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23일 사순 제4주간 월요일
예수께서 “집에 돌아가라.
네 아들은 살 것이다” 하시니
그는 예수의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
(요한 4,43-54)
Jesus said to him,
"You may go; your son will live."
The man believed
what Jesus said to him and lef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요한 복음에서 갈릴래아 카나는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표징을 일으키신 곳입니다. 그리고 오늘 두 번째로 그곳에서 표징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고 그곳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그리고 다시 사마리아를 거쳐 카나로 돌아오십니다. 거기에 있던 왕실 관리는 예수님께 아들을 고쳐 달라고 청합니다. 왕실의 관리는 이방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이 말씀은 왕실 관리만이 아니라 당시 예수님의 주위에 있던 이들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지금 우리를 향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표징은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왕실 관리의 아들을 고쳐 주신 뒤 그와 온 집안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전합니다. 이렇듯 그들은 표징을 통하여 예수님을 알게 되고 그분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표징과 이적만이 중요하지 않고, 오히려 그 외의 것을 통해서 믿음을 가진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초자연적인 사건을 통해서만 믿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과 그분께서 드러내시는 하느님에 대한 계시를 통하여 믿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사건에, 쉽게 일어나지 않는 일들에 관심을 둡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의미 있고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그분의 삶을 통하여 보여 주신 사건에 집중하고 믿는 것입니다. 그 안에 우리를 위한 생명이 담겨 있습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겨우 2~30년의 차이인데도 불구하고 어마어마한 세대 차이가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 근본적인 차이는 자신의 십 대 때 들었던 노래의 차이일 뿐이라고 하더군요.
경제학자 세스 스티븐슨에 따르면 십 대 때 듣는 노래가 일생의 음악 취향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뇌는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때 도파민, 세로토닌 등을 내뿜으면서 쾌락을 느낍니다. 그런데 가장 많은 호르몬을 배출하는 12세에서 22세 사이의 경험을 이후에도 잊지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고 뭐라 할 것이 아닙니다. 그저 십 대에 어떤 노래를 들었는가의 차이일 뿐입니다.
각 사람의 판단도 어쩌면 별것 아닐 뿐인데, 그 판단이 정답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이런 판단 가운데 사랑은 희미해지게 됩니다.
예수님을 왕실 관리가 찾아옵니다. 그는 헤로데 조정의 관리이거나 유대아에 파견된 로마 황제의 신하일 것입니다. 즉, 그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이방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부족한데 하물며 이방인이 어떻게 믿겠습니까? 실제로 그는 예수님을 직접 만나야만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 나약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만난 뒤 믿음의 변화를 일으킵니다. 그래서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라는 말씀을 믿고서 다시 집으로 떠나갑니다.
주님의 말씀을 세상의 기준을 가지고 판단하지 않고 믿었기 때문에 사랑하는 아들을 살릴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부족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깜짝 놀랄만한 표징이나 이적 없이는 주님을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이 세상의 기준으로 주님을 판단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분의 말씀만으로도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이 선명해질 것입니다.


좋은 부모가 되는 요인은 무엇일까요? 자녀가 원하는 것만 해주면 될까요?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원하는 것을 받는다고 해도 좋은 부모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많은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받지 못한 것에만 집중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부모라기보다 나쁜 부모라고 말하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많은 희생을 하면서까지 사랑을 주었는데 말입니다.
미국의 정신과 교수 다니엘 시겔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일관된 인생 이야기’를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를 말합니다. 즉, 자신의 인생 경험을 의미 있고 재미있게 해석하며, 근사한 추억으로 만들 줄 아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능력을 통해 자신의 삶을 스스로 인정하는 자신감 넘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고, 이 모습을 보고 자란 자녀는 좋은 부모라는 인식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자녀를 훌륭하게 성장시키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많은 부모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에 스토리를 남길 수 있는 삶, 의미 있는 삶을 만드는 삶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면 저절로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습니다.

