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10월 7일 연중 제 27주간 월요일

Margaret K 2019. 10. 6. 19:29

2019년 10월 7일  연중 제 27주간 월요일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16세기 중엽 오스만 제국(현재의 터키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 제국)은 세력 확장을 위하여 유럽을 침공하였다. 1571년 10월 7일 그리스도교 연합군은 그리스의 레판토 항구 앞바다에서 벌인 ‘레판토 해전’에서 이슬람 제국을 무찔렀다. 이 전투의 대승은 묵주 기도를 통한 성모님의 간구로 하느님께서 함께하신 덕분이라 여기고, 이를 기억하고자 비오 5세 교황은 ‘승리의 성모 축일’을 제정하였다. 훗날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이름이 바뀌었다.

☆☆☆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루가 10,25-37)

 

 You shall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with all your being,
with all your strength,
and with all your mind,
and your neighbor as yourself.”

 

The parable of the good samarita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요나 예언자는 주님을 피하여 달아나다가 사흘 밤낮을 물고기 배 속에 있게 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하시며,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드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한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는지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는지 물으시는데, 율법 학자는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이중 계명을 꼽습니다. 이 대화의 골자는 이웃에 대한 사랑에서 누가 이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당시의 유다인들은 자신들의 이웃과 이웃이 아닌 사람들을 분명히 구별하였습니다. 그러니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 역시 다른 유다인들이나 유다교로 개종한 사람들만 자신의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이해했지, 사마리아 사람들을 포함한 다른 민족들을 사랑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하여 율법 교사가 가지고 있던 이웃의 범위를 확장시켜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웃이란 특정 국적이나 종교를 지닌 사람들이 아니라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입니다. 거기에는 나와 사이가 좋지 않거나 내가 적대시하는 사람들도 포함해야 합니다. 그것을 이해할 때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 역시 이해할 수 있습니다.그리고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사랑은 마음에만 간직하는 사랑이 아니라 실천에 옮기는 사랑입니다. 율법 교사에게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사랑의 기본은 연민입니다. 그 사람의 아픔과 필요에 마음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 가엾이 여기는 마음은 곧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느끼시는 마음이고, 또 우리가 서로에게 가지기를 원하시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들도 자비를 입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신학생 때 산에 갔던 기억이 하나 있습니다. 방학을 이용해서 동창들과 함께 산에 갔습니다. 전날 산 밑의 민박집에서 늦은 시간까지 술을 마시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지요. 그래서 다음날 산에 오르는데 몸이 너무나도 힘들었습니다. 더군다나 처음 가보는 산이었기에 코스가 어떤지 또 얼마나 걸릴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더 힘들게만 느껴지더군요. 더군다나 비까지 주룩주룩 내리는 것입니다.

함께 갔던 일행 중 몇 명이 비가 와서 위험하니 다시 내려가자고 주장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산에서 내려오던 등산객들을 만났습니다. 내려가자 그냥 올라가자며 우왕좌왕하는 우리를 향해 이런 말씀을 해주십니다.

“조금만 힘내서 올라가. 정상이 그리 멀지 않아. 만약 지금 포기하면 후회할 거야.”

이 말씀을 듣고 우리는 정상까지 올라갔습니다. 정상이 그리 멀지 않다는 등산객의 말과는 달리 2시간 이상을 올라갔기에 계속해서 투덜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정상에 오른 순간, 포기했다면 분명히 후회했을 것이라고 모두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기쁜 마음을 가지고서 웃으며 하산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것에 대해 포기하려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특히 포기로 인해 후회할 수 있다면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사랑의 실천입니다.

율법 교사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사실 이들은 정답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있느냐는 질문에,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곧바로 이야기하지요. 문제는 그들은 주님의 말씀처럼 살지 못했던 것입니다.

누가 이웃이냐는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말씀을 전해줍니다.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사람을 사제, 레위인은 길 반대쪽으로 지나갑니다. 그들은 율법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신만의 이유를 내세우면서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반해서 이웃을 향해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은 어떠했습니까? 그는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했고, 이렇게 주님께서는 자비를 베푼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사랑의 실천으로 내게 안 좋은 일로 다가오는 것으로 투덜거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렇게 자비를 베푼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면 먼 훗날 주님 앞에서 후회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신뢰가 만들어지는 데 평생의 시간이 걸리지만, 신뢰가 무너지는 데는 5분이 걸리지 않는다(워런 버핏).



막말 금지.

가수 겸 배우 이승기 씨가 어느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내가 결정적인 사고 때문에 ‘바르고 착하게 살 필요가 있다.’라고 생각하게 된 계기가 뭘까?”라는 문제를 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답을 이렇게 말하더군요.

“상대방 차를 향해 막말했는데 알고 보니 어머니 차였다.”

차가 밀리고 있는 상황에서 약속 시각에 늦을까 봐 급하고 초조해지다 보니 앞의 차가 누구인지 생각하지 않고 막말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막말의 대상자가 어머니인 것이었지요.

