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7월 8일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Margaret K 2019. 7. 5. 17:18

2019 7 8일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안심하여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마태오 9,18-26)


"Courage, daughter! 
Your faith has saved you." 

 



예수님 옷에 손을 댐.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야곱은 꿈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하늘에 닿은 층계를 오르내리는 것을 보고,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듣고는 기념 기둥을 세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당신 옷자락에 손을 대자, 그의 믿음이 그를 구원하였다며 고쳐 주시고, 회당장의 죽은 딸을 살리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치유가 불가능한 두 여인을 되살리십니다. 하나는 회당장의 딸로 죽었다가 되살아나고, 또 하나는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자로 예수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다가 치유받게 됩니다. 두 기적 이야기 안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요소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조금 차이도 있습니다. 회당장의 딸은 아버지의 믿음 덕분에 되살아났고,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자신의 믿음 덕분에 살아납니다.

또한, 회당장의 경우는 예수님께 직접 믿음을 고백하며 치유해 달라고 청하지만, 혈루증 여인은 소심한 듯 마음속으로 믿음을 드러냅니다. 그래서일까요?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용기를 북돋아 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이 구원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이 단순한 치유를 넘어 구원을 가져다줌을 발견하게 됩니다.
제1독서에서 야곱은 에사우를 피하여 하란으로 도망치다가 꿈속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땅과 자손에 대한 약속을 처음 듣게 됩니다. 아브라함, 이사악에게 주어졌던 약속이 야곱에게 주어지는 순간입니다. 야곱은 주님의 현존을 깨닫고 그곳을 베텔, 곧 “하느님의 집”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느님을 만나는 성소, 곧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요한 3,21; 묵시 21,22 참조).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의 약속이 이루어졌음을 보게 됩니다. 그렇게 구원을 얻게 된 우리에게 오늘도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염철호 요한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신학생 때에 은경축을 맞이하는 은사 신부님을 보면서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신학생으로 10년, 사제로 25년을 보냈다는 것, 따라서 ‘아~ 저 정도 나이가 되면 삶의 지혜가 대단하겠지?’라는 생각하면서 ‘나도 저 정도 나이가 되면 그렇게 되겠지.’라는 마음을 품었습니다.

시간이 정말로 빠르게 흐릅니다. 글쎄 저 역시 나이 50을 넘기면서 은경축이 멀게만 느껴지는 시간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내 자신을 바라보면서 ‘내가 가지고 있는 삶의 지혜는 어떤가?’라고 질문을 던지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어렸을 적의 철부지 모습과 지금의 모습이 그다지 다르지 않기 때문이지요. 오히려 순수한 마음을 잃어버려서 더 형편없이 변한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막연하게 나중을 기대해봐야 결국은 실망만 돌아오게 됩니다. 오히려 그 나중을 기다리는 것보다 지금이라는 시간에 더 충실한 것이 내 자신에게 훨씬 더 유익했습니다. 나의 기대를 완벽하게 채워줄 미래가 없음을 이제야 겨우 깨닫습니다.

한 회당장이 예수님께 죽은 딸에게 손을 얹어달라는 청을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딸이 살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집에 가시는 길에서 혈루증을 앓는 여인이 예수님 옷자락 술에 손을 댑니다. 이 여인 역시 예수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병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막연한 기대가 아닌 구체적인 기대였습니다. 그러나 “물러들 가거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군중들은 예수님을 비웃습니다.

이 믿음의 차이를 생각해봅니다. 막연한 믿음이 아니라 굳은 믿음을 보였던 회당장과 혈루증을 앓는 여인의 믿음이 우리들이 지향하고 따라야 할 믿음인 것입니다. 그 믿음이 있기에 어떤 경우에도 실망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쉽게 포기하고 판단할 것이 아닙니다. 막연한 기대를 안고 살아서도 안 됩니다. 주님께 대한 구체적인 믿음, 이 믿음이 바로 용기이며 우리를 구원하는 길입니다.
누구나 삶에서 때로는 내면의 불꽃이 꺼진다. 그 불꽃은 다른 인간 존재와의 만남에 의해 다시 타오른다(알버트 슈바이처).



