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자료

복음화란?

Margaret K 2019. 10. 4. 21:30

1.복음화란? ① 개념 : ‘복음화’는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근래에 널리 사용하게 된 용어이다. Evangelizatio(복음화, 복음선교)는 어원적으로 볼 때 동사인 evaggeliomai와 명사인 evarreliou에서 유래되었겠지만 명사화된 형태로서의 본 단어는 성서에서 찾아볼 수 없다. 이 용어가 가톨릭 교회 안에서 사용되기는 20세기에 들어와서부터이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에도 31번밖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 동안은 주로 선교를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서 ‘복음 선포’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어왔다[D. Grasso, S.J., Evangelizzazione. Senso di un termine, in Evangeliation (Documents Missionalia n.9), Roma, 1975, 23-47]. 그러다가 1974년 10월 로마에서 개최되었던 제3차 세계 주교대의원 총회(시노드)의 주제로 Evangelization이 확정됨에 따라 그 의미를 풍부하고 다양하게 재해석하게 되었고 ‘선교’를 대신하는 교회의 공식용어가 되다시피 하였다.


   그 동안 교회 안에서는 ‘선교’(Missiones)란 단어를 주로 사용해 왔다. 선교는 어의(語義) 그 자체로 ‘파견’을 뜻하는 것으로 복음 선포자들이 아직 그리스도를 모르는 민족이나 지역에 파견되어 복음을 전하고 교회 공동체를 건설하는 활동을 지칭하며(선교교령 6항), 그러한 지역을 전교(포교)지방이라 일컬어 왔다. 그리고 비(非)그리스도인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베풀어 교회 공동체를 설립하는 초기적 선교단계와 구분하여 이미 성세성사를 받고 신자가 된 사람들의 영적 생활을 돌보는 활동을 사목(司牧)이라 하여 세분해 왔다.

   그러나 복음화는 보다 풍부하고 역동적(力動的)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복음선포 행위뿐 아니라 교회의 사명 전체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즉 종래의 ‘선교’와 ‘사목’의 의미는 물론이고, 복음의 힘으로 모든 사람들을 내적으로 쇄신시켜 하느님의 말씀과 구원 계획에 위반되는 모든 인간적인 판단 기준, 사상의 동향 그리고 가치관과 생활양식 등을 역전(逆轉)시켜 ‘복음적 생활’(에페 4:23-24, 골로 3:9-10)로 인도하는 활동까지를 폭넓게 의미한다(현복 17, 18, 19항). <현대 복음선교>(Evangelii Nuntiandi> = ‘현복’은 바오로 6세께서 1974년 시노드에서 논의된 사항들을 숙고한 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폐막 10주년을 기념하면서 발표하신 사도적 권고서(使徒的勸告書)로서 공의회 이후 당시까지의 교회 공식 문헌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므로 복음화는 이 세상을 창조주와 구원자의 뜻에 부합하도록 변화시켜야 할 교회의 사명과 활동 전체를 말한다. 그리고 그 목적은 전 인류를 내부로부터 변혁시켜 '새사람'(에페 4:24)이 되게 하고(현복 2, 18항) 구원에 참여케 하는 데 있다. 그런데 이 구원은 인간의 영혼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全人的)인 구원을 말한다.

   ② 복음화의 요소(要素) : 이처럼 복음화는 한 마디로 정의를 내리기 어려울 만큼 그 의미가 풍부하나 그 중심되는 요소는 다음 세 가지로 간추릴 수 있다.

   ㉮ 말씀의 선포 : 복음화에 있어서 복음을 해설하고 교리를 설명하는 말씀의 선포는 그 기본을 이룬다. 사도 바울로의 말씀대로 말로 설명되지 않고 구원의 신비는 이해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말씀을 전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 들어야 믿을 수 있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이 있어야 들을 수 있습니다”(로마 10:14-17). 이와 같이 구원을 위해 필요한 신앙은 말씀을 통한 복음선포를 전제로 한다. 교회가 선포해야 할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시고, 이루신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구원의 은혜이다. 이 구원은 각자가 처한 구체적 상황과 물질적이며 정신적인 충족을 전혀 배제하지는 않으나 무엇보다도 죄와 악신(惡神)으로부터의 해방을 말하며 현세에서 시작되지만 영원 안에서 완성되는 초월적(超越的)이며 종말적(終末的)인 구원을 말하는 것이다(현복 9, 27항). 그러므로 말씀의 선포에는 성사를 통한 초자연적 생명에 관한 선언과 형제애, 악의 신비기도희생선행의 추구 등 교회의 중요 가르침을 포함시켜야 한다.

   ㉯ 생활의 증거 : 말씀의 선포뿐 아니라 복음적 생활의 증거 역시 복음화의 요소 중에 하나이다. 말과 일치된 생활은 언어로 표현된 진리가 참되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복음화에서 중심되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 아버지이시며, 무한한 사랑으로 성자 안에서 온 인류를 모으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불러주신 사랑을 증거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이 복음을 전하는 이들의 생활 안에서 투명하게 반영되지 않는다면 그가 선포하는 사랑은 추상성을 면치 못하며, 그 말씀은 생명력을 잃게 된다. 따라서 사랑의 실천, 생활의 증거는 복음화의 중요 요소에 속한다.

   ㉰ 성사생활(聖事生活) : 말씀과 생활의 증거로 신앙에 귀의(歸依)시킨 다음에는 성사를 통하여 초자연적 생명으로 인도하고 이 생명이 더 풍부해지도록 해야 한다(요한 10:10 참조). 따라서 교리를 가르치고 복음을 해설하는 말씀의 선포를 복음화의 출발점이라고 한다면, 성사로 말미암은 내적 변화와 새 생활은 그 도착점이라고 할 수 있다. 성사생활, 특히 성체성사의 생활화는 복음화의 정점을 이룬다.

   ③ 복음화의 신학적 배경 :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1요한 4:8)께서는 당신 생명과 영광에 참여시키고자 인간을 창조하셨다. 인간의 범죄 후에도 이 같은 하느님의 구원의 의지는 변함이 없어 구세주 그리스도를 세상에 파견하셨다. 성부와 같은 신성(神性)을 지니고 우리와 똑같은 인성(人性)을 지닌 그리스도야말로 인간을 하느님께 결합시키는 유일한 중개자이시다. 당신 몸으로 구원을 이루신(마르 10:45, 루가 19:10) 그리스도는 사실 이 구원의 기쁜 소식 자체이며(마르 1:1, 로마1:1-3), 최초 최대의 복음 선포자이시다(현복 7항).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은 처음부터 성령과의 공동작업이었다. 성령께서는 오순절 날 사도들에게 가시적(可視的)으로 오심으로써 교회의 공식 창립을 드러내셨고 교회의 생명으로 교회 안에 머무르신다.

   예수께서는 당신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루신 구원사업을 역사 안에서 계속하고 세상 극변(極邊)까지 확장하기 위해 사도들을 선택하고 가르쳐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도록 온 세상에 파견하신다(마태 28:19, 마르 16:15). 그러므로 사도들 위에 세워진 교회는 본질적으로 ‘선교하는 자’이다(교회헌장 17항, 선교교령 2, 5항). 교회는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 구원 계획에 초대되었다는 사실을 선포하고, 새로운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 인도하며, 하느님 생명에 참여시키는 일을 근본 사명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은 바로 복음화에 있다(현복 14항). 그러므로 교회는 끊임없는 쇄신으로 자신이 먼저 복음화되면서 이 세상을 복음화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2. 교회의 복음화 활동의 약사(略史) : 복음화에 대한 교회의 자의식(自意識)은 초대교회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변함이 없다. ‘온 세상’(마르 16:15)에 복음을 전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는데 혼신(渾身)의 힘을 다 바쳤으며 예루살렘 박해 이후에는 각 지역에 뿔뿔이 흩어져 전도활동 범위를 넓혔다. 초기 교회의 선교 대상은 당시 지중해 연안에 형성되어 있던 유태인의 공동체(diaspora)였으나 차츰 비(非)유태인들에계 확대시켜 나갔다. 사도들은 로마의 정치와 헬레니즘 문화가 융합되었던 대도시들을 주축으로 선교활동을 펴나간 만큼, 이에 따른 기존 종교와의 마찰이 불가피했고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무서운 박해 속에서도 그리스도교의 확장은 멈출 줄을 몰랐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국교(國敎)로 선언된 후 교회는 눈부시게 외적 성장을 하게 되나 이단(異端)의 발생으로 내적으로는 진통을 겪었다.

