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12월 8일 대림 제2주일(인권 주일)

Margaret K 2019. 12. 7. 19:59

2019 12 8일 대림 제2주일(인권 주일)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태3,1-12)

 

 “Repent, 
for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메시아 시대가 다가옴을 알린다. 메시아는 참평화의 시대를 열 것이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의 자손으로 태어나신 것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고 다른 민족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임을 상기시킨다(제2독서). 세례자 요한은 말과 행동으로 회개의 삶을 권고하며 메시아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예언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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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는 메시아에 관한 예언을 들려줍니다. 잘려 말라죽은 그루터기는 다윗 왕조의 죄와 불충을 상징합니다. 바로 이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는 것은 거저 주는 생명의 시작을 나타냅니다. 햇순은 은총이고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영의 선물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지혜와 용맹과 사랑의 영으로 채워 줍니다.메시아께서는 주님의 영을 받아 무엇보다 힘없고 가련한 이들을 위하여 놀라운 구원의 활동을 펼치십니다. 메시아 나라는 긴장과 적대 행위가 없고 평화와 일치만 있습니다. 이런 이사야의 환시는 우리 마음을 희망과 기쁨으로 채워 줍니다.제2독서에서 바오로는, “인내와 위로”의 선물은 암흑 속에서도 희망과 기다림을 키워 주고, 사랑의 선물은 서로를 받아들이고 섬기기 위하여 우리를 한마음 한목소리로 하나 되게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할례 받은 이들, 곧 당신 약속에 대한 하느님의 충실함을 나타내려고 선택된 백성에게 하였던 약속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넘쳐흐르는 당신의 자비로 찬양을 받습니다.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유다인들에게 구세주의 오심을 준비하면서 먼저 회개하라고 외칩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는 단순한 종교 예식뿐만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불순종에서 진실한 순종으로 나아가는 인격의 변화로도 이루어집니다. 사람의 마음을 알고 계시는 하느님 앞에서 명예와 자격은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회개의 선물은 “성령과 불” 안에서 세례를 통하여 다가오는 하늘 나라로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먼저 회개하고 마음을 비워라

-임상만신부-


사제들이 하는 말 중에 “강론과 고해성사만 없다면 사제직은 천직”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신자들을 신앙적으로 가르치거나 회개시키는 것이 매우 힘들고 어렵기에 나온 말이다. 그런데 사제로 35년 넘게 살다 보니 정말 어려운 것은 정작 남의 강론을 듣는 것과 자기 고해성사를 하는 것이었다. 특히 신자들의 죄를 사해 주는 처지에서 자신도 매번 죄를 찾아 회개하고 고해성사를 한다는 것이 그리 쉽지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이 열심히 산다고는 했지만, 그동안 스스로 만든 자신만의 성채 속에서 그만큼 완고해졌기 때문이리라.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바리사이와 사두가이들도 요한 세례자의 설교를 듣고 세례를 받기 위해 오기는 했지만, 그들 또한 율법을 통해 남들의 죄를 판단하고 단죄를 하는 사람들로서 행여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사람들이다. 요한 세례자는 이들을 보자마자 대뜸 ‘독사의 족속’이라고 비난하면서 화를 피하려면 “우선 회개하고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하고 있다. 이 말에 그들 대부분이 매우 당혹스럽고 불편한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자기들은 이미 율법대로 잘살고 있는데 뭘 회개하라는 것인지 서로 묻기도 하고 일부는 그 자리를 떠나고 있다.

우리는 대체로 자신의 삶이 다른 사람보다 더 옳고 바르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신앙생활에 매진하여 깊이 의식화되고 습관이 된 신자일수록 회개하기가 무척 힘들다. 그리고 세상의 죄악들은 다른 사람들의 잘못들이 문제이지 자신은 전혀 문제가 없다고 본다. 그래서 세상에서 제일 쉬운 것이 ‘지적질’이고 제일 어려운 것이 ‘회개’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 신자들도 이 회개를 아주 소홀히 하고 있다. 우선 죄를 별것 아닌 것으로 생각해서 그렇기도 하고, 끝없는 변명으로 죄를 합리화하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이 회개에 따르는 그 은총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의 믿음생활에서 회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첫 설교 말씀이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인 것을 보면 ‘회개는 하느님 나라의 출입문’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아무리 기도와 선행과 자선 등으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죄에 대한 회개가 선행하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단순한 종교적 행위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를 통한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회개를 하면 죄 사함의 은총을 받는다. 죄는 시간이 가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전가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그 해결은 단 하나 회개하는 것뿐이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우리 안에 진리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하면, 그분은 성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1요한 1,8-9)

그리고 덤으로 회복의 은총도 주어진다. “내 이름으로 불리는 내 백성이 자신들을 낮추고 기도하며 나를 찾고 악한 길에서 돌아서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며 그들의 땅을 회복시켜 주겠다”(2역대 7,14)는 말씀은 우리가 아무리 죄를 많이 지었어도 진정한 회개를 하고 돌아오기만 하면 모든 것이 자동적으로 복구되고 회복됨의 보증이기에 이것만큼 큰 은총은 없을 것이다.

대림 시기 동안 우리는 우선 회개로 시작하여 완고해진 우리의 마음을 비워 놓고 주님을 맞이하도록 해야 하겠다. 그래야 세상 것으로 힘주던 우리가 겸손으로 낮아지고, 용서가 필요한 죄인임을 깨달을 때, 그 마음속에 주님께서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도시 광양의 선구자

-김창선선구자-


자색 촛불을 하나 더 밝히며 대림 제2주일을 맞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정의와 공정으로 다스리는 메시아의 시대가 다가옴을 예고합니다. 시대의 선구자인 세례자 요한은 유다 광야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3,2) 메시아의 재림을 깨어 기다리는 이 은혜로운 시기에 굽은 길을 곧게 펴는 마음으로 회심합니다.

한국천주교회는 대림 제2주일을 인권 주일과 사회교리주간으로 지냅니다. 오늘날 물질문명과 돈 중심의 사회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인간의 존엄성은 무시되고 사회 경제 질서는 심각한 윤리적 딜레마에 빠져듭니다. 인간을 존중하고 정의를 실천하여 사람답게 살 수 있는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새 복음화’의 길은 사회교리의 실천에 달려있습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죄에 대하여 개인의 책임(‘내 탓이오!’)을 강조해왔으나 최근 구조적인 불의로 공동선이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시대마다 도전적인 사회 이슈가 제기될 때 역대 교황들은 교회의 가르침을 선포해왔습니다.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바티칸의 대표적 사회교리 문헌인 <새로운 사태>(1891), <사십 주년>(1931), <어머니요 스승>(1961), <지상의 평화>(1963), <민족들의 발전>(1967), <생명의 복음>(1995), <복음의 기쁨>(2013) 등은 사랑과 정의의 열매를 맺어 평화를 이루는 생명의 길입니다.

오늘의 제1독서(이사 11,1-10)에서 이사야 예언자(기원전 8세기)는 다윗 왕권의 이상을 구현할 메시아 시대의 도래를 예고합니다.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 예루살렘 출신 다윗은 필리스티아인과 전쟁에서 골리앗을 이긴 영웅(1사무엘 17,12 이하)이고, 40년간 통일왕국(1역대 29,27)을 다스린 통치자였으며, 시편에서 보듯이 수금 실력이 뛰어나 성전의 거룩한 전례를 세운 왕의 모델입니다.

오시는 ‘새 다윗’(이사 11,1)은 성령 칠은을 입어 주관대로 판단하지 않는 정의와 신의의 심판자입니다. 늑대, 표범, 사자 같은 야생동물이 염소, 양, 소 같은 가축과 함께 지내고, 어린이가 독사굴에 손을 디밀어도 물지 않는 세상은 천국의 목가적인 모습입니다.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메시아의 시대는 보편적인 정의와 평화가 꽃피는 세상(화답송, 시편 72)이라는 극적 묘사입니다. 모든 민족이 주님을 알고 모여든 성전은 주님께 영광입니다.

제2독서(로마 15,4-9)에서 바오로 사도는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는 인내를 배우고 위로를 받아 희망을 간직하게 됨을 밝힙니다. 주님의 뜻에 일치하여 한마음 한목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함은 경직된 사고와 획일적인 표현이기보다는 타인의 생각과 의견도 배려하여 조화를 이룸에 있습니다. 교회의 궁극적인 사명인 사랑의 일치로 주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릴 때 하느님의 영광이 세상에 드러나게 됩니다. 다시 오시는 주님은 만민에게 은총의 선물이 되어 그들도 주님을 모시고 기쁘게 찬미하고 감사드립니다.