아무리 못된 자식이라 해도 어머니에게 함부로 막말하지 않습니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서 함부로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제대로 보지 않고 또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는 성급함과 경솔함으로 인해 함부로 말을 하게 됩니다. 특히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어지고 숨을 받아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향한 내 막말이 그 안에 계신 하느님을 향한 막말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이렇게 함부로 막말하는 사람이 하느님께 청원 기도를 바치고 있다는 점을 떠올려 보십시오. 도움을 달라고, 힘을 달라고,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기도를 바친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 말을 점검해 봐야 합니다. 사랑의 말, 힘과 용기를 주는 말을 할 수 있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인간은 어차피 휘둘리는 존재다

-전삼용신부-


 축음기 영사기 전구 등 무려 1천3백건이 넘는 발명품을 내놓은 에디슨(1847~1931)도 생애의 말년에는 특유의 외고집으로 인해 실패를 거듭하다가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그는 “몸은 머리를 여기 저기 옮겨주는 데만 필요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할 정도로 스포츠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70세가 넘어서도 잠자는 시간이 하루 4시간에서 5시간으로 늘었을 뿐 여전히 일에 열중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축음기 회사에 과도한 애착을 느낀 나머지 라디오방송이나 전기식 레코드플레이어의 시장성을 무시한 것이 그의 실책이었습니다. 에디슨은 “사람들은 라디오 방송국이 일방적으로 내보내는 프로그램에 곧 싫증내고 우리 회사의 축음기로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골라듣고 싶어 할 것.”이라고 우겼습니다.

      세 아들이 아버지를 설득하다 끝내 고집을 꺾지 않자 몰래 전기식 레코드플레이어 제조에 나섰다가 에디슨의 격분을 사기도 했습니다. 70대 후반이 돼서야 에디슨은 주변의 충고를 받아들여 축음기 생산을 그만두고 라디오 제조에 나섰으나 2년 후 2백만 달러의 손해를 보고 공장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80세가 되자 에디슨은 이번에는 고무 제조에 호기심을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내에 자생하는 식물들에서 고무성분을 추출하는 일이었습니다. 에디슨의 부인은 회고하기를 “그는 고무 생각만 하고 고무 이야기만 하고 고무 꿈을 꾸었다.”고 했으며 “미국은 5년 내에 고무생산국이 된다.”고 자신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만든 고무는 천연 고무에 비해 제조과정이 복잡하고 무엇보다도 질이 형편없었습니다. 무엇하나 제대로 풀리는 일 없이 노년을 보내던 에디슨은 결국 1931년 10월 18일 향년 84세로 눈을 감았습니다.

      유튜브에서 요즘 조회수가 굉장히 높은 것들의 제목들을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나답게 사는 게 정답이다”, “자신의 주인으로 사는 법”, “자신의 욕망에 집중하라” 등의 제목이었습니다. 나의 인생을 영화라 생각하면 내가 주인공도 되고 감독도 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야하는 이유는 나답지 않으면 타인이 원하는 대로 휘둘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휘둘리지 않기 위해 자기 자신을 믿어버리면 자기 자신에게 휘둘리게 됩니다. 에디슨의 자기 자신을 절대적으로 믿는 모습이 꼭 옳아 보이지 않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자신을 믿으라. 자기의 주인은 자기라는 말을 절대 믿지 마십시오. 어떤 피조물도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정할 수 없습니다.

      사탄교의 경전의 제1계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탄을 숭배하라.”가 아닙니다. “네 뜻대로 하라.”입니다. 내 뜻대로 하면 사탄이 됩니다. 내 자아가 뱀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자기 주인이 되려고 하면 누구도 그 사람의 고집을 흔들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결국 자기 생각에 지배당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하느님의 바람에 흔들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적어도 율법학자는 자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아니라 창조자에 의해 지배당해야 함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핵심인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율법은 안다고 지켜지지 않습니다. 구약의 율법에 묶여있는 율법학자는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이렇게 물을 때 드디어 신약으로 넘어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신 다음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하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나의 이웃인지 찾지 말고 내가 그들의 이웃이 되어주라는 것입니다.

      율법학자는 사랑을 계명으로만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을 ‘소명’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소명은 의무입니다. 사랑은 나의 주체로 선택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시키니 하는 것입니다. 사랑에 지배당하고 사랑에 흔들려야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사람은 자아에 휘둘리던지, 외부의 것들에 휘둘리던지, 창조자에 의해 휘둘리던지 셋 중의 하나를 선택합니다. 나에 휘둘리면 모든 행위의 주체는 내가 되고 내가 하는 게 옳은 것이 됩니다. 그러다가는 고집불통이 되고 나중엔 사탄이 됩니다. 그렇다고 남에게 휘둘리면 자신에 대한 책임을 남에게 전가시키는 것입니다. 역시 사탄이 됩니다. 반면 하느님에 의해 휘둘리면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 소명을 받습니다. 사랑하기 싫어도 사랑해야합니다. 그러면 하느님이 됩니다.