더 바라면 더 믿게 되고, 더 믿으면 더 바라게 된다
-전삼용신부-
1950년대 중반 미국 존스홉킨스대학에서 쥐를 대상으로 실험하였습니다. 연구 책임자였던 커트 리히터 교수는 긴 유리그릇에 실험용 쥐를 넣고 그 안에 물을 천천히 부었습니다. 쥐가 물속에서 얼마 동안 생존하는가를 관찰하는 실험이었습니다.
실험 결과, 물의 온도와는 상관없이 물을 붓고 15분 정도가 지나자 헤엄치는 것을 포기하고 죽음에 이르는 쥐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어떤 쥐는 무려 81시간을 버티기도 하였습니다.
다음에는 쥐의 수염과 얼굴에 있는 털을 제거하고 같은 실험을 했습니다. 그 결과 첫 번째 실험보다 쥐의 생존 시간이 현격히 줄었고 여전히 40~60시간 정도 버티는 쥐도 있었습니다.
세 번째 실험은 실험용 쥐가 아니라 덫에 걸린 야생 쥐를 잡아 실험해 보았는데 이번에는 예외 없이 얼마 지나지 않아 다 죽었습니다.
네 번째 실험을 해 보았습니다. 쥐들이 헤엄을 치며 안간힘을 쓸 때 밖으로 살짝 빼 잠깐의 자유를 주었습니다. 이런 절차를 반복했더니 놀랍게도 쥐들은 평균 60시간을 버텨 냈다고 합니다. 어떤 쥐도 15분 만에 포기하지 않았답니다.
리히터 박사의 설명은 쥐도 생명 연장에 대한 믿음이 있고, 그 믿음은 쥐의 삶이 어땠는지에 따라 학습되고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쥐의 수염을 자르고 얼굴에 있는 털을 제거하자 쥐의 생명 연장의 희망이 짧아졌다는 것입니다. 또 덫에 걸린 경험이 있는 쥐는 옴짝달싹을 못 하게 되었기에 쉽게 삶을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쥐덫에 걸린 경험이 절망을 학습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잠깐 자유를 주어 희망의 불씨를 본 쥐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무기력에 빠지지 않기 위해 우리 삶에도 바라고 성취하는 작은 희망의 경험들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두 번째 표징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표징은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어주시는 기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표징이란 누구에게 믿음이 생기게 만드는 은총이 눈에 보이는 무언가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생겼다면 반드시 표징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표징을 통해 은총이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에게 믿음이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보고 믿었다.”라는 뜻의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오늘 복음의 표징은 왕실 관리가 아들이 앓아누워 있어서 예수님께 고쳐달라고 청하는 것에서 드러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왕실 관리는 그래도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라고 청하며 결국, 그 표징과 이적을 보고 믿었습니다. 아이가 살아나기 시작한 시간이 예수님께서 아이가 나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시간과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왕실 관리는 끝까지 청함으로써 표징과 이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희망과 믿음은 새의 양 날개와 같습니다. 새가 날기 위해 한 날개만 움직일 수 없는 것처럼, 희망과 믿음도 함께 움직이며 우리를 하느님 가까이 들어 높입니다. 따라서 청하는 것은 무서워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했다고 해서 주님께서 우리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좋아하신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자녀가 고통받는 것을 좋아하는 부모는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행복하기만을 바라십니다. 그러니 이것을 믿고 무엇이든 청하십시오. 믿으면 청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청하는 것을 들어주시는 것을 보면 더 믿을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더 바라면 더 믿게 되고, 더 믿으면 더 바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행복하기만을 바라십니다. 기차가 캄캄한 터널 속으로 들어왔다고 기차표를 버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희망이라는 기차표를 꼭 쥐고 있으십시오. 그것이 기관사에 대한 믿음입니다. 매일매일 희망하십시오. 많이 바라서 주님께서 좋으신 분임을 스스로가 믿게 만듭시다.