1634년, 마시모 스탄지오네의 ‘광야에서 외치는 세례자 요한’.


오늘 복음은 예언자가 말한 선구자인 세례자 요한(이사 40,3; 말라3,1)이 유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마태 3,2-3)입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광야는 고적한 불모지입니다. 반면에 별이 빛나는 광야는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하늘(하느님)나라는 하느님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는 유다 관습에 비추어 나자렛에 오신 메시아(마태 2,23)이십니다.

하느님 나라에 사는 길은 회개와 쇄신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밖에 없습니다. 회개는 잘못을 고백하고 성사를 보는 예식보다는 하느님을 부인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나 중심의 삶’에서 ‘하느님 중심의 삶’으로 방향전환을 하는 내적 참회가 핵심입니다.

스마트 시대에 주님이 오실 길을 어떻게 마련해야 할까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 앞에서 드러낸 교만과 분노의 산과 언덕은 낮추고, 분열과 절망의 골짜기는 메우며, 얽히고설킨 매듭을 풀고 겸손한 마음으로 말씀(마태 3,3; 이사 40,3-5)을 받아들이는 길입니다.

요한은 말로만 회개를 외친 것이 아닙니다. 낙타털옷과 가죽 띠를 두른 그의 복장과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지내는 광야의 삶이 표양입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강물로 세례를 받는 백성들 가운데 율법과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바리사이와 사두가이에게 요한은 ‘독사의 자식들’이란 모욕적인 언사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질책(마태 3,7-8)합니다. 당시 사회의 갈라진 모습, 지도자들의 위선, 가난한 백성들의 고통이 짐작됩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그렇지 못한 나무는 ‘다가올 진노’에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집니다. ‘다가올 진노’(마태 3,7)는 마음으로 회개하지 않는 이에 대한 심판을 두고 한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라는 선민의식은 버리고,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새 삶에 도전합니다. 오시는 주님은 요한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으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며, 심판의 타작마당에서 알곡은 곳간에 쭉정이는 불에 태우실 것입니다.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동안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고 산타가 되어 가난한 이웃들에게 자선의 선물을 나누는 전통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모자랍니다. 나만의 시간을 가지고 내면의 하느님을 만나 우정을 나누는 사랑받는 죄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부끄러운 삶을 회심하고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신앙인이 요한의 모습을 닮은 도시 광야의 선구자가 아닐는지요? 대림 촛불 앞에서 내면을 살피고, 감사할 줄 모르고 나 중심의 삶을 산 잘못을 참회하면서 마음에 오시는 주님을 따뜻이 맞을 빈방을 서둘러 마련해야 하겠습니다. 


'뒤에 오시는 분'(마태 3,11)을 기다리며

-박일신부-


“회개하여라.”(마태 3,2) 세례자 요한은 더 이상 간결할 수 없고 더 이상 클 수 없는 자신의 메시지를 이렇게 한 마디 로 세상에 외칩니다. 이 외침은 예언자에서 예언자로 마치 횃불 하나 전달되듯 전해져 온, 사고방식과 생활 자체를 온 전히 바꾸어 구원과 생명을 구하라는 애타는 초대입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그 어떤 예언자도 덧붙이지 않았 던, 회개해야 할 이유를 밝힙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 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심판, 분노, 두려움, 캄캄함 등 이전 예언자들의 위협과는 매우 다르게, 밝고 즐거운 희망 으로 가득한 ‘하느님의 종말론적 다스리심’을 선포하고 있 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제 막 세상에 들어오는 위대한 사 건, ‘기쁜 소식’,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선포자입니다.

그럼에도 세례자 요한은 스스로 엄격한 극기의 생활을 하 면서,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 가까이 오는 종말론적 구 원을 얻겠다는 각오로 세례를 받으라고, 대단히 어두운 분 위기로 사람들을 강하게 일깨웠습니다. 그 누구도 안전하지 않으며, 이 심판의 날을 피할 수 없음을 강조하며, 회개의 세례를 받으러 오는 많은 바리사이와 사두가이의 태도의 문 제점을 통렬하게 지적합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 라.”(마태 3,8)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인, 죄를 멀리하고 하느님을 선택하라는, 그리고 단지 ‘사고방식의 전환’ 정도 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바뀐 새로운 생활을 분명하게 하라는 요구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하여 받는 하 느님의 특전도 개인의 ‘회개’ 없이는 아무 소용 없다는 것입 니다. 오늘의 신앙인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이겠습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마태 3,10)고 하면서, 찰 나도 소홀히 여기지 말고 화급하게 회개하고 좋은 열매를 맺 는 생활을 해야 한다고 재촉합니다. 그리하여 성령과 불로 세 례를 주실 “뒤에 오시는 분”(마태 3,11)을 맞을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겉만을 깨끗하게 해주는 물과 달리, 우리의 마음 을 변화시켜주시는 하느님의 성령을 주시는 분을 맞이하라 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종국에는 “꺼지지 않 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마태 3,12)이라는 경고를 덧붙입니다. 

대림 제2주일, 인권 주일이자 사회교리 주간의 시작인 오늘, 우리는 구약의 어두움과 신약의 밝음이 함께 조화를 이루는 세례자 요한의 외침을 들었습니다. 아직 어두움 속 에 있음을 자각한 우리는 ‘하늘나라’를 다시금 준비하며 기 다리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뒤에 오시는 분’이 바 로 이 ‘하느님 나라’를 여시는 분, 메시아, 즉 마지막 때의 주님이시고 심판자이심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참 신 앙인이 되어 ‘사람을 바로 그 사람을 위해 사랑할 줄 아는 참 사랑’, ‘분별 있는 사랑’을 살도록, 새로운 백성을 새롭게 일으키시는 성령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우리는 또다시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리코

-오세호신부-


예리코는 예루살렘 북동쪽 36km 지점, 요르단강 서안에 위치한 기원전 8000년경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입니다. 구약의 블레셋땅 즉 요르단강 서안의 비옥한 지역을 차지할 수 있고 지중해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로 전략적 가치가 매우 높은 도시였다고 합니다. 오랫동안 저주가 내려 아무도 살지 않았던 곳이기도 했지만 신약시대에 헤로데 대왕의 겨울 궁전이 지어지기도 했고 예수님께서도 여러 행적을 보이셨던 곳이기도, 예수님 비유의 말씀 속에서도 누차 언급되었던 도시이기도 합니다. 예리코는 해수면보다 250m나 낮은 도시이고 예 루살렘은 해발 700m가 넘는 고원도시이기 때문에 예리코로 내려가는 길은 급한 경사를 이루고 있었고 강도들이 들끓던 곳이기도 했답니다. 오랜 역사를 지닌 도시인 만큼 인종적, 종교적으로 혼재된 곳이어서 점잖지 못한 곳, 불쾌한 곳, 죄악이 만연한 곳으로 인식되었던 곳이기도 했답니 다. 하지만 예수님께로부터 이 예리코의 모습은 반전을 일으킵니다. 마태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예리코를 떠나실 때 맹인 두 사람이 예수님께 눈을 뜨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신체적인 맹인의 상태를 벗어나는 것이든 마음의 눈을 뜨게 해달라는 뜻이든 예수님께서는 예리코에서 눈을 띄우시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이스라엘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주 하고 형편없이 여겼던 그 어두운 예리코에 하느님의 사랑의 빛이 환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루카 복음에 나오는 자캐오의 일화는 더 극적입니다. 예수님께서 동족으로부터 저주받는 세리 자캐오 의 집에 머무시자 자캐오는 회개하여 구원을 얻게 됩니다. 사람들은 예리코가 죄악이 들끓고 개전의 정이 보이지 않는 불쾌한 곳으로 여겼지만 바로 그 예리코에서, 말하자면 예리코가 구원의 길을 걷는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예리코로 가는 그 좁고 험한 비탈길에서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나그네를 돌보아 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왜 하필 예리코가 그 무대일까요 착 한 놈이 있을 리가 없는 예리코에 사제보다도 레위인보다도 더 선한 이방인이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누가 들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인지 마음속으로 생각해 봅니다. 우리 춘천교구 사회사목국에는 장익 주교님께서 이름을 지어 주신 ‘예리코 클리닉’이라는 봉사 단체가 있습니다.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일대의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해 지난 17년간 의료봉사 를 해 온 단체입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몸과 마음은 고단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더욱 이 정상적이지 않은 절차로 어두운 곳에서 일하며 극심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아픔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병원에 갈라치면 그들에겐 너무 큰 돈이 들어갑니다. 가 산성당 내에 위치한 ‘예리코 클리닉’진료소에서 한 달에 두 번,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도움을 받습니다. 지금은 두 번이지만 앞으로는 매주 진료할 계획입니다. 다수의 의사와 약사, 간호사, 치위생사, 통역사, 의료행정가 등 많은 봉사자들이 마음을 다해 외국인 노동자들을 돌보고 있습 니다. 그들이 보다 빈번하고, 질 높은 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는 금전적 지원이 절실합니다. 캄캄 한 예리코에 하느님 사랑의 빛을 환히 비추어 주십시오.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주십시오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서준홍신부-


