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22일 사순 제4주일
보는 사람과 못 보는 사람을 가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눈멀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9,1-41)
“I came into this world for judgment,
so that those who do not see might see,
and those who do see might become blin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2020년 3월 22일 주일 사순 제4주일 매일미사_조규만 바실리오 주교 집전
[다미안 신부 in Boston] 사순 제 4주일 미사
https://www.youtube.com/watch?v=cmRhSlHeFRQ
오늘의 묵상
질병에 대한 유다인들의 생각은 지금과 달랐습니다. 그들은 병이 죄의 결과라고 생각하였고, 병의 정도가 심할수록 죄가 크다고 여겼습니다. 그럼 오늘 복음처럼 태어나면서부터 눈이 먼 사람은 어떤 죄를 지었을까요? 이런 궁금증과 함께 복음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눈이 먼 사람을 예수님께서 보게 해 주십니다. 요한 복음의 표현으로 하면 표징이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표현으로는 기적입니다. 모든 복음서가 그렇듯이 예수님께서 병자를 치유해 주신 기적 이야기는 길지 않습니다. 그러나 표징이 일어난 이후에 벌어지는 일들이 관심을 모읍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표징 곧 기적을 일으키셨다는 것을 애써 부인합니다. 눈이 멀었던 사람의 부모를 불러 그가 정말 태어날 때부터 보지 못하였는지 묻고 본인에게도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묻습니다. 이 모든 일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그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과 함께 눈을 뜨게 된 사람과 바리사이들을 대조적으로 보여 줍니다.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던 이는 표징을 체험하고 자신을 낫게 하신 분이 누구신지 알아 갑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일어난 모든 일에 완고하게 처신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에 대하여 관심이 없고,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다는 것에만 집착합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눈먼 사람은 눈을 뜨고 예수님을 찾지만, 바리사이들은 눈먼 사람처럼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실상 하느님의 일을 보지 못하고 눈이 먼 사람은 바리사이들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믿음의 빗
-키뎃주교-
어리석음의 어둠:
책을 읽어도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기에 어리석음의 어둠 속에 갇혀 버립니다. 지혜의 눈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석양과 밤하늘, 새벽의 여명을 보면서 깊은 감상에 젖고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저 매일 보는 석양이고 밤하늘일 뿐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합니다. 화가와 같은 아름다움을 보는 눈이 없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깊은 숲 속 나무 가지에서 지저귀는 작은 새의 소리에도 영감을 얻어 시를 씁니다. 그러나 우리는 숲과 나무를 보고 새를 보지만 아무런 감흥을 얻지 못합니다. 시인과 같은 섬세한 눈과 귀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어둠:
어둠 속 깊은 곳에는 믿음과 영적인 삶이 있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주님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뜰 수 있고 신성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다면 빛이신 주님께서 내 안에 계셔도 그 빛을 볼 수 없습니다. 믿음은 보지 못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보고 믿을 수 있도록 어둠을 밝혀주는 빛입니다. 믿음은 어리석은 사람들을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빛이지만 누구나 볼 수 있게 환하게 비추지는 않습니다.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길 수 있을 만큼만 밝혀 주시기 때문에 어둡고 넓은 광활한 하늘에서 주님의 빛을 찾으려면 주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있어야만 합니다.
믿음은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눈 먼 사람은 연못에 눈을 씻으면 정말 볼 수 있을 지 알 수 없었지만 주님을 믿고 실로암 못으로 갔습니다. 주님을 믿었기에 말을 듣자 마자 즉시 실로암으로 떠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올바른 믿음의 자세입니다.
믿음의 길은 쉽지 않습니다. 그 길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힘겨운 고난의 여정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고난은 경험하면 할수록 더 많은 것을 깨닫게 되어 확고한 선택을 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됩니다. 그러므로 확고한 믿음을 갖기 위해 눈 먼 청년의 믿음의 길을 되새겨 봐야 할 것입니다.
주님을 믿은 청년은 주저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눈에 발라준 진흙을 씻기 위해 실로암 못으로 갔고 앞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후 그는 변화한 자신을 대하는 여러 사람들을 통해 예수님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됩니다. 가장 먼저 태어날 때부터 장님이었던 그가 눈을 떴는데도 그 사실을 믿지 않는 군중에게 그는 외쳤습니다.
“내가 바로 성문 앞에서 구걸하던 눈 먼 바로 그 사람입니다.”
다음은 가족들의 외면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눈 먼 아들이 눈을 뜨고 믿음도 갖게 되었지만 부모는 군중들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이 아이가 우리 아들이라는 것과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다는 것은 우리가 압니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게 되었는지는 모릅니다. 누가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었는지도 우리는 모릅니다. 그에게 물어보십시오. 나이를 먹었으니 제 일은 스스로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하면 회당에서 내쫓기는 것이 두려워 아들을 외면했습니다. 이제 막 환한 세상을 보게 된 청년에게 이보다 더 슬픈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주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그 고독한 믿음의 길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에게 가장 큰 고난은 종교적인 시련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청년을 비방하였고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어겼다’고 고발하고 그를 회당에서 쫓아냈습니다. 유다인들에게 회당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가장 치욕스러운 형벌이었습니다. 가족으로부터 외면당하고 회당에서 쫓겨난 그는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려움 속에서 그는 주님에 대한 믿음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기로 하였습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마치 그의 확고한 믿음을 지지하듯이 주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주님 당신이 바로 구세주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드러내어 보여 주시자 그는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경배를 드립니다.
이처럼 믿음은 고난과 함께 오는 은총입니다. 고난이 많을수록 믿음도 깊어집니다. 그 청년은 예수님을 많은 사람들 중 한 분이라고 생각하였기에 사람들이 물을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라고 하는 분이 제 눈에 진흙을 붙여 주셨습니다.”
그 후 바리사이가 "그가 당신 눈을 뜨게 해 주었는데,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오?”라는 물음에 예수님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대답하였습니다.
“그분은 예언자이십니다.”
그리고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체포 당하는 고난을 통해 “그 분은 하느님으로 부터 오신 분”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것을 깨닫게 하였습니다.
믿음은 등잔불과도 같습니다. 뜨겁게 달아오르는 고통을 참으면 참을수록 빛은 더욱 더 밝게 더 멀리 비춥니다.
고난을 통해 믿음에 도달한 눈 먼 청년의 믿음의 길은 우리 모두가 따라야 하는 길입니다. 그는 믿음을 가로막는 모든 어두움을 극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기에 세상을 보는 눈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영적인 눈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에 대한 것을 깨닫기 시작했고, 확고한 믿음을 얻었습니다. 그는 어두움을 벗어나 빛의 근원이신 주님을 만나는 은총으로 믿음의 빛이 충만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믿음을 위협하는 의심과 증오, 자만, 잔인함과 욕망의 어두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요?
사순절은 믿음의 램프가 영원히 빛날 수 있도록, 기름을 붓는 좋은 기회입니다. 그 기름은 금식과 참회를 하며 서로 화해하고 가난한 이웃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닥친 어려움과 어둠을 극복하고 영원한 빛이신 하느님께 다가가는 믿음의 여정을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아멘

1. 믿음에 대한 어떤 시련을 경험하였습니까?
2. 시간이 지날수록 주님에 대한 확신이 깊어 가고 있습니까?
3. 고난 중에 주님께서는 어떤 모습으로 당신을 드러내 주셨습니까?

고통속에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
-임상만 신부-
오늘 복음을 보면,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눈먼 사람을 예수님께서 고쳐주시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자기 탓이나 부모의 탓이 아님에도 날 때부터 눈이 안 보이는 고통을 당했다. 무릇 성경에는 이런 시련과 고통을 당하는 이유가 세 가지로 나온다. 첫째로, 자기가 지은 죄로 인한 대가이다. 예수님께서 벳자타 못 가에 있던 병자를 고쳐주시며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요한 5,14)고 당부하시는 말씀을 들어 알 수 있다. 둘째로, 믿음의 성장을 위한 시련과 고통이다. 욥기를 보면, 그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엄청난 고통을 당하며 신앙과 삶의 위기를 맞아 방황한다. 그러나 결국 자기의 고통은 하느님께서 자신을 단련시키기 위한 것임을 깨닫고 이를 기쁨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복음의 말씀처럼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드러나게 하려고 허락하신 시련과 고통이다.