      사람은 들에 핀 꽃처럼 어차피 흔들려야 하는 존재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것이 잘 하는 것이 아니라, 잘 흔들리는 것이 잘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바람에 우리 몸을 맡깁시다.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신학교에서는 매일 저녁 715분에 묵주기도를 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하기도 하고, 같은 본당 출신 신학생들과 함께하기도 하고, 교구 조모임 신학생들과 함께하기도 했습니다. 학교에 묵주기도 하는 소리가 은은하게 들리면 악의 세력은 감히 접근하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본당에서 단체로 성지순례를 하거나, 야유회를 갈 때면 버스 안에서 묵주기도를 했습니다. 안전한 운행을 위해서,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묵주기도를 하면 마음이 편해지고, 하루의 여정이 즐거웠습니다. 본당 신부님과 함께 산책하고, 묵주기도를 같이 했던 적이 있습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신자분들은 그런 저희의 모습이 너무 좋게 보였다고 합니다.

 

처음 본당신부가 되었을 때입니다. 본당에서 서울의 모임에 가려면 차로 1시간은 넘게 가야 했습니다. 차에서 음악을 듣기도 하지만, 묵주기도를 할 때도 있습니다. 한번은 묵주를 찾으려고 차를 잠시 세웠습니다. 그러자 커다란 트럭이 앞으로 지나갔습니다. 만약에 묵주를 찾으려고 차를 세우지 않았다면 큰 사고가 날 뻔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묵주기도를 한 것도 아니고, 묵주기도를 하려고 잠시 차를 세웠는데도 저를 큰 위험에서 구해 주셨습니다. 매일 집 앞의 공원으로 산책하면서 묵주를 들고 갑니다. 한국에서는 쑥스럽기도 하고, 유난을 떠는 것 같아서 묵주를 들기가 어색했는데 여기서는 좋습니다. 아는 사람도 없고, 편하게 묵주를 드니 기분도 좋습니다. 10월은 로사리오 성월입니다. 오늘은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오늘 하루 묵주를 들고 가족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공동체를 위해서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이웃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을 보게 됩니다. 율법 학자는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라고 이야기합니다. 주체는 나입니다. 나와 관계가 있는 사람, 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 내가 도움을 받았던 사람, 나에게 필요한 사람이 이웃이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갑니다. 내 가족, 나의 물건, 나의 재물, 나의 업적이 중요합니다. 나와 상관없는 일에는 커다란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었습니까?’라고 말씀하십니다. 주체는 지금 강도당한 사람입니다. 우리 중에 가장 가난한 사람, 가장 헐벗은 사람, 가장 굶주린 사람이 이웃이 됩니다.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없는 사람,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 이웃이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관점입니다.

 

요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니네베의 사람은 요나와 상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요나의 이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멀리 도망가려 하였습니다. 요나만 도망가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도 그렇게 도망가려 하는 건 아닐까요?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억지로가 아니라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다는 얼굴로, 신나게 묵주 기도를 바치십시오!
-양승국신부-


한 시골 본당 신부님의 묵주 기도 사랑에 큰 존경을 보냅니다. 언제나 본당을 지키시며, 틈만 나면 본당 성모상 앞을 서성이십니다. 뭐하시나 가만히 보면, 이리저리 산책하시면서 묵주 기도를 바치십니다. 뒷짐진 손엔 언제나 커다란 묵주가 들려져있습니다.

그런 멋진 신부님의 모습에, 본당 신자들뿐 아니라, 성당 옆을 지나가는 비신자들도 큰 감동을 받습니다. 묵주 기도하시는 신부님 모습, 그 자체가 훌륭한 영적 지도요, 전교가 되는 셈입니다.

뿐만 아니라 신부님께서는 짬짬이 묵주를 손수 제작하십니다. 실력이 만만치 않습니다. 모양도 예쁘고 튼튼합니다. 주머니 속에는 언제나 묵주가 수북합니다. 만나는 신자들에게 선물로 주십니다.

신부님께서는 단 한 번도 신자들에게 묵주 기도 많이 바치라고 강요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묵주 기도에 대한 사랑이 극진하신 신부님을 따라 신자들 역시 묵주 기도의 맛에 흠뻑 빠져 살아갑니다.

저희 살레시안들은 저녁 식사가 끝난 후 다들 운동장으로 뛰어나갑니다. 아이들과 어울려 한바탕 신나게 축구시합을 합니다. 운동 시간이 끝나면 모두의 발길은 자연스레 성모상 앞으로 향합니다.

누군가의 선창으로 천천히 운동장을 걸으면서 묵주 기도를 바칩니다. 살레시안들과 청소년들이 한 무리가 되어 우렁찬 목소리로 묵주 기도를 바치는 모습은 정말이지 장관입니다. 묵주 기도 중에 고백성사가 필요한 아이들은 신부님들의 팔을 슬며시 끌어당깁니다.

묵주 기도가 끝날 무렵 모두는 다시 성모상 앞으로 다가가 성모님 성가를 한곡 부르지요. 마지막 순서로 원장 신부님께서 앞으로 나가셔서, 짧지만 따뜻한 밤인사를 건넵니다.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전세계 돈보스코 오라토리오마다 똑같이 펼쳐지는 감동적인 저녁 행사입니다. 살레시안들은 성모님께서 당신 사랑의 망토로 공동체와 아이들 모두를 따뜻하게 감싸주시기를 간절히 청하며 묵주 기도를 바칩니다.

