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11일 파스카 성야
그들은 거기서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마태 28,1-10)
Go tell my brothers to go to Galilee,
and there they will see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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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주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주님 부활의 기쁨이 온 세상 구석구석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전해 오는 거룩한 밤입니다. 파스카 성야는 오랜 관습에 따라 주님을 기억하는 밤이며, 등불을 밝혀 들고 주인을 기다리는 충성스러운 종처럼 깨어 준비하는 밤입니다.
이 거룩한 밤에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새 마음을 주시고 새 영을 넣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죽음의 무덤 위에 앉아 있던 천사의 말을 주님께서 주신 새 마음과 새 영으로 귀담아듣고 믿어야 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찾는 줄을 나는 안다.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이렇듯 죄와 죽음은 더 이상 부활하신 예수님 위에 군림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와 관련하여 단 한 번 돌아가셨고,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단순히 이 지상의 생명으로 다시 돌아오신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향하여 영광 속에 들어 높여지신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신 이 거룩한 밤에 우리는 마땅히 기뻐해야 합니다. 부활의 기쁨은 우리 믿음의 승리요, 죽음보다 강한 사랑의 승리입니다. 이 기쁜 소식은 아직도 이 세상에서 고달픈 순례자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엄청난 힘과 용기가 됩니다. 온갖 희로애락을 겪는 인생길에서 주님 부활의 기쁨은 은총임을 언제나 기억하며,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살아갑시다.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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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수용소에서
당신을 사랑하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용서할 때 용서받을 수 있다는
마더 데레사 수녀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우리가 만나 보리굴비에 돌솥밥을 먹는 것도
따사로운 창가에 앉아 함께 커피를 드는 것도
기차를 타고 멀리 속초까지 와서
설악을 바라보며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것도
신흥사 청동대불님께 절을 하며
당신이 한없이 작아지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당신은 언제나 오늘의 사랑을 내일로 미루었지만
내일의 사랑은 찾아오지 않아요
진실을 말해도 아무도 듣지 않으므로
당신이 두려워 말하지 않았던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기회는 바로 지금이에요
마지막으로 인생을 실패해도 괜찮아요
실패가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요
인생을 사랑으로 성공하기는 어려워요
삶의 수용소에서 당신이 나를 배반하고
내가 당신을 배반하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정호승 시인의 ‘마지막을 위하여’라는 시입니다. 지금 하는 모든 것을 마지막으로 생각하라는 시인의 절절한 표현들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용서도, 사랑도, 만남도…. 그 외의 모든 것이 마지막임을 생각한다면 절대로 지금 해야 할 것들을 뒤로 미룰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 시가 특별히 마음이 와 닿는 이유는 오늘이 성토요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 이후, 예수님의 부재를 깊이 묵상해야 하는 시간이지요.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도 감사함을 느끼지 못하고 불평불만만 했던 시간들, 예수님의 뜻보다는 내 뜻이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교만들, 그렇기에 지금 이 시간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를 깨닫습니다.
오늘 이 순간이 마지막으로 체험되는 것임을 기억하며 지금 할 일을 뒤로 미루지 말고 지금 실천하십시오. 특히 사랑을 말입니다.


어머니께 많이 편찮으십니다. 병원에 계시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마음이 저립니다. 그렇게 건강하신 편은 아니었지만, 90 평생 사시면서 병원에 입원 한 번 하신 적이 없는 분이셨습니다.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까지 입원해 계시니 불안한 마음이 가득합니다. 두 분 모두 아흔을 넘기셨으니 사람들은 장수하셨다고 말하겠지만, 지금 병원에서 힘들어 하시는 모습을 보면 그저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고관절 골절로 병원에 들어가셨다가, 폐렴, 폐수종, 폐혈증까지 이어지면서... 이제 병원에서도 더이상 치료가 힘들다는 말을 듣게 되니 그런 마음이 더해집니다. 성삼일의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더 깊이 묵상하게 되네요.
수술을 하시고나서, 저를 바라보며 늘 걱정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혹시라도 잘못된 길을 갈까 하는 불안감이 아직도 있으신가 봅니다. 옆에 있던 누님이, "마태오 신부, 잘 살고 있잖아요."라고 해도 아직도 믿음이 가지 않는 아들 신부인가 봅니다.
가족을 위해 매일 새벽에 일어나 묵주알을 굴리시는 어머니. 아직도 제게는 어머니가 필요한데, 아직도 어머니의 기도 덕을 봐야 하는데... 점점 힘이 없어지는 어머니 모습에 눈물이 나옵니다. 그러면서 하느님께 의지합니다. 하느님 뜻에 맞춰서 이끌어주시길... 그러나 좀더 편안해지시길...