길을 가던 중에 태중 소경을 발견한 제자들이 예수님께 태중 소경이 되는 이유에 대해 물으니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요한 9,3)라고 하신다. 기존 유다인들의 논리대로라면 지금 당하는 고통의 이유가 과거에 있으니 현재는 절망과 낙담만 남게 되지만, 예수님의 새로운 관점의 말씀으로 보면 우리가 겪는 고통 속에 분명한 하느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지금은 당장 어렵고 힘든 상황이더라도 하느님께서 나의 고통을 통해 역사하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희망을 가질 수 있고, 어떤 시련과 고통 중에도 주님 안에서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바쿡 예언자가 바빌로니아 침공으로 유다 왕국이 망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에서도 “무화과나무는 꽃을 피우지 못하고 포도나무에는 열매가 없을지라도… 우리에서는 양 떼가 없어지고 외양간에는 소 떼가 없을지라도, 나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내 구원의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리라”(하바 3,17-18)라고 노래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언제나 하느님께서 그 어려움과 고통의 순간 속에 일하시고 늘 함께 하심을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고통의 상황은 하느님께서 일하심이 드러나는 은총의 현장이라고 볼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이 과정을 통해서 우리를 변화시켜주시고 우리를 주님 앞에서 성숙한 그리스도인, 쓸모 있는 일꾼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원하는 결과로 드러나지 않았다고 해서 실망할 일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바오로 사도는 자기 몸의 가시로 받는 고통이 너무도 커서 이를 없애주시길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하다가 깨달았다.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12,9) 비록 자기를 고쳐달라는 기도의 응답을 받지는 못했지만, 주님을 더 의지하고 더 겸손하게 일하라는 주님의 음성으로 도리어 기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때때로 우리도 매번 당하는 시련과 고통이 이해가 안 될 때가 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온전히 주님을 믿고 의지하고 봉헌하는 삶을 살면 주님은 연약한 우리를 통해서 하느님의 일을 드러내신다. 어떠한 절망이나, 어떤 고통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먼저 주님 앞에 나서면 바로 그곳이 실로암 못이 된다. 그곳에서 주님의 생명수를 마시고 바르면 눈이 치유되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기적을 보게 될 것이다. 실로암은 예수님께서 그리하도록 ‘파견된 분’이란 뜻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
-임숙희-
빛이 없으면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어둠의 골짜기를 지나가며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 부활을 향해 순례 중입니다. 화답송 시편에서 하느님은 두려워하는 시인을 위로하시고 희망을 불어넣으십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서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시편 23,1-2)
■ 복음의 맥락
요한복음 9장 이야기 배경은 유다 축제 초막절입니다.(7-8장) 초막절은 이집트에서 해방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불기둥과 구름을 안내자로 삼아 가나안으로 행진한 것을 기념합니다. 이 시기에 많은 등불이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과 이스라엘 가정을 밝힙니다. 사람들은 환한 등불을 보면서 주님이 빛이자 안내자로서 광야를 통과하게 해 주신 것을 기억합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가르치며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라고 말씀하십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지금 이 자리에, 교회와 성사 안에 이미 ‘세상의 빛’으로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 나는 세상의 빛이다
예수님은 성전 밖을 ‘지나가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십니다. 이름 없이 ‘그 사람’으로 자주 소개되는데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이 눈먼 이가 먼저 예수님 시선을 받고 그분이 세상의 빛으로서 ‘하느님의 일’을 하게 하는 귀한 도구로 선택됩니다. 성경에서 하느님이 인간의 눈으로 적합하게 보이지 않는 이, 작은 이를 선택하신다는 것을 자주 보게 됩니다. 제1독서에 나오는 다윗의 부르심 이야기도 선택에 대한 구약 신학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 복음과 연결됩니다.
예수님이 눈먼 이를 치유한 방식이 흥미롭습니다. 예수님은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눈먼 이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명령합니다. ‘침’은 유동적이면서도 내밀한 것으로 예수님의 침은 높은 곳에서 태어나게 하는 성령을 가리킵니다. 진흙을 개는 행위는 흙으로 만들어진 인간 창조를 연상시키는데(창세 2,7) 여기에서는 새 인간창조와 연결됩니다. 이 행위가 눈을 뜨게 하고 보게 한다는 것이 본문에서 반복되는데 바리사이들에게는 안식일을 위반한 죄지만 눈먼 이와 예수님에게는 안식일의 궁극적 목적, 곧 새로운 창조입니다.
왜 요한이 실로암의 뜻을 히브리어로 ‘파견된 이’라고 번역할까요? 눈먼 이가 치유된 것은 실로암 물 때문이 아니라 ‘파견된 이’, 곧 예수님 말씀을 경청하고 순종했기 때문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요한 복음서에서 예수님을 가리키는 중요한 칭호는 아버지가 파견하신 아들입니다. 예수님 생애 전체는 그분을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 말씀을 경청하고 아버지께 순종하는 아들의 삶이었습니다. 눈을 뜨게 된 사람은 환상과 상상, 막연한 두려움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이제 자기 눈으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판단하게 됩니다. 그는 자신을 어둠에서 빛으로 구해낸 분의 이름을 ‘예수님’(‘주님이 구원하신다’)이라고 부릅니다.
■ 그분은 예언자이십니다
이웃과 지인들이 바리사이들에게 그 사람을 데려갑니다. 바리사이들은 질문합니다. “그가 당신 눈을 뜨게 해주었는데,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오?”(요한 9,17) 눈먼 이로 태어나 율법을 읽을 수도 없고 생존을 위해 길바닥에서 구걸하며 평생 살아 온 사람이 예수님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자기 ‘체험’, 일어난 사실 뿐입니다. 박해하는 바리사이들이 한 질문은 역설적으로 그에게 ‘나를 치유한 분이 정말 나에게 누구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어둠과 위기의 순간에 예수님에 대한 지식과 사랑이 서서히 깊어집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는 확신도 자랍니다. 그 사람은 마침내 ‘예언자’라고 대답합니다. 바리사이들이 생각하듯 안식일을 어긴 죄인이 아니라 예언자, 하느님을 대신해서 말하고 행동하는 분, 하느님 말씀의 참된 의미를 전달하는 분임을 증언합니다. 그는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에페 5,8)으로서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을 빛으로 데려가는 여정을 걷게 될 것입니다.
유다 지도자들은 그가 보게 됐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기 시작합니다.(요한 9,18) 그들의 태도는 우리 모두가 겪는 유혹을 직시하게 합니다. “우리 각자는 자기 시야의 한계를 세상의 경계와 혼동합니다.”(철학자 쇼펜하우어, 1788-1865) 명확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부정하는 자세는 조롱, 완고함, 무관심, 자기 확신에 대한 맹신, 때로는 오만한 침묵으로 이어집니다. 이 모든 것의 뿌리는 자신을 우상으로 삼는 ‘자기 경배’입니다.
바리사이들은 부모를 불러서라도 예수님이 죄인이라는 자기들 생각을 입증하고 싶지만 실패하자 그 사람을 다시 불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시오. 우리는 그자가 죄인임을 알고 있소”라고 윽박지릅니다. 예수님이 죄인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그들의 권위가 무너질까봐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참으로 모순입니다. 율법에 무지한 사람에게 하느님의 영광을 강요하는 그들이야말로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요한 5,44)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위선적인 태도는 이 한 마디에 요약됩니다. “당신들은 듣지 않는 사람들이군요!”
■ 주님, 저는 믿습니다
자기 체험과 판단에 바탕을 두고 예수님을 용기 있게 증언한 사람은 그 대가로 회당에서 쫓겨나고 박해당하는 스승의 여정을 그대로 따르는 제자가 됩니다. 그는 예수님을 다시 만나 “주님, 저는 믿습니다”(요한 9,38)라고 고백하고 경배합니다. 그 사람의 단계적인 신앙 여정이 절정에 달하는 순간입니다. 신앙이란? 자신이 체험한 분, 자신이 말하고 있는 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보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9장 이야기는 우리에게 진정한 신앙이란 무엇인지 가르치는 표징입니다. 주님, 오늘 이 시간에도 제 영을 눈멀게 하는 온갖 종류의 어둠과 유혹에서 저를 해방시켜 주십시오. 오늘 저에게도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라고 명령하십시오. 아멘.

뒤통수 맞는 체험
김상우신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뒤통수 맞는 체험’을 하게 됩니 다.
나의 신념과 정의에만 눈이 멀어 있을 때 그런 체험을 합니다.
하느님은 나의 신념과 정의를 지지해주셔야 할 의무에 매여 계신 분이 결코 아닙니다.
또한, 내가 만든 하느 님 모습 속에 갇혀 있을 때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체험하 기 어려워집니다.
그러므로 신앙 안에서 ‘뒤통수 맞는 체험’ 은 소중하게 다가옵니다.
제1독서에는 하느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임금을 뽑으시 는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하느님의 선택은 사람들의 기준 과 다르기에 겉모습만을 기준으로 삼지 않으십니다.
하느 님께서는 일곱형들이 아닌 ‘볼이 불그레하고 눈매가 아름 다운 잘생긴 아이’(1사무 16,12), 막내 다윗을 선택하십니다.
이렇듯 하느님의 기준은 세상의 기준과는 다릅니다.
한편 제2독서 에페소서의 저자는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에페 5,8)라고 권고합니다.