오늘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묵주 기도는 수준 낮은 기도가 절대로 아닙니다. 초보 신자들만을 위한 기도 역시 아닙니다. 숙제처럼 빨리 빨리 해치울 기도가 아닙니다. 잡념 속에 성모송만 되풀이하는 기도도 아닙니다. 보고를 위해 초스피드로 끝내야 할 기도도 아닙니다.

묵주 기도는 기도 중에 기도입니다. 성모님과 함께 예수님의 일생을 묵상하는 묵상 기도요, 더 나아가서 관상 기도입니다. 입으로는 성모송을 외지만 정신과 마음으로는 각 단의 신비에 걸맞는 예수님의 생애를 천천히 묵상하는 영적 훈련을 반복해보시면 좋겠습니다.

성인성녀들은 다들 성모님을 각별히 사랑하고 공경했습니다. 그 사랑과 공경의 표시로 묵주 기도를 극진히 사랑했습니다.

오상의 비오 신부님의 경우 묵주기도를 얼마나 좋아하셨던지, 주변사람들은 그를 ‘살아있는 묵주’라고 불렀습니다. 살아 생전 그는 언제나 묵주를 손에 들고 다녔습니다. 늘 묵주 기도 바치는 모습을 세상 사람들 앞에 공적으로 드러냄으로서 묵주 기도를 전파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영적 지도자에게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저와 싸우는 악령의 힘은 엄청납니다. 이 전투에서 가장 효과적인 무기는 바로 묵주 기도입니다.”

성모님을 얼마나 사랑하셨던지 ‘성모님의 교황’이란 애칭까지 얻으셨던 요한 23세 교황님은 묵주 기도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통해, 성모님을 향한 사랑을 드러냈습니다. 묵주 기도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묵주 기도는 기도의 최고 수단입니다. 묵주 기도는 주님의 육화와 구원의 드라마를 우리 마음에 제공합니다. 저는 제가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이신 동정녀 성모 마리아에게 매일 저녁마다 묵주 기도를 바칠 것을 약속했고 평생토록 실천했습니다.”

저 역시 요즘 묵주 기도의 맛에 푹 빠져 살아갑니다. 저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 좋아하는 장소에서 묵주기도를 바칩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해질 무렵이면, 수녀원 뒷길이나 강가 산책로, 산사 초입 같이 편안한 길을 천천히 걸어가면서 묵주기도를 바칩니다.

전에는 하루에 한번의 신비만 바쳤는데, 요즘은 가급적 환희의 신비, 빛의 신비, 고통의 신비, 영광의 신비, 네 신비를 다 묵상하면서 묵주기도를 바칩니다. 총 소요 시간은 한 시간 정도입니다.

때로 지향을 두고 바칠 때도 있지만, 주로 특별한 지향 없이 성모님과 함께 산책하면서, 예수님의 일생을 묵상하는 마음으로 묵주 기도를 바칩니다. 하루 일과 중에 가장 편안하고 행복한 시간입니다.

매일 네 신비를 다 묵상하면서 묵주기도를 바치니, 좋은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자연스레 하루 한번 예수님의 일생, 삶과 죽음을 묵상하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성모님, 예수님과 더 가까워지는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성모님과 예수님께서 내 인생에 아주 가까이 동행하고 계심을 실감하게 됩니다.

묵주 기도 성월을 맞아, 조금 천천히 묵주 기도를 바쳐보시라고 초대합니다. 가급적 네 신비 모두를 묵상해보시기를 초대합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큰 은혜를 받으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묵주 기도를 억지로 바치지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세상 가장 괴로운 얼굴로 묵주 기도를 바치지 마시길 바랍니다.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다는 얼굴로, 기쁜 마음으로, 신나게 묵주 기도를 바쳐보시면 좋겠습니다.


이웃이 되어준 사람

 -반영억신부-

 

‘이웃사촌’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웃사람끼리 서로 돕고 의좋게 지내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아무리 가까운 친척도 멀리 떨어져 있으면 이웃사촌만도 못하다(잠언27,10)고 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실제로 표현되어 나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잠언에는 네 친구와 아버지의 친구를 저버리지 말고 불행할 때 형제의 집으로 가지마라. 가까운 이웃이 먼 형제보다 낫다(잠언27,10).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이가 이웃입니다.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주려는 마음이 불타오르기를 희망합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한 비유를 들어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초주검이 되었는데 마침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는 피해 지나가 버렸고 또 레위인도 지나갔는데 그도 역시 길 반대편으로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상처를 치료해 주고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준 사람입니까?’하고 되물었습니다. 율법교사가 자신 있게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루카10,37) 하고 대답하였고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10,37).하고 이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누가 이웃이며 이웃이 아닌지에 대해서 구별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강도를 당한 사람을 남으로 보았고 이방인 사마리아 사람에게는 남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어디 있느냐에 따라 행동이 다르게 표현된 것입니다. 마음에 품은 것이 밖으로 나오게 마련입니다. 사실 “우리가 병들고 궁핍한 사람을 만지는 것은 곧 고통 받는 예수님의 몸을 만지는 것입니다”(마더데레사). 그리고 ‘누가 나의 이웃인가?’를 묻는 사람에게는 이웃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주려고 마음을 먹을 때 이웃이 보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다 이웃입니다. 누가 내 이웃인가를 찾지 말고 내가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주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의' 이웃이 아니라, '이웃이 되어준' 사람이 누구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까지 미워하는 셈이며 멸시하는 사람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에 의하면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의 눈이 맑아져 하느님을 뵈올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그저 '어떤 사실을 보는 사람'으로 머물지 않고 '예수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송영진신부-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루카 10,25-28)”

