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29일 연중 제26주일
너는 온갖 복을 다 누렸지만
라자로는 불행이란 불행을 다 겪지 않았느냐?
그래서 지금 그는 여기에서 위안을 받고
너는 거기에서 고통을 받는 것이다
(루가 16,19-31)
'My child, remember that you received
what was good during your lifetime
while Lazarus likewise received what was bad;
but now he is comforted here, whereas you are tormented.
레안드로 바사노의 '부자와 라자로'.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아모스 예언자는 요셉 집안이 망하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는 자들이 맨 먼저 사로잡혀 끌려가리라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믿음을 위하여 훌륭히 싸워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를 드시며,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 이들은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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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창세기 24장에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사악과 레베카가 어떻게 혼인하게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종에게 많은 낙타와 온갖 선물을 주며 아들 이사악의 신붓감을 데려오라고 보냅니다. 종은 샘물 곁에서 자신의 낙타 열 마리와 자신에게 물을 길어 주는 소녀가 있다면 그 소녀가 주님께서 보내 주신 주인의 며느리라 여기겠다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레베카가 나타나 낙타들과 종에게 물을 길어 줍니다.여기서 아브라함은 하느님이고 이사악은 예수님이며 레베카는 교회에 비길 수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님과 혼인함으로써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됩니다.그러나 그러려면 먼저 낙타 열 마리를 먹일 수 있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10’은 계명을 의미하고, 모든 계명의 완성은 ‘사랑’입니다(로마 13,10 참조). 사랑의 실천만이 하느님의 가족이 되고 하느님 나라의 상속권을 얻을 수 있게 합니다.그러나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는 비록 모세 오경과 예언서를 읽으며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지만 사랑을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아기가 우물에 빠졌는데 안 구해 준다면 그 사람에게는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굶주린 라자로가 문 밖에 있는데도 먹을 것을 주지 않았으니 그는 스스로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사람이 아님을 드러내며 산 것입니다. 이와 달리 라자로는 개들에게 원하는 대로 자신의 몸을 핥게 하였습니다. 사랑은 내어 줌입니다.제1독서에서 “불행하여라, 시온에서 걱정 없이 사는 자들, 사마리아산에서 마음 놓고 사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우리 주위에 늘 있습니다. 그런데도 아무 걱정 없이 흥청댈 수 있다면 스스로 사랑이 없음을 드러내며 지옥을 향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믿지 않을 것이다.
한민택신부-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가 듣기에 혹독하기 그지없는 말씀입니다. 믿을 수 없기에 그의 형제는 모두 자신과 같은 운명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은 우리에게도 혹독하게 다가옵니다. 믿음에 있어서는 우리 또한 종종 그들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참제자’됨의 여정에서 우리는 ‘불신앙’이라는 걸림돌을 만나게 됩니다. “성당은 다니지만, 변한 것이 하나도 없어요. 다 수박 겉핥기식으로 믿어온 거지요.” 한 자매님의 푸념 섞인 고백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종종 발견하는 것은, 믿음이 어려우며 믿음을 통해 변화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 잘 알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 걸까요?
제자됨의 길에서 만나는 불신앙의 원인에 대해 오늘 복음은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카 16,31)
이 말씀은 그들이 믿지 않음이 ‘듣지 않음’에서 비롯된다고 알려줍니다. 그들이 믿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듣지 않고, 들으려 하지도 않기 때문이며, 그것은 그들의 마음이 열려 있지 않고 오직 자신에게만 집중되어 닫혀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복음 말씀은 또 하나의 중요한 실마리를 전해줍니다. 우리는 묻습니다. 부자가 그 고통스러운 곳에 온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브라함 할아버지와 그 곁에 있는 라자로에게 가지 못하도록 하는 ‘큰 구렁’을 왜 건너지 못하는 것일까요?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루카 16,25)
이 말씀은 부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 누리던 것들이 모두 ‘받은 것’임을 일깨워줍니다. 예, 부자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습니다. 그런 그가 죽은 후에 고통스러운 곳에서 고초를 겪고 있는 이유는, 좋은 것을 받았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사실을 잊고 산 것일 것입니다. 좋은 것은 그 자체로 좋은 것이지만, 그 좋은 것을 그가 모두 받았다는 것을 잊을 때, 그 모든 것을 영원히 소유할 수 있다고 여길 때, 그의 마음이 그것에만 머물러 있을 때, 그리하여 곁에서 죽어가는 라자로의 불쌍한 처지가 전혀 아무렇지도 않게 될 때, 그의 삶은 이미 넘어설 수 없는 구렁 저편으로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죽어서 그가 가진 좋은 것들이 그에게서 거두어집니다. 그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임이 드러납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20) 하는 말씀이 메아리치는 듯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도 질문을 던지며 불신앙을 넘어서라고 합니다. 우리는 과연 듣는 사람인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전부 주어졌다는 것을 기억하는가? 불쌍한 처지로 죽어가는 이웃의 삶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발견하는가? 이 물음 앞에서 겸손되이 고개를 숙일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불신앙을 넘어서고 있는 것입니다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하다는 것
-김혜윤수녀
성경이 시종일관 주지하는 인간관은 우리가 ‘하느님의 백성’이고, 하느님을 중심으로 형성된 ‘계약 평등 공동체’라는 점입니다. 햇빛, 공기, 물은 누구도 사적으로 소유할 수 없다는 특징을 갖고 있는데 하느님만이 유일한 주인이시고 우리는 그것의 관리자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과의 유대 안에서만, 평등하게, 이 요소들을 공유할 권리를 갖습니다. 그러나 인류는 이 신성한 의무를 무시한 채 사적 소유가 허락되지 않은 요소들을 사유화하여 자본을 만들었고, 급기야는 계급 간의 선이 분명한 불공정 사회를 만들었으며, 처참한 착취와 서로에 대한 혐오로 심각한 대립과 양극화를 양산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뜻에 반대하여 소외와 낙오를 만들어내고, 우아한 선긋기를 통해 열등한 것, 이질적인 것, 불편한 것은 자기 영역에 허락하지 않는 지독한 배타성을 고발합니다.
■ 복음의 맥락
이번 주 복음의 내용은 지난 주(연중 25주)에 읽었던 ‘약은 집사’에 대한 내용(루카 16,1-13)과 대조를 이룹니다. 약은 집사는 “불의한 재물로라도 친구를 만들어”(16,9) 살 길을 마련하였다면, 화려한 옷을 입고 늘 잔치를 벌이던 오늘 복음의 부자는 자기 집 대문 앞에 있던 거지 라자로를 상대조차 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지난 주와 이번 주의 본문들은 모두 도입부분에 “어떤 부자가 … 있었다.”(그리스어 ‘엔 플루시오스’)라는 동일한 표현을 배치함으로써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암시합니다.(16,1절과 19절) 교회는 두 주간의 대조 본문을 통해 ‘부와 재물’에 대한 본질적인 통찰을 제안하고 있는 것입니다.
■ 말을 건네지 않는 것
“어떤 부자”라고 지칭되고 있는 인물의 묘사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그에 대한 묘사들이 화려함과 즐거움에 집중되어 있지, 그로 인한 방탕함이나 환락의 부도덕함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19절 참조) 라자로에 대해서도 그의 지독한 가난과 비참은 묘사되어 있지만 그의 윤리적 태도와 덕행들은 표현되지 않습니다.(20-21절 참조) 주의 깊게 살펴야 할 또 다른 장치는 그들 사이에 보이지 않게 존재하던 ‘선’(線)에 대한 것입니다. 이 선으로 인한 분리와 차단은 그들 사이에 그 어떤 상호 관계나 교류, 교감도 불가능하게 했는데, 바로 대문 앞에 존재하던 라자로의 고통을,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매일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공감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때로는 이러한 소통의 불능 상태야말로 진정한 지옥의 실체가 되기도 합니다. 심지어 부자는 죽어서도 라자로에게 직접 말을 건네지 않습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주십시오.”(24절)라며 아브라함과 얘기할 뿐입니다. 결국 지상에서의 선긋기는 저승에서도 그대로 이어져 그들 사이에 “큰 구렁”(26절)을 만들었고, 절실한 고통 중에도 도움을 받지 못하게 합니다.
본문의 후반부는 무엇이 사후에 그들의 운명을 역전시켰는지 그 원인을 알려주는데 중요한 단어는 ‘아브라함’과 ‘모세와 예언자들’입니다.(23.25.29.31절 참조) 아브라함의 등장은 부자와 라자로가 모두 유다 공동체에 속해있음을 알리고, 동시에 그들이 지켜야 할 계약이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모세오경의 여러 구절은 같은 동족을 돌봐야 할 책임을 율법으로 명시하고 있는데(탈출 22,20-26; 신명 8,12-14; 15,7-12 참조) 특별히 신명기 법전에서는 “너희 동족 가운데 가난한 이가 있거든 가난한 그 동족에게 매정한 마음을 품거나 인색하게 굴어서는 안된다 … 그가 필요한 만큼 넉넉히 꾸어 주어야 한다. 너희 마음에 비열한 생각이 들어 … 괄시하고 그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신명 15,7-9)고 선언합니다. 부자는 바로 이점을 무시했던 것이고 그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하느님과의 계약을 위반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죽은 후에 부자가 고통 속에 지내게 된 것은 그가 부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 즉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맺었던 계약과 그에 따른 율법을 실행하지 않은 것이 원인이었음이 드러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부자는 지상에 남은 형제들에게 이를 알려주기를 원하지만 하느님의 뜻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분명히 제시됩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31절)
■ 아랑곳하지 않는 것
복음의 부자가 누렸던 화려한 일상은 제1독서에 더욱 섬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아모스 예언자는 기원전 8세기 북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던 극심한 물질주의와 신자유주의적 경제 체제를 비판하면서, 사치와 문란함으로 야기된 당시의 사회악과 부조리를 고발합니다. 상아로 만든 침대와 안락의자, 넘치는 음식들, 환락을 부추기는 음악, 값비싼 술과 요란한 치장들…. (아모 6,4-6 참조) 모두 인간의 본성을 만족시키는 감각적 요소들이지만, 이런 것에 매이고 중독되다 보면 국가와 사회가 “망하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는”(6절) 상태로 의식이 마비되고 맙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모색하고 그것을 따르려는 의지를 완전히 상실하게 됩니다. 국가와 사회, 타인에 대한 관심을 상실하게 된 상태는 사실 하느님에 대한 관심을 상실했기 때문에 나오는 결과인 것입니다.