아울러 “무엇이 주님 마음에 드 는 것인지 가려내십시오”(에페 5,10)라고 덧붙입니다.
어둠이 자리 잡은 세상에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따라 하느님의 자녀답게 빛을 향해 걸으라는 초대이며 격려입니다.
빛이 신 하느님의 기준은 세상의 기준을 뛰어넘어 다른 길을 열 어주십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눈먼 사람이 안식일에 치유 된 이야기를 듣습니다.
당시 유다교 전통에 따르면 질병과 장애는 죄의 결과라는 신학이 퍼져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 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요한 9,3)라고 하십니다.
반면 바리 사이들은 눈먼 이를 위한 치유가 안식일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에만 관심을 둡니다.
안식일 노동금지 계명(탈출 20,10; 31,14.15;35,2; 레위 23,3; 신명 5,14)에 따라 바리사이들은 눈먼 이 가 눈을 뜨게 된 사실을 함께 기뻐하기보다 율법을 어겼다 는 사실만 중요하게 여깁니다.
마침내 그들을 향해 예수 님께서는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 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요 한 9,39)라고 이르십니다.
심지어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 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 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41)라고 일침을 놓으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기준과 바 리사이들로 표상된 인간들의 기준이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순 제4주일 성경 말은 신앙의 여정에서 ‘뒤통수 맞 는 체험’에 관하여 묵상하도록 이끕니다.
내 신념과 나만의 정의, 내가 빚어놓은 하느님 모습을 깨뜨릴 수 있는, 즉 ‘뒤 통수 맞는 체험’을 감내할 수 있는 용기와 겸손이 있을 때 하느님 사랑과 자비의 빛이 우리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 도의 광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아멘.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나경일신부-
예수님께서는 오늘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만나시고 그를 고쳐주십니다. 앞을 볼 수 없는 이들 중에는 후천적으로 시력을 잃은 이들도 있지만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람처럼 태어나서 한 번도 세상을 두 눈으로 본 적이 없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런 태생 소경들에게 눈을 뜨고 세상을 보고 가족과 지 인들의 얼굴을 바라보고 찬란한 햇살과 대지에 낮게 깔린 아침 안개를 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지 비장애 인의 입장에서는 그저 짐작해보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로 엄청난 사건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날, 태어나서 처음으로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본 태생 소경은 그 놀 라운 일을 마음껏 누리면서 기뻐하며 감사할 틈도 없이 상상하지 못했던 갈등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듭니 다. 마치 그가 눈을 뜬 것이 무슨 큰 죄를 저지른 것 마냥 혼란스럽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왜 하필이면 안식 일에 눈을 떴냐고 따지며, 또 그렇게 해준 이가 누구인지 캐묻습니다. 안식일에 그런 일을 했으니 그 사람 은 분명 죄인인데 당신이 생각해도 그렇지 않으냐고 예수님을 고발하는 답변을 강요합니다. 소경의 부모에 게는 이 사람이 정말 태생 소경이 맞느냐며 억지스러운 팩트체크를 해보기도 합니다.
바리사이들의 공격과 몸을 사리기 급급한 부모의 외면, 그 한가운데서 태어나 처음으로 뜬 눈으로 바라 본 세상은 결코 아름답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혼란과 두려움 속에서도 꿋꿋한 자세로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증언합니다. 바리사이들의 공격에 맞서 그저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 하면서 스스로 증언하던 중에 그는 또 깨달아갑니다. “그분이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으셨으면 아무것도 하 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얼굴도 모르는 그분이 누구신지 알고 싶고 만나 뵙고 싶은 마음이 간 절해졌고 이윽고 예수님을 만나 “주님, 저는 믿습니다.”하며 예수님께 경배합니다. 비로소 세상에서 눈에 보 이는 수많은 것들 중에서 꼭 알아봐야 할 것을 알아보는 진정한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그저 육체적인 눈만 아니라 주님을 알아보고 믿는 영적인 눈을 뜨게 된 소경과 특정한 목적 때문에 눈앞 의 엄연한 현실조차 부정하며 외면해버리는 바리사이들 사이에서 드러나는 이 극명한 대비를 신앙인들은 언제나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 모든 이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살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알면서도 그러려니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눈 뜬 장님이 되는 지름길입니다.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꼭 봐야 할 것을 볼 줄 아는 눈, 세상 모든 일들 안에서 주님의 현존을 발견할 줄 아는 영적인 눈을 뜨게 해주시기를 주님께 간절히 기도합시다

그때 그 사람
-김현준 신부-
주보 편집 담당자로부터 주일 강론 집필을 처음 의뢰받은 것은 작년 가을 사제연수 때였다. ‘춘천 주 보’의 주일 강론은 교구 신부들이 서품 순서대로 쓰고 있다. 2020년 1월 19일(주일) 두 번째 알림을 받았다. “신부님, 주보 강론 사순 제4주일 마감일이 2월 28일(금)입니다.” “아직 한 달이나 남았는데….” 중얼거렸다. 뒤로 미루자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눈은 사순 제4주일 복음 말씀을 찾아보기 시작하였다. 소 제목을 3개나 가진,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고쳐주시다.’‘바리사이들이 개입하다.’‘참으로 눈이 먼 사람’의 요한 9,1-41이었다. 왜 그랬을까? 요한 9장을 읽으면서 ‘그때 그 사람-심수봉’이란 노래가 흥얼 거려졌다. 강론 제목은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 그때 그 사람’으로 정하였다.
못에 가면 생각나는 그 사람 / 앉아서 구걸하던 그 사람 눈이 먼 괴로움을 몰래 감추고 / 주님 만나 눈 뜨길 바라던 그 사람 실로암 못 가에서 내게 물었지 / 세상에서 제일 기쁜 게 뭐냐고 주님 만나 눈을 뜬 것이라며 / 고개를 숙이던 그때 그 사람 로-또 당첨보다 주님을 만나서 / 제자가 된 것이라며 고백한 사람 안녕이란 단 한마디 말도 없이 / 지금은 어디에서 행복할까 어쩌다 한 번쯤은 만날 수 있을까 / 오늘도 보고 싶은 그 사람 눈멀고 오그라든 바리사이들에게 / 당당하게“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실로암 못에 가서 씻고 / 다시금 앞을 보게 되었습니다. “주~님, 저~는 믿습니다.”/
오늘도 만나보고 싶은 그 사람 2월 20일(목) 세 번째로 일깨워주는 문자를 받았다. 강론 내용은 조금씩 다듬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바 깥 상황은 매우 긴박하였다. ‘
코로나19’로 한국 천주교 역사상 236년 만에 주일미사 중단 상황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중국, 우한 ‘코로나’ 발생 (2019년 12월 말) / 한국, 첫 확진자 (2020. 1. 20.) 신천지 대구 교회에서 지역 감염 및 전국 확산 (2. 16. 주일) 대구대교구 미사 중단 (2. 19. 수) / 춘천에서 확진자 2명 (2. 20. 목) 춘천교구장 사목 조치 (2. 24. 월 ~ 3. 13. 금, 미사 중단), 담화문, 기도문 (2. 26. 수) ‘코로나19’감염병을 겪으면서 우리 사회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다.
좋은 모습도 좋지 않은 모습도 보인 다. 신천지 예수교의 민낯도 드러나고 있다. 우리 시대가 신앙, 신뢰, 신념이 없는 사회로, 좌절과 분노의 사회로, 우울증에 시달리거나 마약에 기대고 빠져드는 사회로 갈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든다. ‘실로암 못 가-오늘의 성당’에 가면 “주님, 저는 믿습니다.”라고 고개를 숙이며 고백하던 ‘그때 그 사람-오늘의 그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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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의 습관으로 이루어지는 나의 행동 양식을 기억하면서 보다 올바른 습관을 지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를 위해 한 번 더 보고 한 번 더 생각하는 습관이 생겨야 함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성모님을 비롯해서 많은 성인 성녀들은 이 방법을 습관처럼 간직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기준으로 한 번 더 생각했습니다. 우리 역시 이런 습관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주님을 따름에 있어서 자신의 영광보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은 어떤 영광을 쫓아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남자를 본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 사람이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이냐는 질문을 던집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이 세상 안에서 겪는 고통과 시련을 죄의 결과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일을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대답해주십니다. 그리고 한 처음에 창조하실 때 그러셨던 것처럼 흙을 이용하여 그의 눈을 열어주십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발생했습니다. 치유가 이루어진 날이 안식일이었던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남자의 고통이 없어진 것을 보지 않습니다. 이렇게 놀라운 기적을 이루신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는 것만을 물고 늘어질 뿐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의 판단은 하느님의 일을 절대로 볼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일을 행하신 예수님을 죄인이라고 단정합니다. 치유 받은 남자는 바리사이들의 물음에 사려 깊게 대답하는 동시에 담대하게 믿음을 고백합니다. 그러자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완전히 죄 중에 태어났으면서 우리를 가르치려고 드는 것이오?”
