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10월 23일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Margaret K 2019. 10. 22. 18:20

2019년 10월 23일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사람의 아들도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니

항상 준비하고 있어라

(루카 12, 39-48)


You also must be prepared,
for at an hour you do not expect,

the Son of Man will com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죄의 욕망에 순종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며, 여러분은 죄에서 해방되어 의로움의 종이 되었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니 준비하고 있으라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어제에 이어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종말에 대한 준비를 당부하십니다. 종말에 대한 가르침의 핵심은 언제나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라는 말씀으로 요약됩니다. 그리고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의 비유를 통하여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알려 주십니다.흥미로운 것은 예수님께서 이 비유에서 모든 사람을 집사에 비유하신다는 점입니다. 모든 사람이 집사의 역할을 한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자기 집 종들에게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줌으로써 주인에게 상을 받습니다. 자신이 맡아서 해야 할 일을 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곧 주인을 맞을 준비에 해당됩니다.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의 끝에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여기에서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내가 받은 모든 것은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고, 그것은 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을 관리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너무 쉽게 잊고 살아갑니다.둘째로는, 하느님의 것을 관리하는 데는 슬기와 충실함이 요구됩니다. 내가 맡은 바를 잘 이해하고, 충실하고 현명하게 관리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셋째로는, 내가 받은 것이 많으면 그만큼 하느님께 많이 돌려드려야 합니다. 모든 것을 내 힘으로 얻은 양 움켜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충실하게 살아가며, 주님과의 만남을 준비하는 하루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옛날 어느 나라의 왕이 전국에 다음과 같은 방을 붙였습니다.

‘신분에 상관없이 능력만으로 벼슬을 내리겠다. 시험시간은 *월 *일 새벽 5시이다.’

너무 이른 시간에 치르는 시험이라서 5시보다 늦게 궁궐 앞으로 온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관리들은 그들을 모두 돌려보냈습니다. 그런데 1시간이 지나고 2시간이 지나도 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몇몇 사람은 성문을 두드리고 관리에게 항의도 했지만, 반응이 없자 그냥 화를 내며 돌아갔습니다.

다행히도 정오가 되자 궁궐 문이 열리고 시험이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당황스러운 일이 생겼습니다. 글쎄 ‘1 더하기 1은 얼마입니까?’, ‘바닷물의 맛은 짤까요? 달까요?’ 식으로 너무나 유치한 문제가 담긴 시험지였기 때문입니다. 뛰어난 학식을 갖춘 사람들은 말도 안 되는 문제라고 하면서 시험장을 떠났습니다. 이제 자리에 남은 사람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때 임금이 나와서 말합니다.

“너희는 모두 합격이다. 이른 시간에 정확히 오는 성실함을 갖췄고, 오랜 시간을 기다리는 인내심이 있었으며, 황당한 문제에도 최선을 다해 답을 적었다. 이렇게 시간을 잘 지키고, 인내심이 있으며, 원만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 인재다.”

만약 사람들이 왕의 의도를 알고 있었다면 어떠했을까요? 어떻게든 시간을 지키려고 노력했을 테고, 기다리는 것에 대해 화가 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또 당황스러운 문제에도 의연한 모습을 보였겠지요. 그러나 자기 생각만을 내세웠기 때문에 벼슬을 얻을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주님의 의도에 대해 생각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루카 12,43)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종에게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맡길 것이라고 하시지요. 그런데 주인의 의도는 전혀 생각하지 않은 종들이 있었습니다. 주인이 늦게 온다고 생각하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지요. 그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이 맞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의도는 우리 모두 사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언제 올지 모른다면서,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면서 자기 편한 대로 사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의 의도인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오실 때에 가장 큰 후회를 할 수밖에 없음을 기억하면서, 열심히 사랑할 수 있는 오늘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인생의 의미는 당신의 재능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은 재능을 나누는 것입니다(세익스피어).



최선의 진정한 의미

어느 여름날, 아버지와 아들이 들판에 서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아들아, 너는 ‘최선’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잔꾀를 부리지 않고,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 그럼 오늘 너의 최선의 모습을 한번 보고 싶구나. 저기 보이는 저 논 한가운데 있는 돌무더기가 보일 게다. 그 돌들을 모두 논 밖으로 꺼내도록 하여라. 단, 시간은 해가 지기 전까지이니 ‘최선’을 다해보아라.”

“네 아버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둘의 대화가 끝이 나고 아들은 약속한 대로 돌들을 옮기기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 하지만 그 돌의 양이 많아 옮겨도 옮겨도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아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고 또한 최선을 다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들은 젖 먹던 힘을 내어서 돌을 옮겨 보았지만 논 밖으로 돌을 모두 옮기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렇게 해는 저물었습니다. 온종일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본 아버지가 묻습니다.

