떠밀려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은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 갈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이제 아버지께서 보내 주실 협조자 성령께서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을 다시 알려 주실 것이다.”


우리네 인간 존재라는 것 ‘밤에 우는 갓난아기’와 같습니다!

-양승국신부- 

 

우리 모두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하늘 아래 펼쳐지는 세상만사 모든 것은 유한하며 속절없습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는 내내 뭔가 특별한 것을 기대하지만 특별할 것도 없습니다. 어제와 똑같은 하루가 끝도 없이 지루하게 반복되며, 언젠가 맞이하게될 끝은 너무나도 허망하고 부질없습니다.

 

한때 목숨바칠 정도로 중요하게 여겨지던 가치나 이데올로기도, 영원불변할 것 같았던 불같은 사랑도, 매력적이고 찬란하게만 비춰지던 선망의 대상들도, 지극히 한시적입니다. 다 지나갑니다. 다 떠나갑니다. 다 우리 눈앞에서 사라집니다. 인간적인 것들, 세상적인 가치들이 공통적으로 지니는 특징인가 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토록 추구하고 목말라하는 영원성, 불변성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요한 복음 14장 16~17절)

 

10년, 30년, 50년이 아닙니다. ‘영원히!’입니다. 예수님 당신은 곧 떠나가시지만 당신과 하나이신 분, 당신과 일심동체이신 분, 보호자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실 터인데, 그분께서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실 것임을 선포하십니다.

 

우리네 인간 존재라는 것 ‘밤에 우는 갓난아기’와 같습니다. 말도 할줄 모르고 그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우는 것뿐인 갓난아기와 같습니다.

 

어찌할 바 몰라 마냥 울고 있는 우리를 위해, 때로 어머니처럼 우리 곁에 앉아 계시며, 우리를 내려다보시며, 우리를 보살펴주시며, 우리를 양육해주시는 분이 바로 보호자 성령이십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대신해서 우리를 도와주시고 지켜주시기 위해 파견되신 분, 곧 진리의 성령이십니다.

 

누차 강조하신 바지만 조만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떠나실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현존 방식으로 제자들 안에 사실 것입니다. 당신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거룩한 성찬례 속에서 영원히 살아계실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보내실 성령의 도움으로 인해 제자들은 곧 영적인 눈을 뜨게 될 것이고, 스승님께서 말씀하신 진리를 자신들 삶의 현장에서 생생하게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사이에 머무시는 동안에 제자들은 아무래도 스승님께 의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떠나신 후에는 또 다른 삶의 방식을 터득해야 마땅합니다.

 

제자들은 스스로 서기 위해서 각고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고, 제자들끼리 더 사랑하고 협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무엇에 앞서 예수님을 떠나보냄으로써 또 다른 예수님이자, 예수님의 분신과도 같은 성령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뿐만 아니라 또 다른 특별한 선물을 주실 것인데, 그것은 평화입니다. 그분이 주실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전적으로 다릅니다.

 

로마 제국은 군사력으로 평화를 가져왔지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각자가 충만하게 살고, 서로 사랑함으로써 함께 성장하고, 서로 조화를 이루는 은혜로운 삶입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영근신부-


부활 6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부활을 보증해주는 성령의 기쁜 삶을 보여줍니다. <1독서>에서 사마리아로 파견된 베드로와 요한은 안수하여 성령이 충만하게 하고, 당신 사랑을 사도들에게 체험시켜줍니다. <2독서>에서 베드로는 신자들에게 그리스도는 육으로는 살해되셨지만 영으로는 다시 생명을 받으셨습니다.”(1베드 3,18)라고 선포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시기 직전에 행하신 <고별담화>의 일부로, 사랑하는 제자들을 떠나면서 세 가지로 위로하시는 장면입니다.

<첫 번째> 위로는 먼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청하면 제자들과 영원히 함께 있을 수 있도록 성령을 보내주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주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게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요한 14,16-17)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바로 다음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모순되는 말씀을 하십니다. 성령을 아버지께서 보내주실 것이라고 하시면서 동시에 성령이 이미 제자들 안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있기 때문이다.”(요한 14,17)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진리의 영이신 그분이 이미 우리 안에 머무르고 있기에 우리가 그분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토록,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부활의 삶을 보증해줍니다.