서점

주로 책을 인터넷 서점에서 구매합니다. 신간을 빨리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고, 또한 책에 대한 각종 정보를 신속히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가격도 10% 할인이 되고, 여기에 적립금까지 붙어서 가격적인 면에서도 이득입니다. 또한 각종 사은품까지도 푸짐하게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동네에 서점이 있다면 직접 가서 책을 고르고 구입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서점에 들어가서 직접 이책 저책을 살펴보다보면 ‘뜻밖의 발견’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에서 보는 책과 직접 보는 책의 차이는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누구나 잘 알 것입니다. 좋아하는 작가의 책들을 책 냄새를 맡으면서 읽어볼 수 있고, 책의 디자인을 보면서 ‘나도 다음 책에는 이런 디자인으로 해야지.’라는 아이디어도 얻게 됩니다.

문제는 그런 서점들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불과 20년 전만해도 서점을 흔하게 찾을 수 있었는데, 이제는 서점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렵습니다. 저의 재미가 사라진 것만 같아서 씁쓸한 마음이 듭니다.                    

나의 이웃에 대한 내 자비로움의 정도가 내가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비례한다

-전삼용신부-


돈멀루의 ‘붐비는 우회로’라는 책에는, 부정한 방법으로 자기 회사의 자금 중 수천 달러를 몰래 빼돌린 한 젊은 회사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행위는 적발되었고, 젊은이는 사장실에 가서 그 경위를 보고해야 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내려질 법적 조치가 두려웠습니다. 그의 행위가 모두 사실이냐는 질문에 그는 그렇다고 답변했습니다.


      그러자 사장은 깜짝 놀랄 만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내가 자네를 지금 그대로 일하게 해 준다면, 앞으로 자네를 믿을 수 있겠는가?”

젊은이의 얼굴이 환해지면서 대답했습니다.

“예, 사장님. 여부가 있겠습니까? 저도 이 일로 인해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사장이 말했습니다.

“나는 자네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네. 가서 일을 계속하게.”


      젊은이와 대화를 끝내면서 사장은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들려주었습니다.

      “하지만 자네가 알아야 할 것이 한 가지 있어. 이 회사에서 유혹에 넘어갔다가 관용을 받은 사람은 자네가 두 번째 사람이야. 첫 번째 사람은 나야. 나도 자네와 같은 짓을 했었지. 자네가 받고 있는 자비를 나도 받았다네.”

 

