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29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은 나자렛의 성가정을 기억하며 이를 본받고자 하는 축일이다. 1921년 이 축일이 처음 정해질 때에는 ‘주님 공현 대축일’ 다음 첫 주일이었으나, 1969년 전례력을 개정하면서 ‘성탄 팔일 축제’ 내 주일로 옮겼다(팔일 축제 안에 주일이 없으면 12월 30일).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2001년부터 해마다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부터 한 주간을 ‘가정 성화 주간’으로 지내고 있다. 가족 구성원 모두가 가정 공동체의 소중함을 되새기는 가운데 진정한 사랑이 넘치는 보금자리로 가꾸어 나가게 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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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주님의 천사가 이집트에 있는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거라.
아기의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 죽었다.”
요셉은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갔다.
(마태오 2,13-15.19-23)
The angel of the Lord appeared in a dream
to Joseph in Egypt and said,
“Rise, take the child and his mother and go to the land of Israel,
for those who sought the child’s life are dead.”
He rose, took the child and his mother,
and went to the land of Israel.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집회서의 저자는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는 것은 자신의 죄를 상쇄하는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콜로새의 신자들에게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답게 살아가라고 권고한다(제2독서). 이집트로 피신하였던 요셉은 헤로데가 죽었다는 천사의 말을 듣고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로 돌아와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가서 자리를 잡는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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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한 가정의 행복은 하느님의 선물이므로 가정의 일원들에게 헌신과 애정이 요구됩니다. 이러한 행복은 서로를 사랑으로 감싸 줄 때 충만해집니다. 모든 이의 공동선을 위한 헌신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행복의 조건입니다.오늘 복음에서는 아기와 그 어머니의 목숨을 살리고자 전적으로 자신을 희생하는 요셉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동방 박사들에게서 메시아의 탄생 이야기를 들은 헤로데 임금은 베들레헴과 그 인근에 있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입니다. 예수님에게도 그런 위험이 닥쳐오자 주님께서 요셉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요셉은 일어나 어떤 질문도 하지 않고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서둘러 피신합니다. 부리나케 떠나면서 그동안 공들여 쌓은 성과와 집과 친구들을 모두 버립니다. 그의 행복은 아기와 그 어머니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헤로데의 아들이 다스리는 유다로 들어가지 않고 갈릴래아의 작은 고을, 나자렛으로 갑니다. 요셉의 태도는 하느님의 부성에 대한 반영과 동참을 나타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기와 그 어머니를 참으로 걱정하시고 천사를 보내시어 요셉에게 해야 할 일을 일러 주십니다. 요셉의 배려는 하느님의 배려를 가리킵니다. 하느님에게서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흘러나오고 요셉의 가정은 그분의 인도를 받습니다.가정에서 애정이 이기적으로 변하면 나쁜 감정과 관계 때문에 불목이 가정을 지배합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만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요셉이 아기와 그 어머니와 함께하였던 것처럼, 가장 힘없는 이들, 가장 작은 이들, 가장 소홀히 한 이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사랑이 충만한 나자렛의 성가정
-김창선 선교사-
주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분의 길을 걷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그들의 마음을 다스립니다. 교회는 성탄 팔일 축제를 지내면서 한해의 마지막 주일을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로 기립니다. 그리스도인 가정이 나자렛의 성가정을 본받아 가정 공동체의 소중함을 되새기고 사랑이 충만한 보금자리로 거듭나기 위함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성가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시고, 일치의 교회를 이루며, 사랑을 배우는 학교임을 마음에 간직합니다. 성가정은 주님의 자비로운 사랑에 감사하고, 사랑의 일치로 친교를 이루는 기쁨을 누리며, 기도하는 가운데 복음의 일꾼을 기르는 좋은 못자리입니다.
먼저 성가정은 예수님을 모시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삶의 보금자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분(「가톨릭 교회 교리서」 210항)이십니다. 헤로데는 빛나는 별을 따라온 동방박사들로부터 메시아의 탄생 소식을 들은 뒤 정적을 없애 권좌를 지키려고 베들레헴 일대에 두 살 이하의 모든 남아를 죽여 버리라는 사악한 명령(마태 2,16)을 내립니다.
하느님께서 성가정을 보호(마태 2,13.20)하십니다. 주님의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아기와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라고 일러줍니다. 요셉은 밤길을 나섭니다. 산모인 마리아에게도 큰 고통과 시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집트는 유다 백성의 전통적인 피난처(1열왕 11,20; 예레 26,21)이고, 로마의 통치권이 미치지 않는 안전한 곳입니다. 헤로데가 죽자 천사가 꿈에 요셉에게 다시 나타나 이집트에서 불러냅니다.
헤로데는 죽기 전 다스리던 왕국을 세 아들에게 나누어줍니다. 유다 지역은 헤로데처럼 잔인한 아르켈라오스가 다스리는 곳이기에,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올 때 요셉은 꿈에 지시를 받고 안전하고 평화로운 갈릴래아에 자리를 잡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할 때까지 삼십 년 동안 갈릴레아 호수 서쪽 24㎞ 떨어진 나자렛 고을에 사셨기에 ‘나자렛 예수님’으로 불립니다.(마태 2,23; 판관 13,5; 16,17)
나자렛 성가정에는 성자와 어머니와 아버지가 계십니다. 참빛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사랑과 성덕의 샘이요, 그리스도인 생활의 중심이십니다. 성모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 가정의 어머니십니다. 동정녀의 순종과 마음에 간직한 희생정신이 사랑과 평화의 성전을 이룹니다. 의롭고 정결하신 성 요셉은 성자와 마리아를 충실히 보호하신 가정생활의 자랑이십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가정입니다.
다음으로 성가정은 친교로 사랑의 일치를 이루는 가정교회(「가톨릭 교회 교리서」 1655)입니다. 인간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제1독서는 주님의 자녀에게 주님을 섬기는 덕성(믿음, 소망, 사랑)을 넘어 부모에게 효도하는 책임(넷째 계명)을 일깨웁니다. 장성한 자녀들은 힘자라는 데까지 부모의 노후와 질병, 외로움과 곤궁함을 잘 보살펴야 합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선한 일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닙니다. 자녀의 죄를 용서받는 보상(집회 2,3.14)이 주어집니다.
제2독서(콜로 3,12-21)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의 가정 윤리를 일깨워줍니다. 주님께 선택된, 사랑받는 사람은 가정의 행복을 위하여 연민, 친절, 겸손, 온유, 인내로 대합니다. 불평할 일도 참고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듯이 서로 용서합니다. 가족이 함께 주님께 올리는 찬미와 찬양이 아름답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시편 상해’에서 성가는 두 배의 기도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는 마음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주는 친교의 끈입니다. 주님 사랑에 충실하면 가족도 내 몸처럼 사랑합니다.
끝으로 성가정은 참된 인성교육의 신앙학교(「가톨릭 교회 교리서」 2226)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가족과 함께 사랑이 충만한 가정생활을 하는 가운데 사랑과 환대를 바로 배울 수 있습니다. 가족들이 주님의 뜻을 따라 사랑과 친교, 겸손과 인내와 용서를 처음으로 체험하는 장소도 가정입니다. 예수님께서 부모에게 순종하며 사신 나자렛 성가정의 모범을 본받은 자녀는 올곧게 자라 복음의 도구가 됩니다.
오늘날 급속한 사회변화 속에서 가정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누구나 행복한 가정을 바라지만 현실은 녹녹하지 못합니다. 혼인 생활에 실망과 고통, 증가하는 이혼율, 빈번한 가정폭력과 아동학대, 무의탁 노인, 실직 가정, 미혼모의 발생과 낙태 등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가정은 생명과 사랑의 요람(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교서 「구원에 이르는 고통」 212항)입니다. 모든 가정이 나자렛 성가정의 모범을 본받아 현세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공경과 사랑으로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것이 새 복음화의 지름길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사랑의 대화를 나누며, 한 식탁에서 음식을 나눌 때 가족의 유대는 공고해집니다.
가정의 행복은 공동선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는 가정은 행복합니다. 친교와 기도로 일치를 이루는 성가정은 사랑과 평화의 보금자리입니다. 성가정의 수호자이신 성모 마리아와 성 요셉, 가난하고 고통 받는 가정에도 사랑이 꽃피어 그리스도의 향기가 서리게 빌어주소서. 아멘.

