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12월 30일 성탄 팔일 축제 내 제6일

Margaret K 2019. 12. 29. 20:05

2019 12 30 성탄 팔일 축제 내 제6 


밤낮 없이 단식과 기도로써 
하느님을 섬겨 왔다
.
(루가 2,36-40)

 

Worshiped night 
and day with fasting and prayer.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요한 사도는, 죄를 용서받은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 안에 머물러 있기에 하느님의 뜻을 실천할 것을 권고한다(제1독서). 한나는 하느님을 섬기는 데에 온갖 정성을 쏟으며 살아온 예언자로서 아기 예수님을 보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에서는 하느님 뜻을 실천하는 것이 세상의 유혹에 무릎 꿇지 않고 그분 사랑에 머무르기 위한 조건이라고 강조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이것은 성탄을 믿음과 무관한 소비주의, 떠들썩한 소음과 소동에 치우친 시간으로 허비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복음에서는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한나 예언자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녀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다가 남편을 여의고 성전에 늘 머물면서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습니다.”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다가 자신의 소망을 이루었고 단식하고 기도하며 하느님을 항구하게 섬김으로써 보상을 받았다고 느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에 데리고 왔을 때 그들과 함께할 수 있는 은총도 받았습니다. 구세주를 만났고, 마리아가 하였던 것처럼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렸으며, 이스라엘의 해방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아기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였습니다.한나는 사제 계급에 속하지 않은 평범한 신자였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똑똑하다는 이들과 교만한 이들과 자만에 빠진 이들에게는 강생의 신비를 감추셨지만, 목자들이나 동방 박사들처럼 겸손하고 가난한 이들에게는 이를 드러내셨습니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아기 예수님께서는 슈퍼맨도 아니시고 신화의 영웅도 아니시며, 이 세상에 태어난 다른 아이들처럼 가정 안에서 태어나 자라나셨습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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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응답하라 1988, 82년생 김지영 등 연도가 들어간 영화나 드라마가 있습니다. 이는 현재를 살면서 과거의 그 시간으로 돌아가 회상에 빠지게 합니다. 즉, ‘그때의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라고 생각하면서 화면 속 모습에 “맞아. 그때 저랬지.” 하면서 공감도 하고, “그때 나는 이렇게 해야 했는데.” 하며 후회를 하기도 합니다.

그 시간을 자신의 몸으로 받아서 이겨냈을 때가 매우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과거를 회상하며 “그때 정말로 힘들었어.”라고 말하면서도, “그때가 좋았어.”라고 말할 때가 많지 않습니까? 이는 지나온 시간을 이겨냈다는 긍정적인 마음의 표현입니다.

어렵고 힘든 시간은 일회적으로 일어나고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도 또 앞으로도 계속해서 우리와 함께할 시간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시간을 이겨낸 사람만이 “그때가 좋았어.”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지금 맞이하고 있는 이 순간을 이겨야 하는 이유가 됩니다. ‘그때가 좋았어.’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한나라는 예언자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녀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남편이 일찍 잃어서 남편과의 혼인 기간이 7년에 불과했지요. 그리고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났습니다. 당시에 15~16세에 혼인했던 것을 떠올려 보면 60년 이상을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긴 것입니다.

절대 쉽지 않은 삶입니다. 세상의 것을 멀리하고 오로지 하느님만을 섬기며 산다는 것이 말로는 간단하지만, 나 자신이 직접 그렇게 산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절대로 쉽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며칠도 아닌 60년 이상을 그렇게 산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일입니다. 그런데도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한나 예언자에게는 하느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직접 보게 됩니다. 구원자이신 하느님을 직접 보고 직접 안을 수 있는 영광을 얻게 됩니다. 바로 지나온 시간을 이겨냈기에 얻을 수 있는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하느님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노력이 우리에게 큰 영광의 순간을 만들어줍니다. 한나 예언자처럼 말이지요.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완전하고 건전한 사람은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프리디히 니체).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스킨)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면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믿어야 합니다. 세상이 우리를 속일지 몰라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절대로 속이지 않습니다. 기쁨의 날을 향해 힘차게 주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집중하는 것이 커진다