■ 그러나 당신은
제1독서의 “걱정 없이 사는 자들”과 “마음 놓고 사는 자들”에 반대되는 삶을 사는 이들을 제2독서는 “하느님의 사람”으로 규정합니다.(1티모 6,11) 그들은 “상아 침상”과 “안락의자”에서 일어나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는 이들이고 “믿음을 위해 훌륭히 싸우는” 사람들이며 “훌륭하게 신앙을 고백한” 사람들입니다.(11-12절) 한국어 번역본에는 잘 드러나 있지 않지만 그리스어 본문의 첫 문장은 “그러나 당신은”(그리스어 “수 데”)으로 시작합니다. 한국어 성경에서처럼 “하느님의 사람이여”로 시작해도 문맥은 자연스럽게 이어지지만 그리스어 본문은 굳이 ‘접속사’(그러나)와 ‘인칭대명사’(당신)를 명시함으로써, 지금까지의 어조를 바꾸어 무언가를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 하느님의 사람이여”라는 표현을 통해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일반 사회와 분명히 차별되는 특징을 가져야 함을 피력한 것으로 보입니다.
돈과 재물을 소유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사랑하고 집착하는 것은 하느님의 계약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기에 죄가 됩니다. 복음의 부자와 라자로가 살던 시절은 어쩌면 우리 시대보다는 더 ‘공동체적’이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라자로는 그나마 부자의 집 대문 앞에라도 있을 수 있었지만, 이제 우리 사회의 가난한 사람들은 ‘철저한 보안유지를 자랑하는 동네’에는 얼씬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의 고위층이 사는 곳에는 쓰레기도 구걸하는 걸인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아한 선긋기로 수상하거나 불편함을 주는 타인을 배제한 사회 안에는, 교양과 예의는 있을지 모르지만 인간을 향한 진정하고 정직한 존중은 없습니다. 인간에 대한 옳고 정당한 이해를 갖는 것, 그 은총이 바로 오늘 복음에 나오는 ‘회개’(메타노이아, 루카 16,29)입니다.

나눔으로의 초대
-김현진신부-
과테말라에 살면서 느끼는 것은 결코 이곳이 가난한 나 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다른 나라들과 비교한다면 아직은 가난한 나라에 속하겠지만, 문제는 과테말라에 만 연해 있는 부정부패입니다. 결국 많이 가진 사람들이 더 많 이 가지고자 가난하지만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것 을 빼앗기에 사회적으로 발전하지 못한 채 여전히 가난한 나라로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많이 소유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죄는 아닙니다. 문제는 부유함의 근원인 하느님의 축복을 잊은 채 자신만을 위해 그 부를 사용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1독서에서 전하듯이 “대접으로 포도주를 퍼마시고 최고급 향유를 몸에 바르면서도 요셉 집안이 망 하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처럼 이웃의 고통을 외면 한 채 살아갈 때, 그것이 우리 혼의 구원에 있어서 치명 적인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를 통해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사는 부자는 굶 주림 속에서 자신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아주 작은 음식이라 도 간절히 바라는 대문 앞의 라자로를 외면하습니다. 결국 이웃의 고통에 무관심한 삶은 그 부자처럼 고통과 고초의 불 길로 끝을 맺게 됩니다. 가톨릭교회는 분명하게 ‘가난한 이 를 위한 우선적 선택’과 ‘공동선’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느 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는 혼 자서만 살아가는 곳이 절대 아닙니다. 물론 각자의 삶에 따라
가난과 부유함이 공존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축복으 로 받은 그 부유함을 고통 속에 있는 가난한 이들과 함께 나 누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부유함이 주는 안정감과 행 복을 넘어서는 천상의 기쁨과 평화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과테말라에 살면서 정말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그 천상 의 기쁨을 누리고 있는 신자들과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 속에서 그래도 조금 여유가 있는 가정들은 그러지 못한 가정을 위해 자선을 실천합니다. 저희 본당에서는 특별히 매월 둘째 주일을 ‘자선 주일’로 정하여 식료품을 모아서 가 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미사 봉헌 때 식용유, 콩, 설 탕, 쌀 등을 손에 들고 제대 앞에 내려놓는 신자들의 손은 저에게 참 행복의 표징이며, 구원의 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웃의 고통을 외 면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단순히 물질적인 것이 주는 기쁨에 사로잡히지 말고, 사랑의 나눔을 통한 기쁨 안에 살 아갔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물질적인 부유함만 나누는 것 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풀어 주신 수많은 은총도 이웃과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도 분명히 내 삶의 자리 주변에서 사랑의 위로를 기다리는 아픔과 외로움이 가득한 가난한 라자로들이 있을 것입니다. 닫힌 대문을 열 고 나아가 내가 받은 능력, 사랑, 평화를 적으로 가난한 라자로와 함께 나눔으로써 우리 모두가 하느님 나라에 들 어갈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요즘 신자들은 죄가 없다
-신영규신부-
요즈음 신자들은 죄가 없습니다. 고해소에 앉아 있어보면 진짜 그렇게 느껴집니다. 주일미사에 빠진 것을 고백하는 신자들이 좀 있고, 대개의 신자들은 죄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처지를 넋두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는 남에게 큰 해를 끼치지 않고 살고 있기에 크게 죄지은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정말 요즘 사람들은 죄 를 짓지 않고 사는 것일까요? 무엇이 하느님 앞에서 죄인지를 모르고 사는 신자들이 많아진 것은 아닌지요?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깨우쳐주십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두 사람, 부자는 이 세상에서는 호화로운 삶을 살았고 라자로는 종기투성이의 굶주린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저승에서는 그들의 삶이 뒤바뀌었습니다. 부자는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으며 고 통스러워하고 있고 라자로는 아브라함 곁에서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부자는 무엇을 잘못했기에 고통을 받게 되었을까요? 부자는 자기 집 문간에 굶주린 채 살아가던 라자로 를 외면하고 자신만 돌보며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던 것입니다. 그는 라자로를 내쫓거나 타박하지 않았고 그저 못 본척하고 외면했을 뿐이었습니다. 자신과 가족만을 위해 살았고 바로 곁에서 고통 속에 살았던 라자로를 모른 체한 것이 바로 부자의 죄였던 것입니다.
비유를 통해 깨우쳐주시는 주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신앙인은 단순히 죄를 짓지 않고 사는 것, 남에게 크게 피해를 주지 않고 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적극적인 자세로 주위를 둘러보며 이웃의 아픔과 고통 을 함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인으로 사는 것은 그냥 기도하며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자기 자신만을 돌보며 조용히 사는 소극적인 삶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오늘의 이 말씀이, 내가 부자가 아니기 때문에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비유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모두 부자처럼 많이 가졌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위의 이웃에게 마음의 문을 닫고 있느냐 열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가진 것에 상관없이 이 웃을 외면하고 무관심과 차가운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비유 속의 부자와 다르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고해소 안에서 깊이 돌이켜보고 성찰해야 할 죄는 “이웃을 외면한 채로 살고 있지는 않은가?”입 니다.

기회
-박재우신부-
그리스 고대 유적지에 가면 아주 괴이한 모습의 조각이 있다고 합 니다. 그 형상은 대충 이렇습니다. 앞머리는 숱이 무성하지만, 뒷 머리는 완전 대머리입니다. 발뒤꿈치에는 조그마한 날개가 달려있습 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있습니다. “나의 앞머리가 무성한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내가 누구인지 금방 알아차리지 못하게 함이요, 길게 늘어뜨린 이유는 사람들이 나를 발견 했을 때 쉽게 붙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뒷머리가 대머리인 이 유는 내가 지나가고 나면 다시는 나를 붙잡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요, 내 발뒤꿈치에 날개가 달린 이유는 최대한 빨리 사라지기 위해서다. 나의 이름은 바로 ‘기회’이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참으로 많은 기회를 놓친 한 사람을 만납니다. 그는 부자였고, 외적으로 행복한 삶을 살았지만 하느님께 영원한 벌을 받게 됩니다. 하느님 께서는 매일 매일 거지 라자로를 그에게 보내시어 하늘에 보화를 쌓을 수 있는 수많은 기회 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하느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을 기회를 놓쳐버린 것입니다. 분명 부유함은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그 이유는 그가 하늘에 제 물을 쌓을 기회가 누구보다 많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도와주고 싶어도 할 수 없지 만, 부자는 언제든지 자선을 베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에게도 역시 매일매일 시시각각으로 기회는 펼쳐지고 있 습니다.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 하느님께서 내뻗으시는 손을 잡을 수 있는 기회, 구원 받을 수 있는 기회, 하늘에 보화를 쌓을 수 있는 너무나도 많은 기회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기회가 온다’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기회는 오는 것이 아닙니다. 기회 는 지나가는 것입니다. 기회는 순식간에 지나가기 때문에 잘 준비한 사람만이 잡을 수 있습 니다. 우리가 매일 주님의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기도하는 이유가 바로 이 러한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시거나 목마르시거나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또 헐벗 으시거나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시중들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그때에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 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 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마태 25,44-46)
-신종목신부-
부자가 지옥(?)에 갔습니다. 부자라서 지옥에 간 것이 아니라, 나누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굶어 죽어가는 나자로를 못 본 척했습니다.