   유럽 전 지역의 복음화는 민족의 대이동, 로마제국의 붕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게르만 민족은 처음에 아리안 이단설을 받아들이나 후에는 가톨릭 신앙을 갖게 된다. 프랑크인들의 개종은 장차 가톨릭 선교에 큰 기여를 하게 된다. 그 이유는 차기 구라파의 패권자인 프랑크는 교황권을 보필하여 서방교회 건설에 큰 몫을 차지하게 된 때문이다. 7세기에 대 그레고리오 교황과 스코틀랜드 선교사들에 의해 앵글로 색슨족이 개종하게 되며 기사수도회(騎士修道會)는 슬라브 민족 복음화에 기여하게 된다. 게르만 민족과 슬라브족의 그리스도교에로의 귀의는 곧 전 유럽의 그리스도교화를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13세기경 선교활동은 서양의 문화권을 벗어나 몽고에까지 이른다. 프란치스코회는 중국내륙에 선교 활동을 펼쳐 1307년에 북경 대교구가 설정된다. 그러나 원(元)나라 말엽과 명(明)나라 초 쇄국주의로 말미암아 유럽과의 단절상태에 놓이고 만다.

   14세기초에 선교활동은 활발했으나 흑사병과 여러 가지 악조건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다가 신대륙(新大陸)의 발견과 함께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된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왕의 보조를 받은 선교사들은 신대륙에 놀랄만큼 빠른 속도로 선교활동을 펴나갔다. 때를 같이 하여 예수회가 새롭게 선교활동에 기여하게 되며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의 활동 역시 활발하였다.

   16세기 중엽 예수회 회원들은 중국대륙에 들어가 서양의 새로운 학문을 통해 황실(皇室)의 신임을 얻게 되고 선교 활동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게 된다. 특히 마대오 리치 신부는 중국인의 사고(思考)에 맞는 교리서를 집필했고 이러한 서적들이 사신(使臣)들의 왕래에 의해 조선에까지 이르게 된다. 조선에서는 17세기초부터 이러한 서적들이 일부 학자들에 의해 연구되어 오다가 17세기말에는 신앙으로까지 뿌리를 내리게 되고, 1784년 이승훈의 북경에서의 영세를 계기로 하며 조선 땅에 교회공동체가 설립된다. 선교사 없이 복음의 씨앗이 심어지고 가꾸어진 예는 선교 역사상 한국교회를 제외하고는 그 유래를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남미에서 멕시코와 페루는 선교활동의 중요한 터전이었다. 선교사들은 식민지에서 점령자들의 잔인성을 완화하는데 기여하기도 하였다. 포르투칼은 브라질을 점령한 후 여러 지역에 교회 공동체를 건설하나 적시(適時)의 방인사제(邦人司祭) 양성을 소홀히 한 실수로 근대에까지 불편함을 겪었다.

   1622년에 포교성성(Sacra Congregatione de Propaganda Fide)이 설정됨에 따라 교황 그레고리오 15세는 선교활동을 포교성성에서 통괄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여러 원인들로 인해 포교성성은 선교 활동 면에 있어 크게 기여마지 못하고 오히려 제사문제와 같은 논쟁에 휘말리게 된다. 그러다가 19세기말에 들어오면서 그 위치를 확고히 다지게 된다. 비오 7세 교황은 포교성성의 구조를 새롭게 개편했고 그 후임 교환들은 선교정책을 보강했다. 특히 그레고리오 14세는 선교활동을 전담하는 수도회들을 설립하고 파리 외방전교회를 표본으로 하여 선교전담사제 양성을 위한 신학교도 아울러 세웠다. 뿐만 아니라 선교학을 체계화했고 포교성성 사업에 협력할 수 있는 평신도 협의체도 구성하였다.

   근대에 와서 베네딕토 15세의 회칙 에 의해 선교의 새로운 장이 열리게 되었다. 즉 전교지방에서 방인 성직자들에게 교회를 위임하고(예를들면 비오 9세는 1926년 6명의 중국인 주교를 임명함) 선교활동에 평신도들을 대거 참여시키며 선교학을 더욱 심화시켰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교회를 근본적으로 선교하는 자로 규명함으로써 앞으로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어떤 것인지를 시사하고 있다. 오늘의 복음화에 길잡이가 되고 복음화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바오로 6세의 <현대 복음선교>는 복음화에 있어서 그 대상을 어떤 특정지역(아프리카나 아시아와 같은 종전에 포교지방이라고 일컫던 곳)에 국한시키지 않고 이미 신앙의 씨앗이 뿌려져 교회 공동체가 형성된 곳에서도 복음화는 계속 이뤄져야 함을 강조함으로써 자신이 먼저 복음화되면서 복음화 활동에 참여해야 함을 일깨워 주고 있다. (禹濟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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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강의-1
예수의 메시지 : 하느님 나라


복음서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의 핵심은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이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하느님의 뜻을 밝히는데 심혈을 기울이셨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쌍것들을 거두고 귀신들을 추방하고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예수에게 세상은 도피해야 할 무엇이 아니라 하느님의 좋은 창조물이었다.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세상을 피해 자기 내면으로 숨어드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으로 나아가야 한다. 예수께서는 하나의 진리를 추구하고자 세상을 등지고 홀로 관상에 젖어든 수도자가 아니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낸다. 예수 자신이 복음자체이시다. 기쁜 소식은 강생하시고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예수 자체이시다. 그분의 삶이 기쁜 소식 자체이다. 이제 하느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을 살펴보자.


1. 하느님 나라

1. 하느님 나라의 성서의 사용과 다양한 그림들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여러분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
예수의 설교는 ‘하느님 나라’라는 주제로 요약된다. 마태오는 하느님 나라 대신 ‘하늘나라’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하느님 나라’ 용어가 네 복음서에서 122번 나오며 공관 복음서에는 70번 가량 나타나며 90번이나 예수의 입에서 발설된 것으로 나타난다. 예수의 설교와 공생활의 중심도 하느님 나라요 그 테두리도 하느님의 다스림이다. 이것이 예수의 본연의 ‘일’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 분명히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이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만 한다. 그 이유는 청중들이 이 나라에 대하여 알고 있는 주제였고, 이 나라의 도래를 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전제한다. 즉 당시 사람들에게 이 주제는 전혀 생소한 주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하느님 나라의 성취에 대한 주장은 유대인의 파벌에 따라 달랐다.

