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9일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성모 마리아께서는 잉태되신 순간부터 원죄에 물들지 않으셨다는 믿음은 초대 교회 때부터 생겨났다. 이러한 믿음은 여러 차례의 성모님 발현으로 더욱 깊어졌다. 1854년 비오 9세 교황은 ‘성모 마리아의 무죄한 잉태’를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다. 우리나라는 이미 1838년 교황청에 서한을 보내 조선교구의 수호자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로 정해 줄 것을 청하였다.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이러한 요청을 허락하면서 요셉 성인을 공동 수호자로 정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 천주교회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를 요셉 성인과 함께 공동 수호자로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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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카 1,26-38)
Behold,
I am the handmaid of the Lord.
May it be done to me
according to your wor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어 축복을 내려 주셨지만, 사람은 하느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죄를 짓는다(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하셨다(제2독서). 하느님께서는 마리아를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게 하신다. 마리아께서는 하와와 달리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셨기 때문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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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교회는 주님 사랑의 위대함과 주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이루신 놀라운 일을 묵상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로 선택되는 소명을 온전히 받아들였습니다. 그녀에게는 쉬운 일도, 예상된 일도 아니었습니다. 천사가 하느님의 인사말을 전하였을 때 그녀는 몹시 놀라 당황하였습니다.세상의 악은 하느님을 멀리하는 마음에서 생깁니다. 그녀는 천사의 소식에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당황합니다. 그러자 천사가 그녀를 위로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이 소식은 아직 요셉과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은 그녀를 더욱더 복잡하게 만듭니다. 그러자 천사는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하고 덧붙이며 설명합니다. 이때 마리아가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아니요.”라고 하면 평소처럼 평온한 생활을 이어 가겠지만, “예.”라고 하면 그녀의 모든 삶은 복잡해질 것입니다.마리아는 자신의 능력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더 소중하게 여깁니다. 하느님의 계획을 받아들이는 순종의 자세는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 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에게 사랑받는 첫 여인인 그녀는 천사가 그녀에게 전한 부르심에 “예.”라고 대답하는 첫 여인이기도 합니다. 오늘 마리아는 우리 앞에, 우리 마음의 눈앞에 있습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미래사회는 AI(인공지능)이 상용화돼 인간의 단 20%만이 의미 있는 직업을 갖게 될 것이다.”
미래학자이며 다빈치연구소장인 토마스 프레이도 2016년 ‘UN 미래보고서’를 통해 2030년까지 20억 개의 일자리가 사라지며, 현 일자리 중 20%만 남고 80%는 사라질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아마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아주 먼 후의 이야기가 아닌 그렇게 얼마 머지않은 미래에 그렇게 된다는 사실은 우리를 우울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근거 없는 이야기가 아니기에 다가올 미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곰곰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던 인간의 일을 기계가 대신한다는 사실을 이제는 그 누구도 부정하기 힘듭니다. 그렇다면 그냥 포기해야 할까요? 그럴수록 인간만이 가진 장점에 집중하면서 할 수 있는 일들을 더욱더 풍요롭게 해야 한다는 것이 많은 미래학자의 주장입니다. 실제로 18세기 중반에서 19세기 초까지 이루어진 산업혁명으로 기계가 사람의 일을 대신했고 많은 이들이 실업자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통해 사회 경제 면에서 큰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는 마음,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찾는 모습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 모범을 대축일로 기념하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통해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의 전 생애를 보면 결코 평탄하다고 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로 성모님께서는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십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처녀의 몸으로 예수님을 잉태한다는 것은 당시의 관습을 떠올렸을 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일이기에 받아들이는 성모님이십니다. 단순히 원죄 없이 잉태되신 큰 은총을 입었기 때문일까요? 그보다도 철저히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사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어떤 순간에도 절망하지 마십시오. 주님 안에서 희망을 찾으세요.


우리는 언젠가 죽으리라는 사실에 직면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 ‘내 인생에서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내가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노벨상의 창설자 알프레트 노벨은 다이너마이트와 폭발물을 발명해서 많은 재산을 모았습니다. 어느 날 그의 형제 중 한 명이 죽었는데, 한 신문에서 알프레트 노벨이 죽었다고 오보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노벨은 살아있음에도 자신의 사망 기사를 보게 된 것이지요.