이승살이에서 사람을 죽이면 살인죄로 당장 잡혀갑니다.
그런데 직접 죽이지 않으면 잡혀가지 않습니다.
사람을 직접 죽인 물리적 증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후자의 행동을 취했고 이승에서는 죄의 대가를 치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승에서는 하느님께서 그의 양심을 보았습니다. 그는 선을 행하지 않았음에 대한 죄의 대가를 치릅니다.
나눔은 생명을 살리고 나누지 않음은 생명을 죽이는 것입니다.
고해성사 중 고백을 듣다 보면 “성사 본 지 몇 개월 되었습니다. … 주일미사 몇 번 빠졌습니다.”고 고백하는 교우들이 많습니다.
그러면서 “과식을 줄이고 절약한 몫으로 자선할 수 있었는데 인색했습니다.” 고백은 참 드뭅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 인격은 선을 행하면서 성장하지 법이나 규정을 지키고 죄를 짓지 않으려고만 해서는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성은 선을 행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닮아갑니다.
법이나 규정만 지키면 그리스도의 인성 대신에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의 경직되고 차가운 인간성만 닮아갈 뿐입니다.
지금도 많은 교우들이 주일미사 빠지면 대죄가 된다고 열심히 주일을 지킵니다.
그러나 교회법이나 규정들은 길이신 주님께 가는 울타리와 같습니다.
울타리 앞에서나 안에서만 머물면 결국 우리 신앙에는 기쁨과 웃음은 사라지고 멍에만 남을 뿐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보고 맛들여라.”는 시편의 말씀이 있습니다.
신앙의 목적은 사랑이신 주님을 만나고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서 심판받는 기준은 그가 하느님과 이웃을 얼마나 많이 사랑했느냐는 것이지
그가 얼마나 많이 종교적 체험을 했느냐는 것은 아닙니다.”(폰 발타사르)
교회는 전통적으로 교우들에게 영적, 물적 자선을 7가지 알려줍니다. 그것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랑의 기준입니다.
물적 자선 7가지
1.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 주는 것 2. 목마른 자에게 마실 물 주는 것 3. 헐벗은 이에게 입을 것 주는 것 4. 나그네를 맞이하는 것 5. 병자를 돌보는 것 6. 감옥에 같힌 이를 찾아보는 것 7. 죽은 이를 장사지내 주는 것
영적 자선 7가지
1. 모르는 이에게 가르쳐주는 것(예:전교) 2. 의심하는 이에게 조언 3. 슬퍼하는 이를 위로 4. 죄인을 타이름 5. 모욕하는 자 용서 6. 불쾌한 일을 참아내는 것 7. 산자와 죽은자를 위해 기도해주는 것
집회서(25,3)는 말합니다.
“네가 젊어서 아무것도 벌어들이지 못했다면 늙어서 무엇을 찾을 수 있겠느냐?”

-서공석신부-
예수님은 어느 날 바리사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예전에 부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호화롭게 살았습니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주린 배를 채우려 하였지만, 그에게 흥미를 보이는 것은 종기를 핥기 위해 모여드는 개들뿐이었습니다. 얼마 뒤에 두 사람이 모두 죽어서 라자로는 아브라함 곁으로 가고, 부자는 땅에 묻혀서 죽음의 세계에서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이야기를 하신 것은 사후(死後) 세계에 대한 정보를 주기 위한 것은 물론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곁에 있다는 말은 죽어서 행복하게 되었다는 그 시대 유대인들의 표현입니다. 부자가 땅에 묻히고 죽음의 세계에서 고통을 받는 다는 말도 그 시대 유대인들이 상상하던 죽음 후의 불행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에서 이 죽음의 세계는 고성소 혹은 저승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이 세상에서 재물을 지니고 호사스럽게 산다는 그 사실 자체가 결정적 행복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늘 이야기의 부자는 재물을 많이 가지고 호화롭게 살아서 행복하였습니다. 그는 재물이 주는 행복을 마음껏 누렸습니다. 그는 자기 집 문 앞에 있는 가난한 라자로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았습니다. 그는 라자로를 불쌍히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세상 어디에도 가난한 사람은 있습니다. “가난은 나라도 해결하지 못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본인이 게을러서 가난할 수도 있고, 오늘 라자로와 같이 몸이 불편해서 가난할 수도 있습니다. 이북의 동포들 같이 잘못된 지도자 동무를 만나서 굶주리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 세상은 공평하지 않습니다. 성서는 세상의 불공평을 인간이 서로 돌보아주고 나누는 노력으로 극복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이웃에 대해 유대감을 지니고, 불쌍히 여기고 돌보아주어서 모두가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나갈 것을 원하신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자비를 우리가 배워 실천하여서, 비로소 가능한 일입니다. 복음서들은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는 사람, 목마른 이에게 마실 것을 주는 사람, 나그네를 맞아들이는 사람, 헐벗은 이에게 입을 것을 주는 사람을 하느님이 축복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입을 빌려 “너희가 지극히 작은 내 형제 가운데 하나에게 해 주었을 때마다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 40)고도 말합니다. 중국의 고전(古典)인 채근담(採根譚)에도 비슷한 말이 있습니다. “하늘은 한 사람에게 재물을 주어 많은 사람을 가난에서 구하려 하지만, 가진 자는 그 가진 바를 뽐내고 갖지 못한 이를 깔보니 하늘이 노할 것이다.”
오늘 이야기의 부자는 가난한 이웃인 라자로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이 이야기가 지적하는 비극입니다. 인간이 이웃과 유대감을 느끼면, 자기가 가진 것을 이웃과 나눕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회만 주어지면, 우리 자신을 사람들과 분리해서 생각하면서, 인류와의 유대감을 외면하고, 이웃을 비난하며 이웃보다 자기가 우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점입니다. 그것은 인류역사 안에 지속되는 비극입니다. 루가복음서(16, 15)는 말합니다. “사람들 가운데서 높은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흉물입니다.”
19세기 유럽에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기술문명의 혜택으로 인간의 생산성이 높아졌을 때, 유럽의 지성인들은 호언장담하였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그리스도신앙이 해결하지 못한 지구상의 가난을 이제 기술문명이 해결해 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드디어 가난은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모두가 풍요롭게 또 평등하게 사는 세상이 올 것이라 그들은 믿었습니다. 물질이 풍요로워지면, 사람들은 모두가 그 혜택을 공평하게 누릴 것이라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그런 시대가 오면, 사랑으로 인류가 평등하게 될 것을 가르치는 그리스도신앙은 필요 없는 것이 되어, 영원히 사라질 것이라고도 그들은 예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산업혁명이 이루어지고도 오늘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생산성이 증대되면서 빈부(貧富)의 격차는 더 심해졌습니다. 부익부(富益富) 빈익빈(貧益貧)이 되었습니다.
기술문명과 더불어 나타난 공산주의는 재물을 공평하게 나누게 하면, 인간 모두가 풍요롭게 사는 지상낙원(地上樂園)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에서 공산주의는 실험되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 이후 70년의 세월이 흐르자, 그 실험의 결과를 볼 수 있었습니다. 자유로운 인간의 삶은 사라지고, 모두가 가난 안에 공평하게 억눌려 살게 되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공산주의의 실험은 실패로 막을 내렸습니다. 지구상에 유일하게 북한 정권이, 권력을 부자간에 세습(世襲)해가면서, 아직도 공산주의 체제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많은 비용을 들여 핵무기까지 개발해서 가졌지만, 인민은 자유를 잃고,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인류역사는 인간이 인간의 힘으로 사람들을 평등하게 살게 하지 못한다는 교훈을 남겼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말이 인간의 삶에서 온전히 사라졌을 때,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였습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는 죽음의 나라에서 애원하는 부자와 아브라함의 대화로 끝납니다. 부자가 애원한 것은 자기 형제들도 자기와 같은 불행을 당하지 않도록 라자로를 보내어 형제들에게 경고해 달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으면 된다고 말합니다.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서 그들을 찾아가 말하면, 그들이 회개할 것이라고 부자는 또 애원합니다. 아브라함의 마지막 말입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면 어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예수가 죽었다가 부활하셨지만, 유대인들은 그분의 말씀을 듣지도, 믿지도 않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분으로 말미암은 인간 상호간의 유대를 살라고 가르쳤습니다. 하느님이 아버지로 생각되면, 인류는 모두 형제자매로 보일 것입니다. 이웃에 대한 자비와 사랑이 형제자매의 유대를 사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형제 한 사람과도 유대감을 소홀히 하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 믿고 축복 받아서 구원 받겠다는 그리스도신앙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법을 지키고 그분께 제물을 바쳐서 많은 것을 얻어내려는 그리스도신앙도 아닙니다. 가진 것을 은혜롭게 바라보고, 갖지 못한 이와 그것을 나누는 우리의 삶 안에 하느님은 우리 생명의 아버지로 살아계십니다. 재물, 건강, 시간, 기술, 이 모든 것을 이웃과 나누어서 자비하신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살라는 말씀입니다. ◆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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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는 그저 매일 곡을 쓰고 연주만 했을 뿐이었습니다. 오직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행복을 누렸을 것입니다. 그러한 행동들이 위대한 음악가라는 호칭까지 얻게 했던 것이지요.