가령 바리사이들은 율법의 완전한 준수를, 열혈당원들은 신정체제(神政體制)로 이해하고 이 나라를 무력으로 지상에 세우려했다. 엣세네파는 금욕주의와 율법 준수로써 얻어지는 것이라 보았고, 묵시문학에서는 새로운 기원 즉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를 희망하고 기대했다. 물론 민중들은 이들 다양한 부류의 집단에 좌우되고 있었다. 예수는 이 집단들에 가담하거나 동조하지 않았다.
2. 하느님 나라의 의미
하느님 나라 즉 하느님께서 다스린다는 것의 본래적 의미는 무엇인가?
사실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한 느낌을 준다. ‘다스림’이란 뭔가 예속되어 있다는 느낌과 함께 우리에게는 상당히 ‘권위적’으로 들린다. 즉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어떤 신정체제를 생각하게 하는 개념이다. 그리고 이런 표현을 쓰면 지금의 사람들은 괜시리 짜증날 수도 있다.
그런데 성서의 언어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의 이해 안에 자리하고 있다. 즉 당시의 맥락에서 바라봐야 한다. 이 하느님 나라에 대한 개념은 당시의 감수성으로는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았다. 지상에서는 일찍이 실현되어 본 적이 없는 어떤 의로운 지배자를 그리워하면서 이 이상이 언젠가는 실현되리라고 기대하던 당대 유대인들의 희망을 총괄하는 개념이 바로 하느님 나라 내지 하느님의 다스림이라는 개념이었다. 옛 근동의 여러 민족들에게 正義란 편파성 없는 공정한 재판과 판결이라기보다는 의지할 곳 없고 무력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보호하는데 있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가 임하면 부당하고 불의한 지배로부터 해방되고 이 세상에 하느님의 정의가 관철될 것으로 기대했다. 결국 하느님 나라가 임하면 민족, 인간 상호간에 그리고 인간 자체와 이 우주 안에 세말론적 평화로서의 ‘샬롬’이 실현되는 셈이다. 한마디로 하느님의 다스림은 구원에 대한 희망을 총괄하는 개념이었다. 이와 같이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관한 예수의 메시지는 평화와 자유, 정의와 생명에 대한 인류의 갈망과 추구라는 지평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3. 하느님 나라 실현의 주체
이런 세말론적 샬롬은 인간이 근원적으로 희망하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인간의 희망과 하느님 나라의 도래라는 약속 사이의 연관성을 이해하려면, 인간은 평화, 정의, 자유, 생명을 제 스스로 차지하거나 마련할 수 없다는 성서 일반의 견해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생명은 끊임없이 위협받고 있고 자유는 억압당하고 남용되고 있으며, 정의는 짓밟히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성서는 이 같은 절망적 상태를 직면한 인간에게 질문을 던진다. 과연 이런 상황을 인간은 자신의 능력만으로 벗어날 수 있는가? 그런데 개인의 자유이든 모든 사람들의 자유이든, 인간의 자유에 앞서 주어져 있고 또 그 자유를 방해하는 권세를 성서는 마귀라고 한다. 성서의 관점에서 인간이 소외된 것은 이 마귀의 “권세와 세력” 때문이며, 그러기에 인간은 이 마귀에게 팔려갔고 절망적 상태에 놓여지게 되었다. 마귀에 대한 언급은 신화적이며 통속적인 표현들이다. 그런데 이는 인간의 어떤 원초적 체험을 표현하고 있다. 즉 본래는 창조질서에 부합하는 것이라도 그것이 때로는 인간에게 적대적이요 위협적인 권세로 변모할 수 있다는 체험이다. 재물, 지위, 권력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악마의 권세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에게는 근원적으로 이런 종말론적 상황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힘이 없다는 것이 성서의 시각이며, 또한 그것은 우리의 삶이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그렇기에 인간은 절대자에게 간구하고 염원한다. 모든 인간이 그렇다. 그렇다면 새롭고도 전혀 연역 불가능한 시작이 필요하며 이 시작은 생명 및 역사의 주인이신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라는 개념은 이 새로움, 지금까지 있어 본 적이 없는 것, 상상을 초월하는 것, 불가연역적인 것, 더구나 조작될 수 없는 것, 그러기에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 결국 하느님 자신을 의미한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이 하느님으로 계시는 생활의 장(場)을 말한다. 그 장(場)에서만 인간은 인간다워진다. 이것이 구원이다. 구원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실재가 아니다.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질서는 인간을 비인간으로 만드는 실재이다. 바벨탑의 이야기, 여러 정치체제들 등이 그렇다.
여기서 말하는 하느님 나라는 곧 하느님의 하느님이심, 그분의 주님이심을 뜻하며 그것은 동시에 인간의 인간임과 세상의 구원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이 하느님의 다스림은 창조질서에 적대적인 악의 권세로부터의 해방, 구원받을 길 없을 만큼 서로 찢고 찢겨져 있는 실재 상호간의 화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2. 하느님 나라의 종말론적 성격

1. 이스라엘의 체험 역사와 하느님 나라의 종말화(終末化)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루어지리라는 희망은 단순한 공상이나 꿈속에서나 그리는 유토피아, 세상과 역사에 내재하는 법칙에 대한 직관이나 진화의 동향과 경향도 아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러한 하느님 나라를 바라고 기대할 수 있었던 유일한 근거는 오직 이스라엘이 역사 안에서 겪은 구체적 체험이다. 이스라엘이 자신의 역사에서, 특히 출애굽에서 사막을 유랑하는 동안 하느님은 당신을 섭리의 하느님, 길을 밝히는 하느님으로 드러내셨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티나 정착 후 당대 근동의 열강 및 그들의 우주관 및 신앙과 접촉하게 되면서 역사의 주님으로서의 야훼께 대한 신앙을 온 세상의 주님으로서의 야훼께 대한 신앙으로 확대해야 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만백성의 하느님일 때에야 그분은 유배라는 괴로운 역사적 상황으로부터 당신 백성을 구원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드러난 분이 창조 설화에 등장하는 우주의 하느님이다.

하느님 나라가 임하리라는 희망은 이스라엘과 온 세상에 군림하시는 왕이신 야훼라는 표상으로 표현된다.

환호 소리 높은 중에 하느님이 오르시도다. 나팔 소리 나는 중에 주님 올라가시도다. 노래하라, 노래하라. 하느님께 노래들 하라. 고를 타며 우리 왕께 노래들 하라. 하느님은 온 땅의 임금이시니, 멋지게 고를 타며 노래부르라. 하느님이 뭇 나라에 왕하시도다. 하느님이 거룩한 어좌에 앉으시도다.

‘하느님 나라’라는 개념은 “하느님은 주님이시로다”, “하느님은 왕이시로다”라는 이스라엘의 오랜 신앙고백을 추상 명사로 바꾸어 놓은 후기 유대교의 개념이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께서 왕하시는 영역, 그분의 왕권 내지 통치권이 발휘되는 영역으로서의 이 다스림 자체가 역사 안에서 인정되고 관철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역사를 거쳐 오는 동안 쓰라린 체험을 해야 했다. 하느님의 다스림에 대한 신앙이 현실과는 너무도 달랐다. 믿어봐야 뭣하랴, 사실 현실의 삶은 우리가 그저 꿈속에서 그리게끔 하느님 나라와는 동떨어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예언자들의 출현과 더불어 하느님 나라에 대한 신앙은 종말화(終末化)되어 간다. 출애굽이나 계약 체결과 같은 과거의 모든 구원 위업들이 미래에 가서 재현되리라고 기대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새로운 계약, 새로운 출애굽을 희망하기에 이르고, 하느님의 다스림이 임하리라는 것을 이제 먼 미래의 일로 기다리게 되었다.
북 이스라엘의 패망을 앞두고 이사야 11,1-9, 남 유대의 패망 때 예레 30-31장 등의 발생을 볼 수 있고 이것은 모두 미래에 일어날 새로운 계약, 출애굽에 대한 희망을 말한다. 묵시문학과 제3이사야서는 하느님 나라라는 새로운 기원에 대한 희망을 표현한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종말론적 희망의 초월화를 보여준다.

하느님 나라에 관한 성서적 이해를 이렇게 볼 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종말론적 희망이 표현되어 있는 성서의 기사는 장차 일어날 사건들을 보도하는 것이 아니다. 일차적으로는 어떤 괴로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의 위로와 희망의 말씀이다. 현재의 부족함을 보면서 미래의 완성을 말하고, 현재의 불가능함을 보면서 미래에 있을 놀라운 실현을 말한다. 하느님은 세상을 지배하시는 분이고 하느님은 장차 그것을 나타내신다는 뜻이다. 결국 하느님께서 세상의 절대적 지배자로 당신을 실증하시리라는 신앙의 확신을 표출하는 것이다.

2. 예수와 하느님 나라 선포
예수는 이 같은 구약의 희망에 새롭고 결정적인 轉機를 제공한 분이다. 그는 이 종말론적 희망이 지금 실현되어 가고 있다고 선포한다. 묵은 기원과 새 기원의 전환은 도저히 이룰 길 없는 장래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눈앞에 있다는 것이다.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것이다.”