“아들아, 최선을 다했느냐?”

“네, 아버지, 최선을 다했습니다.”

“아니다. 너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네가 수고하고 진짜 열심히 했다는 것은 나도 안다. 하지만 너는 오늘 ‘최선’을 다하지는 않았다. 옆에서 온종일 지켜보고 있던 나한테는 왜 도와 달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느냐? 네가 더이상 할 수 없을 만큼 했다고 싶을 때, 충분하다고 생각할 때 주위를 한 번 더 돌아보면 찾을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다는 사실을 꼭 명심하도록 하여라.”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최선이었을까요? 그 자리에 주님을 초대하지 않는다면 절대로 최선이 될 수 없습니다. 그냥 열심히만 한 것이겠지요. 주님과 함께하면서 최선의 삶을 살아보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종의 역할은 양식을 분재하는 것이다

-전삼용신부-


영화 ‘기생충’은 한 가난한 가족이 부잣집에 위장취업 해서 벌어지는 내용을 그렸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이 모두 한 가정에 취직을 한 것입니다. 어느 날 주인집 가족이 며칠 동안 나들이를 가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가난한 가족이 그 집을 전부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정말 부자가 된 것처럼 먹고 마시고 흥청거렸습니다. 그런데 날씨가 나빠 놀러갔던 주인 가족이 갑자가 들이닥친 것입니다. 간신히 위기를 모면하기는 했지만 가난한 집 가족들은 자신들이 한 짓들을 감추느라 식은땀을 흘립니다. 마치 주인처럼 행세하다 들키면 큰일 나는 벌레들처럼 되어버린 것입니다. 보는 사람들의 심장이 쫄깃쫄깃 해 질 정도로 불안하고 비참한 모습으로 탈출극을 벌여야했습니다. 이것이 주인의 집에 합당하지 못한 종들의 최후입니다.

      남의 집에서 살려면 그 집 주인이 원하는 것을 하고 있어야합니다. 적어도 주인 행세를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도 하느님 집에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집을 얻으려면 그만한 고생을 해야 하듯이 내가 만들지 않은 하느님의 집에 살려면 하느님 뜻에 맞는 삶을 살 줄 알아야합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그럴 능력이 있는지 시험하는 장입니다. 마치 기생충에 나오는 가족처럼 주인이 안 보이기만 하면 그 집을 자기 집처럼 여기며 흥청거리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만일 그 종이 마음속으로 ‘주인이 늦게 오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하인들과 하녀들을 때리고 또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하기 시작하면,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하여 불충실한 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

      영화 ‘기생충’에서 부잣집에서 일하는 가난한 가족들은 각자의 임무가 있었습니다. 그것만 하고 있다면 주인이 싫어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우리에게 그 임무가 무엇인지 명확히 말씀해주십니다.

      제가 병자성사를 어느 부잣집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100평이 넘는 으리으리한 집이었습니다. 낮에 갔기 때문에 주인들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북적였습니다. 알고 보니 다 그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방과 청소, 그리고 환자분을 돌보는 분도 계셨습니다. 한 환자분이 식물인간처럼 침대에 누워 꼼짝하지 못하고 계셨는데 그 집의 가족이었습니다. 그분은 비록 말을 할 수는 없지만 눈은 뜨고 있었고 의식은 있어보였습니다. 만약 주인이 없다고 그 일하시는 분들이 그 환자분께 소홀히 하고 그것이 발각이 된다면 그분들은 당장 쫓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도 이와 같습니다. 주인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CCTV를 통해 다 보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환자들은 세상에서 가장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그들을 돌보는 일을 맡기셨습니다. 카인은 “제가 동생을 돌보는 사람입니까?”라고 하며 그 일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가장 작은이들을 주인님의 가족으로 여겨야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가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어떻게 돌보냐면 주인의 재산으로 돌봅니다. 먹을 것을 주어도 주인의 것을 주는 것이고 옷을 입히고 약을 주어도 다 주인의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주시는 양식을 이웃에게 전해줄 수 있어야합니다. 나의 것을 나의 것으로 여기지 않고 주님께서 주신 것으로 여겨 가난한 이들과 나누게 될 때 그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충실한 종입니다.

      양식을 나눕시다. 어떻게 하면 이웃을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만을 생각합시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삶을 통해 이웃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을 당신 나라의 모든 재산을 맡기실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나 자기 가족만을 위해 산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에서 기생충과 같은 처지가 됩니다. 나는 매일매일 누구에게 하느님의 양식을 전해주고 있는지 생각해보아야겠습니다.




인생의 비정함 뒤에 숨어있는 따스함을 찾아나갑시다!
-양승국신부-

파리증후군이란 말이 있습니다. 파리에서 오랫동안 생활해온 한 일본인 심리학자가 파리를 방문하는 일본인 관광객들이 일시적으로보이는 증세를 관찰한후, 사용하기 시작했답니다.

