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8일 성주간 수요일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마태 26,14-25)
"Surely it is not I, Lor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성주간의 시간이 흘러갈수록 주님 수난과 죽음에 대한 생각은 세상 여러 유혹과 그 갈등 속에서 흔들리는 우리 자신을 더 깊이 바라보게 합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은 주님을 배반한 유다 이스카리옷의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서 우리의 속마음까지도 성찰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거울을 보듯 오늘 독서인 이사야 예언서를 다시금 읽어 봅니다. 이사야는 세상을 구원하려고 고통받는 주님의 종이 어떻게 배신의 비열함을 넘어서는지를 노래합니다.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분께서 가까이 계시는데, 누가 나에게 대적하려는가?”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지친 이를 격려하라고 고통받은 주님의 종에게 혀를 주시고 귀를 일깨워 듣게 하신다고 강조합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도우심이, 사랑하던 사람들에게서 받은 비열한 배신과 그에 따른 깊은 상처를 이겨 내게 한다고 이사야는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어떠한 배신 없이 주님에 대한 깊은 신뢰를 이어갈 수 있겠습니까? 화답송에서 부르는 오늘의 시편이 답이 되겠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열정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형제들에게 낯선 사람이 되며 친형제들에게조차 이방인이 되더라도, 그분 이름을 찬양하고 감사 노래로 기리며 그분만을 찾는다면, 진정 하느님께서는 배신으로 상처받은 마음에 생기를 돋게 하시며 우리의 간청을 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한심하다고 자신을 자책할 수도 있지만, 사실 이런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이 잘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이 생각만 하고 있다면 아무런 변화가 있을 수 없고, 그냥 사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면 할 일이 떠올려지지 않습니까? ‘이러고 있으면 안 되니 지금 할 일은 무엇인가?’라면서 지금 해야 할 일의 숫자를 늘려줍니다. 그 순간 내 인생은 바뀌게 됩니다.
신학교에 처음 들어가서, 외출도 할 수 없는 기숙사 생활을 하며 자유를 억압받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첫 방학이 되자마자 자유를 만끽하면서 사는 데 집중했습니다. 기도도 하지 않고, 대신 친구와 만나서 신나게 놀았습니다. 이렇게 며칠을 놀다 보니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지?’
그 뒤 다시 신학생답게 살 수 있었습니다. 기도와 묵상을 하면서 마음의 평화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지?’라는 생각을 자주 해야 합니다. 그래야 스스로 변화를 하고 성장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생각이 사라지는 순간, 시간만 보내면서 그냥 사는 것이 되고 맙니다.
유다의 배신을 봅니다. 그는 세상의 물질적인 것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 관심이 예수님을 은돈 서른 닢에 팔아넘기는 행동으로 넘어갑니다. 팔아넘길 생각을 했을 때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지?’라고 생각했다면 어떠했을까요? 또 예수님께서 그에게 회개할 시간을 주시려고 이름을 밝히지 않고 당신을 팔아넘길 사람이 있음을 말씀하셨을 때,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지?’라고 생각했다면 어떠했을까요? 회개하지 않자 그 배신자가 유다임을 나와 함께 빵을 적시는 자라고 말씀하셨을 때,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지?’라고 생각했다면 어떠했을까요?
유다는 그러한 생각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특히 예수님께 대한 사랑과 존경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호칭의 변화에서부터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물을 때, 유다만이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묻습니다.
주님의 뜻과 멀어지는 마음이 들었을 때,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더 마음이 쏠리게 될 때, 자기 자신을 다시금 되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지금 해야 할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주님을 배반하는 마음도 되돌릴 수 있습니다.


지금도 ‘젊은 신부’라는 호칭이 제게 맞는 호칭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런 호칭을 전혀 들을 수가 없습니다. 하긴 신학생 때 할아버지 신부님이라고 생각되었던 은경축(서품 25년)을 맞이한 당시 신부님의 나이대를 살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 어떤 사람도 제게 ‘젊은 신부’라고 하지 못하겠구나 싶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덜컥 겁이 납니다. 어느 책에서 이런 문장을 본 적이 있습니다.
“매년 조금씩 나이를 먹어가고, 매일 조금씩 삶은 복잡해져 간다.”
나이를 먹으며 경험을 내세우며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라는 꼰대처럼 살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이렇게 나이를 먹어도 주님의 일보다는 내 일이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어리석은 삶을 사는 것은 아닐까요? 할 수 있었던 일도 게으름과 안일함으로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요? 삶이 더욱 복잡해져 갑니다.
