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9월 27일 연중 제 25주간 금요일

Margaret K 2019. 9. 26. 18:33

2019년 9월 27일 연중 제 25주간 금요일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빈첸시오 드 폴 성인은 1581년 프랑스 랑드 지방에서 소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프란치스코 수도원이 운영하는 학교에서 공부한 그는 1600년에 사제품을 받았고, 1617년에 가난한 이들을 만나는 체험을 하였다. 이때 그는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이 곧 하느님을 섬기는 것’임을 깨닫고, 자선 단체인 사랑의 동지회, 전교회, 사랑의 딸회를 창설하여, 가난한 이들을 돕는 데 일생을 바쳐 봉사하였다. 1660년에 선종한 빈첸시오는 1737년에 시성되었다. 1885년에 레오 13세 교황은 그를 ‘모든 자선 사업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오늘날 수많은 이들이 성인의 영성을 실천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도 사랑의 딸회, 사랑의 씨튼 수녀회,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와 평신도 사도직 단체인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가 서로 연대하며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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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루가 9,18-22)


Who do you say that I am?”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하까이 예언자는 즈루빠벨 유다 총독과 예수아 대사제에게, 하느님의 집의 새 영광이 이전의 영광보다 크리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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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어니스트는 자신의 동네에 있는 큰 바위 얼굴을 가진 사람을 꼭 만나 보고 싶었습니다. 어니스트는 온화하고 사랑 가득한 얼굴을 가진 위대한 사람이 그 마을에서 나온다는 전설을 듣고 자랐습니다. 시간이 흘러 어니스트는 그렇게도 바라던 큰 바위 얼굴을 닮아 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인품을 지니게 된 어니스트를 보며 그가 바로 큰 바위 얼굴임을 알게 됩니다. 너새니얼 호손의 단편 소설 ‘큰 바위 얼굴’의 줄거리입니다.바라보면 닮아 갑니다. 좋아하는 것만을 오래 바라볼 수 있습니다. 좋아해서 오래 바라보면 그것과 하나가 됩니다. 썩은 고기만 먹는 하이에나와 같은 맹수들의 얼굴은 매우 사납습니다.그러나 초식 동물의 얼굴은 무섭지 않고 온화합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나의 모습이 변합니다.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군중이 당신을 누구라고 하더냐고 물으십니다. 군중들은 세례자 요한이나 엘리야, 옛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 살아났다고 말합니다. 이는 군중들이 보고 싶어 하는 예수님의 상을 말해 줍니다. 오직 베드로만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죄를 보속하시려고 십자가의 수난을 받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실 운명을 지니신 분이십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바라보지 않는 이유는 자신들도 십자가를 져야 하는 운명이 될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로 바라보려면 십자가를 가장 사랑하여 오래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삶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여전히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리스도를 순수하게 그리스도로 바라볼 때만 나도 그리스도가 될 수 있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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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때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처음 가본 친구 집인데 글쎄 중국집입니다. 더군다나 어머니께서는 친구가 놀러 왔다고 자장면까지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자장면이 최고의 음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장면 먹은 티를 내려고 일부러 입가에 묻은 자장을 지우지 않고 있기도 했습니다. 이런 자장면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이 친구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우리 아버지는 왜 중국집 사장님이 아니라 선생님이신 거야?’라면서 어린 마음에 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집에서 식구들과 함께 자장면을 시켜 먹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배탈이 난 것입니다. 배가 계속 아파 왔고 수없이 화장실을 다녀와야만 했습니다. 한동안 자장면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장면을 먹으면 또 배가 아프고 고생할 것만 같은 두려움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부터 중국집 아들 친구가 전혀 부럽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누군가가 가지고 있으면 부러움을 갖게 됩니다. 가지고 있지 않은 나는 불행한 사람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부러움은 절대로 영원할 수 없습니다. 나의 취향이 바뀌는 것처럼 부러움의 대상도 계속 바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지고 있고 없고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변하고 없어질 수 있는 것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에 자신의 모든 것을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있는 것에 감사할 수 있으며, 더불어 없는 것에도 의연하게 넘길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옛 예언자 중의 한 분으로 이야기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시지요. 군중의 생각이 아닌 제자들의 생각을 물었던 것이지요. 그러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정답을 이야기합니다.