파리에 도착하기 전, 많은 일본 관광객들이 꿈꾼답니다. 매혹적이고우아한 도시, 그림같은 도시 풍경, 품격있는 명품 도시!

그러나 막상 도착해보면, 너무나 다른 상황 앞에 큰 충격을 받는답니다. 모든 구역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쓰레기들, 지뢰같은 개똥들, 묘한 악취 등등에 실망한 일부 관광객들이 멀쩡했었는데, 갑작스레 현기증이나 구토증세를 앓는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우리네 인생 여정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본격적인 인생의 현장 속으로 뛰어들기 전, 인생의 제 1막 준비 시기에는 삶이 우아해보이고, 뭐든 할수 있을 것 같습니다. 희망과 설렘 으로 인생이 가득 차있습니다.

그러나 점점 나이를 먹어갈수록, 세상의 쓰디쓴 맛을 알아갈수록, 이윽고 사회 초년병 딱지를 '딱' 떼어놓는 순간, 우리는 세상과 인생에 대한 실망을 넘어, 충격을 받게 됩니다.

살아남기 위해 갖은 몸부림과 발버둥을 쳐야만 하는 세상의 비정함과 냉혹함 앞에 짐승처럼 울부짖기도 합니다.

어떻게 삶은 이다지도 우리를 철저하게 속이고, 이렇게까지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갈수 있냐며 분노합니다.

우리 모두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 처럼, 인생이란 것, 절대로 녹록치않고, 만만치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늘 잔뜩 위축되고 움추러들어있어서도 않되겠습니다.

인생의 비정함 뒤에 숨어 있는 따스함을 찾아야겠습니다. 슬픔 뒤에 살짝 숨어있는 작은 기쁨을 찾아야겠습니다.

험난하고 가파른 오르막길 뒤에 펼쳐질, 잠깐 동안의 기막힌 능선길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대해야겠습니다.

인생에 대해 너무 기대도 하지 말되, 동시에 너무 실망하지도 말아야겠습니다.

너무 목숨걸지도 말아야겠지만 동시에 너무 적당적당히 소홀하게 살아서도 안되겠습니다.

어차피 제한된 시공간 안에 어쩔수 없이 근본적인 나약함과 부족함을 숙명적으로 안고 살아가는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작은 꽃의 성녀 소화 데레사의 도시 리지외를 순례하던 제게 주님께서는 이런 깨우침 하나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참행복은 뭔가 대단한 것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랍니다. 매일의 일상 안 작은 것으로 부터 다가온답니다. 작은 깨우침, 작은 성장과 성취, 작은 위로와 성공, 그 안에 참 행복의 원천이 숨어 있습니다.

가슴이 확 트이는 8차선, 10차선 넓은 탄탄대로를 걷는 기쁨도 크겠지만 좁고 호젓한 오솔길을 걷는 기쁨은 더욱 크답니다.

남아있는 우리 인생 여정은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엮어가는 소소한 일상 안에서의 작은 기쁨 작은, 행복을 찾고 추구하는데 더 투자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충실하면 할수록, 그에 비례해서 가장 가까운 이웃들, 가족들에 대한 충실성 역시 커져가야 마땅합니다.

가장 소중한 존재들을 무시하고 냉대하면서 멀리있는 사람들에게 충실하다는 것, 그것처럼 웃기고 어색한 일은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욕망에 순종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김기현신부-


죄가 여러분의 죽을 몸을 지배하여... 라는 말씀을 들으면서 ‘중독’이라는 단어가 생각났습니다. 중독에 걸린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로 만족을 얻으려 합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만족이나 기쁨을 얻기 보다는 오히려 망가지는 자신의 삶을 보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술을 많이 먹어 몸이 망가지거나, 도박으로 가산을 탕진하여 길에 나 앉거나 하는 모습을 보면 그런 것 같습니다. 그밖에도 크고 작은 중독들이 많이 있을 텐데요. 그러한 중독들이 처음에는 달콤할지 몰라도 결국 그 끝은 독서 말씀에 나오는 것처럼 죄의 종이고 죽음일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쉽게 그 가짜 평안이나 기쁨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저도 몇 가지 안 좋은 습관들이 있었습니다. 저번 피정 때도 그 중에 한 가지를 내려놓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기도 중에 반복적으로 결심을 했는데도, 마음 한 구석에 기회가 되면 다시 그 습관으로 돌아갈 것 같은 불안함이 계속 있었습니다. 예전에 ‘내려놓아야겠다.’ 하는 몇 가지 악습들이 있었는데요. 대부분 내려놓을 때 결심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로부터 돌아서서 돌아보지 않았던 경험들이 있었는데요. 그 때처럼 그런 확신이나 자신이 안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영성지도 신부님께 ‘반복해서 끊어버리겠다고 다짐해도, 확신하지 못하는 마음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예전처럼 확고한 의지가 생기질 않는 것 같습니다.’ 라고 했더니, 영성지도 신부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 의지로 끊어버리려고 하지 말고, 하느님께 의탁하고 하느님께 은총을 청해보세요.” 일반적이고 상투적인 이야기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그 때 제가 얼마나 하느님을 의지하지 않는지, 내 힘으로 할 수 있다고 얼마나 자만하고 있는지 새삼 바라본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결심과 다짐에 대해서 확신하지 못할 때마다 하느님께 은총을 청하고, 악습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기도했던 적이 있는데요.