지금의 자리에서 충실한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굳이 먼 미래에 위대한 사람으로 평가될 것을 예상하고 신경 쓰며 살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지금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서 묵묵히 행동했을 때, 세상은 이를 인정하고 기억해주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은 자신의 자리에서 충실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충실이 내 자신에게만 국한된 것이라면, 좀 더 깊숙이 들어가서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라면 세상은 좋은 기억을 남기지 않습니다. 나쁜 기억으로 기억되던지, 어쩌면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은 부자는 탐욕을 부렸다거나 남의 재물을 빼앗았다거나 간음을 했다거나 다른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비난받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자는 종기투성이의 라자로를 매정하게 쫓아내지 않았으며, 아브라함에게 라자로를 보내서 형제들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도록 경고해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가족에 대한 사랑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부자는 죽어서 저승에서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부자라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그는 살아있을 때 고통받는 라자로를 외면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고통 속에서 힘들어하고 있는데도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산 것입니다. 사실 죽어서도 정신이 차리지 못하지요. 벌을 받고 있는데도 자기를 라자로에게로 데려다 달라고 애원하지 않고 라자로를 자기에게 보내시라고 아브라함에 부탁합니다.
중요한 사실 한 가지는, 이 부자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부자의 이름은 널리 알려져 있었고, 이 가난한 라자로의 이름은 아무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부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가난한 라자로의 이름만을 밝힙니다. 고통받는 사람을 외면하면서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만을 채우고 있던 사람은 기억에서 사라지게 된다는 것을, 그래서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내 자리에서 충실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충실은 욕심을 채우는 충실이 아닙니다. 그보다 사랑을 실천하는 충실, 고통받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는 충실, 자신의 것을 내어놓고 나눔을 실천하는 충실입니다.


강화에는 맛있는 식빵을 만드는 카페가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 생각나면 이 카페에 가서 식빵을 사 오곤 합니다. 며칠 전, 신학교 강의를 마치고 성지로 돌아오는데 이 카페의 식빵이 생각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카페에 가서 식빵 3개를 사서 다시 성지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봉투 안에 식빵의 숫자가 다릅니다. 3개가 아니라 2개인 것입니다. 차 바닥에 떨어졌나 싶어 꼼꼼히 찾아봐도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습니다.
다시 카페까지 30분을 운전해서 간다는 것도 힘들고, 가더라도 카페에서 3개를 담아서 줬다고 주장하면 어떻게 할까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빵 하나 그냥 손해 봤다고 생각할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그냥 넘어가면 후에 이 카페에 다시 가는 것이 힘들 것만 같았습니다.
전화를 걸어서 30분 전에 식빵 3개를 사 간 사람이라고 밝히면서 봉투에 두 개만 담겨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조금도 화내지 않고, 이를 확인하지 않고 그냥 가져온 저의 실수를 인정하면서 혹시 제 말이 맞는지 봉투에 담았던 직원에게 확인할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잠시 뒤에 식빵을 담은 직원의 실수였다면서 가능하면 다시 카페에 와서 가져가라고 하더군요.
여기서 다시 부탁했습니다. 왕복 한 시간 동안 식빵 하나 가지러 가기가 힘들다고 말씀드리면서 다른 방법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제 계좌번호를 묻더군요. 이렇게 손해를 보지 않고 잘 해결했습니다. 만약 전화하지 않았다면 손해를 그냥 안고만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전화 한 통화로 잘 해결된 것은 물론이고 그렇게 전화해줘서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계속 이 집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레짐작으로 결론을 내려 버립니다. ‘안 될 거야. 증거도 없잖아. 시간 낭비야.’라는 결론을 내버리면 손해만 안게 됩니다. 그러나 정중히 전화를 걸어 질문하자 많은 부분에서 이득을 볼 수 있었습니다.

말씀 공부의 목적은 무덤에서 죽기 위함이다
-전삼용신부-
전 세계의 존경을 받는 남아프리카의 첫 흑인 대통령 넬슨 만델라는 백인 정부에 의해 26년간 감옥살이를 했었습니다. 그가 출옥할 때 사람들은 그가 아주 허약한 상태로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70세가 넘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주 건강하고 씩씩하게 걸어 나왔습니다. 그래서 80세 넘어 대통령까지 될 수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5년 만 감옥살이를 해도 건강을 잃는데 어떻게 26년 동안 옥살이를 했는데도 그렇게 건강한 상태로 출옥을 할 수 있었냐고 사람들이 질문했습니다.
“나는 감옥에서 하느님께 감사했습니다. 하늘을 보고 감사하고 땅을 보고 감사하고 강제노동을 할 때도 감사하고, 늘 감사했기 때문에 건강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가 생활했던 감옥은 시멘트 바닥이었고 겨울에도 작은 담요 하나로 버텨야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 제자리 달리기를 45분, 손가락 짚고 팔굽혀펴기 200회, 윗몸 일으키기 100회, 허리 굽히기 50회 이상을 했습니다.
하느님께 감사하다면서 왜 이렇게 몸을 괴롭힌 것일까요? 몸이 미워서였을까요?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몸을 괴롭히라는 것입니다. 건강해질 수 있도록 몸을 괴롭히라는 것이 하느님의 메시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자는 바리사이, 율법학자의 상징입니다. 반면 거지 라자로는 예수님 제자의 상징입니다. 둘 다 성경말씀으로 양식을 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만 한 사람은 그 말씀을 자기를 괴롭히려는 목적으로 사용하였고, 한 사람은 자신을 배불리려는 용도로 사용하였습니다. 같은 이슬을 뱀과 젖소 두 부류가 먹은 것입니다.
거지 라자로는 말씀으로 자기를 죽인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의 거지 라자로는 예수님의 친구 베타니아의 라자로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친구가 죽어서 무덤에서 썩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야 믿지 않는 이들에게 표징이 되기 때문입니다. 유다인들은 죽은 사람을 부활시켜보라고 청할 때는 언제고, 라자로를 부활시키자 그들은 예수님은 물론 라자로까지 죽이기로 협의합니다.
반면 말씀으로 자기 배만 불리려고 했던 사람들이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지식으로 장사를 하여 배를 불렸습니다.
예수님은 왜 부자가 지옥가고, 거지 라자로가 천국 가는지 이렇게 아브라함의 입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부자는 혀를 만족시키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아를 만족시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영혼을 망가뜨린 사람입니다. 부자와 부자의 형제들도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부자는 자신의 형제들이 지옥에 오지 않게 해 달라며 이렇게 청합니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저에게 다섯 형제가 있는데, 라자로가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다섯은 ‘오감(五感)’, 즉 육체의 욕구를 의미합니다. 육체의 욕구를 채우느라고 정신없는 그들이 지옥에 오지 않는 방법은 성경을 믿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래서 이렇게 말해줍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성경말씀을 아무리 읽어도 몸을 괴롭힐 마음이 없다면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런 이들에게 라자로가 부활하여 나타나봤자 믿지 않을 것을 미리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말씀을 받아들이는 모델은 그 말씀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무덤에 들어가게 만들려는 의도가 있어야합니다.
성공하려면 배의 80%만 채우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절제의 성공학’을 쓴 미즈노 남보쿠입니다. 그가 19세기 초 국가로부터 ‘대일본(大日本)’이란 칭호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절제의 습관 때문이었습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싸움과 감옥살이를 일관했던 그가 어떻게 변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한 관상가가 “당신은 1년 안에 칼에 맞아 죽을상이니 1년 동안 보리와 흰콩으로만 식사를 하고 다시 돌아오라.”고 한 것에서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말년에 상당한 부와 명성을 쌓았지만, 그의 음식은 항상 보리 1홉 반, 술 1홉, 반찬은 1탕 1채의 간소한 식사를 했다고 합니다.
몸을 건강하게 하려면 ‘혀’를 괴롭혀야합니다. 혀를 만족시키다보면 건강을 잃습니다. 피자나 햄버거나 치킨은 몸이 원하는 음식이 아니고 혀가 원하는 음식입니다. 몸을 건강하게 하려면 또한 ‘게으름’과 싸워야합니다.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운동을 해야 건강해집니다. 나와 싸워야 건강하여 타인도 도와줄 수 있습니다. 나를 괴롭히지 않으면 타인을 괴롭히는 사람이 됩니다.
영혼에도 ‘혀’가 있습니다. ‘자아’라고 합니다. ‘육체의 욕구’라고 합니다. 영혼도 건강하고 싶다면 육체의 욕구와 반대되는 것을 먹어야합니다. 영혼이 먹어야하는 것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말씀은 우리 몸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않고 더 배고프게 만듭니다. 육체의 욕구와 거꾸로 가라는 것이 말씀의 요지입니다. 나를 죽여야 이웃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이 말씀의 핵심입니다. 그러니 말씀이 영혼을 건강하게 하고 영원한 부활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건강에 유익한 말씀을 찾는다면 자아를 괴롭히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몸이 건강하기를 원한다면 육체가 괴로운 것을 선택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의 모든 내용이 내가 죽어야만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도 성경을 공부하면서도 자기를 괴롭히기를 원치 않는다면 오늘 복음의 부자의 결말을 맞게 될 것입니다. 음식을 먹는 것이 다가 아닌 것처럼 말씀을 공부하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자기만족이 아니라 자기를 죽이려는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여야합니다.

-조재형신부-
오늘은 주일이어서 축일로 지내지 않지만 ‘성 미카엘, 성 가브리엘, 성 라파엘 대천사 축일’입니다. 부모님께서는 생일과 비슷한 날로 세례명을 정해 주셨습니다. 큰 형은 9월에 태어나서 미카엘, 작은 형은 12월에 태어나서 사도 요한, 동생은 10월에 태어나서 프란치스카로 세례명을 정했습니다. 저는 5월에 태어났으니 마티아로 하면 좋았을 텐데 부모님께서는 가브리엘로 세례명을 정해 주셨습니다. 이유는 물어보지 않았지만, 오랫동안 함께 지낸 친구처럼 가브리엘 세례명이 좋습니다. 성서에 나오는 가브리엘 천사 이야기도 좋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은 하느님의 뜻을 성모님께 전하였습니다. 성모님은 가브리엘 천사의 말을 듣고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은 요셉에게도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습니다. 요셉은 가브리엘 천사의 말을 듣고 ‘남모르게 파혼하려는 결정을 바꾸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에는 하느님의 뜻을 충실하게 전한 가브리엘 천사와 하느님의 뜻을 기쁜 마음으로 따른 성모님과 요셉의 순명이 있었습니다. 저의 세례명인 가브리엘 천사처럼 하느님의 뜻을 전하며 살고 싶습니다. 가브리엘 천사의 말을 듣고 하느님의 뜻을 따랐던 성모님과 요셉 성인처럼 하느님의 뜻과 의로움을 따르며 살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세례명은 무엇인지요? 여러분도 여러분의 주보 성인의 삶을 묵상하며 오늘 하루 지내면 어떠신지요.
