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25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민족 분단의 아픔을 안고 사는 한국 교회는, 1965년부터 해마다 6월 25일에 가까운 주일을 ‘침묵의 교회를 위한 기도의 날’로 정하였다. 1992년에는 그 명칭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로 바꾸었고, 2005년부터는 이날을 6월 25일이나 그 전 주일에 지내기로 하였다. 한국 교회는 남북한의 진정한 평화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며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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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마태오 18,19ㄴ-22
“Lord,
if my brother sins against me,
how often must I forgive him?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모세는, 너희가 뉘우치고 하느님께 돌아와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면, 하느님께서 너희의 운명을 되돌려 주실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하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형제가 죄를 지으면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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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한 가족이 흩어져 서로 만나지 못하고 생사조차 알지 못한다는 것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비극입니다. 같은 민족 간의 분열과 전쟁은 수없이 많은 가족들을 이처럼 흩어 버렸습니다. 이제는 6·25전쟁이 끝난 지도 60년을 훨씬 넘어, 이산가족의 슬픔을 느끼는 세대도 얼마 남지 않을 정도로 역사가 흘렀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긴 세월이 흘러 더 두려운 것은 오히려 이런 분단의 상황이 지속되고 고착화되어, 민족 분열의 고통도, 이산의 슬픔도 느끼지 못하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사실 고통보다 더 무서운 것은 무감각입니다.
우리나라에는 남북 갈등뿐만 아니라, 남남 갈등도 수없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동서의 갈등, 노사 간의 갈등을 넘어, 이제는 서로 다른 정치적 이념과 부족한 일자리로 말미암아 세대 갈등까지 고착화되는 듯합니다. 같은 민족, 한 가족이라는 공동체 정신보다는 모두 자신의 자리를 찾는 데 급급한 것 같습니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하는 오늘, 예수님께서는 복음에서 일치와 용서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마음을 모아 하나가 되는 것은 하느님께서 가장 바라시는 것이고, 이를 위해서 가장 근본적인 출발점은 바로 서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지나온 분열과 갈등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미래를 위해 새로운 방향을 바라볼 때입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우리는 공수가 완벽했습니다. 경기 내용에서도 분명히 우리 팀이 압도적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골키퍼인 이 친구가 할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골문을 비우고 점점 앞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아예 상대팀 골문 앞까지 오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골문을 자주 비워서 자그마치 5골이나 상대팀에 헌납하게 된 것이지요. 충분히 우리 팀이 이길 수 있는 상황인데 말이지요.
이렇게 자기자리를 지키지 않으면 절대로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없겠지요. 공격수는 공격수의 자리에서, 수비수는 수비수의 자리에서, 골키퍼는 골키퍼의 자리를 잘 지켜야만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운동에서만 그럴까요? 우리 삶 안에서도 자기자리를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들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을 보냅니다. 남북으로 갈라진 우리 민족이 서로 화해하고 진정으로 일치하여 평화 통일을 이룰 수 있기를 기도하는 날인 것입니다. 사실 남북이 갈라진 지도 벌써 69년째입니다. 지금까지 열심히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통일을 이루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쩌면 자기자리를 지키는 것이 부족했기 때문은 아닐까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등의 자리에서 제대로 지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만을 드러내면서 자기자리에서 해야 할 것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무 오랫동안 남과 북이 갈라져 있는 지금, 전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인 우리나라를 위해 주님께 우리 모두가 함께 마음을 모아서 기도하면서 자기자리를 지키면서 자신이 해야 할 것을 지금 당장 해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따라 함께 마음을 모아 기도합시다. 평화 통일을 이루어서 흩어진 가족들이 한데 모여 기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1) 당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2) 당신이 다른 사람들처럼 선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3) 당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4) 당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낫다고 확신하지 마라.
5) 당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하지 마라.
6) 당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7) 당신이 뭔가를 잘한다고 생각하지 마라.
8) 다른 사람들을 비웃지 마라.
9) 누구든 당신한테 관심을 갖는다고 생각하지 마라.
10)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사람들의 관계를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할 10계명이 아닐까 싶어서 올려봅니다.

하나가 되어야 기도에 힘이 생긴다
-전삼용신부-
부산교구 허성 야고보 원로 신부님이 법원 옆에 있는 부산의 모 성당에서 본당신부를 하고 계실 때의 일입니다. 마침 이혼하기 위해 법원에 온 부부가 법원이 점심시간이 된 터라 갈 곳이 없어 성당을 배회하고 있었습니다. 둘 다 신앙인이어서 성당에 잠깐 앉아 있다가 기도가 되지 않아 다시 나왔습니다.
