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7월 4일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Margaret K 2019. 7. 3. 18:40

2019 7 4일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얘야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 
(마태오 9,1-8)


"Courage, child, 
your sins are forgive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외아들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하시고, 그가 이를 실행하려 하자 그를 말리며 그에게 복을 내리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고치시며,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계심을 보여 주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제1독서에서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여 외아들마저 제물로 바치려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후손을 통하여 모든 민족에게 복을 내리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 모두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 이들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복을 받게 된 사람들, 곧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외아들 이사악이 아니라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제물로 내어놓으심으로써 당신께서 약속에 충실하신 분임을 드러내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중풍 병자 한 사람을 데려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십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고쳐 주시기 전에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속으로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유다인들 사고방식에 따르면 병이 들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부정한 상태, 곧 죄의 상태에 있음을 의미하였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죄를 용서해 준다는 말은 그를 죄의 상태, 곧 병에서 풀어 준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관점에서 볼 때 병 자체가 죄를 의미하지는 않기에, 중풍 병자를 치유하는 것 자체가 죄를 용서해 주는 행위는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의 약속이, 곧 죄의 용서가 이루어지게 되었음을 유다인들이 자기네 방식으로 깨닫게 해 주시려고 죄인으로 여기던 중풍 병자의 병을 치유해 주십니다.
그렇게 우리 모두가 죄를 용서받고 다시금 하느님의 축복 속에서 살 수 있게 되었음을 선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육신의 고통만을 없애 주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죄를 용서받아 하느님과 화해하여 영원히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서울대 암연구소에서는 스트레스가 생체에 미치는 영향을 확인하기 위해 실험용 쥐를 활용한 흥미로운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같은 조건에서 양육된 실험용 쥐를 두 집단으로 나눠서 바닥에 전기 충격 장치가 포함된 투명한 유리 상자에 넣었습니다. 그 후 한 집단에는 일정 시간마다 고통을 유발하는 전기충격을 주고, 또 다른 집단은 투명한 유리창을 통해 맞은 편 쥐들을 관찰할 수 있게 배치했습니다.

하루 종일 전기 충격을 받았던 쥐와 오로지 유리창 너머로 고통 받는 동료 쥐를 관찰하던 쥐들의 스트레스는 과연 어떠할지를 살폈습니다. 16시간의 실험 끝에 탈진한 쥐가 나왔습니다. 어떤 쥐들이 탈진했을까요? 하루 종일 전기 충격을 받은 쥐가 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탈진했을 것 같지만, 뜻밖에도 관찰 조건에 있는 쥐들이었습니다.

인간 역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지금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이 가장 큰 스트레스 속에서 힘들어할 것 같지만, 사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사람의 스트레스가 더 크다는 것을 우리의 삶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결국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이나 그 사람을 보고 있는 사람이나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고통 속에 있다고 자기 자신만 힘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그 옆에 있는 사람도 고통을 줄이는데 함께 노력해야 하는 당연한 이유를 찾게 됩니다. 이렇게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함께 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서 주님께 데리고 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태 9,2)

중풍 병자의 믿음이 아니라, 그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병을 고쳐주셨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통 받고 있는 사람이나 그 옆에서 고통을 보면서 함께 해주는 사람이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에 반해 복음에 등장하는 율법 학자들은 어떠합니까?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기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이라면서 불쾌하게 생각하지요. 그들은 고통 받고 있는 중풍 병자와 함께 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죄인이라고 생각하면서 중풍 병자의 고통을 당연하게 생각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고통 속에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은 이 세상입니다. 이는 그만큼의 우리가 해야 할 일도 많다는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고 더욱 더 그들의 아픔에 함께 하면서 주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으로 그들의 고통이 치유될 것입니다.
격려란 사람들에게 그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들이 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켄 블랜차드).



그냥 버리세요...

어떤 책에서 집단의 힘이 개인의 힘보다 우선시 되는 나라가 우리나라라고 쓴 글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소위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할 수 있다는 논리를 내세워서 개인의 고통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하긴 서로 지지하는 정당이 다르다고 서로 원수처럼 대하는 경우도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과정 안에서 타인과 비교하고 또 비교당하면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내’ 자신이 기준이 되지 못하고 타인이 기준에 서게 될 때, 남 눈치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각 개인이 바로 서야 우리 모두도 함께 잘 살 수가 있게 됩니다.

