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5일 연중 제26주간 토요일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루가 10,17-24)
“I give you praise, Father,
Lord of heaven and earth,
for although you have hidden these things
from the wise and the learned
you have revealed them to the childlik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룩 예언자는 유배자들에게 용기를 내라고 하며, 하느님의 위로와 권고를 전한다(제1독서). 일흔두 제자가 돌아와 보고하자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선한 뜻이 이루어졌다고 하시며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일흔두 제자가 복음 전파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와 보고하는 내용을 들려줍니다.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선교 여행 중에 겪은 일들 가운데, 마귀들까지 자신들에게 복종했다는 사실을 기쁨에 차서 보고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고 말씀하십니다.바로 여기에 구마 기적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제자들이 마귀들을 쫓아내었다는 것은 하느님 나라가 이 땅 위에 실현되었기에 악의 권세가 굴복되고, 사람들이 그 권세에서 풀려났다는 것을 뜻합니다.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을 전파하고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의 특권은, 명예나 명성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는 데 있습니다. 모든 것이 내가 바라거나 계획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도 있지만, 복음 전파는 참으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하느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것을 체험할 때가 많습니다.그러면서도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경고 말씀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자신들이 하는 일에 도취되어 그것을 자신의 능력으로 이루어 냈다고 생각할까 염려하십니다. 다른 일들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일을 할 때에도 성취감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겠지만, 성과에만 연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기쁨은 내가 무엇을 이루었을 때가 아니라 실제 생활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며 살아갈 때 얻을 수 있습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그렇다면 자신이 하지 않으려는 일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여기에는 본인의 의지가 필요합니다. 때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고통을 가져다줄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지요.
미워하지 않기, 중독에 빠지지 않기, SNS나 인터넷 하지 않기, 쓸데없이 시간을 소비하지 않기 등등….
이러한 것들은 하지 않기가 쉽지 않습니다. 의지가 없다면 불가능한 것들이지요. 무의식적으로 하는 것과 의지를 세워서 하지 않는 것의 가치는 어떤 것이 더 높을까요? 당연히 의지를 세워서 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높습니다. 따라서 얼마나 의지를 갖고 살아가느냐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가치를 좇아서 살기 위해 굳은 의지를 세우며 살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하고 돌아와서 스승이신 예수님께 보고합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아마 제자들은 자신들 역시 예수님처럼 마귀를 복종시켰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기뻤나 봅니다. 특히 주님의 이름만으로 가능하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면서, 이렇게 힘 있는 분의 제자라는 사실이 뿌듯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시지요.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 10,20)
주님의 이름으로 저절로 마귀를 쫓아낸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자신의 의지를 세워서 하느님의 권능과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지를 세워서 주님을 따르고,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의 삶을 사는 것 모두가 하느님의 권능과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저절로 되는 것만을 쫓으면서 막연한 기쁨을 간직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본인의 의지를 굳게 세워서 주님과 함께 하는 참된 기쁨을 간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열등감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열등감이 오히려 성장의 발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형제님은 어렸을 때부터 몸이 너무나 허약해서 병원을 자기 집 드나들 듯 다녔습니다. 그래서 운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현재 이분은 소위 ‘몸짱’ 소리를 들으면서 건강하게 살고 있습니다.
어떤 자매님은 공부에 대한 열등감이 컸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오르지 않는 성적은 점점 더 자신감을 잃게 했습니다. 어느 날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책 읽는 것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이분은 유명한 작가가 되었습니다.
열등감은 분명 성장의 발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냥 열등감 안에 묻혀 포기하고 좌절하기만 한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업적지향적 삶과 의미지향적 삶
-전삼용신부-
어떤 아이에게 손가락을 빠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부모가 손가락을 빨지 말라고 타이르거나 혼내도 별 효과가 없었습니다. 지쳐버린 아버지가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매일 15분씩 열심히 손가락을 빨아라. 그럼 아빠가 100원 줄게.”
얼마 후 아이의 태도가 돌변했습니다.
“아빠, 나 이제 손가락 빨기 싫어요!”