군중들은 그 누구도 주님이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보여 주신 놀라운 기적을 보면 충분히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왜 그런 고백은 하나도 없었을까요?

군중들은 진짜 주님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의 관점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모습만 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 삶을 뛰어넘은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을 보지 못하고, 단지 로마의 지배에서 해방해줄 정치적 메시아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옛 예언자 중의 한 명으로 예수님을 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들과 비교할 수 없는 크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을 제대로 바라보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위대한 인물에게는 목표가 있고,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소망이 있을 뿐이다(워싱턴 어빙).



죄송합니다.

신자 중에 저의 휴대전화 번호를 가르쳐 달라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갑곶성지 대표 전화 번호가 있지만, 저와 직접 연락할 수 없으니 번호를 요구하는 것이겠지요. 휴대전화 번호를 주고받는 것이 일상이 된 사회 분위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요구로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번호를 알려주고 나면 곤란한 일들이 밀려듭니다. 아무 때나 전화가 오고(밤 11시 넘어서 전화 오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이 시간에 저는 꿈나라에 있습니다),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낸 뒤에 확인하지 않는다(워낙 잘 보지 않습니다)고 불평도 하십니다.

그래서 제 번호를 잘 공개하지 않습니다. 대신 사무실에서 상대방의 번호를 물어보고, 제가 직접 전화를 거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물론 이때 쓰는 전화는 단순히 통화만 할 수 있는 옛날 전화입니다. 카카오톡이 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통화하고 난 뒤에는 그냥 전원을 꺼버리기 때문에 상대방이 이 번호를 안다고 해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분에게 저는 그저 ‘한 사람’일 뿐이지만, 많은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저로서는 그 사람이 ‘한 사람’일 수 없습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이 누군가에게 특별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번호를 물어보고 만남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런 요구가 종종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이런 저의 고충을 조금만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로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전삼용신부-


오늘은 가난한 이들의 아버지 성 빈센트 드뽈 기념일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살고 또 가난한 이들을 위해 여러 수도회를 세운 성 빈센트 드뽈이 처음부터 그렇게 거룩한 사람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는 젊었을 때 출세하고 싶어서 일찍 사제서품을 받고 싶어 했습니다. 신학교 시절엔 아버지가 형편없는 옷차림으로 다리를 절뚝거리며 아들을 찾아왔을 때 체면이 깎일까봐 창피해서 만나지 않은 적도 있습니다. 또한 자신이 시골 출신으로 돼지치기를 했었다는 것을 솔직하게 고백하지도 못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그는 참으로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살아보았던 두 번에 걸친 하느님 체험은 성 빈센트 드뽈을 완전히 바꾸어놓았습니다.

      그 첫 번째 체험은 그가 도둑질을 했다는 누명을 쓰고도 여섯 달 동안 침묵을 지킨 일입니다.

      두 번째 체험은 어떤 신학박사가 신앙의 유혹에 빠져있는 것을 돕기 위해 그 유혹을 자신이 대신 받겠다고 기도한 것입니다. 실제로 그러한 유혹이 그에게 주어졌고 그는 유혹에 빠질 듯하면 ‘사도신경’을 베낀 종이를 가슴에 품고 그 위에 손을 대며 신앙을 새롭게 고백하곤 했습니다. 어느 날 신앙에 대한 심한 유혹에 사로잡혀 괴로워하고 있을 때, 그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평생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께 바치기로 서원합니다. 그 때부터 마음을 괴롭히던 유혹과 고통은 사라지고 신앙에 대한 확신과 영혼의 평화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어떠한 모습을 닮고 싶어 합니까? 영광의 예수님입니까, 아니면 고통 받고 멸시 받는 십자가의 예수님입니까? 요즈음 우리가 보고 있는 루카복음은 참된 신앙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본받는 것임을 줄기차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로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제자들은 군중이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옛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 살아나셨다고 말한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은 이번엔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은 마귀들도 알았습니다. 베드로의 고백과 마귀의 고백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이 복음 바로 위로 올라가보면 헤로데가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라고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헤로데도 예수님의 정체를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헤로데가 예수님을 알고자 하는 이유는 자신의 호기심을 채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이 마귀의 신앙고백입니다.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한 관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바로 위에는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야기가 나옵니다.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의미합니다. 당신의 봉헌으로 열두 광주리, 즉 이스라엘 백성이 탄생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통해 한 백성이 탄생하는 영광은 자기 자신을 양식으로 내어주는 십자가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당신을 알아보는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헤로데는 자신을 살리기 위해 예수님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의 등에는 자기를 죽이는 십자가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내가 이웃을 살리는 양식이 되려는 마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예수님을 바로 알아보게 됩니다. 십자가 없는 신앙고백은 가짜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교만하면 기쁨을 잃습니다. 성 빈센트 드뽈처럼 겸손해지고 가난해질 때 참 기쁨을 다시 찾습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통해 나에게 주어지는 영광입니다. 고 김수환 추기경님이 이런 고백을 했다고 합니다.