그때 자신을 어떻게 사람들이 기억할 것인가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 방향을 바꿔서 자기 재산을 전부 바쳐서 노벨상을 만든 것입니다.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것은 어떤 마음을 갖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머뭇거리다가는 후회만 남게 될 것입니다. 나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리면서 사람들의 기억 안에서 어떻게 남을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해야 할 일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을 높이 올려줄 사람만 가까이 하라
-전삼용신부-
길가에 살면서 핫도그를 파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귀가 거의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가게에 라디오가 있을 리 없었습니다. 눈도 좋지 않아 신문도 읽지 않았습니다. 다만 좋은 핫도그를 팔면 많은 사람이 사 먹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핫도그에 들어가는 고기와 빵도 남들보다 크게 했습니다. 고속도로변에 광고판도 세웠고 길가에 나와 “핫도그 사세요.”라고 외치기도 하였습니다. 사업은 나날이 번창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대학에 다니는 아들이 집에 와서 아버지를 돕게 되었습니다. 경제를 공부하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라디오 듣지 못하셨어요? 신문도 읽지 못하셨죠? 지금 경기가 곤두박질치고 있어요. 유럽의 상황은 처참해요. 미국은 유럽보다 훨씬 나쁘고요.”
이 말에 아버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 우리 아들은 대학생이고 신문도 읽고 라디오도 들으니까 아는 게 많은 게 당연하지.’
그리고는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고기도 줄이고 핫도그 크기도 줄였습니다. 더 이상 길가에 서서 핫도그를 팔지도 않았습니다. 아들의 말대로 장사가 점점 안 되었습니다. 급기야 고속도로변의 간판도 내려야했습니다. 그렇게 완전히 망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네 말이 옳았다. 경기가 곤두박질치고 있는 게 분명하구나.”
경기가 안 좋다고 다 망하는 것은 아닙니다. 경기가 안 좋으면 망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만 망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그 부정적인 믿음을 선택합니다. 그래서 경기가 더욱 안 좋아집니다. 이것이 모든 인간이 가지고 태어나는 원죄의 영향 때문입니다. 원죄를 지니고 태어나면 자아의 부정적인 생각을 받아들여 항상 더 낮고 어두운 곳으로 향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그 자아의 목소리를 발로 밟고 하늘의 목소리만 경청하는 분이셨습니다. 세상의 믿음에 역행하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모님 아닌 분에게 태어나실 수 있으셨을까요? 절대 불가합니다. 자녀를 알려면 부모를 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가 죄가 있는데 자녀가 성인이 태어날 수 없습니다. 모기에서 모기 외에 다른 동물이 태어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에게서는 인간밖에 태어나지 못합니다. 성모 마리아가 하느님을 낳았다면 이미 하느님이신 것입니다. 하느님이어야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이 될 수 있느냐고 반박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성모 마리아께 가브리엘 천사가 한 말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하느님께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뜻은 인간은 그렇지 못하다는 뜻과 같습니다. 하느님만이 모든 일이 가능합니다.
이것을 믿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죄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고 하느님이 자신들을 용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믿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힘으로 나뭇잎으로 몸을 가리고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면 자신의 능력을 믿게 됩니다. 이것이 원죄이고 이 아담과 하와의 원죄가 모든 인류에게 미친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 마리아만은 자신의 능력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브리엘 천사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한계를 알고 오로지 하느님만이 당신을 높여줄 것을 믿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원죄의 어두움에 물들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자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어떤 특징을 지닐까요? 도움을 청할 것입니다. 아이가 병뚜껑을 따지 못할 때 어떻게 합니까? 부모에게 내밉니다. 이것이 자신을 믿지 않는 죄 없는 어린이와 같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무조건 하느님께 청합니다. 그러니 항상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을 한 잔 마시더라도 체하지 않게 도와달라는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운전을 시작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능력을 절대 믿지 않는 사람이 원죄로부터 멀어지는 사람입니다. 자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도와주시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기에 더 큰 일을 이루어냅니다.