 성모당에서 순례자들이 초를 봉헌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대부분 정성껏 초 를 봉헌하는데, 어떤 이들의 초 봉헌 모습은 다소 황당했습니다. 자신의 초를 중앙에 봉헌하기 위해 다른 초들을 구석으로 밀어붙이는 모습, 자신의 초를 봉헌할 공간을 마련하려고 봉헌된 다른 촛불을 입김으로 불어 끄는 모습, 자신의 초가 좀 더 잘 타 게 만들려고 초를 조금 태운 후 촛농을 바닥에 붓는 모습, 촛불을 켜기 위해 사용한 라이터나 초 심지를 사용 후에 아무렇게나 놓아두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과연 하느님 과 성모님께서 그 모습을 보고 어떻게 생각하실까 궁금했습니다.

  신나무골 성지에서도 순례자들이 초를 봉헌합니다. 관리자가 없어 제가 아침마다 타다가 꺼진 초를 다시 불 붙여주고, 봉헌대를 정리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을 보았습니다. 가장 위쪽에 봉헌한 초가, 그다음 으로 가장 중앙에 봉헌한 초가 잘 꺼진다는 점입니다. 가장 잘 타는 곳은 아래쪽이고, 그다음으로 가장자 리였습니다. 순례자들은 기필코 높은 곳이나 중앙에 초를 봉헌하려고 하는데, 촛불이 꺼지지 않고 타 들어 가는 곳은 낮은 곳과 구석진 곳이었습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현상이었습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이 힘없는 이들과 가련한 이들을 돌보아 준다고 하셨습니다.(이사 11,4)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자신을 낮추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종이 된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뜻에 따 라 하느님을 찬양하고, 서로를 기꺼이 받아들이라고 하십니다.(로마 15, 5-8) 마태오 복음에서 세례자 요 한은 낮은 자의 모습으로 살면서 모범을 보였고, 당당하게 예수님을 선포했습니다. “주님의 길을 마련”하는 일은 이 시대에 정의와 평화가 꽃 피게 하는 일이며(화답송) 자신을 낮춤으로써 가능합니다.

  초를 봉헌할 때, 자신의 초만 잘 태우려 할 때 오히려 촛불은 꺼지고, 다른 이의 초도 잘 타게 도와줄 때 촛불은 잘 탔습니다. 대림 시기에 주님의 길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을 더욱 낮추어야 할 것 같습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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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때, 라디오를 참 많이 들었습니다. 최신 노래부터 옛날 노래까지 끊임없이 나오는 음악도 좋았지만, 중간중간 소개되는 청취자 사연에 귀 기울이며 들었습니다. 분명히 남 이야기인데도 큰 공감을 하게 되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또 어떤 때는 너무나 재미있어서 큰 소리로 웃을 수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문득, ‘내 이야기가 라디오 스피커로 흘러나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사연을 적었습니다.

“안녕하세요? DJ ***님. 저는 인천에 사는 중학교 2학년 조명연 이라고 합니다.”라고 시작하는 사연이었습니다. 결과는 몇 번을 다른 내용으로 보냈지만 단 한 번도 소개되지 못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글재주가 없던 저의 글을 소개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데, 당시에는 나의 문제점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방송국 사람들의 안목이 부족한 것 아냐?’, ‘혹시 이 안에 어떤 비리가 있는 것 아냐?’, ‘혹시 내 사연 엽서를 누가 훔쳐 가는 것 아냐?’ 등등 내 안의 문제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단 한 번도 소개되지 못한 채, 남에 대한 원망만 가득 간직하면서 글 쓰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이런 식의 마음은 어른이 된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아마 자신 안의 문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남의 문제만 들춰내게 될 것입니다. 내 책임이 아니라, 남 책임이라고 하면서 책임 전가만 할 것입니다. 그 결과 주님을 세상에 드러내는 사랑의 삶이 아닌, 미움과 다툼의 삶을 만들지 않을까요?

예언자와 세례자는 표현은 다르지만 둘 다 같은 말을 합니다. 예언자는 그분께서 오신다며 “주님의 길을 닦아라”, “길을 곧게 내어라”고 했습니다. 요한 역시 “주님의 길을 닦아라”와 같은 뜻인,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주님께서 오셨으니 길을 내고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요한이 주님의 길을 닦는 모습은 그의 옷과 음식에 볼 수 있습니다. 낙타 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지요. 그리고 그의 음식은 메뚜기와 들꿀이었습니다. 자연인의 모습입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태초의 인류가 살았던 모습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즉, 지금 오고 있는 나라와 회개의 상징입니다.

대림시기, 즉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길을 닦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남 탓보다는 스스로 회개하면서 지금 오고 있는 나라를 위한 준비에 매진해야 합니다.
마음을 닦는다고 하지만, 사실 마음은 닦을 것이 없습니다. 실체가 없는 것을 닦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다만 쉴 수 있을 뿐입니다. ‘쉬는 것이 깨달음’인 것입니다(원호).



어떤 감정도 다 사랑하세요.

몇 달 전에 나온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2018년도 우울증 진료환자 수는 78만 2037명이었습니다. 우리나라 국민 100명당 1.5명에 해당합니다. 연간 우울증 환자 수가 최근 6년 사이(2013~2018년) 1.27배가량 증가한 숫자라고 하는데, 이만큼 우울증 환자가 눈에 띄게 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울증의 대표적인 특징은 기분이 축 처지고 어떤 것에도 흥미가 없는 상태가 2주 이상 지속한다고 하지요. 불안·공허·절망·무기력에 시달리면서 좋아하던 일이나 취미생활에 의욕이 없어지게 됩니다. 이런 상태를 극복하기 힘들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우울증은 과거에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우울증이 있는 사람의 공통점이 뇌 전두엽의 이상이라는 것을 밝혀져서 실제로 1960년대까지 전두엽의 한 부분을 제거하는 수술이 이루어졌습니다.

수술받은 사람들의 상태는 아주 좋아졌습니다. 그러나 감정 없는 행동으로 사람들과 함께 살 수가 없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감정 없이 사는 것이 나을까요? 힘들더라도 감정을 간직하면서 사는 것이 나을까요? 자신에게 없어졌으면 하는 그 감정도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심리학자는 약물치료와 함께 자신의 감정을 받아들이는 심리치료도 함께 한다고 합니다.

어떤 감정도 부정하지 말고 사랑해보세요.                   

싸우기 시작하면 무기가 보인다

-전삼용신부-


 고등학교 때 일진인 아이가 교실에서 저의 친구를 때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도 모르게 그 친구에게 달려 나갔습니다. 일진은 제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놀라서 넘어졌습니다. 그것이 창피했던지 저의 얼굴을 주먹으로 쳤습니다. 희한하게 저는 하나도 아프지 않았고 싸움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멀거니 서 있는데 그 아이는 주먹으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교실 뒤로 가서 마대를 부러뜨려 크게 휘두르며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반 아이들이 말려서 제가 서 있는 곳까지 오지는 못하고 싸움은 그렇게 끝나고 말았습니다.