만약 세상에 딱 한 가지 색깔만 있다면 어떨까요? 세상에서 아름다움을 보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다양한 색깔이 있기에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우리 각각의 다양성이 있기에 아름다운 세상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양한 색깔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인간들 안에서도 다양함이 있어야 지극히 정상입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판단에 대해 의기소침하거나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때는 이런 마음을 가져보면 어떨까요?

누군가가 내게 쓰레기를 주고서는 차를 타고서 재빨리 도망을 칩니다. 이때 쓰레기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쓰레기를 하나하나 꺼내서 분석하시겠습니까? 아마 그럴수록 화가 날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기분이 좋지는 않겠지만 그냥 쓰레기통에 버리면 끝입니다. 남의 말이 쓰레기라고 생각되면 그냥 버리십시오. 분석하지 마세요.                   

하느님을 모르는 것이 모욕하는 것이다

-전삼용신부-


인공지능(AI) 로봇 영화인 ‘엑스 마키나’. 유능한 프로그래머 칼랩은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천재 개발자 네이든의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위해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네이든의 비밀연구소로 들어가게 되고, 그곳에서 네이든이 만든 인공지능 ‘에이바’를 만나게 됩니다.


      칼랩은 에이바의 감정이 진짜인지 아니면 프로그래밍 된 것인지를 밝히는 테스트에 참여하게 됩니다. 매혹적인 모습의 에이바에게 칼랩은 한눈에 미묘한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에이바도 칼랩에게 애정을 주며 자신을 만든 네이든을 믿지 말라고 말합니다. 칼랩은 네이든의 이상한 행동을 보며 점점 에이바의 말을 믿어갑니다. 인공지능 로봇이 인간의 감정을 쥐었다, 폈다 하는 것입니다.


      칼랩은 에이바를 만든 인간 네이든보다, 기계인 에이바를 더 믿어갑니다. 결국엔 인간이 AI에게 이성과 감정까지도 조정 당하게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무엇을 믿어야하는지도 말입니다. 칼랩은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혼돈 속에서 자기 자신이 인공지능은 아닐까하는 의심에까지 다다르게 됩니다. 그리고는 에이바를 탈출시키기 위해 네이든을 배신합니다. 에이바는 네이든을 죽이고 자신에게 이용당한 칼랩도 배신한 채 탈출에 성공하여 세상으로 나아갑니다.

 

      천재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완전한 AI 기술의 발전은 인류의 종말을 초래할지도 모른다.”라고 했고, 테슬라 모터스 일론 머스크 또한 “어쩌면 우리는 AI라는 악마를 불러들이고 있는지도 모른다.”라고 우려를 표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 던져준 것은 평화로웠던 인간을 도탄과 전쟁으로 빠져들게 만들었습니다. 요즘 프로 9단의 바둑기사는 인간에게서 바둑을 배우지 않고 AI에게 바둑을 배운다고 합니다. 훗날 AI를 통제하지 못하는 때가 오면 AI의 지배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일이 이미 우리 자신 안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안의 AI는 ‘이성’입니다. 이성은 나의 도구인데 이것이 나의 주인이 되는 날 나의 파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성적 사고가 바로 나 자신이라 생각하며 그것에 지배받기를 거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성은 도구이지 주인이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이성이 한 일이 무엇일까요? 하느님의 지배를 벗어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을 무자비한 분으로 심판하여 그분이 부르실 때 숨도록 했습니다. 고작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가릴 수 있다고 믿게 했습니다. 이성에 속으니 하느님과 단절되게 된 것입니다. 우리 안에 통제하지 못하면 통제받게 되는 AI가 이성인 것입니다.


