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 2일 목요일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바 실리오 성인은 330년 무렵 소아시아의 카파도키아(오늘날의 터키 카파도캬) 체사레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와 조모, 누이 마크리나, 동생 니사의 그레고리오 주교와 세바스테아의 베드로 주교가 모두 성인일 만큼 영광스러운 가문의 출신이다. 은수 생활을 하기도 한 바실리오는 학문과 덕행에서 특출하였다. 370년 무렵 체사레아의 주교가 된 그는 특히 아리우스 이단에 맞서 싸웠다. 바실리오 주교는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특히 그의 수도 규칙은 오늘날까지도 동방 교회의 많은 수도자가 따르고 있다. 379년 무렵 선종하였다.
그 레고리오 성인 역시 330년 무렵 바실리오 성인과 같은 지역의 나지안조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는 동료 바실리오를 따라 은수 생활을 하다가 381년 무렵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가 되었다. 그레고리오 주교도 바실리오 주교처럼 학문과 웅변이 뛰어났으며, 이단을 물리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390년 무렵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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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요한 1,19-28)
“I am the voice of one
crying out in the desert,
‘Make straight the way of the Lord,’
as Isaiah the prophet sai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요한 1서에서는 ‘그리스도의 적’ 문제를 계속해서 다룬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이 신자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었으므로, 이 서간은 신자들에게 그들을 조심하며 배운 신앙에 항구하게 머물 것을 권고한다(제1독서). 세례자 요한은 유다인들이 보낸 이들에게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분명히 밝히고, 자기는 그분의 길을 마련할 뿐이며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시라는 점을 알려 준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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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언제나 “내 안에 머물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안에 머무른다는 것은 곧 그분에게서 “처음부터 들은 것”, 곧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을 마음에 간직하는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았고, 지금도 그 상태를 보존하고” 있기에 하느님과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았고, 이 영원에 대한 갈망은 누가 따로 가르쳐 주지 않아도 이미 하느님 안에 머무르는 사람이라면 확신할 수 있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진리는 사람들의 왜곡과 편견에 맞서 참된 확신 속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십자가의 진리는 세상의 어떤 권력과 힘의 무상함에 맞서 인간의 내면에서 뿜어 나오는 인생의 신비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바로 이 신비가 세상을 구원할 것임을 미리 깨달았고, 그래서 유다인들이 그를 위대한 엘리야나 메시아로 받들려고 했을 때마다,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에 불과하고,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진리는 불변하지만, 진리를 해석하는 사람들의 생각은 변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예수님을 참된 구원자로 고백하기 힘들어하지만, 예수님 안에서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맛본 사람들은 이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 안에 머뭅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하느님을 떠나 살 수 없는 사람들임을 말뿐만 아니라 삶으로 보이며 살아갑시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50세가 되었을 때 당신의 저금통장이 당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의 성적표입니다.”
이 글귀를 보면서 ‘그러면 내 성적표는 낙제인가?’ 싶었습니다. 통장에 들어 있는 돈이 거의 없으니 말입니다. 요즘 집 한 채에 몇억씩 한다고 하는데, 저는 월세도 살기 힘든 금액만 통장에 들어있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제 삶을 실패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지금의 삶에 충분히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사회 친구들을 자주 만나는데 2~30대에는 주로 어떻게 돈을 버느냐는 이야기를 많이 하더군요. 그러나 50대에 접어들면서는 그런 대화는 거의 없습니다. 대신 ‘어떻게 잘 살 것인가?’라는 삶의 질에 관한 이야기가 대부분입니다.
세속적인 부의 축적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자기 옆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는가가 아닐까요?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고, 그 밖에 많은 사람이 함께할 수 있다면 행복한 사람이라고 불리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오늘의 복음의 주인공인 세례자 요한에 대해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그에게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이 찾아오지요. 예수님께도 유다인들은 사람을 보냈지만, 예루살렘의 지체 높은 사람인 사제와 레위인이 아니라 종들과 헤로데 당원들을 보냈습니다. 이렇게 지체 높은 사람이 찾아온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요한에게 “당신은 누구요?”라고 물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쩌면 그들은 정답을 정해놓고서 요한을 찾아온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아니라 요한을 그리스도로 결정한 것입니다.