신부님은 그들을 보고 무엇 때문에 이혼을 하려고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남편이 먼저 “이 사람은 제가 무슨 일만 하려고만 하면 반대를 합니다.”라고 합니다. 그랬더니 자매가 “당신이 잘했어봐라. 내가 반대하나?”라고 하며 언성이 높아집니다. 신부님은 “아니, 싸우다가도 어른이 오시면 싸움을 멈추는 법인데 신부님 앞에서 이게 뭐 하는 것입니까?”라고 호통을 치셨습니다. 그들은 용서를 청했고 신부님은 그러면 보속으로 2시간 동안 함께 성체조배를 하라고 했습니다.
두 시간 뒤 두 사람이 눈물이 범벅이 되어 사제관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두 시간 동안 성체 앞에 있다 보니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가 잘못했다고 뉘우치고 용서를 청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신부님이 보는 앞에서 이혼서류를 찢어버렸고, 신부님은 바로 혼인갱신 예식을 해 주었습니다.
기도의 목적이 무엇일까요? 집안이 잘 되는 것일까요? 남편이 승진하고 자녀가 성공하는 것일까요? 기도를 통해 오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사랑이시고 사랑은 일치시킵니다. 그러니 기도하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기도하는 이들이 하나가 되는 것 외에는 바라시는 것이 없으십니다. 그런데 이 목적은 제쳐놓고 기도를 하니 다른 것도 들어주실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사람이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이루어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당신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당신도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용서 이야기가 나옵니다. 베드로 사도가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이 있다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느냐고 여쭈어봅니다. 예수님은 일곱 번에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일곱이란 숫자는 성령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용서는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내 안에서 성령께서 시켜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함께 모이기 위해서는 용서가 절대적으로 요구됩니다. 완전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항상 서로서로 상처를 줍니다. 한 사람만 상처 주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통해 오시는 성령으로 용서할 수 있는 힘을 기르지 않으면 누구든 갈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기도하여 성령의 힘으로 용서하여 둘이 하나가 되었다면 하느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성령께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가 될 줄 아는 사람이라야 그 기도의 목소리가 아버지의 귀에까지 닿습니다. 둘이나 셋이 하나가 되었다면 그것 자체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용서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서 기도해봐야 소용이 없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무언가 청하기 이전에 무언가 청할 자격이 있는지부터 살펴야합니다. 누군가에 무언가를 청할 때 그 누군가가 호감을 가질 무언가를 지니고 있어야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얻어낼 수 있으나 미워하는 사람은 아무 것도 얻어내지 못합니다.
우리나라는 남북으로 갈라져있습니다. 과거의 일들을 잊지 못하고 미움과 원망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니 종교 내에서도 좌파니 우파니 갈라지기 일쑤입니다. 이런 종교에서 하는 기도를 주님께서는 듣기 거북해하십니다. 먼저 화해하고 기도하시기 원하십니다. 이는 마치 민물에 사는 물고기와 바닷물에 사는 물고기가 함께 부모를 찾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섞일 수 없는 사람들끼리 하느님을 같은 부모라고 해봐야 부모님 마음만 아플 뿐입니다. 주님은 갈라진 겨레가 하나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갈라진 공동체, 성당, 교회, 나라가 하나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만약 하나만 된다면 그 공동체가 못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우산과 나막신을 파는 두 아들을 둔 어머니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머니가 우산을 파는 아들을 위해 기도하면 나막신을 파는 아들은 장사가 망하고 그렇다고 비가 오지 않게 기도를 하면 우산을 파는 아들이 망합니다.