새벽님들께도 조심스럽게 부탁드립니다. 제 어머니, 이재복 말가릿다를 위해 기도 중에 기억해주셨으면 합니다.

-조재형신부-
코로나 바이러스가 중국에서 시작되어 지금은 전 세계로 전파되었습니다. 학교는 휴교하였고, 식당은 문을 닫았고, 성당의 미사도 중지되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일찍 전파되었고, 지금은 많이 진정된 한국의 이야기를 잠깐 하려고 합니다. 다른 나라들이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한국의 대응을 모델로 따르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한국인의 심성입니다. 위기와 어려움 앞에서 한국인은 독특한 대응을 하였습니다. 마스크가 없다고 하니 83세의 할머니가 손수 마스크를 만들어서 전해 주었습니다. 어려움에 처한 지역을 위해서 도시락을 만들어 주기도 하였고, 가장 위험한 지역으로 자원해서 봉사하는 의료진도 있었습니다. 임대료를 깎아 주기도 하고, 어려운 지역을 위해서 물품과 성금을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극심한 사재기도 없었습니다. 위험을 감수하고 타 지역의 환자를 받아 주었습니다. 정부가 권고하기 전에 교회는 자발적으로 미사를 중지하였습니다. 굳이 지역을 봉쇄하지 않아도 자발적인 거리두기를 하였습니다. 외신은 깨어있는 민주시민의 역량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한국인의 어려움에 대한 대응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23년 전인 1997년에 한국은 극심한 경제적인 어려움에 직면했습니다. 국가부도 사태를 맞이했고,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아야 했습니다. 기업은 도산했고, 헐값에 팔려나갔습니다. 바이러스는 몸을 병들게 했지만 경제위기는 가정까지 병들게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인은 새로운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전 국민이 ‘금 모으기’에 동참하였습니다. 아이의 돌잔치 금반지부터, 시집올 때 받았던 금반지와 금비녀를 가져왔습니다. 금 모으기에 동참한 사람들의 긴 줄을 은행 앞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박세리 선수의 US 여자 오픈에서의 우승은 위기를 극복하는 한국인들에게 위로가 되었고, 용기를 주었습니다. 한국은 외환위기를 가장 먼저 극복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13년 전인 2007년에도 한국인은 국가적인 어려움을 극복하였습니다. 좌초된 유조선에서 기름이 흘러나왔습니다. 청청한 바다인 태안은 검은 기름으로 가득 찼습니다. 누가 말하지 않았어도 사람들은 휴가를 반납하고 태안으로 달려갔습니다. 밀려오는 기름을 수건으로 헝겊으로 닦아냈습니다. 성당에서 단체들은 야유회를 대신해서 태안으로 갔습니다. 가족들이 태안으로 갔습니다.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었지만 우리의 환경을 우리가 지킨다는 마음으로 기름을 닦아냈습니다. 기름으로 검게 물들었던 태안은 다시금 청청한 바다가 되었고, 보금자리를 빼앗겼던 새들은 다시 돌아 왔습니다. 외신은 환경을 사랑하는 민주시민의 역량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둘째는 바이러스를 대처하는 한국의 정책입니다. 다른 나라들은 확진자를 밝히려 하지 않을 때 한국은 원하는 사람은 모두 바이러스 감염 여부를 검사하였습니다. 확진자가 늘어나는 것에 대한 비난도 있었습니다. 비용과 인력이 과도하게 소모된다는 비난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원하는 모든 사람을 검사하였고, 확진환자는 격리하였습니다. 바이러스의 전파는 점차 진정되었고, 환자의 사망을 줄일 수 있었습니다. 과도할 정도의 검사는 바이러스 확산을 늦출 수 있었고, 불안과 공포를 줄일 수 있었습니다.
투명하게 모든 것을 발표하였습니다. 매일 질병관리 본부의 보고가 있었습니다. 검사자, 확진자, 완치자, 사망자의 통계를 발표하였습니다. 바이러스의 감염 경로를 찾아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는 정직하고, 투명한 감염경로의 발표를 통해서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투명하게 발표하지 않으면 바이러스는 지역으로 전파되고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거짓과 숨김은 인간관계를 엉망으로 만들지만, 바이러스와의 싸움도 이길 수 없게 합니다. 다른 나라들은 한국의 투명하고, 정직한 통계를 신뢰하였고, 한국의 정책을 수용하였습니다.
