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22일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루카 12,35-38)
Blessed are those servants
whom the master finds vigilant on his arrival.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은 행복하다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의 모습을 통하여 종말에 대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깨어 기다리다 주인을 맞이하는 종은 상급을 받으리라는 내용입니다. 물론 그 이면에는 불충한 종은 벌을 받으리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지만 종말의 근본적인 내용은 만남입니다.지금은 거울을 보듯이 희미하게 보이지만 그때는 얼굴을 맞대고 보듯이 모든 것이 분명하리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에게 그때는 하느님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우리가 신앙 안에서 가장 바라고 느낄 수 있는 최고의 기쁨과 행복이 하느님을 만나는 일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종말은 고통과 혼란이 아니라 기쁨과 행복의 완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예수님께서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기다리라고 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런 기쁨을 기다리며 그 희망으로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종이 주인을 기다리는 것은 겁이 나거나 불안해서가 아닙니다. 주인이 돌아오면 자신을 축복해 주리라는 기쁨에 차서 취하는 자세입니다. 주인이 종의 식사 시중을 들어 줄 것이라는 말씀에서, 우리가 머리로 다 알아차리지 못하는 하느님의 커다란 신비와 축복이 드러납니다. 이제 종은 더 이상 종이 아니라 벗이 된 것입니다.이런 맥락에서 내일 복음에서 듣게 될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 12,40)라는 주님의 권고는, 어떤 위협이나 협박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다가올 무한한 행복에 마음을 활짝 열고 희망 속에 살기를 바라시는 정감 가득한 말씀이며, 우리에게 당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나누어 주시고자 하는 사랑 가득한 마음이기도 합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여보, 우리 어떻게? 글쎄 태양이 머지않아 크게 폭발해서 적색거성이 된다네. 그렇게 되면 지구는 전부 불타고 이후에 얼음으로 뒤덮이게 된데.”
아내는 깜짝 놀라면서, 정말로 큰 일이라며 언제 그런 일이 생기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말합니다.
“응…. 50억 년 후에!”
이 대답에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고 하네요.
“또 장난치면 태양보다 당신이 먼저 사라진다.”
우리 중에 혹시 50억 년 후를 걱정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100년도 못 사는데 50억 년 후를 걱정하고 있다면 쓸데없는 걱정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쓸데없는 걱정은 멈추지 않으면서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저 역시 쓸데없는 걱정을 참 많이 했었습니다. 특히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인해서 ‘어떻게 하지?’라는 걱정을 했었지요. 그러나 걱정의 시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모두가 쓸모없는 걱정이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의 순간에 얼마나 충실하게 사느냐에 있었습니다. 이것이 걱정을 줄여나가고 미래를 잘 준비하는 모습이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 신앙인들은 주님 앞에 섰을 때를 준비해야 한다고 하지요. 즉, 언젠가 닥쳐올 죽음을 잘 준비해야 합니다. 나의 죽음이 언제 어디서 이루어질지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자신이 그 시간을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죽음은 연중무휴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죽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살 준비도 되지 않은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라고 명령하십니다. 육체노동을 하거나 힘든 일을 하는 이들은 허리에 띠를 단단하게 맵니다(역도선수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래야 자신의 온 힘을 쏟아부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등불은 깨어 있음을 의미하지요. 즉, 마음과 육체가 기운차게 깨어 있어야 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언제나 깨어서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이는 먼 훗날 힘이 떨어져서 이 세상 힘이 떨어질 때 할 것 없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이라고 하시지요. 우리가 젊든 늙었든, 누구든지 허리를 동이고 깨어 있다가 주인을 맞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준비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온 힘을 쏟아붓고, 사랑을 외면하는 일이 없도록 등불을 켜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어느 온천에 갔던 기억 하나가 생각납니다. 그곳의 온천수는 너무나도 유명했습니다. 철분과 무기질이 다량함유되어 있고 물이 나오고서 10분 정도 지나면 붉은색으로 변하는 신비한 물이 나오는 곳입니다. 특히 피부에 무척 좋아서 옛날부터 피부병 치료에 좋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워낙 유명해서 신기한 마음에 방문했습니다. 소문대로 욕조에 받아 놓여 있는 물은 붉은색이었고, 많은 사람이 이 욕조 안에서 몸을 담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뒤에 어떤 분이 나타났는데 사람들은 그분을 보고는 모두 욕조 밖으로 성급히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분의 피부가 너무나도 이상했기 때문이었지요. 피부병 환자로 보이는 사람이 욕조에 들어가니 다른 사람은 모두 인상을 쓰면서 밖으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잠시 뒤에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와서 피부병 환자는 입욕할 수 없다고 매정하게 말합니다. 아마 누군가가 직원에게 항의했겠지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피부병 치료에 좋은 곳이니 피부병 환자가 들어가는 것이 당연할텐데, 정상인인 사람들이 잘못되었다고 난리입니다. 피부병을 앓고 있는 이들이 오히려 피부병에 좋은 곳을 이용하지 못하게 합니다.