‘인생에서 너무 늦었을 때란 없습니다’라는 책을 쓴 모지스 할머니를 떠올려 봅니다. 그녀는 76세가 되어서야 처음 그림을 그렸고 그후 20년 넘게 1,600여 점의 작품을 났습니다. 또, 90세에도 현역 모델을 하는 카르멘 델로피체도, 70세가 넘은 나이에도 유튜브 크리에이터로 왕성히 활동하시는 박막례 할머니도 후회의 삶보다는 지금 어떻게 사는 것이 중요한가를 보여 주십니다.
삶은 점점 복잡해집니다. 그런데 이것을 풀어나가면 존경과 사랑을 받고, 풀기를 포기하고 화만 내고 있다면 꼰대가 될 뿐입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맛'이 있다
-전삼용신부-
많은 중독자가 있습니다. 일 중독, 알코올 중독, 도박 중독, 성(음란) 중독, 권력 중독, 돈 중독, 게임중독, 스포츠 중독… 등. 그런데 왜 그런 중독이 자신을 망친다는 것을 알면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요? 당연히 그것에서 주는 만족을 그것에서 벗어나는 만족보다 더 크게 보기 때문입니다.
찰스 두히그의 「습관의 힘」에는 도박 중독에 빠진 어느 평범한 주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앤지 버크만은 측량사인 남편과 두 딸을 키우는 중년 여성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다 출가하고 남편은 여전히 일에 바쁜 상태여서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왠지 모를 공허함이 밀려왔습니다. 자신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무의미한 존재란 생각이 밀려왔습니다. 결국은 혼자라는 생각에서 잠시 벗어나기 위해 카지노를 가기 시작하였습니다. 물론 몇 만원, 크게는 몇십 만원 이상은 도박을 하지 않았습니다. 도박할 때, 특별히 돈을 딸 때는 자신이 좀 특별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습관이 되어 그동안 모은 돈을 다 날리고 파산신청을 해야 하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앤지는 파산한 지 3년 후,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약 11억 원의 유산을 받게 됩니다. 도박을 싹 끊기 위해 그 돈으로 도박이 불법인 새로운 지역으로 이사했습니다. 그러나 훌륭한 고객을 잃을 수 없었던 카지노 측에서는 교통비와 숙박비, 그리고 약 천만 원의 칩까지 서비스로 제공하겠다는 말에 ‘그것만 해야지!’라는 생각으로 다시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불과 며칠 사이에 유산 11억을 다 날린 것은 물론이요, 집까지 저당 잡히고도 약 4억 원 상당의 빚 독촉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솔직히 누구든 내 입장이었다면 똑같이 했을 거라 생각해요.”
왜 중독을 끊지 못할까요? 그 이유는 ‘맛’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데도 맛이 있습니다. 구약에 에사우는 야곱이 제공하는 불콩죽에 자신의 장자권을 팔았습니다. 우리가 공부해야 하는 것은 과연 불콩죽의 행복을 장자권을 희생하면서까지 팔아넘기는 것이 과연 현명한 일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가리옷 유다처럼 은전 삼십 냥을 선택하며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을 포기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하신 말씀을 다시 들을 것입니다.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우리는 왜 현명한 선택을 하지 못할까요? 그 이유는 ‘나’의 정체를 잘못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육체와 영혼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육체는 땅으로 만들어졌고 영혼은 하늘에서 왔습니다. 그래서 육체는 땅의 행복을 추구하고 영혼은 하늘의 행복을 추구합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를 ‘나’로 정할 것이냐는 것입니다. 내가 육체라고 믿으면 은전 삼십 냥에 예수님을 팔아넘기게 됩니다. 육체의 행복이 우선시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를 영혼으로 생각하면 영혼의 행복을 위해 은전 삼십 냥을 포기하는 고통을 감수합니다. 물론 은전 삼십 냥을 포기하는 고통으로 얻어지는 것은 영원한 행복입니다. 육체의 행복은 짧은 맛과 오랜 고통을 수반합니다. 반면 영혼의 행복은 짧은 고통과 오랜 행복을 보장합니다.