<두 번째> 위로는 당신께서 아버지께 돌아가시지만,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요한 14,18)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도 역시 이어서 모순된 말씀을 하십니다. 아버지께 돌아가셨다가 다시 오시겠다고 하시면서, 동시에 언제나 제자들 안에 현존하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요한 14,19)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가시면서도 현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곧 부활생명은 항상 우리 안에 살아있음을 말해줍니다.

사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어긋나는 진술은 우리에게는 모순처럼 들리지만 예수님께는 모순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두 시간, 두 공간 속에 동시에 있을 수 없는 우리에게는 모순이지만, 부활 예수님의 시간은 과거와 미래가 따로 없는 언제나 지금이며, 그분의 장소는 여기와 저기가 따로 없는 모든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가셨지만 지금 이곳에 우리와 함께 계시고, 예수님께서는 세례 때 당신의 영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날마다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모순적인 진술 속에 담긴 진리입니다. 바로 이것이 당신께서 아버지께 가시면서 사도들에게 남겨주신 선물이며,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당신의 선물입니다.

<세 번째> 위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에게 당신을 드러내 보여주신다는 약속입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요한 14,21)


그렇습니다.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사랑의 표시가 됩니다. 곧 말씀을 받아 믿고 간직하고 지키고 준수하는 것이 그분을 사랑한다는 표시가 됩니다. 그러니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있다면, 진정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 것일 것입니다. 그런데 혹 자기 자신을 지키고 있다면,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자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사랑하는 것을 따라 살게 됩니다. 돈을 사랑하면 돈을 따라 살게 되고, 예수님을 사랑하면 예수님을 따라 살게 됩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는 분명 자신이 사랑하고 있는 것, 바로 그것을 따라 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내 삶이 바로 지금 누구를 사랑하고 있는지를 알려줍니다.

지금 여러분은 누구를 따라 살고 있는지요? 혹 자기 자신을 따라 살고 있는지요? 그렇다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혹 세상의 물질이나 명에나 권력이나 힘을 따라 살고 있다면, 그것들을 사랑하고 있는 까닭일 것입니다. 진정, 내가 지금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 있다면, 진정 그분을 사랑하는 까닭일 것입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다른 그 무엇을 사랑하는 데는 자신이 스스로 사랑할 수 있지만, 예수님을 사랑하는 데는 반드시 성령의 도움으로만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시면서, 다른 보호자(요한 14,16)진리의 영(요한 14,17)을 보내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을 우리와 함께 사시고, 우리 안에 계시게.’(요한 14,17 참조) 하시어, 제자들이 당신 사랑을 지키게 하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성령께서 함께 머무르시지 않으면, 결코 우리 스스로는 사랑의 계명을 지킬 수 없을 것입니다. 결국, 성령의 도움으로 사랑하는 일은 가능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 구원의 거대한 밑그림을 그리실 때, 사랑이란 물감으로 그 구원의 초상화를 그리셨습니다. 사랑의 초상화는 결코 입술로 하는 사랑의 고백이나, 그 어떤 감상이나 감정이나 지성으로는 그릴 수도 그려지지도 않는, 오로지 사랑을 몸소 행함으로만 그려지는 초상화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계명을 지키고 순명함으로써만 색칠되는 그림이요, 직접 사랑의 삶으로 온갖 색체를 짜내어야만 그려지는 그림입니다. 사랑은 순명의 실천으로 그려지는 삶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빈 도화지 위해 우리의 사랑의 삶으로 초상화를 그려갑니다. 우리 삶의 빈 도화지 위에 꽉 찬 예수님의 초상화를 베껴 그려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주님!

당신을 사랑하오니, 당신의 말씀을 듣게 하소서. 저 자신보다 당신을 앞세우게 하소서.

당신을 사랑하오니, 당신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해도 받아들이게 하소서. 당신을 믿고 신뢰하게 하소서.

