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5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한국인 최초의 사제로서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1821년 충남 솔뫼에서 태어났다. 양반 가문이었으나 그의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와 어머니 고 우르술라가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1801년 신유박해 때 집안이 몰락하였다.
김대건은 열여섯 살인 1836년 사제가 되고자 최양업 토마스와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길을 떠났다. 1844년 부제품을 받은 그는 선교 사제의 입국을 돕고자 잠시 귀국하였다가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1845년 8월 17일 상하이의 김가항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고국에 돌아온 김대건 신부는 서해 해로를 통한 선교 사제의 입국 통로를 개척하려다가 1846년 6월에 체포되어 여러 차례 문초를 받고 9월 16일 한강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84년 5월 6일 서울에서 한국 순교자 103위를 시성하면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정하상 바오로와 함께 한국의 대표 성인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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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마타 10, 17~22)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즈카르야는 주님의 계명을 어기는 이들을 책망하다가 주님의 집 뜰에서 사람들의 돌에 맞아 죽는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믿음 덕분에 환난도 자랑으로 여긴다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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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예수님의 제자들은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그들은 의회에 넘겨져 회당에서 채찍질을 당할 뿐만 아니라,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갈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가족들의 미움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벌어지는데, 그분의 참된 제자라면 끝까지 스승이신 예수님을 버리지 않고 증언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젊은 나이에 순교한 것도 이런 제자로서의 사명 때문입니다.
교회는 김대건 신부처럼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의 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들의 피로 양육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언한 신앙 선조들의 모범을 따라, 그들이 걸어간 십자가의 길에 동참합니다. 그러나 종종 십자가 밑에서 주님을 증언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분의 이름을 더럽히지는 않을까 걱정하기도 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환난 중에 내버려 두시는 분도, 우리를 박해하는 이들을 그냥 내버려 두시는 분도 아니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박해하는 이들을 결코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또한 당신의 이름 때문에 박해받는 이들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당신의 큰 사랑을 부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주님의 제자들은 환난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희망은 그들을 결코 부끄럽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친구들과 함께 래프팅을 가서 고무보트를 타고 계곡을 내려오는데 글쎄 균현을 제대로 잡지 못해서 혼자서 물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구명조끼를 입고 있었고, 어디 가서 수영 못한다는 이야기를 듣지 않을 정도의 수영 실력을 가지고 있는 저입니다. 또한 보트에는 안전요원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에 빠져서 빠른 물의 속도에 떠내려가면서 느낀 것은 ‘공포’였습니다.
갑자기 물에 빠지게 되니까 수영을 전혀 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그냥 허우적거리게 되더군요. 그러면서 물도 꽤 마셨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억지로 수영을 하지 않고 그냥 빠른 물의 흐름에 자신을 맡겨야 한다고 하지요. 알면서도 당황하게 되면서 공포를 느꼈을 때,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됩니다.
공포는 잘 하는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게 합니다. 절망감을 심어주어서 희망을 잃게 만드는 것이 공포입니다. 희망의 주님이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주님을 통해서만 모든 공포에서 벗어나 참 기쁨의 삶, 참 행복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신심 미사를 봉헌합니다. 신부님의 상황을 떠올려 봅니다. 중국에서 어렵게 사제서품을 받고서 한국에 돌아왔지만 1년도 안 되어 체포되어 문초를 받고 1846년 9월 16일에 한강 새남터에서 순교하십니다. 젊은 나이였고 사제로서 연륜도 없었던 때였습니다. 얼마나 두려우셨을까요? 더군다나 외국에서 10년 동안 공부를 하고서 사제서품을 받았는데, 1년도 안 되어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억울하다는 생각도 할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의연하게 순교하셨던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셨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바로 하느님 아버지께 희망을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우리를 두렵게 하고 공포심에 빠져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하는 세상의 유혹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때 희망의 주님을 떠올리면서 주님의 구원 약속을 마음에 담아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유혹보다는 주님의 말씀이 훨씬 더 힘이 있으며 기쁨의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주십니다.