      이 이성에게 지배받는 대표적인 사람들의 부류가 바리사이-율법학자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믿고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인간에게 줄 수 없다고 여깁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고쳐주시며 당신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셨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기적을 하시는 것을 보고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사람들에게 주신 하느님을 찬미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성에 중독된 이들은 이것마저 속임수가 있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죄의 용서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눈으로 보고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악한 사람들입니다. 표징을 보고 이성적으로 추론해서 더 큰 믿음으로 나아가야합니다. 이것이 표징을 보여주시는 이유입니다. 교회에서 지금도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사제들이 행사하고 있다면 이는 주님께서 그 권한을 주셨다고 보아야합니다. 누가 감히 죄를 용서하겠다고 나설 수 있겠습니까?


      혹은 성체성혈의 예식을 행하는 것만 보아도 믿어야합니다. 누가 감히 밀떡과 포도주를 가져다놓고 예수님의 살과 피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벌어지는 있는 모든 것들이 믿을 수 있는 표징들임에도 직접 예수님이 나타나서 용서해주셔야 하고, 직접 예수님이 미사를 집전해주셔야 한다고 하면 그것이 악한 생각인 것입니다. 이는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믿기 싫어서 안 믿는 것입니다. 이성은 믿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기 위해 이용해야 하는 도구입니다. 도구가 주인이 되면 그 사람은 이성의 노예가 됩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 이성을 도구로 사용해야하는데 이성을 섬기면 하느님을 믿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가 싸워야하는 것은 이성입니다. 이성을 주인이 아닌 도구로 만들어야합니다. 이성은 하느님께로 가기 위한 도구입니다. 도구를 믿으면 그것이 곧 그 사람에겐 재앙입니다. 영화에서 인공지능 로봇이 처음엔 인류에게 봉사하는 듯하다가 인간을 지배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성을 어떤 목적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지 않으면 그것이 나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이성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누가 방을 청소하는 로봇이나 스마트폰을 자신의 주인으로 믿어 복종하려합니까? 그것들은 도구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에 너무 몰입하면 오히려 그것들에 지배를 받습니다. 빠져나오지 못해서 해야 할 일도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성도 내가 도구로 사용해야지 그것에 너무 빠져들어서는 안 됩니다. 이성은 하느님을 아는 데 사용되면 그만입니다. 하느님을 아는 것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이성을 통해 오히려 하느님을 모르게 되었습니다. 그런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이성 중독에서 빠져나와야합니다.


      그 방법은 하느님의 빛으로 이성을 도구로 이용하여 하는 묵상을 하는 것입니다. 혹은 이성과의 대화를 끊고 하느님만을 바라보는 관상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결국 이성의 지배를 받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인류가 AI에게 지배를 받게 되는 서막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도구를 단지 도구로 잘 다스릴 수 있어야합니다.


-조재형신부-


매일 숨을 쉬면서 사람은 숨 쉬는 방법을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호흡도 몇 가지가 있습니다. 평상시에 하는 호흡입니다. 가슴으로 호흡을 합니다. 수련을 통해서 하는 복식호흡과 단전호흡이 있습니다. 이런 호흡법을 배우면 혈액 순환이 잘 되고, 정신이 맑아진다고 합니다. 운동선수들이 긴장을 풀기 위해서 숨을 고르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숨 쉬는 법을 잘 배워도 건강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매일 글을 쓰면서 글 쓰는 법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단어를 많이 알아야 합니다. 단어의 개념을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전을 가까이 하고, 책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일기를 쓰고, 메모를 해야 합니다. 예전에는 편지를 쓰고, 생각을 정리하면서 글을 썼지만, 요즘은 컴퓨터와 스마트 폰으로 글을 쓰고 문자를 보냅니다. 편리하고 빠르지만, 정성과 깊이가 느껴지지 않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지만 신앙생활의 길을 깊이 생각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단체 활동하고, 미사참례하고, 신심서적 읽고,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고, 애덕을 실천하면서 지내면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의 맛과 깊이를 알기 위해서는 더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성지순례, 피정, 양심성찰도 신앙생활에 도움을 줄 것입니다. 수도회의 영성을 배우는 것도 좋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의 영신수련은 신앙생활에 큰 도움을 줄 것입니다.