남과 북이 갈라져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 기도가 주님께 도달하는 것을 막습니다. 통일이 되어 하나가 되면 주님께서는 우리가 청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실 것입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우리 장차 미래의 자녀들이라면 그들의 사랑이 비극으로 끝나지 않도록, 먼저 두 집안이 화해하고 하나가 되는 일을 완수해야합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으십니다. 함께 기도하면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가 되면 모든 바라는 것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어릴 때의 기억입니다. 동네의 아이들은 시간이 나면 공터에 모여서 함께 놀았습니다. ‘비석치기, 자치기, 구슬치기, 다방구, 술래잡기, 재기차기, 땅따먹기, 딱지치기, 신발치기’ 등을 하였습니다. 지금처럼 학원 때문에 시간을 빼앗기지도 않았습니다. 컴퓨터와 게임 때문에 바쁘지도 않았습니다. 동네의 공터는 우리 모두의 놀이터였습니다. 누구나 와서 놀 수 있었고, 거기에는 이념도, 세대도, 지역도, 학연도 필요 없었습니다. 다른 동네에서 이사 온 아이들도 놀러 오면 받아 주었고, 금세 친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세계는 이렇게 쉽게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공터를 나누어서 소유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공터를 가지고 싸움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물론 아이들도 가끔은 티격태격 다투곤 합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면 아이들은 다시금 공터에서 놀게 됩니다. 공터는 싸운 친구도, 울었던 친구도 모두 받아 주었기 때문입니다. 아스라한 기억이 있습니다. 왜 다투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친한 친구와 싸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키가 컸던 친구는 저의 목을 잡았습니다. 상대적으로 키가 작았던 저는 친구의 급소를 잡았습니다. 우리는 서로 눈물을 흘리면서 상대방의 아픈 곳을 잡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아픈 곳을 놓아 주었고, 눈물을 그치고 함께 하드를 사서 먹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서로가 잡은 상대방의 아픈 곳을 놓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서로에게 무기가 되었던 손은 서로를 보듬어 주는 화해와 용서의 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민족의 일치와 화해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참으로 화해하고, 민족이 하나 될 수 있는가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제1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가 마음속으로 뉘우치고,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서,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대로 너희와 너희의 아들들이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 하여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의 운명을 되돌려 주실 것이다.” 먼저 자신을 성찰하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힘으로는 힘든 일이지만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찰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용서는 조건이 없습니다. 용서는 상대방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용서는 용서하는 사람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오늘의 제2 독서는 용서의 구체적인 행위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속량의 날을 위하여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인간의 관계는 꼭 시비를 가려야만 해결되는 것이 아닐 때가 있습니다. 남과 북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비를 가리려고 하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해결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엉킨 실타래는 더욱 심하게 꼬이게 됩니다. 불가에서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원망을 원망으로 갚으면 원망은 해결되지 않는다. 오직 참음으로써 원망은 해결되나니 이 가르침은 영원한 진리이다. 시비(是非)란 본시 그른 것만 취한다면 해결되지 않으며, 옳고 그른 것을 동시에 놓아버려야 끝난다.?
작년에는 남과 북의 정상이 3번 만났습니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 국방 위원장도 2번 만났습니다. 자꾸 만나서 대화를 하면 길이 보일 것입니다. 남과 북이 단일팀으로 국제경기에 나가고, 남과 북의 예술인들이 평양과 서울에서 공연하고,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 백두산 관광도 계속되고, 서울, 평양을 이어주는 고속도로, 철도가 개통되는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기차 타고 평양을 거쳐서 유럽으로 가는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정치와 군사적인 통일은 아직은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분야는 우리가 서로 협력하기로 마음만 먹으면 못 할 것도 없는 일들입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래도 꾸준히 남과 북이 대화와 협력으로 풀어나가던 일들입니다. 주님의 크신 사랑이 함께 하시어, 우리 사회의 갈등이 치유되기를 기도하며, 남, 북의 화해와 일치가 이루어지도록 기도합니다.

분단된 동포를 하나로 만드는 것은 이 시대 새로운 독립운동입니다!
-양승국신부-
또 다시 오랜 분단의 세월을 돌아보며, 안타깝고 속상한 마음을 애써 달래야 하는 날이 돌아왔습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는 특별히 오늘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로 정해, 한반도의 평화 통일을 위해 좀 더 적극적으로 기도하고 행동하자고 초대하고 있습니다.
같은 피를 물려받고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한 동포인 남과 북이 갈라서서, 점점 더 멀어지기 시작한지 벌써 까마득한 세월이 흘렀습니다. 지리적으로는 손에 잡힐 듯이 가까이 살아가지만, 심리적으로는 지구상 가장 멀리 떨어져 버렸습니다. 이제는 서로가 너무 낯선 존재, 이질감이 커져버린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 강력한 소비에트의 철조망도 제거되었습니다. 영원할 것 같았던 베를린 장벽도 허물어졌습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지구상 유일하게 남과 북 사이에 세워진 무시무시한 철조망은 끝도 없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너무나 큰 슬픔이자 치욕거리며, 이런 상태가 지속된다는 것은, 우리 자녀들과 후손들에게는 너무나 큰 부끄러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 관계 안에서, 서로 크게 상처를 주고 받은 누군가와의 관계 회복과 새출발을 위한다면, 가장 우선적인 일은 일단 만나는 일입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더 자주 만나면 좋습니다.