-전삼용신부-


한 번은 두 자매님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산책을 하다 머리를 깎으러 미용실에 들어갔습니다. 손님이 없어서 기다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두 자매님도 따라 들어왔습니다. 조금은 고급스러운 가게였습니다. 퇴근 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는지 스마트폰을 보던 팔에 문신한 남자가 제 머리를 깎으려 조금은 투덜거리듯 다가왔습니다.

      저는 머리를 감을 때 샴푸를 쓰지 않습니다. 그런데 누가 좋은 샴푸가 있다고 해서 한 달 정도 샴푸를 썼습니다. 그러나 별 효과가 없는 것 같아 다시 노푸(샴푸를 쓰지 않고 머리를 감는다는 뜻)로 돌아갔습니다. 그랬더니 며칠 동안은 기름이 많이 나와 머리가 기름졌습니다. 대뜸 그 청년이 불만 섞인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아침에 머리 안 감으셨어요?”

      그리고는 자신의 손에 머리 기름이 묻는 것이 기분 나쁜지 짜증나는 표정으로 연신 머리를 만진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털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모습을 제가 보기를 바라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머리를 깎는 것이 아니면 머리를 숙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죄인처럼 그냥 그 청년에게 머리를 맡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자매님들이 미리 계산을 다 해 놓았습니다. 자매님들이 저를 대하는 모습이 심상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샴푸를 하고 난 후엔 그 청년의 태도가 눈에 뛰게 바뀌었습니다. 깊은 절을 하며 미소 띤 얼굴로 또 오시라고 인사하고, 날씨도 추운데 나와서 저희가 걸어가는 것을 뒤에서 계속 지켜보았습니다. 저는 피식 웃음이 나왔습니다.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여러 번 있습니다. 지방 총선을 앞두고 시장님이 저희 성당 신자들에게 잘 부탁드린다고 인사를 나왔습니다. 제가 사복을 입고 청년처럼 생겨서 그런지 시장님은 뻣뻣한 자세로 저의 폴더 인사를 받고 지나갔습니다. 그러다 신자들에게 혹시 신부님이 어디 계시냐고 물어보더니 다시 제 앞으로 와서 깊은 절로 인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뻣뻣하게 인사를 되돌려주었습니다. 받은 대로 되갚아줘야 하는 못된 청년이었던 것입니다.

      ‘안하무인(眼下無人)’이란 말이 있습니다. 자신을 최고로 느껴 사람이 보이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이유는 자신이 너무 커졌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커지면 사람은 개미처럼 작아 보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밟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안하무인(眼下無人)’으로 살게 되는 진짜 이유는 그 사람이 정말로 큰 사람이어서가 아닙니다. 자신이 자신에게만 너무 집중하며 너무 커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것은 집중하면 커집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에서 마더 데레사가 천국에 갈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 조사해 봤더니 79%가 천국에 가실 것이라 대답했습니다. 그들에게 자신들이 천국에 갈 확률을 적어보라고 했더니 87%가 천국에 갈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다들 마더 데레사보다 잘 산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알아본 한 여인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보잘 것 없는 가정의 평범한 아이였고 성전에서 남들처럼 할례를 받기 위해 봉헌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나라는 여인만이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이 여인은 어떻게 작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알아볼 수 있었을까요? 세례자 요한이 자신은 작아져야 하고 그리스도는 커지셔야 한다고 말했던 것처럼 자신을 끊임없이 작게 만드는 작업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한나는 남편과 7년을 살다가 사별하고 84세가 되도록 과부로 지냈습니다.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습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낮추는 삶을 살아온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기도할 줄 모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힘으로 잘 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단식하면 배가 고프고 배가 고프면 자신의 낮은 처지를 알게 되고 그러면 기도하게 됩니다. 하느님밖에 의탁할 분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모든 사람에게 당신을 드러내시지만 오직 자신을 작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이들에게만 구원자로 보이십니다.