하느님의 일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여전히 치유 받은 남자를 죄인이라고 단정 짓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보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만을 주장하는 습관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바리사이의 모습이 바로 영적인 눈멂이었습니다. 우리도 영적으로 눈이 먼 것은 아니었을까요?
먼저 하느님의 일을 봐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한 번 더 보고 한 번 더 생각해야 합니다.


유명한 마시멜로 실험이 있습니다. 네 살 아이의 자제력 시험으로 널리 알려진 실험입니다. 작은 마시멜로를 하나씩 준 뒤에 15분간 받은 마시멜로를 먹지 않고 기다리면 마시멜로 2개를 얻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75%의 아이들이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하나뿐인 마시멜로를 먹어 치운 것입니다. 실험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자제력이 있는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가 성장한 후의 모습을 조사합니다. 그 결과 자제력 있는 아이가 커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실험도 있었습니다. 어떤 아이에게는 마시멜로를 보여줬고 어떤 아이에게는 보여주지 않은 것입니다. 시나리오는 똑같았습니다. 마시멜로를 보지 않은 아이는 평균 10분을 기다릴 수 있었고, 보았던 아이는 평균 6분을 기다렸습니다. 상황에 따라 자제력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결론을 볼 수 있었습니다.
상황을 어떻게 끌어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 뜻에 맞춰서 살아가는 삶을 원하는 우리입니다. 그렇다면 ‘죄’라는 상황에 빠지지 않도록 시작부터 끊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는 괜찮아’라며 악에게 자신의 영역을 내어주면 주님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믿을 마음이 생기지 않는 이유는 죽을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전삼용신부-
이탈리아 몬테팔코라는 동네에 가면 ‘십자가의 글라라’ 성녀가 모셔져 있습니다. 8백 년이 지났지만 신체가 썩지 않는 성녀로도 유명합니다. 성녀는 어렸을 때부터 수녀원에서 살아서 정결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신심이 강한 분이셨습니다. 어느 날 기도 중에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은 매우 슬픈 표정을 하고 계셨습니다. 성녀가 예수님께 왜 그리 슬퍼하시느냐고 물었더니 예수님은 “지금 시대에 내 십자가를 꽂을 굳은 땅이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너무 슬퍼진 성녀는 “예수님, 그러면 당신의 십자가를 제 심장에 꽂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당신의 십자가를 성녀의 심장에 꽂았습니다. 아마도 성녀는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가 심장에 불화살을 맞은 것처럼 큰 고통을 느꼈을 것입니다.
성녀가 20대 중반쯤 기도 중 탈혼 되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동료 수녀들은 성녀의 심장이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하였습니다. 분명 그런 일이 있고 나서의 수녀님의 변화가 그 수녀들에게도 믿음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수녀들이 글라라 수녀의 몸을 열었을 때 다른 사람들보다 두 배는 큰 심장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심장을 칼로 갈라봤더니 그 심장에서 예수님의 수난 도구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채찍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심장 살이 그런 모습으로 응고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글라라 성인은 수백 년 동안 매우 많은 사람에게 자신이 가진 믿음을 물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에게 옆 아씨시의 글라라 성녀를 더 많이 찾고 십자가의 글라라 성녀는 거의 잊혀가고 있습니다. 16세기까지 십자가의 글라라 성녀만큼 관심을 끌었던 성녀가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왠지 부담스러운 분이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과의 관계가 그분의 십자가의 칼로 자신의 심장을 찌르는 것이 된다는 것에 부담을 느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관계가 나를 죽이는 십자가로 연결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성당에서도 십자가 없는 예수님의 모습이 많이 보입니다. 십자가의 신심을 잃으면 참 예수님의 신심도 잃게 됩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만나면 우리에게 먼저 십자가를 질 수 있느냐고 물어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왜 태생 소경이 치유된 것을 보고도 유다 지도자들은 믿지 않고 그를 내쫓았던 것일까요? 그 이유는 가난합니다. 그들은 십자가를 거부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왜 가난하고 병들고 죄의 삶을 살아가고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더 쉽게 받아들였을까요? 그들은 삶이 지치고 힘들어 그런 삶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습니다. 반면 부자고 지식과 권력을 지닌 이들은 왜 예수님을 배척했을까요? 예수님을 받아들이면 변해야 함을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을 수 없다고 표징을 보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믿을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표징이 부족하다고 자기 합리화를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변하고 싶어 하는 이들은 아주 작은 표징에도 민감합니다. 마태오는 그저 “나를 따라라!”(마태 9,9)라고 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갑자기 모든 것을 집어던지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얼마나 세리로 살아가는 삶이 지겨웠으면 그렇게 쉽게 예수님을 믿을 수 있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유다 지도자들은 없던 눈이 생겨서 온 사람의 증언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만약 자신들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버리면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함을 직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눈을 뜬 태생 소경은 아무리 미소한 표징이라도 잡고 따라갔습니다. 누군가 진흙으로 자신의 눈에 바르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자 그렇게 하였습니다. 아마 예수님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하라고 시켰어도 그 사람은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손해 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죄를 짓고 사는 지금의 자신이 너무나도 지긋지긋하여 조금이라도 변화된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몫입니다. 탈출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그렇게 모세의 말을 듣지 않았을까요? 파라오로부터 탈출하고 싶은 마음이 적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파라오의 지배 아래에서 종살이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없다면 누구도 우리 자신에게서 탈출할 수 없습니다.
사랑받는 자 마카리우스 성인이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속에서 주님이 더없이 힘겹게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본 마카리우스는 주님께로 달려가서 십자가를 대신 져 드리겠노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주님은 그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걸어가실 따름이었습니다. 마카리우스는 또다시 주님께로 달려가 간청했습니다.
“주님, 제발 저에게 십자가를 넘기십시오.”
그러나 이번에도 주님은 그를 모른 체하시며 십자가를 양어깨로 무척 힘들게 걸쳐 매고 묵묵히 걷기만 하셨습니다. 마카리우스는 가슴이 아프고 당혹스러웠지만, 그래도 끈기 있게 주님 곁을 따라붙으며 십자가를 넘겨 달라고 다시 한번 애원했습니다. 그러자 이윽고 주님은 여전히 십자가를 양어깨에 둘러맨 채 발걸음을 멈추더니 마카리우스에게로 몸을 돌리셨습니다. 그러고는 마카리우스가 당신을 처음 목격했던 자리를 손으로 가리키며 다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이것은 내 십자가란다. 네가 조금 전에 내려놓은 네 십자가는 저기 있지 않으냐? 내 십자가를 져 주려고 하기 전에 네 십자가부터 져 나르려무나.”
사랑받는 자 마카리우스는 뒤로 돌아 주님이 가리키신 지점으로 달려가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그의 십자가가 모래 바닥에 나둥그러져 있었습니다. 그는 얼른 그 십자가를 걸머지고 주님이 기다리시는 곳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와 보니 놀랍게도 주님의 어깨에 걸려 있던 십자가가 없었습니다. 마카리우스가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주님의 십자가는 어디로 간 겁니까?”
주님은 빙긋이 웃으며 대꾸하셨습니다.
“아들아, 네가 사랑으로 네 십자가를 질 때는 내 십자가를 지는 것이나 진배없단다.”
변화는 이전의 자신을 십자가에 죽이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지금의 자신을 죽이기 싫다면 구원을 주는 믿음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실로암에 가서 눈을 씻으라고 하는 것부터 시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눈을 씻었는데 눈이 낫지 않았다면 사람들로부터 커다란 비웃음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존심을 버리고 실로암에서 눈을 씻는 행위는 이미 자신을 죽이는 십자가의 삶을 시작한 것입니다.
지금의 자신에게서 벗어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먼저 자기 자신이 십자가에 매달아야 할 만큼 자신을 힘들게 하는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자신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표징으로 보일 것이고 쉽게 믿음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자신을 버리기를 원치 않는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믿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십자가에 죽을 마음이 없다면 구원을 주는 믿음은 생겨날 수 없습니다. 믿지 못해서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믿으면 죽을 거 같아서 안 믿는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작년 8월에 미국으로 왔습니다. 저를 파견하신 주교님께서도 멀리 가는 저를 안쓰럽게 보셨습니다. 잘 지내다 오라고 하셨습니다. 동창 신부님들도 힘들지만 잘 지내고 오라고 했습니다.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신문사의 일이 힘들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있는 곳은 한국인이 많아서 언어로 인한 어려움도 별로 없습니다. 음식도 대부분 한국 음식으로 먹을 수 있습니다. 신문 홍보로 비행기를 자주 타지만 여행가는 기분으로 다니고 있습니다.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자리도 생각하나 바꾸면 꽃자리가 되기도 합니다. 신종코로나 바이러스가 전국적으로 퍼지면서 한국의 상황이 어려워졌습니다. 동창 신부님들도 어려운 상황 속에서 잘 견디고 있습니다. 힘들고 어렵지만 모든 일들이 잘 풀릴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돌아보면 언제나 시련과 아픔이 있었습니다. 절망과 고독이 있었습니다. 우주는 생성하고 소멸하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도 6번의 큰 시련이 있었습니다. 소행성이 충돌한 적도 있고, 엄청난 규모의 화산 폭발이 있었고, 빙하기가 있었고, 기근과 전염병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생명체가 사라지기도 했고, 인류도 아주 극소수만 살아남기도 했습니다. 토인비가 말했던 것처럼 시련과 도전이 있었기에 그에 따른 변화와 발전이 있었습니다. 구원의 역사인 성서도 이스라엘 백성의 시련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은 정처 없이 정든 땅을 떠나야 했습니다.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광야에서 40년간 방황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도착했지만 남과 북으로 갈라져야 했습니다. 아시리아, 바빌로니아의 침략으로 유배를 가야했습니다.