 

오늘의 성서말씀은 신앙생활에 꼭 필요한 2가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아브라함이 보여주었던 순명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느님의 말씀에 아브라함은 아무런 이유도 묻지 않고, 순명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축복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런 순명의 모습을 나자렛의 성가정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성모님은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순명하였습니다. 요셉 성인은 천사의 말을 듣고 파혼하려고 했던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면서 순명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라고 기도하시면서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셨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위기의 순간에 순명할 수 있기 위해서는 늘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는 애덕의 실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중풍병자는 혼자서 예수님께 갈 수 없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평상에 들고 예수님께로 데려 왔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치유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의 작은 수고와 노력은 중풍병자가 치유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봉사자들의 마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고통에서 치유시켜 주셨습니다. 어떤 분들은 좋은 방법을 찾기 보다는 지금 잘못된 것들을 찾고 비난하는 것을 봅니다. 그동안 열심히 일했던 분들의 수고와 땀은 생각하지 못하고 눈앞에 드러나는 작은 허물들을 먼저 이야기하는 것을 봅니다. 마치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바리사이파 사람과 같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중풍병자를 평상에 들고 왔던 따뜻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온 착한 이웃들을 생각합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 살지만 이미 하느님나라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나라는 그런 이들 가운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밭과 같고, 그릇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심느냐에 따라서,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몸은 변화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담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담는다면, 우리의 몸은 성령의 이끄심으로 살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악한 것들을 담는다면 우리의 몸은 악한 기운에 의해서 이끌려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악의 지배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를 얻기를 바라셨습니다. 


님으로 인해 기적처럼 내 인생에 봄이 찾아왔습니다!

 -양승국신부-

 

요즘은 의술이 많이 좋아져서, 초기에 발견하고 즉각적인 대처를 하면, 빠른 회복이 가능한 병이 중풍(中風)이지만, 과거에는 꽤나 치명적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주변의 여러 어르신들이 중풍으로 인해 제대로 거동도 못하시면서, 평생 고생고생하다가, 힘겹게 세상을 떠나시는 모습을 많이 봐서 그런지, 떠올리기조차 싫은 단어가 ‘중풍’입니다.

 

뇌는 우리 신체 전반에 걸쳐 의식적·무의식적 명령을 내리고, 통제를 하는 중앙관제센터 역할을 하는데, 이런 뇌의 혈관이 막히거나 터져, 피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을 때, 중풍이 발생합니다. 뇌경색, 뇌출혈이라고도 하는데, 병세가 진전되면 몸의 일부, 혹은 반, 나중에는 전부가 마비되는 무서운 병입니다. 

 

오늘 사람들이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온 중풍병자의 증세는 ‘침상에 뉘인 채’란 표현을 봐서,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치유 불가능의 말기요 중증이었습니다. 온 몸에 마비가 와서 스스로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 환자 본인이게도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언제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도움의 손길을 받아야 했으니, 본인 스스로를 짐으로 여겼습니다. 긴병에 효자없다고, 가족들 역시 아무런 희망이나 가능성이 없는 그를 케어하느라, 다들 진이 빠졌을 것입니다.

 

아무런 희망도 기쁨도, 삶의 의미도 없던 중풍병자, 언제나 그의 계절은 혹독한 겨울이었는데, 갑자기 그의 인생에 기적처럼 봄이 찾아왔습니다. 은혜롭게도 삶의 막다른 골목에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주님은 매섭고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봄 같은 존재입니다. 따지고 보니 주님과 함께 라면, 우리네 인생은 계절에 상관없이 항상 봄일 수도 있겠습니다. 화사하고 향기로운 꽃들이 만발한 봄같은 존재, 우리의 눈과 코, 귀와 입은 물론 정신과 영혼까지 따뜻하게 녹여주고 치유시켜주실 분,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치유하시는 과정에서 둘러선 사람들이 꽤나 의아해 한 측면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의사요 치유자로서의 모습을 기대했습니다. 당신 사랑의 손길을 중풍병자의 몸에 대고 일으켜 세우는 모습을 기대했습니다. “낫게 해주겠다!”는 말씀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 입에서 나온 말씀은 사뭇 의외였습니다. “애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태오 복음 9장 2절)