여기서 “그렇게 하여라.” 라는 예수님 말씀은,
“알고 있는 것으로만 그치지 말고, 알고 있는 그대로 실천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사랑이 무엇인지, 사랑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사랑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신앙인은 ‘온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계명이라는 것,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은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고, 그것을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라는 말씀은,
“네 이웃은 곧 너 자신이니, 네가 너 자신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로 해석됩니다.
‘이웃’은 곧 ‘나 자신’입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일은 따로 이유를 말할 필요가 없는 일이고,
따로 한계를 정하는 일도 아닙니다.
그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이유를 생각할 필요 없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고,
한계를 정해 놓지 말고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루카 10,29).”
여기서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라는 말은,
“자기가 의인인 척 하면서”,
또는 “자기가 사랑 실천을 잘하고 있는 척 하면서” 라는 뜻입니다.
그 율법 교사가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라고 물은 것은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니라, 논쟁을 하려고 물은 것입니다.
그는 만일에 예수님의 답변에 조금이라도 빈틈이 보이면
그것에 대해서 시비를 걸 생각으로 그런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 다음에 그 율법 교사에게,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라고 물으십니다(루카 10,36).
예수님의 질문은, “누가 나의 이웃인가?” 라고 묻지 말고, “나는 누구의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하는가?”를 생각하라는 가르침인데, 모든 사람이 다 이웃이고,
모든 사람을 다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라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는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루카 10,37).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라는 말씀도 역시 ‘실천’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사랑한다고 머릿속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말로만 사랑을 말하는 것도 사랑이 아닙니다.
행동으로, ‘온 삶’으로 실천할 때 비로소 사랑이 됩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인은,
계명에 대해서, 또 사랑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고,
그것을 말로 설명하는 것도 잘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은 잘 알면서도 실천하지는 않은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알고 있는 것들은 아무런 쓸모가 없는 헛된 지식일 뿐입니다.
헛된 지식으로는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알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 그대로 실천한 사람입니다.
그의 사랑 실천은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일의 대표적인 모범이고,
온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의 모범이기도 합니다.
(그 사마리아인이 성경도 모르고, 계명도 모르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또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거나 설명을 못하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랑 실천은 그가 그런 것들을 아주 잘 알고 있는 학자들보다도
더 깊은 ‘앎’의 단계에 도달해 있음을 나타냅니다.
머리로만 아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고,
삶으로 실천하는 것만이 참으로 아는 것입니다.)

실천을 강조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설명하는 말이 ‘야고보 서간’에 나옵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4-17).”
“여러분도 보다시피, 사람은 믿음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의롭게 됩니다(야고 2,24).”
(야고보서 저자가 말하는 것은,
‘사랑 실천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만일에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인이
강도당해서 초주검이 된 사람을 발견하고서 그냥 지나가지는 않고,
그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길에 누워 있지만 말고 어서 빨리 집으로 가서
잘 치료하시오.” 라고 말했다면? 그것을 관심과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야고보서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실천 없는 사랑은, 즉 말로만 하는 사랑은
‘죽은 사랑’인데, ‘죽은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랑한다.’는 말을 너무나도 많이 남발하면서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 대해서는 소극적일 때가 많습니다.

(몸이 아파서 꼼짝도 못하고 누워 있는 사람에게,
“이렇게 누워 있지만 말고 빨리 병원에 좀 가라.” 라고
말하는 경우가 실제로 많습니다.
병원에 데리고 갈 생각은 왜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안 하는 것인지?
그 아픈 사람이 가족인 경우에도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 그치는 일들이 있습니다.
설마 실제로 그런 일이 있을까? 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 수도 있는데,
그런 일을 당해 본 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서러운 일인지를 잘 압니다.
아픈 것도 서러운데,
병원에 가지 않는다고 구박하는 것 같은 말을 듣는 것은 더 서러운 일입니다.) 