우선 예수님은 보잘것없는 집안 출신이었지요. 그러나 요한은 대사제의 아들로 좋은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일에 자주 했지만, 요한은 광야에서 혹독한 수련을 거치면서 세상을 향해서 힘차게 외쳤습니다. 따라서 이들에게 “맞소. 내가 그리스도요.”라고 말했다면 모두가 요한을 그리스도로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모든 유다인들이 간절히 기다려온 그리스도로 인정받을 수도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세속적인 것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기에 “아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까? 요한이 보여준 세속적인 것이 아닌 하느님의 뜻에 충실히 따르는 그의 성실성을 본받아야 합니다.


강의 전에 제 소개를 먼저 합니다. 이 소개를 평범하게 하는 것보다는 재미있게 해서 딱딱한 분위기를 좋게 만들려고, 저에 대한 설명 7가지를 말하는데 그중에서 딱 하나만 진실이고 나머지는 거짓이라고 말해 주고 찾으라고 합니다. 사실 답을 찾지 못하십니다. 왜냐하면, 거짓 같아 보이는 것이 진실이거든요.
그 진실은 “제 나이는 현재 20대입니다.”입니다.
사람들은 “마음이요?”, “20대가 되고 싶은 거죠?”라고 묻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설명해드립니다.
“저는 사제 서품을 받으면서 새롭게 태어났다고 생각합니다. 서품받은 지 이제 20년 넘었으니 20대라고 박박 우기고 있습니다. 맞죠?”
꽤 많은 분이 자신의 나이를 걸림돌로 생각하십니다. 나이가 많아서, 또 나이가 어려서…. 그 실제의 나이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새롭게 태어난 자신의 날을 따져보는 것입니다.
결혼한 지, 직장 생활한 지, 철든 지…….
이렇게 새롭게 태어난 자신의 날을 따지다 보면, 내 삶을 구체적으로 바라보게 되면서 지금을 더욱더 힘차게 살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은 몇 살이세요?

무대의 주인공이 되지 말고 진행자가 되라
-전삼용신부-
1900년대 초 유럽은 정치적 긴장이 고조되던 시기였습니다. 특히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제국 간의 문제가 심각했는데 그 원인은 그들이 다양한 국가와 인종 집단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황제 프란츠 요제프가 시대 상황이나 국민의 뜻과 담을 쌓고 50년 동안 장기 집권한 오스트리아는 제국 내 민족 간 분열이 극에 달한 상태였습니다. 무정부주의자들은 모든 정부를 근절하겠다는 일념으로 폭탄 테러를 가했습니다.
이런 변덕스럽고 불안정한 상황이 한창인 가운데 왕위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가장 위험한 지역인 사라예보를 직접 방문해 제국에 반대하는 이들의 심정을 안심시키려 했습니다. 그는 위험하니 가서는 안 된다는 주위 측근들의 말을 무시하고 1914년 6월 사라예보로 떠났습니다. 왕위 계승자로서의 자질을 보여주려 했던 것 같습니다. 경찰들이 황태자의 안전을 위하여 도처를 지키며 철저한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오스트리아 대공을 태운 오픈카는 수류탄 공격을 받게 됩니다. 다행히 수류탄은 차를 튕겨 나와 뒤따르는 차에 피해를 입혔습니다.
사라예보군 사령관 포티오렉 장군은 대공에게 가능한 빨리 도시를 벗어날 것을 권유했습니다. 이번에도 페르디난트 대공은 수류탄 폭발로 다친 사람들을 먼저 만나야겠다며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런데 병원으로 향하는 길에는 잠시 전에 차가 너무 빨라 페르디난트 대공을 공격하지 못하고 철수하던 한 테러리스트를 만나게 됩니다. 그는 이미 가지고 있던 장전된 총으로 페르디난트 대공의 심장을, 소피아 부인의 복부를 맞췄습니다.