      자비를 받은 사람은 자비롭습니다. 인간이 이웃에게 자비로울 수 있는 이유는 그런 자비를 받아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의 자비를 절대적으로 믿는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자신의 딸이 죽어서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는 회당장과 혈루증을 앓는 여자입니다. 이 두 사람의 하느님 자비에 대한 믿음이 그들의 말과 생각에서 잘 드러납니다.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예수님은 이들의 믿음대로 행동해주십니다. 죽은 이를 위해 곡을 하는 군중들을 보고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물러들 가거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혈루증을 앓는 여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따라서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내가 믿느냐와 같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딸을 다시 살려줄 분이라고 판단했고, 옷자락에 손만 대어도 자신의 병을 낫게 해 주실 수 있는 분으로 믿었습니다. 하느님의 존재나, 예수님의 존재를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그런 믿음은 구원으로 이끌지 못합니다. 마귀도 하느님이 계시고 예수님이 계신 것은 믿습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하느님의 자비에 관한 믿음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자비를 믿는 사람은 이웃에게 자비롭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웃에게 무자비하다면 그 사람은 하느님도 무자비한분으로 판단합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 안의 같은 판단의 기준으로 하느님도 판단하고 이웃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돌아온 탕자는 아버지의 자비에 의지하지만 그의 형은 아버지가 그렇게 자비롭게 동생을 대하는 것에 대해 화를 냅니다. 아버지는 더 엄해야 한다고 판단해놓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그렇게 엄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아버지와 동생에게 엄한 모습을 보입니다. 형은 아버지 옆에서 봉사하면 죄를 짓지는 않았지만 실제로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 안에 있는 죄가 사람을 무자비하게 만듭니다. 제가 강의하다가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은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이죠?”라고 물으면 신자분들은 “예!”하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저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저는 “여러분 가운데 여러분의 자녀가 여러분이 숨겨놓은 과일을 먹었다고 해서 호적에서 파버리는 부모님이 계신가요?”라고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신자분들은 웃으십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그 정도로 자비로운데 우리는 하느님을 왜 그렇게 엄한 분으로 판단해놓은 것일까요? 하느님은 선악과를 톱으로 베어서 잘라버렸어도 그들을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들이 쫓겨난 실제적인 이유는 하느님께서 부르실 때 숨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을 무서운 분으로 판단해놓은 것 자체가 믿음이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내 앞에서 무서워 숨기만 하는 사람과 무슨 관계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믿음을 증가시키기 위해서는 죄에서 벗어나야합니다. 죄는 행위로만 짓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판단하는 교만으로도 짓습니다. 죄는 인간 안의 자아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신 반면 자아는 무자비합니다. 그러니 죄를 짓는 이의 특징은 이웃도 심판하고 하느님도 무서운 분으로 여깁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아드님을 십자가에 죽여가면서까지 당신의 자비를 보이셨습니다. 십자가를 보며 아드님까지 우리를 위해 죽이신 하느님의 자비가 어느 정도인지 깨달아야합니다. 그 자비를 깨달았다면 이웃에게 무자비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키우고 싶다면 이웃에게 먼저 자비로운 사람이 되면 됩니다. 그러면 하느님도 자비로운 분으로 판단하게 됩니다. 이를 위해서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이웃만 사랑할 수 있다면 하느님의 자비를 믿게 되고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들처럼 구원을 포함하여 이 세상에서도 원하는 모든 것을 얻게 됩니다.


-조재형신부-


옥에 티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좋아 보여도 허물이 보이기 마련입니다. 다만 티가 있을지라도 옥의 가치를 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부처님에게 가족을 잃어버린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부처님! 어찌 이런 슬픈 일이 저에게 찾아왔는지요?’ 그러자 부처님이 이야기합니다. ‘나의 대답을 듣기 전에 한 가지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을 하겠습니까?’ 사람이 대답합니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가족의 죽음이 없었던 집이 있으면 한 집이라도 찾아보십시오. 그러면 내가 답을 하겠습니다.’ 사람은 동네의 모든 집을 찾아가서 물어보았지만, 가족의 죽음이 없었던 집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죽음이 찾아온다면 그것을 거부하기보다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부러운, 행복한 가정이 있었습니다. 가족이 건강하고, 자녀들은 공부 잘하고, 남편의 사업도 잘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가정에도 말 못 할 고민이 있었습니다. 자녀들의 결혼입니다. 결혼하지 않으려는 것도 걱정이고, 배우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걱정입니다. 아들이 여자 친구에게 마음이 빼앗기는 것 같아 서운하기도 합니다. 화목한 가정에 먹구름이 끼는 것은 기대가 크기 때문입니다. 기대는 욕심이기도 하고, 기대는 착각이기도 합니다. 완벽한 가정은 없습니다. 부족하지만 서로 이해하고, 서로 용서하고, 서로 인정하는 가정이 있을 뿐입니다. 기대라는 이름의 욕심을 내려놓으면, 기대라는 이름의 착각을 내려놓으면 가정에 드리운 먹구름을 지나가고, 밝은 햇빛이 가정을 비출 것입니다.