(23일 월요일부터 유튜브에도 묵상글을 올리겠습니다. '전삼용 묵상'이라고 검색하시면 됩니다. 많은 관심 가져주시길 바랍니다.^^)

-조재형신부-
주말에는 밥을 해 먹을 때가 있습니다. 밥을 할 때는 물 조절을 잘 해야 합니다. 물을 조금 많이 넣었더니 밥이 조금 질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는 볶음밥을 만들어 먹으면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파를 넣고 기름에 데친 다음 햄, 김치, 콩나물을 넣고 볶음밥을 만들었습니다. 계란 프라이를 올려놓으니 근사한 볶음밥이 되었습니다. 간단한 볶음밥을 하는데도 준비할 것이 많았습니다. 김치는 잘게 썰어서 물에 한번 담갔다 건졌습니다. 파, 콩나물도 미리 준비해야 했습니다. 햄도 적당한 크기로 잘라 놓았습니다. 아! 짜파구리도 한번 만들어 보았습니다. 인터넷에 만드는 법이 있어서 따라하니 제법 맛있는 짜파구리가 되었습니다. 늘 만들어 주신 식사를 하다가, 직접 음식을 만들어 보니 한 끼의 고마움을 새삼 알 수 있었습니다.
성지순례를 갔을 때입니다. 호텔에서 저녁 식사를 하는데 입구를 잘못 찾아서 주방 쪽으로 들어갔습니다. 식당에는 우아하게 테이블이 장식되었고, 맛있는 음식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직원들이 웃으면서 커피와 차를 따라 주었습니다. 그런데 주방의 모습은 달랐습니다. 많은 사람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남은 음식을 정리하는 사람, 그릇을 씻는 사람, 물건을 정리하는 사람, 바닥을 청소하는 사람, 음식을 만드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마치 백조가 우아하게 호수를 떠있지만 백조의 다리는 물 아래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옷,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핸드폰, 지금 내가 운전하는 차는 누군가의 헌신, 노력, 땀이 있었다고 생각하니 새삼 감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어 보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합니까? 제자들이 대답했습니다. 선생님은 엘리야라고 합니다. 선생님은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합니다. 선생님은 예언자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물어 보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가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 되셨고, 그리스도는 부활하여 하느님의 오른편에 계시고, 그리스도는 다시 오셔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주시고, 그리스도는 성체의 모습으로 감실에 계십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아들,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지만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신앙의 신비로 믿고 있습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또 다른 예수님의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을 위해서 음식을 만들어 주시는 예수님입니다. 밤을 새워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던 제자들이 안쓰러워서 더 깊이 그물을 던지라고 하시는 예수님입니다. 나자로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슬피 우시는 예수님입니다. 백인대장의 굳건한 믿음을 칭찬하시는 예수님입니다. 성전을 장사꾼의 소굴로 만든 사람을 야단치시는 예수님입니다. 자캐오의 집에 머물면서 먹고 마시던 예수님입니다. 닭이 울 때 베드로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시던 예수님입니다. 제자들에게는 언제나 겸손하라고 당부하신 예수님입니다.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기 위해 오셨다고 하신 예수님입니다. 십자가의 무게에 짓눌려 세 번이나 넘어지신 예수님입니다.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며 한탄하신 예수님입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이야기합니다. 율법과 계명으로 억누르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아닙니다. 권위와 제도로 억누르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아닙니다. 신학과 교리에 갇혀서 보이지 않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아닙니다. 온 힘과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벗이 겉옷을 달라면 속옷까지 내어주는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가장 가난하고, 굶주리고, 병든 이웃들의 친구가 되어 주는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나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고, 받아주는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제2의 예수님이 되는 것이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 너희는 악이 아니라 선을 찾아라. 그래야 살리라. 그래야 주님이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예수님께서는 유다를 떠나 갈릴래아로 가시어 두 번째 표징을 일으키셨다.”

구원을 부른 고통
-반영억신부-
왕실의 한 관리가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앓아 누웠습니다.
그러자 그 관리는 예수님께 쫓아가 자기 아들을 고쳐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에게 예수님께서 이르셨습니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그 왕실 관리는 “주님,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요한 4,48-49). 하며 사정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거라. 네 아이는 살아날 것이다”는 예수님의 응답을 얻어냈고 그 시간에 아이는 나았습니다.
왕실의 관리가 예수님께 사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들 때문입니다. 아들의 고통이 관리를 사정하게 했고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는다.’는 면박도 감당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네 아이는 살아날 것이다’ 는 말씀에 두 말 없이 믿음을 걸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아이는 살아났고 온 집안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고통이 하나의 시련이었지만 구원을 가져왔습니다. 예수님의 능력과 왕실의 관리의 믿음이 만나서 아이는 살아났고 온 집안이 믿게 되었습니다(요한4,53). “믿음의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주십니다”(야고5,10).