대공 부부는 결국 사망하였고 며칠 후, 이 사건을 이유로 오스트리아 군대가 사라예보를 침공하였습니다. 사라예보를 지원하기 위해 러시아가 나섰고 오스트리아는 독일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독일은 러시아와 싸우면서도 자신들의 독립을 방해했던 프랑스도 함께 공격하였습니다. 프랑스로 가는 길목인 벨기에도 공격했습니다. 그러자 벨기에와 상호방위조약을 맺었던 영국도 독일에 선전포고를 단행했습니다. 그렇게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역사의 주인공이 되고자 했던 페르디난트 대공은 2주 뒤 유럽 전역이 전쟁의 화마로 몸살을 치르게 만드는 계기를 만들었고 그렇게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으로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이 페르디난트 대공의 책임이라고 하기는 무리가 있습니다. 다만 싸울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분위기에 시작종을 울려준 것은 확실합니다. 만약 대공이 조금만 신중했더라면 역사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가끔은 우리가 역사의 주인공이 되려고 하다가 역사적인 큰 비극의 시발점이 되기도 합니다.
저도 기도를 충분히 하지 못한 날은 저도 모르게 제 힘으로 살아보려 합니다. 실수를 한 것을 깨닫고 나서야 내가 주인공으로 살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역사의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내가 아니라 하느님을 역사의 주인이 되게 해야 합니다. 내가 사라져야 하느님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그러려면 나는 작아지고 그분은 항상 커지시게 하려는 마음으로 살아야합니다. 그런 삶을 모범적으로 살았던 인물이 ‘세례자 요한’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오는 역사의 한 축을 담당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역사의식은 일관되게 “내가 아니다.”였습니다. 유다인들이 “당신은 누구요?”라고 물을 때,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누구냐고 물었는데 아니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그는 다만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라고 함으로써 자신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역사를 위해 준비하는 역할만 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마치 무대의 주인공이 아닌 무대에서 주인공을 소개하기 위한 소개멘트를 하는 진행자의 입장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기 위해 진행하는 사람만큼 큰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으로 아무리 큰 역사를 이루어내더라도 하느님 역사의 가장 작은 부분만 못합니다. 자신을 가치 있는 역사로 만들어주시는 주님께 우리 모두도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내 등 뒤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마음으로 살아야겠습니다.
며칠 전에 백종원씨가 SBS 연예대상에서 공로상을 받은 것을 보았습니다. ‘골목식당’ 때문입니다. 골목식당의 모든 스텝은 백종원씨를 내세워 좋은 성과를 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잘 섭외하는 것도 실력입니다. 우리는 항상 등 뒤에 예수 그리스도를 섭외하여 그분이 역사를 이루어 가시도록 합시다. 그러면 내가 무언가를 해야 하는 부담도 사라지고 그분께서 이루신 역사에 같은 영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 저희가 매일매일 작아지게 하시고 당신은 저희를 통해 매일매일 더 커지게 역사하소서.

-조재형신부-
제가 있는 곳에서 바다는 그리 멀지 않습니다. 등대가 있고, 산책로가 있고, 길가에는 사슴이 있습니다. 겨울이라 사람이 많지 않은데, 여름에는 많은 사람이 온다고 합니다. 시냇물이라는 동요가 있습니다. “냇물아 흘러 어디로 가니 강물 따라가고 싶어 강으로 간다. 강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 넓은 세상 보고 싶어 바다로 간다.”