모든 가정의 모범이신 나자렛 성가정
-이성진 신부-
오늘은 2019년의 마지막 주일이면서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그리 고 오늘부터 한 주간을 ‘가정 성화 주간’으로 보냅니다. 예수, 마리아, 요셉, 이 세 분 이 이루는 가정을 우리는 ‘성가정’이라 부르며 모든 가정의 모범으로 삼아 본받고자 합니다.
사실 우리보다 훨씬 어렵고 시련이 많았던 가정이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이었 습니다. 가장인 요셉의 직업은 목수였습니다. 그 시대 그 나라의 목수는 대개 천민들 의 직업으로, 한 끼 배부르게 먹는 것도 힘겨웠다고 합니다. 따라서 ‘성가정’은 힘겨운 생활고를 겪을 수밖 에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성가정’은 약혼자였던 마리아의 임신 사실이 드러나면서 출발부터 삐거덕거렸고, 아들 예수는 젊은 나이에 십자가에 처형되고 마는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가정이었습니다. 이런 가정이 무슨 이상적인 가정이고, 우리가 본받아야 할 가정이겠습니까?
하지만 이 가정이 특별한 것은 이렇게 상상하기도 힘든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늘 하느님께 기도하고 하느 님의 뜻을 찾으며 인내하고 승화시켰다는 것입니다. ‘성가정’으로 부르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이 가정의 중심 에는 언제나 하느님께서 함께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하는 가정, 모든 어려움을 하느님 안에서 해결하 는 가정, 가족이 서로 아껴주면서 위해주는 가정. 이런 가정이 성가정이고, 이런 가정을 ‘성가정’이 보여 주 셨고, 우리는 이것을 본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시대 가정은 왜 이렇게 어려움을 승화시키지 못 하고 조그마한 일에도 상처를 받고 신음하는 것일까요? 한마디로 하느님 중심으로 살지 못해서입니다.
우리는 가정의 가장이 예수님이시라는 고백으로 거실이나 방의 한가운데 잘 보이는 곳에 십자가를 모셔놓 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실제 삶에서는 그 십자가와는 영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조그마한 시련 이 와도 그것을 십자가로 받아들이고 온 가족이 힘을 모아 기도하며 하느님 안에서 이겨낼 생각은 않고, 다 들 남 탓으로 돌려 대다 보니 가족이 서로 갈라져 있는 것이 우리네 가정이 아닙니까? 이럴수록 온 가족이 기도하며 서로 믿고 서로를 격려하면서 헤쳐나갈 때 진정 사랑이 넘치는 보금자리 성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는 지난해를 돌아보며 탓하지 말고 감사합시다. 어찌 됐건 지금까지 살아왔으니 말 입니다. 그리고 새해엔 더 열심히 잘해보자고 서로 격려하며 하느님의 이끄심을 간절히 기도합시다.

성가정 되소서
-김현진 신부-
한국에서 사제 생활을 하면서 가장 저를 무안하고도 쑥 스럽게 하는 인사말은 바로 ‘신부님, 성인(聖人) 사제 되세요’ 습니다.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저 같은 사람이 무슨 성인 이 될 수 있다니요?’라고 속으로 반문하며 한사코 손사래 를 치곤했습니다. 그런데 신자들의 이러한 인사말이 한국 에서만 존재하리라 생각한 것은 저의 큰 오산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지구 반대편에 있는 과테말라의 본당에서도 가 끔 신자들이 ‘신부님, 성인 사제 되세요’라는 똑같은 인사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저는 그 말 을 듣자마자 화끈거리는 마음을 달래며 한사코 부정했습니 다. 하지만 돌이켜 보니, 신자들이 바라는 사제상을 거부한 참으로 교만한 저의 마음이었습니다. 한국이나 과테말라나 모든 신자들은 사제들이 성인들과 같이 거룩한 삶을 살아 가며 예수님을 닮은 착한 목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인데, 제 가 그 깊은 속뜻을 헤아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득 ‘왜 사제만 성인이 되라 하시나?’라는 생각 이 들었습니다. 성덕의 삶은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 신 초대입니다. 물론 한 명의 그리스도인이 시복과 시성을 통해 가톨릭교회의 성인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도 어려운 절차인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부족한 우리의 삶이 거룩하신 가톨릭교회의 성인들의 발끝에도 못 미침은 너 무나도 잘 알고 있지만, 그분들의 모범과 거룩한 삶을 따
라 하루하루 성화하며 살아가려는 우리들의 노력마저 내 려놓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가톨릭교 회가 기념하는 성가정 축일은 가정생활을 하는 그리스도 인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큰 의미가 있는 축일입니다. 교회의 기초인 가정이 거룩하게 성화된다면 그것이 바 로 성가정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께서 말 하듯이 ‘가정 안에서 서로 참아주고 용서해 주며,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고 평화가 우리 가정을 다스리게 내어 맡긴 다면’, 분명 우리 가정은 그리스도의 말이 풍성히 머무르 는 성가정이 되고, 성가정은 성교회의 기초가 된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지향을 마음에 두고, 그동안 신부님들에게만 드 렸던 특별한 인사말과 기도를 이제 우리들도 서로서로 ‘성 가정 이루세요’라고 함께 나눴으면 합니다. 모든 사제들이 성인 사제처럼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신자들의 마음 처럼, 저도 모든 신자들이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 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고”(콜로 3,12) 성가정 이루시기 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예수님, 성모님, 성 요셉처럼 모두 ‘성가정 되소서.’

바라는 성가정 vs 현실 가정
-윤장호신부-
오늘 우리는 예수님과 성모님 그리고 요셉 성인이 이루셨던 성가정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성가정이라고 한다면 어떤 가정을 말할까요? 행복한 가정? 기쁨이 넘치는 가정? 아무런 걱정이 없는 가정? 어쩌면 이 러한 가정을 성가정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성모님 그리고 요셉 성인이 이루셨던 가정 은 그러한 가정이 아니었습니다. 그 가정은 오히려 불행해 보이는 가정이었고, 눈물이 그칠 일이 없었던 가정 이었으며, 걱정이 끊이지 않는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왜 그 가정을 성가정이라고 말하며, 그 가정을 본받 아야 한다고 말할까요? 잘못과 실수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올바른 삶을 추구하는 가정이 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가정은 끊임없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느님 뜻을 받아서 예수 잉태 소식을 받아들이는 성모님이었으며,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마리아를 아내 로 받아들이는 요셉이었습니다. 또한 꿈 속의 지시에 따라서 베들레헴에서 이집트로, 또 이집트에서 나자 렛으로 옮기는 등 철저히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가정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일까요? 바로 그 내용이 오늘 제1독서와 제2독서에 나옵니다. “얘야, 네 아버지가 나이 들었을 때 잘 보살피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슬프게 하지 마라. 그가 지각을 잃 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그를 업신여기지 않도록 네 힘을 다하여라. 아버지에 대한 효행은 잊혀지지 않으 니, 네 죄를 상쇄할 여지를 마련해 주리라.”(집회 3,12-14) “아내 여러분,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주님 안에 사는 사람은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남편 여러분, 아내를 사 랑하십시오. 그리고 아내를 모질게 대하지 마십시오. 자녀 여러분, 무슨 일에서나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 이 주님 마음에 드는 일입니다. 아버지 여러분, 자녀들을 들볶지 마십시오. 그러다가 그들의 기를 꺾고 맙니다.” (콜로 3,18-21)
이 두 말씀처럼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바로 성가정으로 가는 길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이야기하 고 나면 많은 신자들이 “신부님, 현실은 이상과 달라요!”라고 말합니다. 이 말에도 공감합니다. 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현실과 이상은 다릅니다.” 그러나 현실과 이상이 다른 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⑴ 가족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⑵ 내 생각을 자녀들에게 주입하려고 합니다. ⑶ 내 판단 기준에 가족들을 맞추려고 합니다. ⑷ 서로 자기가 원하고, 추구하는 것만을 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현실과 이상이 달라집니다. 그러기에 성가정을 이루기 위해 서로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내려놓고,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합니 다. 그리고 서로의 말을 듣기 위해 인내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여러분의 가정이 진정한 하느님의 뜻을 따 르는 성가정을 향해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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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부부는 대화가 너무 부족합니다. 그래서 서로를 잘 모르게 되고, 갈등이 계속 나오는 것입니다. 각자의 장단점을 다 나누어야 합니다. 그래야 화목한 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날 밤, 아내는 집에 와서 남편에게 서로 부족한 점을 하나씩 번갈아 나눠보자고 했습니다. 남편은 낮에 받은 교육 내용이 생각나면서 그렇게 하자고 했지요. 그러자 곧바로 아내 입에서 남편의 단점이 쏜살같이 이렇게 나옵니다.