믿음 없이 살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그제서 밤을 지새가며 기도하고 부산을 떠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지만 그래도 믿음을 가지고 매달리면 주님께서 그 마음을 헤아려 주십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법으로 채워주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왕실의 관리가 예수님께서 자기 집으로 가시길 원했지만 예수님은 한마디 말씀으로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들을 낫게 해준 것은 약초나 연고가 아닙니다. 주님, 그것은 모든 사람을 고쳐 주는 당신의 말씀입니다”(지혜16,12). “사랑하는 여러분,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도 여러분은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1베드4,12-13).
그러므로 내 방식으로 되지 않는다고 실망하거나 의심하지 말고 그분께서 원하시는 때에 그분의 방법으로 이루어 주심을 믿고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 하십시오”(로마12,12). “아무것도 걱정 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줄 것입니다”(필리피4,6-7).
고통은 결코 죄의 벌이 아닙니다. 한편으로 하느님의 섭리요, 은총의 기회입니다. 또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는 절호의 찬스입니다. 예수님의 고통은 부활의 기쁨으로 끝납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고통을 느꼈을 때는 이제 다가올 부활을 기억하십시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은 모두가 다 귀한 것입니다. 고통 이라할지라도....이 고통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무슨 일을 하고자 하시는지,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메시지를 알아듣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기적을 말하지 않고 표징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을 통해 보물 상자보다 보물에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더욱 튼튼하여지고 아름다워지길 빕니다. 우리는 믿음의 특권에서 오는 고난의 특권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곧 영광의 특권이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요한 4,50)
-이영근신부-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드러내는 일련의 증거, 곧 일곱 개의 표징과 일곱 개의 예수님의 자기 선언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증거의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표징이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과 신성을 증거 하는 하느님의 계시가 구체화 된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모두 예수님의 파스카에 집결되어 있고, 우리는 지금 파스카를 향하여 나아가는 ‘사순시기’의 한 가운데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전례주년에 따라 ‘기쁨주일’이 지나고, 이제 십자가의 수난이 다가올수록 전례력에 따른 말씀은 오히려 새로운 창조에 대한 희망의 빛을 점점 더 밝게 비춥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새 하늘 새 땅의 창조에 대한 희망과 기쁨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오늘 <복음>은 갈릴래아의 카나에서 행하신 ‘왕실관리의 아들을 살리신 두 번째 표징’입니다.
이 역시 희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곧 아픈 아들로 절망에 빠져있던 왕실관리가 예수님에게 희망을 걸고 찾아가 기쁨을 찾은 이야기입니다.
그는 “자기 아들이 죽게 되었으니 가파르나움에 내려가시어 아들을 고쳐 주십사고 청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르셨습니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고는 믿지 않을 것이다.”(요한 4,48)
왕실관리가 예수님을 찾아와 도움을 청한 것은 그의 희망과 믿음의 표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치유해 주실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면, 굳이 청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의 믿음은 불완전했던 것입니다.
그는 백인대장과는 사뭇 달랐던 것입니다. 백인대장은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그를 고쳐주마” 하실 때에,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 8,8;루카 7,7)고 신앙을 고백하는데 반해서, 그는 단지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라고 말할 뿐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에까지 가야만 치유하실 수 있는 정도로만, 또는 죽기 전에 치유해야만 되는 정도로만 믿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요한 4,50)라는 “예수님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났습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을 믿었습니다.
아직 표징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가 집으로 돌아가던 중에 종들이 와서 아들이 나은 것을 알려 주었을 때, 바로 그 때가 예수님께서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요한 4,50)라고 말씀하신 때임을 알고서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표징과 이적을 보고서” 비로소 온전히 믿었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병든 아들의 치유만이 아니라, 마음이 병든 아버지도 치유하시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한 말씀으로 두 영혼을 치유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믿음이 온전해서가 아니라, 그의 약한 믿음을 굳세게 하기 위함이셨습니다.