 

72세인 형제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나이가 많아서 다른 분들에게 걸림돌이 되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그러자 다른 형제님께서 이렇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아닙니다. 형제님은 우리들의 디딤돌입니다. 걸림돌은 앞을 향해 나가는 데 방해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디딤돌은 더 높은 곳을 향해서 꼭 필요한 돌입니다. 같은 돌인데도 그것을 느끼기에 따라서 걸림돌이 되기도 하고, 디딤돌이 되기도 하는 것을 봅니다. 인생을 행복하게 살고, 기쁘게 사는 분들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역경과 어려움을 디딤돌로 생각하는 분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가 하면 인생이 늘 불평과 원망인 분들, 하는 일마다 잘 안 되는 분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역경과 고난을 걸림돌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회당장은 자신의 죽은 딸을 위해서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하혈하던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져 보려 했습니다. 죽은 딸, 12년간의 하혈은 커다란 고통입니다. 하지만 주님을 찾았기에 그런 고난과 아픔은 하느님을 만나는 디딤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주어진 아픔, 갈등이 있다면 그것을 걸림돌로만 생각하지 말고, 새로운 기회가 되는 디딤돌로 생각할 수 있는 한 주간 되시기랍니다.

 

저의 하느님, 저는 당신께 의지하나이다.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주셨네


깊고 흔들리지 않은 성숙한 믿음도 작고 초보적인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양승국신부- 

 

아무리 고관대작이라 할지라도 우리네 인생사 안에서 벌어지는 길흉화복(吉凶禍福)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유다 사회 안에서 회당장은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신분이었습니다. 한 지역 안에서 종교와 관련해서는 최고의 직책이었습니다. 예배를 관장하고 회당을 관리하는 책임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회당장이 세상 슬픈 얼굴로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조금 전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금쪽 같은 딸이었으니, 그 충격이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얼마나 마음이 절박하던지, 예수님 앞에 엎드려 절까지 하면서 소생(蘇生)을 청합니다.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마태오 복음 9장 18절)

  

예수님께서는 회당장의 겸손한 태도와 강한 신앙을 보시고, 즉시 자리를 털고 일어나시어 그의 집을 향하십니다. 회당장의 모습을 보신 예수님 마음이 대견스럽고 흡족하셨을 것입니다. 아마도 마음 속으로 이런 생각이 드셨겠지요. ‘그래!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이 다 불신자들만은 아니로구나. 이런 기특한 사람들도 남아 있구나!’

  

당시 떠들썩한 회당장 딸의 치유 사화와는 크게 비교대조되는 또 다른 한 기적이 조용히 일어납니다. 밀려드는 군중들 속에 한 불행한 여인이 서 있었습니다. 그녀는 열두 해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지니고 있었던 예수님을 향한 믿음은 다분히 미약하고 초보적인 것이었으며, 지극히 인간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아무도 눈치 못채게 은밀히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마태오 복음 9장 21절)

  

그러나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지극히 단순하고 초보적인 믿음까지도 크게 눈여겨보시고 환영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지닌 믿음이 아무리 보잘것 없는 작은 믿음이라 할지라고, 우리 각자의 처지를 헤아려주시고 격려해주십니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태오 복음 9장 22절)

 

예수님께서는 그녀를 치유하게 만드는 동기 중에 중요한 것이 그녀가 지니고 있던 믿음이라고 강조하십니다. 이렇게 믿음은 언제나 주님께서 인간에게 치유와 구원을 베푸시는 데 있어 전제 조건이요 배경이 됩니다.

  

다만 우리의 믿음과 관련해 중요한 관건은 믿음의 성장입니다. 초보적이고 기복적인 믿음에서 보다 정화되고, 보다 영적인 믿음에로의 성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아주 작고 단순한 믿음도 소홀히 해서는 절대 안됩니다. 깊고 흔들리지 않은 믿음, 주님께서 기뻐하실 성숙한 믿음은 바로 그 초보적이고 작은 믿음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새로운 나로 살게 합니다

 -반영억신부-

 

어느 한 수도원이 있는 깊은 산속에 한 은수자가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수도원의 원장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그 이유는 한창 번성하였던 수도원이 쇠퇴의 길로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원장은 수도원을 어떻게 다시 일으킬 수 있을까 은수자에게 조언을 구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은수자는 죄송합니다. 저는 아무런 조언도 드릴게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당신들 가운데 구세주가 계시다는 것입니다.