      “나는 가난한 집 출신입니다. 여러 해 동안 남의 집 셋방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신부가 되면서 가난을 점점 잊어버리더니 주교, 대주교, 추기경이 되면서 불행하게도 귀족이 되어버렸습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당신을 낮추신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랑은 겸손입니다. 이걸 먼저 깨달아야합니다.”

      우리가 어떤 때 마음이 편안하고, 어떤 때 기쁨이 솟아나는지 잘 기억해야합니다. 확실한 것은 더 가지고, 더 교만해질 때 평화와 기쁨을 빼앗긴다는 것입니다. 가난해지고 겸손해지는 길에서 평화를 찾으려고 하는 사람만이 예수님을 온전히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조재형신부-


인터넷 공간에서 나만의 공간을 얻으려면 이름(ID)과 비밀번호(Password)가 있어야 합니다. 기억력도 예전 같지 않고, 방도 많기에 따로 적어놓습니다. 적어놓고 기억해도 깜빡거릴 때가 있습니다. 다시금 내 방을 찾아가려면 인터넷은 내가 누구인지 묻습니다. 나의 인격, 나의 직장, 나의 취미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의 스마트폰이나, 메일로 인증번호가 옵니다. 인증번호는 숫자입니다. 인터넷 공간에서 나를 알 수 있는 건 인증번호라는 숫자입니다. 숫자를 나의 자리에 넣고, 다시금 비밀번호를 설정하면 비로소 나의 방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며칠 전에도 번호를 잊어버려서 30분은 씨름했습니다. 차분하게 하면 10분도 걸리지 않는 일입니다. 급한 성격이 일을 더디게 만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생각합니까?”라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었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이 전하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엘리야가 다시 왔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예언자 중에 한 분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러면 여러분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합니까?”라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의 생각도 달랐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서 높은 자리, 영광의 자리에 오를 거로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들도 예수님 곁에서 권력을 행사하고 싶어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과 예수님 주변에 모인 군중을 보면 그렇게 보였습니다. 로마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해 주리라 믿었던 제자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 나라는 로마로부터 독립된 나라라고 생각했습니다. 독립을 위해서라면 폭력도, 전쟁도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베드로는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베드로의 대답에는 초대교회의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참하게 억울하게 돌아가셨지만,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 성령과 평화를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셨고, 하느님의 오른편으로 승천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새로운 사명을 충실하게 수행하면 예수님께서는 다시 오시어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하느님의 백성을 따로 선별하실 겁니다. 이것이 초대교회가 가르쳤던 하느님의 그리스도였습니다.

 

20199월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여러분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합니까?”라고 물으시면 어떻게 대답하시겠는지요? 니케아 신경과 사도신경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참인간이며 참 하느님이셨던 예수님, 삼위일체의 한 위격이신 예수님,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님도 좋습니다. 그러나 제자들과 함께 먹고, 제자들과 함께 복음을 전하셨던 역사의 예수님을 체험하고 느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 곁에서 함께 숨 쉬고, 내가 그 곁에서 함께 울고 웃으면 좋겠습니다.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믿고 물 위를 걸어보면 좋겠습니다. 마귀를 쫓아내고 복음을 전하고 기쁜 마음으로 예수님께 돌아가면 좋겠습니다. 신앙의 예수님, 교리의 예수님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삶의 예수님, 함께 고난받는 예수님, 우리 때문에 애통해하시는 예수님을 만나면 좋겠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기러 왔고,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사할 때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 봉사하는 것입니다!