가족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옛날에 살았던 경기도 안중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때의 기억들이 많은지 부모님을 모시고서 함께 안중을 찾은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경기도 안중에서 살았던 기억이 전혀 없습니다. 가족들에게는 많은 기억이 있는 곳인지 모르겠지만, 저에게는 단 하나의 기억도 없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태어난 곳으로, 갓난아기 때를 어떻게 기억하겠습니까?
제 기억에 없는 경기도 안중에서의 시간이 제게 필요 없는 시간일까요? 기억도 하지 못하고 무엇 하나 스스로 한 것이 없는 시간이니 허투루 산 것일까요? 아닙니다. 너무 어려서 아무것도 하지 못할 수밖에 없었던 시간이었고, 기억에 없는 시간이지만 이 시간 역시 지금의 제가 있는데 필요한 시간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또 기억에 없다고 의미 없는 시간이라고 취급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종종 “잘못 살았어. 헛살았어. 제발 이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라는 말로 자신의 삶을 탓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시간 역시 나를 만들어주는 필요한 시간이었고, 앞으로 더 나은 시간을 만들 수 있는 반드시 있어야 할 시간이었습니다.
이 시간을 지배하시는 분이 주님이시기 때문에 더욱 더 희망의 주님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모든 시간이 감사할 수 있으며 희망을 둘 수 있는 시간입니다.

세상의 천재, 천국의 바보
-전삼용신부-
한 연구에서 초등학교 교사들에게 가장 마음에 드는 학생들과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학생들의 목록을 작성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두 집단의 학생들을 여러 가지 특성에 따라 점수를 매기도록 했습니다. 조사 결과 교사들이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학생들은 자기 스스로 규정을 만드는 이른바 비순응자들이었습니다. 기존 체계에 의문을 품고 새로운 시스템을 꿈꾸는 이들이었던 것입니다. 교사들은 이렇게 도발적이면서도 창의적인 학생들은 좋아하지 않았고 순응하고 머리 좋은 학생들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바꾸는 이들 대부분은 순응하는 학생들이 아닌 비순응자들이었습니다.
심리학자 엘렌 위너(Ellen Winner)는 신동이나 천재들은 어른이 되면 자기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고 자기 조직에서 지도자가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신동들 가운데 아주 극소수만이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창의력을 발휘한다.”고 말합니다.
신동들은 자신의 뛰어난 능력을 평범한 방식으로 사용하지만,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들은 자신의 평범한 능력을 천재적으로 발휘합니다. 예를 들면 천재들은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가 되지만 비순응자들은 사람들이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고장 난 의료체계를 바꾸기 위해 싸운다는 것입니다. 천재들은 불합리한 법을 바꾸기 위해 애쓰기보다는 시대에 뒤떨어지는 법을 위반한 고객들을 변호하는 변호사가 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불합리한 법에 맞서 새로운 시대를 엽니다. 퓰리처상을 수상한 역사학자 잭 래코브(Jack Rackove)는 미국의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이들은 혁명가적 기질이 전혀 없는 이들이었다고 합니다. 다만 두려움에 맞설 용기가 있는 이들이었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이들은 적응력이 강한 천재들이기보다는 의심을 품고 편한 자리에서 내려와 아슬아슬한 모험을 즐길 줄 아는 용기 있는 이들이었습니다.
[참조: ‘오리지널스; 1장 창조적 파괴’, 애덤 그랜트, 한국경제신문]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대축일입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체력도 약했고 공부도 함께 갔던 최방제, 최양업 신학생보다 뛰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결국엔 가장 먼저 사제가 되었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가장 많은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당연히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를 심문하던 관장이 “왜 왕명을 거슬러 그 종교를 믿는 거요. 그 교를 버리시오.”라고 말하자, “나는 그 교가 참되기 때문에 믿는 거요. 그 교는 천주를 공경하도록 나를 가르치고 나를 영원한 행복으로 인도해주오. 배교하기를 거부하오.”라고 대답했습니다.