욕실과 방에 예쁜 발판을 깔아 놓았습니다. 조금은 거칠고 투박하던 욕실과 방이 예쁘고 환해졌습니다. 욕실에서도 발판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방에서도 발판을 보니 격이 높아진 것처럼 기분이 좋습니다. 방을 바꾸거나, 집을 수리하는 건 시간도 많이 필요하고, 비용도 많이 듭니다. 하지만 작은 정성과 적은 비용으로도 산뜻하게 기분을 전환할 수 있습니다. 싸움이 빈번하고, 쓰레기가 넘쳐나던 우중충한 골목길 담벼락에 예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꽃도 그리고, 새도 그렸습니다. 어린 왕자도 그리고 백설 공주도 그렸습니다. 싸움 소리는 사라지고, 사진 찍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쓰레기는 없어지고, 사람들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생겼습니다. 발상의 전환이 쓰러져가는 골목길에 생기를 주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발상의 전환입니다. 이기적인 사랑을 할 것인가 이타적인 사랑을 할 것인가입니다. 개인적인 사랑에 머물 것인가 사회적인 사랑에 동참할 것인가입니다. 이기적인 사랑도 필요합니다. 나와 내 가족을 사랑하는 것은 삶의 시작입니다. 이기적인 사랑도 못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불평과 불만이 가득한 가정도 있습니다. 원수처럼 지내는 이웃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이타적인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우리에게 측은지심(惻隱之心)의 마음을 주셨습니다. 예언자들은 이타적인 사랑을 실천하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신 건 이타적인 사랑의 시작입니다. 사막의 오아시스는 생명의 쉼터가 됩니다. 이타적인 사랑은 공동체를 위한 오아시스입니다.
개인적인 사랑도 필요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걸 추구하는 건 기쁨입니다. 산을 좋아하면 산엘 가고, 음악을 좋아하면 음악을 듣습니다. 운동을 좋아하면 더불어 사는 이웃과 운동하면 됩니다. 공부하고, 책 읽고, 여행하고, 가정을 이루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못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여건이 안 돼서 못하는 사람도 있고, 의지가 약해서 못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사회적인 사랑을 실천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이사야 예언자가 꿈꾸었던 세상입니다. 사랑과 정의가 만나는 세상입니다. 사랑과 평화가 만나는 세상입니다.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는 세상입니다. 사랑과 진실이 만나는 세상입니다. 그런 나라가 오면 사자도 여물을 먹고, 늑대와 어린양이 함께 춤추고, 어린이와 호랑이가 손잡고 길을 걸어갑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가장 헐벗고, 가장 굶주리고, 가장 아픈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입니다.” 인류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육체적인 능력 때문이 아닙니다. 인류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자연을 정복해서가 아닙니다. 이타적인 사랑이 공동체를 만들었고, 사회적인 사랑이 공동체를 성장시켰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지 못하고, 가난한 이는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게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첫째는 믿음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다스리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냥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크신 사랑으로 이 세상에 온 것임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화의 산물이고, 우리의 삶은 이 세상에서 끝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런 믿음이 필요 없습니다.
두 번째는 행동입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사랑의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헌혈증을 가져오면 국밥을 무료로 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환경미화원에게 따뜻한 국수를 드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꽃동네는 어려운 이웃의 친구가 되어주었습니다. 밤하늘은 별들이 있기에 아름답습니다. 이 세상은 따뜻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 있기에 아름다울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의로움과 신심, 믿음과 사랑, 인내와 온유로’ 그 일을 행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정중하게 이야기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 없고 나무랄 데 없이 계명을 지키십시오.’

천국에는 더 이상 높음도 낮음도, 귀함도 천함도, 특별대우도 귀빈석도 없습니다. 모두가 한 형제 자매입니다!
-양승국신부-
언젠가 스페인 마드리드에 위치한 한 고풍스런 수도원 대성당에서 봉헌된 부활 성야 미사에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전례를 아주 중시여기는 수도원이어서 그런지, 정말이지 성야 미사는 거룩하고 진지했습니다, 동시에 장엄하면서도 아름다워 평생 잊지 못할 감동을 제게 선사했습니다.
총 9개나 되는 성경이 봉독되었고, 매 성경 봉독 후에는 어김없이 천상음악처럼 들리는 멋진 선율의 화답송이 반복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복음 낭독 후에는 긴 강론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다보니 말씀의 전례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시간은 한 시간 반을 훌쩍 지나버렸습니다.
그 특별한 부활 성야 미사에 참여하면서 느낀 바가 한 가지 있었습니다. 제단을 중심으로 제대 뒷쪽에는 인자하신 주교님과 여러 사제들과 복사들이 줄지어 앉아 계셨고, 반대편 신자석에는 수많은 수도자들과 신자들이 경건한 자세로 앉아있었습니다.
거룩한 독서가 봉독될 때는 다들 귀담아 성경말씀을 들었습니다. 잘 훈련된 성가대원들은 매 화답송을 정성껏 노래했습니다. 신자들 역시 천상 음악에 누가 되지 않게 조용조용 성가를 따라불렀습니다.
그 자리에 앉아있던 저는 순간 무릅을 탁! 쳤습니다. ‘아! 그래! 천국이 바로 이런 모습이겠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앙에 좌정해 계시고, 그 주변에 성모님과 수많은 성인성녀들이 앉아 계시고, 훌륭하게 살다가신 신앙인들이 한 무리가 되어 살아가는 곳, 언제나 거룩한 말씀이 계속 봉독되고, 끝도 없는 찬미가와 영가가 울려 퍼지는 곳, 그곳이 천국이겠지?’ 하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 순간 옆에 앉아 있던 동료 형제를 힐끔 쳐다봤는데, 평소 거룩한 전례보다는 역동적인 외부 사목활동이나 스포츠를 좋아하던 형제였는데, 그 얼굴이 세상 괴로운 얼굴이었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끝나지 않는 길고도 긴 말씀의 전례 때문에, 그 얼굴이 살아 생전 지옥벌^^ 을 받고 있는 표정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들었던 한 가지 생각! ‘지상에서부터 미리 미리 천국 생활을 준비해야겠구나. 지상에서 늘 지극히 세속적이며 인간적인 것들에만 몰두하지, 영적인 삶, 거룩한 전례적 삶에 맛을 들이지 않을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천국을 허락하신다 할지라도, 천국의 거룩한 삶 자체가 지옥이 될 수도 있겠구나!’
수백·수천억의 막대한 자산을 보유한 회장님들, 그러나 죽기살기로 모을 줄만 알았지, 죽었다 깨어나도 그 재물을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선용(善用)하지 않는 재벌들 뵐 때 마다, 큰 안타까움을 금할 길 없습니다.
아차! 하고 크게 가슴 칠 날이 순식간에 다가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할 것 같았던 그 재물이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불변의 진리를 깨닫는 순간, 크게 후회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갑작스레 다가온 마지막 날, 그들은 깨달을 것입니다. 재물이라는 것! 결코 내것이 아니었구나. 죽써서 개주는구나!
죽기살기로 애써서 모은 그 많은 재물들 남겨두고 떠날려니, 너무나 분하고 아까워서, 어디 눈이나 제대로 감을 수 있겠습니까? 따지고 보니, 미래를 위한 영적 준비에 소홀했던 그들은 요르단 강 건너기 전, 살아생전 이미 혹독한 지옥의 형벌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지상에서 누릴 것 안 누릴 것 다 누린 사람들, 늘 떵떵 거리며 유세를 부리던 사람들, 언제나 높은 자리에 앉아,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편안하게 살던 사람들, 어디 가나 귀빈석에 앉고 특별대우를 받던 사람들을 봐도 걱정이 앞섭니다.
그들은 이 지상에서부터 이미 받을 것을 다 받았기 때문입니다. 누릴 것을 다 누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그토록 추구하고 집착했던 자리 역시 영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자리에서 내려오는 순간, 그들이 겪게될 상심감과 비참함은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 더구나 천국에서는 더 이상 높음도 낮음도 없습니다. 귀함도 천함도 없습니다. 더 이상 특별 대우도 귀빈석도 없습니다. 모두가 한 형제 자매이기 때문입니다.
높은 자리와 특별 대우에 익숙했던 그들이 천상에서 받을 느낌 자체가 지옥일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도 이 지상에서부터 미리 미리 천국에서의 공평하고 형제적인 삶에 적응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해야할 것입니다.
아모스 예언자도 바로 이점을 정확하게 적시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읽고 묵상하다보니, 정말이지 오늘 우리를 향한 섬뜩한 경고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불행하여라, 시온에서 걱정없이 사는 자들,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 놓고 사는 자들! 그들은 상아 침상 위에 자리 잡고 안락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양 떼에서 고른 어린 양을 잡아 먹고 우리에서 가려낸 송아지를 잡아먹는다. 이제 그들이 맨 먼저 사로잡혀 끌려가리니, 비스듬히 누운 자들의 흥청거림도 끝장나고 말리라.”(아모스 예언서 6장 1~7절)
주님으로부터 엄청난 부를 은총의 선물로 받았지만, 그 부를 자신의 호의호식만을 위해 사용했지, 바로 옆에 굶어죽어가는 이웃 라자로를 개무시·개취급한 부자를 향한 예수님의 강력한 경고 말씀 역시 오늘 우리를 향한 것이 분명합니다.