요즘 ‘코로나 블루’라는 말이 유행이라고 합니다. 코로나 블루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새롭게 일상에서 겪게 되는 우울증을 말합니다. 맞습니다. 우울한 세상입니다. 그러나 이런 때에도 우울함보다는 기쁨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이 시간을 기회로 삼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쩌면 우울함도 내가 선택하는 삼십 냥일 수 있습니다. 시간이 많으니 한 달 동안 악기를 배워볼 수도 있고, 소설을 한 권 쓸 수도 있고, 드라이브하면서 찾아뵙지 못했던 부모님을 찾아뵙고 친교를 나눌 수도 있습니다. 선택의 상황에서 굳이 더 우울한 것을 선택하는 이유는 자신의 몸의 행복에만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영혼을 기쁘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은전 삼십 냥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전인수(我田引水)’라는 말도 있습니다. 2020년 새해는 신종코로나 바이러스와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에게는 국경도 없었습니다. 한국은 다른 나라와는 다른 특별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신천지 예수교 증거 장막 성전’이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신종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한 대부분의 확진자는 이들 단체를 통해서 전파되었습니다. 이 단체는 다른 종교와는 다른 선교를 하였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선교하였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가 우리 몸에 들어와 감염시키면 치료하기가 어렵습니다.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선교하면 선교를 당하는 사람은 판단할 기회와 기준을 갖지 못하게 됩니다. 영상을 통해서 본 이 단체의 예배는 아주 밀접하게 밀착하며 드리는 예배였습니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이 있다면 아주 쉽게 옆 사람에게 전파될 수 있는 예배 방법이었습니다.
여기서 역지사지를 말하고 싶습니다. 신천지와 관련이 없는 사람들은 신천지 때문에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합니다. 바이러스의 전파에 신천지가 거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신천지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신천지라는 사실을 숨기고, 감염의 위험이 있음에도 사람을 만나고 선교하려했기 때문입니다. 신천지임을 밝히고, 방역 당국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이러스는 종교적인 신념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이러스는 위생관리를 철저히 하고, 치료제를 개발하면 쉽게 극복할 수 있는 질병의 매개체 일 뿐입니다. 신천지에 있는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의 교세가 급격하게 발전한 것을 시기한 마귀의 작전이라고 했습니다. 자신들이 최고의 피해자라고 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아파도 선교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가족을 속이는 것도 허용된다고 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직장을 포기할 수도 있고, 가족을 떠날 수도 있고, 친구를 속일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친구를 속이고, 가족을 속이고, 질병을 퍼트리고 얻는 영원한 생명이 가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영원한 생명을 얻으라고 가르치는 신(神)이 있다면, 그런 신을 믿어야 한다고 하는 교주가 있다면 그것은 참된 신이 이미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얻는 영원한 생명은 없습니다.
여기서 아전인수를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의 논으로 흐르는 물을 내 논으로 끌어 들이는 겁니다. 양해를 구하고, 도움을 청하면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밤에 몰래 다른 사람의 논으로 흐르는 물길을 나의 물길로 옮겨 놓는다면 잘못된 행동입니다. 성서는 우리의 영혼을 풍요롭게 하는 생명의 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지금 당신이 마시는 물은 곧 다시 목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생명의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겁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는 성서의 말씀을 ‘안전인수’식으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성서를 이용해서 거짓을 합리화하면 안 됩니다. 성서를 이용해서 가정의 평화를 깨버리면 안 됩니다. 성서를 이용해서 부당한 이익을 취하면 안 됩니다. 성서를 이용해서 다른 종교에 위장 전입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당당하게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등불은 등경 위에서 빛나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성서해석은 공동선과 정의를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 성서해석은 인류의 지성과 영성을 품어 주어야 합니다.
‘타전인수(他田引水)’를 생각합니다. 나의 논에 흐르는 물길은 목마른 다른 사람의 논으로 흐르게 하면 좋겠습니다. 비록 그것 때문에 고난의 십자가를 질지라도, 그것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반을 당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소중한 사람과 헤어질지라도 우리는 타전인수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가신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순교자들이 걸어간 길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아전인수의 삶을 통해서는 결코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 영원한 생명은 사막에 있는 신기루와 같습니다. 그런 영원한 생명은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습니다. 가까이 가면 사라지는 겁니다. 가까이 가면 무너지고 마는 겁니다.
이제 우리는 파스카의 성삼일을 하루 앞두고 있습니다. 교회 전례의 가장 중요하고, 거룩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주님 수난 성삼일을 준비하면서 우리들의 몸가짐을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왜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는지 묵상하면서 오늘 하루를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성서말씀은 우리를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입니다. 유다는 은전 서른 닢에 예수님을 대사제들에게 팔아넘겼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재물 앞에 자신의 양심을, 친구를, 하느님과 함께한 신앙을 팔아넘기는 것을 봅니다.
우리를 재물에 대한 유혹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신을 비우는 무소유의 삶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진실로 뉘우치고 하느님 자비에 신뢰한다면 용서받지 못할 죄란 없습니다!
-양승국신부-
거룩한 성주간 복음 말씀 안에는 예수님의 수난 여정의 핵심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어제 요한 복음에 이어 오늘 마태오 복음은 배신자 유다를 소개합니다.