나의 불편함에 대해서는 조금도 참지 못했던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주님께서는 이러지 않으셨습니다. 늘 그들의 편에서 생각하고 행동하셨다는 것을 떠올려 봅니다.

내가 나의 삶의 주인일 때 잠자고 있는 것이다
-전삼용신부-
저는 제가 좋아했던 여자와 결혼을 해서 행복한 신혼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침에 출근을 하려고 하는데 정말 정성스럽게 아침밥을 해 주는 아내가 사랑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조금씩 잔소리를 하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돈이 더 필요하다느니, 양말 좀 뒤집어 벗지 말라느니 갖은 잔소리를 늘어놓았습니다. 일하러 가는 것도 힘든데 아침부터 잔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신혼 때부터 이렇게 잔소리를 하면 갈수록 더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앞이 막막했습니다. 평생 아내의 종으로 살아야 하는 것 같아, 괜히 결혼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꿈이었습니다. 제가 사제가 되고 얼마 되지 않아 보좌신부일 때 꾼 꿈입니다. 눈을 떴을 때 주위를 둘러보고 사제관인 것을 알았습니다. 눈뜨자마자 감사기도를 그렇게 절실히 드려본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주님, 제가 사제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의 종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결혼이 힘들다는 것을 말씀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꿈을 꾸고 있을 때는 내가 내 삶의 주인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결혼은 나의 선택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후회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누군가의 종이 되어 살고 있었습니다. 아내에게 휘둘리고 있었습니다. 상황에 휘둘리고 있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가기 싫은 직장도 억지로 가야했습니다. 내가 나의 주인이었을 때는 철저하게 혼자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종임을 다시 알게 되니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는 그런 꿈을 꾸고 싶지 않았습니다.
사제생활을 하다 보니 제가 꾸었던 꿈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꿈이었지만 많은 분들에겐 그것이 현실이었습니다. 자기 삶의 주인이 자기 자신이라고 믿고 살지만 실제로는 사람에 휘둘리고 현실에 휘둘리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삶은 깨어있지만 잠을 자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상태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자기 자신을 주인으로 삼고 살지 말고 당신을 주인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잠에서 깨는 유일한 길입니다. 나는 내 생명을 만든 적도 없고 내 존재가 생겨나게 한 적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내 생명을 부모님이 만들어준 것도 아닙니다. 부모님은 나의 눈 하나도 다시 넣어줄 수 없습니다. 나를 만드신 분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런데도 내가 주인인 것처럼 살면 꿈을 꾸고 있는 것입니다. 참 나의 창조자를 만나 창조자의 의도대로 살아갈 때 비로소 깨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일반 대학교 다닐 때 이런 꿈도 꾸었습니다. 제가 사막을 혼자 걷고 있었습니다. 푹푹 빠지는 모래 때문에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습니다. 모래 언덕을 오르고 있었는데 너무 지쳐있었습니다. 그때 옆에서 저를 부축해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너무 편안한 마음이 들어 그 사람을 바라보았더니 아는 여자였습니다. 잠에서 깨어나 이것은 분명 하느님의 계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뒤 그 여자는 다른 남자와 사귀고 결혼하였습니다. 허망한 꿈이었던 것입니다.
인생이 허망한 꿈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우리 자신이 자신의 주인이 되어 살면 안 됩니다.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면서 혼자 판단하고 혼자 힘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오류에 빠져 고생만 하며 살다가 하나도 남지 않는 인생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깨어나야 합니다. 나의 주인이 주님임을 믿게 될 때 참으로 깨어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자신이 주님의 종으로 여기고 주님의 뜻대로 살아갈 때 그 삶이 깨어있는 삶입니다. 이런 깨어있는 사람만이 주님의 나라에 살 자격을 얻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우리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 하느님을 주인으로 여기며 산 이들에게 이런 축복을 주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당신을 참 아버지요 주님으로 인정한 이들은 아버지로부터 오는 모든 축복을 받게 됩니다. 자신을 자신의 주인으로 여기며 살지 맙시다. 나는 나를 만든 적이 없습니다. 잠에서 깨어나 주님을 나의 주인님으로 여기고 오늘 하루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도록 결심합시다. 이것이 깨어있는 삶입니다.