 

아무래도 욕망의 길은 인간에게 자연스럽고 편안한 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길이 들어 있어서 나도 모르게 쉽게 빠져듭니다. 그 익숙함과 편안함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나의 힘이나 결심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습니다. 잘 알고 있지만 잘 하지 못하는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넘어지더라도 다시 그 모습마저도 봉헌하고, 하느님께 다시 의지하여 그분이 원하시는 길을 걷고자 하는 모습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 걸음을 걷다 보면, 언젠가 그 안에서 어느새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여러분이 전해 받은 표준 가르침에 마음으로부터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죄에서 해방되어 의로움의 종이 되었습니다.

 

오늘 하루, 나에게 있는 악습은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주님의 도우심과 이끄심에 따라 의로움과 순종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 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예전에 여행 갔을 때 동기 신부와 한 방에서 잤다.

그 친구 코 고는 소리가 대단하지만,

새로 산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이 있으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 친구의 코고는 소리는 노이즈 캔슬링도 뚫었다.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반영억신부-

 

어렵게 집안을 꾸려가던 가난한 가장이 아이들 걱정을 했습니다.

‘신발이 다 떨어졌다고 새 운동화를 사달라고 난리인데 새 운동화를 장만할 돈이 부족하니…. 그래도 사주기는 사줘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이 말을 듣던 한 여인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당신은 아이들 신발 때문에 걱정하셨지요? 저에게는 어린 딸이 하나 있는데 그 아이는 태어난 후 아직 한 번도 걸음을 옮긴 적이 없지요. 몸이 아파서… 만약우리 아이가 신발을 신고 걸어 다녀 한 켤레만이라도 닳아 못 신게 된다면, 우리에게는 그보다 더 큰 행복은 없을 것입니다.’ 가난한 가장은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습니다. 아이들의 떨어진 운동화를 보았습니다. 고민 덩어리였던 그 신발들이 그렇게 사랑스러워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가12,48)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동고동락했으니 그에 걸 맞는 책임이 요구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독차지 했으니만큼 더 많은 것이 요구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잘못을 범하게 되면 그 벌은 더욱 엄할 것입니다. 그야말로 “매를 맞아도 많이 맞을 것입니다”(루가12,47).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분의 자비를 더 많이 입었으니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삶이 따라야만 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성직자는 성사집행과 복음선포의 사명에 충실해야 하고 수도자는 봉헌의 삶을 더 열정적으로 살며 평신도는 그에 맡겨진 직분과 소명을 다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때 그런 직분이 없는 사람보다 더 많은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매 맞을 것을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늘 깨어 준비 하면 오히려 그 책임을 통해 모든 재산을 관리할 기회를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루가12,44).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러저러한 근심과 걱정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이 행복한 고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충실하면 우리의 미래는 보장된 것이고 기대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을 제대로 사는 만큼 주님을 만나는 기쁨이 클 것입니다.

 

 사실, 세상 모든 것이 주님 것이니 받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주께서 마련해 놓으신 것을 이 세상사는 동안 잠시 관리하다가 주님께로 돌아가는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뜻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모든 것을 되돌려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일은 먼 훗날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이미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아들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루가12,40). 많이 받았으니 많은 것을 돌려드려야 하겠습니다. 혹 많이 받고도 받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매 맞을 일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송영진신부-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종이 마음속으로 ‘주인이 늦게 오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하인들과 하녀들을 때리고 또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하기 시작하면,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하여
불충실한 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루카 12,42-46).”