“당신은 식사할 때 너무 소리를 내면서 먹어요. 이제 주위 사람도 생각해서 앞으로는 좀 교양 있게 좀 드세요.”
이번에는 남편 차례입니다. 남편은 아내의 얼굴을 보면서 생각합니다. 한참을 바라만 보다가 마침내 남편이 이렇게 말합니다.
“여보! 아무리 생각하려 해도 별로 생각나지 않네.”
이기고 지고를 따질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우위에 선 사람은 누구일 것 같습니까? 사실 단점을 따지면 한도 끝도 없을 것입니다. 세상의 그 누구도 완벽한 사람은 없으니까요. 더군다나 아내가 먼저 자신의 단점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따라서 내 마음에 들지 않는 한 가지를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별로 생각나지 않네.”라면서 아내에 대한 믿음을 표시합니다.
이런 마음이 가득한 가정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상대방의 단점을 드러내는 가정이 아니라,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믿음이 가득한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을 지내면서 이 가정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성가정이란 어떤 가정을 말할까요? 단순히 모두가 세례를 받고서 신앙생활을 함께 하는 가정입니까? 이것만을 가지고 성가정이라고 말하기는 부족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가정 안에 단 하나의 고통 시련도 없이 모든 것이 잘 되어 남들의 부러움을 받는 가정을 말할까요? 이것도 예수님의 가정을 떠올려 보면 아닌 것 같습니다.
복음만을 봐도 예수님이 태어나신 뒤에 얼마나 큰 어려움이 있었는지를 알 수 있지요. 헤로데의 폭력을 피해서 이집트까지 피신하여야만 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천사의 메시지를 받아 이스라엘 나자렛으로 이동하지요. 지금처럼 이삿짐센터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또 교통이 좋았던 것도 아닙니다. 이 밖에도 어려움이 이 가정 전체에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래도 성가정이라고, 또 이 가정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은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면서 함께 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믿음의 가정을 만드십시오.


어느 마을에 400년이 넘은 나무가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거목이었습니다. 그동안 나무는 참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수십 차례 산불의 위험도 있었고, 자그마치 14번이나 벼락을 맞는 고초도 겪었습니다. 그러나 나무는 그 많은 위험 속에서도 긴 시간을 꿋꿋이 견디어 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갑작스럽게 이 강대한 거목이 말라 죽었습니다. 사람들이 알아낸 원인은 작은 딱정벌레였습니다. 나무속 줄기를 갉아 먹는 딱정벌레들 때문에 결국 나무 속살에 상처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 거목에 비한다면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상처들은 조금씩 모이면서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상처가 된 것입니다.
작은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됨을 이 이야기는 전해줍니다. 그런데 이는 우리 가정 안에서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이 정도는 이해해주겠지’ 등의 말로 우리는 쉽게 말하고 쉽게 행동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과 행동이 모여서 거목이라는 가정이 쓰러질 수도 있습니다.

누구와 싸워야 하는지 모를 때 가정은 파괴된다
-전삼용신부-
‘희망기도’로 유명한 대구교구 최봉도 신부님이 본당 사목하실 때 한 자매가 울면서 신부님을 찾아와 정말 하느님이 계시기나 한 것이냐고 따졌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들어본 즉 이렇습니다. 식구가 4명인데 월세로 한 방에서 산다는 것입니다. 남편은 알코올중독이라 일도 나가지 않고 술만 마시고, 큰 딸은 결핵에 걸렸지만 돈이 없어서 병원에 데려가지 못하여 집에 있고, 작은 딸은 가출해서 소식도 없는데, 이번엔 자신이 다니는 직장이 부도가 나 그 자매까지 직장을 잃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월세를 내지 못해서 쫓겨날 판이고 이제 모든 식구가 길에 나앉게 되었다고 하소연하는 것이었습니다.
최봉도 신부님은 그 자매에게 그러면 일주일간 속는 셈 치고 ‘감사기도’를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남편이 알코올중독인 것도, 딸이 하나는 결핵으로 죽어가고, 또 하나는 가출하여 집에 없는 것도, 또 자신이 직장을 잃게 된 것도 다 하느님의 은총이니 감사의 기도를 드리라고 하였답니다. 그 자매는 불난데 기름 붓느냐며 화를 내고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습니다.
그런데 일주일 뒤 그자매가 환한 얼굴로 신부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러 찾아왔습니다. 신부님께 화를 내고 집에 돌아가서는 할 것이 없더랍니다. 그래서 한풀이를 할 겸 하루 종일 방에서 큰 소리로, “남편이 알코올중독이라 감사합니다. 내 딸이 결핵에 걸려 감사합니다. 막내가 가출을 해서 감사합니다. 제가 직장을 잃어서 감사합니다.”라며 계속 부르짖었다고 합니다. 그 다음 날도 목이 쉬어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지만 속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본당 빈첸시오회에서 오더니 오스트리아 선교사 하 마리아가 운영하는 결핵요양소에서 딸을 무료로 받아주겠다는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그러니 진짜 감사의 기도가 나오더랍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문 밖에서 “엄마!”하는 작은 딸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집에 돌아온 것입니다. 정말 감사의 기도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남편이 생전 처음으로 술을 안마시고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동안 미안했다고 하며 아예 술을 끊었고 아파트 경비원으로 취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 자매도 옆에 병원이 새로 생겨서 거기에 주방근무자로 취직이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일주일 안에 일어났다고 합니다.
만약 내가 마귀라면 교회를 먼저 파괴할까, 가정을 먼저 파괴할까를 생각해보았습니다. 내가 마귀라면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가정을 먼저 파괴하겠습니다. 가정이 파괴되면 교회는 자연히 붕괴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가정을 파괴할까를 생각해봅니다. 서로서로 미워하게 만들면 됩니다. 어떻게 하면 미워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 어려운 일이 닥치게 하면 됩니다. 그 두려움 때문에 상대의 탓을 하게 되면 가정은 자연적으로 붕괴됩니다. 아이는 못생겨서 결혼 못하게 되면 어떻게 하느냐고 부모 탓을 하게 만들고 아내는 돈을 못 버는 남편 탓을 하게 만들며 남편은 바가지만 긁는 아내 탓을 하게 하면 됩니다. 이 모든 것은 걱정과 두려움을 줌으로써 해결됩니다.
집안의 걱정과 두려움이 있고 그것 때문에 서로 싸움을 하게 된다면 그것은 싸움의 상대를 잘못 고른 것입니다. 마귀와 싸워야하는 것을 모르고 마귀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정이 파괴되는 이유는 이렇게 누구와 싸워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 ‘성가정’이 나옵니다. 성가정을 파괴하려는 마귀도 등장합니다. 여기서는 헤로데 왕입니다. 자신이 왕을 하고 싶어서 예수님을 죽이고 싶어 합니다. 이 두려운 상황에 요셉이 이집트로 피신하자고 말합니다. 천사가 알려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모 마리아는 두말도 하지 않고 요셉의 말을 따릅니다. 하느님의 뜻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아기들은 다 죽었지만 성가정은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평화로울 수 있었습니다. 이분들이 성가정을 이룰 수 있었던 이유는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하는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가정을 파괴하려는 헤로데, 즉 마귀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찾을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그것들이 주는 두려움을 극복하는 법을 알아야합니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법은 다른 것이 없고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가정은 순종하는 가족입니다. 순종하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느님 뜻을 알기 위해 기도해야합니다.
부산교구 허성 야고보 원로 신부님이 법원 옆에 있는 부산의 모 성당에서 본당신부를 하고 계실 때의 일입니다. 마침 이혼하기 위해 법원에 온 부부가 법원이 점심시간이 된 터라 갈 곳이 없어 성당을 배회하고 있었습니다. 둘 다 신앙인이어서 성당에 잠깐 앉아 있다가 기도가 되지 않아 다시 나왔습니다.