-조재형신부-
한국에서 버스를 기다릴 때입니다. 전광판이 있고, 기다리는 버스가 몇 분 후에 올지 알려줍니다. 집에서도 인터넷에 접속하면 원하는 교통수단의 출발시각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유용한 프로그램은 열정을 가진 사람의 노력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버스 정류장의 안내 서비스는 고등학생의 신선한 생각으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깨어 있는 사람의 열정과 노력이 많은 사람에게는 생활의 기쁨이 되고 있습니다. 제가 있는 신문사에도 ‘맥가이버’처럼 도움을 주는 형제님이 있습니다. 서랍도 고쳐주고, 형광등의 안전기도 갈아주고, 고장 난 스위치도 바꿔주고, 막힌 배수구도 뚫어주고, 청소 도구함도 만들어 줍니다. 같은 손인데 형제님의 손은 만능입니다. 저와 신문사의 직원에게 형제님은 언제가 감사한 손님입니다. 땀을 흘리면서도 언제나 웃는 모습으로 봉사하시는 형제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많은 것들을 주셨습니다. 아름다운 산과 바다를 주셨고, 태양을 만들어 주셨고, 들에는 많은 먹을 것들을 주셨습니다. 물과 공기가 있어서 우리는 마시고, 숨을 쉴 수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것들을 주셨는데, 때로 우리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느끼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서로 싸우며 분열을 일으킬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벌하시기도 하지만 우리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도록 예언자들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언자들은 우리에게 한결같이 ‘회개’를 요구했습니다. 이제 그릇된 길에서 돌아와 바르고 참된 길을 가도록 요청하였습니다. 회개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면 많은 축복이 있음을 알려 주었습니다.
회개란 무엇일까요? 마음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왔던 부자 청년이 있었습니다. 부자 청년은 예수님께 질문을 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셨습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고, 살인하지 말며, 부모에게 효도하여라.’ 부자 청년은 그런 것들은 이미 잘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 자신 있게 말하였습니다. 저는 이미 그런 계명들은 잘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너는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라라.’ 그러자 부자 청년은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가진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깨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단순히 눈을 뜨고 있는 것이 깨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과 의식이 깨어 있어야 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원망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은 깨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워하고, 탐욕을 부리고, 남을 속이는 사람은 깨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은 비록 눈은 뜨고 있지만, 영혼은 죽어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름을 준비하고 등불을 켜는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기름은 친절, 인내, 나눔입니다. 이것은 바로 사랑, 희망, 믿음의 등불이 될 것입니다. 새로운 걸 배우고 도전하는 사람도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도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열정과 노력으로 새로운 걸 만들어내는 사람도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을 따르며 생각과 의식이 깨어 있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 이는 죄가 죽음으로 지배한 것처럼, 은총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의로움으로 지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떠나는 여행이 아니라 깨달음을 얻기 위해 떠나는 여행!
-양승국신부-
여행을 떠나면서 불현듯 떠오른 생각입니다! '그래 우리네 인생도 여행이로구나!'
인생이라는 여행길을 걷다보면,때로 조금 길고 지루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때로 결코 길지 않은 여행, 마치도 벗꽃 만개한 어느 봄날, 아스라한 하루밤 꿈과도 같은 짧은 여행 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무한하신 은총과 자비로 이 땅에 온 우리는,다들 각자 나름의 여행길을 걷고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이 여행길이 아무리 길어보이고 고단하게 느껴진다 할지라도 결코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는것입니다.무한 반복되지 않고 이 한번의 여행으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이 여행길의 종착점에는 그토록 우리가 그리워했던,사랑이신 하느님께서 두 팔 크게 활짝 벌리고 미리 마중나와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 힘겹고, 때로 포기하고 싶어도,두발에 힘을 주고 기꺼이 걸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왕 걷는 여행길 억지로,갖은 인상 다 쓰며 걷지말고,세상 기쁘고 행복한 얼굴로, 순간순간 설레고 들뜬 마음으로 이 여행길을 걸어가야겠습니다.
걷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때도 있을 것입니다. 강한 폭풍우를 만나거나 작열하는 뜨거운 태양 아래를 걸어갈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나고 나서 돌아보면 반드시 고개를 끄덕이실 것입니다. 자비의 하느님께서 마냥 우리를 험난한 비탈길로만 인도하지 않으신다는 진리를 말입니다.
걷다보면 황홀한 일출 광경도 만날 것입니다. 절경 사이로 펼쳐진 평탄한 능선길도 걷게 될 것입니다. 천국의 정원같은 꽃길도 만나게 될것입니다.
더욱 은혜로운 일 한 가지! 우리의 인생길은 결코 우리 혼자 걷지 않는다는 것! 때로 자주 잊어먹지만 우리의 여행길에는 인도자 성령께서,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 우리 각자의 수호천사들께서 우리와 함께 걷는다는것은 우리가 굳게 믿어야할 신앙의 진리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 나혼자뿐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겠습니다.외롭다고 울부짖지도 말아야겠습니다.
초목 우거진 멋진 수목원 산책하듯이, 편안한 마음으로 걸어가야겠습니다.
내일은 또 어떤 길로 나를 안내하실까...흥미진진한 얼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남아있는 우리의 인생여정을 힘차게 걸어가야겠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왕 걷는 길,잘 꽃단장하고 걸으라고 초대하십니다. 우중충하고 심란한 모습이 아니라 허리에는 띠를 매고 등불을 켜서 손에 들라고 하십니다.