교회는 믿는 사람들이 모이는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지난 사순시기를 모이지 않고 보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활을 맞이하였습니다. 요즘 상황을 보면서 교훈을 떠올려 봅니다. 매일매일의 일상이 가장 큰 축복임을 이제라도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주신 행복을 곁에 놔두고 엉뚱한 것을 찾아 헤맸는지도 모릅니다. 매일같이 미사를 지내고 신자들과 함께한 일상들이 축복이고 행복이었던 것입니다. 텅 빈 성당을 보면서 그동안 우리 교회가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했는지 반성해봅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란 말이 있습니다. 꽃이 피고, 강남 갔던 제비도 돌아와서 봄은 분명 왔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우리는 봄의 기운을 느끼기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처염상정(處染常淨)’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진흙탕 속에서도 아름다운 연꽃은 피어납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장 먼저 코로나 바이러스의 현장으로 달려간 간호사와 의사가 있습니다. 피해 지역의 주민을 위해서 도시락을 전달한 이웃 도시의 온정이 있습니다. 가장 거룩하고 엄숙하게 기억해야 할 성주간 전례를 중지한 교회의 결정이 있습니다. 부활에 우리는 ‘빈 무덤’을 묵상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아픈 이들과 함께하는 따뜻한 이웃들 속에 계십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두려움과 공포를 이겨내고 열정과 헌신으로 가진 것을 나누는 이들 속에 계십니다.
신앙의 신비여! 우리는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주님의 부활을 굳게 믿나이다.
예수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실의와 좌절로 무거웠던 발걸음이 아니라 기쁨과 설렘으로 ‘통통’ 튀는 가벼운 발걸음!
성금요일 골고타 언덕 위에서 벌어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사건은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에게 너무나도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 참혹한 사건을 십자가 바로 아래서 자신들의 두 눈으로 직접 목격했으니 그 트라우마는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목숨바쳐 사랑했던 주님, 자신들의 인생 전체와 운명까지 걸며 따랐던 주님의 참혹한 죽음 광경이 계속 머릿속에 떠올랐던 두 여인은 도통 잠을 이룰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새하얗게 밤을 지샌 여인들은 여명이 밝아오자마자 예수님의 무덤을 향해 내달렸습니다. 머릿 속에는 오로지 한 가지 생각, 서둘러 수습한 예수님의 시신에 대한 걱정뿐이었습니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훼손시키지는 않았을까? 혹시라도 누군가가 탈취하지는 않았을까?
그런데 무덤 앞에 도착한 두 여인 앞에 경천동지할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지축을 흔드는 큰 지진이 일어나면서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왔습니다. 천사들은 무덤 입구를 막아놓은 큰 돌을 옆으로 굴리고서는 그 위에 앉아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마태오 복음 28장 6절)
천사의 등장과 메시지 앞에 여인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또 다시 제자들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전 무덤으로 오던 발걸음과는 크게 대조가 되는 발걸음입니다. 실의와 좌절로 무거웠던 발걸음이 아니라 기쁨과 설렘으로 ‘통통’ 튀는 가벼운 발걸음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천사의 메시지만으로도 감지덕지했던 두 여인 앞에 더 은혜로운 대 사건이 한 가지 더 발생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직접, 최초로 두 여인 앞으로 마주 다가오신 것입니다.
얼마나 반갑고 기뻤던지 두 여인은 예수님 앞으로 다가가 엎드립니다. 그분의 발을 잡고 절합니다. ‘발을 잡고 절하는 행위’는 되찾은 주님을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강력한 표현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여인들에게 세가지 말씀을 건네십니다. 1. 평안하냐? 바꿔 말하면 너희에게 평화를 빈다! 2. 두려워하지 마라! 3. 내 부활이 증인이 되어다오!
쉼없이 흔들리는 근심과 걱정 투성이인 이 세상이지만, 내가 폭력과 죽음을 이겼다. 그러니 평안하거라. 너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겪는 갖은 두려움의 끝은 죽음이 아니냐? 그런데 보아라! 내가 폭력과 죽음을 이겼다. 그러니 두려워 말거라. 평안하거라. 앞으로는 걱정하고 근심하기보다는 내 부활의 생생한 목격 증인이 되어다오.
은혜롭게도 주님 부활을 최초로 목격한 여인들의 기쁨과 설렘을 묵상합니다.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를 먼저 찾아주시다니! 이 얼마나 큰 영광이요 은총입니까?