바다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 거 같습니다. 하나는 ‘받아 준다.’입니다. 냇물도, 강물도 모두 받아 주는 커다란 그릇이 바다입니다. 세상의 모든 물은 흘러서 바다로 가고 있습니다. 그만큼 바다라는 그릇이 크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바닥’입니다. 바닥은 낮은 곳입니다. 손바닥, 발바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역시 낮은 곳입니다. 바다는 낮은 곳에 있기에 세상의 모든 물이 모일 수 있습니다. 2020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새해에는 바다와 같은 큰 그릇이 되어서 이웃의 아픔, 절망, 시련을 받아 주면 좋겠습니다. 새해에는 바다와 같이 낮은 자세로 십자가는 기꺼이 지고, 영광은 하느님께 돌리면 좋겠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바다와 같은 사람입니다. 율법과 계명을 지켜야만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강물을 세례를 받고, 뉘우치면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바다로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세례자 요한을 따랐습니다. 세리도, 과부도, 가난한 이도, 아픈 이도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이라는 바다는 회개한 모든 사람을 기꺼이 받아 주었습니다. 이는 율법과 계명이라는 강물을 벗어나는 새로운 길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바다와 같은 사람입니다. 낮은 곳에 있는 바닥의 마음을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더욱 작아져야 합니다. 나는 그분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습니다. 저기 하느님의 어린양이 오십니다.”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았지만, 세례자 요한은 깊은 바다와 같은 마음으로 겸손함을 드러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보다 더 깊고 넓은 바다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끄는 바다에는 유대인, 이방인의 구분이 없었습니다. 죄인들도 기꺼이 받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하느님의 의로움을 드러내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착한 목자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밤을 새워 들판을 돌아다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돌아옵니다.” 그러기에 세례자 요한은 그분은 더 넓고, 깊은 바다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겸손을 이야기하셨습니다. 희생과 십자가를 기꺼이 감수하는 겸손입니다. 겉옷을 달라면 속옷까지 벗어주는 겸손입니다.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까지 내주는 겸손입니다. 조롱과 멸시를 당해도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는 겸손입니다.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는 삶을 선택하는 겸손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강생의 신비는 바로 겸손의 신비입니다. 제자들에게는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째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잔치에 초대받아도 윗자리에 앉지 말고 끝자리에 앉으라고 하셨습니다.
신학생 때입니다. ‘사제는 제2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침묵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진하게 나야 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가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사제에게 필요한 사람들을 만나기보다, 사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먼저 만나야 합니다. 강론을 성실하게 준비하고, 자신이 행한 강론을 삶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았고,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모든 신앙인은 또한 ‘제2의 그리스도’가 돼야 합니다.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전해주어야 하고,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우리가 ‘제2의 그리스도’로 살아갈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께 이러한 희망을 두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신도 순결하게 합니다.”

나는 찰라의 순간동안 허공을 맴돌다 사라져가는 한 소리에 불과합니다!
-양승국신부-
세례자 요한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솔직한 증언은 읽을 때 마다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당시 그는 전국민적으로 선풍적인 인기와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전국구 인물이었습니다. 요르단 강에서 시작된 그의 세례 운동, 신앙 갱신 운동은 전 국민적인 이슈였습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통쾌한 촌철살인의 말씀은 유다인들의 마음에 회개의 마음을 불러 일으켰고 세례로 이끌었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종래 다른 예언자들이나 교사들로부터는 들을 수 없었던 신선한 것이어서, 군중은 크게 환호했고, 너나할 것 없이 그를 향해 달려갔습니다.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과 유다 당국자들 역시 세례자 요한의 존재감에 대해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마음 한켠에는 혹시 이 사람이 오시기로 된 메시아가 아닐까? 하는 기대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보내서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당신은 누구요?”(요한 복음 1장 19절)
세례자 요한의 대답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습니다. 그는 서슴치 않고 시원시원하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요한 복음 1장 20절)
세례자 요한의 단호한 대답 ‘나는 당신들이 기다리고 있던 메시아가 아니다.’라는 말에는 심오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가르켜 에고 에이미(jEgw eijmi, 나는 ~이다. 나는 있다)라고 말씀하신 것에 반해, 요한은 에고 우크 에이미(jEgw oujk eijmi, 나는 ~아니다, 나는 없다)라고 외친 것입니다.