당신을 사랑하오니, 당신의 말씀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지키게 하소서.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당신을 사랑하오니, 당신의 말씀을 받아 지키고 실행하게 하소서! 아멘.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라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왔고 그 사랑은 이유를 묻지 않으며 이익을 따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사랑이며 십자가에 목숨을 내놓기까지 끝까지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이 시간 사랑의 의미를 새롭게 할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사랑은 일방통행일까요? 쌍방 통행일까요? 예, 좋습니다. 사랑은 일방통행입니다. 어떤 분은 자기입장에서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베풀고 또 베풀었는데도 불구하고 돌아오는 것이 없으니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자식에게, 배우자에게 이웃에게 온갖 정성을 다했는데 남는 것이 없어서 그런 생각을 하는 분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주고받는 것, 곧 쌍방통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사랑하면 상대방이 알기 때문에 어떤 방법으로든 다시 채워줄 것이고,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수고와 땀의 보람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은 ‘일방통행’이지만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죄가 있든 없든 개의치 않으시고 베푸시는 사랑입니다. “분별없이 마구 퍼주고 철없는 탕아처럼 다 내주고도 너무 적게 준 것이 아닌지 걱정하는”사랑입니다. 오히려 죄가 클수록 은총도 넘치는 사랑입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용서하시고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쳐라.” 하시며 죄인이 잃었던 권위를 회복시켜주는 사랑입니다. 우리도 베푸는 사랑에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청하여 영원히 함께하실 보호자를 보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안다면 우리도 주님을 사랑해야합니다. 우리가 진정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을 바라고 그분 계명을 지킴으로써 삶 안에서 그분을 영광스럽게 해 드려야 합니다. 진실한 사랑은 감정만으로 이루어지는 정서적 사랑이 아니라 아낌없이 내어주는 행위로 이루어지는 실질적 사랑입니다. 말로 충분한 사랑이 아니라 행동하는 사랑입니다.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는 그 사람에게 좋은 것을 사랑하고, 그 사람이 바라는 것을 행하고자 하게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청하여 아버지께서 보내주시는 보호자를 받아들이고 그분과 하나가 되고자 합니다.

보호자는 누구이십니까? 진리의 영이십니다. 요한복음 17장 17절에서는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받아들임으로써 영을 갈망해야 합니다. 진리의 영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삶을 체험하도록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진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살 때 영을 알아보게 되고, 육적으로 사는 사람은 영을 만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사랑하고, 보호자를 만나고자 한다면 우리의 육적인 삶을 영적인 삶으로, 천상을 갈망하는 삶으로 바꿔야 합니다. 아니 천상을 여기서부터 살아야 합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말합니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에제36,26). 우리는 새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서 있다는 믿음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을 한다고 하면서도 많은 상처를 주고 또 받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사랑의 결과입니다. 사랑을 하면서도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것은 내가 이만큼 베풀었으니 너는 최소한 이 정도는 해야 되지 않느냐는 보상심리의 사랑 안에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방식의 사랑으로 사랑함으로써 상대방을 소유하고 지배하며 마음속에 묶어두면 사랑을 빌미로 상처를 더해갑니다. 그러나 사랑은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상대의 고유성을 인정해 주고 그가 원하는 것을 채워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에 대한 보상은 사랑입니다. 사랑함으로써 주어지는 기쁨과 평화, 보람이 이미 하느님께서 주시는 보상입니다.

우리 옛말에 “내리 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설사 자식에게 업신여김을 받아도 부모는 자식을 미워하지 못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사랑이란 내리 사랑이므로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자식의 부모에 대한 사랑을 능가한다.’는 의미입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사랑하는 경우는 많아도 아랫사람이 윗 사람을 사랑하는 경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윗사람이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랑이 전수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해야지 내방식의 사랑을 고집하여 상처를 키워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 일서 3장 18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요한14,15).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14,21).라고 하셨습니다. 인격적인 사랑은 인격의 지성, 정서, 의지에 일치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 대한 인격적 사랑은 그분의 비전과 열정에 동화될 뿐 아니라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실천하는 것입니다.‘성경적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기쁨, 예수님의 마음으로 모두를 사랑하는 가운데 평화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분의 정신과 가르침의 계명을 준수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내적 진실은 실천하는 행동으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의 요구를 헤아리고 그 것을 채워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도 하나 해내지 못하느냐? 이해하지 못하느냐?”하며 불평불만하지 말고 부족함을 채워줄 수 있음을 기뻐했으면 좋겠습니다.“우리 인생이 기계라면, 미움은 모래이고, 사랑은 기름입니다.”기계에는 반드시 윤활유가 필요합니다. 우리 삶에는 사랑이 필수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20). 주님께 대한 사랑은 이웃 사랑을 통해 드러납니다.