우리는 하루에 몇 번 정도 하느님을 찾습니까? 자주 하느님을 찾을수록 하늘나라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만이 나의 능력을 높여주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프라 윈프리는 “여러분을 더욱 높이 올려줄 사람만 가까이 하세요.”라고 충고합니다. 우리에게 그 분은 하느님이시고 그분이 파견하신 사람들입니다. 죄에서 멀어지려면 자신을 높여줄 하늘에 계신 분만 신뢰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항상 불가능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조재형신부-
전임 교구장님께서 언젠가 말씀을 하셨습니다. “교구장으로서 가장 힘들었을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사제들의 인사이동입니다.” 인사이동에 대한 체계적인 기준이 마련되지 않은 점도 있습니다. 사제들의 사목에 대해서 일정한 기준의 평가를 정하기 어려운 점도 있습니다. 사제들의 능력과 적성을 다 파악하기 어려운 점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힘든 점은 ‘순명’의 자세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제는 힘들고 어려운 곳이라도 기쁜 마음으로 순명하였고, 그런 곳에서도 사목의 열매를 맺었다고 합니다. 그런 사제를 보면 감사하기도 하였고, 고맙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때도 있었다고 합니다.
제가 속한 서울교구는 보좌신부로 지내는 기간이 많이 길어졌습니다. 교구에서 인사이동에 대한 정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이런 현상은 계속될 겁니다. 몇몇 동료는 본당 사목은 하지 않겠다는 의견을 말씀드렸습니다. 인사이동에 대한 주교님의 부담을 덜어드리고 싶었고, 후배들이 본당 사제가 될 수 있도록 자리를 내주고 싶은 마음에서였습니다. 단순히 순명을 넘어서 더 힘들고 어려운 곳으로 찾아가려는 동료들의 모습에서 교회에 대한 사랑, 후배들에 대한 사랑을 볼 수 있었습니다. 주교님께서 제게 ‘가톨릭 평화 신문 미주 지사’를 제안하셨고, 저도 기쁜 마음으로 순명하였습니다. 연로하신 어머니께서도 기도 중에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고, 잘 다녀오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벌을 주시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가 넘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용서를 청했다면 하느님께서는 선악과를 먹었던 죄를 용서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담은 자신의 잘못을 여인의 탓으로 돌렸습니다. ‘저 여인이 저에게 먹으라고 권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용서를 받을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여인도 마음이 아팠을 것입니다. 비록 자신이 먹으라고 권했을지라도 남자가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말을 했다면 여인은 남자를 더욱 신뢰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두 사람 모두를 용서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믿지 못하고, 우리의 잘못을 남의 탓으로 돌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자비하심이 우리의 마음으로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잘되면 내 탓이고, 잘못되면 조상 탓’이라는 말을 하곤 합니다. 시대를 탓하고, 가정을 탓하고, 이웃을 탓하고, 친구를 탓하면 진정한 자신을 보기 어렵습니다. 삶의 기준이 성공과 권력 그리고 재물이라면 우리는 누군가를 탓하기 마련입니다. 작은 꽃은 절벽에 피어도, 길가에 피어도, 비와 바람을 맞아도 무엇을 탓하지 않습니다. 존재하는 것만으로 하느님의 큰 영광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많은 문제는 자신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잘못을 솔직하게 시인하면 풀릴 수 있습니다. 상대방의 관점에서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존심, 열등감, 편견, 두려움 때문에 인정하려 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제의 해결 방법은 무엇일까요?
오늘의 복음에서 우리는 엉킨 실타래를 푸는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바로 성모님의 방법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먼저 천사 가브리엘의 말을 경청하였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온 일들이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성모님께서는 누군가를 탓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이 드러날 수 있도록 하느님께 의탁하였습니다.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면 우리 또한 빛의 자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온 우주보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안 되는 것이 없다
-반영억신부-
세상은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돈을 벌어야 하고 또 돈이 많은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정작 돈을 가지고도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돈으로 하느님을 차지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많은 돈이 하느님을 멀리하게 만듭니다.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했지만 사실은 돈이 하느님을 만나는데 결정적으로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물질을 따르기보다 “불가능한 일이 없는” 하느님께 마음을 두어야겠습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은총이 가득힌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라고 말했습니다. 마리아는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습니다. ‘곰곰이’ 생각한다는 것을 그것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에 대한 대답은 감당하는 책임과 희생이 들어있습니다. 그 바탕에 다시 ‘아기를 잉태’하게 되리라는 소식을 전달받았습니다. 더군다나 천사는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하며 명했습니다. 그러니 마리아가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천사는 늙은 나이에 임신한 엘리사벳의 잉태 소식을 전하며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1,37) 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가 말하였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마리아는 ‘곰곰이 생각한 후’ 자유의지로 응답하였습니다. 천사를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말씀을 믿었고 그 말씀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처녀가 임신을 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 했지만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다”는 사실이 두려움을 몰아냈습니다. 결국 구세주의 잉태는 하느님의 은총과 거룩한 어머니 마리아의 믿음 안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잉태되고 또 태어나야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우리의 응답을 통하여 세상에 구세주를 낳아드려야 합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우리의 응답과 협력을 통해서 이루십니다.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지 않습니다.