신부님은 그들을 보고 무엇 때문에 이혼을 하려고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남편이 먼저 “이 사람은 제가 무슨 일만 하려고만 하면 반대를 합니다.”라고 합니다. 그랬더니 자매가 “당신이 잘했어봐라. 내가 반대하나?”라고 하며 언성이 높아집니다. 신부님은 “아니, 싸우다가도 어른이 오시면 싸움을 멈추는 법인데 신부님 앞에서 이게 뭐 하는 것입니까?”라고 호통을 치셨습니다. 그들은 용서를 청했고 신부님은 그러면 보속으로 두 시간 동안 함께 성체조배를 하라고 했습니다.
두 시간 뒤 두 사람이 눈물이 범벅이 되어 사제관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두 시간 동안 성체 앞에 있다 보니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가 잘못했다고 뉘우치고 용서를 청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신부님이 보는 앞에서 이혼서류를 찢어버렸고, 신부님은 바로 혼인갱신 예식을 해 주었습니다.
기도의 목적이 무엇일까요? 집안이 잘 되는 것일까요? 남편이 승진하고 자녀가 성공하는 것일까요? 기도를 통해 오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사랑이시고 사랑은 일치시킵니다. 그러니 기도하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순종이 가능할까요? 하느님의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요셉은 아들을 잃게 되었을 테고 그러면 부부간의 사랑도 그렇게 끝나버렸을 것입니다. 요셉은 항상 하느님의 뜻을 찾는 사람이었습니다. 가장으로서 하느님께 순종해야 가정을 잘 이끌어 갈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영성으로는 요셉이 자신보다 못하지만 가장이라는 것 하나만으로 요셉에게 순종할 줄 아는 분이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부모에게 순종하며 지냈습니다.
이 순종은 기도 없이는 실천이 불가능합니다. 기도하면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이 됩니다. 부부가 함께 두 시간만 기도해도 수십 년 동안 말로 풀어도 안 되는 것이 해결됩니다. 순종하기 위해 기도한다면 사탄이 가정을 파괴하기 위해 주는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고 가정 안에 하느님께서 머무시게 됩니다. 누구와 싸워야 할 줄 아는 사람은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만이 사탄의 두려움을 이길 힘을 주십니다. 함께 기도하지 않으며 가정이 화목하기를 바라는 것은 바람에 날리는 모래가 뭉쳐서 스마트폰이 만들어지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조재형신부-
어릴 때의 기억입니다. 천호동에 살던 저의 집은 당시 장마로 삶의 터전을 봉천동으로 옮겼습니다. 몇 번 이사 다녔지만, 봉천동은 제가 사제서품을 받을 때까지 살던 동네입니다. 제가 살던 집은 재개발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제가 살던 봉천동은 행정명의 변경으로 중앙동으로 바뀌었습니다. 성당은 모습이 몇 번 바뀌었지만, 예전 그 자리에 있습니다. 살던 집과 동네의 이름은 사라지고, 바뀌었지만 봉천동은 제 유년 시절의 추억이 깃든 동네입니다. 근엄하셨던 아버님, 가족들을 사랑으로 돌보셨던 어머니, 생각이 깊었던 큰 형님, 자유로운 영혼의 작은 형님, 아버님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여동생이 함께 살았습니다. 강감찬 장군이 태어났다는 낙성대로 놀러 가고, 관악산 계곡으로 수영도 갔습니다. 성당에서 첫영성체 교리를 했고, 주일학교 친구들과 성탄에는 예술제를 준비했습니다.
김장철이 되면 어머니는 저와 형을 데리고 시장엘 가셨습니다. 주머니에 손을 꼭 넣고 어머니의 뒤를 졸졸 따라서 시장을 구경했습니다. 늘 추웠고, 어떨 때는 눈도 내렸습니다. 시장 아저씨와 한참 흥정을 한 후에 어머니는 배추와 무를 한 손수레 가득 담고 무척이나 뿌듯해하셨습니다. 손수레를 뒤에서 밀면서 오는 저도 마냥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집안 형편이 어려울 때도 시장엘 갔었습니다. 그땐, 겨울바람이 유난히 더 차가웠고, 어머니의 뒤를 따르는 저의 모습도 그렇게 처량했습니다. 늦은 시간 시장이 파할 무렵에 버려졌지만 쓸만한 것들을 얻어온 적도 있습니다. 그때는 손수레도 없고 보따리에 메고 왔습니다. 그럴 때는 집에 오는 길도 멀게만 느껴졌습니다. 넉넉한 가정형편은 아니었지만, 그 동네에서 자라고, 어른이 되었습니다. 돌아보니 모두 감사할 일이고, 고마운 일입니다. 제가 살던 동네와 가족은 제 삶의 못자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유년 시절은 어떠하셨는지요?
오늘 교회는 ‘예수, 마리아, 요셉 성가정’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추한 마구간에서 태어났습니다. 시메온은 마리아의 가슴은 칼에 찔리듯 아플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아들 예수를 위해서 기도하지만, 늘 걱정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했고,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품에 안아야 했습니다. 재물, 명예, 권력, 성공이라는 기준으로 행복한 가정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오늘을 ‘성가정 축일’로 지내는 것은 예수, 마리아, 요셉에게 한가지 공통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일까요? 맞습니다. 나자렛 성가정은 모두 ‘하느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성모님은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며 하느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요셉 성인은 남모르게 파혼하려는 마음을 바꾸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성모님을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기도하셨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의 가정에 하느님의 뜻이 함께한다면,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난다면 우리의 가정 역시 ‘성가정’이 될 것입니다.
오늘은 모든 ‘추억, 기억, 상상력’이 시작되는 ‘성가정 축일’입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가정의 소중함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소중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 가족들이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네 아버지가 나이 들었을 때 잘 보살피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슬프게 하지 마라. 그가 지각을 잃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그를 업신여기지 않도록 네 힘을 다하여라. 아버지에 대한 효행은 잊혀지지 않으니, 네 죄를 상쇄할 여지를 마련해 주리라.” “아내 여러분,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주님 안에 사는 사람은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남편 여러분,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아내를 모질게 대하지 마십시오. 자녀 여러분, 무슨 일에서나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 마음에 드는 일입니다. 아버지 여러분, 자녀들을 들볶지 마십시오. 그러다가 그들의 기를 꺾고 맙니다.”
예전에 읽었던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비가 오는데, 키 큰 사람하고, 키 작은 사람이 우산 하나만을 가지고 비를 피해야 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키 큰 사람에게 우산의 높이를 맞추면 키 작은 사람이 비를 맞게 되고, 키 작은 사람에게 우산의 높이를 맞추면 키 큰 사람이 비를 맞게 됩니다. 서로가 키가 다른 것에 대해 한탄하거나 탓하면 둘 다 불행해집니다. 또 서로를 탓하다 갈 곳을 못 가게 될 수도 있죠. 해결 방법의 하나는, 키 큰 사람이 키 작은 사람을 업고, 키 작은 사람은 우산을 들면, 비 맞지 않고 갈 곳을 가게 될 뿐만 아니라, 둘이서 서로의 믿음과 나눔의 경험을 창출해 낼 것입니다. 이렇듯, 모든 문제는 함께 해결할 수 있고 또 함께 해결하면서 성장의 기회를 얻게도 됩니다.”
기도와 마음을 열어주는 대화, 그리고 신뢰를 통해서 성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양승국신부-
세상 속에 깊이 함몰되어, 세상의 좋은 것들에 시선을 빼앗기며 살아가는 오늘 우리를 향한 주님 말씀은 꽤나 날카롭게 다가옵니다.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랑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요한 1서 2장 15절)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요한 1서 2장 17절)
사실 세상은 본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대상입니다. 하느님께서 손수 창조하신 세상이요, 그분의 손길과 흔적이 담긴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지칭하는 세상은 예수님과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적대시하는 세상을 말합니다. 인간의 그릇된 욕망과 교만함, 죄와 이기심으로 가득한 악한 세상입니다. 그리스도 정신과는 달리 사탄의 지배 하에 꿈틀거리는 인간의 집단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참으로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의미의 세상, 악으로 가득한 세상과는 늘 첨예한 대립각을 세웠습니다. 자연스레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악한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박해를 받을 때 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깊이 동참하는 것이니, 더할 나위없는 기쁨과 영예로 여겨야겠습니다.