관장은 시대에 순응하는 엘리트였습니다. 기존체제에 가장 잘 순응하는 이들은 엘리트라 불립니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님은 더 천재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천재라도 하느님의 뜻에 다다를 수는 없습니다. 스티븐 호킹도 평생 천재소리를 들었지만 우주인이 있을 수 있다고는 말했지만 신은 없다는 결론을 내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람처럼 천재가 아니어도 하느님이 계심을 압니다. 자신의 머리를 믿는 이들은 세상에선 인정받을 수 있어도 거기까지입니다.
자신을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해주시는 김대건 신부님의 이런 지혜를 그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관장님, 천주님의 사랑을 위해 고문을 받도록 해준 데 대해 감사드리오. 천주께서 당신을 더 높은 벼슬에 오르게 하여 그 은혜를 갚아주시기를 기원하오.”
아마 바보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이 세상에서는 어리석음이지만 우리에게는 구원에 이르는 지혜입니다. 사람의 머리로 다다를 수 없는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나의 머리에 의지하지 않고 하느님의 영에 의지할 때 나는 천재라는 인간들보다 훨씬 지혜로우신 하느님의 영을 따르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면 이 세상의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체제에서 벗어나 참 지혜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돈과 쾌락과 명예를 좇지만 성령께서는 가난과 절제와 멸시와 박해의 가치를 알게 하십니다. 그래서 김대건 신부님이 마지막으로 신자들에게 이렇게 당부하시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사랑해서 잊지 못하는 신자 여러분, 이런 환난의 때를 당하여 부디 마음을 헛되게 먹지 말고, 밤낮으로 주님의 돌보심을 빌어 삼구(三仇: 세속, 육신, 마귀)를 대적하십시오. 박해를 참아 받아 주님께 영광을 드리고, 여러분들의 영혼을 위한 큰일을 도모하십시오.”
[출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삶과 영성’, CBCK 시복시성 위원회]
현명하고 현명하다는 사람들도 세상의 속임수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머리를 믿고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 순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을 믿는 이들을 성령을 통하여 세상을 밟고 천국으로 오르는 길로 안내합니다. 세상에서 천재보다 천국의 바보가 훨씬 지혜롭습니다. 믿음만 있다면 아무리 바보라도 성령의 지혜로 삽니다. 세상의 천재는 아무리 똑똑해도 아주 작은 성령의 지혜의 조각에도 다다르지 못합니다. 성령의 지혜는 세상의 어리석음입니다. 그런 성령을 택하는 것이 순교의 길이요, 참 지혜의 길입니다.

-조재형신부-
어릴 때의 기억입니다. 어르신들이 늘 말씀하셨습니다. 사제가 되면 이제 성이 바뀐다고 했습니다. 한양 조씨인 저의 성은 하느님의 아들인 하씨로 바뀐다고 하였습니다. 집안의 일은 생각하지 말고, 오직 하느님의 일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집의 형편이 어려워도, 부모님이 아파도 먼저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라고 하였습니다. 집안의 일은 다른 형제들이 알아서 하면 된다고 하였습니다. 자식으로서 부모와 가족과 인연을 끊으라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하느님의 일이 그만큼 소중하다는 말이었습니다.
사제의 길을 포기하면 현세에서 결코 잘살면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죄인처럼 조용히 속죄하며 살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신자들과 가족들의 기도를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현세의 삶에서 충분히 보속을 해야만 하느님께 나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겁이 나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습니다. 28년 사제로 지내면서 지금은 그 의미를 조금 이해합니다. 사제의 길이 그만큼 소중하니, 사제의 길이 그만큼 거룩하니 뒤를 돌아보지 말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말이었습니다.