 -양승국신부-

 

우리 각자가 지니고 있는 이름이라는 것이, 별것 아닌 것 같아도, 각각의 이름에 담겨있는 의미, 지향하는 간절한 희망이포함되어 있기에, 무척이나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과거 우리 할아버지들께서는 손자 손녀가 태어나면, 좋은 이름을 지어주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하셨습니다. 그 덕분에 한때 ‘작명소’ 경기도 좋았습니다.

 

 한때 어머님들 가운데 꽤 많은 분들이 할아버지가 지어주신 촌스런 이름이 너무 싫었던 나머지, 과감하게 예쁘고 고상한 이름으로 개명하던게 유행이었습니다. 어머님들께서 거금을 투자해서 큰 마음 먹고 이름을 바꾸었지만, ‘그분’ 입장에서 볼때, 연세에 비해 지나치게 앙증맞고 소녀스런 이름을 부르자니 너무 이상해서, 자연스레 옛날 이름을 부르겠지요. 그러다 혼나는 분들 제가 한두번 본게 아닙니다.^^

 

 오늘 우리는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의 축일을 경축하고 있습니다. 빈첸시오(Vincencio)라는 이름은 라틴계열 언어 Vincere(승리하다, 정복하다) 동사가 원형입니다. 빈첸시오는 자신의 이름처럼 온 세상을 사랑으로 정복하고 승리했습니다.

 

 폭력이나 전쟁, 야욕과 권모술수로 세상을 정복하려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이 시대, 사랑의 승리자, 사랑의 정복자였던 빈첸시오의 생애가 더욱 각별해 보입니다.

 

 빈첸시오 사제의 전 생애가 가난한 이웃들을 향한 한없는 사랑과,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대대적인 자선활동으로 가득 찬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그분의 전기를 읽어보면 즉시 답이 나옵니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그 맛을 압니다. 한 때 배고파 본 사람만이 지금 굶주리고 있는 사람의 처지가 얼마나 비참하고 힘겨운지를 잘 압니다. 빈첸시오의 인생은 마치 놀이공원의 바이킹 오르내리듯 했습니다. 어쩌다보니 그는 인생의 가장 낮은 밑바닥 체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젊은 시절 그는 참으로 기구한 운명과 마주하게 됩니다. 사제품 이후 좀 더 깊이있는 신학공부에 매진하고 있던 빈첸시오 드 폴에게 한 가지 좋은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마르세이유의 한 귀부인이 학비에 보태라고 거금의 유산을 기증하겠다는 것입니다.

 

 한 걸음에 달려간 그는 두둑한 봉투를 건네받고 품에 간직한 채 배를 타고 돌아오던 중이었습니다. 불행하게도 해적선의 습격을 받아 돈뿐만 아니라 지니고 있던 모든 소지품마저 탈탈 털리고 말았습니다.

 

 불행은 한꺼번에 몰려온다고,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온 몸은 굵은 철사줄에 꽁꽁 묶여 아프리카로 끌려갔습니다. 그는 순식간에 전도양양하던 사제에서 노예 신세로 전락한 것입니다. 그는 선주의 손에서 의사의 손으로, 의사의 손에서 농사꾼의 손으로 넘어갔습니다. 다행히 좋은 주인을 만나 기적과도 같이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젊은 사제 시절 빈첸시오 드 폴이 겪었던 특별한 바닥체험은 그의 성소 여정을 더욱 굳건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저같았으면 그런 불운을 겪게 해주신 주님과 해적들을 원망했을텐데, 오히려 그는 고통과 시련을 통해 더 성숙해지고, 더 큰 그릇이 되는 계기로 삼았습니다.

 

 불행한 사람들만 만나면 빈첸시오 드 폴은 자신의 불행했던 어린 시절, 청년 시절을 떠올리며, 자신이 베풀수 있는 가장 큰 사랑과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당시 사회 안에서 넘쳐흐르던 고아들과 과부들, 환우들과 임종자들, 노예들과 재소자들, 걸인들과 병든 나그네들을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로 여기고 섬겼습니다.