또 이런 실험도 있습니다. 심리학자 그린과 스턴버그는 초등학교 4, 5학년 어린이들에게 새로 개발된 재밌는 수학게임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아이들은 점점 재미를 붙여 틈만 나면 게임을 즐겼습니다. 10일 뒤쯤 심리학자들은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 재밌지? 지금부터 오래 하는 사람에겐 트로피와 상을 주기로 하마.”
처음엔 아이들이 앞 다투어 더 오래 게임을 하려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이전에 신나서 하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서로 경쟁을 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트로피와 상을 주지 않겠다고 하자 아이들은 게임을 더 이상 하지 않았습니다.
[참조: ‘리듬: 내 안의 부정적 생각 싹 날려버리기’, 김상운, 정신세계사]
어떤 것에 대한 노력을 멈추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힘이 드는 것에 비해 결과가 미약할 때 노력을 멈추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것에 대해 경쟁을 지나치게 많이 하게 되면 에너지가 소진되어 포기하거나 자신을 힘들게 만든 사람에게 보복을 하게 됩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긴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과 힘의 경쟁을 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경쟁에서 이겨서 자신을 증명하려는 사람은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까지도 경쟁상대로 생각하여 모든 것을 잃게 만듭니다.
이런 일이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많이 벌어집니다. 봉사자들이 본당 사제에게 더 잘 보이기 위해 경쟁을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본당 신부님이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더 인정해주는 것 같으면 그 다른 사람도 미워하고 본당 신부도 미워합니다. 너무 힘이 들기 때문입니다. 자존감이 낮은 분들은 대부분 이런 함정에 빠지고 지옥을 경험하며 살게 됩니다. 우리는 경쟁에서 누구보다 앞선다고 기뻐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결국 지옥체험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일흔두 제자들이 예수님께 돌아와 각자 자신이 한 일들을 보고합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사실 자신들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성령의 힘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선교에서까지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려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라고 하시며 그들이 잘 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제자이기 때문에 그리 되는 것임을 일깨워주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결론지어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남들보다 뛰어난 능력을 지녀서 기뻐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다는 것에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선교를 통하여 옵니다. 선교만큼 큰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선교는 성공과 실패에 상관없이 하느님나라에 들어가는 직행버스입니다. 그냥 타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을 통해 자기를 증명하여 기쁘게 하려면 더 많은 선교를 하는 사람, 더 멋진 성당을 짓는 사제, 더 존경받는 신앙인이 되려할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그 일에 싫증을 느끼게 되고 업적주의자로 전락해버립니다. 결국 이도저도 되는 일 없이 지옥의 고통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 하는 일의 성패와 상관없이 그 일 자체가 가치가 있어서 행복할 줄 아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시선의 차이에 따라 두 부류로 나뉩니다. 업적, 혹은 목적지향적 인간과 의미지향적 인간입니다. 그 일을 통해 목적에 다다르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그 일 자체에 의미를 두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는 일 자체에 의미를 두고 성패는 상관하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어떤 자매님이 참으로 마음이 찡하다고 하며 이런 글을 보내왔습니다. 함께 묵상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한여름 우리의 눈을 기쁘게 하는 형형색색의 꽃들은 가지가 성장을 멈췄다는 증거다. 멈추지 않고 계속 자라기만 하면 풍성한 꽃도, 꽃이 진 자리에 달리는 튼실한 열매도 볼 수 없다. 내처 자라기만 하면 하늘에 가까워질 수는 있어도 뿌리로부터 점점 멀어져 결국 에너지가 고갈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무는 스스로 멈춰야 할 때를 잘 안다.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 성장했고, 욕심을 내면 조금 더 클 수 있다는 것도 알지만 어느 순간 약속이라도 한 듯 나무들은 자라기를 멈춘다. 마치 동맹을 맺듯 ‘나도 그만 자랄 테니 너도 그만 자라렴.’ 하고 함께 성장을 멈추고는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결국 나무에게 있어 멈춤은 자신을 위한 약속이면서 동시에 주변 나무들과 맺는 공존의 계약인 셈이다.”