유다의 배신 행위나 그로 인한 비참한 인생의 말로는 그리 유쾌한 것이 아니기에, 이제 그만 기억 속에서 지우고 싶은 생각도 자주 듭니다. 그러나 교회 전례는 매번 성주간 때 마다 유다의 배신 사건을 또 다시 들추어냅니다.
그 이유는 유다와 오늘 우리들 사이에 지니고 있는 공통 분모가 있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인간의 위대함과 비참함의 양 극단을 동시에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우리는 유다를 통해서 한 인간 존재가 얼마나 깊은 죄의 나락까지 떨어질 수 있는지를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유다처럼 악행의 극단에까지 이르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 안에서 종종 유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교회 앞에서 장엄히 발했던 서원은 지금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결혼생활을 하시는 분들 혼인 서약 때의 그 열렬한 사랑의 맹세가 변함없이 현재진행형인가요?
유다도 한때는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선택을 받은 훌륭한 인물이었습니다. 머리도 잘 돌아갈 뿐더러 추진력도 있어서, 사도단의 총무 역할까지 맡게 되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면서 그분의 인류 구원 사업의 첫째 가는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면서 어떻게 변화되고 성장하고 구원되는지를 자신의 눈으로 목격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유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안타까운 사실 한 가지! 유다는 예수님과 너무 가까이에 있어서 그랬던지, 그러한 회심과 새로운 삶을 자신에게 적용시키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렇게 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유다는 야심가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라나섰지만, 내면 깊숙히 자리잡고 있는 개인적인 바람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끝까지 거부하셨던 지상에서의 왕권과 그에 따른 세속적인 출세를 꿈꾸고 있었던 것입니다.
머리가 잘 돌아가던 유다였기에 어느 순간 스승님의 노선과 자신의 노선이 일치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유다는 스승님께서 거듭 강조하시는 수난과 죽음의 십자가 길을 원치 않았습니다.
유다의 배신 그 이유는 분명해집니다. 유다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온전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도 메시아에 대한 자신의 선입관과 기대를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유다의 결정적으로 배신하는 순간, 보여주신 예수님의 모습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얼싸안고 입을 맞춥니다. 유다는 적대자들과 미리 각본을 꾸민 것입니다. ‘내가 입을 맞출 사람이 예수이니, 그를 체포하면 됩니다.’
유다는 존경과 친교, 일치와 사랑의 표시인 입맞춤을 반대로 악용한 것입니다. 그런 유다의 행동 앞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친구야, 네가 하러 온 일을 하여라.”(마태오 복음 26장 50절)
아직도 자신을 친구라고 부르시는 예수님의 선한 얼굴에 유다는 전율합니다. 그제야 제 정신이 든 유다는 크게 가슴을 치며 후회하기 시작합니다. 군인들이 무례하게 예수님을 다루는 모습에 송구한 마음은 점점 더 커져갔습니다. 너무나 후회스러웠던 나머지 유다는 계약금으로 받은 은전 30냥을 되돌려주려고까지 했습니다.
바로 이 순간, 유다가 조금만 더 신중했더라면 하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사실 유다가 배신의 입맞춤을 한 후에도 스승님과 다시 새롭게 시작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를 보십시오. 한번이 아니라 세번씩이나 예수님을 배반했지만, 후회하고, 또 참회하고, 또 뉘우치는 노력을 통해 참 제자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유다는 뒤늦게 후회까지는 했지만,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믿지 못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죄가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하느님 자비는 우리 죄를 훨씬 능가한다는 사실을 망각했습니다. 그래서 죄책감에 괴로워했고, 절망의 깊은 수렁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으며, 그 결과 극단적인 선택에까지 이르렀던 것입니다.
유다는 우리 죄인들을 언제나 용서하시고 생명으로 이끄시는 하느님께 희망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베드로처럼 구원과 용서를 받기 위해 하느님께 애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살만이 자신의 죄를 속죄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진실로 뉘우치고 하느님 자비에 신뢰한다면 용서받지 못할 죄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당신 아들조차 내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용서받지 못할 죄란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결정적으로 배반하는 순간에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시며, 여전히 사랑하시며, 또 다시 기회를 주신다는 사실을 명심해야겠습니다.

저는 아니겠지요?
-반영억신부-
미국에서 교포사목을 할 때의 일입니다. 행려자 한 분이 찾아왔습니다. 젊은이였는데 분명 아침미사참례를 한 사람이었습니다. 밤10시가 다 되었는데 배가 고프다고 하니 돌려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 늦은 저녁을 먹으려고 준비하던 때라 사제관으로 들어오라고 하였습니다. 어설프게 준비한 파스타를 먹으며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하였습니다. 본인을 이탈리아사람이라고 소개하였습니다. 종이를 달라고 하여 그림을 그리며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 하였습니다.