단 한번 뿐인 소중한 우리네 인생길 적당히 흥청망청 낭비하며 보내지말고 최선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더할나위없이 충만한 모습으로 엮어가라고 초대하십니다.

-행복한 삶
-김기현신부-
말기암 환자가 올린 영상을 몇 가지 보았습니다. 제가 병에 걸려서 관련 정보를 얻으려는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얼마 남지 분의 이야기여서 그런지 귀 기울이게 되는 것 같습니다. 특별히 기억나는 말이 있는 건 아니지만, 보면서 느껴지는 것 중의 하나가 암환자가 되면 스스로에게 더 중요한 것에 집중하게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여행도 가고, 평소 해 보고 싶었던 작은 일들도 시도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때로는 의식 없이 하루 하루 살아가는 모습을 반성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나는 지금 행복한가... 내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바쁜 일들이 있다면 아마 그런 생각은 일 뒤로 밀려났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종종 그런 생각들이 밀려오곤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종이에 몇 가지 적어 보았는데 이런 겁니다. ‘글을 쓰고 나서 조금 말이 된다고 생각할 때, 혼자 조용한 숲길을 걸을 때, 플롯으로 쉽지만 아는 노래를 불고 있을 때, 심고 거두며 흙을 만지고 일할 때, 책을 읽고 무언가를 알아가는 느낌이 있을 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읽을 때, 운동하면서 작은 근육들이 생기는 것을 볼 때, 낯선 곳에 갔을 때, 기도 안에서 위로를 받을 때...’ 등등이 생각났었습니다.
그리고 ‘잘 하고 있나...’ 라는 것을 생각해 봤을 때, 어느 순간에는 그런 것들로부터 멀어져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해야 된다는 느낌의 것에 나도 모르게 사로 잡혀서 힘을 쓰고 있는 모습을 종종 보곤 합니다. 그래서 매일 해 오던 것들을 조정하고 다시 살아가곤 하는데요.
오늘 복음에서도 잊지 말아야 할 행복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복음은 저에게 ‘종’임을 잊지 말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삶의 주인이 아니라 섬겨야 할 주인이 있음을 상기시켜 주고 그 주인을 기다리는 마음과 삶의 모습도 잊지 말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두 달 전에 조금 길게 피정을 했었습니다. 피정을 하면서 다시 마음이 주님을 향하고 나에게 진정한 안식과 쉼이 무엇인지 새삼 느끼고 평안함을 회복했던 적이 있는데요. 살다보면 자주 잊어버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때로 시간이 많이 남아 있는 것처럼, 주인을 맞이하는 종의 모습이 아니라 내 일을 이루고 싶어하는 교만한 모습으로, 그리고 영원을 위한 선택과 삶이 아니라 사라질 것을 움켜쥐고 있는 모습으로 말입니다. 조금 헤매였다면, 그리고 중요한 것을 다시 바라보고자 한다면 다시 기본으로 돌아올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애착을 버리고, 영혼구원을 위해 내 인생에서 하느님이 바라시는 일을 찾고 일하는 것.’ 이 아마 그 기본을 생각하게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하루, 내 삶의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행복은 무엇일까... 한 번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중국 신부님, 수녀님, 식복사 분이랑
사제관에서 식사를 했다.
중국 신부님이 유머를 했는데 못 알아들었다.
중국 신부님이 “알아 들었어?”라고 해서
“못 알아 들었어요.” 했다.
그랬더니 신부님이 나보고 웃으시면서,
“예전 신부도 불리하면 못 알아 들었다고 했어~”

행복하여라, 깨어있는 종들!
-반영억신부-
베드로의 편지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1베드5,8-9).
‘깨어있다’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을 감지하는 영적감각이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잠시라도 한 눈을 팔면 안 된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누구나 자기의 몫이 있는데 그 몫에 충실하지 않으면 생각지도 않은 어둠이 우리를 지배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이만하면 됐다’는 안일함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이 다하여 하느님 안에 편히 쉬기까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한다는 것 자체가 깨어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깨어 있는 사람은 미래를 준비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축복을 받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주인을 충실히 기다리는 종에게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바와는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종이 주인처럼 대접 받으며 주인이 그의 종처럼 처신합니다. 결국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축복이 주어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그러면서도 내일 당장 떠날 것처럼’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음이 행복입니다.
본당신부를 할 때에 가끔 예고 없는 가정방문을 했습니다. “사람의 아들도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마태24,44).는 예수님의 말씀을 핑계로 말입니다. 그러면 행복해 하는 분도 있지만 당황하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집안정리를 잘 해 놓으신 분은 더없이 기뻐했고 그렇지 못한 분은 신부에게 자기 속을 다 보인 것 같아서 무안해 했습니다. 그러나 소위 ‘열심 하다’는 분의 가정에서 그 모습을 보면 제가 오히려 미안하고 죄송스러웠습니다.