 

사람들은 중풍병자의 죄를 고백받고 사해주는 시제가 아니라 의사를 원했습니다. 중풍에 걸린 육체의 치유를 위해 예수님께 데려온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한 차원 높은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당신에게 있어 몸이 건강한가, 병들었는가? 하는 것은 부차적인 것이었습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영혼이 건강한가, 병들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인간 존재가 영적으로 살아있는가, 죽었는가? 하는 것이 당신께는 훨씬 더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시선은 언제나 인간의 육체를 뚫고 들어가 그의 내면과 마음, 영혼과 정신을 들여다 보십니다. 중풍병자는 육체적 질병도 질병이었지만, 그보다 마음이 병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아무런 쓸모 없는 존재로 여겼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무거운 짐으로, 무의미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연유로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외치신 것입니다. “애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마치 짐짝처럼 누군가의 손길에 옮겨져야 했던 중풍병자가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인해 똑바로 일어나 자신의 들것을 본인이 들고 걸어가는 모습! 생각만 해도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한 인간이 주님을 제대로 만날 때,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 안에 주님이 안계시면, 우리는 죄속에 머물 수 밖에 없습니다. 죄는 주님으로부터의 멀어짐입니다. 우리가 다시금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고, 그분을 마주 뵙고, 그분을 찬양할 때, 우리 죄는 사해지고, 진정한 의미의 치유, 영적 치유, 영원한 치유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신다

 -반영억신부-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외적인 병을 고쳐 주신 것이 아니라 그의 죄까지 용서해 주셨습니다. 당시는 병은 죄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중풍병자는 신체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죽음에 직면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한 말씀으로 생명과 활력을 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병의 근원을 고쳐 주신 것입니다. 그야말로 영육의 치유를 이루어주셨습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외적인 질병의 치유에 매달립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원인을 다스리는 치유의 손길을 펼치십니다. 우리는 그러한 능력을 지니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병의 치유는 그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과 구원을 보여주는 표징일 따름입니다. 손가락 끝으로 달을 가리킬 때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 ‘손가락’이 아니고 ‘달’인 것처럼(견지망월) 우리가 만나야 할 분은 나를, 우리를 구원하실 예수님이지 병의 치유가 다는 아닙니다.

 

눈으로 보이는 현상에 매달리는 것보다 언제든지 그러한 은총을 베풀어 주실 수 있는 주님을 만나는 것이 더 소중합니다. 만남을 위해서 그분께 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또한 환자 자신이 갖는 믿음도 중요하지만 중풍병자를 평상에 뉘어 주님께 데려온 이웃의 믿음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사실 중풍병이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무지와 껍데기 믿음이 더 큰 문제입니다.    

 

미국 남북 전쟁시에 링컨의 참모가 하느님께서 우리의 편이 되시게 하기위해 기도합시다.라고 하였을 때 링컨은 하느님이 우리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 편에 서기위하여 기도하도록 합시다.라고 답변하였다고 합니다.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믿음의 사람은 생각하는 차원이 다릅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편이 되어주시고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길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나의 편이 되어주셨고 죄를 용서해 주시며 마음의 자유를 주셨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주님께 대한 믿음을 다지고 새롭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신실하지 못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나에게 잘해주고 계십니다. 어떤 어려움이 생길 때 내가 죄인이라서 벌을 받는구나. 또는 내가 못나서 이런 고통을 당하는구나 하고 낙담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이미 하느님의 모상, 하느님의 걸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렇게 느끼지 못하는 것은 나의 우둔한 믿음 탓입니다. 지금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외부에서 오는 위기인지 아니면 연약한 내 마음에서 오는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에 눈뜨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오늘도 ‘주책’을 생각합니다. ‘주책’ 아시죠? 님께서 임져주신다는 믿음으로 산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9,1-8: 중풍병자를 고치시다.

중풍병자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침상에 실려 왔다. 자기 자신의 힘으로는 어쩌지 못하는 상태였으나, 그 사람들의 도움으로 그렇게 되었으리라고 본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가 아니라, 그를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병자에게 애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2)고 하신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겸손을 나타낸다. 죄를 용서해주시고 아들을 부르듯이 부르신다.