주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이 주님께 대한 사랑을 드러내듯 우리가 서로에게 다짐한 약속을 지키는 것이 사랑을 증거 합니다. 약속 이행은 사랑의 증거입니다. 하느님과의 약속 배우자간의 약속, 부모와의 약속 자녀와의 약속 그리고 이웃과의 약속에 충실한 만큼 사랑을 증거 하게 될 것입니다. 첫 마음에로 돌아가서 서로의 관계를 회복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하느님과 이웃의 관계를 지속시켜주는 힘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요한14,18).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진리의 영을 약속해 주셨고 부활의 생명으로 다시 오셔서 우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현존을 영원히 지속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토록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안에 오신 성령을 무시하고 고아처럼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결코 떠나 본 적이 없다.’네가 나를 원망하는 그 순간까지.......

“아버지의 품 안에는 아홉 자식이 있을 곳이 있지만 아홉 자식의 어느 집에도 아버지가 있을 곳은 없다.”는 말이 크게다가옵니다. 부디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 안에 머물러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송영진신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요한 14,15).”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요한 14,21).”

이 말씀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예수님을 ‘사랑’하는 일과 예수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일은 모두 하나로 일치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머릿속으로 ‘믿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믿는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신앙인의 ‘믿음’은 곧 ‘삶’이 되어야 하고,
그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또 만일에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예수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단순히 예수님을 좋아하는 것만으로는
예수님에 대한 신앙인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신앙인의 사랑 실천은 좋아하는 감정에 관한 일이 아니라 신앙생활을 뜻합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예수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을 실천하면서도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사랑 없는 실천은, 멍에와 족쇄에 묶여 있는 것과 같습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이 사랑 없는 실천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루카 15,29-30).”
여기서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라는 말은, 큰아들이 작은아들과는 다르게
대단히 성실하게 일했음을 나타내지만,
동시에 아버지에 대한 사랑은 없이 ‘일만’ 했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아버지를 사랑해서 일한 것이 아니라, 맹목적으로 일한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니 기쁨도 없습니다.
그는 종이 아니라 아들인데도, 자기 자신을 종으로 전락시켰습니다.
따라서 그의 성실함의 가치는 인정되지 못합니다.)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라는 말은 그의 ‘순종’을
나타내는데, 사랑도 없고 기쁨도 없는 상태에서의 순종은
‘자녀의 순종’이 아니라 ‘노예의 복종’일 뿐입니다.
따라서 그의 순종도 별로 가치가 없는 일입니다.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라는 말은,
그의 성실함은 겉으로만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이고
마음속은 친구들과 놀고 싶어 하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혹시라도, “놀고 싶은 마음을 참고 성실하게 일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하지 않는가?” 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기꺼이’ 참는 것과 ‘억지로’ 참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에게 화가 나 있는 상태에서 억지로 참았을 뿐입니다.
그러니 마음속으로는 계속 죄를 짓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 같은 태도로
위선적인 신앙생활을 할 때가 많습니다.
사랑도 없이 기쁨도 없이 겉으로만 예수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을 실천하면서,
자기 스스로 “나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 라고 착각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속마음을 보십니다.
겉으로만 잘하는 것은 위선이라는 죄를 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또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라는 말씀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가,
아닌가? 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계명을 실천하는 사람, 또는 계명을 실천함으로써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신앙생활을 정말로 잘하는 사람입니다.
계명을 지키긴 하지만 사랑 없이 지키는 사람과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판단은 자기 스스로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의 신앙생활도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됩니다.
(판단은 하느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솔직하게 반성하고 판단해야 합니다.