예수는 나자렛 회당에서 첫 공개 설교 때에도 예언서의 한 구절을 낭독한 다음 이렇게 말했다.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여러분의 귓전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언자들의 언약이 말해주던 그 시간이 다 된 것이다. “장님이 보게 되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이 기쁜 소식을 전해 듣습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지금 예수의 말씀과 행적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 예수에게는 사실 걸림돌이 될 만한 것이 많았다.
예수는 무명의 랍비였고, 제자들은 교양이 없었다. 특히 그의 처신을 보면 세리나 창녀 그리고 죄인 등 당시의 엘리트라고 할 수 없는 천민들과 어울린 예수다. 이런 인물이 새로운 세상 즉 하느님 나라를 오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 사람들의 인식이었다. 그래서 그를 만나본 사람들은 머리를 흔들고 불신에 가득 찬 질문을 던지곤 했다. 그의 친척들 역시 그를 미친 사람으로 여겼다. 뭔가 화려하고 번뜩여야지만 잘난 것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의 인식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 같은 모양이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는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 밀알의 비유등의 비유를 들면서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전하기 시작한다. 비유에서처럼 하느님의 다스림은 하나의 감춰져 있는 현실이다. 묵시문학 계통에서 생각하고 있었듯이, 하늘 저 너머에 감춰져 있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인 현재 안에 지금 바로 이 자리에 감춰져 있다. 그렇기에 현재를 보고도 그 안에서 무엇이 진행되고 있는가를 아무도 알아 볼 수 없다. “하느님 나라의 비밀”은 그것이 세상 한가운데 몰래 뚫고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지금 당장 시작된 실재이지만 그것은 또한 끊임없이 도래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에 대한 언급은 두 가지로 보아야 한다. 첫째 하느님의 다스림이 지금 당장 시작했다는 것이고, 둘째 하느님의 다스림의 도래를 정작 이제부터 기대하고 간청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 사이에 놓여 있는 하느님 나라이다.

시간은 날과 때의 계속적이며 규칙적인 선후계기가 아니라(양적인 시간) 하나의 질적 단위(질적인 시간)이다. 시간은 그 내용에 따라 측정된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한 시간인가에 달려있다.

“모든 것이 정한 때가 있고 하늘 아래 있는 사물마다 제 때가 있다. 심어야 할 때가 있는가 하면 뽑아야 할 때가 있으며, 울어야 할 때가 있듯이 웃어야 할 때가 있다. 슬퍼해야 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다. 침묵을 지켜야 할 때가 있고 말해야 할 때가 있다. 전쟁할 때가 있는가 하면 평화로울 때가 있다.”

시간을 그 내용에 따라 이해하는 이런 시간관(時間觀)의 테두리 안에서 현재 및 미래의 하느님 나라에 관한 예수의 메시지가 좀더 잘 이해된다.

그렇다면 지금이 바로 하느님의 다스림의 도래를 위한 시간이다. 즉 현재라는 시간은 하느님의 다스림이 도래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를 맞아 결단해야 할 상황이 무르익었다는 사실로 해서 그 質이 규정된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는 미래를 장악하고 있는 권능이다. 이 권능은 지금 결단을 촉구하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현재 안에 힘차게 작용하고 있고 현재를 규정하고 있다. 그러기에 예수의 설교에 있어 현재에 관한 말씀은 곧 미래에 관한 말씀이고 미래에 관한 말씀은 곧 현재에 관한 말씀이다. 하느님 나라가 인간에게서 유래하지 않는 이유는 인간이 자기 과거를 바탕으로 하는 기획의 결과로 그것이 오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은 하느님의 현재요 구원의 시간으로 깨닫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미래가 구원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오늘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현재, 자신의 과거, 그리고 미래에 대한 자신의 꿈에 집착하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미래가 심판이다.… 하느님의 미래는 현재를 향한 하느님의 외침이요, 현재는 하느님의 미래에 비추어 내리는 결단의 시간이다.”

역사란 하느님의 계획이든 인간의 계획이든 어떤 일정한 계획에 따라 진행하지 않는다. 오히려 역사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주고받는 대화 중에 일어난다. 하느님의 언약은 인간에게 어떤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다. 그러나 이 언약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방식은 인간의 결단, 그의 신앙이나 불신에 달려 있다. 이같이 하느님의 다스림은 인간의 신앙을 도외시하고 오는 것이 아니라, 신앙 안에서 주님으로서 인정을 받으시는 곳에 임한다. 하느님의 다스림이 가까이 와 있다는 예수의 메시지는 결단을 촉구하는 하느님의 제안이요 인간은 이 제안을 의무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 제안은 인간의 자유로운 결단을 기대하고 있다. 이 제안은 현재의 상황을 종말론적인 결단의 상황으로 재규정한다.

이스라엘이 이 제안을 거부했을 때 하느님은 첫 번이자 마지막으로 주신 이 언약을 취소하지 않는다. 다만 다른 길을 택하신다. 이 길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과정을 거쳐 간다. 그 의미는 이렇다. 장차 임하실 하느님의 다스림에 관한 예수의 메시지에는 어떤 의미의 잉여언약이라는 여백이 있었다. 그의 메시지는 어떤 희망을 열어준다. 이 희망은 예나 지금이나 아직 실현되지 않고 있다. 이 희망은 하느님께서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일 그때 가서야 비로소 실현될 것이다. 그래서 종말론적 긴장은 유지되어야 한다. 종말론이 없는 신앙은 그리스도와 무관한 것이다. 이 긴장은 인간의 희망에 호응하여 전개되고 확대되어야 한다.

3. 하느님 나라의 신론적 성격

1. 하느님 나라의 주인이신 하느님
예수가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선포한다면 그것은 곧 “하느님이 가까이 와 계시다.”는 뜻이다. 복음서에는 이 두 가지 언명이 자주 나란히 수록되어 있다. 이같이 예수의 복음선포에는 용어상으로 보더라도 종말론적 언명과 신론적 언명이 병존하고 있으면서도 어떤 긴장을 이루고 있으며 공존하고 있으면서도 어떤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렇게 하느님의 다스리심은 일차적으로 어떤 왕국이 아니다. 하나의 공간이 아니라 삶이다. “나 너와 함께 있다.”는 말씀으로 발생하는 삶의 장이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주님이심, 그분 영광의 실증, 하느님의 하느님이심이다. 그것은 “나는 너의 하느님,… 너는 나 밖에 다른 어떠한 잡신들도 갖지 말라.”는 제1계명이 실천되는 場이다.

구약에서 하느님이 주님이라는 사상이 창조신앙에서 비로소 우주적 차원에로까지 확대·연장되었다. 창조 신앙이 말하는 것은 하느님이 절대적으로 모든 실재의 주님(주인)이라는 것이다. 세상이 무(無)로부터 창조되었다는 신앙은 세상이 자체로서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하느님을 근본으로 할 때 그 가치를 지닌다는 믿음이다. 따라서 세상이 존재하는 것은 하느님이 세상을 원하고 지탱하기 때문이라는 내용을 소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매순간 하느님의 손길로부터 새로 태어나는 것과 같다는 이 사상은 예수의 복음 선포에 다시 나타난다. 하느님은 세상 만물의 원리로 멀리 계시거나 율법 뒤에 숨어 계시는 분이 아니다. 율법을 매개로 할 때만 인간과의 교섭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하던 후기 유대교의 신관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예수의 하느님은 가까운 분이시다. 들의 꽃과 풀을 손수 보살피고 하늘의 참새들을 먹인다. 이같이 농부가 씨 뿌리는 일, 주부가 빵을 굽는 일과 같은 지극히 일상적인 일들이 하느님이 다스리러 온다는 사실에 대한 비유가 된다.

2. 지고하신 사랑의 아버지이신 하느님
하느님의 가까우심은 예수의 선포에서 구약성서의 창조신앙을 훨씬 능가하는 어떤 깊이를 얻게 된다. 예수에게 있어 하느님의 주님임은 그분 사랑의 至高性에 있다. 그분의 오심과 그분의 가까우심은 그분이 사랑으로 지배하러 온다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이 새로운 해석은 예수가 하느님을 아버지에 관해서 말씀하고 아버지로서의 하느님께 말씀을 건네는 특성과 방식에 표현되어 나온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사상은 고대 모든 종교에서 쉽게 볼 수 있다. 고대 사회질서의 최소단위체인 가정에서 父權은 신격화되었고 많은 문화권 안에서 가장은 제사를 주관한다. 로마를 비롯한 고대 문화권에서 가장은 가족의 生殺權을 갖는다. 이러한 지배자적인 면모와 권위에, 예수가 아버지란 표현을 사용하는 데는 아버지라는 개념이 마찬가지로 내포하고 있는 가족적이며 친밀하고 친숙한 요소들과 함께 결합되어 나타난다. 이같이 ‘아버지’라는 개념에는 하느님의 통치를 사랑 안에서의 다스림으로 알아들었던 예수의 이해가 집약되어 있었다.