오늘은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의 발자취를 따라서 순례를 가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기 때문입니다. 성지를 순례했다면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 가신 길을 따라가면 좋겠습니다. 백견이 불여일행이기 때문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이 태어난 곳은 솔뫼입니다. 솔뫼는 소나무 숲이 청청하다는 뜻을 지닌 송산(松山)의 우리말입니다.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충청도에서 제일 좋은 땅'이라고 했던 솔뫼는 김대건 성인이 태어난 생가 터일 뿐 아니라 증조부 김진후(비오, 1814년 순교)를 시작으로 4대에 걸쳐 순교자 11위를 낸 성지입니다. 한국을 방문하셨던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솔뫼를 방문하셨습니다. 성지는 2004년에 복원한 성인의 생가와 함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기념관, 소나무 그늘 아래 서 있는 김대건 신부 동상 및 기념탑 등으로 조성됐습니다. 기념관은 성당을 비롯해 성인의 생애와 사목 활동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김대건관, 대전교구의 어제와 오늘을 보여주는 내포 교회관, 기증 유품실, 소영상관 등으로 이뤄졌습니다. 김대건 성인의 삶과 신앙을 보고 느끼기에 모자람이 없습니다.
솔뫼에서 태어난 성인이 순교로 생을 마감한 곳은 서울 새남터입니다. 새남터에서 순교한 분은 김대건 신부님뿐만이 아닙니다. 한국교회가 낳은 순교 성직자 14명 가운데 11명이 이곳에서 순교하였습니다. 그리고 11명 가운데 8명이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성 앵베르 주교와 성 모방ㆍ샤스탕 신부님이 새남터에서 순교하였습니다. 새남터에는 현재 이들의 유해가 모셔져 있습니다. 전통 한옥 양식으로 세워진 새남터성당에서 꼭 둘러봐야 할 곳은 2006년 문을 연 '새남터 기념관'입니다. 모두 4개 공간으로 이뤄진 기념관에서 '도입 공간'(입구)은 새남터성지 역사와 103위성인 성화를, '전시 공간'은 천주교 수용과 창설, 박해 및 순교과정 유물들을 전시했습니다. 또 '추모의 장'은 김대건 신부 등 성직자 14인의 흉상과 부조 및 추모대로, '체험 및 교육 공간'은 김대건 성인 유해를 모신 조배실과 영상물 상영실, 박해 체험 공간 등으로 꾸며졌습니다.
경기도 안성 산골짜기에 있는 미리내는 성인이 묻힌 곳입니다. 당시 대역죄로 처형당한 김 신부님의 유해를 거둔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행동이었습니다. 성인이 순교한 지 40일이 지난 후 목숨을 걸고 성인 유해를 거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이민식(빈첸시오, 1829∼1921)입니다. 미리내는 다름 아닌 이민식의 고향입니다. 성인이 미리내에 묻힌 사연입니다. 미리내(은하수의 우리말)는 박해를 피해 숨어 살던 신자들 집에서 흘러나오는 불빛들이 달빛 아래 냇물과 어우러져 은하수처럼 보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경당 앞에 있는 네 개의 묘 가운데 성인의 묘는 왼쪽에서 두 번째입니다. 성인의 왼쪽은 강도영 신부, 오른쪽은 차례대로 페레올 주교ㆍ최문식 신부의 묘입니다.
성인이 사제품을 받고 조선에 들어와 붙잡힐 때까지 활동한 기간은 반년 남짓입니다. 짧았던 만큼 성인의 자취가 남은 곳은 많지 않습니다. 나바위와 용수리 포구는 성인의 조선 입국과 관련된 성지입니다. 나바위는 성인이 1845년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와 함께 서해를 통해 귀국하면서 첫발을 디딘 곳입니다. 이곳에는 성인 일행이 한국 땅을 밟은 것을 기념해 세운 나바위성당이 있습니다.