일단 그를 만나서, 그의 얼굴을 대면하고,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그의 입에서 직접 흘러나오는 말을 듣게 될 때, 좀 더 그를 이해하게 됩니다. 함께 소통하면서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될 때, 그간 감춰두고 있었던 그의 속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자연스레 그간 쌓였던 오해가 풀립니다. 그런 과정 안에서 화해와 일치는 한결 용이해질 것입니다.
아직 속시원할 정도의 획기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지는 못했지만, 다행스럽게도 만남과 대화의 물꼬가 트였습니다. 일년 이년도 아니고 반백년 이상 계속되어온 첨예하고 복잡한 화두가 평화통일이기에, 더 오랜 고민과 성찰, 뼈를 깎는 노력과 큰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런 중차대한 순간에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야속하게도 상황은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첨예한 대립과 머릿싸움을 벌이고 있는 외세는 결코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원하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미사여구를 늘어놓지만, 통일 이후 자국에 끼치게 될 경제적 손실과 다양한 측면의 데미지에 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사실 남북 분단은 국제정치패권세력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강대국들의 국익에 따라 강제된 분단이기 때문에, 분단을 반대하고 통일 정부를 외치던 수많은 민족인사들이 속속 제거되었습니다.
국제정치패권세력인 미국과 소련은 우리 민족에 참으로 못할 짓을 저질렀습니다. 815 해방 이후 유럽쪽 전범 국가인 독일을 분단시켰다면, 당연히 아시아쪽 전범 국가인 일본을 분단시켰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승전국가들은 엉뚱하게도 우리나라를 분단시키는 중차대한 범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가로막는 분단 고착화 세력은 바깥에만 있지 않습니다. 더 큰 적은 내부에 있습니다. 분단고착화는 강대국들에 빌붙어 제 한목숨, 제 호주머니만 생각하는 독재자들을 거듭 배출시켰으며, 기회주의의 명수인 친일파 세력들에게 면죄부를 부여했으며, 아직도 그들의 잔존 세력들은 독버섯처럼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버젓이 살아숨쉬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어떤 정당 안에서, 여러 매체 안에서 얼토당토 않은 논리로 선량한 국민들을 호도시키고 있습니다. 분단 고착화를 자신들의 정치적, 사회적 기반으로 삼고 있습니다. 자연스레 그들은 남북 사이의 조성된 해빙 무드라든지, 남북간의 소통과 만남의 분위기 앞에, 별의 별 꼬투리를 잡고 훼방을 놓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같은 날, 안타깝게도 분단고착화 세력에 희생되신 백범 선생님의 유언과도 같은 말씀을 마음 깊이 담고 지내야겠습니다.
“분단된 동포를 하나로 만드는 것은 이 시대 새로운 독립운동입니다. 통일 운동은 곧 제2의 독립운동입니다”(백범 선생)
한반도의 평화통일은 다른 그 누구의 과제가 아니라, 남북 당사자들 사이에서 해결해야할 문제입니다. 남북을 둘러싼 주변국가들 겉으로는 반기는 듯 하지만 속으로는 지속적인 분단을 원합니다. 한반도의 분단이 곧 그들의 국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정의 내밀한 가정사에 대해 옆집 이웃들이 끼어들어 이래라 저래라 한다면, 얼마나 기분 나쁜 일이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처한 형국이 똑같은 현실입니다. 너무나도 당연히 남북 문제의 주도권을 우리 손으로 가져와야 마땅합니다.