 

수도원장은 이 수수께끼 같은 말의 의미를 도무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겨우 다섯 명 밖에 남지 않은 수도원에 “구세주가 계시다는 은수자의 말을 모두가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들 중에 구세주가? 구세주가 있다고? 다섯 중에 누가 구세주란 말인가? 그 날부터 수도자들은 구세주일지도 모르는 서로를 깊은 존경심과 사랑을 가지고 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수도원의 분위기는 전과는 사뭇 다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점차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 수도원을 찾아와 그 수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했고 수도자가 되겠다고 지원하는 젊은이들도 많아져 옛날처럼 번창한 수도원이 되었답니다. 서로를 인정하고 이웃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알아 볼 수 있는 눈이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자가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개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하는 생각을 가지고 당신의 옷자락에 손을 댄 것을 아시고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태9,22). 하고 이르시며 구원을 허락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으로 불치병을 낫게 하셨지만 내가 너를 낫게 하였다.고 하지 않으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셨습니다. 병을 낫게 하는 육적인 치유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인 것은 주님을 통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완성에는 인간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물론 우리의 공로를 통해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자유의지에 의한 협력을 기다리십니다. 여인은 감히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당시의 율법으로는 부정을 탄 여인이 그렇게 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그러나 그는 용기를 내어 믿음을 표현하였습니다. 이제 그는 과거에 매여 있지 않고 새로운 구원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주님의 능력의 손길에 협력하면서 내 믿음이 나를 구원 하였다.고 하지 않고, 주님께서 저를 구원해 주셨습니다.하고 말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시면서도 결코 인간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인간의 협력을 간절히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은 새로운 나로 살게 합니다.

 

믿음은 인간의 능력이상을 체험케 합니다. 인간은 끝이라고 생각할 때 하느님께서는 시작하십니다. 사람들은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고 소란을 피웠지만 예수님께서는 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이 곧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몰아내시고 슬픔을 기쁨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놓으십니다. 그러나 그 주변에는 믿음을 가진 사람도 있었지만 그를 비웃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마음이 한번 비딱해지면 기적을 보고도 또 비웃을 것이며 쓸데없는 소문을 퍼뜨리게 됩니다. 주님의 능력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 이웃 안에 계신 주님을 섬기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가득한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딸의 손을 잡아주셨듯이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시고 일으켜 주십니다. 우리도 누군가의 손을 잡아 줄 수 있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프란치스코 교황님 말씀

인간을 다시 살리는 힘

 

예수님의 자비는 단순히 어떤 감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생명을 주고 인간을 다시 살리는 힘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인간에게 생명을 줍니다. 그리고 그를 죽음에서 다시 살려냅니다.

주님은 항상 자비로이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그분은 자비로이 우리를 바라보시며 기다리신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그리고 그분께 다가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그분은 자비로 가득한 마음을 갖고 계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내적 상처들과 우리 죄들을 그분께 보여드릴 때 그분은 우리를 항상 용서하십니다. 그분은 정녕 온전한 자비이십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9,18-26: 예수의 옷에 손을 댄 여자, 살아난 회당장의 딸

오늘 복음에서는 회당장의 딸을 살리시는 것과, 12년 동안이나 혈루증을 앓던 부인의 치유기적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죽은 이에게는 생명이 돌아오고 아픈 사람은 온전하게 된다. 회당장이 예수님께 청하고 있다. 회당장은 율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백성, 그 딸을 위해 기도한다. 율법과 예언서는 그리스도에 관하여 그들을 양육하였고,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소녀를 살리신다.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18) 회당장은 갑자기 예수님께 나타나 예수님께서 곧 가 주실 것과 딸에게 손을 얹어주실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시리아인 나아만이 엘리사 예언자에 대해 나는 당연히 그가 나에게 나와 서서, 주 그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병든 곳 위에 손을 흔들어 이 나병을 고쳐 주려니 생각하였다.”(2열왕 5,11) 하였다. 신앙이 없는 사람이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표징을 요구하는 법이다.