“애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루카 복음 16장 25절)
아모스 예언자와 예수님의 강한 메시지에 마음이 많이 찔리시는 분들, 오늘 이 자리에서 곧 바로 결단을 내리시면 좋겠습니다. 마치 한 줄기 바람처럼 소리도 없이 순식간에 다가올 우리의 그날, 땅을 치며 후회하지 않도록, 관대한 나눔과 이웃 사랑의 실천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시면 좋겠습니다.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고인 물은 썩는다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 각자에게 알맞은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주님께서 주신 탈랜트를 알고 그것을 효과 있게 사용할 수 있는 용기를 얻기를 바랍니다.
옛날 한 마을에 구두쇠 할아버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 집 마당에는 우물이 있어 동네 사람들이 자주 드나들면서 물을 길었습니다. 구두쇠 할아버지는 그것이 늘 못마땅하였습니다. 결국 할아버지는 많은 돈을 들여 집 주변에 높은 담을 쌓고, 사람들의 출입을 금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자기 혼자만 우물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우물의 물맛이 변질되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더러운 냄새가 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물을 퍼갈 때는 계속해서 맑은 물이 솟아올랐지만 물이 계속해서 고여 있으니까 썩기 시작한 것입니다. 결국 그 좋던 물이 먹을 수 없는 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제때에 올바로 쓰지 않으면 그 가치를 잃고 맙니다. 물질이나 시간, 재능, 아니면 다른 무엇이든 간에 제대로 간수 하지 않으면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똥은 쌓아 놓으면 냄새가 나지만 뿌려지면 거름이 된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이웃을 위해 뿌려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수고와 땀이 담겨있지만 하느님께서 이미 마련해 놓으신 것을 활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감사하고 기쁘게 쓸 줄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를 통해 욕심을 경계하도록 일깨워줍니다. 무엇을 소유한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소유한 것 때문에 하느님을 잃을까 염려하는 것입니다.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아쉬울 것이 없으니 하느님과는 아무 상관없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성공한 것은 내가 잘나서 성공한 것이지 하느님의 은총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여길 수가 있습니다. 멋진 삶에 완전히 빠져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늘 풍족하면서도 하느님을 위한, 그리고 하느님사랑의 구체적 표현의 대상이 되는 가난한 이를 위한 시간이 전혀 없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한 마디로 이기적인 사람이 되면 문제가 됩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일생을 헌신하신 마더 데레사 수녀님께서는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바로 돈입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 넘긴 것은 탐욕, 바로 돈에 대한 지나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라고 고백하셨습니다. 수녀님은 말씀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주는가가 아니라 그 안에 얼마나 큰 사랑을 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쌓아 놓으면 쌓아놓을수록 줄 것이 없습니다. 많이 가졌는데도 왜 줄 것이 없습니까? 아홉을 가지면 하나를 채워 열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 주면 줄수록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사실 부자가 잊고 살 수 있는 것 중에 하나는 ‘인간의 삶은 현세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은 후에도 계속되는 영원한 삶의 풍족함을 잊으면 이세상의 것을 다 얻었다 할지라도 모든 것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부자는 복이 많은 사람입니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은 다 복이 없는 사람입니까? 역시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경험으로 보면, 복을 간수하지 않으면 화가 돌아옵니다. 복 안에 화가 있습니다. 단순한 예이지만 로또 복권이나 토지보상 등으로 졸지에 부자가 된 사람의 거의 모두가 횡재를 하기전보다도 더 비참한 생의 마감을 했다는 통계가 나와 있습니다. 수고와 땀이 없는 복은 결코 복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가난이 천국으로 가는 보증수표냐? 그것도 아닙니다. 가난이 주는 비참한 고통 때문에 인간의 한계를 느끼며 하느님께 매달린 사람이라야 천국의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의지하지 않고 물질에만 의지하려 하면 더 탐욕스러워지고 몰염치해지며 더욱 천박해집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면 지금당장은 여려 울지 몰라도 복중의 복을 차지하게 됩니다. 하느님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많이 가졌다고 해서 자만할 것도 아니고 가진 것이 없다고 해서 실망할 것도 아닙니다. 많이 소유한 사람은 많이 베풀고 적게 가진 사람은 절망 속에서도 인내하고 희망을 키워가야 합니다. 지금의 처지를 불평 불만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은총의 기회로 만들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분명 우리를 도우십니다. 따라서 믿으십시오! 믿는 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라자로는 모든 것을 잃은 초라한 삶을 살았습니다. 불행이란 불행을 다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난 때문에, 불행 때문에 하느님께 희망을 두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느님나라에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나 몰라라 했지만 “라자로” 라는 이름, 즉 “하느님께서 도우신다.” 는 의미대로 하느님께서 그를 도왔기 때문입니다. 라자로의 불행을 외면하지 않으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처지와 상황을 반드시 헤아려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서 최선에 최선을 더하시기 바랍니다.
잠언 30장 8절에서 9절을 보면 마싸 사람 야케의 아들 아구르의 말이 나옵니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 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십시오, 먹고 살 만큼만 주십시오. 배부른 김에 하느님이 다 뭐냐? 하며 배은망덕하지 않게 가난한 탓에 도둑질하여 하느님의 이름에 욕을 돌리지 않게 해주십시오.)
이 기도가 우리의 간절한 기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무쪼록 살아서도 천국이요, 죽어서도 천국이 될 수 있는 은총이 충만하시기 빕니다. 그리고 먼 훗날의 천국을 기대할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부터 영원을 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주의 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있지 않다”(루카12,15) 너희는“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가지도 못한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6,19). 재물을 보물로 삼지 말고 주 하느님을 가장 귀한 보물로 삼고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방효익신부-
오늘 제1독서(아모 6,1.4-7)는 사마리아의 지도자들에게 두 번째로 불행을 선언합니다.
아모스는 첫 번째 불행선언(5,18)에서 정의롭지 못하고, 형식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북쪽 이스라엘에게 구원이 완성되는 “주님의 날”에 죽음으로 끝나는 어둠이 닥칠 것이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 불행선언(6,1)에서는 부정부패를 일삼아서 치부하는 북쪽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에 있는 정치, 사회, 종교 지도자들이 사치와 향락에 빠진 채 예배만 드리면 된다는 생각을 비난하면서 북쪽 아시리아의 침략을 예언합니다. 북쪽 이스라엘의 도시 사마리아에서 하느님께 제사 드린다는 핑계로 방탕한 축제를 벌이는 사회, 정치, 종교 지도자들이 가난한 이들을 철저하게 외면하기 때문에 아모스 예언자는 불행을 선언한 것입니다. 상류층 지도자들이 신앙적이고 순수해야 할 예배를 세속화된 축제로 변질시켰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하느님께서는 선언하셨음에도(아모 5,21-23) 이들은 제사를 핑계로 최고 비싼 음식을 차려놓고 자기들끼리 게걸스럽게 먹고 놀았습니다. 현악기 연주와 더불어 폭음을 하고, 값비싼 향유를 몸에 바르면서 놀아났지만 가난한 이들을 철저하게 외면했습니다.
다른 이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흥청망청 놀아나는 것을 그렇게까지 비난할 것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지만, 가장 좋은 것을 하느님께 봉헌한다는 명분으로 거둬들여서 온갖 사치를 부리면서 가난한 이들을 소외시키는 행위를 반복하기 때문에 비난하는 것입니다. “공정이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해야”(아모 5,24)할 지도자들이 상아침상과 안락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폭식과 폭음, 그리고 유희에 젖은 나머지 국운을 쇠퇴시키는 것은 물론 하느님께 대한 예배를 무시하기 때문에 불행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임을 자처하면서 신앙적 모임에서 자기들의 부와 권력을 자랑하는 태도로 일관하기 때문에 불행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 가운데 대부분이 시리아에 의해 몰락할(기원전 722-721: 2열왕 17장) 것이고, 이들의 흥청거림이 끝장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루카 16,19-31)은 이기적으로 살았던 왕족인 부자의 운명을 말합니다.
루카복음은 부자와 가난한 이의 운명이 뒤바뀜을 행복과 불행의 선언에 자주 연결시키는데(1,46-55; 6,20.24; 12,16-21.33-34; 16,1-9), 가난하게 살았던 라자로의 운명이 뒤바뀌는 내용을 유다인들의 믿음의 형태에 따라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부자(루카 12,16-21)와 왕궁에서 “화려한 옷을 입고 호화롭게 사는 자들”(루카 7,25)에 관한 비유는 마치 동화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주색의 고운 아마포(왕족의 옷)를 입었다는 부자와 그의 집 대문 앞에 종기투성인 몸으로 누워 있으면서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 간절히 바라는, 처참하게 가난한 라자로를 등장시키는데 외모로는 물론 사회적 계급까지도 대조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왕족인 부자의 구체적인 잘못이나 두 인물의 직접적인 만남도 언급하지 않으면서 같이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냥 묻혔다는 부자는 상류층 사람들과 어울리는 왕족이었고, 이기적이었으며, 미식가였던 것 같습니다. “말을 들을 준비를 잘 하고 있다”는 뜻을 지닌 라자로는 개들이 와서 핥아도 아무도 도와주는 이가 없을 절도로 처참했던 상황을 말해줍니다. 라자로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면서 의로운 이들의 죽음처럼 묘사합니다. 왕족인 부자는 죽은 뒤에 처절한 고통 가운데서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서 천상의 행복을 누리고 있는 라자로를 바라봅니다. 똑같은 죽음 뒤에 부자와 라자로의 운명이 정반대로 바뀌었습니다. 살아있을 때의 화려함과 이기적이었음을 후회하듯이, 마치 구걸하던 라자로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세 번에 걸쳐서 아브라함 할아버지에게 간청합니다. 그러나 화려하게 살았던 왕족의 간청은 모두 거절됩니다.