세상이 예수님과 교회를 미워하고 박해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세상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기존의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에 비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방식은 요구성이 훨씬 많고 불편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날선 지적과 충고가 가슴에 찔리고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을 거부하는 것을 넘어 미워하고 박해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미움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상 안에서 계속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세상이라는 것,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참으로 영악하고 사악합니다. 정말이지 고단수입니다. 따라서 우리 교회는 비둘기처럼 단순할 필요도 있지만, 뱀처럼 지혜로울 필요도 있습니다.
우리 앞에 매일 펼쳐지는 이 세상, 사랑이신 하느님 손길과 흔적이 담겨있는 이 세상이기에, 때로 이해할 수 없고, 때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큰 사랑의 마음으로 성장시켜나가고 완성시켜나가야 할 대상입니다.
동시에 권모술수가 판을 치는 세상, 바로 옆의 이웃이 죽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만 살겠다고 발버둥치는 극단적 자기 중심주의와 천박한 물질만능주의가 판을 치는 이 세상은, 다같이 합심해서 극복하고 투쟁하고 이겨내야 할 대상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교회 안에서도 충실해야 하며 전문성을 지녀야겠지만, 최첨단·글로벌 세상 안에서도 충실해야 하며 전문성을 지녀야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회사 안에서도 동료들로부터 찬사와 박수갈채를 한 몸에 받는 모범사원으로 살아가야겠습니다. 학교 안에서도 남들보다 한 걸음 앞서가는 우등생으로 살아가야겠습니다.
경쟁력과 전문성이라는 개념이 복음 정신과 상충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각자의 경쟁력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세상 안에서도 빛나는 삶을 살아, 주님께 영광과 찬미를 드려야 할 것이다. 그런 삶이야말로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삶이며, 삶을 통한 복음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심이 깊고 착하기만 하지 성적이나 경쟁력이 떨어지는 학생들은 뱀처럼 지혜로워지라는 주님 말씀에 좀 더 방점을 둘 필요가 있겠습니다. 이런 면에서 바오로 사도의 빛나는 승리의 길, 강한 경쟁력, 불굴의 의지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착하고 순결하기만 하지 지혜롭지 못하다면, 악한 이리 떼의 먹잇감으로 적락하고 말것입니다. 세상 안에서도 패배자나 낙오자로 밖에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 주님 사랑 받는 사도로 살아가기 위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충실히, 더 열심히 살아가야만 합니다.

내 삶의 중심은 무엇인가?
-반영억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한 해의 끝자락에 와있습니다. 한 해 동안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다가오는 새해에도 주님께서 늘 동행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을 잘 간직하시고, 복을 많이 만드시고, 나눠주시고 또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늘 복된 사람으로, 꼭 필요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기원합니다.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을 본받아 복된 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특별히 기도하는 날입니다. 이 시간 성가정에 관해 묵상하는 가운데 하느님께서 각 가정에 행복을 더해주시길 희망합니다.
예수님의 가정을 보십시오. 아버지 요셉은 목수일을 충실히 하였습니다. 그런 중에 하느님께서 보낸 천사의 말을 듣고, 믿었으며 마리아를 아내로 받아들였습니다. 거기에서 오는 어려움들을 묵묵히 잘 견디어냈습니다. 헤로데의 손아귀에서 하느님의 아들을 구하기 위한 피난살이에서 오는 혹독한 시련을 묵묵히 받아들였고, 전 생애 동안 가난을 감수하시면서 주어진 삶에 충실하였습니다.
성모님께서도 천사를 통해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 하였고 아들 예수를 통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바랐으며 그에게 일어나는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습니다.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 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2,35). 라는 시메온의 당혹스런 예언의 말씀을 들어야했습니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주님의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기에 복되신 분’이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요셉과 마리아는 파스카 축제 때 3일간이나 예수님을 잃고 걱정에 휩싸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찾아냈을 때 아들에게 들은 소리는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2,19).하는 말이었습니다. 부모는 이 말을 알아듣지 못한 채 마음속에 간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않고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부모에게 순종하며 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습니다.
이렇게 나자렛 성가정에는 인간적 갈등과 고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처지와 상황, 예기치 않은 일에도 불구하고 서로간의 신뢰와 순명, 그리고 사랑이 넘쳤습니다. 서로의 다른 모습 안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고 따르며 지켰습니다. 각자의 소명에 충실하였습니다. 이것이 성가정의 모범입니다. 성가정은 고통이나 시련이 없는 가정이 아니라 시련과 고통을 이겨낸 가정입니다.
우리는 쉽게 흔들리고 서로 간에 기대를 채우지 못해 상처를 주며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음으로써 벽을 쌓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찾기는커녕 상대를 무시하고 깔보기까지 합니다. 한 집안 식구끼리도 서로 손해 보는 일, 희생하는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면 됐지 뭘 더 바라느냐는 식입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 당신도 이만큼은 해야 되지 않느냐며 따지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부부사이에도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서로의 눈높이를 맞추기가 너무도 힘이 듭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자기 역할을 해 내는 것이 너무도 어렵습니다. 이것이 우리가정의 위기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에 머무는 사람은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사랑의 의무를 생각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아무리 해도 다 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율법을 완성했습니다”(로마13,8). 요한 사도도 “우리는 우리의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미 죽음을 벗어나서 생명의 나라에 들어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1요한3,14).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랑 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3,3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은 곧 우리 삶의 길입니다. 그리고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가운데 오신 예수님은 우리의 해답입니다. 모든 문제의 해답이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을 기초로 삼고 영성체를 통해서 주님을 가슴에 모시고 말씀대로 실천하여 성가정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우리 마음에서 하느님이 떠나면, 말씀을 멀리하고 영성체를 소홀히 하면 허전함을 느끼게 됩니다. 마음은 메마르고 삶은 공허해 집니다. 가정의 평화가 깨지고 이혼율이 늘어갑니다. 하느님을 떠나서 우리가 얻는 것은 무의미와 공허와 비인간화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지으신 존재,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없이는 살 수 없게끔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백악관을 기도실로 바꾼 대통령 링컨'이라는 책을 보면 너무나 가난했던 링컨의 어머니는 어린 링컨에게 성경만을 가르쳤습니다. 다른 것은 아무 것도 해 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세상을 떠나면서 유산으로 남긴 것도 성경 한 권 이었습니다. 링컨은 성경을 읽고 또 읽어 지혜를 얻었고 링컨의 삶을 이끌었던 분은 하느님이셨습니다. 그는 대통령(미국16대, 1861)이 되고 나서도 집무실 책상 위에 항상 성경을 두고 읽었으며 그 말씀대로 실천하였습니다. 그는 "성경은 하느님께서 주신 가장 좋은 선물"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노예해방을 선언하기도 하였습니다. 주님과 함께한 결과입니다.
여러분은 미국의 자동차 왕 헨리 포드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포드는 대기업을 일으킨 후 고향에 조그마한 집을 한 채 지었습니다. 그 집은 대기업의 총수가 살기에는 아주 작고 평범한 집이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이건 너무 초라하지 않습니까? 호화롭지 않더라도 생활에 불편하지는 않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걱정스럽게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포드는 얼굴에 가득한 미소를 띠며 말하였습니다. “가정은 건물이 아닙니다. 비록 작고 초라하더라도 예수님의 사랑이 넘친다면 그곳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집이지요.” 지금도 디트로이트에 있는 헨리 포드의 기념관에 가면 “헨리는 꿈을 꾸는 사람이었고 그의 아내는 기도하는 사람이었다.”는 글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헨리 포드는 꿈을 가졌기 때문에 자동차를 만들었고, 그의 성공 뒤에는 꿈꾸는 사람과 기도하는 사람이 함께 이룬 아름다운 가정이 있었습니다. 성가정의 핵심은 바로 삶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고 사느냐? 기도하고 사느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집회서를 보면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죄를 용서 받는다. 제 어머니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보물을 쌓는 이와 같다”(3,4)고 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주는 끈입니다.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면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콜로새서3,13.17).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 된 사람은 아내를 사랑하며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는 자녀들을 들볶지 않는 가운데 화목함을 이루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시오....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콜로새3,15.16)하셨는데 이 외침이 하나의 공허한 외침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마음을 다스리고, 말씀이 마음 안에 머무르게 한다는 것은 곧 말씀을 행함으로써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입니다. 실천 없는 믿음은 곧 죽은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고 행하시기 바랍니다. 실천하는 가운데 믿음의 결실을 얻게 될 것입니다.