‘에고 에이미’라는 이 표현은 체포하러 온 적대자들 앞에 서신 예수님 입에서 다시 한번 흘러나옵니다. 수난 직전 절체절명의 위기 순간에도 예수님께서는 단 한걸음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당당하고 외치십니다. “에고 에이미.”(나다. 내가 바로 그니라)
반면에 베드로는 체포된 스승님께서 큰 수모와 고초를 겪고 계실 때, 누군가“당신도 저 사람의 제자 가운데 하나가 아니오?”라고 물었을때, 세번씩이나 “에고 우크 에이미(나는 아니오)라고 거듭 대답하며,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세례자 요한의 에고 우크 에이미(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는 대답은 얼마나 멋지고 당당한 것인지 모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신원에 대해 조금도 부풀리거나 과정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어떠한 유형의 메시아적 인물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그는 메시아적인 모든 역할로부터 자신을 철저히 배제시킵니다. 그러한 기대는 오로지 자기 뒤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채워져야 할 것임을 외칩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에게 주어진 직분은 유한한 것이라는 것, 자신의 역할은 잠정적이고 일시적이라는 것임을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지극히 겸손한 인물이었습니다. 철저히 자신을 낮추고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거듭되는 유다인들의 질문에 종지부를 찍는 세례자 요한의 대답 역시 멋집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복음 1장 23절)
그는 스스로를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소개합니다. 찰라의 순간동안 허공을 맴돌다 사라져가는 소리에 불과하답니다. 해가 떠오르는 즉시 증발하고 말 풀잎 끝에 맺혀 있는 한 방울 이슬같은 존재와 같답니다.
작은 직무 하나 맡았다고 뭐라도 되는 양, 무소불위, 안하무인이 되고 마는 우리에게 ‘에고 우크 에이미’‘나는 아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세례자 요한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증언은 참으로 아름답고도 감동적입니다.

예수님을 전하는 이의 태도
-반영억신부-
가끔 ‘주객이 전도되었다’는 말을 씁니다. 경중이나 선후가 서로 바뀌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전하는 요한을 메시아로 착각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서슴지 않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다시 ‘메시아가 아니라면 그리스도를 준비하는 엘리야인지 묻습니다. 이 질문에 역시 “아니다” 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다시 ’예언자‘인지를 묻습니다. 그러자 요한은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에 불과하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뒤에 오시는 분, 곧 메시아가 계시는데 자신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자신을 한껏 낮추며 곧 다가오실 예수님의 신원을 알립니다. 만약 요한이 인기에 영합하여 자신을 부각시켰다면 그야말로 주객이 전도된 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할지를 알고 있었기에 항상 있어야 할 자리를 지켰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의 여정에서도 요한의 모범은 감동을 줍니다. 겸손으로 자신을 인정하는 가운데 주님께 대한 갈망과 사랑이 커져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가 자랑해야 할 분, 전해야 할 분은 우리의 구세주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다만 주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을 뿐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자리를 차지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소망한다면서도 내심 칭찬과 인정을 바라는 모습들을 봅니다. 진정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묵묵히 자기자리를 지킬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존재이니 그것으로 족하여 감사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나를 자랑하는 말이 아니라 삶으로 그리스도를 드러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당신은 누구요?"
-이영근신부-
우리는 지금, 주님 공현 전 주간을 맞이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자기증언입니다. 광야에 살면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던 요한은 예루살렘에서 온 사제들과 레위 인들에게 질문을 받습니다.
“당신은 누구요?”(요한 1,19)
이 질문은 단순히 세례자 요한의 정체성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메시아와의 관계를 묻는 질문입니다. 곧 “그리스도와 당신의 관계는 무엇이요?” 라는 질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그분과 관계하여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해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그분과 관련한 우리의 신원에 대한 이 질문은 우리가 그분과 관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그 길을 가르쳐주고, 우리의 소명을 일깨워줍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분과 관련하여, 자신의 신원을 부정과 긍정을 통해 고백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요한 1,20)
“나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1,23)
세례자 요한처럼, 우리도 구세주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단지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증거 할 뿐입니다. 그러기에, 혹 우리가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증언하고 증거하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혹 우리가 그리스도를 스승이나 주인으로 따르기보다 자신을 스승이나 주인으로 내세우고 있지는 않는지,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을 따르고 자신을 존경하도록 하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우리는 스승이 아니라 제자이고, 앞서가는 자가 아니라 뒤따라가는 자입니다. 주인이 아니라 속해 있는 자이고, 판단해야 하는 자가 아니라 응답해야 하는 자입니다. 또한 우리는 구원자가 아니라 구원받아야 할 존재이고, 해결사가 아니라 해결 받아야 할 존재입니다. 그리고 요한처럼, 우리도 ‘외치는 이’가 아니고, 외치는 이의 ‘소리’입니다. 곧 ‘내 안에서 외치는 분’를 드러내는 소리입니다. 사실, 소리를 내는 것은 피리가 아니라, 피리를 부는 이입니다. 피리가 결코 스스로 소리를 낼 수는 없습니다. 마치 붓이 스스로 글씨를 쓰는 것이 아니라, 붓을 쥔 이가 글씨를 쓰는 것이듯이 말입니다. 곧 화살표 같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피리를 부는 이가 아니라, 피리를 부는 이를 담아내는 ‘소리’라고 말합니다. 사실, 이는 진정 비워진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요한은 참으로 비워진 사람이었기에, 그렇게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채우는 데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비워진 데서 오는 기쁨을 찾아야 할 일입니다. 자신을 드러내는데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자신을 비우고 타인을 드러내는 데서 오는 기쁨 말입니다. 그러기에 비워내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인 것입니다. 사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큰 적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그렇습니다. 자기 자신에 집착하는 사람처럼 추하게 보이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 자신에 집착한 나머지 다른 이들을 자기 발밑에 두려는 것처럼 추한 모습은 없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자신의 발밑에 다른 이를 두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다른 이의 발밑으로 내려가려고 하나, 그 발밑에 내려갈 자격마저 없는 몸이라 고백합니다.