아무 쓸데없는 적대감

-이종훈신부-

운동경기를 할 때는 서로 다른 운동복을 입어야 경기하기 편하다. 나와 다른 운동복을 입은 사람들은 나의 적이 아니다. 그들은 운동놀이 친구이다. 그런 마음이어야 경기가 끝나고 승자와 패자가 서로 포옹하며 축하하고 위로하는 멋진 모습을 보여주며 끝까지 관중을 감동시킬 수 있다. 그런 멋진 모습은 상대편을 싸워 눌러야 할 적으로 여겼던 사람에게 전혀 다른 세상을 보여주며 자연스럽게 그 세상으로 한 발짝 들여놓게 한다. 그들이 보여 준 그 세상은 그냥 보기만 하고는 발길을 돌릴 수는 없는 절대적인 매력을 지녔다. 그들은 그 세상을 관람이 아니라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요즘 일본과 사이가 많이 안 좋다. 기승전조국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그를 두고 나라가 둘로 쪼개질 것 같다. 상대방을 비방하고 욕함이 일상이 됐다고 느낄 정도다. 하지만 일본사람과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저 사람들은 나의 적이 아니다. 적대감은 정의를 가장한 위선으로 나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한다. 예수님은 자신을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며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분부하셨다. 그리고 당신이 먼저 그렇게 하셨고, 당신이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다. 지키기 어렵고 큰 도전이지만 자신을 사랑하고 영원히 살기를 원한다면 꼭 지켜야 할 계명이다.

 

그를 좋아하면 사랑하기 쉽지만 사랑한다고 모두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더 많이 사랑하면 미워하던 사람도 좋아하게 될 것 같기는 하다. 예수님 시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도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했다. 그러나 원수는 미워했다. 그것을 하느님의 계명이라고 믿고 있었다(마태 5,43). 그 계명을 잘 지키려고 이웃과 원수들을 구분해놓았기 때문에 그 때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질문했던 그 율법학자는 그것을 잘 지키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던 것 같다(루카 10,29).

 

원수까지 사랑하는 세상은 다른 세상이다. 그곳에 미움 속임수 다툼 폭력이 끼어들어 올 수 없다. 예수님이 그 세상을 몸소 보여주셨다. 사람들은 그분에게 빠져들었다. 그분의 말씀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 때문이었다.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햇빛을 비추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시는 하느님을 보여주셨다(마태 5,45). 당신에게 못된 짓을 한 사람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셨다(루카 23,24). 그분만이 하느님을 알고 그 세상에서 사셨으니 그분을 이상하고 위험한 사람으로 여김도 이해할만 하다. 하지만 그분의 말씀과 삶에서 느끼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까지 부정한다면 그것은 억지다. 한낱 운동경기 끝에도 그런 감동을 받는데 한 사람이 전 생애를 바쳐 그렇게 살았는데도 그것을 믿지 못한다면 하느님도 어쩌실 수 없을 거다.

 

주 예수님, 주님의 계명은 달콤하고 매력적이지만 막상 실천하려고 하면 그 계명이 그리 만만치 않음을 즉시 알게 됩니다. 저도 모르게 생겨나는 적대감에 시달려 쓸데없이 시간과 힘만 낭비하는 적이 많습니다. 저의 사정이 이러니 언제나 용서하신다고 약속하셨겠지요. 주님의 그 약속과 계명이 영원한 생명을 받는 유일한 길임을 믿고 사랑합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하느님의 자비를 전해주시는 어머니의 눈을 바라보며 위로를 받고 용기 내어 주님의 계명 길을 다시 따라갑니다. 이 마음이 어제보다 조금 더 오래가게 도와주소서. 아멘.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10,25-37: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율법 교사는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 했으나, 결국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25) 여기서는 율법 학자지만 법조문만 잘 알 뿐 그 정신은 모르는 자들임을 알려준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율법의 첫 줄부터 아무 것도 모른다고 하신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26) 율법 교사는 계명을 말씀드렸다.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그의 속마음을 아시고 꾸짖으시며 벌을 주시듯이 말씀하신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28) 그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이웃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29)라고 묻는다. 그리스도를 모르면 율법도 모른다. 율법은 올바른 것을 가르치는데, 그것을 모르고 있다면 어떻게 율법을 알겠는가?

 

주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율법을 지키고자 하여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줄 준비가 된 사람만이 예리코로 내려가던 사람의 이웃이었다고 가르치신다.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36) 사제도 레위인도 아니었다. 율법 교사가 대답한 것처럼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37)이 그의 이웃이었다.

 

여기에 나오는 사마리아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34)이라고 한다. 우리를 치유하시는 의사는 필요한 치료제를 많이 가지고 있다. 그분의 말씀이 치료제이다. 어떤 말씀은 상처를 싸매고, 어떤 말씀은 기름을 바르고 어떤 말씀은 포도주를 붓는다. 그분은 그에게 다가가 상처를 싸매주고 기름과 포도주를 발라주고 노새에 태우고 그의 짐을 대신 져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우리에게도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37) 말씀하신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드리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35) ‘이튿날은 바로 강도를 맞은 사람이 구원받은 날로 부활의 날이다. 그리고 두 데나리온은 하느님의 두 계약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아들이 상처 입은 값으로 우리가 치유되었다. 그 고귀한 피가 우리를 구원하여 죽음의 아픔을 면하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강도를 만나 매 맞고 반죽음 상태로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도와준 이가 당신이심을 알려주셨다. 우리의 상처를 보살펴 주는 이보다 더 가까운 이는 없다. 그러니 그분은 우리 주님으로 사랑하고 우리 이웃으로 사랑하자.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도 사랑하여야 한다. 하나 된 몸 안에서 다른 어려운 지체들을 사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오상선신부-