마리아가 이런저런 생각에 머리를 굴려 계산하고 앞으로 닥칠 일을 고민했더라면 아마도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하고 응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약혼한 처녀가 부모도 모르고 약혼자도 모르게 배가 불러온다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그 아이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이 믿어주기나 할까요? 하느님을 모독한 죄로 쫓겨나든지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저에게 이루어 주소서’ 한 것은 곧 자신의 모두를 바친 것을 의미합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주님의 뜻을 겸손하게 받아들임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자신을 봉헌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실 ‘안 되는 것이 없는 세상’에서 ‘불가능이 없는 하느님을 차지’하기란 너무도 힘이 듭니다. 그래도 우리의 어머니 마리아께서 순명의 모범을 보이시고 실제로 구원을 이루셨으니 우리도 일상 안에서 성모님을 생각하며 단호한 결단과 더불어 온전한 봉헌의 삶으로 한 발 나아가야겠습니다.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는 겸손과 순명으로 하느님을 잉태 하셨습니다”(성 베르나르도).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를 통하여 세상에 오셨으니 역시 마리아를 통하여 이 세상을 다스리기를 원하시며, 또한 마리아를 통하여 다시 오실 것이므로 마리아를 통하여 세상의 구원이 성취될 것입니다”(성 루도비꼬). 어머니를 통하여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께로 가기 위해 먼저 겸손과 순명의 어머니 마리아께 다가가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업가가 신부님께 와서 물었습니다. “신부님, 제가 1억 원을 봉헌하면 하느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그러자 신부님께서 대답하셨답니다. “그거 한번 시험해 봅시다!”
봉헌한다는 것은 그것을 통해 나의 이득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봉헌을 통해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어떤 기대나 바람을 이루기 위해서 재물을 내 놓는다면 그것은 예물이 아니라 뇌물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결코 뇌물을 즐기지 않으십니다. 마리아는 자신을 위하지 않고 하느님의 영광을 희망하였고 우리 모두를 위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갈망하였습니다. 그 참된 봉헌을 통해 우리에게 구세주를 낳아주셨습니다. 우리의 삶도 주님의 뜻을 이루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봉헌의 삶이되기를 기도합니다.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인간은 하느님에게서 와서 하느님에게로 돌아가는 존재입니다.
-송영진신부-
하느님께서 성모님을 ‘원죄 없이’ 잉태되게 하신 것은,
단순히 성모님의 ‘몸’을 무결점의 상태로 만들어 주신 일이 아니라,
성모님의 영혼을 천지창조 때의 순수한 상태 그대로 만들어 주신 일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원죄에 물들지 않도록 보호해 주신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신 첫 번째 이유는,
당신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입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
예수님은 하느님의 본성을 그대로 지니신 채 인간 세상으로 오셔서
사람으로 사셨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께서 아버지에게서 인간 세상으로 강림하시는 통로로(어머니로)
선택되신 분인데,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본성을 그대로 지니신 채로
인간 세상으로 가시는 예수님을 위해서 성모님을 무결점의 통로로 만드셨습니다.
(“왜 꼭 그렇게 해야만 했는가? 성모님이 우리와 똑같이 원죄 있는 사람으로
잉태되면 안 되는 것인가?”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시기를 원하셨다.”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하느님께서 성모님을 ‘원죄 없이’ 잉태되게 하신 두 번째 이유는,
우리에게 최종 목적지가 어디인지,
그곳이 어떤 곳인지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입니다.
‘원죄 없는’ 상태는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기 전의 상태,
즉 천지창조 때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던 그 상태입니다.