이스라엘이 선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출애굽 사건 이후이다. 선택을 배타적으로 이해하여 폐쇄된 선민의식으로 발전시킨 것은 사람들이 한 일이다. “땅의 모든 가족들이 너 안에서 축복을 받으리라”는 말씀에 유의해야 한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아버지이시다. 사람들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구절은 드물다. 이스라엘에게 하느님의 아버지이심은 가장의 권위를 말하기 위함도 아니고, 하느님이 인간을 출산했다는 의미도, 우주의 기원으로 세상만물을 유출시켰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이집트에서 데려 내오신 자상하고 가까우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하느님이심을 말한다. 후기 유대사상이 율법준수를 강조하면서 아버지라는 호칭은 하나의 헛된 말에 불과하게 되었다. 유대교 안에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현상은 있었지만, 율법 위주의 사고로 인해 어색하게 붙여 놓은 하나의 칭호(빈사)였고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는 신앙의 얼은 없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표현은 복음서 안에 170번 이상 나온다. 이 숫자는 예수로 하여금 하느님을 아버지로 표현하게 하는 전승의 경향이 분명히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수가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방식은 사람들 눈에 새롭고도 이채로운 것으로 비쳤다. 이것은 특히 ‘압바’라는 하느님의 호칭에 분명히 드러난다. 이 호칭은 마르 14,36 갈라 4,6, 로마 14,36에 보존되어 있다. 그리스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던 교회 공동체들이 이 아람어의 표현을 기도할 때 사용하는 호칭으로 사용했다는 사실은 원시 그리스도교계에서 이 하느님의 호칭을 독특하고 특징있는 추억으로 간직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 호칭을 몸소 사용하셨다는 사실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유대교에서는 기도에 이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예수는 하느님을 이 호칭으로 부르고 기도하신 것이 특징이다. 아빠라는 호칭은 어린이들뿐 아니라 장성한 사람들도 사용했다. 생부가 아닌 사람에게도 경의의 표시로 사용했다. “유대인들은 예나 이제나 절대로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지 않는다.” 당대의 사람들에게 이 호칭을 하느님께 사용하는 것은 지나치게 친근감이 담겨있어 경망스럽게 보였다.

그런 가운데 예수는 이 호칭을 과감하게 사용하면서 하느님이 가까이 계시고 인간은 이 가까이 계신 하느님 안에 감싸여 있기에 그 안에서 안심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믿으라고 가르친다. 그분은 자녀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있다. 그분의 착하심과 보살피심에는 한계가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녀라는 지위는 창조와 더불어 주어진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종말론적 구원 혜택이다. 이같이 ‘압바’라는 하느님의 호칭에는 예수의 하느님에 대한 이해의 새로운 면모가 드러난다. 하느님은 사랑으로 인간에게 가까이 계시다는 새로운 하느님에 대한 이해이다.

하느님의 주님이심은 사랑 안에서의 주님이심이다. 하느님의 영광은 사랑과 용서를 의향대로 베푸시는 그 높으신 자유에 있다. 루가가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완벽성을 그분의 자비로 이해한 데에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다. 후에 신앙인들은 최고도의 윤리선에 하느님의 완전함을 보았지만 예수의 가르침에 나타나는 하느님의 완전함은 사람들을 자비롭게 만들어 주는 창조적 자비심이고 당신 자신을 주는 사랑이다.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은 죽은 것을 도로 살린다.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군림하시는 곳에는 새로운 창조가 있고, 모든 것이 그분 사랑의 광채를 받아 새롭게 된다.

하느님의 다스림에 관한 이 새로운 해석에서 다음의 결론이 맺어진다.
하느님의 다스림은 오직 하느님 자신의 일이다. 종교적·도덕적 성취를 통해 획득할 수 있는 것도 아니요, 정치적 투쟁으로 강제로 지상에 끌어내릴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묵시문학적 공상으로 미리 계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인간으로서는 그것을 계획할 수도 조직할 수도 없고 마련할 수도 없으며 고안해 낼 수도 생각에 떠올려볼 수도 없다. 그것은 하느님의 선물이며, 하느님이 주시는 유산이다. 하느님의 다스림의 도래는 일체의 인간적인 기대, 반항, 예상 그리고 계획을 완전히 도외시하는 하느님만의 기적이요 하느님만의 역사하심이다. 그러면 인간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3. 하느님께 자리를 내어드리는 신앙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회개와 신앙이다. 신앙은 자신의 성취 능력을 포기한다는 것이고, 자신의 인간적 무력과 무능을 자백하는 것이며, 인간이 제 힘으로는 자신을 어떻게 해볼 수 없다는 것, 따라서 자기의 존재와 그 구원에 어떤 근거를 자신 안에 세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인가 다른 것, 새로운 것, 미래적인 것에 문을 개방하게 된다. 신앙은 제 자신으로부터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기에 그것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하느님으로부터 일체를 기대한다. 하느님의 배려로 출산하는 구약의 수태치 못하는 여인들과 예수를 출산한 처녀인 마리아라는 주제들이 의미하는 바이다. 이처럼 인간이 하느님께 여백을 마련해 드릴 때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말씀은 타당해 진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인간은 자기 실적의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 재물, 지위, 권력에 대한 아집은 이 망상의 자기표현이다.

이처럼 신앙은 예수 안에서 활약하는 하느님의 권능을 의지로 삼고 그 위에 건설한다는 것, 존재의 근본과 기반을 하느님 안에 세운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하느님으로 하여금 일하게 하는 것, 하느님으로 하여금 행동에 나서게 하는 것, 하느님으로 하여금 하느님이게 함으로써 그분께만 홀로 영광을 돌려 드린다는 것, 그분의 다스림에 승복함을 의미한다. 이런 신앙 안에서라야 하느님의 다스림은 비로소 역사 안의 구체적 현실로 된다. 신앙은 하느님 나라의 현존을 맞아들이기 위한 빈 터이다.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이 받아들임과 빈터의 제공이다. 사랑이신 하느님이 내 안에 임하시면, 나도 이웃을 사랑한다.

4. 예수의 선포의 혁명성
예수께서 사용하던 ‘압바’의 호칭은 그 의미에 있어서 퇴색되고 말아서 그 안에 담긴 혁명적인 새로움을 알아내기가 어렵게 되었다. 사람들은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보다는 철학의 신 혹은 모든 종교에 내재하는 신의 개념으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예수의 신 이해는 전혀 다르다. 부동의 원동자나 불가변의 근본이 아니라 살아계신 사랑의 하느님으로 정의된다. 구약과 마찬가지로 역사의 하느님이시다. 이 하느님은 어떤 새로운 시작을 놓으시고 이를 보존하시는 하느님이요 미래를 장악하고 계신 권능이다. 미래를 장악하는 권능으로서 하느님은 시간이라는 법칙에 지배를 받지 않고 오히려 시간과 미래의 주님이요 임자이다. 이것은 곧 자유의 정의이다. 자유란 실상 제 스스로 자발적으로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 미래를 제 힘으로 제 안에 차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한다. 하느님의 이 자유는 결국 그분의 초월성이다. 하느님의 이 자유는 우리가 하느님을 임의로 처리할 수도 억지로 휘어잡을 수도 그리고 확인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 확인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미래는 불확실한 숙명도 아니요 또한 하느님의 자유도 전혀 예측을 불허하는 자의가 결코 아니다. 하느님의 자유는 어디까지나 사랑 안에서의 자유이다. 사랑이란 자유의 신의라는 말이다. 사랑이란 일치해 있다, 친근하다, 서로 마주 보고 있다, 서로 다르다는 말이다.

사랑이란 서로를 위해주기에 그저 구별만 되어 있지 않은 둘 사이의 구별이다. 내 밖에 그리고 다른 사람 안에 있다는 이 의식, 이 일체감이 곧 사랑이다. 나는 내 자의식을 내 안에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 안에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그도 자기 밖에 있는 동안에는 자기의 자의식은 내 안에만 가지고 있다. 이 두 가지는 각자 자기 밖에 있다는 것과 둘은 일체라는 이 의식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이란 구별이요 동시에 이 구별의 지양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사랑에 관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은 허튼 소리에 불과하다.

하느님의 하느님이심은 그 사랑의 지고성에 있다. 그렇기에 그분은 당신 자신을 남김없이 선물로 내줄 수 있으면서도 당신 자신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 하느님은 자기가 아닌 다른 것 안에 내재하면서 동시에 당신 자신 안에 머물러 계신다. 바로 당신 자신을 비워서 내주는 가운데 그분은 당신의 하느님이심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그분의 은폐성은 하느님의 영광이 세상에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보여주는 특성이요 방식이다.