오늘의 독서와 복음은 성경의 여러 내용 중에서도 재미와 흥미, 의미를 두루 갖춘 일화들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 내재된 다양한 교훈들을 비집고 오늘은 제게 "방향성"에 대한 말씀들이 다가오셨습니다.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29)
율법 학자는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또 제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질문을 던집니다. 자기 본위의 의도를 품은, 순수성이 결여된 질문들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속셈이 빤히 보이는 율법 학자의 접근을 밀쳐내지 않으시고 우리가 잘 아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려 주십니다.

"어떤 사제가 ...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루카 10,31-32).
강도 만나 초주검이 된 이를 보고 두 사람이 반대쪽으로 발길을 돌립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나 도움이 필요한 이에게서 멀어지는 방향성을 선택한 것은 분명하지요.

십분 양보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다면, 전례 봉사를 위해서 죽은 몸에 닿아 불결한 상태가 되면 곤란하니까 그랬을 거라고 두둔해 주고 싶지만, 실상 사제나 레위인은 예리고로 "내려가는" 길이었다고 서술하니 아마도 예루살렘에서 이미 예식을 마치고 난 뒤일 것 같아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어떤 사마리아인은 ... 그를 보고서는 ... 그에게 다가가"(루카 10,33-34).
먼저 예수님은 유다인이 멸시하는 사마리아인을 등장시켜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는 조건에서 민족적 순혈주의를 제거해 버리십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는 피의 순수성이나 신분적 자격 요건이 아니라 이웃을 향해 다가가는 방향성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방향성은 하느님께서 마음에 일으켜 주신 "가엾은 마음"(루카 10,33)에 순종함으로써 시작됩니다.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루카 10,35).
강도 당한 이를 정성껏 돌보아 주었지만, 마냥 이곳에 머무를 수만은 없었던 그가 여관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주며 부탁합니다. 추가 비용이 들면 돌아올 때 갚겠다는 약속까지 하면서요. 사마리아인은 다친 이가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단지 그가 상처 입고 죽어간다는 사실, 인간 존엄성이 훼손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정성과 시간, 재산을 들여 그를 돌봅니다. 사마리아인은 여관 주인의 방향성까지도 강도 만난 이에게로 향하게 만듭니다. 방만 빌려주면 되는 여관 주인에게 관심과 돌봄, 헌신의 몫을 나누어 줌으로써 그 역시 "이웃"의 자리로 초대하는 것이지요.

제1독서에서는 요나 예언자에게 니네베로 가 당신 뜻을 전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내립니다.

"주님을 피하여"(요나 1,3.10).
그런데 그는 주님이 원하시는 방향의 반대쪽으로 몸을 돌립니다. 주님을 피하는 것은 그분 말씀을 듣지 않겠다는 거부 의사 표시로, 결국 주님이 구원하시려는 니네베를 외면한다는 뜻입니다. 요나는 죄악으로 상처 입고 죽어가는 이방 도시 니네베 사람들의 구원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을 이웃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지요.

"선장이 그에게 다가가 말하였다"(요나 1,6).
폭풍을 만나 모두들 울부짖는데 천연덕스럽게 잠에 빠진 요나에게 선장이 다가갑니다. 이 다가감으로 폭풍의 원인이 밝혀지고 요나는 하느님께서 설정하신 궤도로 돌아올 기회를 얻게 되지요. 선장의 관심과 다가감은 비록 당장의 위기 때문이기는 하나 결국 모두를 구하게 됩니다. 배에 탄 이들과 요나, 니네베 사람들까지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큰 물고기를 시켜 요나를 삼키게 하셨다"(요나 2,1).
자청해 바다에 내던져진 요나에게 이번에는 큰 물고기가 다가갑니다. 그를 삼키고 분해하고 흡수해서 제 살과 피로 만들려는 의도가 아니라 주님의 명령에 따라 그를 잠시 품고 있기 위해서입니다. 큰 물고기 역시 이 순간 요나의 이웃이 되어 준 것입니다. 사흘 후 육지로 그를 뱉어 내어 요나가 자기 방향성을 찾아 나아가게 될 때까지 주님께서 큰 물고기를 요나에게 허락하신 것이지요.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29).
이제 우리는 율법 학자의 질문에 답을 찾았습니다. 바로 방향성이 이웃을 결정하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하느님께서 일으켜 주시는 "가엾은 마음"에 순종해 도움이 필요한 이에게 다가가는 이가 이웃입니다. 이 방향성과 접근성은 물리적으로 직접 표출되어야 하는 것만이 아니라, 간접적으로나마 심적, 정서적, 영적으로 표현될 수도 있습니다.

