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회 자료실

‘기도’를 동력 삼아 하느님께 나아가다/가톨릭 평화신문

Margaret K 2018. 1. 13. 03:50
‘기도’를 동력 삼아 하느님께 나아가다
-최문기신부-


▲ 프란치스코는 ‘기도 자체인 사람’이라고 불릴 정도로 그의 삶과 기도는 긴밀하게 결부돼 있다. 그림은 다미아노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는 프란치스코, 아시시 프란치스코 대성당 벽화.




오늘날까지 프란치스코가 직접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글들이 몇몇 전해진다. 그 중 하나가 안토니오 성인에게 보낸 편지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의 주교 안토니오 형제에게 프란치스코 형제가 인사합니다. 신학 연구로 인하여 회칙에 담겨 있는 대로 기도와 신심의 정신을 끄지 않는 한, 그대가 형제들에게 신학을 가르치는 일은 나의 마음에 듭니다.”



성인의 삶을 지탱한 두 기둥

프란치스코는 사제이자 신학자이며 탁월한 설교가였던 안토니오를 ‘나의 주교님’이라고 부를 만큼 높이 평가하며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편지는 안토니오가 프란치스코에게 형제회에서 신학을 가르칠 수 있는 허락을 청한 것에 대한 답변으로 생각된다. 이 짤막한 편지로 프란치스코가 가지고 있었던 두 가지 생각을 엿볼 수 있는데, 하나는 그가 세간의 편견과는 달리 학문을 절대로 도외시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와 신심의 정신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사실이다.

기도와 신심의 정신은 프란치스코의 삶을 지탱하는 기둥이었고 만사에 우선해서 선택하여야 하는 최고의 가치였으며 어떤 경우에도 지켜져야 하는 삶의 보루였다. 그는 삶의 번잡함이 기도와 신심의 정신을 흩트리는 것을 경계했으며, 오히려 모든 일상과 노동은 궁극적으로 이 정신을 고양하는 데에 그 목적을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형제들을 위해 작성한 회칙에서도 일과 생활의 목적이 바로 여기 있음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주님으로부터 일하는 은총을 받은 형제들은 충실하게 또 헌신적으로 일할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영혼의 원수인 한가함을 피하는 동시에 거룩한 기도와 신심의 정신을 끄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현세의 다른 모든 것들은 이 정신에 이바지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는 분명 세상의 다른 모든 일보다 기도가 더욱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은 기도를 통해서 덕이 늘어나고 마음이 정결해지며 한 분이신 하느님과 일치하게 되기 때문이다. 반면 세상의 일은 그것이 비록 선한 일이라 할지라도 단순히 하늘로부터 받은 은총을 활용하고 나누어 주는 것에 불과하며, 세상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이 아닌 인간사에 대하여 생각하고 보고 듣고 말하면서 생활해야 하므로 필연적으로 영혼에 먼지가 들어가게 되고 수도 생활에 산만함과 해이함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과 형제들의 삶이 본질적으로 지상 삶의 여정에서 분리될 수 없음을 알고 있었기에, 더욱 깨어 있는 마음으로 기도와 신심의 정신을 지키며 늘 삶 속에 그분의 거처를 마련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우리는 항상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전능하신 주 하느님이 머무르실 수 있는 자리와 거처를 우리 안에 마련합시다. 그분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늘 깨어 기도하여라.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하기에 우리는 그분을 깨끗한 마음으로 흠숭합시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하느님은 영적인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사람들은 그분을 영적으로 참되게 예배드려야 마땅합니다.”

프란치스코는 기도 안에서 인간을 구원하신 하느님의 초월성과 선하심, 그리고 무한한 사랑을 깊이 체험하였고, 동시에 제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나약함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러한 하느님과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은 기도 안에서 함께 얻어지며 동전의 양면처럼 분리되지 않는 체험으로 다가왔다.

프란치스코는 기도가 전적으로 하느님의 주도권 아래 이루어지는 역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하느님께 열어드림도 오로지 위에서 받는 은총이며,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대화를 시작하시는 분도 오로지 주님의 성령이시며, 인간은 오로지 그분께 마땅한 찬미와 감사를 드릴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찬미와 감사’는 프란치스코의 기도를 특징짓는 중요한 요소로서, 무한하시고 완전하시며 선 자체이신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는 것은 그에게는 가장 중요하며 필수적인 일이었다. 만약 인간이 당신 아들을 내어주심으로써 모든 것을 충만케 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잊어버리고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며 하느님의 선물을 자기 것인 양 차지한다면, 그런 자는 하느님의 보화를 훔치는 도둑과 같다고 프란치스코는 말한다. 



하느님 앞에선 모두가 벌거숭이

그런데 이 찬미와 감사는 동시에 자신을 향한 날카로운 성찰의 빛으로 되돌아온다. 찬미의 대상이 되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시선과 영광의 빛은 나 자신의 비천한 모습까지도 속속들이 드러나게 하기 때문이다. 누구도 그 빛 앞에서 숨거나 피할 수 없기에, 하느님 앞에 서는 일은 천상의 안식인 동시에 피할 수 없는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의 발견이기도 하다. 바오로 사도는 히브리서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히브 4,13) 

프란치스코는 지극히 높으시고 영광스러우신 하느님 앞에서 문득 지극히 작고 보잘것없는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이 작고 보잘것없음의 어둠은 하느님의 지극히 높으심 그리고 영광스러운 빛과 대비되며 더욱 어두워진다. 이러한 자기 자신에 대한 명확한 인식 안에서 그는 ‘하느님 앞에서 인간은 아무것도 아님’을 알 수 있었고, 자신이 하느님께 청해야 할 바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견딜 수 없는 자기 자신의 어둠은 그를 가슴 아프게 했지만, 기도 안에서 항상 그 이상의 위로와 안식이 함께했기에 그것이 그의 삶에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다. 

프란치스코에게 기도는 떼어놓을 수 없는 절대적인 삶의 요소였으며, 방황하던 회개 초기부터 삶의 마지막 날에 이르기까지 영혼의 가장 확실한 동력과 방향타였다. 그는 자신을 위한 기도의 자리와 거처를 마련하기에 앞서서 하느님께서 머무르실 수 있는 자리와 거처를 자신 안에 마련하였기에 번잡한 세상 속에서도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한결같이 하느님을 찬미하는 삶을 살 수 있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그가 “기도 그 자체”인 사람으로 불렸던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