성모님은 가슴이 예리한 칼로 찔리듯 아플 거라는 예언을 들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보아야 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예수님을 보아야 했습니다. 돌아가신 예수님을 품에 안고 통곡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과 시련을 예고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당연히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거부했던 베드로 사도에게는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라고 야단치셨습니다. 사랑하는 제자에게 배반당하셨습니다. 가장 사랑했던 제자는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은 대부분 순교로서 신앙을 증거했습니다. 초대교회는 300년 동안 극심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화려한 교회는 모두 순교자들의 피와 땀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제가 태어나고 자란 대한민국의 역사도 찬란한 문화와 전통을 가지고 있지만 오랜 시련과 고통의 역사가 함께 했습니다. 냉혹한 제국주의의 칼날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일본으로부터 36년 동안 지배를 받았습니다. 독립운동을 하면서 많은 사람이 순국하였습니다. 해방의 기쁨도 잠깐이었습니다. 남과 북으로 나눠진 민족은 서로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눴습니다. 한국전쟁으로 우리는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습니다. 국토는 파괴되었습니다. 서로의 가슴에 적대감이 커졌습니다. 이념과 사상은 여전히 조국의 허리를 갈라놓고 있습니다. 남과 북의 통치자들은 이념과 사상으로 인권을 탄압했습니다. 남북 정상회담이 있었고, 긴장과 갈등의 골이 조금 적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이념과 사상은 넘기 힘든 벽이 되고 있습니다. 주변 강대국들과의 외교문제도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수고도 더 많이 하였고 옥살이도 더 많이 하였으며, 매질도 더 지독하게 당하였고 죽을 고비도 자주 넘겼습니다.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유다인들에게 다섯 차례나 맞았습니다. 그리고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 돌질을 당한 것이 한 번,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입니다. 밤낮 하루를 꼬박 깊은 바다에서 떠다니기도 하였습니다. 자주 여행하는 동안에 늘 강물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에게서 오는 위험, 이민족에게서 오는 위험, 고을에서 겪는 위험, 광야에서 겪는 위험, 바다에서 겪는 위험, 거짓 형제들 사이에서 겪는 위험이 뒤따랐습니다. 수고와 고생, 잦은 밤샘, 굶주림과 목마름, 잦은 결식, 추위와 헐벗음에 시달렸습니다. 그 밖의 것들은 제쳐 놓고서라도, 모든 교회에 대한 염려가 날마다 나를 짓누릅니다. 누가 약해지면 나도 약해지지 않겠습니까? 누가 다른 사람 때문에 죄를 지으면 나도 분개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자랑해야 한다면 나의 약함을 드러내는 것들을 자랑하렵니다.”
한국의 첫 번째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순교자들은 1984년 성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로부터 여의도 광장에서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한국교회에는 커다란 영광이었습니다. 그러나 103위 순교 성인들의 삶은 고난과 가시밭의 연속이었습니다. 눈물 없이는 차마 읽을 수 없는 순교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생의 마지막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에게 어머니 우술라를 잘 부탁한다고 편지를 보냈습니다. 순교의 칼을 받는 것은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평생 고생하신 어머니를 혼자 남겨두고 세상을 떠나야하는 인간적인 고뇌가 있었습니다. 236년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는 순교자들의 피와 땀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신앙의 자유는 신앙의 선조들은 단 하루만이라도 누리고 싶었던 신앙의 자유입니다.
오늘은 사순 제4 주일입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우리에게 용기와 위로를 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희망의 빛을 말하고 있습니다.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아. 그를 사랑하는 이들아, 모두 모여라. 슬퍼하던 이들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위로의 젖을 먹고 기뻐 뛰리라. 당신 이름 위하여 나를 바른길로 이끌어 주시네.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두려울 것 없나이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 저에게 위안이 되나이다.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로움과 진실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사막의 먼 길에 오아시스를 만나면 얼마나 감사하고 기쁘겠습니까? 오늘 성서 말씀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힘들어 하는 한국의 신앙인들에게, 또는 삶의 시련 앞에 힘들어하는 신앙인들에게 커다란 위로가 될 것입니다.
데레사 성녀의 기도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아무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
아무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지니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다 지나가는 것
오 오 하느님은 불변하시니
인내함이 다 이기느니라.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다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 하도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이 한 가지, 제가 눈이 멀었는데 이제는 보게 되었다는 것은 압니다.”

맑은 눈을 지니길 희망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자녀들의 바람을 들어 주십니다. 이시간 주님의 사랑에 눈 뜨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못 보는 사람을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눈멀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 스스로 눈이 잘 보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바로 잘 볼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오히려 눈이 가려서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육신의 눈은 멀쩡히 뜨고 있지만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야말로 눈뜬장님입니다. 그가 참으로 볼 수 있으려면 먼저 눈이 멀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9장을 보면 사울의 회심에 관한 이야기가 적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던 다르소사람 사울이 길을 떠나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비췄습니다. 사울은 땅에 엎어졌습니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는 소리를 들었고 사울은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자 그분께서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하셨습니다.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였는데 그동안 그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스스로 세상을 바로 본다고 자부하는 바리사이파 사람이었지만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뵙기위해서 먼저 그 눈이 멀어야 했습니다.
결국 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그릇에는 아무 것도 담지 못하는 법입니다. 선입견이 있으면 다른 사람이나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장점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은 자기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만을 확신하고 고집함으로써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눈은 있어도 동자가 없는 사람” 다시 말하면 눈은 있으나 ‘정확한 안목과 식견으로 분별’해내지 못하였습니다. ‘아는 것이 병’이었습니다. 우리도 같은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자기 안에 갇혀 있는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의 틀을 깨뜨려야 합니다.
흔히 눈을 3가지로 구별을 합니다. 내가 나를 바라보는 눈, 남이 나를 바라보는 눈, 하느님께서 바라보는 눈입니다. 우리는 어느 눈을 의식해야 합니까? 하느님의 눈을 의식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눈은 어디에나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주님의 눈은 어디에나 계시어 악인도 선인도 살피신다”(잠언15,3). “주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궁전에 계시고 주님의 옥좌는 하늘에 있어 그분 눈은 살피시고 그분 눈동자는 사람들을 가려내신다”(시편34,16). “네 눈은 네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맑을 때에는 온 몸도 환하고, 성하지 못할 때에는 몸도 어둡다”(루카11,34).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은 하느님의 눈에 들기 보다는 사람의 눈에 들기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외면하고 세상 것에 줄을 섭니다. 그렇지만 믿는 이들은 크신 사랑으로, 자비 가득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시는 주님을 바라봐야 하고 마침내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세상의 헛된 암흑을 멀리하고 깨끗한 눈으로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려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호소합니다. “형제들이여, 세상을 두고 기뻐하지 말고 주님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죄 안에서 기뻐하지 말고 진리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허영의 꽃을 두고 기뻐하지 말고 영원의 희망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 얼마나 오래 살든 간에 주님께서 가까이 계시니 아무 걱정도 하십시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눈먼 사람에게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에 보내시어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한 말씀으로 눈을 뜨게 할 수 있지만 진흙을 발라주는 구체적 행동을 통해 사랑의 표현을 드러내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보아야 할 것입니다. 결국 눈을 떠서 본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머리로 하는 사랑이 아니라 행동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행하는 가운데 빛이신 주님을 뵐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의 눈이 맑아져서 하느님을 뵐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성 아우구스티노).
우리의 눈은 육안, 심안, 혜안으로 구별하기도 합니다. 혜안이란 육적인 눈이 아니라 신앙의 눈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하느님께로부터 받을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알게 되기를 기원하였습니다(에페1,18). 그리고 우리는 이미 세례성사를 통하여 주님께서 마음의 눈을 넘어 영의 눈을 뜨게 해 주셨음에도 세상 것의 욕심으로 영의 눈을 자꾸 가리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온전히 깨달아 눈이 뜨이고, 날마다 맑은 눈을 가지고 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무엇이 주님의 마음에 드는 것인지 가려내는 지혜를 청하며...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
-이영근신부-
오늘은 사순 4 주일이며, 기쁨주일 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참된 기쁨이 어디로부터 오는 지를 밝혀줍니다.