이렇게 볼 때 예수 당대의 신관이 얼마나 철저하게 혁명적으로 수정될 수 있었으며 창조에 관한 사상이 얼마나 그 현실적 의미를 다시 회복할 수 있었는가를 알 수 있다. 세상이 피조물이라는 이 신앙은 세상이 자기의 現存在와 相存在를 해명하고 지탱하기에 충분한 근거를 자기 안에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 제 스스로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하느님을 근원으로 할 때는 모든 것이라는 것, 세상은 자기의 존재를 하느님의 사랑의 선사에 전폭적으로 힘입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창세기 1장에 6일의 노동이 있고 제7일을 거룩한 날로 말하는 것도 세상 만물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은 모든 실재의 의미요 목표일뿐만 아니라 그 근거이기도 하다. 사랑이란 그저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거듭거듭 자신을 새로 실증해 보인다. 사랑은 언제나 다시 행동으로 나타난다. 언제나 다시 이기심과 자기추구를 이겨낸다. 장차 임할 하느님 나라에 관한 예수의 메시지는 모든 실재의 가장 깊은 근거와 의미가 이제 새로이 그리고 궁극적으로 하나의 현실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하느님의 다스리심의 오심과 함께 이제 세상이 그 구원에 이르게 된 것이다.


4. 하느님 나라의 구원론적 성격

1. 구원의 메시지 하느님 나라
구원론적 성격이라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선포와 실천은 구원을 발생케 한다는 의미이다.
하느님 나라가 임박했다는 요한의 설교는 위협적인 심판이었던 반면, 예수의 설교는 구원의 제안을 의미하는 기쁜 소식이다. 예수의 행적에 어떤 독창성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하느님의 다스림이라는 개념을 한가운데다 옮겨놓았을 뿐 아니라 이 개념을 구원의 중심개념으로 삼았다는 데 있다. 그는 하느님의 다스림을 선포하면서, 현존하는 일체의 상황이 근본적으로 뒤바뀌고 유례없는 새로운 시작과 함께 마침내 인간들의 온갖 희망, 기대 그리고 동경이 이루어지리라고 언약했다.

구원의 때가 되어 하느님이 몸소 다스리러오면 모든 고통, 모든 눈물, 모든 아픔이 끝장나리라는 인간의 이 가장 원시적인 희망은 이미 신화뿐만 아니라 구약의 예언자들도 이를 고스란히 이어 받았고 예수는 이를 자기 자신의 희망으로 삼았다. “소경들이 보고, 절름발이들이 걸으며, 나병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머거리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일으켜지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예수는 사람들을 “낫게 하고”, “세리들과 음식을 들고”, “단식을 하지 않으며”, “안식일에 밀이삭을 자른다.”

2. 하느님께 의탁한 가난한 이들
현존하는 일체의 상황이 완전히 뒤바뀐다는 사실은 무엇보다도 예수의 선포를 특징짓는 ‘진복선언’에 들어있다. 이런 진복찬양은 그리스계 및 유대계의 지혜문학 내지 교훈문학에 이미 정형화되어 나타나는 문체인데 복음서는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한다. 이들에서 행복한 사람으로 찬양받는 사람은 똑똑한 자식을 두었거나, 훌륭한 아내를 데리고 산다거나, 의리있는 친구가 있다거나 성공을 거둔 사람이었다. 그러나 예수의 진복선언은 인간의 경험에서 얻은 지혜의 소산이 아니라 예언자의 말씀으로서, 축하와 환호의 외침이요 격려의 말씀이다. 일체의 세속적 재물과 가치들이 하느님 나라에의 참여라는 행복에 비해서 완전히 뒤로 물러가 있다. 가난한 사람들, 굶주리는 사람들, 우는 사람들, 조소받는 사람들, 박해받는 사람들이 복되다고 선포한다. 일체의 가치들이 전도되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행복할 수 없는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나자렛에서의 ‘첫 설교’때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들어 당신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해방을 알리며 눈먼 자들에게 시력을 회복시키고 매여 있는 사람들은 자유로이 풀어주며, 마침내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기 위해 보냄을 받아 왔노라 말할 수 있었다.

하느님 나라를 언약받은 이 가난한 자들은 누구인가?
마태오는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들’이라 말해서 ‘가난’을 하느님 앞에서의 가난이라는 종교적 의미로 알아들었다. 루가는 실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의미하고 있다. 정말로 가난한 자들뿐만 아니라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 그분의 뒤를 따르면서 가난을 견뎌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이란 도움을 받을 수도 없고 궁지에 빠져 나올 수 없는 사람들, 시련에 시달리는 사람들, 낙담한 사람들, 멸시당하는 사람들, 악용당하는 사람들 그리고 정당한 처우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모두 포괄한다. 이러한 예수의 입장은 사회의 부정과 억압을 비판하던 아모스 예언자와 박해를 당하는 사람들과 권력 없는 사람들을 보호하시고 도와주시는 야훼께 간청을 드리고 찬양을 바치는 시편과 같은 구약성서에 호응한다.
그렇다고 구약성서가 유족한 생활 그 자체를 원칙적으로 배척하지 않고, 하느님의 선물로 고맙게 받아들인 것과 같이 예수도 가난을 낭만적으로 찬양한 것만은 아니다. 부자들에 대한 원칙적인 증오는 아무데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예수는 그들의 초대를 받아 식사도 함께 한다. 예수가 가난한 사람들을 복되다고 찬양한다고 해서 어떤 일정한 사회계층만을 의중에 두고 있던 것도 아니고 사회개혁을 위한 어떤 계획을 갖고 그런 말씀을 한 것도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이란 “이 세상으로부터는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는 사람들, 그러기에 모든 것을 하느님으로부터만 기대하려는 사람들, 어쩔 수 없이 하느님만을 찾아가 볼 수밖에 없는 사람들, 자신마저 하느님께 내맡기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 세상과 그 가능성의 한계 밖으로 쫓겨난 사람들이다. 그들은 너무 가난한 나머지 그 무슨 혁명 같은 것도 일으켜 볼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기들은 물론이고 모든 사람들이 처해 있는 참된 상황을 뼈저리게 체험하였다. 인간들은 결국 하느님 앞에 모두 거지라는 상황이다. 하느님만이 그들의 희망이다.

예수의 처신도 이런 그의 선포와 일치한다. 그의 공감과 연대감은 작은 무리들과 순박한 사람들, 중노동자들과 짐꾼들에게 쏠렸다. 그가 즐겨 사귀던 사람들은 멸시받던 세리들과 죄인들 혹은 세리들과 창녀들, 혹은 그저 죄인들이라고 불리던 사람들이었다. 한마디로 이들은 불경건한 사람들이었다. 불경건한 자들이란 공공연히 하느님의 계명을 업신여기는 자들이었고 그러기에 지탄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었다. 당시의 유대교의 가르침에 의하면 하느님으로부터 벌받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팔자가 사나와서 혹은 자신들의 과오로 혹은 기존 사회의 편견 때문에 이 세상이라는 틀에 끼어 들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런데 당대 유대교의 응보교리(應報敎理)에 의하면 이들은 자기네 딱한 사정을 하느님의 처벌로 감수해야 했고 따라서 자기네가 처해 있던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가능성마저 갖지 못했던 만큼 이들의 운명은 더욱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세상으로부터, 하느님으로부터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예수는 이들에게 “복되다, 그대들이여 …”하고 선포한다.

3. 행복, 구원의 실체
그렇다면 이 행복, 이 구원은 무엇인가?
구원은 하느님 나라에의 참여이다. 이 참여는 생명과 동일한 것이었다. 예수에게는 구원의 때가 지금 벌써 나타나고 또한 실현되고 있으며 하나의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다. 예수의 행업과 기적적인 치유가 이를 말해준다. 이 위업과 치유기적을 통해 하느님의 다스림은 구원과 구속의 위력을 발휘하면서 현재 안으로 세차게 뚫고 들어온다. 이러한 위업과 치유기적 안에는 하느님 나라의 구원이라는 영육을 포괄하는 전인간의 구원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두 채무자의 비유, 인정없는 종의 비유, 탕자의 비유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관한 구원의 기쁜 소식은 죄과의 사면이라는데 그 내용이 있다. 잃었던 것을 다시 찾을 때 그것은 기쁨으로 터져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의 소식은 기쁜 소식 곧 복음이다. 이처럼 하느님 나라의 구원은 일차적으로 죄의 용서에 있으며, 그럴 자격과 공로가 없는데도 하느님의 한없는 자비하심을 만났다는 데 대한 기쁨에 있다.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했다는 것은 인간이 절대적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 긍정을 받았다는 것, 그러기에 이제 그도 자신은 물론 남도 받아들일 수 있고 받아들여서 좋다는 것을 체험한다는 것이다. 구원이란 이처럼 하느님을 계기로 하는 기쁨이요, 이웃에 대한 그리고 이웃과 더불어 나누는 기쁨으로까지 번져가는 기쁨이다.