[출처: ‘나는 나무에게 인생을 배웠다’, 우종영, 메이븐]
하늘로 오르려고만 하면 땅이 주는 에너지에서 멀어집니다. 대신 땅에 깊이 뿌리를 내리려고 하면 저절로 높이 올라갑니다. 목적지향적 삶은 그래서 힘이 빠지고 고통스럽습니다. 반면 의미지향적 삶은 항상 현재 하는 일 때문에 결과에 상관없이 기쁘고 평화롭습니다. 업적은 사라지지만 의미는 영원히 남습니다. 의미지향적 삶을 사는 사람의 결과도 그래서 의미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조재형신부-
‘부화뇌동(附和雷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의 행위와 자신의 업적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남들의 판단과 남들의 이야기에 마음이 흔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전에 읽은 글이 떠오릅니다. “나귀를 몰고 가던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아들이 나귀를 타고, 아버지가 나귀를 끌고 갔습니다. 사람들이 ‘저 아들은 불효자구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아버지는 이번에는 아들이 내리고 아버지가 나귀를 탔습니다. 사람들이 ‘둘이 같이 타면 되지 왜 혼자만 타고 가나’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아버지는 이번에는 둘이 같이 나귀를 타고 갔습니다. 사람들은 ‘저 사람들은 나귀가 불쌍하지도 않은가 봐’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아버지는 이번에는 나귀를 아들과 메고 갔습니다. 사람들이 ‘저 사람은 타고 가는 나귀를 메고 가네’라고 말했습니다. 걸어가야 하는 나귀는 결국 몸부림치다 개울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흔히 이런 사람을 일컬어 ‘귀가 얇다.’라고 합니다. 자신의 소신과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론과 언론에 편승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확실하지 않은 것도 남들이 이야기하니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부화뇌동’하는 사람은 참된 신앙인이 되기 어렵습니다. 저 역시도 부화뇌동한 적이 많습니다. 부화뇌동은 책임지지 않으려는 태도이기도 합니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인이 되신 신영복 선생은 화이부동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나 지배하려 하지 않고, 소인은 지배하려 하나 공정하지 못합니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는 각 악기의 소리를 존중합니다. 각 악기가 똑같은 소리를 낸다면 아름다운 음악이 되지 못합니다. 각 악기는 저마다의 소리를 연주해야 합니다. 그러나 각자의 악기는 지휘자의 뜻을 따라 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나침판은 끊임없이 흔들리지만 언제나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릴 수는 있지만 언제나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주변을 보면 화이부동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경청하지만 자신의 신념을 차분하게 이야기합니다. 믿음이 가고,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20년 이상 도시 빈민을 위해 사목하는 동창 신부가 있습니다. 다른 사목을 하는 동창을 존중하고, 경청합니다. 자신의 사목을 드러내거나 내세우지 않습니다.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늘 웃는 모습으로 해야 할 일을 충실하게 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제1 독서는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들려주고 있습니다.
“너희 마음이 하느님을 떠나 방황하였으나 이제는 돌아서서 열 배로 열심히 그분을 찾아야 한다. 그러면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신 그분께서 너희를 구원하시고 너희에게 영원한 기쁨을 안겨 주시리라.” 부화뇌동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그리고 오늘 영송체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 당신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저는 그 말씀에 희망을 두었나이다. 당신 말씀 고통 속에서도 위로가 되나이다.”

너희 마음이 하느님을 떠나 방황하였으나 이제는 돌아서서 열 배로 열심히 그분을 찾아야 한다!
-양승국신부-
구약 성경 안에는 여러 예언자들이 등장합니다. 말마디 그대로 해석하면, 예언자(豫言者)란 노스트라다무스처럼 미래의 일을 미리 예측하고 알아맞추는 사람이지만, 사실 성경에 등장하는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백성들에게 전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언자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그분을 대신해서 백성들에게 말씀은 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사람이었으며, 동시에 성령의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하느님 말씀에 자신의 청춘, 일생, 삶과 죽음, 모든 것을 건 ‘말씀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말씀에 살고 말씀에 죽었습니다. 그들은 말씀의 해석자들인 동시에, 선포자였으며, 설교가였습니다.