어설프게 알아듣는 저를 보고 얼마나 답답하였을까? 음식을 챙겨 주었지만 제 마음 한 구석에는 이제 사제관에서 재워야 하나? 하는 고민을 하였습니다. 결국 담요 한 장을 챙겨 내보내고는 미처 여관비도 주지 못한 후회스러움 속에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부끄러운 밤을 보냈습니다. 다음 날, 아침미사 봉헌을 위해 제단에 올랐는데 그가 담요를 둘둘 말아 가지고 성당 문으로 들어왔습니다. 어디서 밤을 지새웠을까? 행려자로 오신 주님을 외면하고 봉헌하는 미사에 가슴이 저며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에 앞서서 제자들에게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마태26,2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26,22) 하고 말하였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도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마태26,25).하셨습니다. 일상을 살아오면서 오늘도 여전히 주님의 뜻을 외면하면서도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말합니다. 밥 한 끼 주고서는 할 일을 다 한양 “저는 사랑을 베풀었지요?” 하고 말합니다. 아직도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는 소리는 살아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세례성사를 받을 때 약속한 것들을 얼마나 지키고 있는지? 혼인계약으로 새 가정을 시작하면서 다짐한 약속들, 부모와 자녀, 이웃과의 신의를 지키지 못하면서도 유다를 쉽게 비난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천상을 갈망하면서도 세상의 애착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격입니다.
“주님, 저는 아니지요?” 하고 물을 때 “아니 너 맞아”라는 답변을 들을까 두렵다고 고백한 한상봉씨의 말씀이 크게 들려옵니다. 주님의 자비를 간구하는 오늘입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2,15-17). 죽은 믿음을 살리는 부활을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프란치스코 교황님 말씀입니다.
"혀로 예수님을 팔지 마십시오." 유다는 은돈 서른 닢으로 예수님을 팔아먹었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짓을 합니다. 서로 험담할 때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험담할 때 그 사람은 하나의 물품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유다가 한 짓입니다. 험담할 때, 다른 사람의 껍질을 벗길 때에 바로 유다가 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권고합니다. '다른 사람을 나쁘게 말하지 맙시다."
예수님을 배반했을 때 유다는 마음이 닫혀있었습니다. 이해심이 없었고, 사랑이 없었고, 우정이 없었어요. 우리도 역시 남들에 대해 쓸데 없는 말을 할 때 우리에게 사랑이 없고, 우정이 없으며 모든 것이 시장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친구와 친지를 팔아먹는 것입니다. 그러니 용서를 청합시다. 친구에게 용서를 청하면 예수님께 용서를 청하는 것입니다. 그 친구 안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무에게도 껍질을 벗기지 말고, 아무도 험담하지 않는 은총을 청합시다. 어떤 사람에게 결점이 있는 것을 알게 된다면 우리 입으로 정의를 이루려고 하지 말고, 그를 위해 주님께 이렇게 기도합시다. "주님, 그를 도와주십시오.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2)
-이영근신부-
우리는 때로 비참하고 참담한 상황들을 맞이하곤 합니다.
배신당했다고 여겨질 때가 그렇습니다.
그것도 가장 믿고 사랑하는 사람, 바로 내 형제에게서 배신당할 때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랑하는 제자에게 은전 30냥에 팔려 배신당하는 예수님을 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배신자에게 마지막까지 인정을 베푸시고 기회를 주십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유다야, 네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라고 하지 않으시고,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마태 26,21)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음으로써 마지막까지 그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2)라고 묻습니다.
마찬가지로 유다도 묻지만, 그는 “주님”이라 부르지는 않습니다. 그는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5)라고 묻습니다.
이제 어둠 속에서 그의 정체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가 올리브동산으로 예수님을 붙잡으러 왔을 때도 예수님께서는 “친구야, 네가 하러 온 일을 하여라.”(마태 26,50)하고 여전히 그를 친구라고 부르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변치 않는 스승의 사랑을 끝까지 외면하고 맙니다.
그는 뒤늦게 후회는 했지만 하느님의 사랑 안으로 돌아오지는 못하고, 결국 자책과 죄책감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을 용서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대체 유다는 왜 예수님을 배반했을까?
그것은 단순히 은전 30냥에 대한 탐욕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예수님이 먼저 유다를 배신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유다가 바라고 원했던 정치적 민족적 메시아가 되어주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먼저 유다의 이상을 배신한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그릇된 관념, 곧 선입감과 고정관념을 바꾸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고집한 까닭입니다.