70여년 이상 분단고착화로 인한 남과 북의 증오와 대립, 불신으로 우리는 북한에 대하여 아는 것 같지만, 사실은 왜곡, 날조된 정보로 아는 것이 없습니다. 이른 바 우리는 북맹(北盲) 상태입니다. 북한에 대하여 증오와 불신으로 눈이 멀어 아무것도 아는 것도 보이는 것도 없습니다. 북녘 동포들을 좀 더 알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겠습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분단의 벽을 넘어서는 일은 낭만적이거나 감상적인 것이 아니라, 온몸이 으깨어질 고통과 두려움을 이겨내고 담대한 용기로 실천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평화의 주님께서 우리 한민족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이제는 그만 분단의 세월을 끝내고, 조속한 평화 통일을 선물로 주시라고 열심히 기도해야겠습니다.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다
-반영억신부-
오늘 남북통일기원 미사를 봉헌하면서 무엇보다도 아버지 하느님의 큰마음과 예수님의 사랑으로 서로를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키워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서로의 허물을 인정하고 용서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해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이웃, 가까운 사람과도 용서하고 화해하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남북의 화해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용서와 화해는 지금 삶의 자리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가까운 이웃과의 관계를 새롭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한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과 백 사람이 하나 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쉬울까요? 예,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이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이 쉽다고만 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너는 다 좋은데 이것만은 안돼!’하는 마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마음 한번 틀어지면 둘이 하나가 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정성이 요구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머리수가 아니라 마음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마태18,19) 마음을 모아 청하면 이루어 주실 것이다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이 모여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머리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기도하는 그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보이는 사람과 서로 하나가 되기가 힘든 데 우리가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 예수님과 한 마음 되기는 얼마나 더 힘들겠습니까? 사실 하느님과 하나 되면 이웃과 일치하는 것은 문제될게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입으로는 하나가 되고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마음으로는 일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는 안 그렇다고 하는 분도 계시겠지만 실제 몸으로 마음으로 손발로 고백하는 분들은 적습니다.
우리가 입으로는 용서했다고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용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용서했다고 하면서도 막상 얼굴을 마주 하거나 목소리를 들으면 옛 생각에 울컥 치밀어 오르기도 합니다. 피하고 싶습니다. 마음이 불편합니다. 그것은 아직 용서하지 못한 것입니다. 마음으로 품어 끌어안지 못한 것입니다. 아직 내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으로 크지 못한 것입니다.
신비한 것은 상처를 받은 사람은 많은데 상처를 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받아들이는 사람의 그릇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말하는 사람이나 행동하는 사람도 품위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나를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인간적으로는 용서하지 못하지만 주님의 이름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하면 안 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보면 상대를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저에게 상처를 준 저 사람을 용서해 주십시오. 인간적으로는 힘이 들지만 당신이 이미 용서 하셨기에 용서합니다. 당신이 그를 사랑하시기에 저도 사랑하고 용서합니다. 그러나 제가 알게 모르게 상처를 준 것이 있다면 먼저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런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1절에서 11절을 보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율법학자, 바리사이들이 이 여자를 끌고 와서는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들의 마음 안에는 ‘나는 의롭다’, ‘나는 잘 살고 있다.’ ‘나는 거룩하다.’ 뽐내고 으스대는 마음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와서 그러는 것입니다. “스승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소리를 듣고 금방 대답하지 않으시고 몸을 굽히시어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습니다. 무엇을 쓰셨을까요?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 추측 하건 데 아마도 ‘너 자신을 알라!’하셨을 것입니다. ‘너도 하느님 앞에 죄인 아니냐? 잘 생각해 봐라. 너 잘 난척하지만 너도 별 수 없다.’ 예수님께서 뜸을 들이시자 사람들이 재촉합니다. ‘스승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말씀 좀 하십시오.’ 사람들이 줄곧 물어대자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랬을 때 나이 많은 사람들부터 시작하여 다 떠나갔습니다. 마침내 예수님 앞에는 죄 많은 여자만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그러자 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자유를 주셨습니다. 과거를 묻지 않고 자비와 용서를 허락하셨습니다.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
성경은 나이 많은 자들부터 떠나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삶의 경륜이 많은 사람부터 떠나갔습니다. 말하자면 의롭다고 자처한 사람들,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세상에는 밝게 눈떠 있었지만 하늘에는 눈이 멀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한 말씀에 눈이 뜨였습니다.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쳐라.”하시는 한 말씀에 눈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자기 죄를 인정하고 자기 죄에다 죄를 더 보태지 않고 떠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눈뜨지 못했다면 돌을 집어 던졌을 것입니다. 죄에 죄를 더했을 겁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의 허물과 잘못을 봅니다. 그것을 보고 이러쿵 저러쿵 얘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굉장히 잘난 줄로 알아요. 의로운 줄로, 거룩한 줄로 알아요.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순간 순간마다 죄에 죄를 더해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가 죄짓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눈먼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눈을 떠야 합니다.