이스라엘도 우리나라처럼 ‘지정학적 리스크’가 상당했습니다. 틈만 나면 이집트, 앗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로마 등등, 잔혹하고 호전적인 주변 강대국들 틈바구니 속에서 참 많이도 고생을 했습니다.
어마무시한 군사력으로 무장한 적군 앞에, 식량이 바닥날때 까지 성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항쟁하는 모습, 성벽이 허물어지고 무고한 백성들이 처참하게 살육당하던 모습, 포로가 되어 머나먼 이국땅으로 끌려가는 이스라엘의 모습과, 그 옛날 우리 선조들의 모습이 어찌 그리 판박이인지 신기할 정도입니다.
바빌로니아의 침공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의 자랑이던 예루살렘의 도성은 자취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파괴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심장이던 예루살렘 성전도 심하게 훼손되었습니다. 왕도 끌려가고, 왕자들도 끌려갔습니다. 유능한 지도자들도 끌려가고, 젊고 총명한 청년들도 끌려갔습니다.
시편 작가는 머나먼 타국 땅 유배생활의 고통과 서러움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빌론 강 기슭 거기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우네. 거기 버드나무에 우리 비파를 걸었네. 우리를 포로로 잡아간 자들이 노래를 부르라, 우리의 압제자들이 흥을 돋우라 하는구나. 우리 어찌 주님의 노래를 남의 나라 땅에서 부를 수 있으랴?”(시편 137)
어제에 이어 오늘 첫번째 독서로 봉독되는 바룩 예언자 역시 유배지에서 크게 절망하고 상심한 동족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바룩 예언자는 유배지에서 고생하는 백성들, 그리고 그리운 고국에서 고초를 겪고 있는 백성들을 향해 외칩니다.
“오늘 비록 우리 백성이 바빌로니아의 압제 하에 죽을 고생을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아직 살아있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우리가 만일 죽었더라면 더 이상 주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힘내십시오. 비록 우리가 지금 큰 곤경 중에 있지만, 어떻게든 견뎌내 살아남는다면, 언젠가 반드시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실 것입니다. 끝내 주님께서 우리를 굽어보실 것입니다.”
“주님만이 참된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분 밖에 다른 신은 없습니다. 따라서 그분 외에 다른 어떤 신을 섬겨서도 안됩니다. 주님과 맺은 계약에 충실하십시오.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이 고통은 우리가 그분을 저버리고, 그분과 맺은 계약을 파기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하느님은 우리를 벌하시면서도 자비를 베푸시는 분, 끝끝내 우리를 멸망의 땅에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바룩 예언자는 이스라엘이 끝까지 살아남아 고국으로 돌아가고, 궁국적으로 주님으로부터의 구원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할 구체적인 행동 지침을 소개합니다.
“아이들아, 용기를 내어 하느님께 부르짖어라. 이 재앙을 내리신 주님께서 너희를 기억해 주시리라. 너희 마음이 하느님을 떠나 방황하였으나 이제는 돌아서서 열 배로 열심히 그분을 찾아야 한다. 그러면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신 그분께서 너희를 구원하시고 너희에게 영원한 기쁨을 안겨 주시리라.”(바룩서 4장 27~29절)
말씀 중에 “이제는 돌아서서 열 배로 열심히 그분을 찾아야 한다.”는 말씀이 제 폐부 깊숙히 파고 듭니다.
지난 세월 돌아보니, 제 인생 구비구비, 어찌 그리 이스라엘 역사와도 똑같은지 깜짝 놀랄 지경입니다. 참으로 불충실했고, 참으로 부끄러운 길을 걸어왔습니다.
앞으로 살길은 적당히가 아니라 열 배, 백 배로 더 열심이 그분을 찾아야겠습니다. 더욱 그분 말씀을 잘 경청하고, 더 그분께 충실해야겠습니다. 다양한 우상숭배를 멀리하고 그분만 섬기고, 그분께 최우선권을 드려야겠습니다.