곧 참된 기쁨은 ‘빛을 보는 데서 온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여기서, ‘본다.’는 것은 ‘안다’는 것을 말해주기에, 기쁨은 ‘빛이신 주님을 아는 데서 온다.’는 것을 밝혀줍니다.
우리는 모두 눈을 지니고 있고, 눈으로 타인과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바라본다고 해서 모두 제대로 보는 것은 아닙니다.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는 당달봉사가 있는가 하면, 눈을 감고도 볼 수 있는 심미안이 있고, 보아도 보여 지는 대로 보지 못하고 자신이 보는 대로만 고집하는 편견이 있습니다.
<제1독서>는 눈이 빛나는 다윗이 선별되는 이야기입니다. 사무엘은 말합니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1사무 16,7)
<제2독서>는 빛의 자녀로 사는 그리스도인의 이야기입니다. 바오로는 에페소인들에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1사무 16,7)
그리고 <복음>은 태생소경이 눈을 뜨고 빛을 보는 이야기 입니다.
제자들은 태생소경이 보지 못하는 것이 자신의 죄든, 부모의 죄든, 죄 탓인지를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이 그에게서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이다.”(요한 9,3)
그렇습니다. 그에게서 하느님의 일이 드러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실, 소경인 그는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인류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곧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우리 자신을 대변해 줍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그가 눈을 뜨게 되는가? 그에게 빛이 생기게 되는가?
그는 예수님께서 땅에 침을 묻혀 진흙에 개어서 자신의 눈에 바르며, “실로암 못에 가서 씻어라.”(요한 9,7)하신 말씀대로 했습니다.
그는 앞을 보지도 못했지만, 말씀에 순명하여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보다 앞서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당신의 침을 묻힌 진흙을 눈에 발라 주었습니다.
진흙으로 빚어진 그의 살이 예수님의 신성과 결합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으로 도유된 것입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친히 소경의 눈을 만지시고, 그의 가슴 속에 당신의 빛을 부어주시어 그가 볼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는 남들처럼 볼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까지도 보게 되었습니다.
소경은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것입니다.
혹 우리는 예수님을 보고도 아직 눈 먼 존재로 살고 있지는 않는지요?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본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 우리 가정, 우리 공동체를 주님을 계시하는 장소로 알아 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현실을 떠난 저 높은 곳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심을 알아차릴 것입니다.
그래서 삼위일체의 신학자라 불리는 보나벤뚜라는 인간에게는 3중의 눈이 있음을 이렇게 말합니다.
“육신의 눈과 지성의 눈과 관조의 눈이 그것이다. 인간은 육신의 눈으로써 세계와 그 안에 있는 것을 보고, 정신의 눈으로써 영혼과 그 안에 있는 것을 보며, 관조의 눈으로써 하느님과 하느님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본다. 그리하여 인간은 육신의 눈으로써 인간 밖에 있는 것을 인식해야 하고, 지성의 눈으로써 인간 안에 있는 것을 인식해야 하며, 관조의 눈으로써 인간 위의 것을 인식해야 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소경이었다가 ‘눈을 뜬 이’에게 말합니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요한 9,37)
분명, 우리는 이미 그분을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하고 있다면, 곧 보고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면, 완고하여 보고도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분은 분명, 여전히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혹 나는 지금 빛이 아니라 어둠을 보고 있지는 않는지요?
혹 자신에게서나 타인에게서 어둠이 보인다면, 얼른 그 어둠을 비추고 있는 빛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우리 안에는 이미 빛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빛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빛을 향하여 있어야 할 일입니다.
세상과 모든 이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스도를 알아보는 일, 바로 이것이 “기쁨주일”인 오늘 우리가 누리는 참된 기쁨일 것입니다.
빛이 어둠을 몰아낼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장면에서, 바리사이들이 “우리도 눈먼 자라는 말은 아니겠지요?”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41).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요한 9,37)
주님!
분명, 이미 당신을 보았습니다.
보고도 아직 보지 못함은 완고하여 인정하지 않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당신은 여전히 보여주고 계십니다.
항상 저를 향하여 계신 사랑입니다.
하오니, 빛을 보게 하소서.
당신 사랑을 보게 하소서.
당신을 보게 하소서.
나의 주님!
아멘.

빛
-송영진신부-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우리는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이제 밤이 올 터인데 그때에는 아무도 일하지 못한다.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9,4-5).”
요한복음을 보면 ‘빛’에 관한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9).”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요한 3,19-21).”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
“낮은 열두 시간이나 되지 않느냐? 사람이 낮에 걸어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어디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밤에 걸어 다니면
그 사람 안에 빛이 없으므로 걸려 넘어진다(요한 11,9-10).”
“빛이 너희 가운데에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빛이 너희 곁에 있는 동안에
걸어가거라. 그래서 어둠이 너희를 덮치지 못하게 하여라. 어둠 속을 걸어가는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빛이 너희 곁에 있는 동안에 그 빛을 믿어,
빛의 자녀가 되어라(요한 12,35-36).”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2,46).”
이 말씀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예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빛이신 분’이다.
2) ‘빛’이신 분인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생명’을 얻게 된다.
3) 그러나 예수님을 거부하면, ‘죽음의 어둠’에 빠지게 된다.
4) 예수님께서 주시는 ‘빛’을(생명을) 받고 싶다면,
나중으로 미루지 말고 ‘지금’ 받아야 한다.
여기서 ‘낮 시간’은, 우리가 예수님께서 주시는 빛을(구원과 생명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허락해 주신 시간입니다.
이 시간이 언제까지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모르니까 ‘지금’ 받아야 합니다.
나중으로 미루면서 안 받으면,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마태 24,50) 심판이 닥치게 될 것입니다.
(이 심판은 개인의 사심판일 수도 있고, 종말의 공심판일 수도 있습니다.)
심판의 날이 닥치면, 예수님을 안 믿고 있었던 사람들은 ‘안 믿고 있는 그 상태’
그대로,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있지만 죄 속에서 살면서 회개하지 않고 있었던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고 있는 그 상태’ 그대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9,39).”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라는 말씀은, 요한복음 3장에 있는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라는 말씀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경우가 자주 있기 때문에, 예수님 말씀의 의도를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의 뜻은,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려고
왔는데, 구원을 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내가 주는 구원을 받을 것이고,
구원받기를 거부하면서 나를 배척하는 자들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입니다.
< 요한복음 3장 18절에, ‘심판’에 관한 말씀에 대한 보충 설명이 있습니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 3,18).”
이 말씀의 뜻은, “믿지 않는 것은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것이고,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것은 심판을 선택하는 것이다.”입니다.
(생명을 선택하지 않는 것은 죽음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중간은 없습니다.)>
여기서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라는 말씀의 뜻은, “자기가 죽음의 어둠 속에
있음을 인정하면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빛을 받기를 원하고,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은 어둠에서 해방되어서 빛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입니다.
그것은 보지 못하던 이들이 보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라는 말씀의 뜻은,
“자기가 어둠 속에 있음을 인정하지 않거나, 또는 어둠 속에 있음을 인정하더라도
어둠을 더 좋아하면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빛을 거부하는 자들은,
빛을 보지 못하고 그냥 그대로 어둠 속에 있게 될 것이다.”입니다.
(잘 보고 있다가 눈먼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눈먼 상태 그대로 끝나버리는 것입니다.)
인류는 메시아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는 예외 없이 모두 다
어둠 속에 있었습니다(마태 4,16; 요한 1,5).
그런데 어떤 이는 빛을(구원을) 갈망했고,
어떤 이는 아무 생각 없이, 희망도 없이 살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 나라, 구원, 생명, 참 평화, 참 행복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 없이,
하루살이처럼 허무한 삶을 살다가 그냥 그대로 생을 마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41)”
이 말씀은, “자기가 구원받아야 할 처지에 놓여 있는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고백하고) 회개하는 사람들은 죄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즉 구원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는 의인이라고 자처하면서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죄 속에서 멸망하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하늘나라의 문을 활짝 열어 놓으셔도,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겠다고,
또는 그냥 밖에 있겠다고 고집부리는 사람은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안 들어가서 못 들어가게 됩니다.
< 사제가 고해실 안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고백할 죄가 없다면서
고해실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사람에게는 고해성사를 줄 수가 없습니다.
성사를 보라고 강요해서 억지로 보게 만들 수는 있겠지만,
보려는 마음 없이 억지로(형식적으로) 보는 고해성사는 고해성사가 아닙니다.