비록 그의 믿음이 불완전할지라도 결코 하찮게 여기지 않으신 것입니다.
비록 겨자씨만한 믿음일지라도 그 믿음을 소중하게 여기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왕실관리 아들을 살리신 이 ‘두 번째 표징’은 믿는 이들에게는 확증을 주기 위함이요, 믿음이 약한 이들에게는 믿음을 굳게 하기 위함이요,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믿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를 통하여 당신이 신성과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바로 우리의 믿음을 굳게 하기 위하심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표징과 이적”을 보고도 믿지 않는 일이 없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오늘 나 자신의 살아있음이 바로 하나의 “표징”입니다.
곧 나 자신이 죽었다가 살아난 당신의 “표징”입니다. 아멘.
주님!
믿음과 사랑의 표징으로 살게 하소서. 보고도 믿지 못하는 불신을 몰아내소서.
사랑받고도 사랑하지 못하는 완고함을 몰아내소서.
제 삶이 믿음과 사랑의 표징이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고는 믿지 않을 것이다.”(요한 4,48)
주님,
믿음이 부족하오니, 도와주십시오.
믿음 없이 청하기만 하고 돌아서는 일이 없게 하소서.
의혹하고 믿지 못하는 병든 마음을 치유하소서.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소중하게 여기시는 당신을 믿습니다. 아멘.

믿음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적이 있는 갈릴래아 카나로 다시 가셨다.
거기에 왕실 관리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카파르나움에서
앓아누워 있었다. 그는 예수님께서 유다를 떠나 갈릴래아에 오셨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와, 자기 아들이 죽게 되었으니 카파르나움으로 내려가시어
아들을 고쳐 주십사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그 왕실 관리는 예수님께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요한 4,46-50).”
이 이야기에서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여러 가지로 해석됩니다.
1) 왕실 관리는 예수님을 안 믿으면서도,
예수님의 기적에 관한 소문만 듣고서 찾아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 상황이라면 예수님 말씀은,
“너는 믿음도 없이 왜 나를 찾아왔느냐?”로 해석됩니다.
2) 왕실 관리는 마르코복음 9장에 나오는 아이 아버지처럼 예수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은 있었지만 예수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채로
“하실 수 있으면”(마르 9,22) 아들을 고쳐 달라고 부탁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 말씀은, “표징과 이적을 보기 전이라도, 먼저 믿어라.” 라는
가르침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3) 왕실 관리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은 것은 아닌데,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으로는 믿었고, 그래서 예수님께 간청하면
아들을 고쳐 주실 것이라고 기대하고 찾아왔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 말씀은, “너는 표징과 이적이 없어도 믿는 믿음을 가져라.”
(“표징이나 이적과는 상관없이 나를 믿어라.”) 라는
권고 말씀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어떻든 그 왕실 관리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상태로, 그러나 아들을 고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왕실 관리의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지적하신 것은
그의 아들을 고쳐 주실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고,
또 그를 올바른 믿음으로 인도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표징과 이적을 보아야만 믿는 믿음’과
‘그런 것을 보지 않아도 믿는 믿음’은 어떻게 다른가?
두 믿음의 차이는 무엇인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1) ‘표징과 이적을 보아야만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기가 바라는 대로 기적이 일어나야 한다고 고집부리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고집부리는 사람은,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관심 갖지 않고, ‘내가 지금’ 바라고 있는 것에 대해서만 생각합니다.
2)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아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기가 바라는 대로 기적이 일어나지 않아도,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드리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순종하는 사람은, 자기의 사정을 주님께 말씀드리는 것으로 그치고,
그 일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는 주님께 맡겨드립니다.
왕실 관리의 입장에서는 예수님 말씀이 ‘거절’하는 말씀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또다시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아들의 병을 고치고 싶다는 간절함 때문입니다.
그 모습은 어떤 가나안 여자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태 15,27).”
(이 말은, “저의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지 마시고,
저를 가엾게 여기셔서 은총의 부스러기라도 주십시오.” 라는 간청입니다.)
아마도 왕실 관리도 그런 간절한 심정으로 예수님께 매달렸을 것입니다.