 

이 때 혈루증을 앓고 있는 여인이 주님께서 걸어가실 때 그분께 다가간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소녀에게 가시는 길에 또 한 여인을 치유하셨다. 여자는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다. 그러나 떳떳하게 주님께 다가가지 못하였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여인의 지속적인 하혈은 부정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레위 15,25 참조). 그래서 여인은 자신을 감추었다. 여인은 모습을 숨긴 채 있었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눈길이 여인에게 가도록 여인을 내세우신다. 주님께서는 그 여인에게서 두려움을 없애주셨고, 그 여인의 믿음을 모든 이에게 본보기로 세우신다. 그러시면서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다. 이렇게 이스라엘을 위해 준비된 것을 이제는 평범한 이민족 사람들이 그것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회당장의 딸은 유대 민족을 상징하고, 여인은 다른 민족들의 교회를 상징한다.

 

물러들 가거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24) 예수님께서는 회당장의 집에 가셔서 죽은 소녀를 보신다. 믿음 없는 마음을 믿음으로 데려 오시기 위해, 회당장의 딸이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니까 그들이 예수님을 비웃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의 지도자들과 구경꾼들을 본다. 그들은 이 위대한 은총이신 주님까지도 비웃고 무시했다.

 

소녀는 예수님께서 살려 주신다. 이 소녀의 모습은 우리 구원의 신비 전체를 예시한다고 보아야 한다. 루카 복음에는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리고 하신다. 이것은 신앙인이 성령을 받아 생명으로 돌아올 때, 주님께서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요한 6,53)고 하신 거룩한 빵을 먹어야 한다는 가르침도 받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태 9, 22)

서로 다른 아픔을
겪는 이 시기에

예수님께서
우리삶 가운데
함께 하십니다.

아픔을 통해
얻게되는 간절한
믿음입니다.

믿음도 성장이
필요한 부분임을
우리의 아픔을 통해
다시금 일깨워주십니다.

구원으로 이끄시는
참된 치유입니다.

치유의 시작에는
언제나 주님을 향하는
용기가 있습니다.

용기가 필요한
우리들
매순간입니다.

주님을 향하는
성장의 시간입니다.

모든 성장의
순간에는
주님을 향하는
간절한 믿음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모든 여정이
필요함을
가르쳐주십니다.

믿음으로 연결되는
고통의 신비입니다.

구원과
믿음의 관계는
아픔과 성장의
관계처럼
서로를 향합니다.

소중한 믿음의
순간들을
놓치지 마십시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들은 "믿음"이라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절박한 상황에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에서 나온 믿음이라 할지라도 그 순간은 온 존재의 바람이 실린 절규에 가까운 고백이고, 하느님은 결코 이를 값어치 없다고 여기시지 않습니다.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마태 9,18)
회당장의 믿음입니다. 자식을 보내고 억장이 무너지는 고통의 순간이지요. 그런데 그는 분명히 딸이 죽었다고 해놓고서는 "그러나"라는 말 뒤에 영 엉뚱한 말을 합니다. 어떻게 해 주시면 살아나리라는 방법까지 제시하면서요. 회당장의 이 말은 예수님께 청을 드렸다기보다 본인이 믿는 바를 고백하고 선포한 것에 가깝습니다.

"물러들 가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마태 9,24)
선선히 그를 따라나서신 예수님께서 장례가 한창인 집에 들어서시며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께 믿음을 고백한 회당장의 그 "믿음"을 믿어주신 겁니다. 그의 인간됨이나 직업, 신분이 아니라 그 단순하고 굳건한 믿음만을 보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를 비웃은 이들(마태 9,24 참조)은 이 놀랍고 신비로운 현장에서 순식간에 열외자로 전락해 버리고 맙니다. 함께 믿음을 고백했거나, 적어도 그 믿음을 기대하기만 했어도 뒤이어 일어날 기적의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었을텐데 참 아쉽습니다.