      싸움을 할 때 맨주먹으로 안 될 것 같으면 무기를 찾습니다. 컴퓨터 게임을 하다보면 어떤 것은 상황에 따라 무기를 주워가며 싸워나가는 것이 있습니다. 싸우려 하니까 무기가 보이는 것입니다. 아니 싸워야하는데 자신이 약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무기를 찾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주러 오신 것이 무엇일까요? 무기입니다. 죄와 싸울 무기입니다. 죄 때문에 천국에서 쫓겨났다면 그 죄와 싸워 이겨야 다시 그 나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죄는 우리 힘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죄를 이길 수 있는 무기를 청해야합니다.

      하느님께 무기를 청하는 시간을 ‘기도’라 하고 그 기도로 오는 무기를 ‘성령’이라 합니다. 그리고 이 싸움을 할 장소를 ‘광야’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와 싸울 마음이 없다면 하느님께서 무기를 가지고 인간을 만나러 오셔도 인간은 그분께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우선 하느님께서 오시기 전에 죄와 싸우게 만들 선지자를 먼저 보내셨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사람들을 광야로 나오라고 외쳤던 ‘요한 세례자’입니다. 세례자 요한을 만나면 누구든 싸움을 시작해야합니다.

      이렇게 요한 세례자는 우리가 죄와 싸울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러 왔습니다. 그 이전에는 죄를 자신의 탓으로 여기지 않고 환경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자포자기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구원자가 오셔도 아무 소용없습니다. 싸울 마음이 없는 사람이라면 무기를 주려는 사람에게 관심이 있을 리 없습니다.

      1300년대 중반 유럽에 흑사병이 창궐하여 유럽 인구의 절반이 사라졌습니다. 가톨릭교회는 이런 사태 때 무언가 대책을 내어놓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자기성찰은 둘째 치고 그 원인을 ‘고양이’에게 돌렸습니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고양이를 악마로 취급하여 고양이를 없애야 흑사병이 잦아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유럽에서 고양이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염병이 잦아들기는커녕 더욱 빠르게 확산되었습니다. 고양이를 다 잡아 죽이니 쥐의 개체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기 때문입니다. 쥐는 더 구석구석까지 병을 퍼뜨렸습니다.

      우리의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환경 탓이나 남 탓을 할 때는 메시아를 알아볼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 죄에서 결코 헤어 나올 수 없게 됩니다. 먼저 죄를 자신의 탓으로 여기고 그 죄와 싸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만이 성령의 무기를 주시는 분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자신들의 힘만으로 죄를 이길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제일 사악한 인간들이었습니다.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죄를 이길 수 있다면 굳이 성령의 무기가 필요 없습니다. 그렇게 예수님 구원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인간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자신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요한은 이렇게 야단을 칩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란 인간의 힘으로 죄를 이길 수 없음을 깨닫고 성령을 청하는 기도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죄를 이기기 위해 기도를 시작했다면 회개를 한 것입니다. 회개를 한 사람만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회개를 했다면 반드시 자기 죄와 싸우기 위해 성령을 청하고 있을 것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기 때문에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셨을 때 그냥 지나치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죄와의 싸움을 시작한 사람만이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회개해야 복음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14년 전의 일입니다. 저는 캐나다 토론토에서 방을 얻어 지냈습니다. 추운 겨울에 동창이 와서 하루 같이 지냈습니다. 주인에게 말하고 친구를 초대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문제는 다음 날 아침에 벌어졌습니다. 친구와 주인이 화장실에서 만났습니다. 주인은 놀라서 당신 누구냐?’라고 물었고, 친구도 놀라서 그런 당신은 누구냐?’라고 했습니다. 저는 일어나서 주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습니다. 하루 숙박비를 내겠다고 했지만 주인은 받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말을 제게 했습니다. “I respect you, you also respect me!” 저는 정중하게 사과했고 주인은 저의 사과를 웃으면서 받아 주었습니다. 나중에는 동창이 와도 주인과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

 

외국에는 없는 말인데 우리 말로는 모두가 이해하는 말이 있습니다. ‘갑질입니다. 돈은 많지만, 인품이 부족한 사람이 상대적으로 약한 사람에게 가하는 폭력을 뜻합니다. 권력은 있지만, 인품이 부족한 사람이 거부할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가하는 폭력을 뜻합니다. 상대적으로 우월한 힘을 이용해서 약한 이를 괴롭히는 행위가 갑질입니다. 서대문에서 뺨 맞고, 동대문에서 화풀이하는 것도 갑질입니다. 초대교회에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부제를 선발했습니다. 가난한 이, 고아, 과부, 장애인이 나눔에서 차별받았습니다. 사도들은 공정한 분배를 위해서 부제를 선발했고, 오직 기도하는 일에만 전념했다고 합니다.

 

성서에도 갑질은 있었습니다. 카인은 하느님께서 자신의 제사를 받아 주지 않았다고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동생은 형에게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따지려면 하느님께 따져야 했습니다. 야곱의 삼촌 라반은 야곱에게 14년 동안 노동을 시켰습니다. 라반은 야곱이 작은딸 라헬을 좋아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7년 동안 일한 야곱은 결혼식에 큰딸 레아를 아내로 얻어야 했습니다. 야곱은 억울했지만, 사랑하는 라헬을 얻기 위해서 삼촌의 집에서 7년 더 일해야 했습니다. 다윗은 충실한 부하의 아내를 탐했고, 부하는 전쟁터에서 죽도록 했습니다. 이세벨과 아합왕은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고, 나봇에게 누명을 씌어 죽였습니다. 자신들은 더 좋은 포도원이 있었지만, 욕심은 끝이 없었습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희망과 꿈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새싹이 나올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암울하고 어두운 시대에 이사야 예언자는 놀라운 꿈을 이야기 합니다. 이사이의 그루터기에 새싹이 돋을 것이고 그 싹이 자라나 커다란 나무가 될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영이라고 말을 합니다. 하느님의 영은 아브라함에게 강한 믿음을 주어서 새로운 민족이 될 수 있게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영은 모세에게 놀라운 지도력을 주어서 파라오의 압제를 벗어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영은 지혜와 슬기의 영이며 경륜과 용맹의 영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영이 함께 하면 늑대가 어린양과 함께 놀고, 어린아이가 사자와 함께 놀 수 있게 만든다고 말을 합니다. 이것은 놀라운 꿈이고, 이것은 어떠한 과학과 기술로도 이룩할 수 없는 새로운 질서입니다.

 

하느님의 영을 받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거짓된 영들을 버려야 합니다. 무엇을 버려야 할까요? 나는 할 수 없다는 열등감을 버려야 합니다. 열등감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갈 수 없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소중한 존재입니다. 우리의 상처를 곪게 만드는 미움과 분노를 버려야 합니다.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러한 행위를 회개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거짓된 영들을 버릴 수 있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영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변화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거짓된 영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오랫동안 하느님의 영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늑대와 같았던 바오로 사도, 사자와 같았던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영을 받아들여서 순한 어린양과 같이 되었습니다. 과학과 기술은 새로운 기능의 제품을 만들 수 있지만, 사람의 영혼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은 낡은 영혼을 새롭게 변화시켜 줍니다. 하느님의 영은 이웃의 아픔을 보듬고, 살아있는 모든 것을 소중하게 여길 수 있도록 이끌어 줍니다. 이것이 바로 이사야 예언자가 보았던 꿈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혜와 슬기, 경륜과 용맹의 영으로 꿈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영을 받을 수 있으며, 하느님의 영만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인내를 배우고 위로를 받아 희망을 간직하게 됩니다. 인내와 위로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님의 뜻에 따라 서로 뜻을 같이하게 하시어, 한마음 한목소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을 찬양하게 되기를 빕니다.”


없는 겸손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명확한 인식, 그것이 바로 세례자 요한의 위대함, 그 비결이었습니다!

 -양승국신부-

 

요즘 봉독되는 성경말씀에는 대림시기라는 무대를 빛낸 위대한 조연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엘리사벳과 즈카르야, 마리아와 요셉, 세례자 요한...사실 그들 역시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던 존재, 한없이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단순함과 겸손함을 바탕으로 하느님 말씀에 대한 철저한 순명으로 충실성으로 인해, 구세주 예수님의 육화강생에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그 결과 세세대대로 교회 안의 위대한 인물로 칭송받고 있습니다.