마태복음 7장 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자기가 잘못한 것은 보이지 않고 남이 잘못한 것은 아주 크게 보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눈뜬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눈뜬 사람은 허물을 보면 그 사람을 어떻게 도와줄까를 먼저 생각합니다. 하느님께 눈 뜬 사람은 그 허물을 통해서 자기자신을 비추어 봅니다. 내가 저 사람과 똑같은 잘못은 범하지 않았지만 또 다른 잘못과 허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세리처럼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이 죄 많은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기도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베드로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18,21)하고 물었습니다. 일곱 번, 많죠. 한 번도 힘든데….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용서는 해도 해도 끝이 없다. 용서는 선행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네가 일생을 살아오면서 잘 산다고 했지만 하느님으로부터 이웃으로부터 얼마나 많이 용서 받고 살았느냐? 너 그거 아느냐? 너 그거 안다면 다른 사람을 용서 못할 것이 없지 않느냐? 그런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타인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나는 너를 결코 ‘용서 못한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용서 할 수 없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네가 나에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내가 너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주었는데 이렇게 앙갚음을 하느냐?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아직 하느님께 눈뜨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느님을 믿는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입으로 고백할지언정 몸으로 마음으로 손발로 고백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하느님께 눈뜰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 눈뜨면 내 힘으로 안 되지만 주님의 이름으로 용서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힘으로, 능력으로 먼저 용서를 청할 수 있고 베풀 수 있습니다.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억울해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모든 진실을 알고 뱃속까지 환희 들여 다 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못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단순히 입으로 주님을 고백하지 말고 마음으로 온 몸으로 손발로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의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길 기도합니다.
으뜸제자 베드로를 보면 예수님께서 수난 예고를 하실 때 모든 사람이 다 주님을 떠날 지라도 저는 결코 주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장담하였습니다. 그런 베드로가 막상 위험에 직면하자 3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그야 말로 본이 아니게 얼떨결에 주님을 배반하였습니다. 이것은 곧 우리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우리가 나는 의롭다, 떳떳하다. 거룩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하느님 앞에서 별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자비와 용서를 입지 못하였다면 어떻게 주님의 으뜸제자로 활동을 할 수 있었겠어요? 바오로가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어떻게 이방인의 사도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모세가 과거의 살인죄에 매여 있었다면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이끄는 도구로 활동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다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로 하느님의 일을 하였습니다.
우리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 자비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도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사랑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님으로부터 얻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의 대상은 우리 가족 안에 있을 수 있고 이웃 안에 공동체 안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 용서를 행하는 사람이야 말로 믿음의 사람이요,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가 남북통일 기원미사를 봉헌 하면서 남북의 화해와 친교에 앞서 먼저 가까운 사람들에게 용서를 청하고 또 베푸는 것부터 시작하였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죄 없는 자가 돌을 던져라’ 하신 말씀에 나를 비추어보고 ‘내가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라고 하신 말씀을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이웃에게,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게 ‘죄를 묻지 않겠다.’고 마음을 다짐하시길 희망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당당하게 말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결코 화해를 재촉하지는 않기를 바랍니다. 섣부른 화해는 더 큰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욱현신부-