“나는 그 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 1,27)
본래 주인이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종이 그 신발 끈을 풀어주는 법인데, 요한은 그런 종의 일마저도 할 만한 조격조차 없는 부당한 몸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자기 자신을 온전히 비운 까닭입니다.
오늘 우리도 요한이 받은 질문을 받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 오늘의 말씀에서 솟아난 기도 -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요한 1,23)
주님!
화살표 같은 존재가 되게 하소서.
제 자신이 아니라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붓이 되어 당신의 말씀을 삶으로 쓰게 하소서.
피리가 되어 당신의 노래를 온몸으로 드러내게 하소서.
주인이신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생명의 춤이 되고 당신 축복의 강복이 되게 하소서. 아멘.

-조욱현신부-
복음: 요한 1,19-28: 이분은 내 뒤에 오시는 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소개하고 있다. 요한 세례자는 즈카르야의 아들로 제사장직을 이을 수 있는 혈통이었음에도 그 직분과는 거리가 먼 광야에서 생활을 하였다. 사람들은 그의 말과 행동을 보고 혹시나 그가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 그리스도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또한 요한 세례자에게는 그의 제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성서를 통해 알고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나타나셨을 때에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고 역사의 뒤로 사라지는 그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인간적으로 자신의 위엄과 힘을 군중들의 힘을 빌어 나타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적인 모습이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메시아로 생각하면서 따를 수 있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자신의 사명에 충실한 면을 보여준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에게 메시아가 아닌가 하고 묻는 말에 그는 솔직하게 ‘아니다.’라고 했다(20절). “엘리야요?” 하였을 때 또 아니라고 대답하였다(21절). 이 엘리야는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와서 반대자들을 처리해 주고, 물건이건 사람이건 깨끗한 것과 불결한 것을 가려주고, 흩어져있던 유다인들을 한데 모을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인데, 그도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21절)하고 물었을 때 그도 아니라고 하였다. 이 예언자는 신명 18,15에서 모세가 한 말에 있는 예언자이다. “너희의 주 하느님께서는 나와 같은 예언자를 동족 가운데서 일으키시어 세워주실 것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한 예언자인데 그도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요?”(22절) 하였을 때, 세례자 요한은 이사 40,3에 나오는 대로, 왕이 오실 때 그 길을 준비하라고 외치는 소리라고 하였다(23절). 그러면서 자기를 그렇게 보지 말고 오직 자기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는 사람이며, 이미 와 계신 분을 바라보라고 하였다(26-27절).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작고 크고 간에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과대포장을 하여 드러내려고 하지나 않는지! 우리는 “백마병” 환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백마병이란 백말이 자기가 등에 태운 임금에게 모든 사람이 절을 하니까 자기에게 절을 하는 줄 착각하고 으스대며 거들먹거리는 것을 말한다. 자신이 말이라는 것을 잊고 마치 임금인 것으로 착각하며 사는 어리석은 사람을 말한다. 나 자신을 드러내는 오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주님을 드러내는 삶을 살도록 하여야 한다. 이 미사 중에 우리는 세례자 요한과 같이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 솔직함과 겸손을 갖도록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요한 1, 20)
-한상우신부-
낮아지신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존재를 다시
깨닫습니다.