물론 집안 정리가 잘 되었다고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할 수 있는 것도 마음이 맑은 것도 아닙니다만 열심한 만큼 가족 구성원 누구에게도 짐을 지워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늘 준비된 모습이 가정 안에 화목함과 평화를 이루는 원동력이 됩니다. 그리고 서로를 배려하는 모습에서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사실 집안 정리를 못해서 부끄러운 건 그래도 다행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 앞에 서있는 우리의 마음이 부끄럽지 않아야 합니다. 따라서 잠시라도 악에게 틈을 주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깨어있어 행복한 오늘입니다. 항상 깨어 안 밖으로 정리 정돈을 하며 주인을 잘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종은 그 신분상 겸손할 수밖에 없고 순종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에게는 참으로 겸손하고 순종적이면서 바로 이웃에겐 그토록 교만하고 억압적인 태도를 보이는 우리는 위선자입니다." 깨어있는 종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깨어서 기다리던 주인을 반갑게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신앙생활은 ‘기쁨’의 생활
-송영진신부-
신앙생활은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행복과 기쁨을 믿고,
날마다 회개하면서, 그 생명과 행복과 기쁨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제는 강론을 할 때마다
지옥과 연옥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를 강조하면서,
그 무서운 곳에 안 가려면 회개하라고, 마치 협박을 하듯이 강론을 합니다.
회개해야 한다는 말은 옳지만, 꼭 그런 식으로 말해야 하는가?
벌을 받는 것이 무서워서 회개하면, 그 회개는 과연 진정한 회개일까?
그런 경우에는 고해성사를 보아도 기쁨이 없고,
귀찮은 숙제를 마쳤다는 정도의 안도감을 느끼는 것으로 그칠 것입니다.
또 그런 경우에는 기쁨 없이, 의무감으로만 신앙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주일마다 부담감과 압박감을 느낀다면,
그래서 주일을 지키는 일에서 아무런 기쁨과 행복을 얻지 못한다면,
주일은 괴로운 날로 변질될 것이고,
그러면 주일을 지킨다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됩니다.
주일은 주님께서 주신 해방과 자유를 누리는 날이 되어야 하고,
기쁨과 행복과 평화를 누리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일미사 때마다 무시무시한 심판과 지옥 벌로 협박하는 것 같은
강론을 들어야 한다면, 주일미사도, 주일을 지키는 일도 모두
고통스러운 강제노동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기쁜 소식’입니다.
만일에 ‘복음’에서 ‘기쁨’을 빼버리면,
복음은 들으나마나 한 소식, 즉 들을 가치가 없는 소식이 됩니다.
어떤 성직자도, 어떤 수도자도,
‘기쁜 소식’에서 ‘기쁨’을 빼고 ‘무서운 소식’으로 바꿀 권한은 없습니다.
주일학교 어린이들 경우에, 성당에서 항상 혼나기만 하고,
그래서 성당에 가는 것을 싫어하면 집에서 부모가 혼내고...
가도 혼나고, 안 가도 혼나고... 그 어린이 입장에서는
성당은 무서운 곳이 되고, 예수님은 무서운 분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다가 결국 영영 예수님에게서 멀어지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기쁨의 생활’입니다.
만일에 신앙생활이 ‘기쁨의 생활’이 아니라 ‘괴로운 생활’이 된다면,
그것은 사제들과 수도자들에게 일차 책임이 있습니다.
(어떻든 죄를 안 짓기만 하면 된다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신앙생활은
아주 많이 부족한 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능동적으로, 또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하고,
기뻐하려고 노력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왜 하는지, 그 목적부터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옥과 연옥에 가는 것을 피하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루카 12,35-38)”
이 말씀은 당신의 ‘재림의 날’은 결코 ‘무서운 날’이 아니라,
기쁘고 행복한 날이라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는 것은 즉시 응답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고, 이것은 ‘항상 깨어 있는’ 신앙생활을 뜻합니다.
“주인이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은
주님께서 오시기를 간절하게 기다리는 신앙인입니다.
그렇게 기다리는 이유는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이고,
보고 싶고, 함께 있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 말씀은 주님께서 지금 우리 곁에 안 계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언제나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재림’은 떠나셨던 주님께서 돌아오시는 일이 아니라,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현존해 계셨던 주님께서
직접 보고 만질 수 있는 모습으로 당신을 드러내시는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차원의 존재로 변화되어서
주님과 함께 지내게 되는 일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행복하여라!” 라는 말씀과 “그 종들은 행복하다.” 라는 말씀은,
원래는 “하느님의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또는 “행복하게 될 것이다.” 라는
뜻인데, 글자 그대로 ‘지금’ 행복하다는 말씀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신앙인은 기다리는 동안에도 행복하고,
만나면 더욱 행복하게 됩니다.
(신앙생활 자체가 행복한 생활입니다.