완고함이란 이처럼 무섭습니다. 곧 자신의 피조물인 자신의 관념을 믿고 섬긴 우상숭배에 빠진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생각과 이상을 파괴시키는 혁명가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버리지 않고는 따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자신이 만들어 놓은 이상을 쫒는 자는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마태 26,24)
이 말씀은 비단 유다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우리 모든 이들에게도 해당하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저는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2)라고 말할 용기가 없습니다.
제가 유다처럼, 배신할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아니, 당신을 배신하는 줄을 알면서도 악에 조정당하고 있고, 오늘도 넘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끊임없이 주님의 사랑 안으로 돌아와야 할 일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주님, 제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건져주십시오.”라고 자비를 구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2)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말할 용기가 없습니다.
제가 오늘도 배신할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알면서도 넘어지고 또 넘어지니 무참할 뿐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건져주십시오.”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게 하소서. 주님을 떠나는 일이 없도록 도와주소서. 아멘.

그들은 몹시 근심하며
-송영진신부-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으셨다.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기 시작하였다(마태 26,20-22).”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때는, 유다가 이미 예수님을
배반한 뒤인데(마태 26,14-16), 그런데도 ‘팔아넘길 것이다.’ 라고 표현하신 것은,
유다의 배반이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결되지는 않았음을 나타내기도 하고,
또 아직은 그에게 ‘회개의 기회’가 남아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라는 말씀은, 당신이 특별히 뽑으신 사도들 가운데에서
배반자가 생긴 것에 대한 예수님의 고통과 슬픔이 들어 있는 말씀입니다.
나머지 열한 사도는 자신이 배반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몹시 근심하고 두려워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확신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은 배반할 생각이나 마음은 전혀 없지만,
본의 아니게 자신이 배반자가 되는 상황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입니다.)
제자들이 몹시 근심했다는 말은, 동료들 가운데에 배반자가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근심했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 불안해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라는 말은,
“주님, 그게 혹시 저입니까?” 라는 뜻입니다.
1) 제자들은 자신들이 나약하고 부족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말은, 사도들이 그때까지는 아직도 자신들의 신앙이 미숙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직접적으로 예수님을 배반하지는 않더라도 자신들의 부족한 점들이
예수님을 배반하는 것과 같은 일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조금 다른 관점에서 생각하면,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에 자신들이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고 있음을 의식하고 있었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받은 사랑에 응답하는 방법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자신들이 주님께 드리는 사랑이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랑의 부족함’ 자체가 배반은 아니지만,
받은 사랑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는 것을 ‘배반’으로 느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사랑이 많이 부족하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최선을 다해도 그렇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언제나 항상 대단히 ‘큰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2) 인간은 앞일을 모르는 존재입니다.
열한 제자는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서,
또 자기 자신이 어떻게 될지 몰라서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일을 겪으실지, 그리고 자신들은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
제자들은 당시에 몹시 불안하고 초조한 상태였을 것입니다.
(아마도 제자들의 근심은, 자기들이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짓을 할지도 모른다는
근심이 아니라, 끝까지 충성스러운 제자로 남아 있을지 확신하지 못하는,
자신감이 부족한 데에서 생긴 걱정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을 위해서 그들에게 생길 일을 미리 알려 주십니다.
뒤의 31절을 보면, “오늘 밤에 너희는 모두 나에게서 떨어져 나갈 것이다.” 라는
말씀이 나오고, 34절에는 베드로 사도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하게 된다는 것을 예고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 일들을 미리 말씀해 주신 것은, 제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고,
그래서 그것은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유다의 배반을 예고하신 것도 유다가 회개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이고,
그래서 그 일도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배신을 예고하신 뒤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여러 가지 시련을 겪는 동안에 나와 함께 있어 준 사람들이다.
내 아버지께서 나에게 나라를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에게 나라를 준다.
그리하여 너희는 내 나라에서 내 식탁에 앉아 먹고 마실 것이며,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루카 22,28-30).”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예고하신 대로, 제자들이 모두 당신을 버리고
달아날 것을(마태 26,56; 마르 14,50) 알고 계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내가 여러 가지 시련을 겪는 동안에
나와 함께 있어 준 사람들이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에게 당신의 왕정에 참여할 수 있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제자들이 흩어지고 달아나는 것은 일시적인 일이고,
그랬다가 그들이 곧바로 돌아온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가 당신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말할 것이라고
예고하시면서도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루카 22,32).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만을 위해서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 모두를 위하여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그들이 흔들리고 달아나고 흩어졌지만 그래도 다시 돌아와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때 제자들도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은총에 그들 나름대로 응답했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배반자 유다를 위해서도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그 자신이 스스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살함으로써
예수님의 보호를 못 받았습니다.
아마도 유다는 전혀 기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보호해 주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안 받아서 못 받은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충실하게 할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우리도 사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어떤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 생기면 두려워하고,
그래서 믿음이 흔들릴 때가 많습니다.