우리자신을
제대로 아는 것이
자아의 해방이며
겸손의 시작이며
은총의 참된
감사입니다.
나약한 한 사람임을
인정하고 인정합니다.
삶이라는
광야의 이여정에서
우리는
우리자신을 만나고
그리스도를 애타게
찾게됩니다.
기도의 여정또한
우리자신이
그리스도 아님을
진실로 인정하는
회개의 여정입니다.
그리스도가
되고자하는 유혹과
착각이 오히려
그리스도를 이용하고
그리스도를 떠나는
악순환이 됩니다.
그리스도를 진실로
사랑하는 것이
끝내 우리를 살리는
구원이 될 것입니다.
참된 신앙의
발자국들은
이와같이
겸손으로 이끕니다.
이기적인 자아가
죽어야 그리스도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오늘되시길
기도드립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일수록
우리 삶은
그리스도화
될 것입니다.
땅으로 내려오시며
한없이 낮아지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어리석은 우리자신이
새롭게 변화되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그리스도께
우리자신을
봉헌합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독서들은 표면적으로는 "말씀"을 이야기하지 않지만 여러 각도로 "말씀"을 향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요한 복음 머리말인 '말씀 찬가'에 이어지는 부분입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요한 1,1)로 시작해 '사람이 되신 말씀'에 대해 소개한 대목이 세례자 요한의 일화로 이어지면서, '말씀이신 분'과 비교할 수 없는 피조물의 본모습이 "말씀"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요한 1,20).
사람들은 절제와 금욕생활로 자신을 단련하며 사람들을 가르치고 그들의 죄를 듣고 세례를 베푼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추측합니다. 자기들보다는 하느님 나라에 더 가까운 존재로 보이니까요. 그런 그들의 질문에 요한은 군더더기 없이 간명하게 "나는 아니다" 하고 고백합니다.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1,23).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 잘 압니다. 명확한 자기인식에 근거한 겸손입니다. 그는 "소리"입니다. 공기와 마찰해 발생하는 소리일 뿐입니다. 중요한 건 소리 안에 담긴 내용입니다. 소리인 요한이 전하는 바는 그 내용이신 "말씀", 즉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요한 1,25).
이처럼 점잖게 묻고는 있지만 속뜻은 "네가 뭔데? 무슨 권한으로?"입니다. 정화와 성별의 의식인 세례는 제도적이거나 영적인 권한이 뒷받침이 된 이들이 주로 베풀지요.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요한 1,26).
요한은 이제껏 이스라엘에서 사람에 의해 베풀어진 세례와, 오실 분이 베푸시는 세례를 구별합니다. 사람은 물로 세례를 주고 그리스도께서는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십니다(마태 3,11; 마르 1,8; 루카 3,16; 요한 1,33 참조).
제1독서에서 서간의 저자는 잠시 그리스도교에 적을 두었다가 다른 교설에 현혹되어 이제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이들을 언급합니다.
"여러분은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1요한 2,24).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처음부터 들은 것"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교에 입문할 때 들은 기초 교리이기도 하고, 서간 첫 머리에 언급했던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 생명의 말씀"(1요한 1,1)을 가리키기도 하지요.
간직하는 것은 머무르는 것으로 나아갑니다. 간직하는 것은 무언가를 내 안에 품는 것이고, 머무르는 것은 내 안에 품은 줄 알았던 무엇(말씀, 그리스도, 성령 등)이 점점 커져서 오히려 나를 품는 상태가 되는 것일 겁니다. 그래서 저자는 뒤이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 간직하면 ... 머무르게 될 것입니다"(1요한 2,24).
"여러분은 그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고 지금도 그 상태를 보존하고 있으므로"(1요한 2,27).