< 신앙생활의 기준은 내가 내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기준은 이미 예수님께서 정해 놓으셨고,
신앙인은 예수님의 마음에 들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 말은 ‘사랑’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사랑 실천에 대해서 내 마음대로 “이것으로 충분하다.” 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이웃 사랑’의 경우에, 사랑 실천을 얼마나, 어떻게 할 것인지는
내 쪽에서 마음대로 판단할 일이 아니라 그 이웃의 입장에서 판단할 일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경우에는 하느님(예수님)께 기쁨을 드리는 일을 하는 것이
사랑 실천인데,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은 무한하기 때문에
인간 쪽의 사랑 실천은 아무리 해도 부족한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참 종교’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세상에는 종교도 많고 종파도 많은데,
그 가운데에는 이단도 많고 사이비도 많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주장하고, 겉으로 보기에는 예수님을 지극정성으로
섬기는 것처럼 보인다 해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하지 않고,
자기들이 마음대로 정해 놓은 어떤 규정이나 전통만 잘 지키고 있다면,
그것은 이단이거나 사이비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하지 않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종파는 예수님을 믿는 종파가 아닙니다.
(사이비 종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일들을 하면서도
자기들은 예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공동선과 사랑을 거스르는 일들을 할 때 그런 태도를 자주 보입니다.
사랑이 없는 것은 사이비로 전락하는 지름길입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요한 14,15-21: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다.

오늘 복음에는 성령에 관한 주제와 성령강림을 예고하고 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의 친밀한 사랑에 참여함으로써 체험할 수 있는 기쁨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오늘 복음은 사랑의 주제로 시작하여 사랑의 주제로 끝나고 있다. 예수께서는 사도들에게 당신이 떠나시는 것에 대해 걱정할’(14,1) 필요가 없다고 하시며, 위로를 주시고 계시다. 즉 그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당신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겠다고 하셨다(21절 참조). 그분을 사랑하는 것은 행동을 통하여 입증되는 참된 것이어야 한다. 즉 계명을 지킴으로써이다. 그분의 계명이 실현됨으로써 바로 그분이 현존하시며, 그분이 더욱 친밀하게 드러나고, 그분이 계신 곳에 아버지도 함께 계시기 때문에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21). 그러므로 하느님과 그리스도께 가까이 있는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더 많이 알고 있는사람이 아니라, 그분들을 더 사랑하고’, 그분들의 뜻을 즉 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사람들이다. 이것을 우리가 너무 소홀히 해서, 그분과 신비로운 만남을 못 하고 있지 않은가?

 

예수께서는 당신을 드러내 보여주시는 것외에 또한 성령의 선물을 약속하신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16). 그러나 세상은 그 성령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이다.”(17). 요한복음에서 보다(theorèin)’라는 동사의 의미가 현상을 넘어 하느님의 현존 표지를 알아보는 의미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세상은 이러한 자세를 갖고 있지 못하다. 빛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과 같다. 빛을 보려면 먼저 눈이 치유를 받아야 하듯이, 세상이 성령을 받아들이려면 세상이기를 그쳐야 한다. 빛과 어둠의 대결에 대한 사건이 요한복음 전체를 덮고 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1,5).

 