바로 그럴 때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언제나 항상 우리를 지켜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하고, 또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고 계신다는 것도 믿어야 하고,
그 믿음 속에서 꾸준히 기도해야 합니다.
보호해 달라고 간청하는 기도는 예수님의 보호에 응답하는 방법이기도 하고,
주님의 보호를 잘 받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조욱현신부-
마태: 26,14-25: 사람의 아들을 배반한 그 사람은
유다 이스카리옷은 예수님을 없애려 하는 대사제들에게 가서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15절)하자 그들은 은전 서른 닢을 내주었고 그때부터 유다는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고 한다. 그 적당한 기회란 “군중이 없을 때에 예수님을 그들에게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루카 22,6)고 하는 때였다. 유다는 바로 최후의 만찬 뒤 예수님께서 겟세마니 동산에 혼자 계실 때 그 일을 했다. 진리의 말씀이 배반당하는 시간은 그분 곁에 충실한 지지자들이 거의 없는 바로 그 때이다.
“무교절 첫날” 제자들이 예수님께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차리면 좋겠습니까?”(17절) “무교절 첫날”은 파스카 축제 전날이고 그날을 마르코는 “무교절 첫날 곧 파스카 양을 잡는 날”(마르 14,12)이라고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지키시는 분임을 보여주시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모여서 파스카 만찬을 나눌만한 집이 없었다. 그들은 모두 세속적인 재산을 모두 포기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무개”라는 사람을 찾아가 그 집에 준비하라고 하셨다. “나의 때가 가까웠으니 내가 너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축제를 지내겠다.”(18절) 그 아무개는 마르코와 루카가 “물동이를 메고 가는 남자”(마르 14,13; 루카 22,10)이며, 주님의 제자들을 받아들인 첫 사람이었다. 그는 제자들의 말을 듣고 장소를 제공해 주었다. 제자들은 “이미 자리를 깔아 놓은 큰 이층 방”(마르 14,15)에 파스카 음식을 차렸다. 우리 자신도 이제는 주님을 위해 손님방을 마련하여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으셔서 파스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21절)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배반자에게 어떻게 하셨는가? 만찬 전에 그분은 유다의 발을 씻어 주셨고,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고 하시며 누구인지 밝히지 않음으로써 그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신다. 이 말씀 때문에 나머지 제자들은 혼란에 빠졌지만 유다의 구원을 위하여 그렇게 하셨던 것이다.
제자들은 견디기 힘든 혼란에 빠졌다. 요한은 “제자들은 누구를 두고 하는 말씀인지 몰라 어리둥절하여 서로 바라보기만 하였다.”(요한 13,22)라고 한다. 제자들은 자신에 관하여 묻고 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22절) 이 근심을 없애주시려, 예수님은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 그 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23절)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근심에서 구해 주고자 결정하셨을 때, 유다의 정체를 밝히신다. 유다는 시간을 주었지만 변할 수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24절) 유다는 악마의 도구로 쓰이고 말았다. 이 불행은 유다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그리스도께서 넘겨지신 것은 악마 때문이지만, 그 일이 이루어지는 데 도구가 된 자들도 불행하다는 말씀을 하신다.
다른 제자들이 주님께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하자 유다도 양심에 찔렸을까? 예수님께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25절) 하고 묻는다. 다른 제자들은 주님이라고 했고 유다는 스승님이라고 한다. 주님을 배반한 것이 아니라, 스승님을 배반한 정도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25절)고 하시며 빌라도에게 하신 말씀으로 유다를 책망하신다. 이는 예수님과 다른 제자들 앞에서 빛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완전히 가리는 말이다. 어둔 밤으로 들어가겠다는 말이다.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나는 어떠한 자세로 그분을 따르고 있는가? 내가 하느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그분께 나를 따르라고 하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하면서 오늘 복음을 잘 묵상하고 그분을 따르는 제자, 신앙인이 되도록 기도하자.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마태 26, 24)
-한상우신부-
하느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다시금 묻는
성주간입니다.
얼마만큼 더
하느님을 팔아야
하느님을 더는 팔지
않게 되는 것입니까.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아주 씁쓸한
우리들
자화상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던
한 사람이
너무도 빨리
하느님 나라를
부정합니다.
거칠 것 없는
잔혹하고 잔인한
인간의
교만입니다.
유다같이
일방적인 믿음은
있는 그대로의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유다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측은한
눈빛을 아프게
묵상하게 됩니다.
막다른 곳에 선
유다의 모습에서
우리는 어떤
하느님을
찾고 있었는지를
반성하게 됩니다.