      우리 자신을 정결함과 단식, 그리고 기도로 작게 만들어야겠습니다. 자신보다는 하느님과 이웃의 행복을 바라며 살아야겠습니다. 사람은 딱 두 종류밖에 없습니다. 자신을 위한 생각만 하는 사람과 하느님과 이웃의 행복만을 위하는 사람입니다. 자신만을 위하는 사람은 자신이 너무 커져서 안하무인이 됩니다. 그러나 어떻게 이웃을 행복하게 해 줄까만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이 작아져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모든 것에서 하느님을 볼 수 있을 때 하느님처럼 됩니다.


-조재형신부-


지구 사제회의에 참석했습니다. 서울교구의 지구사제회의와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서울교구는 회의를 먼저하고, 식사하였습니다. 회의 시간에 나누는 이야기도 좋지만, 식사하면서 친교를 나누는 것에도 의미를 두었습니다. 부르클린 교구는 먼저 식사하고 회의를 하였습니다. 식사는 간단하게 하고, 회의를 하였습니다. 식사와 친교보다는 회의에 더 비중을 두는 것 같았습니다. 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회의는 진지했고, 합리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왔지만, 가능하면 교구의 회의나 행사에 참석하려합니다. 상관없다고 피하기보다는 힘들어도 부딪치는 것도 좋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보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권력과 재산에 만족한 사람입니다. 지금 누리고 있는 편안함에 안주하는 사람입니다. 변화와 혁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궁궐에 있었던 헤로데 왕이 그랬습니다. 헤로데 왕 곁에서 풍족한 삶을 살았던 신하들이 그랬습니다. 자신들의 잣대로 세상을 보았던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이 그랬습니다. 세상의 것에 취한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현상은 보지만 본질은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계산하고, 분석하는 것은 잘하지만 의미와 가치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탄생을 보았고, 경배한 사람이 있습니다. 참된 행복, 참된 기쁨, 참된 평화를 찾았던 사람입니다. 현실에 만족하기보다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사람입니다. 머리를 들어 별을 보았던 사람입니다. 동방박사들은 별을 보았고, 구세주의 탄생을 보았습니다. 먼 길을 걸어, 주님께 경배 드렸습니다. 황금, 유향, 몰약을 가져왔습니다. 천사의 소리를 들었던 목동들이 주님의 탄생을 보았습니다. 시메온과 한나가 주님의 탄생을 보았습니다. 겸손한 사람, 기도하는 사람, 하느님의 뜻을 찾는 사람은 구세주의 탄생을 알아보았고, 경배하였고, 축복하였습니다.

 

지구사제회의에서 함께 읽었던 기도문을 나누고 싶습니다.

주님, 경배합니다. 당신은 과거에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당신은 이스라엘의 법에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예언자들의 글에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이 사랑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 경배합니다. 당신은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히 오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사랑과 관심을 가지는 이웃들을 통해서 오십니다.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오십니다. 우리의 이웃들과 함께 당신을 경배할 때도 오십니다.

주님, 경배합니다. 당신은 마지막 때에 우리에게 오실 것입니다. 죽음의 시간에 우리와 함께 하실 겁니다. 당신은 인간의 제도적인 실패에도 여전히 권능으로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당신은 인간의 역사 안에 여전히 함께 하십니다.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환영합니다. 주 예수님, 우리에게 오소서.”