복음에는 또 다른 축의 믿음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해 온 여인의 믿음입니다. "내가 저분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마태 9,21)

피 흘리는 것을 정결하지 못한 상태로 여기는 고대 관습과 율법의 그늘에서 그녀는 무려 열두 해를 가족과 이웃, 집회와 축제에서 소외되어 살아왔을 것입니다. 율법이나 타인뿐 아니라 스스로도 자신을 더럽고 부정한 존재로 인식하게 되기에 충분한 시간이지요. 게다가 잘 알다시피 열둘은 완전함을 상징하는 숫자이므로 그녀에게 고통의 시간은 영원히 정지된 듯한 죽음과도 같았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예수님을 향해 손을 내뻗는 그녀를 관상합니다. 현실에서 부정한 상태인 그녀는 누구도 만지면 안되지만, 믿음이 이 모험을 감행하게 부추깁니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마지막 시도일지라도, 또 아직 사랑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상대에 대한 조건 없는 믿음은 결국 사랑으로 옮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은 충직한 사랑의 다른 이름이니까요.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태 9,22)
열두 해를 그림자처럼 지내온 그녀를 "딸"이라 다정히 부르시는 예수님의 따사로운 눈길을 바라봅니다. 그녀에게 당장 필요한 치유는 그 자체로 그녀에게 구원이 될 것입니다. 다시 새롭게 공동체 삶에 녹아들 자격을 얻은 그녀가 그 구원을 누리기 위해 가장 필요한 건 다름아닌 "용기"가 될 것입니다.

제1독서인 창세기 대목은 에사우의 복을 가로채고 도주 중인 야곱의 꿈 이야기입니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않겠다."(창세 28,15)
하느님의 통큰 믿음입니다. 누구보다 야곱의 됨됨이를 잘 아시는 분이 형을 속이고 도망 중인 그에게 조건 없이 복을 내리십니다. 후손의 번성을 약속하신 분이 이 약속을 다 이루어 주실 때까지 함께하신다니, 이 말씀은 곧 영원과 이어져 있습니다. 외롭고 두려운 '홀로' 광야길, 미래를 알 수 없는 막막함 속에서 "함께함"의 약속은 생명수나 다름없을 겁니다.

그런데 이 신비로운 꿈과 하느님 현현, 그리고 어마어마한 약속에 대한 야곱의 응답이 너무 초라하게 들립니다. 조건 없는 하느님의 믿음에 대해 야곱은 조건부 마음으로 응하고 있으니까요.

"... 해 주신다면 주님께서는 저의 하느님이 되시고 ... 이 돌은 하느님의 집이 될 것입니다."(창세 28,22)
간단히 말하자면, '보호와 양식과 의복이 보장되고 무사귀환까지 이루어지면 그때에 '비로소' 제가 당신을 제 하느님으로 모실 것이고, 여기가 '진짜로' 하느님의 집이 될 것입니다'라는 뜻으로 들립니다. 야곱의 계산적이고 거래에 가까운 기도, 이게 바로 인간의 기도 수준일 수 있다는 생각에 부끄럽고 슬퍼집니다. 주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이, 우리에 대한 주님의 신뢰를 절반이라도, 아니 억만분의 일이라도 닮을 수 있다면 그분께 얼마나 큰 기쁨이 될까요!

그런데 야곱의 기도를 꼭 부정적으로만 여겨서는 곤란합니다. 이제 막 시작이니까요. 조건부 신앙은 자기에게 조건 없이 쏟아붓는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면서 조건을 내려놓게 되어 있습니다. 온전한 믿음이 될 때까지 주님께서 믿어 주시고 이루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야곱에게 하신 약속을 다 이루기까지 떠나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으니, 우리는 이루어질 때까지 믿으면 됩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믿음은 모험입니다. 보이는 것, 증명된 것은 앎의 영역이지 믿음의 영역이 아닙니다. 그런데 믿음이 있다면 결과가 보이지 않더라도 오히려 그 결과를 선명히 알게 됩니다. 믿는 바가 곧 결과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오늘 야곱의 조건부 기도만큼도 못 되는 우리의 얄팍하고 부서지기 쉬운 믿음부터 손 보아 주십사고 청합시다. 우리에 대한 주님의 약속이 되어가는 동안 믿음도 함께 커갈 테니까요. 우리는 그저 될 때까지 믿으면 됩니다. 나머지는 하느님이 알아서 하실 겁니다. 아멘.

하느님은 우리 기도를 다 들어주실 필요 없다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235673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7월 10일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