하느님 나라의 구원은 하느님의 사랑이 사람들 사이에 군림하신다는 사실에도 드러난다. 우리가 도저히 갚을 길 없는 엄청난 죄과를 하느님이 우리에게 탕감해 준다면, 우리로서도 이웃 사람들에게 그들의 적은 죄값을 탕감해 줄 수 있어야 한다. 하느님의 용서는 한없이 용서해 줄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준다. 언제고 용서할 수 있는 힘은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용서의 조건이다. 구원은 자비로운 사람에게 약속된 것이다. 그런데 이 구원이 지금 당장 가까이 와 있기에 더 이상 시간도 없고 연기할 수도 없다.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는 때는 서로 상대방을 아무런 조건없이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고 있는 사랑의 시간이다. 좌절할 줄도 모르고 아무것도 거절하지 않는 이 사랑은 세상에 있는 악을 사로잡아 버린다. 이 사랑은 폭력과 가해와 복수의 악순환을 타파한다. 사랑은 새로운 시작이며 구원의 구체화이다. 일체를 능가하고 극복하는 하느님의 사랑은 그 작용력을 발휘하여, 우리로 하여금 동료 인간들을 받아들이고 편견과 사회적 장벽을 무너뜨리며, 사람들 사이에 새롭고도 자유로운 소통을 트고 형제처럼 다정하게 지내며 동고동락하게 한다.

하느님 나라의 구원은 창조 질서에 적대적이고 파괴적인 악의 세력이 정복되고 어떤 새로운 창조가 동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새로운 창조를 지배하는 원동력은 생명이요 자유이며 평화이고 화해이며 사랑이다. 하느님 나라의 구원은 당신을 몸소 내어주는 하느님의 사랑이 인간 안에서 그리고 인간을 통하여 군림한다는데 있다. 사랑은 존재의 의미로 군림한다는데 있다. 사랑은 존재의 의미로 판명된다. 세상과 인간은 사랑 안에서만 그들의 완성을 발견한다. 소유로써 완성되지 않는다. 소유는 인간을 끊임없이 속이고 통속적인 인간, 규격품의 인간을 만든다.

실제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사랑을 거절하였고 이기주의와 자기 추구, 아집과 사리, 완고에 사로잡힌 몸이 되고 말았다. 약육강식의 처참한 생존경쟁을 벌이며 일치대신에 고독과 고립이 들어서 있다. 그러나 고립된 인간은 무의미에 희생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이 지배하면 세상은 다시 질서와 구원을 회복한다. 각자는 자기가 절대적으로 인정받고 긍정 받았다는 것을 믿어도 좋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친교를 나눌 수 있는 것이다. 이같이 하느님의 사랑이 다스리러 온다는 것은 곧 세상 전체의 구원과 각 개인의 구원을 의미한다. 사랑은 최종적이요 궁극적이라는 것,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고 증오와 불의보다 강하다는 것을 믿고 희망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랑으로 이루어진 것은 겉으로는 아무리 그렇지 않은 것 같이 보여도 영구히 존속하리라는 약속이다. 사랑으로 이루어진 것만이 영원히 존속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그리스도인이 세상 안에서 취해야 할 태도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사랑의 폭력이라는 길을 거쳐 세상을 개혁하고 인간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된 것이다. 사랑은 정의의 대용품이 아니라 정의의 초과구현이다. 사랑은 정의를 능가하며 정의를 완성한다. 사랑은 그때마다 변화하는 상황 안에서 정의의 요구를 알아보고 이를 새로이 실현할 줄 아는 힘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은 정의의 얼이다. 이같이 사랑은 보다 정의롭고 인간적인 세계를 추구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사랑은 인간과 세계의 구원이고 구원받은 인간과 세계가 존재하는 양식이다.


5. 하느님 나라는 지금의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 : 천국(天國)?

1. 복음의 근본적 메시지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는 너무도 간단한 예수의 이 선포에는 종교의 근본을 이루는 세 가지 중요한 진리가 담겨있다. 곧 복음과 회개와 믿음이 그것이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이 복음을 선포하기 위함이다. 예수께서 죄인들과 어울리고 그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줄 수 있었던 것도 이 복음 때문이었으며,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도 이 때문이었다. 예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고 몸과 마음을 바쳐 그렇게 사셨다.

이 복음은 인생의 화두이며 온 우주의 화두이다. 이 복음을 깨달을 때 우리는 인생이 무엇인지 알게 되며 우주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신자들은 이 복음 안에 내재되어 있는 심오한 진리를 그냥 지나쳐 버린다. 그저 건성으로 보고 듣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때문에 예수께서는 이 복음을 선포하면서 회개하라고 덧붙이신다. 사고와 생활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이 복음을 알아들을 수 없고, 이 복음을 깨치지 않고서는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는 이 복음에는 인생의 신비, 곧 종교가 말하고자 하는 모든 내용이 함축되어 있다. 이 복음은 종교를 존재하게 하는 가장 근본적 원리이다. 모든 종교는 이 원리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이 복음은 인간의 사고와 삶을 전환시켜 주며 참된 인간으로 살게 해준다.

그런데 어째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 복음, 곧 기쁜 소식인가?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이 내게 정말 기쁜 소식으로 다가오는가? 이 복음을 듣는 순간 기쁨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넘쳐흐르는가? 아니면 이 복음은 다만 예수의 여러 말씀 가운데 하나일 뿐인가?

예수 당시의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기쁨과 위안을 얻었다. 물론 반발세력도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왜 자신의 첫 복음을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으로 택하셨을까? 다른 즉 ‘사랑하라’, ‘자비를 베풀라’ 등 수많은 가르침이 있는데 왜 하필 이 복음을 택하신 이유가 뭘까?

2. 도전적 질문과 사고의 전환 요구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보통 쓰고 있는 ‘천국(天國)’을 번역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단어를 일상적으로 어떻게 사용하는가? 나에게 천국은 무엇이며 천국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인간은 살아서 천국을 체험할 수 있을까? 나는 내 삶에서 천국을 체험한 적이 있는가? ‘여기가 천국이다’며 천국에 가지 않아도 좋을 만큼 큰 기쁨을 체험한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 기쁨은 어디서 온 것일까?

1. 있다 없다의 공간적 차원이 아닌 상태 혹은 처지의 질적 차원
천국은 ‘있다’ ‘없다’의 차원에 머물러서 올바로 이야기할 수 없다. 신의 존재가 ‘있다’ ‘없다’의 차원에서는 올바르게 이야기될 수 없는 것과 같다. 지옥과 연옥도 마찬가지다. 만일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내세의 개념으로 이를 이해한다면 그래서 그러한 천국이 따로 있다면 그야말로 세상은 살맛이 나지 않는, 어서 떠나야 할 곳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천국이 있는가 없는가, 있으면 어디에 있는가?’하고 따지며 묻기 전에 우리 인생에서 천국에 대해 이야기하게 한 그 원초적 체험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그럴 때라야 천국은 내 인생에 있어 의미있는 것이 될 것이고 종교적 물음이 될 것이다. ‘천국의 이야기’는 ‘있다’ ‘없다’의 차원을 넘어 인생의 지평을 열어주는 차원에서 이야기되어야 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천국도 그런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천국의 존재를 증명하려 한다거나 천국의 위치에 대해 답변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천국이 다가왔다. 그러니 믿어라’ 하고 말씀하셨을 뿐이다.