성인들(의인들)은 더 많이 회개하면서 죄를 고백하는데,
정말로 큰 죄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자기는 죄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회개하기를 거부합니다.>

빛과 어둠의 대립
-조욱현신부-
오늘의 주제는 빛과 어둠 사이의 ‘대립’에 관한 것이다.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요한 1,5). 이것은 빛이신 하느님께서만이 인간들의 눈을 열어 보게 해주시지 않으면 눈먼 상태에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도 고쳐주실 수 없는 ‘소경’들이 있다. 자신들이 눈이 멀었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하면서 오히려 잘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모습이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있다.”(요한 9,41).
제2독서: 에페 5,8-14: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한다.
이 빛과 어둠의 대립은 ‘어둠’ 속에 살다가 세례를 통하여 “주님 안에 있는 빛”(8절)이 된 모든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 속에서 계속될 것이다. 이러한 삶을 위하여 사도 바오로께서는 우리에게 ‘빛의 자녀답게’ 살며, ‘모든 어둠의 행위’를 어디서든 또 누가 행하든지 고발하고 단죄함으로써 피하라고 권고하고 있다(8-11절). 이렇게 우리 그리스도인의 책임도 커진다. 즉 빛의 증거자 뿐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불의한 일들, 악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고발할 수 있는 ‘예언적’ 소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그들의 존재 전체, 삶 전체를 통해 입증되어야 한다.
복음: 요한 9,1-41: 태생 소경의 치유
태생 소경에 대한 치유 기적은 우선, 육체적으로뿐 아니라 정신적으로까지 ‘밝음’의 상태에 서서히 이르고 있는 태생 소경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사실의 진실성이 입증되는데도 그 분명한 사실을 부정하려 하면서 신적인 현존의 표지 확인을 고집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유다인들의 모습이다. 보기를 간절히 원했던 소경은 눈을 떴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요.”(28절) 하느님과 율법을 온전히 안다고 하던 자들은 장님이 되고 만다.
이 태생 소경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기적을 이루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다. 신앙은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인간들의 모든 적대행위와 거짓된 논리를 이긴다. 그 소경은 치유 받은 후 모든 사람과 대립하고 있다. 부모들도 위험을 느끼고 모든 책임을 아들에게 돌린다(20-22절). 또한, 명백한 사실을 부인하기 위해 온갖 협잡이 이루어진다(16.24절). 그러나 이 모든 문제의 쟁점은 기적이 아니라, 예수에 관한 것이다.
지금 예수께서는 곤란한 문제를 일으키고 계시며, 사람들 간의 의견을 엇갈리게 하는 분도 그분이시다. 기적을 받아들이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때 생기는 문제를 모두 수용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이 치유 받은 소경에 의해 해결되고 있다. 소위 ‘지혜로운 자들’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그런 사실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28-33절 참조).
그 소경의 신앙이 점점 명백해져 가고 있는 사실도 주목해볼 만하다. 예수님께 관해 연달아 질문을 받았을 때, 처음에는 예수님을 ‘예수라는 분’(11절) ‘예언자’(17절)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33절) 이라고 하고 마지막에 예수님을 만날 때, ‘주님’(38절)으로 고백한다. 여기서 그의 신앙이 완전해진다. 이제 완전한 의미에서 ‘보게 된다.’ 육체적으로 시력을 얻었을 뿐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사람의 아들’(다니 7,13-14)이신 영광의 ‘주님’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유다인들은 소경이 보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다. 율법의 근본정신에는 귀를 막고 또 하느님의 ‘판단’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참으로 눈이 먼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그분을 ‘죄인’으로 배척하고 있는 유다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눈이 먼 것은 그들이 빛을 피하여 어둠으로 숨어버렸기 때문이며, 그들의 탓인 것이다. 이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이미 단죄의 심판을 내리신다(39절). 이 심판은 따지고 보면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자신에게 내리는 단죄의 ‘심판’이다. 인간들의 구원이나 멸망은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명의 ‘빛’으로 받아들이거나 거절하는 능력 여하에 달려있다.
또 여기서는 세례성사에 대한 가르침이 있음을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소경이 실로암 연못에서 눈을 뜬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세례의 물을 통하여 밝은 빛을 얻으며,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로 ‘주님’으로 고백하게 된다. 히브리서에나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세례가 ‘빛’으로 제시되고 있다(히브 6,4; 10,32; 에페 5,14 참조). 소경이 눈을 뜬 ‘실로암’ 연못의 이름도 의미가 있다. 그것은 ‘파견된 자’(7절)라는 뜻이다. 이 파견된 자는 바로 성부께 ‘파견된’ 메시아이신 그리스도께 연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를 낫게 한 것은 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시다. 세례는 하나의 ‘빛’이다. 그 빛은 우리를 모든 사람에게 보내어 그들도 우리의 빛에 참여함으로써 그들 역시 다른 사람들, 다른 사물, 다른 사건들을 하느님의 눈, 즉 신앙의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야 하는 빛이다. 제1독서에서도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1사무 16,7) 우리가 주님께 받은 빛을 통하여 항상 어둠의 세력을 이기는 그리하여 주님의 빛이 세상에 퍼질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의 빛이 빛나는 곳이면 어디서나 어둠은 물러가게 될 것이다.

주님, 저는 믿습니다.(요한 9, 38)
치유의 이름을
이 순간 다시
묻습니다.
치유의 이름은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시작되는 믿음의
시간입니다.
온전한 사람으로
살게하는 참된
믿음입니다.
믿음이 피어나고
믿음으로 피워내는
치유의 꽃입니다.
치유는 언제나
현재진행형으로
드러납니다.
믿음은 어둠의
시간과 고통의
시간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서로를 보게하고
서로를 치유하는
유일한 희망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기에
치유하시는
주님을 앞에 두고도
주님을 모른채
살아갑니다.
주님과 우리를
이어주는
연결고리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믿음을
보게합니다.
주님께서는
삶을 밝히는
믿음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십니다.
보게하시는
믿음을
믿게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에게는
세상을 다르게 보는
믿음이 있습니다.
부활을 준비하는
이 사순시기가
믿음의 길을
따라가는 새로운
시작이길
기도드립니다.
우리 영혼이
잃어버린 것이
바로 믿음임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반성하는 시간
되십시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는 사순시기 중반을 넘어선 우리를 격려하는 말씀으로 열립니다.
"즐거워하여라 ...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 기뻐 뛰리라"(입당송).
우리나라와 전 세계를 뒤흔드는 전염병 사태가 이 사순시기와 함께 종식되기를 빌며 부활의 희망으로 한 숨 돌리라고 초대하시는 사순 제4주일 말씀 묵상을 나누고자 합니다.
복음에서는 한 눈먼 이가 예수님을 통해 빛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의 선천적 시각장애가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요한 9,3)이라고 하시면서 친히 이를 증명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 하고 그에게 이르셨다"(요한 9,6-7).
오늘 이 현장은 한처음에 펼쳐진 창조의 여정을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빛이 생겨라"(창세 1,3) 하신 첫날의 창조에서, "땅에서 안개가 솟아올라 땅거죽을 모두 적셨다. 그때에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신"(창세 2,6-7) 엿새날 창조까지가 예수님 말씀과 행동으로 한 순간에 실현됩니다. 게다가 그 날이 마침 안식일이었으니 지금 이 순간은 하느님 창조 업적의 축약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로암'은 '파견된 이'라고 번역되는 말이다"(요한 9,7).
눈먼 이는 진흙을 눈에 바른 그 순간에 치유되지 않고 "파견된 이"라는 실로암 못에 가서 씻은 뒤에야 비로소 눈을 뜹니다. "파견된 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성자 예수님은 아버지에게서 파견된 분이시니까요.
결국 출생 때부터 유예되었던 그의 온전성이 성부께서 파견하신 분을 상징하는 실로암 못의 물로 씻은 뒤 회복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일화는 모든 인류가 원죄로 잃었던 창조 때의 온전성을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하게 된다는 의미의 엄청난 사건이지요. 이렇게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을 통해 드러"난 것입니다.
"그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므로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요한 9,16).
그런데 소위 독실하다는 바리사이들은 치유된 이와 함께 기뻐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치유가 안식일에 일어났다는 사실 때문에 사건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걸려 넘어집니다. 안식일 법은 이스라엘을 다른 민족과 구분하는 특별한 자긍심의 근원인 것은 사실이지만, 예수님을 아무리 털어봐야 살인, 간음, 도둑질 등의 금지 계명에 저촉되지 않으니 그들로서는 가장 만만한 게 안식일 법이었을 겁니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9,39).
예수님께서 하실 심판이란 다른 게 아니라, 스스로 볼 수 있다고 자부하던 이들이 실상 눈멀었음이 드러나고, 볼 줄 몰라서 움츠러 살던 이들이 보게 되는 역전과 전복의 사건입니다.