며칠 전 제가 사는 곳 근처에 자리한 명성황후(1851~1895) 생가에 다녀왔습니다. 기념관 전시물들은 잔혹한 일제에 의해 저질러진 을미사변(乙未事變) 혹은 명성황후시해사건(明成皇后弑害事件)의 개요를 잘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야욕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그 어떤 수단과 방법도 다 동원했던 일제의 만행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비운의 국모(國母) 명성황후! 그녀에 대해서는 여러 평가들이 분분하지만, 그녀는 일제 침략에 정면으로 맞선 여장부였습니다. 그녀는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쥐락펴락하던 왕권을 남편 고종에게 되돌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더군요.
시대의 흐름을 읽을 줄 알았던 명성황후는 고종을 보좌하면서,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일본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 일본의 독주를 막기 위해 러시아와 손을 잡고, 일본세력을 축출하려는 작전을 지휘했던 핵심 인물이 명성황후이었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이런 눈엣가시같은 명성황후를 일제가 절대로 그냥 둘 수 없었습니다. 1895년 8월 20일, 일제는 소위 ‘여우 사냥’이라는 이름의 작전하에 명성황후를 잔혹하게 시해합니다. 조선에서 반일 세력의 핵심이자 러시아와의 연결고리인 왕후를 제거하기 위한 일제의 프로젝트가 바로 명성황후시해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이 작전을 총 지휘한 사람은 당시 일본 공사 미우라였습니다. 시신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후에 조선인들이 어떤 일을 벌일지 두려웠던지, 시신에 석유를 붇고 태워버리기까지 헀습니다. 목적의 달성을 위해서는 인간이기를 포기했던 그들이었습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여러 일본인들이 가담했었는데, 범죄자들은 감옥에서 영웅 대접을 받았습니다. 미우라가 석방되어 동경에 도착하자 일본천황은 그의 노고를 크게 치하했습니다.
이런 일제를 찬양하고, 일제 강점기 시절을 미화하고 그리워하는 몇몇 정신 나간 대학 교수님들! 정말 제 정신이 있는 사람들인지 묻고 싶습니다. 대체 일본 정부로부터 얼마나 많은 후원금을 받았기에, 그토록 이해할 수 없는 망언들을 쏟아내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조속한 시일 내에 일제침략전쟁과 강점기 역사왜곡에 대한 행위가 금지되고 처벌되는 법이 마련되고 시행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특단의 조치가 없다보니 그 하이에나 같은 교수들의 강단에서의 가르침은 계속되고, 또한 그 가르침을 받는 학생들 가운데 또 다른 친일파가 생겨나는 것 같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반영억신부-
우리는 많은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대개는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하고 끝마무리를 합니다. 기도를 하되 내 이름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시고 아버지 하느님을 통하여 그 풍요로움을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일흔 두 제자들이 선교여행에서 돌아와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제자들은 여러 질병을 낫게 해 주었을 뿐 아니라 마귀까지도 쫓아냈는데 그것은 그들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통해서 마귀들을 복종 시킨 것입니다. 제자들은 기뻐했고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때 주님이 한 말씀하셨습니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10,20). 참다운 기쁨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하느님 나라에 뽑힌 것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마귀를 복종 시킬 수 있었던 것도 하느님께 선택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누리는 인기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인기의 바다에 빠지면 주님은 잊고 나를 드러내서 결국 주객이 전도되고 망하게 됩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다면 주님께서 허락하셔서 가능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특별히 세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로 뽑아주시고 영원한 생명에로 불러주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능력을 당신의 자녀들을 통해서 드러내시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주님의 도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자신을 “하느님의 손에 쥐어진 몽당연필”이라 했고, 소화 데레사 성녀는 “주님 손안의 장난감, 주님 손안에 쥐어진 작은 공”이 되길 원하셨습니다. 과연 나는 주님 안에서 무엇이 되고 있는가? 그리고 무엇이 되어야 할까? 생각해 봐야하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마귀를 쫓아내고 기적을 행하여 아무리 인기가 좋아도 주님의 도구임을 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일보다 구원입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의 일을 함으로써 주님을 차지하는 기쁨 안에 머물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이름이 이미 하늘에 기록되었다면 그 이름의 빛을 잃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주님, 저의 머리위로 당신의 손길을 얹어 주소서. 