일행은 나바위에 도착하기 전 바다에서 풍랑을 만났습니다. 표류하던 일행이 도착한 곳이 바로 제주도 용수리 포구입니다. 일행은 이곳에서 며칠간 머물면서 배를 수리하고 먹을 것을 구한 뒤 다시 뱃길에 올랐습니다. 제주교구는 이를 기념해 용수리 해안에 김대건 신부 제주표착 기념관과 기념 성당을 세웠고, 성인 일행이 타고 왔던 라파엘호를 복원해 전시하고 있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옥중에서 신자들에게, 주교님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신부님의 굳은 신앙과 열정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신부님의 편지 중에서 최양업 신부님에게 어머니를 부탁하는 내용을 읽으면서 눈물이 났습니다.
“머지않아 천당에서 영원하신 성부 대전에서 서로 만나 뵙기를 바랍니다. 저를 대신하여 모든 공경하올 신부님들께도 인사드려 주시기를 청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한 저는 그리스도의 권능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저로 하여금 모든 혹독한 형벌을 끝까지 용감하게 이겨내도록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느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의 환난을 굽어보소서.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살피신다면 주여, 누가 감당할 수 있으리이까.
지극히 사랑하는 나의 형제 토마스여, 잘 있게. 이후 천당에서 다시 만나세. 그리고 내 어머니 우르술라를 특별히 돌보아 주기를 그대에게 부탁하네.
지극히 공경하올 신부님들, 안녕히 계십시오. 무익하고 부당한 종, 그리스도를 위하여 감옥에 갇힌 조선 선교지의 교황 파견 선교사 안드레아가 올립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조욱현신부-
김대건 신부님은 1821년 8월 21일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솔뫼)에서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와 어머니 고 울술라 사이에서 출생하셨다. 6살 때 박해를 피해 경기도 용인시 남곡리의 골배마실로 이사를 하고 1836년 은이 공소에서 영세를 하셨다. 그 해 12월 모방 나신부에 의해 최양업 토마와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 유학길에 오르니 16세였다. 1844년 12월 15일 페레올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고 1845년 1월 조국에 몰래 입국하였다가 다시 4월에 주교와 신부를 영입하기 위하여 10여 일의 항해 후 상해에 도착한다.
1845년 8월17일 상해 근처 김가항에서 페레올 주교에 의해 사제로 서품 되니 한국교회 최초의 사제가 되었고 그때 그의 나이 25세였다. 그해 10월 12일 주교와 신부를 모시고 충청도 나바위에 무사히 입국하였다. 8개월 동안 국내에서 사목활동을 하던 중 1846년 6월 5일 몰래 출항하려다 황해의 순위도 부근에서 체포되어 9월 16일 새남터에서 참수되어 군문 효수형을 당하니 그의 나이 26세에 불과하였다. 1925년 비오 11세에 의해 로마에서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2세에 의해 서울에서 성인으로 시성 되었다.
복음: 마태 10,17-22: 박해를 각오하여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새로운 종류의 싸움을 준비시키신다. 그분 때문에 신앙 때문에 제자들은 부당한 대우와 형벌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신다. 이것은 선을 위해 악을 참고 견딜 때 승리가 있다는 것을 가르치시는 말씀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이 정말 가치가 있는 것인지 따져보지 않았다. 그들은 그대로 순명하였다. 그들이 순종한 것은 어떤 무서운 일이 닥친다 해도, 그것을 견디어낼 수 있는 더 많은 은총을 받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 할 것이다.”((17절) 유다인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한 일인 양, 회당에서 그들을 채찍질 할 것이다. 기도와 찬양을 바치고 성경을 읽는 그곳에서 사도들을 처벌할 것이다. 사실 사도들이 겪은 고통은 하느님께 바치는 희생 제물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19-20절)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큰 위안을 주시는 말씀이다. “말하는 이는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라고 하셨다. 즉 사도들은 하느님의 영 없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21절) 한 집안의 가족들이 서로 다툴 것이다. 이것은 꼭 가족들이라는 말이 아니라, 인간은 부모와 친척으로 불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에는 사람들이 일치하고 있었지만, 이 믿음 때문에 사악한 믿음과 충돌한다는 뜻이다. 그 사악한 믿음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증언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조심하여라.”(17절)고 하신다. 왜냐하면 모든 악 가운데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장 악하다는 사실을 알려주려 하셨기 때문이다. 인간이 동물보다 더 잔인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은 동물에게는 이성이 없기 때문에 동물의 잔인함은 인간의 잔인함에 못 미친다. 이성적인 인간이 잔인하게 굴면, 그 잔인함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22절) 앞으로 신앙생활을 해 나가면서 만나게 될 사람들은 아마 이러한 사람들이라고 하시는 것 같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시작은 많이 하지만 끝에까지 가는 이는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은총으로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끝까지 견디어 낼 수 없다.