 

사지의 힘을 다 잃어버리고 누워있는 그의 치유를 위해 완전한 의사이신 주님 앞으로 들려왔다. 그분의 자비로 우선 마음이 치유되면 그 육체는 곧바로 자기 침상을 들고 갈 수 있는 충분한 힘을 얻을 것이다. 이 경우에는 치유 받을 사람이 천사들에 의해 예수님 앞으로 옮겨졌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용서받았다. 그러나 그가 죄를 지어서 병이 든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4) 하느님께서는 , 바로 나는 너의 악행들을 씻어 주는 이”(이사 43,25)시다. 하느님 말씀을 자기들 마음대로 해석하는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했다고 따진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을 주님께서는 읽으시고 당신이 마음에 숨겨진 것들을 아시는 하느님이심을 보여주신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5) 이 말씀은 어떤 행위가 더 쉽다는 의미가 아니다. 인간으로서는 아무도 그러한 말을 할 수 없다. 두 가지는 모두 전능하신 하느님께만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여기서 복음은 예수께서 이 모든 권능을 지니셨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하시고는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집으로 갔다.”(6). 이 행위로써 예수님은 죄를 용서해 주시는 권한과 건강을 회복시키는 당신의 능력을 보여 주셨다. 병자가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잃었던 낙원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의미이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동시에 찬양을 드렸다고 한다. 사람들이 하느님을 찬양한 이유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사람들에게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과 하늘로 돌아가는 권한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병자의 치유행위는 죄를 용서하는 행위를 증명하는 것과도 같다. 그분은 영혼과 육신의 마비를 모두 고쳐주셨다. 영혼의 치유는 육신의 치유를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다.

 

우리가 이렇게 고백하는 주님께 우리 이웃도 함께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자.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태 9, 6)

-한상우신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우리자신의
평상입니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갈
내적건강을
되찾았습니다.

기다림 뒤에
찾아오는
치유의 기쁨입니다.

아픈 과거를
떠날 수 있는
예수님의 치유입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죄의
용서입니다.

모든 용서는
하느님을 향해
있습니다.

치유와 용서를 통해
우리가 사람임을
받아들이듯
사람의 여정을
다시 걷게됩니다.

치유의 여정과
용서의 여정은
생명의 길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은총으로
살아가는 우리들
여정입니다.

치유의 관계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이듯

용서의 관계또한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우리의 역사안에
용서의 하느님이
계십니다.

용서의
하느님이심을
믿습니다.

평상을 들고
삶의 자리로
기쁘게 돌아갑시다.


-오상선신부-


예수님께서 당신이 사시는 고을에서 중풍병자 일행을 만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마태 9,2) 어제, 그제에 이어 또 "믿음"의 이슈가 등장합니다. 주님의 길을 따르는 저마다 부족한 우리에게 그만큼 소중한 덕목이기 때문일 겁니다. 환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에게 믿음이 없었다면 굳이 시간과 공을 들여 괜한 고생을 사서 할 필요가 없었겠지요. 움직임과 이동이 자유롭지 않은 이와 동행하는 일은 그리 만만하지 않으니까요. 예수님께서 먼저 그들의 믿음을 알아보십니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태 9,2) 위로와 희망을 주는 참으로 다정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 첫 말씀에 먼저 반응한 건 환자가 아니라 율법 학자들입니다. 그들에게 죄의 용서는 오로지 하느님께만 유보된 권능이었기 때문에 이 말씀이 신성 모독으로 들렸을 겁니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태 9,6) 첫 말씀이 영의 원리에 기인하는 표현이었다면, 이 두번째 말씀은 땅의 원리를 충족시키는 표현입니다. 매우 구체적이면서 실천적인 지시여서 달리 오해할 소지가 없이 명확합니다. 그리고 즉시 이루어집니다. 이 말씀의 실현에 대해 복음사가는 "그러자 그가 일어나 집으로 갔다."(마태 9,7)고 전합니다.