 

오늘 독서와 복음은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고, 경배할 수 있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하느님만으로 족하라

 -반영억신부-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2,17). 그러나 현실은 인간의 욕망과 하느님의 뜻 사이에서 방황하고 걸려 넘어지며 은혜를 잊고 살 때가 있습니다. 오늘을 감사하고 늘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사람으로 거듭나기를 희망하며 하느님 안에서 행복하기를 기도합니다.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출신 '한나'라는 예언자를 생각합니다. 그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는 벌써 이름에서부터 행복을 누렸습니다. 한나라는 이름은 “하느님은 은혜로우시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프누엘은 “하느님은 빛이시다”는 뜻입니다. 아세르는 “행복”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빛 안에서 행복을 누리고 있으니 그것이 얼마나 큰 은혜로움이겠습니까? 그는 충만한 은총 안에 있었습니다. 물론 이름 자체가 행복을 가져 다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에 걸 맞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은총이 많아도 담을 그릇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한나는 겉으로만 보면 남편을 일찍 잃은 불행한 여인입니다. 그러나 여든 네 살이 되도록 성전을 떠나지 않고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습니다(루카2,37). 불행한 처지에 매여 있지 않고 오히려 그 처지를 하느님을 섬기는 기회로 만들었습니다. 남편이 있다면 밤낮없이 단식과 기도로 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일찍 과부가 된 것은 불행이지만 온전히 하느님을 차지할 수 있음은 행복입니다. 한나가 행복한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한나의 행복은 그의 처지나 형편에 따라 있고 없는 것이 아니라 천상의 것을 추구함으로써 누리는 행복입니다. 주어진 현실,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를 생각할 때입니다.

 

 한나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기 위하여 성전에 왔다가 메시아이신 아기 예수님을 보았고 시메온이 예수님께 대하여 말하는 모든 것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루카2,33-35). 그리고 구원자를 기다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아기에 관해서 말 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늘 성전을 찾아 기도한 덕택입니다. 우리도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주님을 만나게 되기를 원한다면 꾸준히 기도해야 합니다. 특별히 성체 앞에서 기도하며 주님께 마음을 둔다면 감히 생각하지도 못한 방법으로 주님을 체험케 될 것입니다. 마음의 문을 열기만 하면 주님께서는 사랑과 기쁨, 희망과 평화로 충만히 채워주십니다.

 

청주교구는 내년 1월7일 오전10시에 사제.부제 서품식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2명의 사제 후보자와 3명의 부제 후보자가 주님의 도구로 쓰임받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긴 한나의 기도가 필요한 때입니다. 피정에 임하게 될 후보자를 위해서 희생의 기도를 봉헌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후보자들이 모든 희망을 오로지 천상 것에 둘 수 있도록 빌어주시기 바랍니다. “주님 안에서 즐거워 하여라. 그분께서 네 마음이 청하는 바를 주시리라.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37,5). 그들이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맡길 수 있기를 빕니다.

 

 '한나'예언자가 하느님을 차지해서 행복하였듯이 사제.부제 후보자도 우리도 모두가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셔서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습니다

-이영근신부-


성탄 팔부 축제 제 6일입니다. 태어난 지 40일 만에 아기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봉헌됩니다. 이 봉헌은 예언자 시메온에 의해 거행되는데, 오늘 <복음>은 그때 성전에 있던 여 예언자 한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봉헌은 구약의 사무엘의 봉헌을 떠올려줍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남편 엘카나와 함께 실로의 성소에서 노 사제 엘리를 통해, 아기를 주님께 봉헌했습니다(1사무 1,24-28). 그때에 엘리가 한나를 축복했듯이(1사무 2,20)했듯이,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 시메온도 마리아를 축복합니다(루카 2,34).

또 사무엘의 경우, 성소의 문에서 봉사하는 여자들이 언급된 것처럼(1사무 2,22), 예수님의 경우에서도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긴(루카 2,37) 여 예언자 한나가 등장합니다. 한나는 7년 동안을 남편과 함께 살고, 84세가 되도록 과부로 살았습니다. 마치 밤낮으로 하느님을 예배하고 지냈던 과부 유딧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런데 아기 예수님이 봉헌될 때, 예언자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습니다.”(루카 2,39).