나중에 죽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다음에야 비로소 행복하게 된다고 믿고,
희망하기만 하는 생활이 아니라, ‘지금’ 행복한 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을 하고 있어서 행복하고, 행복하니까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라는 말씀은, 충실한 신앙인을 보는
‘주님의 기쁨’을 나타내는 말씀이기도 하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는
‘신앙인들의 기쁨’을 나타내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 ‘기쁨’은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이미 시작된 기쁨이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계속 누리고 있는 기쁨이고,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되는 기쁨입니다.
우리는 종말, 재림, 최후의 심판이 언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모릅니다.
모르니까 무서워합니다.
각 개인의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을 잘 모르니까 무서워하고, 그 뒤의 일도 모르니까 무서워합니다.
무서운 것은 무서운 것이고,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우리는 이 ‘무서움’을 ‘믿음’과 ‘사랑’으로 극복해야 하고,
충만한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1요한 4,18).”
혹시라도 신앙생활에 기쁨이 없다면, 그것은 아직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회개가 부족하기 때문이고,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기쁘지 않은데 어떻게 억지로 기뻐할 수 있는가?”
자신에게 부족한 믿음과 회개와 사랑이 완전해질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 주님께서 주시는 참 기쁨이 찾아옵니다.

이기심과 욕망의 지옥
-이종훈신부-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듯이, 또한 이렇게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미치게 되었습니다(로마 5,12).” 첫 사람의 죄 때문에 우리 모두가 죄인이 되었다는 원
죄교리를 현대인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연좌제도 없어진 세상에 죄를 물려받았다는 교리는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세상은 뭔가에 홀린 듯 가짜를 진짜라고, 악을 선이라고 주장하는 것 같다. 이를 두고 한 신학자는 ‘원
죄적 상황’이라고 표현했다. 그 공동체의 분위기가 각 개인의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다. 나의 정의와 선
도 이미 내가 속한 공동체의 분위기가 반영되었을 것이다. 사이비종교집단에서 벌어지는 반인륜적인 행위들
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들은 그것이 의로운 결정이고 구원의 길이라고 확신했을 것이다.
공동체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구성원이 바뀌면 공동체의 분위기도 바뀐다. 모두가 예수님을 바라본다면 거기
는 천국이고, 자신만을 생각한다면 지옥이 될 것이다. 인간의 이기심이 거기를 지옥으로 만든다. 공동체가 개
인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지만 개인의 마음 생각 행동이 공동체의 색을 바꾸기도 한다. 인간은 영적인 동물이
다. 하느님을 닮아 영적이고 사랑할 줄 안다. 세상이 이것을 잊어버리게 우리를 폭력적으로 만들어가려해도 그
리스도인들은 이것을 기억한다. 모세가 파라오에게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거기를 벗어나야하는 이
유라고 내세웠던 것은 하느님 예배였다. 모세는 수차례 파라오에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백
성을 내보내어 나를 예배하게 하여라(탈출 7,26).’”하고 말했다. 인간은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으면 자신의 욕
망과 이기심의 노예가 되어 버려 공동체를 지옥으로 만든다.
이스라엘은 모세를 따라 노예생활에서 해방되었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따라 이기심과 욕망의 노예
생활에서 탈출한다. “사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은총과 의로
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입니다(로마 5,17).”
주님, 제가 당신을 주님이라고 불렀으니 당신의 말씀을 따릅니다. 주님의 말씀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이기심과
욕망의 올가미가 저를 옭아매고 있어서 주님을 잘 따르지 못합니다. 이기심과 욕망 안에는 아무 것도 없었음
을 기억하고 생명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12,35-38: 깨어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들은 행복하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35절) 이 말씀은 모세와 아론이 파스카 음식을 먹을 때 하신 말씀과 비슷하다. “그것을 먹을 때는, 허리에 띠를 매고 발에는 신을 신고 손에는 지팡이를 쥐고, 서둘러 먹어야 한다.”(탈출 12,11) 이는 깨어있으라는 말씀이다. 베드로 사도도 “정신을 차리고 깨어있도록 하십시오.”(1베드 5,8)라고 하였다. 주님의 뜻에 대해 깨어있는 것이다.
절제로 허리띠를 매고 선행으로 등불을 밝히는 것이 언제 오실지 알지 못하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가 꼭 해야 하는 일이다. 이것은 정의와 연관된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왜 그래야 하는지 일러 주신다.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36절) 주님께서 오시면 사랑의 명령에 순종한 사람들에게 합당한 상을 주실 것이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 한다. 우리의 등불을 꺼뜨리지 말고 허리에 띠를 동이고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마태 24,42)이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우리들 영에 좋은 것을 함께 찾아야 한다. 가야 할 길을 끝까지 다 가지 않으면 “한평생 믿음으로 산 것이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하기”(바르나바의 편지 4,9) 때문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38절) 주님께서 어느 때 오시든지 허리를 동이고 깨어 있다가 주인을 맞는 사람은 복된 사람이다. 그분께서 오셔서 그렇게 살고 있는 우리를 보신다면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37절) 그분은 우리가 수고한 만큼 풍성하게 갚아주실 것이다.