만일 당신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성 필립보 네리). 무슨 일을 하든지 당신의 이름이 살아있기를 희망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10,17-24: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제자들은 예수님께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라는 명을 받고 떠나갔다가 돌아와서 기쁨에 넘쳐 스승님께 일의 결과를 보고하고 있다. 제자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파견되어 스승님의 말씀을 충실히 따랐다. 복음을 전하는 자세를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따랐기 때문에 제자들은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되었다. 이제 제자들은 주님 앞에 자신들이 행한 모든 것을 기쁨에 넘쳐 보고 드리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18절) 이 말씀은 사탄이 높은 하늘에서 땅으로, 기고만장한 오만에서 굴욕으로, 영광에서 모멸로, 막강한 힘에서 무력한 상태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오시기 전에는 그자가 세상을 지배하였고, 모드 그를 경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들 말씀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시자, 그는 자기의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 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19절) 뱀과 전갈을 밟을 수 있는 능력은 그리스도께서 뱀의 머리를 짓밟으신 사실에서 온다. 그들이 뱀과 전갈의 독침에 쏘이더라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치유될 것이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고 사탄을 물리치셨고, 세례를 받은 우리에게도 같은 능력을 주신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기적을 행하고 사탄을 물리친 일로만 기뻐한다면 교만이 커질 수 있다. 그래서 그 교만을 싹일 때 잘라버리신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20절) 고 말씀하신다. 논에 피가 올라오면 즉시 뽑아버리는 농부와 같이 하신다.
제자들의 보고를 들으시고 예수님 역시 기쁨으로 찬가를 부르신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21절).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이란 이방의 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과 점성사들, 그리고 이스라엘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말한다. 그들은 모두 세상의 비밀과 하느님의 뜻을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생각과는 다르다. 그분은 겸손한 사람, 마음이 가난한 사람에게 당신의 진리를 드러내신다. 이것이 복음서의 중심 사상이며 예수님의 본 모습이다. 스승님은 우리를 ‘철부지들’이라고 하신다. 이것은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고 하는 사람들보다 우리가 구원받을 준비가 더 잘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분의 신비를 알 수 있으니, 우리의 눈은, 또 그분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눈은 행복한 눈이다. 우리는 그분의 놀라운 가르침을 들었으니, 우리 삶의 참된 제물로 그분께 흠숭과 영광을 드려야 할 것이다.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루카 10, 21)
-한상우신부-
우리 삶의 연속은
이와같이 모두
철부지 철부지
철부지들의 순수한
연속입니다.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철부지같은 믿음입니다.
아버지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가
초짜이듯 모두가
철부지들임을
인정합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철부지들을 사랑하시고
철부지들을
이해하시고 철부지들을
기다려주십니다.
어여쁘고 소중한
하느님의
철부지들입니다.
하느님의
철부지들은 결코
하느님께
맞서지 않습니다.
철부지들은
철부지들의 역사를
써내려 갈 뿐입니다.
너무 커버린
우리들 앞에
철부지가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철부지들의
나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철부지들이 사는
여기 이곳으로
오셨습니다.
우리에게로 오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철부지의 날 되십시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철부지들에게
하느님나라의 신비
즉 사랑을 가르처
주십니다.
모자람과
부족함도
은총임을 배웁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 독서의 말씀들에는 어제와 달리 기쁨과 희망이 깃들어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루카 10,17).
일흔두 제자가 첫 선교 여행을 마치고 신이 나서 돌아와 스승님께 외칩니다. 복음서 저자는 "말하였다"고 썼지만, 그 마음에서 울렁이는 기쁨이 마치 외침처럼 들려옵니다.