그녀는 은혜’, ‘호의라는 그의 이름의 의미대로, 하느님의 은혜와 호의에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것은 마치 시메온이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루카 2,25)를 기다렸던 것처럼, 그녀는 예루살렘의 속량(루카 2,38)을 기다려 온 까닭입니다. 마치 유딧이 이스라엘을 구한 다음 하느님을 찬양하며 감사의 노래를 부른 것처럼 말입니다(유딧 15,14-16,17).

이처럼, 한나는 아기가 예루살렘을 속량할 메시아임을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사가는 그 감사 찬양의 노래를 전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 복음사가는 우리를 한나의 자리로 불러들입니다. 우리가 아기 예수님께 직접 감사와 찬양의 노래를 지어 부르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밤낮으로 성전에 머물며 우리 주님을 찬양하며 예배하기를 초대합니다. 아멘.


- 오늘 말씀에서 솟아난 기도 -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루카 2,37)


주님!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과부의 마음속의 말을 들으시듯,

미처 말이 되지 않는 제 마음 헤아려 들어 주소서.

성전을 떠나는 일이 없게 하소서. 당신을 떠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언제나 당신 면전에서 기도하게 하소서. 밤낮으로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당신의 자비에 감싸여 감사와 찬양의 노래를 부르게 하소서. 아멘.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송영진신부-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카 2,36-40).”

여기서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라는 말에는,
한나라는 예언자가 메시아께서 오시기를 희망하는 것 외에는
다른 희망이 없이 살고 있었다는 암시가 들어 있습니다.
한나는 오직 그 한 가지만 희망하면서, 또 그 일이 이루어지기만을 기도하면서
살았는데, 드디어 메시아로 오신 아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라는
말에는, 한나가 크게 기뻐했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긴 세월 동안 희망했던 일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한나는 크게 기뻐했고,
하느님께 감사드렸고, 기쁨과 감사로 가득 찬 마음으로
그 아기가 메시아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증언했습니다.

그런데 복음서 저자는 한나가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는 것만 기록했고,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한나는 바로 앞에 나오는 시메온과 같은 말을 했을 것입니다.
시메온은 아기 예수님을 만나자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했습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 2,29-32).”
이 찬미가는 메시아를 만난 것에 대한, 즉 메시아 강생을 직접 본 것에 대한
자신의 기쁨과 감사를 표현한 찬미가이고,
예수님이 온 세상 모든 사람의 메시아라는 것을 증언하는 찬미가입니다.

또 시메온은 마리아에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4-35).”
이 말은, 예수님의 수난을 예언하는 말인데,
예수님 수난 때에 마리아가 겪게 될 고통을 예언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또 이 말은, 예수님의 구원 사업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고,
사람들 쪽에서 능동적으로 응답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즉 메시아께서 세상에 오셨다고 해서
사람들이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어도 전부 다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만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거부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박해하고 죽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었습니다.
‘반대를 받는 표징’이라는 말은 ‘박해의 표적(과녁)’이라는 뜻입니다.>
시메온과 한나는 신심이나 신앙생활 모습 등이 매우 비슷한 인물입니다.
성령께서는 메시아에 대해서 ‘같은 증언’을 하도록
그 두 사람을 함께 증인으로 선택하셨습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메시아께서 곧 오신다는 것을 즈카르야가
예언했고(루카 1,68-79), 아기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천사에게서 들은
목자들이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었고(루카 2,17),
그리고 아기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라는 것을 시메온과 한나가 증언했습니다.
그런데 그 예언과 증언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 마태오복음에는 동방박사들의 증언이 있습니다(마태 2,2).>
그 예언과 증언을 들은 사람들이 많았을 텐데,
어떤 사람은 놀라고, 어떤 사람은 호기심을 느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대로 듣지 않고 흘려들었던 것 같습니다.
또는 그 예언과 증언들을 믿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특별히 반응을 보인 사람이 없었으니
사람들의 반응을 기록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일을, “온 세상에 ‘기쁜 소식’이 선포되었는데도 사람들은 듣지 않았다.”
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그런 모습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마태 13,15).”