오늘 말씀은 죽음에 대한 대비를 잘하라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의 곁을 그냥 지나치시지 않도록 우리가 깨어있어 그분을 알아보고 맞이할 수 있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주님은 나의 이웃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사랑 받으시기를 원하신다. 이웃을 통해서 그분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하느님께 대하여 깨어있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이웃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우리는 영원히 하느님을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무엇인가? 주님께서 예기치 않을 때 오실 줄 알고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며 항상 깨어있는 것이다. 참으로 행복하다는 것은 깨어있는 삶을 통하여 우리에게 언제나 오시는 그분을 만나는 것이며 이를 통해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다. 언제나 주님을 만나 뵙고 사랑해드릴 수 있는 삶을 청하도록 하자.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루카 12, 37)
-한상우신부-
주님과
우리의 사랑은
깨어 있음으로
풍요롭습니다.
두려움이 아니라
깨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가지마다 가득
깨어 있는 빛깔로
불타는 단풍입니다.
우리 마음까지
물들입니다.
주님을 알고
살아간다는 것은
깨어 있는 삶을 이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계시기에
모든 순간은 특별한
순간이 됩니다.
기다리는 주님 계셔
바라볼 주님이 계셔
우리는 행복합니다.
주님이 중심이
되는 삶이 실상
가장 큰 행복입니다.
주님의 힘으로
살아 가는 우리의
시간입니다.
주님이 오시기에
견딜 수 있습니다.
주님과 우리의
거리는 깨어 있음의
거리입니다.
깨어 있음은
행복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사랑하는 법
믿는 법은
깨어 있음에서
비롯됩니다.
깨어 있음으로
주님의 것임을
알게됩니다.
단풍처럼
아름답게 빛나는
깨어 있음의
오늘 되십시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들은 제게 주인의 행복을 이야기합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루카 12,35).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인을 기다리는 자세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혼인잔치에 갔던 주인이 느닷없이, 예고없이, 갑자기 들이닥치더라도, 당장 아무 무리없이 맞이하여 여독을 풀 수 있게 섬길 수 있는 준비 자세를 갖추고 있으라는 뜻입니다.
"허리의 띠"는 치렁치렁한 복장이 노동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허리에 붙들어 매는 끈입니다. '당신을 위해 무엇이라도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는 마음을 옷 매무새로 표현한 셈이지요.
"등불"을 켜 놓은 상태는 '당신을 기다리기 위해 등불과 함께 제 영혼도 밝히고 있습니다'라는 무언의 메시지입니다. 깜깜한 밤, 저 멀리서 집을 향해 가고 있을 때 집 어딘가에 불이 켜져 있으면 마음이 설레고 위안이 되지요. 거창한 해후가 아닌 일상의 소소한 만남이어도, 모든 만남은 기다림과 기대감이 교차하는 순간입니다. 켜 놓은 등불은 그 기다림과 기대감을 더 밝고 풍요롭게 만드는 힘이 되겠지요.
"그 주인은 띠를 매고 ...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루카 12,37).
종이 자신을 깨어 기다려 준 것이 주인을 얼마나 기쁘고 행복하게 만들었는지 보십시오! 주인은 이를 종의 당연한 의무라 치부하지 않습니다. 긴 잔치와 여독으로 지쳤을 법도 한데 주인이 돌아오자마자 스스로 허리에 띠를 맵니다. 그리고 종들을 앉힌 뒤 그들의 시중을 듭니다.
오늘의 복음 대목에서는 두 차례나 종의 행복을 외칩니다(루카 12,37.38 참조). 그런데 그 행간에는 주인의 행복이 들어 있지요. 얼마나 행복하면 주인이 자청해 종처럼 되어, 종의 종이 되어 종을 섬기겠습니까! 이 역할의 전복, 신분의 전복은 누가 억지로 시켜서 될 일이 아닙니다. 주인 스스로 기쁘고 행복에 겨워 자기 자리, 자기 신분을 잊고(초월하고) 감사와 사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 유명한 죄와 은총의 역설을 이야기합니다.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로마 5,12).
성경은 원조의 불순종으로 인류의 죄가 시작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죄로 '생명의 나무로 이르는 길은 불 칼로 차단되고'(창세 3,24 참조) 인간은 죽음을 운명으로 떠안게 되었지요. 하지만 인류의 운명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로마 5,18).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 죄 없는 어린양의 순결한 피는 원조가 초래한 슬픈 결말을 뒤집습니다. 하느님께서 종이 되고 사형수가 되셔서 이루신 봉헌으로 인류는 구원의 보증을 받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이천 년 전에 이루어진 고귀한 희생 제사의 의미를 우리는 얼마나 누리고 있는지요.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의 일상 안에, 생각과 말과 행위 안에 선과 진리를 가장하고 교묘히 스며들어와 있는 죄와 악과 어둠의 실체에게 우리는 번번이 무너집니다. 그리고는 실망하고 좌절하고 용기를 잃어버리지요.