 

 특별히 세례자 요한은 이 대림시기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어떻게 죽어가야 하는지에 대해 명확한 이정표를 제시해주고 있습니다.그는 구약 시대를 마무리짓는 마지막 대 예언자인 동시에 신약 시대를 활짝 여는 가교로서의 역할에 충실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세례자 요한의 위대성에 대해서 극찬하신 바가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오 복음 11장 11절)

 

 세례자 요한의 위대성 그 배경에는 지극한 겸손의 덕이 자리잡다는 것을 눈여겨봐야겠습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잘 알고있었습니다. 자신의 정체성과 신원에 대해서 착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근원과 한계에 대해서 늘 자각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 진짜입니다. 그분은 너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입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습니다. 나는 나를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한갖 티끌이요 먼지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제게 큰 은총을 베푸셔서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어주셨습니다. 나는 이 땅 위에 잠시 등장했다가 즉시 사라지고마는 한 줄기 연기 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나는 길이 아니라 이정표입니다. 나는 주인공이 아니라 조연배우입니다.”

 

 한없는 겸손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명확한 인식, 그것이 바로 세례자 요한의 위대함, 그 비결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보잘것 없는 주님의 피조물이지만, 겸손의 덕을 통해 위대해집니다. 힘든 일이겠지만 자신을 낮추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높여주십니다. 어렵더라도 우리 내면을 말끔히 비우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가득가득 채워주십니다.

 

 구약시대를 마무리짓는 마지막 대 예언자요,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닦는 선구자로서 세례자 요한의 태도는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만일 제가 세례자 요한이었다면, “당신은 누구요?”라는 질문 앞에 조금은 망설였습니다. 스스로를 좀 더 있어보이게 하려고 포장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메시아까지는 아니지만,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잘 알고 있으며, 일정 부분 그분의 인류 구원 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분과 나는 아주 가까운 친척 관계이며, 그분의 가족들도 잘 알고 지낸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정체, 신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박수갈채와 하늘을 찌르는 인기 앞에 조금도 우쭐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유효 기간이 언제까지 인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떠날 순간이 왔음을 인지하자, 단 한 순간도 지체없이, 그 어떤 미련도 없이, 잘 마련된 무대를 주인공이신 예수님께 넘겨드린 다음, 신속히 구세사의 무대 뒤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겸손의 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뭐 그리 아쉬움이 많은지, 미적미적, “아직 떠날 마음의 준비가 안되었어요. 좀 더 있게 해주세요!”가 아니라, 바람처럼, 구름처럼, 홀연히 떠나가는 세례자 요한의 뒷모습이 참으로 멋있어 보입니다.


본능대로 살지 아니하고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 사랑합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태초부터 영원한 사랑입니다. 그분에 대한 우리의 마음이 흔들렸지 그분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 시간 영원한 하느님의 사랑에 머물 수 있는 은총이 충만하기를 기도하며 당신의 숨, 영을 불어 넣어주신 은혜에 감사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이제 우리는 본능으로 살지 아니하고 이성으로 삽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를 갖고 한 차원 더 나아가 영성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오늘 1독서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보면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쩌 가고, 어린 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이사11,6-7).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믿기지 않는 일입니다. 사자나 늑대는 사나운 이빨을 가지고 있고 난폭합니다. 양과 염소, 송아지는 그들의 먹이가 됩니다. 더군다나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가?

 

 이 말씀은 사자나 늑대가 사나운 이빨과 발톱을 가지고 있지만 제 본능대로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난폭한 습성을 버리고 오히려 양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에제36,26).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언제 이루어졌느냐 하면 이사야 예언자가 예언한 다음 수 백 년이 지나서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이루어졌습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는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어울리며 먹고 마신다고 불평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삶이 변했습니다. 몸을 파는 창녀가 제 습성대로 살지 않고 깨끗하고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예수님 앞에 끌고 왔을 때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을 던져라.”하셨습니다. 그러자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 둘 다 떠났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다시는 죄짓지 마라.” 그는 더러운 습성을 버리고 주님의 자비를 입었습니다.

 

사납게 굴던 마귀들린 사람이 예수님의 한마디로 온순하게 되었고, 남을 등쳐먹던 세리 자캐오가 자기습성이나 본능을 버리고 가난한 사람에게 자기 재산을 내놓았습니다. 손해를 끼친 사람에게 네 곱절로 갚았습니다. 서로 미워서 등진 사람들이 사랑하게 되고, 심지어 죽었던 나자로가 일어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가르치고 때로는 기적을 행하시며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내셨습니다. 주님이 계신 곳에는 은총이 충만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둠의 세력에 사로잡힌 일부를 제외하고는 본능이나 습성대로 살지 아니하고 자신의 삶을 바꾸었습니다. 어부가 그물을 버리고 가족을 놔두고 그야말로 삶의 터전을 떠나 기꺼이 주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리하여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본능적으로 살았을 때에는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을 박해하고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았습니다. 그가 “나는 죄인 중에 가장 큰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 달리고 있습니다.” 하며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 매달린 강도도 자기 마음대로 살았던 큰 죄인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여 바로 그 자리에서 낙원에 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구원을 얻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세례자 요한은 유다 광야에서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3,20).하고 선포하였습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바로 자기 본능대로 살지 않고 악습대로 살지 아니하며 잘못된 것을 버리고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새 삶을 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얘기를 하면 그래도 봐 줄 수 있는데 남 얘기를 얼마나 잘하는지 몰라요. 남이야 상처를 받건 말건, 상대방을 위하는 척 하면서 뒤로는 온갖 것을 다 떠벌립니다. 그것이 사실이건, 거짓이건 진실성은 사라지고 자기 본능대로 있는 말 없는 말 다 해요. 평상시에는 ‘저는 말 주변이 없어서…하고 꽁무니를 빼던 사람도 남 을 흉볼 때는 어찌나 그리 말을 잘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사람이 정말 주님을 영접하려면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사자와 늑대, 표범이 사나운 입을 다물고 새끼염소나 송아지와 함께 지내듯 사나운 입을 다물고 절제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면 여러분은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저 신부님께서 누구에게 무슨 얘기를 들으셨기에 저런 말씀을 하실까? 누굴 두고 하는 말씀일까? 하고 생각합니다. 누굴 두고 하는 얘기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지요. 자기영혼의 상태를 비추어 보고 고칠 것을 고치면 되는데 남에게 먼저 관심을 두고 있으니 그것이 문제입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먹고 싶은 대로 다 먹고, 쓰고 싶은 대로 다 써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폭음과 폭식을 하고는 탈이 나서 고생하는 사람도 있고요, 사촌이 땅을 사서 배아파하는 사람도 있고 시기와 질투로 마음고생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사촌이 땅을 사서 배가 아프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더 열심히 노력해서 그보다 더 넓은 땅을 사면됩니다. 그런데 노력은 하지 않고 절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을 가슴에 품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혹시라도 이런 마음이 있다면 오늘 그 본능적인 마음을 주님의 마음으로 변화시켜 주시기를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주님의 길을 마련하고 그분의 길을 곧게 한다는 것은 우리 삶의 자리에서 아주 사소한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들은 회개한 증거를 행실로써 보여라.(사도 26,20)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니 나의 좋지 않은 습관, 삶의 태도를 한 가지라도 바꿀 수 있는 한 주간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복음 3장 10절에는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 진다.”고 적혀 있습니다. 도끼가 뿌리에 닿아있다는 것은 결국 그만큼 절박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은총의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내일로 미룰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 마음을 바꿔야 합니다. 작심삼일이 되더라도 지금 좋은 일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선을 이끄시는 하느님께서 좋은 열매를 맺어 주실 것입니다.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속에 태워버리실 것이다”(마태3,12). 하셨으니 여러분은 부디 알곡이 되어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벌써 두 번째 대림초에 불이 당겨졌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만큼 밝아 졌기를 희망하고 준비된 마음 안에 아기 예수님을 낳아드리시기를 기도합니다. 콜로새서 말씀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생활을 함으로써 언제나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온갖 좋은 일을 행하여 열매를 맺으며 하느님을 더욱 잘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송영진신부-


“그 무렵에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 유다 광야에서 이렇게 선포하였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3,1)”

세례자 요한의 첫 선포는 ‘하늘나라’가 곧 온다는 선포입니다.
그런데 하늘나라(하느님 나라)는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따라서 세례자 요한의 선포는 메시아께서 곧 오신다는 선포입니다.
오시는 메시아를 잘 맞아들이기 위한 준비는 ‘회개’입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마태 3,3)”

‘주님의 길’은 주님께서 ‘나를’ 구원하려고 ‘나에게’ 오시는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길’을 곧게 내는 일은, 바로 ‘나를’ 위한 일입니다.
회개는 ‘나 자신이’ 살기 위해서, 즉 구원과 생명을 얻기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께서 오신다.”는 말 때문에,
또는 ‘대림’이라는 말 때문에,
가만히 앉아서 주님을 기다리기만 해도 되는 것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주님과 나의 ‘만남’은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나도’ 주님을 향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주님은 문을 두드리시는 분이고, 그 문을 여는 것은 내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길’은 ‘내가’ 주님을 만나러 주님께 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회개는 그 길을 곧게 내는 일, 즉 주님을 잘 만나기 위해서 준비하는 일입니다.