여기서 성령은 협조자’(Paraclito)라고 한다. 이는 요한복음 사가 고유의 용어이다(14,16.26; 15,26; 16,7 참조). 본래는 변호사를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신앙인들을 도와주는 기능으로 사용되고 있다. 기운을 돋우어 주다’, ‘협조하다의 의미가 생기게 된다. 그러기에 성령은 우리가 어려움에 부딪히게 될 때, 위로해주고 보증해 주시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성령은 그리스도의 일을 계속하는 협조자이다. 지금까지는 예수께서 친히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맡기신 사람들을 지켜주셨고’(17,12) 그분이 떠나가시면 성령께서 그 양떼를 보호해주실 것이다. 이제 성령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께 충실할 수 있도록 내면으로부터 그들을 도와주고 위로해 주신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스도인들이 진리를 터득하도록 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진리를 더 잘 깨달을 수 있게 한다. 사도들 역시 성령이 임하신 다음에 완전히 깨닫게 되었다. 오늘의 교회도 성령의 빛을 충만히 받아들여야만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된다. 그 진리는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진리이다. 즉 성령은 그리스도를 더 잘 인식시키고 보다 강렬하게 그리스도의 더욱 친밀해진 새로운 현존을 생활화하도록 도와줄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18)고 하신다. “내가 살아있고 너희도 살아있을 것이기 때문이다.”(19).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신앙으로 느끼는 것은 실제적 접촉과 같이 강한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은 단순히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항상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20). 이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신적 개입이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이루어지고 있다. 믿는 이에게는 매일매일이 모두 그날일 수 있으며 또한 그날이 되어야 할 것이다. 부활 시기를 지내는 우리는 이제 진정, 세상에 희망을 전할 수 있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본받음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매 순간 우리의 삶이 부활을 체험하는 삶이 됨으로써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우리 신앙인들에게 바라시는 것이다.

 

2독서: 1베드 3,15-18: 언제나 깨끗한 양심을 지니고 사십시오

베드로 사도는 신자들에게 어떤 박해에도 굴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본받으라고 한다. 시련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진정 하느님께 바칠 수 있는 가장 참된 예배이며 진실한 찬미의 행위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육으로는 살해되셨지만, 영으로는 다시 생명을 받으셨습니다.”(18). 이 옛 신앙고백에서 파스카의 배경이 드러나고 있다. 그 성령은 우리의 부활도 이루어 주실 것이다(로마 8,11 참조). 육적인죽음과 영적인삶 사이의 체험은 그리스도교 신자가 매일매일 자신 안에서 되풀이하는 부활 체험이다. 이것이 그가 세상에 설명해 주어야 할 희망의 신비이다. 사랑은 적개심이나 중상모략보다 훨씬 더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사람들에게 그의 삶과 그 삶을 드러내는 모든 외적 표현을 통해 신앙인들이 지닌 희망”(15)에 대해서 답을 해 주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부활에 대한 신앙을 생활 전체로써 선포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죽여 죽음의 어둠 속에 영원히 매장하려 했지만, 그분은 그 죽음의 감옥을 막았던 바윗돌을 굴려내셨다. 그리스도인들은 여기서부터 희망의 선포자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내어 주셨듯이 하느님과 형제들에 대한 봉사를 위해 자신을 무상으로 내어주는 사랑의 에 맡길 수 있다면 불의, 부정, 폭력, 고문 그리고 죽음까지 모든 것이 변화될 수 있을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요한 14, 17)

-한상우신부-

우리 삶의
내적, 외적
변화가 절실히
필요한 신앙의
시간입니다.

우리의 일상이
새로워지지
않고서는 결코
하느님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가시는
성령의 힘이십니다.

신앙의 시간은
우리를 향한
변화의 진리를
거스를 수 없습니다.

숨은 것도
드러나게 하시며
우리의 어둠을
정화시키시는
진리의 영이십니다.

진리의 영께서는
그 누구도 아닌
우리자신을 제대로
보게하십니다.

하느님의
현존안에서
우리를 올바로
보게하십니다.

우리를 진리로
이끄십니다.

생명을 부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하느님께 속한
사람답게 살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진리의 영이시여!
이기심과 거짓으로
얼룩진 우리들을
새롭게 하소서.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성삼위 하느님을 보여 주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요한 14,16).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당신의 사명을 마치고 떠나시면, 세상에 남은 이들을 위해 그들과 함께하실 분을 아버지께 청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호자"를 보내 주실 터인데, 그분이 곧 진리의 영, 성령이십니다.

제1독서에 그 약속이 실현되는 과정이 잘 나타납니다.

"사도들이 그들에게 안수하자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사도 8,17).

필리포스를 통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이 전해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표징을 일으킵니다. 그들은 귀를 기울였고 큰 기쁨에 넘쳐 새로운 길을 받아들이지요. 그리고 이제 예루살렘에서 내려와 안수한 사도들을 통해 성령이 내리시고 그들은 온전한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납니다.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요한 14,17).