똑똑한 아들은 나라의 아들이고, 돈 잘 버는 아들은 장모의 아들이랍니다. 그리고 골치 아픈 아들은 평생 내 아들이래요. 초등학생 때가지는 일촌이지만 아이들이 커서 중학생이 되면 벌서 사촌이 되고 대학가면 오촌 아저씨가 됩니다. 장가를 들면 8촌이 되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사돈의 팔촌이 된답니다. 이렇게 성장하면서 점점 남이 되어가는 것은 사랑의 끈이 그만큼 느슨해지는 탓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이신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셔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행복의 원천이며 모든 해답이 거기 있습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말씀과 함께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시는 성체성사를 통해 영적 충만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통해 하느님을 내 마음 안에 모셔 들이면 육적인 사람이 영적인 사람으로 변합니다. 가치관이 달라지고 생의 목적이 달라집니다. 생활양식이 바뀌고 갈등이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말씀 안에서 해답을 찾고 행하는 성 가정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실 “주님께서 집을 지어 주지 않으시면 그 짓는 이들의 수고가 헛되리라. 주님께서 성읍을 지켜 주지 않으시면 그 지키는 파수가 헛되리라”(시편127,1). 고 했습니다. 주님을 모시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헛되고 행복도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한해를 보내며 부족했던 모든 것에 대해 자비를 간구합니다. 아울러 새해에는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행할 수 있는 은총이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집인가 가정인가
집 벽은 나무로 세워진 것
그 기초는 벽돌이나 돌로 세워진 것.
그러나 가정은 오직 심장의 고동들로 세워진 절묘한 것.
집 값은 즉시 매겨지고
한 덩어리 금덩이로 치를 수 있으나
가정의 값을 계산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어
그 가격을 말한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었다네.
집의 방들은 품위 있고 호화로우며
그 장식이 예술적 업적인지 모르나
가정의 아름다움은 사심이 없는 마음의 노고에서 나오는
마지막 결과들이라네.
집은 불탈 수 있고 팔리거나 바뀔 수 있는 것
집안의 조화를 잃어버리기까지 간섭할 것은 아니지만
가정을 잃게 되면 마음이 얼마나 짓밟혀질 것인가!
우리의 가정은 우리 모두가 사랑하고 지켜야 할 것.
많은 행운으로 여러 집을 가진 사람은
그의 재산이 그를 절망으로 인도하지만
존경할 만한 사람이 속한 가정에 사는 사람은
참된 백만장자로 여겨질 것이 틀림없다네(J.H 사이크스).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이영근신부-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 성가정 축일입니다.
그런데 성가정이란 대체 어떤 가정을 말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을 오늘 <복음>에서 찾는다면, ‘성가정’이란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가정이요, ‘말씀’에 순명하는 가정이요, ‘말씀’이 성취되는 가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말씀이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이 주인 되게 하는 가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두 가지 말씀의 성취를 전해줍니다.
<하나>는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마태 2,25)라는 말씀의 성취요, <또 하나>는 “그는 나자렛 사람으로 불릴 것이다.”(마태 2,23)라는 말씀의 성취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들의 성취 안에는 모진 고통들이 함께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곧 이 가정은 이집트에서 불려나오기까지, 또 나자렛 사람으로 불리기까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쫓겨다녀야했고, 변방의 거류민으로 살아야 했고, 숨어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니 고통이 없는 가정이 성가정이라는 말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아니 어쩌면, 성가정에는 고통이 필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의 성취에는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있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성가정’이란 고통이 없고 편안하고 안정된 단란한 가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함께 나누고 고통 속에서도 말씀이 이루어지는 장소요 자리가 되는 가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말씀을 이루는 사람이기에 앞서, 말씀이 이루어져야 하는 장소요 공간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말씀이 활동하고 성취되는 모습은 참으로 신기합니다. 무엇보다도 신비로운 것은 ‘말씀이신 분’께서 말을 하지도 못하는 아기 모습으로 우리 가정과 우리 공동체 안에 들어와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 아기는 말을 할 줄 모르면서도 우리를 이끄십니다. 우리 안에서 성취를 이루십니다.
참으로 묘한 신비입니다. 말씀이시면서 말을 못하는 이 아기는 때로는 침묵으로, 때로는 고통으로, 때로는 무력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때로는 보이지도 않은 빈자리가 되어 우리네 가정, 우리네 공동체를 이끄십니다.
이렇게 아기 예수님은 우리 가정과 공동체의 주인이면서도 우리 모두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빈자리로 계십니다. 마치 ‘가나안의 혼인잔치’에서 주인공이면서도 보이지 않는 빈자리로 있는 신부처럼, 우리 가정 안에서도 빈자리로 계시면서 우리 모두를 품으시고 끌어안으십니다. 그러면서도 성취를 이루십니다. 그러니, 공동체의 빈자리, 그곳이 바로 중심임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자기 자신이 중심이 아님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가정, 우리의 공동체 안에 말씀이 살아있는지 들여다볼 일입니다. 곧 ‘말씀이신 분’이 우리 안에 작고 낮고 무력하게 말 못하는 아기의 모습으로 살아계심을 볼 일입니다. 말씀은 사랑하는 이 앞에서 항상 작고 낮은 이로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 앞에서는 결코 자신을 높이거나 교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관상하는 것은 언제나 우리보다 작고 나약한 예수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보다 작고 무력한 예수님을 만났는가? 나를 사랑하기에 언제나 나보다 작은 모습으로 내 앞에 무력하게 낮아져 있는 그분을 말입니다. 심지어는 없는 자, 빈지리가 되어 있는 그분을 말입니다. 아멘.
- 오늘 말씀에서 솟아난 기도 -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거라.”(마태 2,20)
주님!
말씀에 귀 기울이며, 들은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말씀이 살아있고 존중되는 말씀과 함께 친교를 나누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말씀이 항상 중심이요 주인이 되는, 말씀에 순명하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말씀 안에서 서로의 고통을 끌어안고 십자가를

성가정
-송영진신부-
‘성가정’이라는 말은, 예수님과 성모님과 요셉 성인으로 이루어진,
나자렛에서의 가정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가 ‘성가정 축일’을 지내는 것은,
‘인류 구원’이라는 ‘하느님 뜻’이 성가정 안에서부터 실현되기 시작했기 때문이고, 성가정이 ‘하느님 뜻 실천’의 모범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은 자신들의 가정이 성가정과 같은 가정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1) 그러면서도 성가정이 누리는 은총만 보고,
성가정이 겪었던 고난은 못 볼 때가 많습니다.
2) 자신의 가정만 생각하다가 이웃의 가정을 잊어버리거나
이웃의 가정 사정에 무관심할 때가 있습니다.
3) 식구들이 모두 세례를 받으면 성가정을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착각입니다.
“박사들이 돌아간 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마태 2,13-15).”
1) 예수님께서는 태어나실 때부터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여관방을 구하지 못해서 외양간에서 태어나신 일,
헤로데가 죽이려고 해서 이집트로 피신하신 일 등은 모두 십자가입니다.
그 일들은 예수님에게만 십자가였던 것이 아니라,
마리아와 요셉에게도 십자가였습니다.
성가정의 가족이 모두 함께 십자가 수난과 시련을 겪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고난과 시련을 겪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고난과 시련을 겪어도 하느님의 보호를 믿고 인내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집트로 피신할 때의 이야기를 겉으로만 보면,
위험한 일이 다가오기 전에 천사가 나타나서, 다가오는 위험을 미리 알려 주고
무사히 피신할 수 있도록 도와 준 것으로만 기록되어 있어서,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던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는데,
마리아와 요셉이 위험한 일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채로
아무 생각 없이 지내다가,
천사가 지시한 대로 수동적으로 움직였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 당시의 실제 상황을 재구성해 보면, 동방박사들이 돌아간 뒤에 크게 화가 난
헤로데는(마태 2,16) 군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서 수색을 했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군인들이 아기들을 모두 죽이려고 한다는,
또는 죽이고 있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을 것입니다.