 

 한 가장이 잘못을 저질러 교도소에 수감되었는데, 그가 없으면 부인과 어린 자녀들이 굶어죽게 되었다는 소식이 빈첸시오 드 폴에게 전해졌습니다. 저같았으면, 부인과 어린 자녀들을 위해 금일봉을 전달하는 선에서 도와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교도소 당국에 부탁해 가장을 석방시켜주도록 탄원했습니다. 남은 형기는 자신이 대신 뱃사공 역할을 하며 채워주었답니다.

 

 참으로 위대한 자비의 성인, 빈첸시오 드 폴 사제였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가난’ ‘자선’ 하면 즉시 떠오르는 얼굴이 바로 그의 얼굴입니다. 그의 생애와 영성에서 가장 두드러진 예수님의 모습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삶은 온통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웃들을 향해 아낌없이 조각나고 나뉘어진 거룩한 성찬의 삶, 빛나는 자선의 삶이었습니다.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웃들을 향한 자비심, 연민의 정, 측은지심이 많이도 결핍된 우리들, 피눈물 흘리는 이웃들, 죽어가는 이웃들의 고통 앞에서도 조금의 흔들림없이 꿋꿋이 오늘 우리 자신의 길만을 걸어가는 우리를 향해 빈첸시오 드 폴 신부님은 외치고 계십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의 스승이고 주님이십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사할 때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 봉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생각

 -반영억신부-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양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엘리야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옛 예언자 중의 한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다른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나의 생각을 확실히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여러 활동을 통해 하느님나라에 관해 가르치셨는데 그 가르침을 받은 것에 상응하는 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하고 물으십니다.

 

 베드로는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가9,20). 하고 고백했습니다. ‘하느님의 기름부음 받으신 이’라는 이 말은 이사야의 예언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이사야61,1). 베드로의 고백은 완벽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는다면 그 고백은 힘을 잃고 말 것입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임금으로 정하신 분"입니다.

 

 낚싯바늘만 있고 미끼가 없는 낚싯대, 아무리 낚싯바늘이 좋아도 고기가 물지 않습니다. 말만 있고 행동이 없으면 이와 마찬가지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다면 그에 걸 맞는 삶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기름부음 받은 이’앞에서 떳떳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서있어야 합니다. 나의 행동 하나하나가 나의 예수님에 대한 생각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나는 주님의 손에 들린 몽당연필입니다.”하고 고백했습니다. 수녀님은 연필을 잡은 주님 안에서 기뻐했습니다. 과연 우리는 주님의 무엇입니까? 나에게 있어서 주님은 도대체 어떤 존재입니까?

 

 다른 사람의 신앙을 고백하지 말고 내 신앙을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누구이십니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이사야53,4).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받은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이사야 53,3). ‘그는 우리의 반역죄를 쓰고 사형을 당하였다’(이사 53,8). 그러나 “그는 제 고난의 끝에 빛을 보고 자기의 예지로 흡족해하리라.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 그러므로 나는 그가 귀인들과 함께 제 몫을 차지하고 강자들과 함께 전리품을 나누게 하리라”(이사53,11-12). 라고 선언한 이사야 예언의 말씀이 주님에게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의 주님, 속죄의 제물이 되시고 부활의 기쁨으로 다시 오신 주님, 그분을 우리의 주님으로, 저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기쁨이 더욱 커지시기를 기도합니다.

 