(해마다 대림절과 사순절 때에 시행되는 판공성사를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죄를 고백하는 일이 쉽고 편안한 일은 아니고,
부담스럽고 긴장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데,
그렇다고 해서 나중으로 미루거나,
고해성사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대충 때우려고 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성사’의 경우, 편법은 모두 불법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잘 맞아들이기 위해서 정성스럽게 준비한다는 마음으로,
마치 목욕재계를 하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성실하게 판공성사를 보아야 합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마태 3,7-8).”

이 말은 형식적으로 회개하는 척만 하는 자들을, 즉 진심으로 회개하지는 않고,
세례자 요한에게 가서 ‘회개의 세례’를 받기만 하면,
하느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꾸짖는 말입니다.
여기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라는 말은,
“행동으로 실천하는 회개를 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회개한다고 생각만 하는 것은, 또 회개한다고 말만 하는 것은
진정한 회개가 될 수 없습니다.
(정해져 있는 예식대로, 형식적으로 고해성사를 보는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삶’ 전체를 변화시키려고 노력해야 진정한 회개가 됩니다.
그래서 고해성사의 다섯 가지 요소가 중요합니다.
성찰, 통회, 정개, 고백, 보속, 이 다섯 가지 가운데에서
어떤 것 하나도 소홀히 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고 말할 생각일랑 하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마태 3,9).”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이유만으로,
즉 하느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이스라엘 민족에 속한다는 이유만으로,
자기들은 구원을 받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선민사상은 헛된 자만심일 뿐입니다.
여기서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 라는
말은,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는다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은 돌들만큼의 가치도 없다는 뜻입니다.
(세례대장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만으로는 구원을 보장받지 못합니다.
신앙인이라면 신앙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혹시라도 “신앙인이라서 더 많은 것이 요구된다면,
왜 굳이 세례를 받아야 하는가?”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신앙인은 안 믿는 사람들보다 더 크고 더 많은 은총을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뻗어 있는 지름길로 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받고 있는 은총들에 제대로 응답하려면, 제대로 회개를 해야 합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마태 3,10-12).”

이 말을 겉으로만 보면, 무서운 심판이 곧 다가온다고 위협하는 말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아니고, 진심으로 회개를 해서, 또 삶 전체가 변화되는 회개를 해서
메시아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으라는 권고입니다.
“멸망을 당하지 않으려면 회개하여라.” 라는 말과
“구원을 받으려면 회개하여라.” 라는 말이 어떻게 다른가?
그 말이 그 말 같지만, 완전히 다릅니다.
지옥에 가는 것이 무서워서, 죄를 안 짓기만 하면 된다는 소극적인 태도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의 생활에는 기쁨도 없고, 사랑도 없습니다.
억지로 하는 생활이어서 하느님 나라의 행복과는 거리가 먼 생활입니다.
죄를 안 지으면 지옥에 가는 것은 피할 수 있겠지만,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해서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지옥도 천국도 아닌 곳, 즉 연옥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의 생활에는
믿음과 희망과 기쁨과 사랑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미리 누리게 됩니다.
(주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생활을 하고 있으니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 될 것입니다.)  


회개

 -조욱현신부-


오늘 전례의 주제는 회개에 대한 것이다. 독서들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이 회개의 개념이 얼마나 깊고, 항상 본질적으로 그리스도께 집중되고 있다.

 

1독서: 이사 11,1-10: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1독서는 메시아의 도래와 메시아가 인간들 가운데 성취시킬 변화의 놀라운 위업을 예고하고 있다. 그분은 정의를 다시 세우실 것이고, 모든 피조물들 사이에 평화를 다시 이루어주실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주님의 영에 의하여 이루어질 것이다.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나오고 그 뿌리에서 새 싹이 돋아난다. 야훼의 영이 그 위에 내린다. 지혜와 슬기를 주는 영, 경륜과 용기를 주는 영, 야훼를 알게 하고 그를 두려워하게 하는 영이 내린다...그의 말은 몽치가 되어 잔인한 자를 치고 그의 입김은 무도한 자를 죽이리라...늑대가 새끼 양과 어울리고 표범이 숫염소와 함께 뒹굴며 새끼 사자와 송아지가 함께 풀을 뜯으리니 어린 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나의 거룩한 산 어디를 가나 서로 해치거나 죽이는 일이 다시는 없으리라. 바다에 물이 넘실거리듯 땅에는 야훼를 아는 지식이 차고 넘치리라.”(이사 11,1-9).

 

이같이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시적 표현을 통해 인간들 사이에 모든 피조물들 사이에 쇄신과 평화의 시대가 이루어질 것을 예고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결국 모든 인간들의 마음을 전환시켜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역사를 이끌어 가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복음: 마태 3,1-12: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

세례자 요한의 회개의 외침으로 장식되고 있다. 그 외침은 낙타 털옷과 같이 껄끄럽고 광야의 돌들과 같이 거친 모습이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은 나무는 다 찍혀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마태 3,2-10). 결단을 하여야 한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그래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이것은 요한이 자신보다 더 큰 권능을 가지신 어떤 분을 예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손에 키를 드시고 타작마당의 곡식을 깨끗이 가려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11-12). 이는 종말의 심판의 표현이다. 즉 요한은 구원의 소식의 전달자가 아니라, 새로운 때와 구원에 들어가기 위해 갖추어야 할 조건들을 알려줄 뿐이다. 구원하시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이시다. 요한은 그분을 위해 길을 준비하는 책임을 지고 있다.

 

교회는 초기부터 세례자 요한의 역할과 가르침을 깊이 숙고함으로써, 그의 크리스챤적 사명을 알아듣게 되었고, 그를 곧 임하실 메시아에 대한 가장 권위 있는 증인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런 면에서 세례자 요한은 우리를 오늘도 그리스도와 만나게 해주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세 가지 형태로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있다. 1) 그의 인품을 통해, 2) 그의 가르침을 통해, 3) 그의 메시지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세례의 정화예식을 통해서이다.

 

1) 오늘 복음에 나타난 요한은 권위 있는 사람이다. 세례자 요한은 초대교회에서 이사야 예언서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 종살이로부터 해방되리라는 기쁜 소식을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들에게 알려야 했던 신비스러운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었는데, 이 구원의 선포자를 세례자 요한으로 확인하였다. “한 소리 있어 외친다. ‘야훼께서 오신다. 사막에 길을 내어라. 우리의 하느님께서 오신다. 벌판에 큰길을 닦아라’”(이사 40,3). 또 세례자 요한은 금욕적 생활의 특성 때문에 엘리야와도 관련하여 생각하였다. “가죽으로는 아랫도리를 가리고 몸에는 털옷을 걸친 사람이었습니다.”(2열왕 1,8). 히브리 전승에는 메시아 예고자로 엘리야를 기다리고 있었다(말라 3,23). 초대교회는 이 모든 것이 세례자 요한을 통해 실현되었다고 믿었다. 예수께서도 요한에 대해 언급하신 후 너희가 그 예언을 받아들인다면 다시 오시기로 된 엘리야가 바로 그 요한임을 알 것이다”(마태 11,14).

 

즉 요한은 이러한 사명에 자신을 봉헌하기 위해 바친 정렬에 비추어 보아서도, 자신보다 훌륭한 분이어서 신발을 들고 다닐자격도 없는 자기이지만, 주님을 알리는 겸손하고도 기쁨에 찬 그의 자세를 보아서도 그의 인품이 우리를 저절로 주님께로 인도해 준다.