여인들이 주님 부활 최초 목격 증인인 된 이유는? 주님을 향한 가장 큰 사랑의 소유자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향한 그들의 사랑은 이 세상 그 어떤 사람들, 사도들보더 훨씬 더 컸습니다. 주님께서도 그들이 열렬한 사랑을 기꺼이 받으시고, 보답하신 것입니다.
다시금 맞이한 부활성야입니다. 다들 여인들처럼 예수님 부활을 목격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게 힘들다면, 적어도 작은 부활 체험이라도 해보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답은 한 가지 뿐입니다. 더 많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더 많이 눈에 보이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부활! 파스카! 그에 걸맞게 건너가는 것입니다. 죽음같은 삶에서 참 삶에로, 절망적 삶에서 희망적인 삶에로, 미움의 삶에서 사랑의 삶으로, 분노의 삶에서 용서의 삶에로...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영근신부-
알렐루야! 찬미 부활! 파스카를 축하합니다.
“파스카”라는 말은 알다시피, ‘지나감’(transitus)이라는 뜻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파스카를 거행한다는 것은 지나간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지나가지 않는 것을 지나가는 것’이다. ‘세상과 함께 지나가지 않기 위하여 세상으로부터 지나가는 것이다.’”(요한복음 강해)
이는 모든 것은 지나가지만, 지나가지지 않는 영원히 남는 것이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7)
그렇습니다. 지나가지 않는 누군가가 있으니, 바로 그분이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에게 또한 지나가지 않기 위한 방법이 있으니, 바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 곧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께 속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지나가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세상과 함께 지나가버리지 않으려고 세상으로부터 지나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과 교부전통에서는, “파스카”, 곧 “지나감”이라는 개념을 여러 방식으로 해석했습니다.
<첫째>는 하느님의 천사가 이집트에 있는 히브리인들의 집을 치지 않고 그 위를 지나갔다고 할 때, 파스카는 ‘위를 지나감’(hyperbasis)입니다.
<둘째>는 이집트로부터 약속된 땅으로, 곧 종살이에서 자유로 지나간 백성들을 가리킬 때, 파스카는 ‘통과해 지나감’(diabasis)입니다.
<셋째>는 인간이 아래의 것들로부터 위의 것들로 지나갈 때, 파스카는 ‘위를 향해 지나감’(anabasis)입니다.
<넷째>는 인간이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날 때, 파스카는 ‘밖으로 지나감’(exodus), 곧 ‘엑소더스’(탈출)입니다.
<다섯째>는 인간이 선과 거룩함에 있어 진보할 때, 파스카는 ‘앞을 향해 지나감’(progressio)입니다.
오늘은 ‘위를 향해 지나감’만 간단하게 보고자 합니다. 오르게네스는 파스카는 늘 ‘올라가면서’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파스카를 ‘2층 방’에서 거행하셨으므로, 그리스도인 역시 그분과 함께 파스카를 거행하기 위해서는 ‘올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 편에 앉아 계십니다.”(골로 3,1-2)
이와 동시에, 오늘 우리는 ‘흰 옷을 입은 두 사람’의 질책을 듣습니다.
“왜 하늘만 쳐다보고 있습니까?”(사도 1,11)
결국, 우리는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라’는 말씀과 ‘위만 쳐다보지 말라’는 말씀을 동시에 듣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는, 우리가 어느 쪽으로 가야하는지 그 방향을 알려줍니다. 천사가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서 뵙게 될 것입니다.”(마태 28,8)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신다.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 28,10)
우리는 여기에서, ‘주님의 돌아오심’을 알아듣습니다. <행전>에서 루카는 말합니다.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사도 1,11)
그렇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주님과 함께 있기 위해서 세상으로부터 도망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 스스로 이 세상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 그리스도인은 우선적으로 하늘은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아니 바오로 사도의 고백처럼, 이미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필리 3,20). 그러나 땅에 발을 딛고서 하늘을 바라보는 하늘의 시민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다림과 희망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희망 속에서 희망을 품고 살아갑니다. 비록 땅에 발을 딛고 있지만, 하늘을 바라보는 하늘의 시민들인 것입니다. 바로 오늘, 바로 여기 이 땅, 내가 있는 이곳에서, 기쁨으로 부활을 살아갑니다.
오늘 여기, 우리가 주님과 함께 부활했도다, 알렐루야!
우리는 하늘 시민입니다. 알렐루야!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 28,10)
주님!
곁에 계시는 당신을 두고도 모르는 척 무시하고 비껴가도,
당신께서는 저를 형제라 부르시며 다정히 손을 잡으십니다.
붙들리게 하소서. 당신 사랑에 늘 붙들려 있게 하소서.