"주님의 이름 때문에!" 제자들은 선교지에서 이루어진 성공이 무엇에 기인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이 갖는 힘, 그 권능을, 치유받은 사람이나 구경꾼들보다 그 이름을 간직하고 있던 제자들이 더 생생히 체험한 것입니다.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 10,20).
참 놀랍지요! 주님의 이름을 지니고 파견되었던 제자들의 이름이 하늘에, 곧 하느님 심장에 새겨지게 되었다니 말입니다. 영들이 복종한 일이 기쁘다면, 자신들이 지닌 주님의 이름을 "믿은" 덕분에 하느님 안에 자리를 얻게 된 은총은 얼마나 더 크고 기쁜 일이겠습니까! 그런 제자들을 바라보시는 예수님도 "성령 안에서 즐거워"(루카 10,21)하십니다. 선교 여행이 그리 순탄했다니 아직 고통의 잔은 그들 몫이 아닌가 봅니다.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루카 10,21).
제자들은 세상 눈으로 보면 철부지들입니다. 그들 중에는 저명한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도 없고 사제도 랍비도 아닌 어부, 세리 등 보통의 단순한 이들이지요. 그들을 부르신 주님은 세상이 인정하는 지혜와 슬기 대신, 새로움의 씨앗을 품어 싹을 틔워낼 마음밭의 상태를 보신 듯합니다. 제도와 기득권으로 다듬어지지 않아 더 순수하고 생명력 넘치는 불모지에 가까운 영혼이 철부지일 것 같습니다.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루카 10,22).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는 존재는 오직 아들뿐인데, 그 아들이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이도 이 엄청난 행운의 주인공이 된다고 하십니다. 누구를 선택해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실지 그 선택권은 오로지 예수님께 달렸습니다. 바로 오늘, 철부지 제자들이 그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유배 상황 안에서 희망이 선포됩니다. 예루살렘의 죄와 그들에게 내린 재앙이 민망할 정도로 낱날이 반복되어 언급되지만, 그 처참한 단어들 사이로 실낱같은 희망의 메시지가 비추입니다.
"아이들아, 용기를 내어 하느님께 부르짖어라"(바룩 4,27).
용서를 청해 보셨습니까? 진정으로 어린이의 마음이 되지 않고서는 온전히 자기를 낮추어 죄를 고백하고 자비를 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세상적 지혜와 슬기를 짜내어 도망갈 구멍을 마련하거나, 이중적 의미의 단어를 써서 슬쩍 책임을 감소시키거나, 장황하게 본질을 흐리는 경우가 종종 있지요. 하지만 아이들은, 철부지들은 그러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아이들아!" 하고 부르시는 겁니다.
절망과 고통의 끝에서 하느님의 자비 외에는 달리 희망이 없는 지금, "용기를 내어 하느님께 부르짖으라"고 하십니다. 백성의 죄악에 노하셔서 잠시 재앙을 퍼부으신 하느님의 마음을 돌리려면 세상의 지혜와 슬기가 아니라 "용기"가 필요하니까요. 아이들처럼, 철부지처럼 아버지 품에 달려들어가 더 깊이 파고들어 매달리며 그 사랑과 자비에 호소하는 용기의 밑바닥에는 순박하고 단순한 믿음이 자리합니다. "주님은 불쌍한 이의 간청을 들어 주시고 사로잡힌 당신 백성을 멸시하지 않으신다"(화답송). 그들이 아는 아버지는 이런 분이시니까요. 그리고 이 아이다운, 철부지다운 믿음을 아버지 하느님은 결코 밀쳐내실 수 없습니다.
"그분 이름을 사랑하는 이들이 그곳에 살리라"(화답송).
주님의 이름을 지니고, 그 이름에 기대어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은 자기의 이름을 세상의 눈과 귀가 아니라 하느님의 심장에 새겨 넣습니다. 세상이 주는 명성과 찬사가 아니라 주님이 부르시는 "철부지"라는 호칭과 애틋하고 따사로운 눈길이 그저 기쁘고 행복합니다. 그들은 설령 넘어지고 엇나가더라도 이내 아이처럼 아버지의 품을 찾아 달려들 수 있습니다. 그들이 지닌 주님의 이름이 아버지께 자석처럼 이끌리고, 아버지 심장에 새겨진 자기 이름이 그들을 끌어당기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는 이들이 살 곳은 하느님의 심장입니다.