성령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 자신에 대한 말씀과 흡사합니다. 아니, 일치하지요. 인간의 육을 취해 세상에 오셨던 성자 예수님과 성령이 같은 분이시니까요. 비록 우리가 다 알아들을 수 없지만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그분의 영은 하나이신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본 이들은 아버지를 본 것이고, 예수님을 아는 이들은 아버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실 분, 성령께서는 예수님에 대한 앎을 강화시켜 주시고 기억을 환기시켜 주시면서 유한한 인간이 하느님과 관계를 이어가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요한 14,18).

다시 오실 분은 예수님의 영이십니다. 제2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육으로는 살해되셨지만 영으로는 다시 생명을 받으셨다"(1베드 3,18)고 증언합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인간의 육신을 입지 않으시지만, 성령으로 현존하시며 우리와 함께하실 겁니다.

율법은 사회적 약자층인 "고아"를 보호하도록 가르칩니다만, 사실 시기가 다를 뿐 언젠가는 자신을 낳아서 보살펴 준 보호자를 잃고 고아가 되는 것이 우리 모든 인간의 운명이지요. 그래서인지 예수님은 새로 오실 성령을 "보호자"라고 부르십니다.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요한 14,20).

하느님 안에 예수님이, 예수님 안에 우리가, 또 우리 안에 예수님이... 이렇게 성삼위 하느님과 우리는 하나입니다. 바로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의 사랑으로 엮어 주시는 사랑의 기운이시지요.

저는 오늘의 말씀에 머무르면서 전지전능하시고 무한하신 하느님의 관심사가 온통 "우리"라는 걸 다시금 확인했습니다. 성부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이유도, 성자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도, 그리고 성령께서 세상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이유도 결국 "우리"입니다. 우리에게만 하느님이 존재 이유이고 목적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도 우리가 그러한 것 같았습니다. 그만큼 사랑이신 성삼위 하느님의 오매불망 관심사는 "우리"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주님 부활 시기를 지내며 성령강림을 향해 나아가는 오늘, 말씀은 우리를 하느님과의 더 깊은 사랑의 일치로 초대합니다. 성 삼위 하느님 안에서 위로와 기쁨을 누리며 사랑 안에 푹 잠기시는 하루 되시길 기원합니다. -김찬선신부-

너희 희망은 무엇이냐?   
 -김찬선신부-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거룩히 모시십시오.
여러분이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십시오. 그러나 바른 양심을 가지고 온유하고 공손하게 대답하십시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우리가 지닌 희망에 관해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즉시 저에게 '나의 희망은 뭐지?' 생각게 하는데
여러분에게는 즉시 대답할 수 있는 희망이 있나요?

저는 희망이 없다고 할 수 없지만 누구에게나 당당히 얘기할 수 있기에는
부끄러운 것이고 그래서 오늘 베드로 사도 말씀처럼 바른 양심을 가지고
온유하고 공손하게 대답한다면 저의 희망은 너무 가까운 희망뿐입니다.

새벽에 일어나 저의 전 인생을 하늘에서 내려보듯이 성찰할 때는 여지없이
눈에 보이는 희망은 부질없는 것이고 그래서
'살아서도 주님과 함께, 죽어서도 주님과 함께'가 저의 유일한 희망이지만
요즘 제가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은 선교 협동조합입니다.

그런데 혈안이 되어 있다는 말이 재미있지요?
눈에 핏발이 서있다는 뜻이잖아요?
너무 집중을 해서 보면, 그것도 오랫동안 보면 눈에 핏발이 서게 되는데
요즘 저는 선교 협동조합의 활성화 방법을 찾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겁니다.

그러다 제가 제 정신이 들면, 앞서 말씀드린 대로 새벽에 저를 성찰하면
이런 것은 한때 제가 평양에 <평화 봉사소>를 세우기 위해서
갖은 애를 쓰고 결국 그 희망을 이뤘지만 그것이 세월과 함께 지나갔듯이
이 선교 협동조합도 지나가는 꿈이요 희망인 것입니다.