일상 안에서 주님을 첫 자리에 모실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내 할 일 다 하고 짬이 나서야 그분을 생각하는 처지가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도구삼아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먼저 감사하고, 다른 무엇에 앞서 주님의 거처를 마련했으면 좋겠습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묵시21,3). 주님께서는 나의 삶의 자리에서 나를 찾고 계십니다. 내가 그분을 찾기 훨씬 전부터.....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십자가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루카 9,20-22).”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라는 질문은,
겉으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라는 질문이지만,
뜻으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믿느냐?”, 또는 “너희는 왜 나를 믿느냐?”입니다.
< “너희는 나에게서 무엇을 찾느냐?” 라는 뜻일 수도 있고(요한 1,38),
“너희가 나에게서 바라는 것은 무엇이냐?” 라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이 질문을 “너희는 왜 성당에 다니느냐?”로,
즉 우리에게 하시는 질문으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라는 대답은,
“저희는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구세주’ 라고 믿고 있습니다.” 라는 뜻인데,
구세주로 믿는 예수님에게 바라는 것은 ‘구원’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신앙인이 예수님에게 바라는 것은
세속의 부귀영화도 아니고, 물질적인 것도 아닙니다.
궁극적인 구원과 영원한 생명입니다.
우리가 성당에 다니는 이유는 바로 그것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사이비 종교는 예수님을 믿고 열심히 기도하면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을 받는다고 선전합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도 그런 강의나 강론을 하는 사람을 가끔 볼 수 있는데,
그런 사람은 겉으로는 우리 교회에 속해 있지만,
그 사람 속에 들어 있는 것은 사이비 신앙입니다.
정말로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만 바란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이 그리스도(구세주)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신 것은,
‘십자가 수난’의 의미를 온전히 깨달아야만
예수님을 제대로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간단하게 대답했던 베드로 사도는
오순절 날 설교 때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사도 2,36).”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십자가 수난 전의 사도들의 믿음과
수난, 부활 후의 사도들의 믿음은 확실히 다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구세주” 라고 수난 전부터 믿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 모두 달아날 정도로(마르 14,50)
그 믿음은 허약한 믿음이었습니다.
(‘머리로만’ 믿는 믿음이었고, 가슴으로, 또는 삶으로 믿는 믿음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나던 그때 사도들은 아마도,
“내가 이런 꼴을 보려고 예수님을 믿은 것은 아니었다.” 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랬던 그들이었는데, 예수님 부활 후에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은 뒤에는
완전히 변화되어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사도들의 그런 모습은 오늘날에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예비신자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고, 정식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그 단계는 ‘머리로만’ 믿는 단계입니다.
그랬다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어떤 고난과 시련을 겪게 되면,
“내가 이런 일을 당하려고 성당에 다니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라고 말하면서
신앙생활을 중단하는 사람이 생깁니다.
(중단했다가 다시 돌아오는 사람도 있고, 영영 안 돌아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고난과 시련을 겪어도, 그래도 계속 기도하고, 어떻게든 참고 견딘 사람은
힘든 그 시기가 지나가면 ‘온 삶으로’ 믿는 신앙인이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고난과 시련을 일부러 겪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일부러 겪을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특별한 고난과 시련이 없다면 감사하게 생각할 일이고,
자만심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 됩니다.
그렇지만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힘든 일을 한 번도 안 겪을 수는 없습니다.
(인생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예외 없이 사는 동안 아프고 슬픈 일을 몇 번씩 겪게 됩니다.
아무도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우리 인생에도 ‘빠스카의 신비’가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고난과 시련 끝에 부활과 생명을 체험하게 되는 일,
그런 일들도 ‘빠스카의 신비’입니다.
고난과 시련을 겪을 때에는 고통스럽지만,
‘나중에’ 그 의미를 깨닫게 되면, 고통을 잊고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십자가는 부활을 통해서만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물론 죽을 때까지 이해가 안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죽은 다음에 내세에서 그 일들의 의미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신앙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이해가 안 되어도 받아들여서
극복할 수 있게 해 주는 힘”이고,
“십자가 너머에 있는 부활과 생명을 볼 수 있게 해 주는 힘”이고,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해 주는 힘”입니다.
(신앙은 고난과 시련을 만나지 않도록 그것들을 막아주는 힘이 아니라,
그것들을 만나더라도 이겨낼 수 있게 해 주는 힘입니다.)
아무 일도 안 겪는 것이, 즉 ‘무사태평’이 신앙생활의 목표가 아닙니다.
어떤 일을 겪든지 간에 잘 극복해서
궁극적인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신앙생활의 목표입니다.
만일에 현세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만을 바라고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이쪽 세상에서나 저쪽 세상에서나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고,
후회만 하는 불쌍한 인생으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1코린 15,19).
(바라는 대로 잘 먹고 잘 살다가 생을 마친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9,18-22: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질문을 하신다.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18).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중이었고, 예루살렘에는 십자가의 길이 그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즉 예수님은 이제 머지않아 십자가를 지셔야 하며 그 십자가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계획을 이루셔야 하는 중요한 때였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당신의 존재를 올바로 보고 있는지 물으신 것이었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19) 예수님께서는 이 소문에 대해 무어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 그 소문은 언급할 가치도 없이 틀린 소문이기 때문이다. 그 답에 즉시 예수님께서는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20).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받아들여 혼란을 겪지 않도록 그들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여 대하신다. 그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하신 것이다. 하느님의 기름부음을 받아 그리스도라고 불린 사람들이 있었다. 더러는 임금으로 혹은 예언자로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하느님 아버지의 그리스도이신 분은 오직 한 분이시다. 베드로는 하느님의 그리스도”(20)라고 정확하고 올바르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였다.