이 말씀은, 불충실한 신앙인들에게 벌을 주겠다고 위협하는 말씀이 아니고,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서 구원을 받도록 노력하라는 권고입니다.
최후의 심판 때에 벌이 어떻게 이루어질지는 알 수 없지만,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 자체가 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 자체가 멸망입니다.
그 나라의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은 모두 ‘밖’에 있어야 하고,
바로 그 ‘밖’이 멸망입니다.
생명을 얻지 못하면 죽는 것입니다.
‘빛 속’에 있는 것이 아니면 ‘어둠 속’에 있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안’이 아니면 ‘밖’입니다.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닌 중간 지역은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면 영원한 멸망입니다.
생명도 아니고 멸망도 아닌, 빛도 아니고 어둠도 아닌 중간 상태는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쪽으로 갈 것인가는 ‘내가’ 선택합니다.
마음을 졸이면서 심판결과를 기다리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자기가 어떻게 살았는지는 자기 자신이 잘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떤 쪽을 선택했는지는 바로 ‘지금의 삶’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심판하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요한 3,17).
재림 때에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복음서에 있는 재림에 관한 말씀들을 보면,
대체로 심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긴 하지만, 그것은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사람들,
또는 구원받는 것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고,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에게는
재림의 날은 심판받는 날이 아니라 구원받는 날이 됩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8).”
예수님의 재림의 날은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는 날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집사’는 교회의 지도자들(성직자들)로 해석됩니다.
그러나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모든 신앙인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 자기 인생의 집사입니다.
(주님이 우리 인생의 주인이시고, 우리는 위임을 받은 집사일 뿐입니다.
그러니 ‘내 인생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인생을 자기 마음대로 살 권한은 아무에게도 없습니다.)
공심판이든지 사심판이든지 간에
심판은 인생의 최종 결산서를 제출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앞에서 이미 말한 것처럼 심판결과는 각자 자기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결산서는 각자 자기 자신이 작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종말과 재림의 날을 알려 주지 않으신 것은,
‘지금’ 회개하라는 뜻이고, 스스로, 진심으로 회개하라는 뜻입니다.
(그날이 언제인지 알면,
사람들은 마음대로 막 살다가 그날에 맞추어서 회개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 회개를 진정성 있는 회개로 볼 수는 없습니다.)

구원과 심판이 어떤 것인지를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통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작은아들이 회개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아버지와 함께 잔치에 참석한 모습은(루카 15,24),
구원을 받고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신앙인들의 신앙생활 목표가 바로 그것입니다.
(아버지는 작은아들을 심판하지 않았고, 아들에게 아무런 벌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작은아들이 겪은 고난과 굶주림은
아버지가 내린 벌이 아니라 작은아들 자신이 자초한 일이고,
그 일은 벌이라기보다는 그를 회개시킨 회초리였습니다.)

아마도 아버지는 작은아들이 그렇게 될 것을 알고서
집을 떠나는 아들을 말렸을 텐데,
작은아들은 그 말을 안 듣고 떠났다가 나중에 후회했습니다.
종말과 재림에 관한 예수님 말씀도 바로 그렇게 우리를 타이르시는 말씀입니다.
나중에 벌을 주겠다는 위협이 아니라......
만일에 작은아들이 굶주림을 겪지 않고,
그런대로 먹고살만한 상태였다면, 회개했을까?
비유에서는 배가 고파서 정신을 차린 것으로 되어 있지만,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 꼭 굶주림을 겪을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고난을 겪기 전에 스스로 정신을 차리는 것, 그것이 지혜입니다.
비유에 나오는 작은아들은 고난 덕분에 제정신이 들었는데,
고난을 겪어도 정신을 차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고,
오히려 아버지를 더 원망하고 아버지에게서 더 멀어져 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작은아들이 먼 고장에서 자기 마음대로 사는 모습은(루카 15,13),
종교와 신앙 없이, 또 심판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이
마음 편하게, 살고 싶은 대로 사는 세속 사람들의 모습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그렇게 사는 사람들의 인생은 허무하게 끝납니다.

구원과 심판을 천국, 연옥, 지옥으로 바꿔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회개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아버지와 함께 잔치 음식을 먹는 상황은 천국이고,
제정신이 들어서 잘못을 뉘우치고 집을 향해서 걸어가는 상황은 연옥입니다.
(연옥은 벌을 받는 곳이 아니라 보속하면서 천국을 향해서 나아가는 곳이고,
아직 희망이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천국도 연옥도 아닌 상태는 모두 지옥입니다.
자기 스스로 아버지의 집을 외면하고 거부하든지,
배반자 유다처럼 용서받기를 포기하든지,
어떻든 아버지의 집에서 떨어져 있는 상태는 모두 지옥입니다.
먹고살기가 편하고, 인생이 즐겁고 재미있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지옥입니다.
< 그런데 묵시록에 의하면, 사실 지옥은 임시 감옥일 뿐이고,
최후의 심판이 끝나고 나면 지옥도 소멸되고
지옥에 있는 사람들도 함께 소멸됩니다(묵시 20,14).> 


섬김과 친절

-이종훈신부-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셨는데 이 땅에서는 사람들의 종처럼 사셨다. 그분을 따르는 이들에게도 그렇게 살라고 요구하셨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르 10,43).”