또는 예수님의 말씀과 왕실 관리의 말 사이에
좀 더 긴 대화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마르코복음 9장에 나오는 아이 아버지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마르 9,24).”
왕실 관리도 비슷한 말을 했을 것입니다.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아도 믿는 믿음을 갖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제가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치유의 은총’뿐만 아니라 ‘믿음의 은총’도 베풀어주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은총을 받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믿음 자체가 은총입니다.)
왕실 관리가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라는 예수님 말씀을 믿고 떠나간 것은,
그의 믿음이 올바른 믿음으로 발전하고 성숙해졌음을 나타냅니다.
(표징과 이적이 없어도, 말씀만 듣고도 믿는 단계로 발전한 것입니다.)
그가 아들의 병이 고쳐진 것을 알게 된 다음에 믿게 되었다는 말은(53절),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확신을 갖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아마도 그는 가족들과 집안사람들에게 자신의 믿음을 증언했을 것입니다.
온 집안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그의 증언을 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 ‘카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를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요한 2,11).”
제자들은 예수님을 안 믿고 있다가 기적을 목격한 다음에야
믿게 된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제자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믿게 되었다.’ 라는 말은,
“자신들의 믿음에 대해서 확신을 갖게 되었다.”로 해석됩니다.
표징은 믿음을 갖게 만들어 주는 일이 아니라,
믿음을 확인해 주는 일입니다(마르 16,20).>
살다보면 예수님께 무엇인가를 간절하게 청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에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바치면서도,
믿음도 없이 기도를 하는 사람도 있고(“기도한다고 무슨 효과가 있을까?” 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하면서 기도하는 사람도 있고),
자기가 바라는 대로만 해 달라고 떼를 쓰듯이 기도를 했다가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면 실망해서 신앙생활을 중단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절박한 사정을 말씀드리는 기도를 하는 것 자체는 필요한 일이고,
신앙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고,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기도할 때에는 “주님께서는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좋은 때에 주신다.”는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 믿음이 있다면, 바라는 것과는 다른 결과가 생기더라도 실망하지 않을 것이고,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카파르나움 고관의 아들 치유
-조욱현신부-
복음: 요한 4,43-54: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예수께서 갈릴래아의 카나에 가셨을 때, 카파르나움의 왕실 관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죽어 가는 자기 아들을 살려달라고 청한다. 카파르나움은 카나에서 80리 정도 되는 먼 거리였다. 예수님은 애원하는 그에게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50절) 하고 말씀하셨다. 그 고관은 그 말을 믿고 집으로 돌아갔고 가는 길에 자기 종들을 만났고, 아들이 완쾌되었다는 말을 듣고, 온 집안이 믿음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먼 길을 찾아와 예수님께 은혜를 입은 이 고관의 자세를 살펴보자.
우선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고관이 일개 목수에 지나지 않는 예수님께 오기 위해서 먼 거리를 고생하며 찾아왔고 예수님께 간청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믿음의 표시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48절)라고 하시면서 왕실관리를 가르치신다. 사실 그는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49절)하고 했다. 아직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몰랐기 때문에 아이가 죽으면 예수님도 되살릴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기적들은 무엇보다 영혼을 위한 것임을 알려주시기 위해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아들만이 아니라, 마음이 병든 아버지도 치유해 주시는 것이고, 우리가 당신의 기적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 때문에 당신께 귀 기울이도록 만드시려는 것이다. 기적은 믿는 이들이 아니라, 믿지 않는 이들과 믿음에 관해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이는 기적을 기다리지 말라는 것이다. 언제나 하느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라는 말씀이다.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50절) 왕실 관리는 예수님께서 함께 가셔야 아들이 나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예수님께서는 생각이 모자라는 이 관리를 도와주신다. 예수님은 관리에게 “가거라.”는 말씀으로 왕실 관리의 믿음을 알아주셨고,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는 말씀으로 당신의 사랑과 권위로 그의 소망을 이루어주시고 계시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50절) 여기서 믿었다는 것은 완전한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덕분에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를 의미한다. 그는 처음부터 불완전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왔다.