사랑을 보게 하소서. 늘 함께 동행 하시는 제 안에 들어와 꽃을 피우는 당신의 사랑을 보게 하소서. 아멘.

장봉훈주교-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28,5.10)
1. 오늘은 주님 부활 대축일입니다. 교구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 확산으로 지난 2월 24일부터 무려 여섯 주간 동안이나 신자들과 함께 하는 평일 미사와 주일 미사를 중단하였습니다. 그리고 급기야는 성삼일 미사와 전례, 부활대축일 미사마저 중단되는 한국천주교회 236년 역사에 초유의 사태를 맞이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슬픔과 아픔을 불쌍히 보시고 하루빨리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을 종식시켜 주시어 평화로운 일상생활로 돌아갈 수 있는 은혜 내려주시기를 기원합니다.
2. 부활신앙은 두려움을 떨쳐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28,5.10).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첫 새벽 먼동이 트기 전 무덤을 찾아갔던 여인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하신 첫 말씀입니다(마태 28,5). 또한 이 말씀은 부활 날 첫 새벽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여인들에게 친히 다가와 하신 말씀입니다(마태 28,10). 우리는 많은 것을 두려워하며 삽니다. 그중에서도 우리 모두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가 언젠가 한 번은 맞이하게 될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모두의 부활의 보증이며 확증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종말의 날에 있을 육신의 부활과 영원한 삶을, 역사 안에 앞당겨 보여준 희망의 사건입니다. 사도신경에 함축된 그리스도교 신앙고백의 절정은 육신의 부활과 영원한 삶을 믿는 것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988항 참조). 부활신앙은 죽음의 두려움을 떨쳐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그리스도인은 언젠가 한 번 맞이할 죽음 앞에서도 부활의 희망을 품고 두려움 없이 평안히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살 것”(로마 6,8; 2티모 2,11)을 확실히 믿기 때문입니다.
3. 부활신앙은 시련을 견디어 냅니다. 죽음보다 삶이 더 두려운 때가 있습니다. 최근 걷잡을 수 없이 만연되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 확산으로 세계는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여 있습니다. 더욱이 코로나바이러스에 직격탄을 맞은 우리 사회에 충격과 혼돈 속에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특히 일용직 노동자들, 소상공인들, 중소기업인들 중에 파산과 생계의 심각한 위협으로 죽음보다 삶이 더 두려운 분들이 적지 않으리라 사료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느님 사랑의 증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죄인이며 나약한 우리를 위한 지고한 하느님 사랑의 결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 하느님 사랑이 죄와 죽음보다 더 강함을 입증하셨고 새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우리가 처한 환경을 쳐다보지 말고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전능하신 하느님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아낌없이 내어주시어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부활의 영광을 허락하신 하느님께 우리의 시선을 두어야 할 때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로마 8,28) 굳게 믿고 혹독한 시련을 견디어 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의 확증인 부활신앙은 우리에게 역경을 딛고 일어설 용기와 힘을 줄 것입니다.
4. 우리는 주님 부활의 증인입니다. 최근 우리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이 무섭게 확산되는 두려움과 공포의 현장에서 환자들의 생명을 살리고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헌신하는 의료인들과 자원봉사자들의 모습에서 빛을 보았습니다. 위대한 인간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사랑의 등불, 희망의 등불을 밝혀야 합니다. 우리는 두려움과 절망 중에 있는 이웃에게 따뜻한 형제애를 베풀고 배려하는 희생을 통하여 사랑의 빛을 비추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세상의 빛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의 거룩한 희생으로 우리에게 참된 생명의 빛을 주셨습니다. 부활신앙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인내하며 끊임없이 사랑을 선택하도록 독려하고 다그칩니다. 우리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을 내어주고 가진 것을 나누는 사랑의 실천으로 주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5. 예수님의 부활은 언제나 우리 신앙의 굳건한 토대요 희망의 원천입니다. 깊은 부활신앙이 가져다주는 열매는 기쁨과 희망입니다. 부활대축일을 축하드리며 부활의 기쁨과 희망이 신자여러분의 가정과 이 땅에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송영진신부-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찾는 줄을 나는 안다.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와서 그분께서 누워 계셨던 곳을 보아라. 그러니 서둘러 그분의 제자들에게 가서
이렇게 일러라.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너희에게 알리는 말이다(마태 28,5-7).”
‘기쁜 소식’은 선포될 때의 상황에 따라서,
또 ‘기쁜 소식’을 듣는 사람들의 처지에 따라서 ‘소식의 내용’이 다릅니다.