강도 만난 이처럼 당장 시급하게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이웃도 있고, 따뜻한 인사와 관심으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이웃도 있습니다. 묵묵한 동행과 지켜봄이 필요한 이웃도 있고, 먼 발치에서 기도로 격려하고 응원해 줄 이웃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웃은 일방적이 아닌 상호적 개념이고 관계이기에 내가 다가가고 내어준 만큼 나 역시 받게 됩니다. 이웃이 되어줌으로써 이웃을 얻는 것이니까요.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
"가서"! 도움이 필요한 이에게 나아가고, 다가가라고 하십니다. 이웃이 누구인지 알았다면 "가엾은 마음"(루카 10,33)과 "자비"(루카 10,37)를 품고 다가가서 이웃이 되어 주라는 명령입니다. 이 발걸음은 도움이 필요한 이(대상)와 도움을 주는 나(주체) 뿐만 아니라 타인도 구원 행위에 참여시키게 됩니다. 이웃이 확대되면서 선이 확장됩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가서 그렇게 합시다! 오늘 우리가 향하는 단 한 명의 이웃이 내게는 한 명이지만 우리가 모이면 백 명이 되고, 천 명이 되고, 온 세상 모든 인류까지 확장될 수 있습니다. "Just do it!"

우리가 찾아가야 할 이웃은? 

-김찬선신부-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오늘 복음은 저를 항상 찌르는 말씀입니다.
제가 청원장을 할 때 제가 이 비유의 사제와 똑같은 짓을 했기 때문입니다.

청원형제들과 성심원에서 봉사하고 진주 양로원으로 봉사하러 가던 중
저희 앞에 가던 오토바이 운전자가 유조차에 깔려 죽는 사고 났을 때
저는 너무도 끔찍해 그냥 그 도망쳐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도망치고 한 10분이 지나자 놀란 것이 진정이 되면서
저는 제가 뭔 짓을 했는지, 제가 가르치는 형제들 앞에서 뭔 짓을 했는지
깨닫게 되곤 너무 부끄러워 악 표양에 대해 형제들에게 용서를 청했습니다.

그날 밤 성체조배를 하며 성찰을 하는데 제 형이 그 오토바이 운전자였다면
제가 끔찍하다고 도망쳤을까 반성이 되었고,
아니 유조차 운전자였을지라도 도망치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을 하면할수록 어떤 끔찍한 일도 끔찍하지 않고,
어떤 고통스러운 일도 피하지 않고 감수하고 감당할 테고,
반대로 사랑이 없으면 아주 조그만 고통도 외면하고 피할 것입니다.

이 복음에 대해 청원자들에게 강론할 때 입으로는 고통을 함께 하는 것이
진정한 이웃이라고 하였지만 실제로는 나와 별 상관없는 이웃은
고통을 함께 할 만큼 사랑치 않음이 명백하게 드러난 이 사건이 있고 난 뒤
내 이웃은 어디까지고, 내 사랑은 어디까지인지 깊이 성찰케 되었습니다.

아무튼 인간은 사랑이 없을 때 자기중심적이게 되어
누구나 자기가 좋은 것은 하고 싫은 것은 피하기 마련인데
다만 그 싫은 것이 사람에 따라 또는 때에 따라 다를 뿐입니다.

오늘 독서의 요나의 경우는 그 싫은 것이 이방인인 니네베 사람들이지요.
자기 동족이 아닌 니네베 사람들이 싫기에 그들이 회개하여
하느님의 용서를 받게 되는 것이 요나에게는 너무도 싫었고
그래서 니네베로 가 회개를 선포하라는 명령을 피해 도망칩니다.v
오늘 복음의 비유에 나오는 사제는 강도당한 사람이 동족임에도
상관없다고 생각했기에 그를 위해 시간과 돈을 뺏기기 싫었고,
그래서 사제임에도 매정하게 피해 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저는 피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이고,
지금 제가 찾아가야 할 곳이 어디이고 이웃이 누구일까요?

지금은 태풍 피해를 입은 곳이고 그곳 분들입니다.
그래서 강원도로 달려가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우리 정동 수도원 일도 형제들의 일손을 많이 필요로 하다고
공사를 책임진 형제가 형제들 모두에게 S.O.S를 친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형제들도 이 일을 하는데 지금까지 정동에서 일하던 저는
더더욱 이 일을 해야 마땅하다 할 수 있고 그래서
어떻게 할까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는데 결국 결심을 하였습니다.

수도원 일이 더 시급한가, 수재민들을 위한 일이 더 시급한가 생각해보니
수재민들을 위한 일이 더 시급하다는 판단이 섰고 그래서
수재민들에게 가기로 결심을 한 것입니다.

저는 수도자요 사제이고,빠지지 말아야 할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며,
건강도 하니 마땅히 제가 가야 하겠지요.

그런데 그분들을 위한 간다고 하지만 실은 전에 그 부끄런 짓을 했던
저의 사랑이 또다시 부끄럽지 않기 위한 것이니 저를 위해 가는 것이요,
최후심판 때 주님으로부터 어려움중에 있는 사람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라는 말씀을 듣지 않기 위해 가는 것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10월 9일 연중 제 27주간 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