그리고 종말에 완성될 하느님 나라의 상태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죄의 지배 아래에 있는 인간들을 구원해서
하느님 나라로 데리고 가려고 오신 분인데, 죄에 물든 이 세상을 깨끗하게 해서
원래의 상태로 복구하려고 오신 분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에덴동산이 원래대로 복구된 그곳, 하느님 나라입니다.
성모님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은
그 나라의 시민들의 모습을 미리 보여 주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묵시록에서는 그 나라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부정한 것은 그 무엇도, 역겨운 짓과 거짓을 일삼는 자는 그 누구도
도성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오직 어린양의 생명의 책에 기록된 이들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묵시 21,27).”
그 나라는 완벽하게 깨끗한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신앙생활은 깨끗해지려고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완벽하게’ 깨끗해지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물론 사람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을 통해서 세상으로 오신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셔야만 합니다.
“그곳에는 더 이상 하느님의 저주를 받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도성 안에는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가 있어,
그분의 종들이 그분을 섬기며 그분의 얼굴을 뵐 것입니다(묵시 22,3-4ㄱ).”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지은 다음에 하느님을 피해서 숨었습니다(창세 3,8).
그러나 종말의 하느님 나라에서는 그렇게 숨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숨을 일 자체가 없습니다.
모두 다 깨끗하기 때문에 죄의식, 죄책감, 부끄러움 같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누구나 하느님과 예수님의 얼굴을 직접 뵈면서,
하느님, 예수님과 함께 살게 됩니다.
또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다음에 받은 첫 번째 벌은
바로 ‘하느님의 저주’였습니다.
창세기에서는 그것을 임신과 출산의 고통, 노동의 고통,
인생의 허무함 등으로 표현하고 있는데(창세 3,16-19),
간단하게 ‘생로병사의 고통’이라고 줄여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종말의 하느님 나라에는 더 이상 하느님의 저주를 받는 것이 없다는 말은,
‘생로병사의 고통’이 없다는 뜻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는 따 먹었지만 생명나무 열매는 따 먹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죄를 지은 다음에는
생명나무 열매에 다가가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창세 3,22-24).
“그들은 왜 생명나무 열매는 따 먹지 않았을까? 사탄은 왜 생명나무 열매를
먹으라는 유혹은 하지 않았을까?” 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것은 아마도 생명나무 열매를 따 먹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원래부터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생명나무 열매를 먹지 않아서 영원한 생명을 잃은 것이 아니라,
죄를 지었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종말의 하느님 나라에서는 그 나라의 모든 시민들이
마음대로 따 먹을 수 있도록 생명나무 열매가 완전히 개방됩니다(묵시 22,2).
이것은 그 나라의 시민들이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는 뜻입니다.
신앙생활의 목표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 또 성모님을 본받는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하면, 누구나 그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도 ‘한처음’부터 선택된 존재라고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성모님만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도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에페 1,4-5).”
“만물을 당신의 결정과 뜻대로 이루시는 분의 의향에 따라 미리 정해진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몫을 얻게 되었습니다(에페 1,11).”
그래서 인간은 “하느님에게서 와서 하느님에게로 돌아가는” 존재입니다.
지상에서의 인생살이를 ‘귀양살이’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소풍’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나그네 여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이곳’은 언젠가는 떠나야 할 곳이고,
‘그곳’은 우리가 가서 살아야 할 곳입니다.
신앙생활은 우리가 ‘그곳’에 잘 도착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에
응답하는 생활이고, 또 ‘그곳’에 잘 도착하기 위해서 준비하는 생활입니다.
성모님은 신앙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한 모범이 되시는 분이기도 하고,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1,26-38: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구원의 은총을 미리 입게 하시어 마리아를 원죄에서 보호하셨음을 기리는 날이다. 교황 비오 9세는 이미 1854년 12월 8일에 마리아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신 것을 ‘믿을 교리’로 선포하셨고, 이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는 한국교회의 수호자이시다. 성모님께 대한 이 믿을 교리는 루르드의 벨라뎃다 성녀에게 나타나신 성모님께서 확인시켜 주신 내용이다. 우리는 마리아께서 처음으로 구원의 신비를 입으셨듯이 나약한 우리들도 그 신비에 동참하리라는 희망을 갖게 해준다.