처음에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전해 준 ‘기쁜 소식’은
인간 세상으로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소식이었습니다(루카 1,13-17).
예수님께서 활동을 시작하실 때 선포하신 ‘기쁜 소식’은,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고,
회개하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마태 4,17).
천사가 예수님의 무덤에 간 여자들에게 전해 준 ‘기쁜 소식’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입니다.
(나중에 사도들이 본격적으로 선교활동을 할 때,
그들이 선포한 기쁜 소식은 이 세 가지 소식을 모두 합한 것입니다.
메시아께서 인류를 구원하려고 세상에 오셨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고,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대신 속죄하려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셨고, 그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고,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사도들이 선포한 ‘기쁜 소식’입니다.)
메시아께서 인간 세상에 오셨다는 소식은, 구원받기를 희망하면서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는 기쁜 소식이지만, 구원에 대해서 관심도 없고,
메시아를 기다리지도 않은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소식일 것입니다.
또 그런 사람들에게는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고
회개하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소식도 기쁜 소식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은, 믿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안 믿는 사람들도 크게 기뻐할 수 있는 ‘기쁜 소식’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인생의 끝은 아니라는 것과
인생은 결코 허무하지 않다는 것을 알려 주는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내세도 영생도 바라지 않고, 그냥 죽는 것으로 자기 인생을 끝내기를
바라는 사람들이라면, ‘부활 소식’을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 믿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많은 사람이
죽음이라는 것 때문에 절망하고 있고,
그래서 인생의 허무함을 극복하려고 애를 쓰고 있고,
그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도 분명히 예수님의 부활 소식은
기쁨과 희망을 주는 ‘기쁜 소식’이 됩니다.
여자들이 예수님의 무덤에 간 것은, 예수님의 시신을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천사가 그들에게 한 말,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라는 말은,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에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분의 시신을 찾으려고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시신을 찾지 말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라는 뜻입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라는 말이 더 있습니다(루카 24,5).
여기서 분명히 해 둘 점이 있는데,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은 그분의 시신이 무덤에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자들이 직접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에 없다는 것은 ‘부활의 증거’가 아닙니다.
‘부활의 증거’는 예수님을 만난 체험과 그 체험을 한 사람들의 증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려면 무덤을 떠나야 합니다.
살아 계신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그러면 그곳이 어디인가?
바로 지금 이곳, 내가 살아 있는 이곳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자들이 찾아다닌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항상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언제나 항상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분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제자들은 처음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때가 많았습니다.
그랬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본 다음에는, 예수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도
당황하지 않았고, 서운해 하거나 아쉬워하지도 않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기쁨이 지속되었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사람들 안에 현존하신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부활하신 예수님을(부활하시고 살아 계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 자신이 ‘살아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지 말라는 천사의 말을,
‘영적으로 죽은 이들’은 살아 계신 분을 만날 수 없다는 말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이들, 미신을 믿는 이들, 현세적인 복만 비는 기복신앙에
빠져 있는 이들, 사랑 없이 이기적으로 살고 있는 이들, 그리고 부활을 안 믿는
이들, 그런 사람들이 영적으로 죽은 이들입니다.
그런 이들은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닌 이들입니다.
죽으면서 허무하게 인생을 마치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들 자신들이 자초한 일입니다.)
영적으로 살아 있는 신앙인이란 어떤 사람인가?
믿음, 희망, 사랑의 덕을 온전히 실천하는 신앙인,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신앙인, 온 마음과 온 삶을 다하여 하느님과 예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신앙인, 사랑하기 때문에 계명을 기쁜 마음으로 실천하는 신앙인.
<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부족하거나 없는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받아들이더라도 기쁨 없이 억지로 받아들이고),
예수님 뒤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고, 그래서 결국 길을 잃고 방황하게 됩니다.>
‘구세주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또 ‘자신의 부활’도 믿으면서
나중에 부활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하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사랑’을 실천하는 신앙생활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통해서 ‘영적으로 살아 있는 신앙인’이 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항상 예수님과 함께 살게 되고,
그래서 항상 기쁨 가득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부활의 첫 증인인 여인들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28,1-10: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다.
“안식일이 지나고 주간 첫날이 밝아 올 무렵”(1절)!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다음 날 부활하셨다. 구약의 안식일은 이제 주님의 부활하신 날 주님의 날로 바뀌게 된다. 이 부활하신 날 그리스도를 가장 먼저 경배한 이들은 여인들이었다. 그들은 무덤을 보러 갔다. 그들은 거기서 놀라운 광경을 체험한다. 천사들로부터 부활의 소식을 들었다. 매우 이른 아침 그 시간은 죽음을 이기신 주님의 영광으로 성스러운 시간이 되었으며, 당신 부활의 빛으로 빛나게 하고 있다.