오늘 독서 복음은 한국 가톨릭교회가 남북통일을 위하여 그리스도인으로써 통일을 준비하는 자세가 담겨 있다. 회개와 용서를 통한 사랑의 생활과 믿음의 기도로써 민족화합과 통일을 기원하자. 일제의 손에서 우리에게 광복을 주신 하느님께서 자비로이 평화통일을 이루어 주실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회개하고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믿으며 사랑의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제2독서: 에페 4,29-5,2: 서로 용서하십시오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용서하셨듯이 서로 용서하라고 하며 분노와 욕설과 악의를 내어버리라고 한다. 북한의 위협적인 태도가 용서와 신뢰를 회복하기에는 큰 걸림돌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북한의 어떤 주민이 “남한과 미제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기보다는 이대로 폭삭 망하는 것이 낫겠다.”고 한 기사는 그들 또한 우리를 두려워하고 못미더워하며 용서 못할 자들로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남북은 서로를 두려워하고 있다. 우리의 자유, 복지와 평화 그리고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안보 의식을 굳게 가져야 한다. 그러나 상호 용서를 통해 민족이 화해할 때 그 이상의 안보와 평화는 없다. 또한 그리스도인이 먼저 마음으로 용서해야 되는 것은 하느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복음: 마태 18,19-22: 기도와 용서
복음에서는 기도와 용서를 가르치신다. 기도는 통일과정에 필요한 교회의 역할 가운데 가장 우선적인 선택이다. 기도하면서 남북의 화해를 이루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에 앞서 우리는 우리들 사이의 화해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화해하지 못한 형제가 있으면, 이 미사의 은혜로 서로 화해할 수 있는 은총을 구하도록 하자. 어떤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누군가를 오랫동안 용서하지 못하고 또 화해하지 못한 채 끝내 이 세상을 떠나보낸 적이 있다. 그 때는 그를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기도하던 중이었다. 처음에 나는 그와 화해해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다. 그냥 모른 척 부딪히지 않고 관심 두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와 화해하고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마음에 부담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하느님과 가까워지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사랑하는 아드님을 통해서 나를 용서하셨고, 그런 나를 받아들여 주신 하느님 앞에 나는 그를 더 이상 미워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막상 얼굴을 맞대고 손을 먼저 내밀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내 마음이 열리기를, 용기가 생기기를 기도하였다. 하루 이틀 미루던 중 갑자기 떠나버린 그를 앞에 두고 뒤늦게 후회의 눈물을 흘렸다. 어리석게도 ‘내가 화내는 이유는 너무나 정당한데 왜 내가 먼저 화해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자꾸 던졌던 내게 하느님은 아무 말 없이 당신의 아들을 통해서 나를 용서해 주시지 않았는가?” 라고 하였다. 기회는 그렇게 많은 것이 아니다. 은총의 때를 잘 알고 그 순간에 우리는 용기를 내어서 다가가야 할 것이다.
별 뚜렷한 근거 없이 낙관하는 통일관은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장벽에 좌절한다는 것은 우리의 희망을 빼앗아 간다. 우리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통일을 이루어 주시도록 겸손과 인내로 기도하며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랑의 생활을 할 때 통일은 성큼 우리에게 다가와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사회가 서로 용서하고 화합할 수 있도록 우리 신앙인들이 살아가야 한다. 우리가 먼저 화해하지 못하고 일치되지 못하는데 어떻게 남북이 통일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먼저 우리 사이의 관계 개선을 위해, 그래서 일치되도록 노력하자. 이것이 남북통일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항상 하느님의 일,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말씀을 선택하여 실천하는 삶으로 우리나라의 통일을 준비하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결심하며, 오늘을 살아가도록 하자.

-오상선신부-
분단된 우리 민족의 아픔이 서려있는 오늘, 우리는 용서와 자비에 대해 이야기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를 가엾이 여기시어..."(신명 30,3)
제1독서인 신명기에서 모세는 마음속으로 뉘우치고 하느님께 돌아오는 이들을 기꺼이 다시 품어 주시는 하느님의 연민과 자비를 이야기합니다. 용서를 베푸는 이의 원형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에페 4,32)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먼저 용서받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용서는 한 번으로 끝나는 단발성 이벤트가 아니라 또다른 용서로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비유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용서를 관상하다 보니 용서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 같이 보입니다. 존재 밑바닥까지 내동댕이쳐진 비참한 순간에 받은 용서는 그 사람 안에서 사라져 버리지 않고, 마치 여인이 태아를 잉태하듯 존재 안에 깊숙히 남게 됩니다. 그렇게 잉태되어 품어진 용서는, 적절한 때에 용서가 필요한 이에게 마치 생명을 출산하듯 베풀어집니다. 하느님에게서 시작된 용서가 저마다 부족한 우리 사이를 뚫고 들어와서 돌고 돌아 서로를 이어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용서가 흘러간 자리를 사랑이 단단하게 이어주고 결속시킵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 주는 끈이니 무엇보다 사랑을 입어라."(영성체송)고 권고하는 것이겠지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복음에서 예수님은 용서를 의무로, 당위성으로 이야기하십니다. 베드로가 제 딴에는 최대한의 수로 일곱 번을 불렀지만, 예수님은 일흔일곱 번, 즉 완전한 숫자 일곱을 두 차례 반복한, 무한을 가리키는 수를 제시하십니다.