그가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그의 종들이 마주 와서 아이가 살아났다고 알려주었다. 그는 예수님께 돌아가 감사를 드리는 대신 아이가 나아지기 시작한 시각부터 물어보았다. 그 시각이 예수님께서 아이가 나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라는 것을 알고 나서야 “그와 온 가족들이 믿게 되었다.”(53절)고 한다.
예수님의 명령 한 마디에 두 사람이 치유를 받았다. 왕실 관리에게는 뜻밖의 믿음이 생겼고, 아이는 육체적 죽음에서 구원을 받았다. 우리도 지난날을 통하여 하느님께 받은 은혜는 어떤 것이었으며, 그것을 어떻게 보답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예수님을 나의 삶 속에서 어느 위치에 모시고 살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요한 4, 50)
-한상우신부-
가혹한
시간속에서도
봄꽃은 피어납니다.
조금씩
약해져 가는
우리 믿음을
성찰케하는
봄꽃의 뜨거운
시간입니다.
사순시기는
생명을 위해
뜨겁게 기도하는
믿음의 시간입니다.
생명의 역사는
이와같이 믿음이
만들어가는
믿음의
역사입니다.
믿음은 생명의
떨림을 결코
외면하지
않습니다.
생명의 소리에
귀기울여 듣는
것입니다.
모든 목숨이
소중합니다.
믿음의 가치는
생명의 가치입니다.
믿음은 지나가는
표징과 이적의
집착이 아니라
생명에 대한
존중입니다.
표징과 이적을
뛰어넘는 생명의
눈부신 나날들이
바로 신비입니다.
사람을 살리시는
믿음안에 우리의
생명이 있습니다.
생명이 있기에
믿음이 있고
믿음이 있기에
생명이
있는 까닭입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믿음의 참모습을
뜨겁게 드러내는
생명의 참된
시간이길
기도드립니다.
살리시는
믿음안에서
버려야 할 것이
교만임을
깨닫습니다.
믿음안에서
봄꽃이 길을
일깨워줍니다.
생명이신 주님과
함께하는 은총이
바로 이시간임을
믿습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 안에서도 우리는 '새 창조의 기적'을 만납니다.
"보라, 내가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이사65,17).
기쁨에 찬 주님의 음성이 제1독서의 첫머리에서 울려퍼집니다. 즐거움이 가득하면서도, 반드시 그리 되리라는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단호함과 확고함이 느껴집니다. 혹독한 유배가 끝난 뒤 새롭게 예루살렘을 재건하고 민족적 정체성을 복원해야 하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큰 희망이 되는 말씀이지요.
"기쁨, 즐거움, 집, 포도밭, 열매"
이어지는 독서의 대목에서 그 희망을 구체화한 말씀들이 반복되어 나옵니다. 당신 백성에게 새 터전을 허락하시고 자리잡도록 보살피시는 주님께서 오히려 백성보다 더 설레고 행복해 하신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에서 한 사람의 믿음이 어떻게 새 창조와 이어지는지를 봅니다.
"예수님을 찾아와, 자기 아들이 죽게 되었으니 카파르나움으로 내려가시어 아들을 고쳐 주십사고 청하였다"(요한 4,47).
죽어가는 아이의 아버지인 왕실 관리가 예수님께 동행을 청합니다. 그는 여느 의사나 주술사처럼 예수님께서도 직접 환자를 보셔야 고쳐 주실 수 있으리라 여기는 것 같습니다. 소문으로만 듣던 예수님께 신분과 체면을 뒤로 하고 아들의 치유를 간청하는 그에게 아직 믿음이랄 것은 없지만, 절박함에서 우러난 진정성은 가득합니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요한 4,48).
예수님의 답변이 좀 생경하게 느껴집니다. 앓는 이를 향하는 그분의 연민을 볼 때 당장 아이 아버지에게 위로와 희망의 말씀을 건네실 것 같은데 다짜고짜 "믿음"이라는 주제를 던지십니다. 이 말씀에는, 너에게 믿음이 먼저인지 기적이 먼저인지 선후 관계를 결단하라는 촉구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도"(요한 4,49)
하지만 왕실 관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예수님께 같이 가달라고 청합니다. 이 "그래도"에는 병자와 약자를 소중히 하시는 예수님 인격에 대한 신뢰가 담겨 있습니다. 아직 완전히 꼴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그의 믿음이 잠재적 상태에는 이른 것 같습니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요한 4,50).