오늘 모든 일을 '주님의 이름으로'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벗님의 이름을 하늘에 기록하시는 행운을 입으시길 축원합니다.

기쁨의 차원
-김찬선신부-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와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오늘 복음은 모처럼 제자들과 예수님 모두 기뻐하시는 내용이며
우리의 기쁨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가르침을 주시는 내용입니다.
어제 모 수녀원에 가 젊은수녀님들을 대상으로
수도생활에 대한 강의를 하루 종일 하였습니다.
세상의 변화와 함께 우리의 수도생활도 바뀌어야 하는데
기쁘고 건강한 수도생활로 바뀌어야 한다는 내용이었고
기쁘고 건강한 수도생활의 요체는 우리의 정신이 바뀌어
하느님의 영을 영접하는 그런 생활이어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주제를 이렇게 잡은 것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복음의 기쁨>에서
지적하였듯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기쁨이나 열정이 없이 살면서
불안과 분노와 두려움 같은 것들로 가득차 있는데 수도자들도
이런 면에서 비슷하기에 미래의 주역인 수도자들 자신이 건강하고
기쁘게 살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도 복음의 기쁨을 선사하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이 바로 예수님과 제자들이 기뻐했다는 얘기를 전하는데
아시다시피 이것은 복음 전체에서 볼 때
이곳 외에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장면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출되고서 <복음의 기쁨>이는 회칙과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는 권고를 냈을 뿐 아니라
자주 웃는 얼굴을 보이는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선함을 선사했는데
그것은 이전 교황들이 근엄한 모습만 보여주고 좀처럼 웃는 얼굴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는데 사실 예수님의 이미지도 마찬가지였지요.
그런데 교황의 말씀대로 우리가 복음을 제대로 산다면 기쁨이 있어야 하고
실제로 복음을 기쁘게 사는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도 있는데 하물며
복음의 주인공이신 주님과 제자들이 기쁘지 않았을 리가 없을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기쁨에도 등급이랄까 차원이 있습니다.
제자들의 기쁨 차원과 예수님의 기쁨 차원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낸 기쁨을 토로합니다.
이것은 루카복음의 이전 장,곧 9장에서 열두 제자가 뽑히고
마귀추방의 사명을 받았음에도 그 사명에 실패한 뒤의 얘깁니다.
그러니까 9장에서는 예수님께서 타볼산에 베드로,야고보,요한 세 사도만
데리고 가셔서 그들 앞에서 변모의 모습을 보이시고 내려오셨고,
남아있던 다른 제자들은 마귀추방에 실패하였는데 10장에서는
다른 일흔 두 제자가 파견되고,이들은 마귀추방에 성공한 겁니다.
그러니 일흔 두 제자가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이것은 실패를 거듭하다 드디어 성공했다는 성취의 기쁨일 수도 있고,
열두 제자가 못한 것을 해냈다는 우월감적인 기쁨일 수도 있습니다.
혹 이런 기쁨이 아니라 마귀를 쫓아냈다는 성취의 기쁨일 수도 있습니다.
악령을 쫓아냈으니 어떤 영적인 힘을 성취한 기쁨일 수도 있을 겁니다.
아마 저라도 그런 힘을 지니게 되면 기쁘고 어쩌면 우쭐할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영 안에서 기뻐하시며 경고성 충고를 하십니다.
마귀추방을 할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하지 말고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을 기뻐하라고 말입니다.
영적인 힘이든 뭐든 이 세상에서 성취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하늘나라를 성취하는 것을 기뻐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로 치면 이 세상에서 손주얻은 것을 기뻐하지 말라고 할 수 없고
그런 기쁨이 주어졌을 때 하느님께 감사드려야겠지만
그런 기쁨에만 머물지 말고 더 높은 차원의 기쁨,
곧 하늘나라 성취를 더 기쁨 삼으라는 오늘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10월 7일 토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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