어떤 장애 같은 것이 있어서 ‘기쁜 소식’을 듣지 못하는 것은 탓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소리와 말을 듣느라고, 또는 딴 생각을 하느라고,
들어야 할 ‘기쁜 소식’을 듣지 않은 것은 그 사람 자신의 탓입니다.
(자기가 안 들어서 못 들었으면서도
“나는 못 들었다.” 라고 우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우겨도 하느님 앞에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묻습니다. 그들이 들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까? 물론 들었습니다.
‘그들의 소리는 온 땅으로, 그들의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 나갔다.’(로마 10,18)”
처음부터 ‘기쁜 소식’은 다양한 방법으로 모든 사람에게 선포되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기를 희망하면서 메시아를 기다리거나 찾는 사람만
그 소식을 알아듣게 되고, 믿게 됩니다.
구원에 대해서 관심도 없고, 메시아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는 사람은
들어도 듣지 못합니다.

마태오복음과 루카복음을 합해서 보면,
‘메시아 강생’이라는 ‘기쁜 소식’에 대해서 반응을 보인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헤로데입니다.
메시아께서 태어나셨다고 동방박사들이 알려 주자(마태 2,2),
헤로데는 그 메시아가 자기 왕권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해서
메시아를 죽이려다가 베들레헴의 아기들을 모두 죽였습니다(마태 2,16).
그는 자신의 권력과 부귀영화가 유지되기만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기쁜 소식’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고, 자기 마음대로 ‘새 왕의 탄생 소식’으로만
생각해서 왕권을 잃을까봐 두려워했고, 결국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는 헛된 탐욕 때문에 메시아를 거부하고, ‘영혼의 구원’도 거부한 자입니다.
오늘날에도 헤로데 같은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2,36-40: 한나라는 과부의 기쁨

시메온의 뒤를 이어 여예언자 한나가 등장하고 있다. 먼저 시메온이 아기를 뵙고 품에 안아 본 다음에 한나가 나타났다. 한나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38)고 한다. 복음에 그녀의 조상과 지파를 밝힘으로써 자기가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확인시키고 있다. 그들이 증인이 되는 것이다.

 

신비적인 의미로 한나는 배필의 죽음으로 과부가 된 교회를 의미한다.

 

오늘 복음에서는 성전에서 기도하며 지내다가 하느님의 구원을 발견한 한나라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 여인이 과부라고 소개한다. 인생에 있어서 과부라고 하는 생애는 남편과 사별을 하고 외롭고 슬픔이 가득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남편을 잃은 슬픔은 인간적으로 참으로 비통에 빠지기 쉬운 경우라고 하겠다. 이런 경우에 우리는 흔히 두 가지 모습을 볼 수 있다. 하나는,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나에게 무슨 죄가 있어서 이렇게 하시는가?” 하며 하느님을 원망하고 하느님을 외면하고 냉담해 버리는 경우가 있다.

 

다른 하나는, 사랑하는 이를 잃은 뼈아픈 체험을 통하여 현세의 삶과 죽음의 허무함을 통감하여 모든 것을 하느님께 더욱 의뢰하고자 하는 경우가 있다. 현세에서 당하는 슬픔은 단지 이런 여인의 슬픔만이 아니라,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당하는 모든 고통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사람은 자신이 당하는 고통을 통해서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외면하게도 되고, 신앙의 깊이를 더할 수도 있어 그 뿌리를 튼튼하게도 한다. 이 모든 것은 그러한 고통을 통해서 결국 하느님을 자기 생활에서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나라는 여인은 결혼한 후 7년 동안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된 사람이었다. 84세에 이르도록 성전에 몸담아 하느님께 봉사와 기도로써 지내왔다. 이것은 하느님 공경에 참으로 정성스러운 생활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복음에서 그러한 그 할머니가 성전에서 봉헌되는 구세주 아기 예수가 누구신가를 알아보고 기뻐하며 다른 이들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증언하였다고 한다.