예수님은 재차 간청하는 그의 태도를 귀찮아하지도, 무례히 여기지도 않으시고, 선선히 그가 바라는 것 이상의 답을 주십니다. 아이의 치유를 '같이 내려가'는 과정 없이 당장 이루어 주신 것이지요. 같이 내려가 달라는 그의 청원이 인간적 차원이었다면 "살아날 것"이라는 예수님 확언은 신비적 차원입니다.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요한 4,50).
예수님 인격에 대한 신뢰는 그분이 하신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발돋움합니다. 그는 자기 생각을 내려놓고, 물리적 현존 없이도 말씀만으로, 살리고자 하는 의지 만으로 기적을 이루어 주실 예수님을 굳게 믿습니다.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다"(요한 4,53).
아이 때문에 예수님을 찾으면서 시작된 믿음의 첫걸음이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자라나 결국 진정한 믿음으로 거듭났습니다. 왕실 관리는 아이의 생명과 함께 믿음까지 얻었으니 주님은 절박했던 그의 고통을 몇 배의 상급으로 갚아주신 것입니다.
여러 기적 사화에서 드러나듯 예수님은 곧잘 치유와 구원의 원동력을 당사자의 믿음으로 규정하시지요. 믿음을 지닌 이에게는 일어나는 모든 일이 기적이고 구원인 반면, 믿지 않는 이에게는 아무리 큰 기적도 제 구원과 하등 관계없는 우연일 뿐입니다. 오늘 복음 대목에서 일어난 치유 사건도 물론 놀라운 기적이지만, 아이 아버지와 온 집안이 얻은 "믿음"야말로 새 창조의 절정이 아닐까 합니다.
"그래도"
오늘 저는 이 짧은 말씀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아이를 위해서라면 자존심도 내려놓고, 포기하기를 포기한 아버지의 간절함이 그 안에 다 담겨 있으니까요. 우리 하느님 아버지는 부족한 우리를 품으시느라 얼마나 무수히 "그래도"를 되뇌이시며 재차, 삼차, 수차례 호소하고 달래고 침묵하고 또 눈감아 주시는지요.
사랑하는 벗님! 죄인인 우리에게 일어날 새 창조는 아버지의 무한한 "그래도"가 낳은 열매일 것입니다. 이 "그래도"가 우리 믿음에 물을 주고 구원을 견인해 오늘에 이르렀지요. 한달 여 계속되고 그 끝이 언제일지 가늠하기 힘든 이 혼란의 시기, 우리의 "그래도"의 믿음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진정한 새 창조는 이렇듯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니, 말씀과 함께 깊이 깊이 내면으로 들어가는 오늘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저는 오로지 주님만 믿나이다. 가련한 저를 굽어보시니 당신 자애로 저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리이다"(입당송). 아멘.

지프라기가 아니라 주님을 잡아라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29276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희망과 믿음은 새의 양 날개와 같습니다. 새가 날기 위해 한 날개만 움직일 수 없는 것처럼, 희망과 믿음도 함께 움직이며 우리를 하느님 가까이 들어 높입니다. 따라서 청하는 것은 무서워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했다고 해서 주님께서 우리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좋아하신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자녀가 고통받는 것을 좋아하는 부모는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행복하기만을 바라십니다. 그러니 이것을 믿고 무엇이든 청하십시오. 믿으면 청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청하는 것을 들어주시는 것을 보면 더 믿을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더 바라면 더 믿게 되고, 더 믿으면 더 바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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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오늘 저는 이 짧은 말씀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아이를 위해서라면 자존심도 내려놓고, 포기하기를 포기한 아버지의 간절함이 그 안에 다 담겨 있으니까요. 우리 하느님 아버지는 부족한 우리를 품으시느라 얼마나 무수히 "그래도"를 되뇌이시며 재차, 삼차, 수차례 호소하고 달래고 침묵하고 또 눈감아 주시는지요.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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