그 소문을 들은 마리아와 요셉은 몹시 당황하고 두려워했을 텐데,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저 허둥대기만 한 것은 아니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묻는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그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천사가 나타났을 것입니다.
사실 믿음이 없다면 천사의 말도 믿지 못했을 것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천사의 말을 ‘하느님의 뜻’으로 바로 알아들었고, 그대로 실천했습니다.
그리고 이집트로 가는 일도, 또 이집트에서의 피난 생활도
무척 어렵고 힘든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마리아와 요셉은 믿음과 기도로 그 고난을 견디었을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고난과 시련을 한 번도 겪지 않고
한평생 편안하게 살아가는 가정은 없습니다.
살다보면 누구나 뜻하지 않은 사고를 겪기도 하고, 병에 걸리기도 하고,
계획한 일들이 바라던 대로 되지 않아서 힘들어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고난을 겪게 되는데,
그럴 때에 성가정을 본받아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꾸준히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고난을 겪을 때,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더욱더 기도해야 합니다.
(고난과 시련 자체가 하느님의 뜻은 아니고,
그런 일을 겪어도 신앙인들이 흔들리지 않고 꾸준히 나아가서
구원에 도달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자신의 가정이 성가정과 같은 가정이 되기를 바란다면,
가장 먼저 할 일은 ‘기도’입니다.
특히 가족이 모두 모여서 함께 기도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2)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이야기를 겉으로만 보면,
다른 집은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요셉이 신경도 안 쓰고
사람들 모르게 이집트로 떠난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의로운 사람’인(마태 1,19) 그가 자신의 가정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행동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에 헤로데가 메시아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서
예수님만 죽이려고 했다면, 그리고 그것을 천사가 미리 알려 주었다면,
요셉은 다른 집은 신경 쓸 필요 없이 자신의 가족만 보호하면 됩니다.
그러나 헤로데는 메시아로 오신 아기가 누구인지 몰랐고, 그래서 베들레헴 일대의
아기들을 모두 죽이는 것이 처음부터 그의 계획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가 그런 상황을 알려 주었다면,
요셉은 당연히 근처의 다른 집에도 알려 주었을 것이고,
또 빨리 피신하라는 권고를 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믿을 수 있습니다.)
그 권고를 믿고 받아들인 집은 피신했을 것이고,
안 믿고 무시하거나 비웃은 집은 화를 입었을 것입니다.
(성가정은 자기 가족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가정이 아닙니다.
자신의 가정이 성가정과 같은 가정이 되기를 바란다면,
다른 가정의 사정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고, 사랑을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웃 사랑 실천 없이는 성가정을 이룰 수 없습니다.)
3) 식구들이 모두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성가정을 이룬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라는
예수님 말씀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50).” 라는 예수님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가족이 모두 한 마음으로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가정’이 성가정입니다.
세례는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조욱현신부-
오늘은 성가정 축일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신비는 참으로 위대한 신비이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똑같이 ‘가정’이라고 하는 공동체의 체험을 거쳐 우리의 형제가 되셨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강생의 신비는 이 가정이라고 하는 실체도 취하여 거기에 보다 깊은 의미를 부여하고 하느님의 사랑의 표지와 구원의 도구로 삼는다. 이제 오늘 축일은 가정이 강생의 신비를 통해 구원을 위한 공간이 됨을 상기시켜줄 뿐 아니라, 하느님 사랑의 신비에 대한 체험을 했던 나자렛 가정을 우리에게 구체적인 ‘모범’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즉 교회는 오늘 나자렛 가정의 구체적 체험을 거행하고자 하며, 그 체험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범으로 제시하려는 것이다.
제1독서: 집회 3,3-7.14-17a: 어버이에 대한 공경
1독서의 내용은 부모를 공경해야할 의무를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케케묵은 옛날 이야기가 아니다. “너는 네 아비가 늙었을 때 잘 보살피고...그가 설혹 노망을 부리더라도 잘 참아 받고 네가 젊고 힘 있다고 그를 업신여기지 말아라.”(집회 3,12-13). 이 말씀은 너무나 쉽게 노인들에게 무관심해버리고, 마치 그들을 무슨 짐처럼 여기며 그들을 사회공공기관에 맡겨버리는 것이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오늘의 우리에게 하는 말 같다.
복음: 마태 2,13-15.19-23: 이집트 피난
오늘 복음의 내용은 한 가정이 겪는 고통스럽고도 극적인 사건들에 집중되고 있다. 요셉이나 마리아 혹은 아기 예수가 주인공이 아니라, 한 가정의 이야기로 전개되고 있다. 천사가 요셉에게 하는 말은 한결같이 “아기와 아기 어머니를 데리고”(13.20절)라고 하고 있다. 이는 어느 것도 따로 생각할 수 없는 단일한 결합상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분위기는 복음 전체에 흐르고 있다(14-15절.21절). 여기에는 신학적인 의미가 있다. 즉 나자렛 가정의 가족들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는 감정과 행동의 완전한 일치를 강조하고 있다. 서로간의 봉사와 보호와 도움이 필요한 ‘아기 예수’에 대한 사랑이다.
아기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지만 인간적으로 나이 때문에 또 그의 사명 때문에 닥치는 어려움에 대해 보호와 도움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그 부모들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고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징표들을 알아듣고자 하는 마음자세로써 아기를 보호하고 도와주고자 애쓴다. 즉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그리스도를 통해 실현되도록 하기 위해 이루어지는 하느님과 사람의 협력관계를 볼 수 있다. 가족들 상호간의 사랑과 하느님께 대한 무한한 신뢰로 이 가정의 삶이 전개되고 있다.
나자렛 성가정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이것이다. 우선, 가정의 참된 의미는 오직 서로 사랑할 수 있고 서로를 깊이 나눌 수 있는 곳에만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기고, 영혼과 육신을 결합시켜주며, 사랑은 삶의 극적인 어려움까지도 극복하도록 해준다. 사랑이 없으면 가정은 무너지고 말며, 사랑이 식어 가는 가정에는 법적 조치도 사회적 대책도 아무 소용이 없다. 가정은 사랑과 그 사랑의 요구가 회복될 때만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
두 번째 사실은 가정이 하느님의 계획의 일부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정은 바로 사랑의 최대 표현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가정이 진정한 의미의 가정이 되려면, 나자렛 가정과 같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빛과 영감에 항상 개방되어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가정이 근본적으로 ‘종교적’ 차원을 가져야 하며 하느님께 대한 ‘감각’을 양성해야할 의무도 있다.
세 번째는 나자렛 성가정이 사랑과 헌신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았고 하느님께 온전히 개방되어있었기에 이 세상과 인간적인 문제에 ‘개방되어’있다는 점이다. 즉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사람이며, 마리아는 예수로 하여금 형제들의 어려운 처지를 알고 느끼게 해주는 협력자 역할을 할 것임을 말해줄 것이다. “그를 나자렛 사람이라 부르리라”(23절). 이 말씀은 나자렛이 아무런 명성도 없는 보잘것없는 동네이다(요한 1,46참조). 이 동네와 예수님을 연결하는 것은 당신의 겸손을 의미할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과의 결합을 입증하는 것이다. 가정은 ‘개방된’ 공동체이다. 그것은 가정이 사랑에서 생기고 사랑 안에 자라기 때문이다. 사랑은 그 안에 폐쇄될 수 없다. 그렇다면 사랑이 아닐 것이다.