사업의 성공이 저의 희망이라면 그 희망은 지나가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저의 희망이 하느님의 사랑을 사는 것이라면
그리고 10년 전에는 그 사랑이 평화 봉사소이고
지금은 그 사랑이 선교 협동조합이라면 사업들은 지나갈지라도
저의 희망인 사랑은 이것들을 통하여 계속되는 것이겠지요.

사실 사업이라는 것은 성공했어도 지나가는 것이거나 사라지는 것이고
사랑만이 남는 것이고 영원한 것입니다.
이것을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예언도 없어지고 신령한 언어도 그치고 지식도 없어집니다." 그러나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 말씀에 비추어 더 풀어 얘기하면
사랑도 하느님 사랑만 영원하고 우리 인간의 사랑은
하느님 사랑을 지닌 사랑과 하느님 사랑 안에 있는 사랑만 영원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삼위일체시기에 그 사랑도 삼위일체적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당신 안에서 삼위가 서로 사랑하시기도 하지만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는 것도 삼위일체적이라는 말입니다.

성부께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해주셨고,
성령의 사랑으로 당신의 사랑이 영원케 하십니다.

당신의 사랑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육신을 취하여 오시게 하셨지만
이 세상 육신은 이 세상 사는 동안만 우리와 함께 있을 수 있기에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시고는 떠나가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떠나가신 다음 이어지는 사랑이 성령의 사랑입니다.
성자께서 떠나신 것이 하느님 사랑이 사랑이 없어지는 것이 되지 않도록
성부께서는 성령을 영원히 함께하시는 사랑으로 또 보내주십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희망해야 하고
누가 묻더라도 이것이 나의 희망이라고 얘기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5월 21일 부활 제6주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 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  (요한 14,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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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성야의 주제는 빈 무덤입니다예수님께서는 무덤에 계시지 않았습니다.예수님을 사랑했던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예수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갈릴래아는 주님께서 복음을 전하신 곳입니다갈릴래아는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곳입니다갈릴래아는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신 곳입니다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 복음의 기쁨이 있다면 바로 그곳이 갈릴래아입니다.

부활 제2주의 주제는 평화와 용서입니다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그리고 평화를 빌어 주셨습니다성령을 주셨습니다

부활 제3주의 주제는 엠마오입니다엠마오는 장소가 아닙니다엠마오는 우리의 마음이 자괴감에서 자부심으로 바뀌는 것입니다두려움과 공포에서 열정과 희망으로 바뀌는 것입니다두려움에 숨어있던 다락방을 열고 세상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부활 제4주의 주제는 착한목자입니다착한목자는 양들의 음성을 듣는다고 하십니다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고 합니다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음성을 잘 들어야 합니다

부활 제5주의 주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입니다길은 고속도로가 아닙니다전용도로도 아닙니다벗이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 함께 가주는 희생의 길입니다

부활 제6주의 주제는 신앙인의 삶입니다신앙은 쉽고 빠른 길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신앙은 때로는 가시밭길이고십자가의 길이고시련과 고통의 길입니다예수님께서 그런 길을 가셨고사도들이 그 길을 걸었고성인들이 걸었던 길입니다오늘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이라면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겪는 것이 악을 행하다가 고난을 겪는 것보다 낫습니다사실 그리스도께서도 죄 때문에 단 한 번 고난을 겪으셨습니다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신 것입니다그러나 육으로는 살해 되셨지만 영으로는 다시 생명을 받으셨습니다.”

도종환 시인은 그의 시 흔들리며 피는 꽃에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비에 젖지 않고 피는 꽃은 또 어디 있으랴’ 길가에 피어나는 작은 꽃들도 다 저렇게 흔들리며비에 젖는다고 시인은 말합니다우리들의 인생 또한 때로 갈등의 바람에유혹의 바람에욕심의 바람에 흔들리기 마련입니다근심과 걱정의 비가 내리고좌절과 고통의 비가 내리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그러나 우리들 또한 충실하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면 행복의 꽃이 필 것입니다사랑의 꽃이 필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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