 

하느님께 삶을 봉헌한 이들에게는 이 말씀이 일상을 규정하는 지표가 되겠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부담스러울 것 같다. 그나마 사는 데 여유가 있는 이들은 이 말씀대로 실천하며 하느님과 가까워져서 좋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 누가 그런 그들을 이기적이라고 비난할 수 있겠나? 그런데 예수님의 그 말씀을 듣던 이들도 거의 다 그런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섬기라고 말씀하셨고 오늘도 여전히 같은 말씀을 하신다.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있어서 자원봉사를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빡빡한 중에 짬을 내어 그렇게 사는 이들도 있다. 그런 시간조차 낼 수 없다면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배려하고 양보할 수 있다. 너무 부유해서 어떤 도움도 필요 없는 사람 없고, 너무 가난해서 아무 도움도 줄 수 없는 사람 없다. 많든 적든 크든 작든 그것이 재물이든 마음이든 우리는 이웃에게 나누고 내어줄 수 있다. 그리고 그 내어줌의 첫째 그리고 가장 큰 수혜자는 바로 나 자신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 거친 세상에서 얼마나 빡빡하게 사는지 모르시지 않는다. 당신도 사셔봤고 또 옆에서 계속 지켜보고 계신다. 그런데도 섬기라고 계속 말씀하시니 우리에게는 그럴 능력이 주어졌고 또 그래야 하고 그러면 뭔가 좋은 게 있음이 분명하다. 바쁜 중에도 이웃을 섬기는 이들의 마음을 과연 무엇이 흔들 수 있을까? 혹시 있다면 더 해주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거룩한 욕심일거다. 그런 이들의 마음에는 도둑이 들어 올 수 없다. 예수님 친히 지켜주실 테니까.

 

예수님, 예수님처럼 사는 것은 당신만 하실 수 있습니다. 저희는 주님을 따라 갈뿐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부자이시니 제가 드릴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저희 섬김과 친절은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증거이고 제 구원입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섬김과 친절이 버거워질 때 어머니의 품에서 잠시 쉬어갑니다. 아멘.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12,39-48: 충성스러운 종에 대하여

매 순간을 충실한 삶으로 준비하라는 어제의 말씀에 이어 오늘은 더욱 구체적으로 충성스러운 종과 불충한 종의 비유를 들어 항상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충실히 수행하고 준비하는 삶의 자세를 말씀하신다. 베드로는 주님, 이 비유를 저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41)고 물었다. 베드로는 이 비유가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인지 알고자 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이 명령이 교사의 역할을 맡아 남보다 영향력 있는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더 새겨들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43-44) 그들은 동료 종들에게 정해진 양식을 내주라는 명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적절한 때에 각자에게 적절한 영적 양식을 넉넉하게 줄 것이다.

 

동료 종들에게 때맞추어 양식을 주는 일은 교회의 사제들과 고위 성직자들의 몫이다. 그런데 자신의 몫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으로 남용을 하게 된다면, 그런 종은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간절히 기다리며 자기의 소임에 충실한 자들은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43)으로 칭찬을 듣고 많은 일을 맡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근면하고 성실해야 할 자신의 본분을 잊어버리고, 깨어 지키는 일을 쓸모없는 일로 가벼이 여기며, 옳지 못한 길에 들어서서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괴롭히는 자, 만일 그가 그들에게 돌아갈 몫을 지급하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처단 당하여 많은 매를 맞을 것이다. 주님의 영광을 가리거나 자기에게 맡겨진 양떼를 소홀히 다루는 자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과 똑같이 대접 받을 것이다.

 

지도자들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양들이 잘못되는 것이 대부분 자신들의 탓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 경우에는 그들이 주님의 길을 지키지 않고, 구원을 위해 주어진 거룩한 명령을 어겼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이익만 탐내고, 교만으로 믿음을 소홀히 하고, 말로는 세속을 버린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움켜잡고, 자기 욕심만 차리느라 하느님의 뜻을 행하지 않았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47)이라고 하셨다. 주인의 뜻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은 매 맞을 짓을 했고 매를 맞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들에게 선한 덕행의 모범이 되어야 할 증거자들인 우리가 어떤 매를 맞더라고 억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알고도 주님의 뜻을 거스른 자는 많이 맞을 것이고 모르고 잘못한 사람은 적게 맞는 다고 하셨다. 그래서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48)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 48)

-한상우신부-

맑은 햇살에
모든 것을 내맡기는
붉은 단풍을
만납니다.

불충실과
충실사이에
우리의 소임이
있습니다.

소임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기도가 필요한
믿음의 시간입니다.

맡겨주신
모든 소임 뒤에는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현실에
충실하시길
바라십니다.

일상의
충실함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봉헌입니다.

봉헌이란
이 소임을
맡기신 주님께
우리또한 의탁하는
것입니다.

의탁은 희생과
봉사로 서로를
받아들이게합니다.