제2독서: 콜로 3,12-21: 사랑은 모든 것을 하나로 만듭니다
바오로 사도는 가정 안에서의 행동규범에 대해 짤막하게 이야기한다. 이것은 모든 어려움과 긴장 그리고 세대 간의 긴장 등을 안고 있는 가정생활이 처해있는 분위기에 대한 것이다(18-21절 참조). 한 가정을 이루는 남편과 아내를 ‘한 몸’(창세 2,24)이라고 할 때, 그리고 부모와 자식 간을 연결시켜주는 사랑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몸’으로 실현되어야 한다. 이 그리스도의 ‘몸’이란 가정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이 담겨있는 것으로써, ‘하느님의 말씀’과의 항구한 일치가 가족들 모두를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사랑 속에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가정들과의 만남으로 서로 ‘가르치고’ ‘충고함’으로서 현대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 즉 혼인의 의미, 부부사랑, 생명의 가치, 자녀들의 가치, 자녀들의 교육, 부부 상호간의 신뢰 등에 대한 문제를 극복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이것이 ‘개방된’ 가정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진정 부부간의 넘치는 사랑과 자녀들의 기쁨에 찬, 웃음이 끊이지 않는 ‘가정’, 한평생 이루어졌으면 하는 이 놀라운 기적은 인간들의 깨어지기 쉬운 사랑을 감싸주고 하느님의 사랑의 징표로 바꾸어놓는 하늘로부터의 ‘축복’에 의해서만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이러한 가정을 실제적으로 만들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성가정 축일은 오늘의 가정이 지녀야할 모든 가치 즉 사랑, 헌신, 희생, 정덕, 생명 존중, 노동, 평화, 환희 등을 알아들을 수 있는 열쇠를 던져주고 있다고 요한 바오로 2세는 말씀하셨다.

-오상선신부-
오늘의 말씀은 우리에게 가정을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중심을 제시합니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마태 2,13)
주님의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하느님의 뜻을 전합니다. 헤로데의 메시아 아기 살해 계획을 하느님께서 이미 알고 계셨으니까요. 그런데 아직 밤이었을텐데도 천사는 "날이 밝는 대로..."라고 하지 않습니다. 행간에 "지금 당장"이라는 조건이 붙은 듯합니다. 그만큼 긴박하다는 뜻이겠지요.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마태2,14)
요셉은 즉각 행동을 개시합니다. 밤은 길 떠나기에 좋은 시간이 아닙니다. 게다가 갓난아기와 산모까지 보호하며 움직여야 했지요. 하지만 요셉은 기꺼이 순종합니다.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마태 2,15).
요셉의 순종은 성자의 생명을 구할 뿐만 아니라 과거 예언자를 통해 하신 하느님의 말씀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협력한 것입니다. 이는 이집트로 떠날 때만이 아니라, 헤로데가 죽은 뒤 이집트를 떠나 나자렛에 정착하기까지의 과정에서도 동일하게 이루어지지요.
오늘의 복음 안에서 하느님과 요셉의 손발이 얼마나 착착 맞는지 감탄이 나옵니다. 먼저 하느님 입에서 말씀이 떨어지고, 곧 요셉이 순종하고, 그로써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집니다. 오늘 복음은 그것도 세 차례(마태 2,14.21.22)나 반복해서 보여주지요!
요셉은 하느님께 순종하고, 마리아는 요셉을 통해 움직이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요셉을 따릅니다. 순종의 뿌리에는 상호적 믿음과 존중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하느님 백성은 신랑과 신부로 비유되지요. 하느님과 요셉도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랑이신 하느님과 신부인 요셉, 두 존재 사이에 오가는 신뢰와 따름과 이루어짐의 역동은 혼인의 축복으로 엮인 모든 부부들에게 선사된 관계의 원형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다른 시각에서 보면, 하느님과 하느님 백성은 아버지와 자녀 관계입니다.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 요셉의 관계를 통해 세상의 모든 부모-자녀 관계를 관상할 수 있습니다. 요셉과 성모자의 안전을 염려하고 개입하시는 아버지 하느님과, 그분께 대한 무한한 신뢰로 그분 뜻을 듣는(행동으로 옮기는) 아들 요셉. 여기서도 믿음이 우선입니다. 서로에 대한 헌신과 존중, 공경과 사랑의 뿌리는 믿음입니다.
제1독서는 부모와 자녀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이는 제 어머니를 편안하게 한다"(집회 3,6).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은 경외심에서 나오는 행동입니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는 인간을 경외합니다. 그의 안에 하느님께서 존재하심을 믿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과 사람을 경외하는 것은 한 뿌리입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 그분의 길을 걷는 모든 사람 ... 너는 행복하여라. 너는 복을 받으리라"(화답송).
그래서 화답송은 제1독서에 대한 응답으로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이 받는 축복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제2독서 안에는 가정생활 안에서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선사된 덕목들이 나열됩니다. 읽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흐뭇해지는 아름다운 말씀들이지요.
"선택된, 거룩한, 사랑받는, 동정, 호의, 겸손, 온유, 인내, 용서, 평화, 감사, 지혜, 순종..."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콜로 3,16).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인 가정과, 더 나아가 모든 교회 공동체의 본질을 이야기합니다. 바로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 안에 드러난 모든 아름다운 덕목들은 이 "말씀"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서 피어나는 꽃들이고 "말씀"이 맺은 열매들입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 머무를 때 요셉처럼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고 완성되도록 돕는 협력자가 됩니다. 하느님과 요셉이 손발을 착착 맞추어 주거니 받거니 한 역동적 교감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 사이에서도 그렇게 쿵짝이 잘 맞으면 신명이 나는데, 말씀과 그런 역동 안에 살아간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입 꼬리가 귀에 걸릴 만큼 행복하지 않습니까? 그런 길 안에 들어선 여러분 모두를 축하하고 존경합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공동체가 나자렛 성가정처럼 이렇게 말씀(예수님)이 중심이 되어 신명나는 자리가 되길 축원합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꿈에 주님의 천사가 이집트에 있는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거라. 아기의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 죽었다.” 요셉은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갔다. (마태오 2,13-15.19-23)
재물, 명예, 권력, 성공이라는 기준으로 행복한 가정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오늘을 ‘성가정 축일’로 지내는 것은 예수, 마리아, 요셉에게 한가지 공통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일까요? 맞습니다. 나자렛 성가정은 모두 ‘하느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성모님은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며 하느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요셉 성인은 남모르게 파혼하려는 마음을 바꾸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성모님을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기도하셨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의 가정에 하느님의 뜻이 함께한다면,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난다면 우리의 가정 역시 ‘성가정’이 될 것입니다.
“비가 오는데, 키 큰 사람하고, 키 작은 사람이 우산 하나만을 가지고 비를 피해야 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키 큰 사람에게 우산의 높이를 맞추면 키 작은 사람이 비를 맞게 되고, 키 작은 사람에게 우산의 높이를 맞추면 키 큰 사람이 비를 맞게 됩니다. 서로가 키가 다른 것에 대해 한탄하거나 탓하면 둘 다 불행해집니다. 또 서로를 탓하다 갈 곳을 못 가게 될 수도 있죠. 해결 방법의 하나는, 키 큰 사람이 키 작은 사람을 업고, 키 작은 사람은 우산을 들면, 비 맞지 않고 갈 곳을 가게 될 뿐만 아니라, 둘이서 서로의 믿음과 나눔의 경험을 창출해 낼 것입니다. 이렇듯, 모든 문제는 함께 해결할 수 있고 또 함께 해결하면서 성장의 기회를 얻게도 됩니다.”
기도와 마음을 열어주는 대화, 그리고 신뢰를 통해서 성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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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와 요셉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천사의 말을 ‘하느님의 뜻’으로 바로 알아들었고, 그대로 실천했습니다.
그리고 이집트로 가는 일도, 또 이집트에서의 피난 생활도
무척 어렵고 힘든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마리아와 요셉은 믿음과 기도로 그 고난을 견디었을 것입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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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마태 2,13)
주님의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하느님의 뜻을 전합니다. 헤로데의 메시아 아기 살해 계획을 하느님께서 이미 알고 계셨으니까요. 그런데 아직 밤이었을텐데도 천사는 "날이 밝는 대로..."라고 하지 않습니다. 행간에 "지금 당장"이라는 조건이 붙은 듯합니다. 그만큼 긴박하다는 뜻이겠지요.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마태2,14)
요셉은 즉각 행동을 개시합니다. 밤은 길 떠나기에 좋은 시간이 아닙니다. 게다가 갓난아기와 산모까지 보호하며 움직여야 했지요. 하지만 요셉은 기꺼이 순종합니다.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마태 2,15).
요셉의 순종은 성자의 생명을 구할 뿐만 아니라 과거 예언자를 통해 하신 하느님의 말씀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협력한 것입니다.
요셉은 하느님께 순종하고, 마리아는 요셉을 통해 움직이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요셉을 따릅니다. 순종의 뿌리에는 상호적 믿음과 존중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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