영광스러운 것은 어떤 좋은 일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좋게 끝맺는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 끝에 이를 수 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되었으니 과거를 돌아보지 말고 우리의 마지막을 생각하라고 하신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시는 이유이다. 우리의 마지막 순간까지의 신앙을 묵상하고 항구하여야 한다는 말씀이다.
김대건 신부님은 인간의 본 모습을 잘 깨닫고, 알고 사랑한 분이시며, 하느님께 자신의 목숨을 바쳐 사랑한 죽기까지 효애를 드린 분이시다. 끝까지 항구한 분이시다. 우리도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과 같은 항구한 믿음과 온갖 박해도 이길 수 있는 주님의 은총을 청하도록 하여야 하겠다.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한상우신부-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 22)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길을 냅니다.
새로운 세상
새로운 길위에
첫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품은
뜨거운 가슴으로
이 땅에서
첫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첫 사제의 뜨거운
사랑이 세상을
물들여놓았습니다.
빛은 아픔을
동반합니다.
시련의 크기만큼
더 깊어지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아픈 시대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했습니다.
새파란 청춘을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진정한
봉헌의 삶을
후배들에게
보여줍니다.
이 땅의
첫 사제에게서
믿음과 사랑을
배웁니다.
이 땅의 신앙은
눈물과 추위
아픔과 기도로
이루어졌음을
우리 잊지맙시다.
이 땅의 성직자들을
위해 빌어주소서.
매순간이 간절한
기도였을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의
삶을 기억합니다.
끝까지 가야
길은 길이 됩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 독서에는 "아버지의 영"(마태 10,20), "하느님의 영"(2역대 24,20), "성령"(로마 5,5)이 공통적으로 등장하십니다. 이는 한국 최초의 사제 순교자이신 김대건 신부님을 기념하는 날에 말씀께서 우리어게 각인시키시고 싶으신 바일 겁니다.
믿지 않는 보통 사람들은 순교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자기의 안위와 목숨'까지 버려가며 지키고 싶은 신념이 있다는 게 생소하고 어리석게 보이기까지 합니다. 더우기 '자기의 안위와 목숨'이 삶의 목적일 경우에는 더 그럴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박해와 죽음을 기정 사실로 이야기하십니다. 또 그걸 피하는 길을 알려주시기보다 그때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일러주십니다. 그러니 주님의 길에 들어선 이상 다른 선택지는 희박하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20)
그런데, 참으로 막막한 위기의 순간에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실 이 말씀은 단지 상대를 감화시킬 음성 언어로만 발설되지 않고, "죽음"이라는 행동 언어로도 표현됩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영께서는 그 순간을 모면하도록 등장하시는 게 아니라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야 할 것이 있음을 증거하기 위해서도 활동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나 때문에 ... 끌려가 ... 증언할 것이다."(마태 10,18)
제자의 증언 역시 성령의 활동처럼 말뿐만 아니라 목숨을 바치는 행동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잘 알다시피 "순교"는 "증거"의 다른 말이고, 그래서 순교자를 증거자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때에 ... 즈카르야는 하느님의 영에 사로잡혀 백성 앞에 나서서 말하였다."(2역대 24,20)
부정적 결과가 뻔히 예상되는 말을 전해야 할 때 얼마나 위축되고 두려울지 어느 정도는 압니다. "그래도" 해야 한다면, 그 중심에는 인간의 힘이 아니라 성령께서 움직이시는 것입니다.