맡기신 주님을
향해 가는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의 소임에서
주님의 뜻을 찾고
성장하는 은총이길
기도드립니다.

단풍도 단풍의
소임에 충실하며
불타오르는
삶을 살아갑니다.

충실과 불충실
사이에
우리에게 맡기신
십자가가 있습니다.


-오상선신부-


오늘의 말씀들은 은총 아래 사는 이의 자세를 권고합니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루카 12,40).
예수님께서 "생각하지도 않은 때"(루카 12,40)에 닥쳐올 주님의 날을 위해 준비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십니다. 본문 안에는 조금씩 표현만 다를 뿐,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루카 12,46)이란 말씀처럼, 사람의 아들이 오는 날이 얼마나 긴박하고 급작스럽게 들이닥칠지 반복해 묘사하고 있지요.

"주님 이 비유를 저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루카 12,41)
그런데 베드로의 관심은 그 "때"나 내용에 대한 의문보다 말씀의 대상에 더 쏠려 있습니다. 예수님 곁에 있는 "우리"만을 위한 지침인지, 아니면 누구나 다, 모든 사람이 지켜야 하는지 가르침인지 궁금해 합니다. 우월감의 발로일지 책임의 과중함 때문일지 현재로선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 의문의 답이 선명하게 떠오를 때가 있을 것입니다.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루카 12,42).
예수님은 집사를 비유로 드십니다. 집사는 주인과 종들 사이를 연결하지요. 주인의 뜻을 종들에게 전달하고, 종들이 주어진 일을 하도록 통솔하면서 그들의 생활도 돌보는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은 주인이 어느날 갑자기 돌아왔다는 설정 아래, 종들을 잘 돌보면서 주인의 집안을 손색없이 꾸려가는 집사와, 맡겨진 종들을 학대하며 자기 욕구와 탐욕을 채우는 집사의 예를 드십니다. 전자에게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맡길 것"(루카 12,44)이라 하지요. 그의 충실함과 슬기가 그만큼 주인을 흡족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후자는 "매를 많이 맞을 것"(루카 12,47)이라 하십니다. 그의 게으름과 무절제한 욕망이 주인에게 실망을 주고 말았으니까요.

언뜻 듣기에 집사는 일반 군중과 예수님 사이를 잇는 제자들만을 지칭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마치 중간 관리자를 위한 말씀처럼 듣는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좀 더 깊이 숙고해 보면, 우리 중 누군들 집사의 역할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있을까 싶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온 세상은 인간과 모든 피조물이 서로 연결되어 살아가는 유기체고요. 한 사람이 생명을 받아 세상에 나와서 살아가는 동안, 어느 누구도 돌봄과 연대의 책임에서 배제될 수 없습니다. 건강한 사람이 육신의 활동으로 맡겨진 가족과 이웃을 돌본다면,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이라도 그 마음에 고통 받는 온 세상 모든 영혼들을 품고 돌볼 수 있으니까요.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에게 맡겨질 주인의 모든 재산은 꼭 물리적인 것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은총 이야기를 계속 전개합니다.

"여러분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총 아래 있습니다"(로마 6,14).
은총 아래 있는 이는 "의로움으로 이끄는 순종의 종"(로마 6,16)입니다. 은총의 날개 아래 품어지는 순간 그는 죄를 떠났습니다. 은총 아래 머무르면서 율법의 그늘로 다시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율법에서 해방시켜 은총의 길로 이끄셨기 때문입니다.

집사는 주인에 대해서는 물론 종들에 대해서도 율법의 의무가 아닌, 사랑의 의무를 다하는 존재입니다. 율법에만 묶여 최소한의 임무나 수행한다면 그저 대가를 바라고 노동력을 파는 날품팔이꾼과 다를 바 없겠지요. "충실하고 슬기롭다"는 주인의 칭찬은 그 이상의 투신과 헌신을 치하하는 보상입니다.

우리 집사들에게 삶에서 사랑할 기회는 얼마든지 다가옵니다. 내게 맡겨진 가족과 이웃, 지인들을 포함해,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 지구 반대편에서 나의 기도와 소박한 자비에 목을 축이고 숨을 연명하는 하느님의 아들딸들, 한 번도 마주친 기억조차 없는 연옥 영혼들까지 우리 돌봄의 울타리는 무한대로 열려 있습니다.