고통을 겪는 환자 앞에서 예수님은 구구절절 율법 학자들과 입씨름하느라, 또 당신을 변호하느라 시간을 보내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즉시 인간의 사고방식에 가장 익숙하고 무리없는 표현으로 바꾸어 말씀해 주시지요. 어떻게 표현되었든 의미는 같습니다. 곧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마태 9,6)을 일깨워주실 뿐만 아니라, 실제로 실현된다는 걸 증명하신 것입니다.

제1독서는 이사악의 번제라는 창세기의 유명한 대목입니다. 귀하게 얻은 외아들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하느님의 요구에 아브라함이 외아들을 데리고 지정해 주신 장소로 향합니다. 성경 저자는 아브라함의 움직임만을 서술할 뿐 그의 내면에 오가는 짐작 가능한 감정적 동요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어, 독자인 우리로서는 각자 자기 삶을 투사해 이를 추측하고 읽어낼 뿐입니다.

"아브라함은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가져다 아들 이사악에게 지우고 자기는 손에 불과 칼을 들었다."(창세 22,6) 교부들은 자기를 태울 장작을 진 이사악을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으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그와 동행하는 아브라함을 인류 구원을 위해 성자의 죽음을 허용하신 성부 하느님으로 보지요.

그런데 오늘 제게는 하느님께 순종해 길을 나선 아브라함이 단순히 성부를 상징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성부인 동시에 성자라고 느껴지네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길의 끝을 아시면서 묵묵히 고통을 감내하고 죽음에 이르는 길에 스스로를 내어놓으신 것처럼, 아브라함도 자기의 생명이고 분신이고 미래인, 또다른 자기라 할 수 있는 독자 이사악과 함께 아버지로서의 죽음인 동시에 자기 자신의 죽음으로 가는 중이니까요.

아브라함이 손에 쥔 "불과 칼"이 다가옵니다. 사람을 해칠 수도 있고 요긴하게 쓰일 수도 있는 참 강렬한 도구들이지요. 그래서 누가 쥐고 있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결과를 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불"은 이루 다 셀 수 없을 만큼 성경에 많이 등장하는 하느님 현존의 상징이고(탈출 3,2; 13,21; 19,18 외 다수 참조), 날카로운 칼은 "말씀"으로 연결됩니다.(히브 4,12 참조)

또 이 "불과 칼"은 창세기 원조 이야기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주 하느님께서 ... 이렇게 사람을 내쫓으신 다음 에덴 동산 동쪽에 커룹들과 번쩍이는 불칼을 세워 생명 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창세 3,24) 여기서 "불칼"은 영원한 생명과 인간 사이의 철저한 단절을 유지시키는 방벽이고 근접할 수 없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아브라함이 순명으로 이사악의 생명뿐 아니라 후손 대대로 민족의 생명을 보장받았듯이, 성자 예수님께서도 순명으로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았던 "불칼"이 거두어지게 하실 겁니다. 결국 아브라함의 "칼과 불"이 숫양의 번제에 사용된 것처럼, 하느님 나라와 인간 사이를 가로막았던 "불칼"은 하느님 현존이 되고, 말씀이 되고,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뜨거운 사랑이 되어(아가 8,6-7 참조) 오히려 인간을 되살리고 행복하게 풍요롭게 해 줄 것입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마태 9,6) 예수님의 권한은 바로, 사랑의 자발적 순명에서, 사랑 때문에 떠안은 죽음에서, 인간을 위해 자신을 잊은 온전한 소멸에서 옵니다. 누구도 자기를 잊은 숭고한 죽음 앞에서 "네가 무슨 권리로..."라고 함부로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예수님께서 친히 죽음으로써 인간이 진 죄의 짐을 벗겨 주셨으니 우리로서는 감사하며 따를 뿐입니다. 삶의 질곡을 통과하는 동안 죄와 약함으로 인해 마비되고 굳어지고 쓸모없이 늘어져버린 우리 영혼 구석구석에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고 속삭이시는 그분 음성에 즉시 일어나 따릅시다. 예수님 권한은 유통기간이 없습니다. 소멸시효도 없습니다. 불칼이 치워진 영원한 생명나무에 다다를 때까지 쭈욱 이어질 그분 권한에 기대어 부족한 나를 잊고 그저 믿으면서 묵묵히 나아갑시다. 마치 오늘 중풍병자를 평상에 뉘어 예수님께 데려온 이들처럼 말입니다.