통상적으로 명사는 수를 셀 수 있는 명사와 양으로 가늠하는 명사가 있지요. 예수님께는 "용서"란 단어가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숫자로 제한해서는 안 되는 단어인 것 같습니다. 실상, 진정한 용서에 '이번은 되고 다음은 안 된다'거나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된다'는 식의 적용이 불가능한 이유는, 용서가 하느님에게서 왔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용서를 받아 그 용서를 잉태하고 출산한 이, 인간적으로 감정적으로 몹시 힘들면서도 용서를 발휘하는 이가 베푸는 용서는 자기의 용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용서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문맥상, 용서 이야기 이전에 "두 사람이 마음을 모아 청하면 이루어 주실 것"(마태 18,19)이라는 내용이 먼저 나오지요. 흔히 함께 기도 드리면 들어주신다는, "기도"에 대한 주제로 접근하는 구절입니다만, 오늘은 조금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왜냐하면 그 앞 대목인 마태 18,15-18에서 먼저 죄지은 형제를 타일러 도우라는 권고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앞뒤로 형제의 죄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다루는 대목이 이어지는 마당에 왜 갑자기 '두셋이 함께 마음을 모아 드리는 청'에 대한 말씀이 끼어든 걸까요?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마태 18,20)은 우리 가족, 공동체, 단체 등의 기초 단위를 가리킵니다. 다들 경험해 봐서 알겠지만, 사람이 둘 이상 모이면 꼭 용서할 일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용서 이전에 맘 상할 일, 불목할 일, 갈라질 일이 선행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그토록 다양한 사람들이 "마음을 모아 무엇을 청"한다는 것은 얼핏 자연스럽고 흔한 일 같지만 실상은 그야말로 대단히 복음적이고 신앙적인 일이 아닐 수 없겠지요. 분명 그 중 누군가 드러나지 않게 자기를 죽이고 양보하고 용서하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20)
그러니 우리는 가정과 공동체, 사회 안에서 일어나는 분열과 갈등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말씀은 곧 당신께서 이 소용돌이 속에서 친히 화해와 일치를 위한 "용서"가 되시겠다는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관계가 복잡해지고 분화될수록 용서를 요구하는 언짢고 불쾌하고 슬프고 화를 돋우는 일들도 늘어나기 마련입니다. 사람 사는 곳에서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지요. 그렇다고 무조건 관계를 피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니 우리는 오늘의 말씀을 통해 용서의 지혜를 배우면 좋겠습니다.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에페 5,1)
하느님께는 용서의 숫자나 횟수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더 이상은 못 참겠다"는 말씀을 하실 줄 모르십니다. 이미 하나의 용서 안에 다 포함되는 일과 사람에 대해서 일일이 다시 검증하고 끄집어내서 제외하실만큼 하느님은 한가하지 않으십니다. 용서에 대한 하느님의 뜻이 그렇다면 사랑받는 자녀인 우리도 저마다 가능한 만큼만이라도 닮으면 좋겠지요.
그렇다고 용서가 마냥 쉬운 것처럼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어렵습니다. 정말 어렵습니다. 이미 우리는 굴곡지고 피묻은 역사를 통해서 절절히 체험하고 살아가는 중이니까요. 바로 지금도 지독히 고통을 당하고 분노와 슬픔에 치를 떨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 걸 외면해서는 안 되고, 또 그들에게 무조건 용서하라고 들이대서도 안됩니다. 그저 곁에서 가슴 저리는 사랑으로 함께 걸으며, 다만 용서는 받는 사람이 수혜자가 아니라 베푸는 사람이 수혜자라는 진실을 조용히 나누고 싶습니다.
"나는 재앙이 아니라 평화를 주노라."(입당송)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용서를 베푼 이가 받는 선물은 "평화"입니다. 평화는 우리 모두의 바람이지요. 그러니 함께 청합시다. 우리가 마음을 모아 함께 부르짖으면 주님께서 반드시 들어주신다고 약속하셨으니까요. 아픔에 우는 이, 슬픔에 무너진 이, 소외로 웅크린 이,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 실패로 좌절한 이, 죽고 죽이던 역사 안에서 피눈물을 삼킨 우리 모두, 벗님 모두에게 평화를 빕니다. 평화를 빕니다. 평화를 빕니다!

하느님 마음 돌리가 위해 기도할 필요 없다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232032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6월 25일 주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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