 

제자들에게 이 질문을 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다. 여기서 제자들은 그 기적에 놀랐고, 그분이 참으로 하느님이시면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수군거리지 않도록 칭송을 받으려 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엄하게 분부하셨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길이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죽음을 당하는 길로써 구원을 이루어야 하는 길이기에 그리스도를 다른 뜻으로 생각하지 못하도록 함구를 말씀하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제자들까지도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믿기 어려워하리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길은 바로 십자가의 길이다. 우리도 그 길을 따라 걸을 때, 우리도 영광을 입을 것이다.

 

제자들에게 함구하라고 하신 것은 그들이 선포해야할 내용 가운데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그들은 주님의 십자가와 수난과 육신의 부활을 선포해야 했다. 제자들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분을 선포해야 했기 때문이다. 신앙생활도 잘못하면 현세적이고 기복적인 신앙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그리스도를 닮는 삶을 살아 그리스도를 올바로 고백하는 신앙인이 되도록 하여야 하겠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카 9, 20)

-한상우신부-

고난은 삶을
일깨워주고
하느님을
가르쳐줍니다.

비껴갈 수 없는
십자가의
고난입니다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받아들여 할
십자가의 여정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은
우리를 망가뜨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더욱 새롭게합니다.

십자가의 고난은
판단과 단죄가 아닌
화해와 용서를
가져다줍니다.

십자가는
살아있음의
선물입니다.

사랑하기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사랑과 십자가는
함께 존재합니다.

사랑을 잃어버린
우리들에게
십자가의 고난으로
다시 사랑을
찾아주십니다.

되찾아주신 사랑은
절망과 끝이 아닌
십자가를 지고가는
새로운 삶이었습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고난으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우리를 끌어올리십니다.

사람은 십자가의
고난으로 낮아집니다.

낮아지신 예수님의
삶이 우리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십자가의 고난으로
소중하고 소중한
하느님 사랑을
알게되었습니다.

오늘도 그 사랑을
향하는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오상선신부-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수난을 예고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충격을 덜어주고 싶으셨는지 반복된 질문으로 본론에 접근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도 함께 있었는데"(루카 9,18).
스승과 제자들이 중요한 순간을 침묵으로 준비합니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요. 제자들이 분명 "함께" 있었다고 하는데,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셨다고 하네요. 모두 함께 기도하고 있었던 게 아니라는 건데, 그러면 기도하는 스승 곁에서 제자들이 무얼 하며 "함께"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스승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요청이 이후에 나오는 걸 보면(루카 11,1-13 참조) 아직 그들은 준비가 덜 되었던 것일 수도 있지요.

그래도, 설령 적극적으로 함께 기도하지 않았더라도 기도하는 스승의 침묵에 함께하며 그간 스승님이 보여 주신 기적들과 그분에 대한 칭송을 떠올렸을 수도 있습니다. 문맥상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루카 9,10-17) 바로 다음에 오늘의 대목이 나오니 그럴 수도 있었겠다 싶습니다.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루카 9,18)
먼저 예수님은 군중의 생각과 반응을 물으십니다. 불현듯 나타나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놀라운 일을 행하는 존재에 대해 형성된 보편적 인식에서 출발하시는 것입니다.