사랑하라고 부여받은 절호의 기회 앞에서, 그가 누구이며, 꼭 내 도움이 필요한지, 나 아니면 안 되는지, 내 감정이 헤프고 공연한지, 내 잔고는 얼마인지 냉철히 분석하고 따지고 계산하는 사이 우리는 은총의 날개 아래에서 다시 율법의 그늘로 빨려들어가 버리고 말 것입니다.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마음이 시키는 길, 연민의 사랑이 부르는 길을 따라갑니다. 죄 짓지 않으려고, 실수하지 않으려고 매달리는 율법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이끄시는 주님의 소리, 은총의 흐름을 듣고 따라가기 때문이지요.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8).
자,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답이 나왔습니다. 이 비유의 대상은 제자들만이냐 모든 사람이냐를 떠나서, 주님께서 많이 주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많이"의 기준이 궁금하지요. 그 답은 오늘 이 말씀을 만난 모든 이들의 마음 안에 들어있습니다. 누가 굳이 콕 집어 일러주지 않아도 자신이 가장 잘 아는 답이 솟구칠 겁니다. 그 답을 따라가십시오. 자유롭게, 사랑의 이끄심을 따라, 은총이 허락하는 대로...

주인에게건 종들에게건 절대 사랑의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깨어 준비하고 있다면"(복음 환호송) 가능할 것입니다.

품위를 잃어도 안 되지만 겸손도 잃어서는 안 되는 
-김찬선신부-


언뜻 생각하기에 종이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생각되는데
주님께서는 어제에 이어 오늘도 행복한 종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주인이 이 세상의 악독한 주인이라면 그 종이 행복할 수 없겠지만
하느님이 주인이시라면 그 종은 행복할 수 있다는 말씀이겠습니다.
그런데 어제 복음의 행복한 종과 오늘 복음의 행복한 종이 다르고 
그래서 행복한 이유도 다릅니다.

어제 복음에서는 주인이 돌아올 때 기다리고 있다가 맞이하는 종입니다.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주인이 돌아올 때 충실하게 일하는 종입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그러니까 어제의 종은 주인을 사랑하고 주인의 사랑을 받는 종이고,
오늘의 종은 주인이 맡긴 일을 충실하게 완수하는 종입니다.
둘을 종합하면 종은 사랑과 일의 종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행복할 수 있는 두 가지 길에 대한 정확한 가르침입니다.
심리학에서도 인간이 행복할 수 있는 두 가지 방식을 얘기하는데
그것은 사랑과 일이라고 하지요.

다시 말해서 인간에게는 두 가지 형태의 만족이 있는데
사랑의 충만으로서 만족과 일의 보람으로서 만족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할 때 더할 수 없는 충만을 느끼게 되고,
또 일을 한 뒤에는 성취감으로서의 보람을 느끼게 되는데
여자는 남자보다 사랑을 하면서 만족과 행복을 느끼는데 비해
남자는 일 하고 난 뒤의 보람에서 만족과 행복을 느끼는 편이라고 하지요.

문제는 사랑한다고 다 충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일을 한다고 다 보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지요.
특히 오늘 복음에서 충실히 일한 종의 행복을 얘기하는데
우리는 일을 노예처럼 할 수도 있고 그때 일한 뒤의 보람은 없지요.

옛날 제가 전남 신안군 자은도에서 일 할 때의 얘깁니다.
낮엔 그곳 분들과 일하고 밤에 교리도 하고 미사도 드리곤 했는데
해뜨자 마자 일을 나가 하루종일 할머니들과 마늘을 캐던 어느 날,
한 할머니가 마늘을 캐다말고,나는 사람이 아니고 소야!
노상 먹고 일만 하니!하고 푸념을 하시는 거였습니다.

너무 큰 충격이었데 저는 그 말씀이 십분 이해가 되었습니다.
저도 신품 받기 전에 가방 만드는 공장에 다닌 적이 있는데
눈 뜨면 시작하여 잠 자기 직전까지 하루에 거의 16시간 일하였지요.
일의 노예지 무슨 보람이 있고 일의 행복이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일의 노예가 되면 안 됩니다.
일의 노예든 1독서 로마서가 얘기하는 죄의 노예든 노예가 되면 
행복할 수 없으니 아무리 내가 종일지라도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종이고,종이 아니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긴 하지만 우리는 종일지라도 노예가 되지 말아야 하고,
하느님을 주인으로 모시면 하느님은 악독한 분이 아니시기에
오늘 로마서의 말씀처럼 그분께 순종하는 종, 충실한 종이 되면
노예가 되지 않을 수 있고 더 나아가 집사로 승진할 수도 있습니다.

집사란 종 중에서 뽑힌 종이고 하느님의 소명을 받은 종이지요.
그런데 건방지게도 집사건 뭐건 나는 종이 싫다고 하며 마치 내가
주인인 양 종들을 부리면 벌받게 될 거라고 오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종이지만 품위를 잃고 노예로 전락해서도 안 되지만
겸손을 잃고 주인인 양 함부로 나대서도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어제와 오늘을 종합하면 우리는 종인데
어제는 다른 누구도 아닌 주님을 사랑하고 사랑 받는 행복한 종이라면
오늘은 겸손하여 주님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상을 받는 행복한 종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10월 25일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