우리의 약함과
아픔을 짊어지고
가시는 주님이십니다.
쉽게 무너지고
쉽게 유혹에 빠지는
이 마음까지 주님께
내어드리는 그 믿음을
청합니다.
깨어있는 믿음은
먼저 주님안에서
우리자신을
알게합니다.
그래서 방심하거나
때론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낙심하거나 믿음을
바꾸지 않습니다.
이 성주간이
믿는 법을
다시 배우는
은총의 성주간이길
기도드립니다.
믿음은 그래서
나의 걸음이 아닌
주님께
보폭을 맞추는
순명입니다.

-오상선신부-
파스카 성삼일을 목전에 둔 오늘, 우리는 말씀을 통해 하느님을 아는 이와 모르는 이의 차이를 봅니다.
제1독서인 이사야서는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를 들려 줍니다.
"하느님은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는 분"(이사 50,4 참조)
"하느님은 아침마다 나를 일깨워 주시는 분"(이사 50,4 참조)
"하느님은 내 귀를 열어 주시는 분"(이사 50,4 참조)
"하느님은 나를 도와주시는 분"(이사 50,7 참조)
"하느님은 나를 의롭다 하시는 분"(이사 50,8 참조)
"하느님은 나에게 가까이 계시는 분"(이사 50,8 참조)
모욕과 수모를 당하면서도 수치를 당하지 않는 힘은 나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알고 신뢰할 때 나옵니다. 세상이 나를 손가락질하고 등돌린다 해도 하느님께서 이를 허락하시는 이유가 있으리라 믿기에 무너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나의 때가 가까웠으니"(마태 26,18)
제자들은 파스카 음식을 차릴 준비를 하고, 예수님은 "당신의 때"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다가오는 시간이 그리 호락호락, 만만하지 않다는 걸 그분은 잘 아십니다. 그럼에도 꿋꿋이 뚜벅뚜벅 이 길을 걸어가실 수 있는 힘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아버지의 뜻에 대한 전적인 신뢰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마태 26,24).
그래서 예수님은 담담히 이 말씀을 하실 수 있습니다. 직접적으로 나를 괴롭히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는 그 상대에게 탓을 돌리지 않고, 하느님의 큰 그림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라 받아들이시는 겁니다. 설령 누가 내게 악행을 저지르더라도 그 역시 우리 인생의 무대에서 악역을 맡았을 뿐이라 여긴다면 미움과 증오에 에너지를 빼앗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기 시작하였다"(마태 26,22).
한 제자가 당신을 배반하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 제자들이 몹시 당황합니다. 아직까지는 분명히 결백한데 행여 앞으로라도 주님을 배반하게 될까봐 두려움이 몰려옵니다. '그 배신자가 내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하느님께 대한 신뢰도, 자신에 대한 신뢰도 미약할 때 생깁니다.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마태 26,25).
같은 표현의 질문이지만 속뜻은 상이합니다. 다른 제자들은 흑시라도 제가 주님을 배반할까봐 두려워 여쭙지만, 유다는 제가 이미 저지른 일이 드러날까봐 두려워 짐짓 여쭙니다. 어쩌면 유다는 자신의 배반으로 스승의 뜻을 수정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버지께서 성자 예수님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파스카의 신비를 유다는 자기 지향과 야망과 탐욕의 도구로 재단하고 편집하려 합니다. 이는 하느님을 모르고 자신도 모를 때 범할 수 있는 큰 실수입니다.
"주님 은총의 때이옵니다. 당신의 크신 자애로 제게 응답하소서"(화답송).
아버지를 알고 당신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수난과 죽음 앞에서 결연히 고백하십니다. 그분이 말씀하신 "나의 때"(마태 26,18)는 과연 "은총의 때"입니다. 이 세상으로 은총을 끌어내리는 때요, 세상이 구원의 은총을 회복하는 때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저마다 각자의 실존과 삶의 여정을 통해 주님 십자가의 길에 동행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알고 자신을 알 때 그 길은 훨씬 수월해집니다. 십자가가 작아지고 가벼워져서 수월해지는 게 아니라, 우리 각자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고 일깨워 주시고 귀를 열어 주시고 도와주시고 가까이 계시는 주님"을 알기에 수월해지는 겁니다. 그렇게 예수님도 앞장서 그 길을 가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벗님! 본격적으로 주님의 파스카 여정에 합류하기 전에 하느님을 알고 자신을 아는 은총을 간절히 청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알고 가는 길과 모르고 가는 길은 다릅니다. 또 알 때의 무게와 모를 때의 무게도 다르지요. 이렇게 우리도 본격적으로 예수님과 함께 걸을 채비를 차립시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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