군중은 예수님을, 하느님 나라 도래를 알린 세례자 요한(마태 3,1-2 참조)이나, 빵을 많게 하고 죽은 이를 살린 엘리야 예언자(1열왕 17,8-8-24), 하느님의 뜻을 전하다 박해받고 죽은 옛 예언자 중 하나로 받아들입니다. 꼭 맞는 정답은 아니나 그렇다고 틀린 답도 아니지요.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루카 9,20)
이제 예수님의 질문이 한 걸음 더 들어가십니다. "나와 함께 지내는 너희는 (그런 보편적 인식을 바탕으로 깔고) 나를 누구라고 하겠느냐?" 물으시는 겁니다. 주님과의 관계는 이렇듯 교의적이고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이론을 토대로, 각자 맺은 인격적, 주관적, 실존적 관계성으로 진입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카 9,20).
베드로의 입에서 메시아 고백이 흘러나옵니다. 안드레아가 처음 예수님을 만난 뒤 형 시몬(베드로)에게 가서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41) 했던 일을 기억하실 겁니다. 어쩌면 이미 제자들 안에서는 예수님께서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이심을 (아직 완전한 믿음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을 겁니다. 메시아가 아니시라면 민족적 열망이 좌절될 뿐 아니라, 모든 걸 버리고 따른 자기들의 삶도 무의미해질 테니 꼭 그래야 했겠지요.

마태오 복음사가는 루카와 달리 베드로의 고백이 살과 피에서 나온 게 아니라 아버지께서 알려 주신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기술했지요(마태 16,13-20 참조). 과연 오늘 제1독서에서 "나의 영이 너희 가운데에 머무를"(하까 2,5) 것이라 약속하신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졌기에 가능한 고백입니다.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 되살아나야 한다"(루카 9,22).
제자들이 (우리는) 드디어 정수에 도달했습니다. 이는 실제로 예언서 갈피마다 등장하는 메시아의 모습이고 모든 참 예언자가 받아들인 운명이었건만, 제자들도 우리도 그다지 직면하고 싶지 않은 진실이 되어버렸습니다. 세속적 힘과 영광으로 덧칠된 구원자의 모습을 고대하는 사이 잃어버린 진리기도 할 겁니다.

제1독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워로와 격려, 축복이 쏟아집니다.
"용기를 내어라"(하까 2,4).
"두려워하지 마라"(하까 2,5).
"내가 이곳에 평화를 주리라"(하까 2,9).
공사가 진행되기 어려운 현실에서 예언자의 입을 통해 들려주신 이 말씀들은 유배의 상흔을 지닌 이스라엘 백성에게 천군만마보다 큰 힘이 되었을 겁니다.

"이 집의 새 영광이 이전의 영광보다 더 크리라"(하까 2,9).
유다 역사의 황금기인 솔로몬 임금 시절 지어진 예루살렘 성전의 영화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커다란 기쁨이 될 약속이지요. 그런데 이 약속이 새 성전 완공이라는 가까운 미래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는 것이 바로 말씀의 신비이고 깊이이며 영원성입니다.

수 세기가 지난 후,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이 세상 한가운데로 육화하시어 성전이신 당신의 현존을 이루십니다. 그리고 죽은 뒤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새로운 성전을 일으키시고요. 그러니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예고에는 수난, 죽음뿐 아니라 부활에도 포커스가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고난과 배척과 죽음을 거쳐 재건된 성전의 영광은 옛 것에 비길 바 없이 온전하고 아름다울 테니까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성령의 성전인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 물리적 장소와 건물을 초월하는 성전이 끊임없이 지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보잘것없는 죄인에 불과하고 부족함 넘치는 우리 (성전)의 영광이 이전의 영광보다 크리라는 이 말씀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보다 우리를 더 크게 고무시키는 약속이 될 겁니다.

이제 눈을 돌려 천상 예루살렘을 바라봅니다. 지상 순례를 거쳐 그리운 주님과의 해후와 사랑의 심판을 지나 찬란히 빛나는 천상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그곳에서 더이상 성전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라 합니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묵시 21,22).

그러니 두려워하지 맙시다. 용기를 냅시다. 성전을 지을 "은도 주님의 것, 금도 주님의 것"(하까 2,8 참조)입니다. 우리는 그저 묵묵히, 따르기로 작정하고 나선 주님의 길, 예언자의 길 안에 머물러 걷고 기도하고 사랑하면 됩니다. 성전이신 분이 성전인 우리를 성전이 필요없는 곳으로 친히 데려가실 것입니다. 아멘.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5년 9월 25일 연중 제25주간 금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