사실 이 상당히 긴 태생 소경의 치유 이야기에서 놀라운 점이 있다면 이웃과 바리사이에게 말하는 눈먼 이의 응답들이 단순하지만 무릎을 칠 만큼 구구절절 옳고 정확하다는 점입니다. 그의 자기 계시는 명료했고(요한 9,9 :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신원을 역사의 유비 안에서 정확히 꿰뚫어 보았으며(요한 9,17 : 그분은 예언자이십니다) 무엇보다 하느님에 대해 올바른 신학적 견해를 지니고 있었지요(요한 9,33 : 그분이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으셨으면 아무것도 하실 수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경악할만큼 더욱 놀라운 점은, 소위 배웠다는 자들, 백성의 우위에서 하느님과 통교한다고 자부하는 바리사들이 자기들이 쌓은 신학과 지혜를 제쳐 놓고, 예수님의 기적이 무엇이 되었건 개의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눈앞에 펼쳐진 진실에 눈을 감은 채 "아, 그건 됐고, 어쨌든 안식일이니까 무효다"라고 앵무새처럼 반복하다 결국 그를 내쫓는 것으로 진실을 회피하고 맙니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1사무 1,67).
제1독서에서는 사람 시력과 주님 시력의 차이를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가 감히 주님의 시력을 갖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겠지만, 당장 드러나는 껍질만 전부인 양 받아들이느냐, 껍질을 뚫고 그 안의 본질을 보는 수고를 아끼지 않느냐의 문제라고 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에페 5,8).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주님 안에서 눈 뜬 이로서 살아가라고 이릅니다. 빛이신 주님 안에 있는 우리는 빛의 자녀이고 또 주님처럼 보는 사람들입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로움과 진실입니다"(에페 5,9).
선과 의로움과 진실이 빛의 자녀라는 증거입니다. 주님의 시력을 가진 이는 선하고 의롭고 진실합니다. 오늘 복음 속 눈멀었던 이의 답변이 그의 의도와 상관없이, 복잡하고 위선적인 바리사이들의 속내를 꿰찌르는 촌철살인의 힘을 보여주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겁니다. 그는 단순했고 사심이 없었으며 솔직했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복음 환호송).
우리는 빛이신 주님의 빛을 받아, 볼 수 있게 거듭 창조된 이들입니다. 파견된 이, 예수님께 씻겨짐으로써 세속과 이기심과 욕정의 각막이 벗겨진 우리는 주님의 눈으로 보고 주님의 마음으로 보는 시력을 회복했습니다.
"주님, 저는 믿습니다"(요한 9,38).
올해 사순시기는 각 개인이 지나고 있는 터널 위에 인류적 재난 상황이라는 터널까지 덮씌워져 암흑이 더 짙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빛과 믿음이 더 절실한 때입니다. 그러니 우리, 이제 빛 한가운데 서서, 눈멀었던 이와 함께 한 목소리로 주님께 외칩시다. "주님! 저는 믿습니다!"
지금은 새 창조가 필요한 시간. 우리는 이 터널에도 끝이 있음을 믿습니다. 이 고난의 시간이 지나면 먼동이 트듯 빛이 비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고통 가운데 생명이 움트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의 가난한 기도와 보잘것없는 선의가 세상을 밝히는데 보탬이 되리라고 믿습니다. 이것이 사순 제4주일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희망이니 앞당겨 기뻐해도 좋습니다. 오늘은 맘껏 기뻐하십시오. 아멘.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오늘 복음을 보면,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눈먼 사람을 예수님께서 고쳐주시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자기 탓이나 부모의 탓이 아님에도 날 때부터 눈이 안 보이는 고통을 당했다. 무릇 성경에는 이런 시련과 고통을 당하는 이유가 세 가지로 나온다. 첫째로, 자기가 지은 죄로 인한 대가이다. 예수님께서 벳자타 못 가에 있던 병자를 고쳐주시며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요한 5,14)고 당부하시는 말씀을 들어 알 수 있다. 둘째로, 믿음의 성장을 위한 시련과 고통이다. 욥기를 보면, 그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엄청난 고통을 당하며 신앙과 삶의 위기를 맞아 방황한다. 그러나 결국 자기의 고통은 하느님께서 자신을 단련시키기 위한 것임을 깨닫고 이를 기쁨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복음의 말씀처럼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드러나게 하려고 허락하신 시련과 고통이다.
예수님의 새로운 관점의 말씀으로 보면 우리가 겪는 고통 속에 분명한 하느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지금은 당장 어렵고 힘든 상황이더라도 하느님께서 나의 고통을 통해 역사하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희망을 가질 수 있고, 어떤 시련과 고통 중에도 주님 안에서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바쿡 예언자가 바빌로니아 침공으로 유다 왕국이 망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에서도 “무화과나무는 꽃을 피우지 못하고 포도나무에는 열매가 없을지라도… 우리에서는 양 떼가 없어지고 외양간에는 소 떼가 없을지라도, 나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내 구원의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리라”(하바 3,17-18)라고 노래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언제나 하느님께서 그 어려움과 고통의 순간 속에 일하시고 늘 함께 하심을 믿었기 때문이다.
바오로 사도는 자기 몸의 가시로 받는 고통이 너무도 커서 이를 없애주시길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하다가 깨달았다.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12,9) 비록 자기를 고쳐달라는 기도의 응답을 받지는 못했지만, 주님을 더 의지하고 더 겸손하게 일하라는 주님의 음성으로 도리어 기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임상만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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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사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남자의 고통이 없어진 것을 보지 않습니다. 이렇게 놀라운 기적을 이루신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는 것만을 물고 늘어질 뿐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의 판단은 하느님의 일을 절대로 볼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일을 행하신 예수님을 죄인이라고 단정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보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만을 주장하는 습관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바리사이의 모습이 바로 영적인 눈멂이었습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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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는 이전의 자신을 십자가에 죽이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지금의 자신을 죽이기 싫다면 구원을 주는 믿음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실로암에 가서 눈을 씻으라고 하는 것부터 시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눈을 씻었는데 눈이 낫지 않았다면 사람들로부터 커다란 비웃음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존심을 버리고 실로암에서 눈을 씻는 행위는 이미 자신을 죽이는 십자가의 삶을 시작한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십자가에 죽을 마음이 없다면 구원을 주는 믿음은 생겨날 수 없습니다. 믿지 못해서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믿으면 죽을 거 같아서 안 믿는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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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의 눈이 맑아져서 하느님을 뵐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성 아우구스티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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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사순 4 주일이며, 기쁨주일 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참된 기쁨이 어디로부터 오는 지를 밝혀줍니다.
곧 참된 기쁨은 ‘빛을 보는 데서 온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여기서, ‘본다.’는 것은 ‘안다’는 것을 말해주기에, 기쁨은 ‘빛이신 주님을 아는 데서 온다.’는 것을 밝혀줍니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1사무 16,7)
바오로는 에페소인들에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1사무 16,7)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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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주제는 빛과 어둠 사이의 ‘대립’에 관한 것이다.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요한 1,5). 이것은 빛이신 하느님께서만이 인간들의 눈을 열어 보게 해주시지 않으면 눈먼 상태에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도 고쳐주실 수 없는 ‘소경’들이 있다. 자신들이 눈이 멀었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하면서 오히려 잘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모습이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있다.”(요한 9,41).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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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다미아노 신부 매일 미사 강론에서-
어렸을 때 일본에서 살았다. 학교갔다 집에 돌아와서 냉장고로 곧바로 가서 청란젓을 먹으며 고향의 맛을 찾았다.
작년 동생가족과 여행을 가서 하루 다섯기를 먹었다.
나의 지평이 한국에서 일본으로 넓혀졌다. 외국에서의 낮선느낌
처음 일본에 갔을 때 낮선느낌
영적인 여정도 처음에는 거부하는 느낌을 받는다.
예수님이 율법을 어기고 넘나드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바리사이의 율법주의의 삶은 마치 냉장고의 고향 맛을 찾듯이
장님이 눈을 떳다는 것은 새로운 진리를 맞이했다.
새로운 가르침을 진지하게 받아들임 영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미국에와서 받은 충격은 컸다
충격이 충격인 이유는 내가 살던 방식대로 살면된다. 내칠수 없는 진리를 담고 있음을 깨닫는다
애국심, 나라사랑. 미국에 오고나서 이민자들의 삶을 봄
각자의 자신들의 뿌리에 대해 이질감을 느끼다가도 공통됨을 알게 된다.
한국을 강조하면 미국에서 소외된다.
내가 가지고 있는 한국이라는 나라사랑에서 벗어나야 겠다는 것에 눈을 떴다.
예수님께서 주신 충격을 지금의 나에게 충격을 줌
끝임없이 마음을 열고
웅크리는 마음을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눈을 뜨고 마음을 열것인가. 어둠의 삶을 살것인가는 우리에게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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