 

2) 그의 가르침 또한 우리를 그리스도와 만나도록 해준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2). 회개’(metánoia), 정신과 감정과 생활의 완전한 변화의 의무를 모면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간으로서는 그 누구도 이 회개라는 진정한 노고를 면하게 해줄 수는 없다. ‘올바른 자로 자처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특권을 가진 자도 마찬가지이다. “이 독사의 족속들아!...너희는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써 보여라...‘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다하는 말은 아예 할 생각을 말아라. 사실 하느님은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를 만드실 수 있다.”(7-9).

 

예수님의 메시지도 세례자 요한의 메시지와 똑같은 말로 시작되고 있다(마태 4,17). 요한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가르침은 연속성이 있고 복음의 본질 자체가 드러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오직 변화되고 쇄신된 생활의 증거만이 우리가 진정 모든 착각의 굴레를 벗어버리기 위하여 회개했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3) 세례자 요한은 세례라는 행위를 통해서도 우리를 그리스도와 만나도록 해준다. 그런데 요한은 그 세례가 단지 잠정적이며 암시적 예언적 기능을 가지고 있을 뿐이라고 한다. “나는...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11). 이렇게 요한의 세례는 인간들의 태도와 행동에 대하여 이미 하느님의 심판의 불을 당긴 종말론적차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가 선포한 회개를 세례라는 표지죄의 고백’(6)을 통해 실현시켰다. 이 모든 것을 그리스도가 베푸시는 세례에서 성령의 은총의 선물로 깊이 있게 성취될 것이다. “그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11).

 

그러나 성령의 풍부한 선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세례는 여전히 심판으로 남아있다(12절 참조). 그러므로 세례는 특히 이 대림시기에 계속적인 회개의 태도처럼 생활화해야 한다. 세례라는 것은 우리의 생활 전체를 통해서 입증되어야 할 변화의 표지이다.

 

2독서: 로마 15,4-9: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십시오.

바오로 사도는 성서를 증거로 내세워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을 화해시켰는지를 상기시키면서(로마 15,4-9), 이 어리석은 인간의 역사가 그 의미를 되찾고 사랑의 역사로 변화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오셔야 하며, 반드시 다시 오셔야 한다는 희망을 우리에게 불어넣어 주고 있다. 그래서 인간의 역사는 모든 사람들이 한 마음이 되어 다 같이 한 목소리로예수를 주님이요 우리를 구원하러 사람의 몸으로오신 참된 하느님의 아들로서 인식하게 될 때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1요한 4,2-3 참조).

 

세례자 요한의 외침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기는 것이 좋겠다. ‘회개에는 그 누구도 예외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나 자신 하느님 앞에 부족하고 또 나약한 인간임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매 순간의 진정한 회개를 통하여 우리의 마음을 비우고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주님께 언제든지 열어드릴 준비되어있는 삶이 되도록 하자. 이러한 삶의 은총을 주님께 구하자.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3, 1)

-한상우신부-

모두가 소중한
주인공들입니다.

방향을 잃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회개는 방향을
가르쳐줍니다.

가까이 온
하늘 나라를
가리킵니다.

가장 낮아진
광야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회개는 우리의
길이 되시는
예수님께 고개를
숙이는 것입니다.

존중에서
더 깊어지는
사랑입니다.

사람은
회개를 따라서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의
합당한 열매는
분명 회개입니다.

회개의 힘을
믿습니다.

회개로 주님께서
만드신 사람을
이해하고 존중하게
됩니다.

인권 주일을 통해
인간 존중의 이유를
예수님을 통해
만나시길 기도드립니다.

회개에는
회개하는 정직한
인격이 있습니다.

소중한 인격을
위한 대림시기
입니다.

회개의 길에서
주님을 드러내는
삶안에서 소중한 것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지켜주는
인격의 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요란한 것이 아닌
고요해지는
회개입니다.

회개와
하늘 나라는
하나입니다.


-오상선신부-


대림환에 두 개의 촛불을 밝힙니다. 오시는 주님께 한층 더 간절하고 한층 더 빛나는 그리움을 열어보이는 대림 제2주일입니다.

오늘 미사의 말씀은 '회개'를 이야기합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3,2).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광야에서 회개를 외칩니다. 회개를 위해 우리는 삶의 네 개의 축을 성찰합니다. 나와 하느님의 관계,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 나와 이웃과의 관계, 나와 자연 환경, 즉 모든 피조물과의 관계입니다.

첫째, 회개는 하느님께로 방향을 돌려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로마 15,7).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창조된 우리 모든 이의 존재 목적을 이야기합니다. 사실 우리가 하느님께 커다란 보탬이 되지는 않지만 그분은 당신의 충만함을 나누시고자 창조를 감행하셨지요. 우리는 그분께 찬미와 찬양, 흠숭, 사랑을 되돌려드리는 본연의 부르심을 인식하고 회복함으로써 그분께 영광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인내를 배우고 위로를 받아 희망을 간직하게 됩니다"(로마 15,4).

말씀은 우리 죄를 인내하시고, 우리 약함을 위로하시며,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버리지 않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인내, 위로, 희망"은 우리의 회개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입니다.

둘째, 회개는 나 자신의 고유한 아름다움과 화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고 말할 생각일랑 하지 마라"(마태 3,9).

우리는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그분의 모상입니다. 하느님의 진실함, 선함, 아름다움은 우리 존재 깊숙이 새겨져 있지요. 그런데 우리는 자신을 남과 비교하거나, 익숙해진 죄와 어둠에 머물면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는 일에 인색합니다. 자신을 자신으로 수용하기보다 인종, 국적, 족보, 연줄, 인맥, 소속, 직분 등 온갖 타이틀 뒤로 숨어 그것들의 힘과 자기 본연의 존재를 혼동하고 살기 일쑤지요. 그럴수록 진정한 자기와 멀어지고 유리되어 자기를 잃어가는데도 말입니다.

"그분께서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마태 3,11).

우리는 물과 성령과 불로 새로워진 존재입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말씀, 해마다 돌아오는 전례주년, 그리고 성사를 통해 나날이 새로워지는 은총을 입고 살아가지요. 이것이 바로 그 어떤 신분, 타이틀, 연줄보다 강력하고 진실한 우리 정체성입니다. 물질과 숫자라는 세상 잣대에 스스로를 매몰시키지 말고, 그런 자신의 아름다움을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이 오늘 우리가 초대받은 회개입니다.

셋째, 회개는 이웃과의 관계 회복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기꺼이 받아들이신 것처럼 여러분도 ... 서로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로마 15,7).

기꺼이 받아들임. 이는 우리에게만 요구되는 무리한 강요가 아닙니다. 우리가 먼저 예수님께 기꺼이 받아들여진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도 할 수 있다는 독려입니다. 사실 '다름'이라는 장벽을 넘어서는 일이 쉽지만은 않지요. 인간적 노력만으로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는 주님께서 우리의 편협한 자기중심성과 주관적 잣대의 힘을 조금 빼주시면 가능해집니다. 사람 사이의 회개는 그래서 주님 은총의 협력이 매우 절실합니다. 혼자서 하려고 하기보다 주님과 함께 할 때 열리는 문이지요.

"한마음 한목소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을 찬양하게 되기를 빕니다"(로마 15,6).

이웃과의 화해는 그저 인간적으로 편하고 좋자고, 똑같아지자고, 서로 이득이 되자고 방향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저마다 다름에도 불구하고 함께 하느님을 향해 "한마음 한목소리로" 찬양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기꺼이"라는 말씀 안에는 우리 인간과 천양지차로 다르시면서도 묵묵히 우리의 실존을 끌어안고 보듬어 주시는 하느님의 "선선한 내어줌"이 들어 있습니다.

넷째, 회개는 자연 환경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에 대한 존중의 회복입니다.

"땅이 주님의 앎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이사 11,9).

제1독서는 창조된 만물의 가장 조화롭고 아름다운 상태를 노래합니다. 동물들조차도 서로 해치지 않고 함께 평화로이 공존하는 모습은 곧 메시아 시대, 하늘 나라의 모습이겠지요. 이처럼 모든 존재가 주님을 알게 되면 더 이상 폭력도 눈물도 없을 겁니다. 앎이 곧 사랑이고, 사랑하는 이는 사랑이신 분의 뜻을 벗어나지 않는 까닭입니다.