여자들이 무덤을 보러 간다. 언제나 남자들 뒷전이고, 지위로도 사도들 아래 있는 여자들이 섬기는 일에서는 사도들보다 먼저이다. 이 여인들은 여자로 표현되지만 교회를 상징하고 있다. 두 여인은 다 그리스도의 어머니와 같은 이름의 마리아이다. 두 백성, 즉 이스라엘과 다른 민족 사람들이 하나가 되는 교회를 의미한다. 그들은 봉사의 삶을 실천하는 제자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무덤으로 다가가 돌을 옆으로 굴리고서는 그 위에 앉는 것이었다.”(2절) 천사가 돌을 옆으로 굴린 것은 주님께서 무덤 밖으로 나오실 수 있도록 길을 열어드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미 살아나셨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그들이 믿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돌로 무덤을 막은 것은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마태 27,63-64 참조) 오늘도 천사가 내려와 우리 마음의 닫힌 문을 옆으로 굴려 참 신앙을 고백할 수 있도록 기도하여야 하겠다.
“두려워하지 마라.”(5절) 두려워해야할 사람들은 여인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인 사람들이 갖게 될 벌과 회개하고 그분을 따르는 이들은 그 두려움에서 벗어남을 말하고 있다. 천사는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찾는 줄을 나는 안다.”(5절)고 한다. 천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라고 한 것은 주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로 축복을 내리시기 때문이다.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와서 그분께서 누워 계셨던 곳을 보아라.”(6절) 주님께서는 당신의 육신 그대로, 십자가에 못 박힌 상처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육신으로 부활하셨다. 우리가 갖게 될 부활한 후의 육신은 바로 내가 지금 지니고 있던 육신이다. 만일에 다른 육신을 가지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가 아닐 것이다. 육신의 모습은 아마 부활하신 예수님의 육체와 같이 변할 것이다. “와서 그분께서 누워 계셨던 곳을 보아라.”(6절) 이것을 보여주려고 천사는 돌을 옆으로 굴렸다.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 증거를 볼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니 서둘러 그분의 제자들에게 가서 이렇게 일러라.”(7절) 천사는 여기서 증거를 보라고만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증언하라고 한다. 천사는 여인들이 다른 제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알리도록 준비시키고 있다. 그들은 제자들이 믿게 하려고 빈 무덤에 대한 이야기와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것이라고 이야기 할 것이다. 천사가 이 여인들을 파견하는 것은 이 부활의 기쁜 소식을 널리 퍼트리기 위해서이다. 이 여인들은 부활의 신앙을 전하는 교회를 의미한다. 우리가 전하는 신앙은 바로 부활 신앙이기 때문이다.
여인들은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간다. 그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8절) 달려갔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그들은 놀라운 일을 보았다. 상상도 못 한 일을 본 것이다. 사흘 전에 그분께서 안장되시는 것을 보았는데 그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천사들은 그 여인들을 빈 무덤과 부활의 증인으로 만들었다. 확실한 것은 군사들이 무덤을 지키고 있었으니 아무도 그분의 시신을 훔쳐 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부활은 확실한 사건이며 그 때문에 두려워하면서도 기뻐하였고 기쁘게 선포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마주 오시면서 그 여자들에게 ‘평안하냐?’하고 말씀하셨다.”(9절) 여인들은 몹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그분께 달려갔다. 그들은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하였다.”(9절) 이렇게 그들은 그분을 통해 부활의 증거를 받았고 확신에 찼기 때문에 그분께 “절하였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다시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10절)고 하신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부활의 증인들로서 여성들을 높이고 계시다. 여인들의 이 증언은 세상 마칠 때까지 읽힐 것이다.
우리도 이 여인들처럼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싶을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분의 발만이 아니라, 그분의 손도, 그리고 그분의 거룩한 머리도 만질 수 있다. 우리가 그분처럼 자애로운 마음을 지닌다면, “평안하냐?”는 말씀만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마태 25,34)는 말씀을 듣게 될 것이다.
우리도 우리의 십자가를 통하여 부활을 체험하고, 그 부활체험을 통하여 부활 신앙을 전하며 기쁨과 평화를 누리는 삶을 살도록 하여야 하겠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고 이끌어 주시도록 기도하자.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마태 28, 7)
-한상우신부-
다시
주님의 힘찬
사랑이 부활로
드러났습니다.