성장은 시험을 통해서만
-김찬선신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아브라함아’하고 부르셨다.”

오늘 창세기의 얘기는 시험에 대해 깊은 신앙적 성찰을 하게 합니다.
오늘 창세기의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백세가 되어서야 얻은 외아들 이사악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시험이니까 망정이지 정말로 이사악의 봉헌을 원하신 거라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런 하느님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하느님이 정말 하느님이란 말입니까?

하느님은 결핍이 없으시니 당신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인간의 제물과 봉헌이 필요하지 않은 분이시지요.
그러니 인간의 봉헌을 원하신다고 해도 그것은 당신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고 우리의 봉헌이 우리의 유익이 되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제 생각에 우리에게 닥치는 시련의 이유는 여럿입니다.
하느님에 의한 것이 있고 인간에 의한 것이 있으며,
하느님에 의한 것에는 사랑으로 주시는 것과 벌로 주시는 것이 있으며,
인간에 의한 것도 나의 탓에 의한 것과 너의 탓에 의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니 고통과 시련의 이유를 우리가 잘 식별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태평양 전쟁과 유대인 학살은 순전히 일본과 히틀러의 죄에 의한 것인데
그것을 마치 하느님께서 주셨거나 허락하신 거라고 해서는 안 될 것이고,
인간으로 인한 것도 인간의 죄로 인한 것과 잘못에 의한 것이 있는데
잘못에 의한 것을 죄로 인한 거라며 과하게 죄책해서는 안 되며,
잘못도 내 잘못 때문인데 네 잘못 때문이라며 남 탓을 해서는 안 되지요.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식별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거나 허락하신 고통과 시련이
순전히 하느님 사랑으로 주신 건지 인간 죄에 대한 벌로 주신 건지 정확히
식별하는 것이 쉽지 않고 순전히 하느님 사랑으로 주신 것일지라도
그것이 시험용인지 단련용인지 정확히 식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럴지라도 우리는 식별을 정확히 잘 해야 합니다.
왜냐면 우리에게 어려운 것은 식별보다도 수용이 더 어렵기 때문이고,
식별을 잘 해야 그나마 받아들이는 것이 조금 수월해지기 때문입니다.

사실 고통이나 시련은 순전히 사랑으로 주신 거라도 수용키 어렵지요.
왜냐면 아무리 약이어도 우리 인간은 쓴 것보다 단 것을 원하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미성숙하면 할수록 쓴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제가 청원장을 할 때 오늘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듯
한 청원자를 시험하였는데 그 시험을 통해 그가 어느 정도 성숙하고,
어떤 수용의 자세와 순종의 자세를 갖췄는지 알기 위해서였습니다.

집안에 중요한 일이 있어 그 형제가 허락을 청했을 때 저는 보내주기로
이미 마음먹고 있었음에도 집에 가는 대신 편지를 하라고 했지요.
그것을 그 형제는 그때는 말할 것도 없고 나중에도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하지 못하니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그래서 억지로 받아들였습니다.

우선은 자신이 시험 당하는 것 자체를 자존심 때문에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그 시험이 사랑이라는 것은 이해가 안 되니 더 받아들이기 힘들어했지요.

우리 인간의 시험 중에는 사랑이 아닌 시험이 있을 수 있습니다.
면접시험의 경우에는 사랑이 하나도 없고 오로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입사시켜야 할 사람인지 아닌지 식별키 위한 시험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시험 중에는 사랑의 시험도 있고 하느님의 시험은 더 그렇습니다.
고통과 시련이 식별을 위한 시험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오늘 아브라함의
경우처럼 믿음과 순종의 사랑이 성장하도록 단련키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순종의 사랑은 고통과 시련이라는 시험을 통해서만 성장합니다.
이론은 강의를 통해, 열망은 기도를 통해 배우고 키울 수 있어도 성장은
고통과 시련을 통해서만 가능함을 아브라함을 통해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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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