오늘 복음의 내용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아무리 크고 좋아도 인간의 협력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음을 보여준다. 마치 처음의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어겼기 때문에 세상에 은총과 구원이 오지 못하고 죄와 죽음이 왔던 것처럼, 하느님의 뜻에 대한 순명을 통해서 구원이 오게 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마리아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마리아께서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지 않았다면 구세주는 태어나실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십자가에 이르기까지의 아버지의 뜻에 대한 순명이 아니었더라면 또한 구원의 업적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죽음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아버지께 피땀을 흘리며 고통스러워하고 그 잔을 치워주시도록 기도하면서도 아버지께 모든 것을 맡기셨던 아드님과 같이 오늘 복음의 마리아께서도 당신의 신앙을 용감히 하느님 앞에 고백하고 있음을 우리는 보아야 한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루카 1,38) 이 고백은 주님의 탄생의 신비를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하는 마리아의 자세이다. 우리도 이 신비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삶이 필요하다. 삶과 유리된 신앙은 무의미하다. 마리아의 이 고백이 자신의 전 존재를 건 고백이었다면, 마찬가지로 우리도 구체적인 실현을 통해 신비를 체험하고 하느님을 체험하면서, 하느님의 뜻에 맞게 우리의 생을 모두 바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삶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마리아의 구체적인 신앙고백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탄생, 삶, 죽음, 부활이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이면서 신앙으로 그 신비를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신앙은 역시 구체적인 것이어야 한다(야고보서).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주님을 느끼지 못한다면, 만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다. 마리아와 같이 자신이 죽어야 한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이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그분께 맡겨드렸다는 것과, 그리고 이웃 앞에 자신을 봉사하기 위하여 내어놓는 자세가 주님을 이 세상에 낳아주실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나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뜻”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그것을 이루려 해야 한다. 가정 안에서, 학교에서 그리고 형제들 사이에서이다. 경험담(주교님 편지).
지금 이 순간, 우리도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하고 고백하며, 주님 앞에 살아가고 있는가 생각해 보자.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 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언제나 주님의 탄생 신비를 살 수 있으며, 체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고백은 마리아의 고백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의 고백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고백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죽지 않으면 안 되며, 그만한 아픔이 있게 마련이기에 고통의 신비를 더 깊이 알게 되며, 더 깊은 사랑을 우리 이웃에 전할 수 있고 그것을 통하여 즉시 우리는 세상을 성화 시켜 나갈 수 있게 된다. 그 고통을 통해 우리는 즉시 부활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으니, 바로 이것이 성탄의 신비가 12월 25일 성탄에만 갖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순간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인의 삶은 휴가가 없다. 연중무휴이다. 큰 것을 찾기보다,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주님의 뜻을 발견하고 기쁘게 그것을 실천하며 나아가도록 하자. 신앙은 알아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야 하고, 또 살아가며 확실히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마리아와 같이 우리의 모든 순간이 주님 앞에 그대로 고백되는 삶으로 이어지도록 은총을 구하며 이 미사를 우리 자신을 위해, 우리 가정을 위해 봉헌하도록 하자.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 28)
-한상우신부-
이 모든 일은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하느님이라
부를 수
있어야합니다.
우리는
매순간
가장 순결한
오늘을
하느님을 통해
맞이합니다.
은총입니다.
과분한 은총입니다.
은총의
하느님께서
탄생하실 거처는 분명
원죄 없이 이루어지는
거룩한 거처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와같이
형식적인 사랑이
결코 아닙니다.
구원을 시작하시는
하느님의 놀라운
신비입니다.
우리의 봉헌또한
복되신 동정
마리아처럼
갈리움 없는
오롯한 봉헌이길
기도드립니다.
하느님을 잉태하실
마리아의 탄생또한
원죄에 물들지 않은
잉태임을 진심으로
믿습니다.
분열이 아닌 일치를
간섭이 아닌 배려를
배우게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한
교회
하느님께서
탄생하실 교회를
위해 기도드립니다.
한국 가톨릭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오상선신부-
늘 미사의 말씀들 안에는 죄와 구원, 절망과 희망이 교차합니다.