 

오늘 복음의 한나 할머니는 과부가 되었으나 자신의 삶이 하느님 안에 있음을 알았고 충실히 믿었기 때문에, 또 하느님이 자신의 삶에서 최선의 분이시라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성전에서 일생을 봉사와 기도로써 살 수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나는 인류를 구원하러 오시는 구세주 아기 예수를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기쁨을 맛보게 된 것이다.

 

남녀가 혼인하여 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귀엽고 믿을 수 있는 자녀들을 낳고 단란한 가정을 꾸미고, 한 생애를 노년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원하는 대로 함께 할 수 있다면 얼마나 현세의 큰 축복이겠는가? 그러나 현실적으로 볼 때 모든 부부가 그렇지는 못하다. 또 부부 중에 어느 한 편이 세상을 먼저 떠났다고 해서 모두가 불행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나이를 먹고 기운이 없어져도 오늘 복음의 안나 할머니처럼 믿음 안에서 주님께 봉사하며 기도하는 속에서 구세주 그리스도를 찾고 만나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모두 이러한 삶으로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은총을 청하여야 하겠다.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루카 2, 38)

-한상진신부-


성탄의
이야기가
우리의 온 세상을
다 뒤덮어
버렸습니다.

희망이 필요한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희망으로
오셨습니다.

성탄의
이야기 하나가
우리에게
가장 강한 희망을
선사합니다.

우리를 살리는
희망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희망을 통해
우리들의 하느님을
기쁘게 만납니다.

희망은 멈추지
않습니다.

희망의 예수님께서
우리를 껴안아
주십니다.

희망을 꿈꾸는
사람이 되게합니다.

희망을 찾는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시어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대신할
희망과 속량은
없습니다.

성탄을 기쁘게
이야기하는
우리의
일상되십시오.

우리 삶안으로
주님의 속량이
성탄으로
들어왔음을
믿습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우리는 복음에서 일생을 하느님께 바친 한 여인을 만납니다. 바로 예언자 한나입니다.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를 데리고 들어오자..."(루카 2,27)

오늘 대목 바로 앞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시메온이 아기와 그 부모를 맞아 하느님을 찬미하여 마리아께 예언을 하지요.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루카 2,38)

마침 그때 한나도 성전에 들어가 아기 예수님을 뵙니다. 그녀가 얼마나 기뻤을지 상상해 봅니다. 그녀야말로 하느님께 일생을 건 여인이니까요.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루카 2,37).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이후 그녀는 세상에 눈길을 주지 않습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성전 안, 하느님 앞을 지키며 머무릅니다. 그녀의 단식은 세상의 죄에 대한 보속이고, 그녀의 기도는 우선, 하느님과의 사랑, 그리고 세상을 위한 전구와 중재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가 가야할 길을 단도직입적으로 제시합니다.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1요한 2,15).

여기서 말하는 "세상"을 성과 속의 대립 개념으로 보아서는 곤란합니다. 이 세상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좋고 아름다우며 그 본성상 선한 하느님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지금 서간의 저자가 말하는 "세상"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좋은 본성을 왜곡하고 해치는 악의 힘을 가리킵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려는 영혼을 유혹하고 무너뜨려 결국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게 만들 뿐만 아니라 대적하게까지 만드는 어둠의 권세입니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1요한 2,15).

이유는 간단합니다. 아무도 한 번에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지요. 선과 악, 하느님과 베엘제불, 빛과 어둠을 동시에 사랑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아버지의 사랑"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기도 하고 우리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기도 합니다.

복음 장면으로 돌아갑니다. 그날 그 축복 넘치는 장소 안에 있던 인물 중, "세상"에 한눈이 팔린 이가 있었던가요? 시메온과 한나, 요셉과 마리아, 네 명의 공동 주인공들은 오직 한 분 아기 예수님께 온전히 몰입하고 있습니다. 이 순간 여기에 오기까지의 그들의 삶이 오직 살아계신 하느님을 향했었기에 이 엄청난 축복의 증인이 된 것이지요.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7).

