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기꺼이 십자가를 지셨다.
나도 어려움이나 괴로움을 대기하고 있다가 기꺼이 십자가를 지면,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똑같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靈)을 받는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靈)과 함께 있을 때,
소위 “내가 지금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고 말 하는 것이다.
억지로 지는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말에 의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성 프란치스코를 믿지 못 하면,
이런 말들이 쓰레기나 다를 바 없다.
· “명상이 있는 기도” 수사님 말씀입니다(2011.5.15.일)
하느님을 뵙는 다는 것은 영적으로 뵙는 다는 뜻이다.
성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은 영적인 분이며”(요한 4,24), 영적으로써가 아니면 그분을 뵈올 수 없습니다.”
(참조. 권고 1 5,6)라고 한다.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생각이나 2000년 전 예수님을 상상해서가 아니고
주님의 영(靈)과 함께 있을 때 지금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주님의 영과 그 영의 거룩한 활동을 마음에 간직하는 것을
얻도록 힘쓰십시오.”(인준 받은 회칙 10,8)
그리고 “주님의 영은 육이 혹독한 단련과 모욕을 당하기를 원하며, 천한 것으로 여겨지고 멸시받기를 원합니다.”
(인준 받지 않은 회칙 17,14)
그러나 여러분은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즉, caro가 원하는 기도를 한다.
· 주님의 영(靈)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아침에 일어나서
“오늘 아무 일 없는 행복한 하루가 되게 하여 주소서!”가 아니고
“오늘 누가 나를 멸시, 모욕하고 괴롭히는 사람이 있어야 할 텐데!” 하고
흥미진진하게 기다리므로 이것을 긍정으로 받아들인다.
아픔이 희망으로 기다리니 인생이 통째로 바뀌어 늘 편안하다.
오늘 누가, 무슨 일을 통해서 괴로움을 받는 것이 그리스도의 영(靈)이다.
이 영과 함께 할 때 주님, 예수그리스도의 영과 함께 사는 것이다.
묵주신공, 성지순례 등을 한다고 해서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것이 대단하고 어려운 것도 아니고 태도만 바꾸면 된다.
영과 육을 구분한 다는 것은 “올 테면 와라!” 기다리므로 이미 분리된 상태이다.
내가 하는 어떤 말이 맘에 들고 안 드는 것은 내 머리에서 거름이 있어 울린다.
마찬가지로 기쁨과 슬픔을 알고 있는 것은 영혼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 육(肉)은 들쑥날쑥 한다. 기쁨, 슬픔, 불안, 불만, 만족으로 흔들리게 되어있다.
원래 그렇게 되어 있으므로 흔들림을 잠재우려 하고, 여기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마라.
변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 영혼에서 육(肉)의 흔들림을 바라볼 때 평온해진다.
“참나”는 원래 “나”다. 영혼, 나가 고요에 머무르는 것이 관상이다.
가슴으로 느낀다는 것은 영혼이 조용하고 따뜻해서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는 것도 흔들림에서 괴로워하는 것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영혼이 고요하고 따뜻하게 바라보니 모든 상처가 치유될 수 있다.
실력 있는 사람은 영혼, 나에서 흔들림을 바라보니 흔들림에서 빠져 나올 수 있다.
여러분 안에 이미 주님의 영(靈)이 있어 영(靈)과 육(肉)을 구분하며 파악하고 있다.
내가 이 주님의 영을 모시고 살면 성부와 함께 있어 늘 편안하다.
흔들리는 파도는 계속 있고 그 밑에 해저(海底)는 안 흔들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