첫째 간청에서 불길이 이글거리는 곳에 있는 부자는 라자로를 보내 물을 찍어 혀를 식혀 달라고 하는데, 불길 속에서 겪는 고초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있는 노력이나 희망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미식가였던 부자는 불길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을 때 고상하고 고귀한 말을 많이 늘어놓았고, 값비싼 음식만 먹던 자기 혀를 식히게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서 떨어뜨려달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부자가 살아 있을 때 했던 일에 따라서 고초를 겪는 것이라고 합니다.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는 부자의 모습은 “불행하여라”,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루카 16,14-15) “너희 부유한 사람들!”(루카 6,24)이라고 하신 말씀을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아브라함은 죽음의 구렁을 건네줄 능력이 없고, 그렇게 해주실 분은 오직 한 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실 그리스도뿐이심을 강조합니다.
둘째 간청에서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는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자기가 다섯 형제들이 있는데, 라자로를 마치 왕궁에서 부리던 심부름꾼처럼 보내, 그들이라도 자기가 있는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도록 해달라고 합니다. 죽은 부자는 자기 형제들도 자기처럼 살고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인합니다. 산 이와 죽은 이들 사이에 큰 구렁이 있어 오갈 수가 없다고 했는데도, 라자로를 보내달라는 것도 결국 자기 형제들에게 한정시키는 이기주의자의 모습을 철저하게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하여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에게,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에 관한 모든 것이 기록된 모세(오경)와 예언자들(예언서)이 있으니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면 된다고 하십니다.
그러자 즉시 셋째 간청에서 죽은 부자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야 회개할 것이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자기처럼 죽어 묻혔다가(루카 23,53) 되살아나신 예수님(루카 24,6)을 뵙고서야 회개할 것이라고 예수님을 대신해서 말합니다. 아직도 상황파악을 못하고 있는 죽은 왕족, 부자는 자기가 살아나서 직접 형제들을 찾아가야 한다고 말해야 하지만 그럴 줄 모릅니다. 앞에서도 그랬지만, 이기적인 부자는 자기가 직접 찾아가는 희생은 싫어합니다.
오늘 제2독서(1티모 6,11-16)에서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기본적인 의무와 책임을 강조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의 독서 앞에서 이단적 가르침을 선포하는 이와 탐욕에 빠진 이들의 운명은 파멸과 멸망이라는 올가미에 걸린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공동체의 신앙적 지도자이며 하느님 백성의 모범으로 살아야 할 티모테오가 남을 지도하기에 앞서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먼저 갖춰야 할 기본적인 소양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고합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부르심을 받은 티모테오에게 복음에 대한 올바른 가르침과 돈에 대한 탐욕을 버리고, 의로움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라고 합니다. “썩지 않는 화관을 얻기 위해”(1코린 9,25), “실격자가 되지 않기 위해”(1코린 9,27)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흠 없고, 나무랄 데 없이 계명을 잘 지키고, 사랑의 실천을 통해 선을 추구하는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2티모 4,7)라고 말할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계명들을 잘 지키고, 믿는 바를 형식적으로가 아니라 충실하게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들에서 부자와 지도자들이 다른 이들에게 잘못을 저질렀다는 내용은 표현되지 않습니다만.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재물에 대한 탐욕에 빠지면 자신들의 운명이 나쁘게 바뀐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으로 살면서 잘못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기적인 삶에 빠진 나머지 마땅히 해야 할 선을 행하지 않았음을 탓하는 것입니다. 개들(이방인들)조차도 라자로의 종기를 핥아서 치료해주었지만 부자는 가난한 라자로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의 지도자들이 제사를 명분으로 흥청망청 놀아났지만 “정의와 공정을 실천함이 주님께는 제물보다 낫다.”(잠언 21,3)는 말씀을 잊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 봉헌하는 모든 경배예절(거룩한 집회)은 철저하게 말씀에 젖어드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해줄 능력은 수금 소리에 따라 되잖은 노래를 불러대는 것이 아니라(아모 5,23) 오직 우리의 주님, 그리스도의 말씀에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젖어들어 살아갈 때 우리에게 천사의 도움은 늘 따라다닐 것입니다.
번제물과 곡식을 제 아무리 많이 바친다 해도, 살진 짐승들을 엄청나게 바친다 해도 공정이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기 전까지 하느님께서는 모두 거들떠보지도 않으실 것입니다(아모 5,22-24).
각자의 행실대로 갚아주시는 하느님(로마 2,6)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우리는 저마다 자기가 한 일을 하느님께 사실대로 아뢰게 될 것입니다.”(로마 14,12) 그래서 의로움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재물의 위험성
-조욱현신부-
지난주일 독서와 복음을 통하여 우리는 ‘재물의 사용법’에 대한 가르침을 들었다. 그 재물이 사람들 사이에 형제애의 다리를 놓아 가난하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친구’로 사귀는데 사용하지 못한다면 자기파멸과 하느님과 형제들을 해치는 도구가 되어버린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이제 오늘의 독서와 복음은 그 위험성이 상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것임을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가난한 라자로의 비유를 통해 재물이 사람들로 하여금 궁핍한 다른 형제들 앞에서 그 마음을 얼마나 메마르게 할 수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말씀하고 계시다.
제1독서: 아모 6,1.4-7: 기지개 켜며 흥청대던 소리 간데없으리라.
1독서는 예언자 아모스가 때를 잘 타 쉽게 돈을 벌어 갑작스레 부자가 된 사람들의 몰염치한 사치스러운 생활을 엄하게 고발하고 있으며, 마지막 절은 북부왕국의 몰락이 다가오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안심하고 흥청대는 사람들’은 이제 막 폭발하려는 화산 입구에서 즐기는 사람들과 같다는 것이다. 재물이 사치와 허영을 드러내는 전시품이 될 때, 그 때문에 사회는 갈라지고, 사회적 불안을 야기하고 있고, 더 나아가 온갖 형태의 도덕적 무질서를 조장하며, 가난한 이들의 마음속에 응어리가 지게하고 또한 의지가 박약한 다른 많은 사람들을 그러한 행동으로 몰아갈 수 있으며, 사회가 커다란 어려움에 처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이 사회에 만연되어있는 ‘소비주의’는 생필품조차 갖추지 못한 사람들에게까지도 확산되어 있다. 이러한 풍조는 결국 그들의 생활을 더 어렵게 하고 절망적인 욕구불만과 거센 분노를 자아낸다. 그러기에 재물이 올바로 사용되지 않고 공평하게 분배되지 못할 때 그것은 참으로 사회적 재난을 야기할 수 있다.
복음: 루카 16,19-31: 부자와 라자로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재물이 오직 개인의 만족과 성취의 수단이 되어버릴 때, 찾아드는 모든 ‘파멸적’ 능력을 극적인 형태로 제시하고 있다. 재물은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을 보지도 느끼지도 못하게 마음을 굳게 닫게 한다. 오늘 복음의 두 주인공은 더 이상의 부조화를 볼 수 없을 정도이다. 부자는 풍요한 의식주의 여유를 가지고 있었으나, 가난한 라자로는 부자들이 식사 후에 손을 깨끗이 하는 빵부스러기로도 배를 채울 수 없었으며, 돌아다니는 개까지 그에게 달려들어 상처를 핥아 다시 헤집어 놓음으로써 고통을 배가시켰다. 그 부자는 정말 ‘자기 집 문간에’ 드러누웠던 그 거지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을까? 팔자가 그렇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죽음의 순간에 갑자기 입장이 바뀐다. 라자로는 영원한 행복을 뜻하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배고프지 않은 식탁에 자리 잡게 되고, 그 부자는 ‘죽음의 세계’에서 고통을 겪게 된다. 그러면서 생애 동안에는 관심도 두지 않았던 라자로의 도움을 구하고 있다. 그러면서 생전과 같이 누구에게나 명령을 하며 살았기 때문에 ‘죽음의 세계’에서도 아브라함에게조차 명령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는 소리를 질러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를 불쌍히 보시고 라자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으로 물을 찍어 제 혀를 축이게 해 주십시오”(24절). 하여간에 오늘 복음의 비유는 전통적인 상징적 개념을 이용해서 하느님의 정의가 어떻게 인생의 불의와 불공평을 다시금 공정하게 짜 맞추어 주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사에 개입하시는 것 같지 않다는 이유로 어떤 사람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손해를 본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결코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께서 그 무시당하고 천대받는 거지를 ’라자로‘라고 부르시는 것도 의미가 있다. ’라자로‘라는 말은 히브리어에서 ’하느님이 도와주신다.‘(El'azàr)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여간에 아브라함이 부자에게 한 대답은 이 정의에 입각한 ‘재균형’에 관한 것이다. “얘야, 너는 살아있을 동안에 온갖 복을 다 누렸지만 라자로는 불행이란 불행을 다 겪지 않았느냐? 그래서 지금 그는 여기에서 위안을 받고 너는 거기에서 고통을 받는 것이다”(25절). 그러나 하느님께서 모든 균형을 이루어주실 것으로 생각하여 무기력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모두가 세상의 사물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형제적 사랑과 재화를 나누어 쓸 수 있는 마음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부자는 자기의 불행을 근본적으로 깨닫고 아브라함에게 라자로를 보내어 자기 형제들만이라도 그곳에 오지 않도록 경고해 달라고 청한다(28절). 그 형제들이 생활을 바꾸면 그 고통스러운 곳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음을 들어 그것도 거절하고 있다.