인간의 탐욕이 낳은 기후 변화와 그에 기인한 자연재해, 무너져가는 생태계와 지구의 몸살은 어제 오늘만의 일이 아니지요. 소수 인간의 편리와 이익에 집중할수록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은 병들어 갑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우리 미래 세대가 고스란히 떠안아야 할, 파멸로 청산해야 할지도 모르는 무서운 빚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마태 3,8).

오시는 주님께 한 걸음 더 나아가는 대림 제2주일에 말씀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목소리를 빌어 보다 강하게 회개를 촉구하고 계십니다. 인간이 지닌 네 가지 관계성, 즉 하느님, 나, 이웃, 모든 피조물과의 관계를 잘 성찰하고 각자 돌이켜 나아갈 방향을 찾으라는 초대입니다.

그런데 방향을 바꾸어 돌아서는 진정한 회개에는 반드시 열매가 맺히게 마련입니다. 머리로 하는 관념놀음이나, 입으로 날리는 공수표는 회개일 수 없으니까요. 오늘은 '인권주일'이고 이번 주간이 사회교리 주간입니다. 말씀 안에 머물러 주님께서 보여 주시는 회개의 길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실천으로써 한 걸음 내딛는 대림 제2주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주님이 오시면 우리는 어떻게? 
-김찬선신부-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주님이 오시면 우리는 어떻게 되고, 어떻게 되어야 하나?>
이것이 오늘 대림 2주일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주제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십니다.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이 대림 시기에 맞춰 얘기하면
주님께서 오실 날이 가까이 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오시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것이고,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는 것입니까?

한 마디로 얘기하면 상선벌악賞善罰惡입니다.
주님께서 오시면 우리는 구원을 받던지 벌을 받던지 할 것이고,
착하게 산 사람은 상을 받고 죄지은 사람은 벌을 받게 될 것이며,
오늘 복음의 얘기대로라면 주님께서 도끼를 들고 오시기에v 그 도끼에 잘리는 나무가 되던지 살아남게 되던지 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이렇게 얘기하니까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되는지 묻고,
세례자 요한이 회개하라고 하자 어떻게 회개해야 하느냐 다시 묻는데
이에 세례자 요한은 자기는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주지만 오실
주님께서는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거라고 함으로써 불과 성령의
세례를 받으라고 하는데 그런데 불과 성령의 세례란 어떤 것입니까?

제 생각에 불의 세례란 불살라 버리는 것입니다.
불 사르는 것은 한 편으로는 태워 없애는 것이고
다른 한 편으로는 무엇인가를 이루어내는 겁니다.

젊음을 불사른다면 젊음을 불태워 뭔가를 이루는 거지요.
일제 강점기 청년들은 자기 한 몸을 바쳐 독립을 이루고,
군사독재 시대 청년들은 자기를 바쳐 민주화를 이루며,
신앙을 가진 청년들은 자기를 바쳐 하느님 나라를 이루는 것입니다.

물론 젊은이뿐이 아니고 늙은이도 성령을 받으면 영혼의 청춘을 되찾아
성령의 청춘을 불사르게 되는데 불사르는 목적은 마찬가지로 하느님 나라를
이루는 거지만 그러기 위해서 먼저 자기를 태워버려야 하는 것이고,
다시 말해서 자기를 태워 자기는 무화無化되는 것이고, 죽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서의 자기란 없어져야 할 자기이고, 죽어야 할 자기인데
그것은 이 자기가 죄의 자기이고, 이 세상의 자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죄의 자기란 다른 사람은 없고 자기만 있는 자기이며,
자기만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죽이는 자기이며,
하느님 나라에서 살려고 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 살려고 하는 자기이며,
하느님 나라에 대한 관심은 없고 오직 이 세상에서 성공하려는 자기이기에
진정 내가 살기 위해서는 이 자기가 죽어야 하고,
하느님 나라에서 살기 위해서 이 자기는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쉽겠습니까?
아니, 이 세상에 살면서 이것이 가능하겠습니까?
더군다나 죽음이 가까운 사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할 날이 구만리인 청춘들이라면 이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사실 늙은 사람도 쉽지 않고 죽음이 임박해서야 인간은 이 자기를 놓습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이것이 쉽지 않음을 얘기하기 위해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회개하지 않는 사람의 죽음에 대해 아주 실감나게 묘사합니다.

"죽음은 다가오고, 친척들과 친구들이 모여 와 우는 시늉을 하며 사제를 모셔옵니다.
사제가 그에게 말합니다. '그대는 그대의 모든 죄에 대하여 보속받기를 원합니까?'
그가 대답합니다. '원합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지금까지 그대가 지은 죄와 사람들에게
사취한 것과 그들을 속인 것을 할 수 있는 대로 그대의 재산으로 보상하겠습니까?'
'못 하겠습니다.' '왜 못합니까?' '모든 재산을 친척과 친구들 손에 이미 넘겨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는 이 불쌍한 사람은 쓰디쓴 죽음을 맞이하고 이 세상을 떠납니다.“

그러므로 이 자기가 죽는 회개는 성령의 세례를 받지 않고는 안 되고,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 독서 이사야서가 얘기하는 메시아처럼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하고 그 성령이 우리 안에 머물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 성령의 회개를 할 때 하느님 나라에서 살 수 있게 될 뿐 아니라
우리는 자기를 바쳐 이사야서가 말하는 하느님 나라, 곧
정당하게 심판이 이루어지는 정의의 하느님 나라
, 늑대와 새끼 양이 함께 사는 평화의 하느님 나라를 이룰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성령과 함께 오시어 불과 성령의 세례를 흠뻑 받을 수 있기를,
그래서 나도 살고 하느님 나라도 이루는 그런 날이 빨리 오기를
바라고 희망하며 기다리는 이번 대림절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6년 12월 4일 대림 제2주일(인권 주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태3,1-12)


우리는 대체로 자신의 삶이 다른 사람보다 더 옳고 바르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신앙생활에 매진하여 깊이 의식화되고 습관이 된 신자일수록 회개하기가 무척 힘들다. 그리고 세상의 죄악들은 다른 사람들의 잘못들이 문제이지 자신은 전혀 문제가 없다고 본다. 그래서 세상에서 제일 쉬운 것이 ‘지적질’이고 제일 어려운 것이 ‘회개’라고 할 수 있다. 끝없는 변명으로 죄를 합리화하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이 회개에 따르는 그 은총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첫 설교 말씀이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인 것을 보면 ‘회개는 하느님 나라의 출입문’이라고 볼 수 있다. 

-임상만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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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께서 세상에 주러 오신 것이 무엇일까요? 무기입니다. 죄와 싸울 무기입니다. 죄 때문에 천국에서 쫓겨났다면 그 죄와 싸워 이겨야 다시 그 나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죄는 우리 힘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죄를 이길 수 있는 무기를 청해야합니다.

      하느님께 무기를 청하는 시간을 ‘기도’라 하고 그 기도로 오는 무기를 ‘성령’이라 합니다. 그리고 이 싸움을 할 장소를 ‘광야’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와 싸울 마음이 없다면 하느님께서 무기를 가지고 인간을 만나러 오셔도 인간은 그분께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우선 하느님께서 오시기 전에 죄와 싸우게 만들 선지자를 먼저 보내셨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사람들을 광야로 나오라고 외쳤던 ‘요한 세례자’입니다. 세례자 요한을 만나면 누구든 싸움을 시작해야합니다.

1300년대 중반 유럽에 흑사병이 창궐하여 유럽 인구의 절반이 사라졌습니다. 가톨릭교회는 이런 사태 때 무언가 대책을 내어놓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자기성찰은 둘째 치고 그 원인을 ‘고양이’에게 돌렸습니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고양이를 악마로 취급하여 고양이를 없애야 흑사병이 잦아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유럽에서 고양이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염병이 잦아들기는커녕 더욱 빠르게 확산되었습니다. 고양이를 다 잡아 죽이니 쥐의 개체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기 때문입니다. 쥐는 더 구석구석까지 병을 퍼뜨렸습니다.

      우리의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환경 탓이나 남 탓을 할 때는 메시아를 알아볼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 죄에서 결코 헤어 나올 수 없게 됩니다. 먼저 죄를 자신의 탓으로 여기고 그 죄와 싸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만이 성령의 무기를 주시는 분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란 인간의 힘으로 죄를 이길 수 없음을 깨닫고 성령을 청하는 기도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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