이 서간의 수신인들은 기름부음받은 이들이고 또 그 상태 안에 머물러 있는 이들입니다. 기름부음은 성령의 세례를 가리킬 수도 있고, 또 다가오신 말씀을 받아들여 간직하고 머무름으로써 거룩한 말씀이 부어져 말씀의 존재가 되는 것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기억하게 해 주시고 속뜻을 밝혀 주시는 분이 곧 성령이시니 성령과 말씀은 별개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제 자녀 여러분,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1요한 2,28).
이제 서간의 저자는 단도직입적으로 명령에 가깝게 권고합니다. 다른 표현으로 바꾸어 말하면, "말씀(가르침, 성령)을 간직하십시오" 또는 "말씀(가르침, 성령)에 머무르십시오"가 아닐까 합니다. 헛된 교설에 휩쓸리거나 현혹되지 않으려면, 이제껏 믿고 사랑한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가 되지 않으려면, 처음부터 들은 것을 잘 간직하고 기름부음받은 상태를 잘 보존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요한 1,26).
"모르는 분!"
바로 오늘 말씀들의 백미가 이렇게 드러납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모릅니다. 그분이 부족한 우리의 앎 저편에 계시기 때문이고, 유한한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영역까지 담고 계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간직하고 품고 보존하고 머무른다 해도 우리가 아는 것은 모르는 것에 비하면 대양의 물 한 방울도 못 되고 대기의 초미립자만큼도 못 됩니다.
그런데 그 "모르는 분"이 우리 "가운데에" 서 계십니다. 무지하고 우매한 우리 틈을 뚫고 들어오셔서 자리를 잡고 계십니다. 마음껏 당신을 간직하고 머물라고요. 심지어, 당신을 뜯어 먹고 마시라고까지 하십니다. 그렇게라도 해서 당신을 알게 하고 싶다고, 우리와 한몸이 되고 싶다고 하십니다.
기도는 모르는 분 앞에 장님인 채로 서서, 내게 감추어진 신비에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말씀을 간직하고 머무르는 것은 내가 아는 단어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그분 편에서 선택해 다가오시는 말씀을 무작정 받아 그 안에 나를 던지는 것입니다. 시작은 모두 무지에서 출발합니다.
그런데, 어쩌면, 아는 분보다 모르는 분이 우리를 더 가슴 뛰게 하고 설레게 만드실 수 있습니다. 아직 우리게 처녀지인 "모르는 신비"는 우리 영혼을 행복한 긴장으로 생동하게 해줄 것입니다. 피조물인 우리가 뭣도 모르고 주님을 향해 피 끓는 애정으로 감히 들이대는 이 무모한 사랑도 "몰라서" 용인되는 무죄한 사랑입니다. 그러니 모른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요!
그러니 사랑하는 벗님!
"모르는 분" 앞에 겸손되이 머무릅시다. 그편이 안다고 하는 것보다 훨씬 진리에 가깝습니다. 우리가 모르기는 하지만 "기름부음은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므로"(1요한 2,17) 우리는 감히 진리이신 그분 안에 스며들 수 있습니다.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끝내 모르는 채여도 괜찮습니다.

우리가 머물러야 할 곳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03080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요한 1,19-28)
인간으로 아무리 큰 역사를 이루어내더라도 하느님 역사의 가장 작은 부분만 못합니다. 자신을 가치 있는 역사로 만들어주시는 주님께 우리 모두도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내 등 뒤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마음으로 살아야겠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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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를 내는 것은 피리가 아니라, 피리를 부는 이입니다. 피리가 결코 스스로 소리를 낼 수는 없습니다. 마치 붓이 스스로 글씨를 쓰는 것이 아니라, 붓을 쥔 이가 글씨를 쓰는 것이듯이 말입니다. 곧 화살표 같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피리를 부는 이가 아니라, 피리를 부는 이를 담아내는 ‘소리’라고 말합니다. 사실, 이는 진정 비워진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요한은 참으로 비워진 사람이었기에, 그렇게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채우는 데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비워진 데서 오는 기쁨을 찾아야 할 일입니다. 자신을 드러내는데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자신을 비우고 타인을 드러내는 데서 오는 기쁨 말입니다. 그러기에 비워내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인 것입니다. 사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큰 적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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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 잘 압니다. 명확한 자기인식에 근거한 겸손입니다.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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