많은 사람이 천국을 죽어서야 가는 행복한 나라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교 신자는 천국을 바라보면서 산다. 그들은 누구나 다 천국에 가고 싶어 한다. 모든 종교가 저마다 천국을 이야기하면서 사람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려고 애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살기 싫다, 죽고 싶다, 더러워 못살겠다 하던 사람도 실제로 죽을 처지에 놓이게 되면 나 살려라, 나 죽는다고 야단법석을 떨며 천국 가기를 두려워한다. 그리스도교 신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막상 죽음의 순간에서는 천국 가기를 싫어한다.

이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옳은 것이다. 이렇게 반응하는 것은 그대로 이 세상이 좋고 살 만한 곳이라는 ‘믿음’이 -비록 알지 못하고 감추어져 있다 하더라도- 깔려 있고, 또한 그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복음은 이 믿음을 찾아 느끼게 해 준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온갖 어려움을 다 겪는다. 불행은 고리를 물고, 좌절과 실망으로 죽고 싶을 정도의 비관에 빠지기도 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기도 한다. 인생은 고해(苦海)이며, 고통 자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그리하여 떠나고 싶다. 죽고 싶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어찌 보면 삶의 행복이나 고통보다는 고통스럽고 힘겨운 시간들이 더욱 많은 것이 우리 인생이다. 이럴 때 사람들은 입버릇처럼 세상이 싫다면서 천국을 선망하게 된다. 천국을 멀리, 이 세상 바깥 어딘가에 있는 곳으로 생각하며 그곳을 그리워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세상을 떠나기 싫어한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 세상이 좋다고 세상에 대한 애착을 보이며 살아간다. 아무리 고통스럽다 해도 세상은 살 만한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천국은 죽은 후에만 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 지금 살아 있는 이 세상 안에서 감추어져 있고 그 때문에 살아 있는 동안 체험되는 나라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사람들은 이렇게 이 고해 속에 천국이 이미 와 있는 것을 마음 깊은 곳에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천국은 죽음 건너 저 멀리 외계에 있는 나라가 아니다. 천국을 선망하면서도 그곳에 가기 싫어하는 것 자체가 이 현실에 천국이 감추어져 있다고 믿고 있는 반증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으로 인생의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는 이 삶의 진리를 느끼게 해주었으며 신뢰를 되찾아 주셨다. 그분은 가까이 다가온 하느님 나라, 감추어진 천국을 우리로 하여금 느끼며 살게 해주셨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믿음 속에는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고통이 그냥 단순한 고통만은 아니라는 메시지가 내포되어 있다. 우리는 오랜 고통도 한순간의 기쁨으로 상쇄되어 버리는 것을 일상에서 체험한다. 절망 속에서도 실낱같은 희망만 있다면 절망은 이미 절망이 아닌 것이다. 이처럼 고통 속에 기쁨이 감추어져 있고 절망 속에 희망이 숨어 있다.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이미 와 있는 천국을 체험하고 있다. 천국을 갈망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와 있는 천국을 느끼고 있으며, 부지중에 이미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렇다고 하면 우리의 시선이 정작 향해있어야 하고, 보완해야 하는 시점은 어디일까?

2.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의 시기를 충실히 살자.
지금까지 어렵게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들어왔다. 하느님 나라는 ‘숨어있는 현실’이라고 했다. 예수께서 선포하셨고, 살도록 초대한 그 나라는 결코 우리 삶의 죽음 이후로 밀어버릴 현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숨어있는 현실이라는 것은 지금 현재 안에 생생하게 살아있으면서 아직 그 실체가 완전하게 성취되지 않는 현실이라는 것이다. 즉 완성되어 가는 와중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 나라는 현실에서 어느 정도 체험 가능한 영역이 있을 수 있다. 위에서 얘기되어진 그런 하느님 나라에 대한 ‘조각’을 우리는 말해야 한다. 그리고 그 조각이 우리로 하여금 종말론적으로 말해지고 있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신앙에로 인도해야 한다.
그래서 어떤 각도에서 보면 참 어정쩡한 신원이 바로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모습이다. 그렇지만 현실에 대해서 숨은 진주를 발견하게 하고, 그럼으로써 우리의 시선을 그저 하늘만 쳐다보지 않게 되며 현실을 더욱 의미있게 살아갈 수 있게 된다. 한편으로는 그러한 조각들을 체험하고 내 삶의 영역에서 하나의 의미로 간직하면서 그것을 켜가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결국엔 미구에 이루어질 하느님 나라에 대한 신앙에로 인도하여 줄 것이다. 그렇게 보면 그리스도교는 참으로 현실에 바탕을 둔 종교임에 틀림없다.

3. 지나친 것은 아니함만 못하다!
그런데 천국과 관련해서 우리 안에 어느정도 정화되어야 하는 의식들이 있을 수 있다.
나는 ‘전설의 고향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표현한다. 우리는 성장하면서 모두 전설의 고향을 보면서 자랐다. 그것으로부터 받은 영향은 사후세계에 대한 이미지들이다. 천국에 대해서 말한다면 모든 것이 그야말로 좋은 그래서 온갖 괴로움과 고통 그러한 것들이 전혀없는 낙원을 상상한다. 그리고 지옥을 말할 때 우리는 뜨거운 물이 철철 끓는 영원히 죽지 않는 불가마 속에서 괴로움에 신음하는 그런 그림들을 상상한다. 지옥의 감옥 속에서 빨간 피를 뚝뚝 흘리며 지옥을 지키는 수문장들의 감시 속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그런 지옥을 상상한다. 그런데 그런 이미지들은 우리가 자라면서 봐온 전설의 고향류의 프로그램에서 얻은 이미지들이다.

만일 이런 상태에 머문다면 우리는 그저 한국의 무속신앙이나 기타 여러 매체들의 영향을 받아서 살고 있는 한국인에 불과하다. 결코 그리스도교적 세계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교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은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런 전설의 고향류의 영향권으로부터 그리스도교적 영향권으로 다시 편입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다시 태어나기 위해선 물어야 한다.
과연 그런 이미지들이 그리스도교에서 말하고 있는 세계관과 어울리고 부합하는가?
아니라면 과감히 던져버려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설령 그런 이미지들이 어느정도 부합한다고 하더라도 구분해야 할 것은 있지 않을까?

성서가 말해주고 있는 하느님은 正義를 넘어선 사랑의 아버지 하느님이시다.
결코 단죄하기 이전에 그 자비로우심으로 인간에게 다가오시고, 그 사랑의 정도가 아드님을 보내시고 그 아드님을 십자가에서 죽게까지 하신 분이시다. 그런 분이 지옥의 불가마를 만들어 놓고 인간의 고통을 바라신다는 것은 사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전혀 부합되지 않는 이미지이다.

그렇다면 전설의 고향의 영향을 따지기 이전에, 과연 그러한 사후세계에 대한 이미지는 어떻게 해서 갖게 되고, 영향을 주는 것일까?

인간은 원초적으로 선과 악에 대한 감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선에 대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악에 대한 부분에 대해선 두려워하고 부담스러워한다. 그래서 그러한 경우에 인간은 자신의 행위나 사회적 조직적인 악에 대해서 두려워하게 되고, 그것이 몰고 올 파장을 두려워하게 된다. 그런데 그것이 인간이 경험하듯이 결코 달갑지 않게 고통스럽다. 그래서 인간은 살면서도 생지옥이라고 말하면서 지옥을 경험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생지옥을 인간은 전설의 고향류로 이미지화시킨다.
그래 좋다. 인간 내면의 체험과 그것을 형상화시키는 것의 구조라고 한다면, 체험과 형상화는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우리는 형상화된 이미지에 고정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여기서 앞과 뒤가 바뀌게 되는데, 그 형상화된 이미지가 무섭고 두려워서 위축되게 된다. 그러면서 인간 내면의 본래적인 공포내지 두려움의 상태는 그런 이미지와 합치되어 버린다. 그렇게 될 거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말하고 있는 사후세계는 말 그대로 죽고 나서의 문제이다.
죽음 이후의 모습은 결국 내가 죽어야만 측정 가능할 수 있지 않겠는가? 모른 다는 것이다.
그런 이미지로 인해서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울 수 있겠다. 그러나 그것에만 머물러버린다면, 결코 자비하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에로 나아갈 수는 없다. 내가 그리는 그림 그대로 사후에도 이루어진다고 하면 나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님을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인간 삶의 시작과 마침의 모든 것의 주인은 내가 아니다. 그래서 사후세계에 대한 자세는 그저 내어 맡겨드리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모든 것을 맡겨라. 그것이 살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