육의 욕망, 눈의 욕망,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세상 것입니다. 거기에 몰두하며 살아가는 이에게는 메시아가 눈 앞에 나타나셔도 아무 관심 없을 것이니 그저 놓치고 말 것이고, 어쩌면 놓쳤다는 사실조차 모를 겁니다.

오늘 성전에 머물러 하느님을 섬기던 두 노인과 예수님의 만남은 그들이 바쳐온 사랑과 섬김에 대한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이미 주님 곁에서 영원을 살던 그들의 행복은 기쁜 소식이 전해지는 곳마다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갈수록 한나의 삶에 끌립니다.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삶!" 멋지지 않나요?

하느님 현존 안에 머무르며 세상의 죄를 보속하고, 하느님과 사랑을 나누며, 세상의 아픔을 그분의 발치께로 보듬어 올리는 기도를 밤낮없이 지속하는 삶. 깨어 있어도 잠을 잘 때에도 오로지 하느님께만 몰두하니 주님께서는 구원의 현장을 그의 앞에서 감추실 수 없을 겁니다. 신비는 그에게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삶의 형태로 살아가건, 어떤 처지이건 영 불가능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출발은 우리 사랑의 저울 추를 세상 쪽에서 하느님 쪽으로 조금씩 옮기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Shall we start?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12월 30일 토요일 성탄 팔일 축제 내 제6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밤낮 없이 단식과 기도로써  하느님을 섬겨 왔다.(루가 2,36-40)


  미국에서 마더 데레사가 천국에 갈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 조사해 봤더니 79%가 천국에 가실 것이라 대답했습니다. 그들에게 자신들이 천국에 갈 확률을 적어보라고 했더니 87%가 천국에 갈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다들 마더 데레사보다 잘 산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알아본 한 여인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보잘 것 없는 가정의 평범한 아이였고 성전에서 남들처럼 할례를 받기 위해 봉헌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나라는 여인만이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이 여인은 어떻게 작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알아볼 수 있었을까요? 세례자 요한이 자신은 작아져야 하고 그리스도는 커지셔야 한다고 말했던 것처럼 자신을 끊임없이 작게 만드는 작업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한나는 남편과 7년을 살다가 사별하고 84세가 되도록 과부로 지냈습니다.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습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낮추는 삶을 살아온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기도할 줄 모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힘으로 잘 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단식하면 배가 고프고 배가 고프면 자신의 낮은 처지를 알게 되고 그러면 기도하게 됩니다. 하느님밖에 의탁할 분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모든 사람에게 당신을 드러내시지만 오직 자신을 작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이들에게만 구원자로 보이십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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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적인 의미로 한나는 배필의 죽음으로 과부가 된 교회를 의미한다.

남편을 잃은 슬픔은 인간적으로 참으로 비통에 빠지기 쉬운 경우라고 하겠다이런 경우에 우리는 흔히 두 가지 모습을 볼 수 있다하나는, “하느님도 무심하시지나에게 무슨 죄가 있어서 이렇게 하시는가?” 하며 하느님을 원망하고 하느님을 외면하고 냉담해 버리는 경우가 있다.

다른 하나는사랑하는 이를 잃은 뼈아픈 체험을 통하여 현세의 삶과 죽음의 허무함을 통감하여 모든 것을 하느님께 더욱 의뢰하고자 하는 경우가 있다현세에서 당하는 슬픔은 단지 이런 여인의 슬픔만이 아니라원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당하는 모든 고통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즉 사람은 자신이 당하는 고통을 통해서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외면하게도 되고신앙의 깊이를 더할 수도 있어 그 뿌리를 튼튼하게도 한다이 모든 것은 그러한 고통을 통해서 결국 하느님을 자기 생활에서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욱현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