부활을 위한
우리의 사순은
참으로
아프고 암담한
시간이었습니다.
아파도 십자가의
여정에 충실하셨던
주님을 만나는
시간이었습니다.
암담한 마음을
뚫고 마침내
부활이 우리에게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아픔도
사랑이 됩니다.
예수님을 통해
모두가
사랑이 됩니다.
사랑의 힘은
이와같이
위대합니다.
십자가의 끝은
부활의 힘찬
시작이
되었습니다.
부활의 문(門)을
활짝 여시는
분또한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십자가도
부활임을
가르쳐주십니다.
주님의
뜨거운 살과
피에서 사람의
부활을 따사로이
만나게됩니다
목숨과 함께
갈릴래아를 다시
보게됩니다.
되살아난
용서이며
되살아난
감사입니다.
부활의 바탕은
십자가의
사랑임을 믿습니다.
또한 죽음이
있기에 부활이
있음을 믿습니다.
부활 인사
드립니다.
함께 나누어야 할
주님 부활의
기쁨입니다.
이 시대의 부활이
올바른 실천이길
기도드립니다.

-오상선신부-
예수님을 무덤에 묻고 맞이한 오늘은 온 세상이 텅 빈 듯합니다. 성토요일에 우리는 상주가 되어 님을 떠나보낸 적막감과 공허감으로 하루를 보내지요. 그리고 주님께서 부활하신 거룩한 밤을 기념하는 파스카 성야를 맞이합니다.
"주간 첫날이 밝아 올 무렵"(마태 28,1)
이른 새벽에 여인들이 움직입니다. 그녀들이 어떤 밤을 보냈을지 헤아려 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던 님을 잃은 슬픔과 그리움으로 아마도 하얗게 지새웠겠지요. 어서 날이 밝기를 기다리면서 사랑은 한숨도 되었다가 용기도 되었다가 했을 겁니다.
그래도, 아무리 안식일이 지나서 자유로이 다닐 수 있다 해도 동이 터올 무렵 무덤을 간다는 건 예사 행위가 아닙니다. 그녀들을 움직인 건 사랑에서 발화한 용기입니다.
"두려움"(마태 28,4,5,8,10 참조)
오늘의 복음 대목에 가장 빈번히 등장하는 말씀은 두려움에 관한 것입니다. 지진과 천사의 발현을 목격한 경비병들은 두려워 떨다가 까무라치고, 여인들은 천사와 예수님에게서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을 듣지요.
부활을 맞닥뜨린 이들에게 다가온 감정은 기쁨 이전에 두려움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부활에 대해 누차 말씀을 하셨어도, 죽은 이의 부활은 예전에 없던 일이기에 경이로우면서도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가서 내 형제들에게 ... 전하여라"(마태 28,10).
여인들은 천사와 예수님에게서 동시에 "가서 전하라"는 미션을 받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냥 제자들 모인 장소에 발현하셔도 이상할 것이 하나 없지만, 그분은 무덤을 찾아온 이들에게 먼저 당신을 드러내시고는 굳이 그들을 메신저로 파견하십니다.
무덤은 죽음을 증명하는 현장입니다. 지상에서의 마지막 거처이고, 산 이와 죽은 이를 가르는 장소입니다. 충성을 맹세했던 제자들에게는 더 큰 두려움과 절망의 자리일 수도 있겠지요. 바로 그곳에서 만남과 파견이 이루어집니다.
"그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 달려갔다"(마태 28,8).
두려움과 기쁨이 교차합니다. 여인들이 겪은 현상은 두려움을 야기하기에 충분하나, 그녀들이 들은 내용은 그대로 그녀들 안에서 기쁨이 됩니다. 공포가 신비로, 허망함이 환희로 바뀝니다. 무덤을 경험한 이라야기쁨의 전달자도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위기는 두려움을 일으킵니다. 세계가 고통과 죽음의 격류에 휩쓸려 가는 가운데 누구도 안심할 수 없을 만치 생과 사의 경계가 너무 쉽게 허물어져 가고 있습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우리의 현재는 주님을 무덤에 모신 시간과 흡사할 것 같습니다.
모순같지만 부활의 기쁜 소식은 여기 이 무덤가에서 시작됩니다. 여기서 두렵지만 인류에게 닥친 고통을 피하지 않고 직시하며 기도로, 나눔으로, 격려로, 참여로, 희생으로 동참할 때 되살아나신 주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주님 부활은 우리 안에 두려움과 기쁨을 동시에 선사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두려워하지 말고 생명의 기쁨을 전하러 달려갑시다.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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