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생각

중국의 허풍과 인생/경포호수

Margaret K 2018. 6. 12. 04:27



중국의 허풍과 인생 ‘쉬샤오둥’라는 39세 중국인 남성은 격투기 광인이다. 그는 지난해에 ‘태극권’의 최고고수에게 도전장을 냈는데 상대는 1분도 안되어 무참하게 얻어맞고 무릎을 꿇었다. 다시 그는 올 3월에 쿵푸로 잘 알려진 ‘영춘권’에 도전장을 냈지만 이 시합 역시 싱겁게 끝났다. 영춘권 고수는 계속 도망만 다니며 얻어맞기만 했다. 지금 중국에서는 전통무술들이 위기를 맞고 있다. 백학권, 장풍, 경공, 화염장, 금강권 등은 굉장히 요란한 중국 무술들이지만 실제 대결해 보면 다 허풍이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40년 전에도 쿵후와 킥복싱이 대결했는데 2분도 못 가서 패하면서 실상이 드러났었다. 그래서 중국 전통 무술의 그런 가식과 허상을 깨부순 ‘쉬샤오둥’이 새삼 화제가 되다. 그는 내실보다는 겉치레에 힘을 쏟는 중국 전통문화에 당당하게 도전했기 때문이다. 중국 무술이 언제부터 이렇게 종이호랑이가 되었던가. 중국에서 가장 보편적 무술이라 할 수 있는 ‘태극권’은 문화혁명 이후론 단지 호신술용이나 일명 건강 체조로 개조되었다. 또한 ‘우슈’는 중국을 대표하는 무술이지만 이것도 승부와 상관없는 혼자 하는 표현 무술이기에 결투엔 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소림무술’은 독특한 기교가 많아서 인기는 높지만 처음부터 공격을 하지 않고 방어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중국 무술은 이렇듯 진정한 내공보다는 실리적인 외공에 치우친 셈이다. 마치 무술과 체조를 결합된 것 같은 모양새에 지나지 않았다. 건강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공격성이 강한 무술 앞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실전에 약하다보니 소림사 무술처럼 외적인 기교는 상대적으로 더욱 더 화려하게 진화 될 수밖에 없었으리라. 중국의 허풍은 무술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중국인들에게 널리 사랑받고 있는 고전소설들은 허풍과 차원이 다른 인간의 권모술수의 총집합체와 같다. ‘수호전’은 도둑과 강도들을 충절로 각색했고, ‘삼국지연의’은 전쟁의 처참함을 영웅들의 패권 무용담으로 채색해 놓았을 뿐이다. ‘삼국지’는 직장인들의 필독서로 알려져 있지만 이것도 사기와 모략, 음모로 가득 찼음에도 남자들의 로망처럼 포장해 놓았다. 오죽하면 젊어서는 ‘수호전’을 읽지 말고 나이 들어서는 ‘삼국지연의’를 읽지 말라는 유명한 말까지 있겠는가. 물론 보는 시점에 따라 인생의 많은 지혜가 분명 담겨있지만 그러한 과정 속에 수단방법 가리지 않는 술수에 대한 역기능적인 지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다. 굳이 예를 든다면 만약 ‘삼국지’에서 교훈을 얻었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만 내가 당하지 않기 위해 연막을 치고 기만하므로 자신의 이익을 취한다는 것이다. 자신도 모른 채 이러한 사고의 합리화는 어느 덧 공산주의자처럼 목적을 위해선 남을 속이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지 못하게 한다는 점이다. 잠시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상대를 속여서 승리했지만, 일상에 돌아와서는 그 어떤 덕목보다 상호 간 신뢰와 정직이 중요함에도 결여되어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어느 저자는 중국인들은 많은 고전소설로 인하여 타인을 속이는 것에 대하여 일련의 죄책감도 없이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행했던 일들이 지금 상상키 어려운 일들이 연일 일어나게 하는 원인이 된다고 했다. 최근 들어 한국은 과도한 포장에 대해 여러 번 보도된 적이 있었다. 스낵 내용물이 풍부한 것처럼 보이려 절반가량이 질소가 차지하고 있다. 과일과 화장품에서도 평균 2.5배에서 6배까지 과도한 포장으로 실제 제품은 상대적으로 더 작게만 느껴진다. 생각해 보니 중국무술은 한국의 과장포장과 일맥상통한 점이 있다. 유교를 바탕으로 한 두 나라인지 왜 그렇게 내실보다도 겉포장에만 신경을 더 쓸까. 이러한 위선적 행태들은 국가적 내성이나 기업의 이기적 윤리를 만들어 왔지만, 가장 무서운 것은 국민 개개인의 허풍적인 바람 든 인생을 무엇으로 수정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생각하는 무술이란 외공만큼 내공이 쌓여져야 방어와 공격의 진정한 힘을 갖지 않겠는가. 인생도 마찬가지다. 에리히 프롬의 [소유와 존재]에서 ‘소유’는 외적인 조건인 외공에 속한다면 ‘존재’는 내적인 내공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소유’의 근본이 되고 있는 ‘돈’이라는 외적인 힘을 누가 부인하겠는가. 하지만 돈이 아무리 중요해도 소유의 한계를 빨리 깨달고 돈보다 소중한 것이 많음을 믿어야만 소유적 인간에서 벗어날 수 있다. 돈이라는 외공과 존재라는 내공이 만나야만 곧 소유적 인간에서 존재적 인간으로 바뀌어야만 사람답고 참된 인생이 뭔지를 알고 남은 인생은 좀 더 행복한 생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꽃을 꺾어 내 것으로 소유하여 누리는 것과 꽃은 그 자리에 두고 본연의 아름다움과 내면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면 과연 어느 것이 긴 인생에 도움이 되겠는가. 에리히 프롬 말대로 또 다른 가정은 내 모든 소유를 잃은 후 나는 어떤 존재가 될까에 대한 고민은 소유적 실존양식에서 존재적 실존양식으로 탈바꿈해야 하는 이유가 되고 있다. 결국 인생의 내공에 속하는 존재적 인간이란 내가 소유한 것이 사라진 후에도 남게 되는 ‘나’라는 실존이다. 생의 목적은 의식주가 아니다. 더 본질적인 인생의 기쁨은 소유에서 벗어나 내가 주체가 되는 존재를 찾아야만 가능하다. 사느냐 죽느냐를 떠나 사느냐 존재하느냐로 바뀌어 외공만큼 내공에 공들여 살아야만 내가 떠난 뒤에서 진정한 ‘나’라는 실존이 남게 된다. GM이 떠난 군산의 근로자들은 ‘우리가 좀 더 위기감을 느꼈어야 한다는 후회가 남는다.’고 했다. 스스로 그들은 막연한 미련이라는 포장이 화를 키웠다. 우린 아직도 어리석게 그런 외적 조건만으로 세상을 보는지 모른다. 세상은 포장에 능하다. 나이가 들수록 소유라는 포장지를 뜯고 ‘나’라는 존재를 찬찬히 살펴야 한다. 인생에서 허풍보다 내실을 기하려면 소유에서 존재로 소유에서 이웃과 접속이 필요하다. 자신에게 정직을 그리고 이웃에게 신뢰가 진정한 내공이다. ‘좋은 내가 되어야 좋은 네가 오더라..’라는 말처럼 자신에게 정직하면 이웃에게 신뢰가 쌓여 당연히 ‘좋은 네’가 많아야 나이가 들고 마지막 순간에도 두렵지가 않다. 2018년 6월 4일 강릉에서 피러한(한억만)드립니다. 사진허락작가:하누리님, 우기자님, 이요셉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