먼저 첫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너는 어찌하여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창세 3,13)
제1독서는 우리를 원죄의 현장으로 데려갑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어긴 인류의 조상과 하느님의 가슴 아픈 대면의 현장입니다. "어찌하여..." 하시는 하느님 마음은 왜 그랬는지를 꼭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추궁의 심정이 아니라 오히려 탄식에 가까울 겁니다. 오직 그들의 행복을 위해 공들인 모든 게 무너지는 아픔과 그들이 짊어져야 할 결과를 예견하는, 안타까움 가득한 한탄처럼 들립니다.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에페 1,4).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먼 옛날 하느님 앞에서 고개 숙인 채 슬픈 선고를 듣던 "첫 사람"의 처지를 반전시키는 놀라운 사실을 전합니다. 원죄에 물든 우리가 다시 하느님 앞에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오늘의 이 길지 않은 제2독서 내용 안에 거의 모든 절마다 "그리스도"의 이름이 불리웁니다. 첫 사람의 죄는 새 아담인 "그리스도"를 통해 사해지고, 우리는 그 덕분에 거룩하고 흠 없는 본성을 되찾았습니다.
다음은 하와의 이야기입니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창세 3,12).
죄의 책임을 전가하면서 하와의 불순종이 드러납니다. 그녀 역시 뱀의 꾐에 넘어갔지요. 이 구차하고 누추한 발뺌의 행태는 누가 먼저냐의 문제라기보다 신뢰와 결속이 무너지는 죄의 결과를 보여 줍니다. 아마도 하느님께는 이 모습이 더 아프셨을 것 같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마리아께서 천사를 통해 하느님께 드렸던 응답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부르심 앞에서 내린 어린 소녀의 이 순수한 결단은 원죄의 결과로 죄악에 물든 세상에 새 희망을 던집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잉태되는 순간부터 원죄에 물들지 않으신 마리아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아드님을 모실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미리 예비하신 존재이십니다. 그녀는 거룩하고 흠 없는 태 안에 자신을 만드신 창조주를 모시도록 준비된 새 하와이십니다. 마리아는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창세 3,20)를 넘어 모든 존재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아담의 불순종과 새 아담인 그리스도의 순종, 화와의 불순종과 새 하와인 마리아의 순종. 얼핏 대비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신비로운 인과관계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다"(로마 5,20)는 사도 바오로의 단언처럼, 스스로 범한 죄 때문에 시들어가는 인류를 두고 보실 수 없는 하느님께서 이 모두를 회복할 특단의 조치를 감행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극단의 현실은 우리 안에 고스란히 들어 있고 또 매순간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같은 몸, 같은 존재 안에 아담의 범죄와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동시에 지니고 살아가지요. 또 하와의 불순종과 마리아의 순종 또한 나날이 체험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저마다 죄와 은총, 어둠과 빛,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길을 찾아나가는 순례자에 비길 수 있습니다. 가망 없는 죄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온전한 의인도 못되는 가련한 실존을 입고 살아가는 나그네와 같은 존재말입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
그래서 천사의 이 단언은 그날 마리아에게는 물론 오늘의 우리에게도 커다란 희망이 됩니다. 죄인인 우리가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다는 자체가, 엘리사벳의 늙은 나이의 잉태나 동정녀의 잉태 못지 않게 우리 힘만으로는 불가능의 영역이지만, 하느님께는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율법과 제도가 아니라 주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거룩하고 흠 없다"고 해 주시니, 우리는 부정하고 불결하고 부족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잉태하고 품고 출산해 키우는 소명에 기꺼이 응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마리아와 함께 기뻐해도 좋습니다. 아니 기뻐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니 한껏 기뻐하십시오.

우리도 은총으로 가득하다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296784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12월 8일 금요일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2015년 12월 8일 화요일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카 1,26-38)
세상의 악은 하느님을 멀리하는 마음에서 생깁니다.
하느님의 계획을 받아들이는 순종의 자세는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 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에게 사랑받는 첫 여인인 그녀는 천사가 그녀에게 전한 부르심에 “예.”라고 대답하는 첫 여인이기도 합니다. 오늘 마리아는 우리 앞에, 우리 마음의 눈앞에 있습니다.