사실 형제적 사랑이나 재화를 서로 나눌 수 있도록 변화되는 데는 거창한 징표나 기회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그저 단순히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으로 넉넉하다는 것이다. 오늘 날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으로 족하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은 저승에서 사자(使者)가 온다고 하여도 믿지 않을 것이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오빠인 라자로도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의 마음이 굳어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이려고 하였다(요한 11,46-53; 12,10-11 참조). 자기가 가지고 있는 편견을 버리고 새로운 눈으로 사물을, 이웃을 바라보려고 하여야 한다.
이 부자는 어찌 가난한 이의 외침에 자기 마음의 문을 닫았을까? 그것은 “먹을 것을 굶주린 이에게 나눠주고, 떠돌며 고생하는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고, 헐벗은 사람을 입혀주며 제 골육을 모르는 체하지 말라.”(이사 58,7)는 하느님의 말씀에 마음의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느님의 말씀에 마음을 닫은 것은 재물을 소유하고 모든 것을 다 소유한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즉 그가 소유한 모든 재물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그 사물들 속에 자신을 상실해버려 더 이상 하나의 인격체이기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비유 속에서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마음의 문을 열 능력이 없는 사람은 바로 그 향락을 즐기는 부자라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재물을 잘 사용함으로써 ‘위험성’에 떨어지는 일이 없이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은총을 청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하자.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루카 16, 25)
-한상우신부-
물들임이
시작된 곱고
고운 가을의
따뜻한 마음입니다.
고운 가을속에서
우리의 마음
우리의 만남은
어떠한가를 성심껏
성찰하게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중요한 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삶이란
우리모두를 위한
사랑의 선물이며
사랑의 시간입니다.
가장 놀라운 것은
우리의 삶이
일회적인 죽음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의 역사를 안고
하느님을
다시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모두에게
늘 가까이 있습니다.
모두 다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어떤 존재도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란 없습니다.
소중한 사람들끼리
서로의 삶을
더 따뜻이 마주하며
더 환하게 비춰주는
사랑의 시간이 되길
기도드립니다.
가난한 라자로를
따뜻하게 맞이하는
사랑을 실천합시다.
지금 우리 자신이
지니고 있는
작은 것조차
우리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삶이란 더 많은 것을
지니기 위한 욕심의
시간이 아닌
더 사랑하기 위한
마음의 시간입니다.
사랑의 마음이
우리모두를
구원할 것입니다.
지금 이순간
우리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위로와 믿음을
나누는 고운
가을되십시오.

-오상선신부-
오늘의 미사 독서들에는 당신께서 만드신 모든 피조물이 무엇을 얼마나 소유했는지에 관계없이 서로 협조해 두루 행복하길 바라시는 주님의 "간절한" 바람이 들어 있습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 누워 있었다"(루가 16,19-20).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비유로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은 당대 유력 종교 지도층으로 부와 권력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율법 준수와 신심 행위에도 열성을 다하던 이들이었지요.
예수님은 운 좋게 부잣집에 태어났거나 부자가 되어 호화로운 삶을 누리며 사는 어떤 이, 그리고 굶주림과 질병 등 세상의 온갖 고초에 노출된 채 인간의 기본 존엄성이 훼손된 상태로 부자의 면전에서 목숨을 연명하던 한 가난한 이, 라자로를 등장시키십니다. 그런데 이들의 신세는 사후에 뒤바뀌지요.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놓여 있어서"(루카 16,26).
저승에서 고통을 겪던 부자가 아브라함 곁에서 복락을 누리는 라자로를 제게 보내 좀 도와주게 하라고 소리 질러 청하자 아브라함이 한 대답입니다.
생전에 굶주리던 라자로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루카 16,21)지만 요구는커녕 부탁도 하지 못했지요. 그는 자기들의 권리 회복을 위해 소리를 낼 줄 모르는 세상의 가난한 이들을 대변합니다. 그런데 부자는 당장 자신의 불편에 대해 호소하며 라자로를 보내라고 요구하지요. 그는 타인의 고통에는 무관심하면서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는 온갖 사회적 정치적 행정적 시스템을 동원해 기득권을 쟁취하는 일부 부유층 권력가들을 상징합니다. 그의 내면에는 반드시 좋은 대접을 받아야 하는 존재로 스스로를 의식하는 우월의식이 존재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상에서 부자와 라자로 사이에는 비록 빈부차이는 있었을지언정 큰 구렁같이 건널 수 없는 공간 따위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부잣집의 대문이 그런 역할을 한 것 같네요. 그집 대문은, 세상의 모든 문이 그렇듯 소통과 연대와 협력의 통로가 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후의 건널 수 없는 구렁 이상으로 견고하고 위협적인 철벽이 되어 버립니다. 그 결과 부자는 그 구렁을 고스란히 마주하게 되지요.
제1독서는 아모스 예언자가 전하는 주님의 불행 선언입니다.
"불행하여라. 시온에서 걱정 없이 사는 자들, 사마리아산에서 마음 놓고 사는 자들!"(아모 6,1)
이스라엘에서 예언자로 활동한 아모스는 본래 유다의 목양업자였지요(아모 1,1 참조). 그는 시온 즉 예루살렘이 가리키는 남 유다와 사마리아라 일컫는 북 이스라엘, 곧 전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의 경고를 보냅니다.
그가 묘사하는 부유층의 모습은 호화롭고 자기본위적인 사치와 향락의 민낯입니다. 흔히 "내가 내 돈 가지고 즐기는데 왜?" 항변하기 마련인 유희는 곧이어 찾아올 이민족의 침략과 유배 때 맨 먼저 사로잡혀 끌려가게 될 신세로 환산될 것이고, 그들은 자기들이 무심했던 가난을 처절히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가진 것이 죄냐고 묻고 싶은 분도 계실 겁니다. 아니요. 절대 아닙니다. 모든 부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축복입니다. 하느님의 충실한 집사가 되어 잘 사용하라고 맡기신 것이니 재물의 소유 그 자체가 죄악이 아닙니다. 다만 "요셉 집안이 망하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는다"(아모 6,6)고 예언자가 전한 말씀처럼, 자기 곁에서 굶주림과 질병과 소외와 상실로 망해가는 이웃을 외면할 때 하느님께 실망을 안겨드리게 됩니다.
우리 대문 앞에, 즉 우리 면전에 누워 있는 "가난"에 대한 방임, 무관심, 소극적 대처도 적극적으로 악의를 품고 누군가를 해치는 것만큼 하느님께서 아파하시는 세상의 상처입니다. 노아의 홍수 이후 징벌을 후회하셨던 하느님(창세 8,21 참조)께서 반대로 '아뿔싸! 내가 사람을 잘못 봤구나. 나눌 깜냥도 못되는 이에게 너무 많이 맡겼구나' 하고 후회하실지도 모릅니다.
언제든지 활짝 열릴 수 있고 안과 밖이 수평으로 만날 수 있는 문을 사이에 두고 부자와 라자로가 존재했다는 건 어쩌면 희망입니다. 하느님은 그 문이 열리길 바라셨던 겁니다. 인간의 고통 앞에서 닫힌 문이 활짝 열리기를, 어떤 조건을 지녔건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환대하고 동등히 교류하기를 간절히 바라셨습니다. 라자로의 "간절함" 안에 바로 그런 하느님의 간절함이 들어 있었던 것이지요.
부자가 라자로에게 필요한 음식과 약뿐 아니라 따뜻한 인사와 눈길을 주는 장면을 상상해 봅니다. 아마 그랬더라면 그 부자는 라자로보다 더 많은 걸 받았을 겁니다. 사후 세계에서만이 아니라 지상에서도, 나누는 바로 그 순간에도 말이지요. 이는 나눔에 참여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진실이지요.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티모테오를 "하느님의 사람"(1티모 6,11) 라 부르며 "훌륭한 신앙 고백"에 대해 치하합니다.
"믿음을 위하여 훌륭히 싸워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십시오"(1티모 6,12).
그런데 이 "싸움"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 박해나 순교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가장 가까이 있는 내 집 대문 앞의 가난한 이에게 문을 열고 필요를 묻고 내 것을 나누는 일이 곧 훌륭하게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늘 쉽기만 하지는 않을 겁니다. 주는 입장에서야 그들이 고분고분하고 순종적이고 굽실대며 무엇이나 감지덕지하기를 바랄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가난한 이들도 모든 인간과 마찬가지로 약하고 상처입은 영혼의 소유자이지 천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유한 이나 가난한 이나, 나누는 이나 받는 이나 오늘 들려주시는 사도 바오로의 권고를 되새겨야 합니다.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십시오"(1티모 6,11).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카 16,31).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구원은 기적에 있지 않고 말씀에 있습니다. 가난에 대한 권고 역시 갑자기 등장한 이론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성경 안에 애초부터 담겨 있던 하느님의 혼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모상을 지닌 모든 인간이 존엄하고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길 진정으로 "간절히" 바라시며 사람을 만드셨으니까요(창세 1,26 참조).
오늘 복음은 "징벌" 이야기가 아니라 "기회" 이야기입니다. 우리에게 아직 건너갈 수 없는 구렁이 가로놓여 있지 않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요!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활짝 열어젖힐 수 있는 문과, 얼마든지 다가가 손을 맞잡을 수 있는 하느님의 사람, 가난한 이들이 대문 앞에 있다는 게 행운이 아니겠는지요?
가난은 고귀합니다. 가난한 이나 부유한 이나 구원으로 이끄는 교차점이 될 수 있기에 그렇습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유하시면서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기에"(복음 환호송 참조) 그렇습니다.
여러분의 가난을 축복합니다. 여러분어 부유함도 축복합니다. 이 모두가 다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 테니까요. 아멘.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6년 9월 25일 연중 제26주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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