제2독서인 로마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로마 5,2)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 희망을 자랑할 뿐 아니라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로마 5,3) 환난을 자랑하다니 도대체 어느 경지에 다다라야 그럴 수 있을까요? 그건 환난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환난을 통해 인내, 수양, 희망이 차례로 탄생될 것이기에 그렇다는 뜻일 겁니다.
결국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로마 5,5)에 우리는 우리가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언어를 동원하여 하느님을, 그분의 사랑을 증언합니다. 아쉽지만 사랑 없이는 목숨을 내놓는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으니까요.(1코린 13,3 참조)
종교와 신앙이 대체로 존중받는 오늘 이 시대에 우리가 말과 행동으로 증언할 내용은 우리가 받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우리 안의 성령께서 이 사랑이 증언되도록 친히 영감을 주시고 생각을 일깨워 주시고 입을 열어 주시고 움직이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께서 하시도록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마태 10,22)이고, 사랑의 순교자, 사랑의 증거자라 불리울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그러니 우리도 사랑의 순교자가 됩시다. 하느님 사랑 때문에, 이웃 사랑 때문에 나를 내어놓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한국교회의 성직자들이 그러한 사랑의 순교자들이 되시도록 기도하는 날입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조심은 하되 걱정은 마라!
-김찬선신부-
전에 대축일로 지내던 김대건 신부님의 축일을 기념으로 지내는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 교회가 그렇게 하기로 하였으니 저도
소박하게 지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의미를 소홀히 하고 싶지 않습니다.
소박한 것과 소홀한 것은 너무도 중요한 차이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이고 세속적으로는 소박한 것에 소홀하게 되기 쉽지요.
예를 들어 옛날 임금님의 행차나 독재자의 행차 때는 사람들을 동원하여
도열케 하고 행사를 엄청 거창하게 거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렸을 적의 저는 이런 외적인 것들에 의미의 영향을 받았기에
임금이나 독재자가 정말로 대단한 자라 생각하고 정중히 대하고
그렇지 않은 소박한 사람은 홀대를 했는데
이 홀대라는 것이 소홀히 대한다는 뜻이잖아요?
그랬었지만 나이를 먹고 영적인 가치에 더 의미를 두는 지금은 그 반댑니다.
세상에서 잘났다는 사람들을 오히려 하찮게 여기고
작고 소박한 것에 더 큰 의미를 둘 수 있게 됩니다.
가치의 초월과 의미의 초월 때문에 가능해진 것인데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로 초월하게 되면 이렇게 되는 거지요.
그런데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로 초월하게 되면
또한 오늘 복음의 말씀처럼도 됩니다.
오늘 주님께서 “사람들을 조심하여라.”하고 말씀하시지만
바로 이어서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고 하시는데
세상 사람들을 조심은 하되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세상사에 대해서도 걱정을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조심은 하되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걱정치 않게 되는 것,
이것이 그런데 어떻게 가능합니까?
말이 쉽지 인간적으로는 매우 어려운 일이지요.
그런데도 이것이 가능한 것은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김대건 사제나 모든 성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내가 정작 두려워하는 것은 하느님이고,
내가 정작 걱정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를 잃는 것일 때 가능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가 가치를 두는 것을 중시하고 그래서
그것을 잃을까 걱정도 하는 법인데 이미 천상 것이 가치가 있고
이 세상 것이 무가치하게 되면 그것을 잃게 될까봐
걱정하는 일도 없게 된다는 말입니다.
아무튼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가 우리를 해치려는 사람들에게
무의미한 희생은 당하지 않도록 조심을 하라고 하시며
그런데 그렇게 조심을 했는데도 그 상황을 피할 수 없었다면
이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하지는 말라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오늘 저에게는 이렇게도 들립니다.
너를 해치려는 사람을 조심은 하되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 마라!
네가 정작 걱정해야 할 것은 네가 이들을 두려워하게 되고
네가 세상사를 걱정하게 되는 것이니 그것을 걱정하여라!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7월 2일 주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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