"죄가 많아진 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 5,20).
이 구원의 보증은 지금 여기 우리에게도 유효합니다. 비록 영육의 충돌과 모순이 우리를 끌어내릴지라도 예수님의 단 한 번의 희생 제사는 이 모두를 상쇄하고도 남습니다. 그러니 완성될 하느님 나라, 흠도 티도 주름도 없이 완성될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로 거듭나기까지 절망해서는 안됩니다.
주님께서는 오히려 죄가 많은 곳에 은총을 쏟아주십니다. 그분은 단죄와 심판이 아니라, 억압과 박탈이 아니라 은총으로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분이십니다. "당신 구원을 열망"(화답송)한다면 그분은 결코 얼굴을 바꾸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그분의 행복입니다.
복음으로 돌아갑니다. 종이 로봇이 아닌 이상 모든 일을 완벽하게 처리할 수 없겠지요. 평소 주인이 종에 대해 완전히 만족하기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주인이 잔치에서 돌아온 이 순간, 주인은 종이 자신을 깨어 기다려 준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감동 받고 감격해서 종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고, 스스로 내려갑니다. 최고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내용은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그 종들은 행복하다"(루카 12,38).
저는 거기에 감히 한 마디 덧붙이고 싶습니다. "주인은 더 행복하다"라고요.

한 사람이 중요하다
-김찬선신부-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듯이,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오늘 독서를 통해서 볼 때 한 사람이 무척 중요합니다.
나 한 사람쯤이야! 라고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사람과
그런 사람들로 인해 세상에 죄가 퍼지고
다른 사람은 어떠하든 나 하나라도 똑바로 살겠다는 사람과
그런 사람들로 인해 죄의 파급이 멈추게 됩니다.
오늘 독서는 한 사람을 통해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는 얘기로 시작됩니다.
아담을 두고 하는 말 같은데 그렇다면 아담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그리고 카인도 죄를 짓지 않았다면 세상에 죄가 들어오지 않았을까요?
그 둘이 죄를 짓지 않았어도 자손 중에 그 누가 죄를 지어
세상에 죄는 들어왔을 것이기에 그러므로 오늘 독서에서 얘기하는
그 한 사람이란 꼭 아담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너나 나이고
너와 나의 죄는 한 사람의 죄로 그치지 않고 세상에 퍼진다는 뜻입니다.ㅍ
우리가 자주 보는 현상이 있습니다.
건널목에 신호등이 있고 빨간불이 켜져 있습니다.
모두 파란불이 켜지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한 사람이 그냥 건너버리자
마치 둑이 터진 듯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법규를 위반하고 길을 건넙니다.
우리 안에 법을 어기고 마음대로 하고 싶은 마음이 다들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또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유 의지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다면 하느님께서는 왜 이런 자유를 주신 겁니까?
자유를 자기 마음 대로 하는 것에 쓰는 것이 인간인데 왜?
그것은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지요.
욕심과 비교할 때 사랑은 본질적으로 자유를 주는 것이고
사랑이 완전하면 완전할수록 자유를 주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욕심이라는 불순물이 있기에 사랑하면서도
욕심만큼 내 욕심대로 되거나 해 주기를 상대에게 바라고
애착을 하고 얽어매려고 하는데 하느님의 사랑은 그런 것이 전혀 없지요.
그런데 하느님께서도 자유를 주시면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억지로가 아니라 완전한 자유로 우리가 당신을 선택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유의지로 당신을 배반하고 죄를 지을 수도 있지만
그 자유의지로 당신을 선택하고 사랑하기를 바라시는 겁니다.
그런데 사랑을 선택할 수도 있지만 죄를 선택할 수도 있는,
이 위험한 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으로 자유를 수성守城해야 합니다.
자기를 포기한 사람은 자기 몸을 함부로 굴리고 인생을 막 살아버리는데
진정 나를 사랑한다면 나의 자유를 소중히 여겨
한찮은 것에 개떡같이 쓰지 말고 소중히 써야 합니다.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것과 같은 거잖아요?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다시 말해서 이웃 사랑 때문에도 함부로 살면 안 됩니다.
가장이 무너지면 한 가정이 무너지듯 내가 무너지면
나를 밑돌 삼아 서 있던 사람들까지 허물어질 것이고,
내가 버티고 있으면 나를 바탕 삼고 디딤돌 삼아
사랑의 탑/건물이 세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거듭 얘기하지만 나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나 하나쯤이야 하고 생각지 말 것이고,
나 하나로 뭘 할 수 있겠어? 라고도 생각지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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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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