-안봉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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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정직한 사람을 도울 수밖에 없다. 정직한 사람은 신이 만든 것 중에 최상의 작품이기 때문이다(세르반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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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가 안 좋다고 다 망하는 것은 아닙니다. 경기가 안 좋으면 망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만 망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그 부정적인 믿음을 선택합니다. 그래서 경기가 더욱 안 좋아집니다. 이것이 모든 인간이 가지고 태어나는 원죄의 영향 때문입니다. 원죄를 지니고 태어나면 자아의 부정적인 생각을 받아들여 항상 더 낮고 어두운 곳으로 향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그 자아의 목소리를 발로 밟고 하늘의 목소리만 경청하는 분이셨습니다. 세상의 믿음에 역행하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모님 아닌 분에게 태어나실 수 있으셨을까요? 절대 불가합니다. 자녀를 알려면 부모를 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가 죄가 있는데 자녀가 성인이 태어날 수 없습니다. 모기에서 모기 외에 다른 동물이 태어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에게서는 인간밖에 태어나지 못합니다. 성모 마리아가 하느님을 낳았다면 이미 하느님이신 것입니다. 하느님이어야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하느님께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뜻은 인간은 그렇지 못하다는 뜻과 같습니다. 하느님만이 모든 일이 가능합니다.
이것을 믿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죄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고 하느님이 자신들을 용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믿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힘으로 나뭇잎으로 몸을 가리고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면 자신의 능력을 믿게 됩니다. 이것이 원죄이고 이 아담과 하와의 원죄가 모든 인류에게 미친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 마리아만은 자신의 능력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브리엘 천사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한계를 알고 오로지 하느님만이 당신을 높여줄 것을 믿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원죄의 어두움에 물들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자주 하느님을 찾을수록 하늘나라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만이 나의 능력을 높여주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프라 윈프리는 “여러분을 더욱 높이 올려줄 사람만 가까이 하세요.”라고 충고합니다. 우리에게 그 분은 하느님이시고 그분이 파견하신 사람들입니다. 죄에서 멀어지려면 자신을 높여줄 하늘에 계신 분만 신뢰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항상 불가능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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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용서를 청했다면 하느님께서는 선악과를 먹었던 죄를 용서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담은 자신의 잘못을 여인의 탓으로 돌렸습니다. ‘저 여인이 저에게 먹으라고 권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용서를 받을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여인도 마음이 아팠을 것입니다. 비록 자신이 먹으라고 권했을지라도 남자가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말을 했다면 여인은 남자를 더욱 신뢰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두 사람 모두를 용서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믿지 못하고, 우리의 잘못을 남의 탓으로 돌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자비하심이 우리의 마음으로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작은 꽃은 절벽에 피어도, 길가에 피어도, 비와 바람을 맞아도 무엇을 탓하지 않습니다. 존재하는 것만으로 하느님의 큰 영광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많은 문제는 자신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잘못을 솔직하게 시인하면 풀릴 수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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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돈을 벌어야 하고 또 돈이 많은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정작 돈을 가지고도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돈으로 하느님을 차지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많은 돈이 하느님을 멀리하게 만듭니다.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했지만 사실은 돈이 하느님을 만나는데 결정적으로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물질을 따르기보다 “불가능한 일이 없는” 하느님께 마음을 두어야겠습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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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제도가 아니라 주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거룩하고 흠 없다"고 해 주시니, 우리는 부정하고 불결하고 부족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잉태하고 품고 출산해 키우는 소명에 기꺼이 응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마리아와 함께 기뻐해도 좋습니다. 아니 기뻐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니 한껏 기뻐하십시오.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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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원죄에 물들지 않게 지켜 주시고 은총으로 가득 차게 하시오 성자의 맞갖은 어머니가 되게 하셨나이다.
-감사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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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 성모님을 ‘원죄 없이’ 잉태되게 하신 것은,
단순히 성모님의 ‘몸’을 무결점의 상태로 만들어 주신 일이 아니라,
성모님의 영혼을 천지창조 때의 순수한 상태 그대로 만들어 주신 일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원죄에 물들지 않도록 보호해 주신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신 첫 번째 이유는,
당신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입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
신앙생활은 깨끗해지려고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완벽하게’ 깨끗해지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물론 사람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을 통해서 세상으로 오신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셔야만 합니다.
창세기에서는 임신과 출산의 고통, 노동의 고통,
인생의 허무함 등으로 표현하고 있는데(창세 3,16-19),
간단하게 ‘생로병사의 고통’이라고 줄여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종말의 하느님 나라에는 더 이상 하느님의 저주를 받는 것이 없다는 말은,
‘생로병사의 고통’이 없다는 뜻입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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