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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 만한 곳은 어디인가?/법정스님

Margaret K 2011. 4. 30. 20:23

***우리가 살 만한 곳은 어디인가?***

...법정스님...

 

한곳에서 12년을 살다보니 무료해지려고 했다.

내 인생의 60대를 이 오두막에서 보낸 셈이다.

 

처음 이곳에 들어올 때는 사람 없는 곳에서

한두 철 지내려던 것이 어느새 훌쩍

열두 해가 지났다.

돌아보면, 한 생애도 이렇듯 꿈결처럼

시냇물처럼 덧없이 흘러가리라.

 

지난 한 해 동안은

 내 마음이 떠서 한 곳에 정착하지 못했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새로운 삶을 시도했다.

그러다가 올봄에 생각을 돌이켜

 다시 이 오두막에 마음을 붙이기로 했다.

 

그대로 주저앉을 수가 없어

내 성미대로 봄내 집 일을 했다.

삭아서 주저앉은 마루를 갈고,

 비가 새는 지붕 천정을 덧댔다.

온갖 파충류들의 은신처인 바깥마루를 뜯어내고

거기 구들을 놓았다.

바깥마루 천정에는

‘93년 입하절에 보수하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내가 이곳에 들어온 그 이듬해다.

 

주방도 너무 낡아 죄다 뜯어내고 새로 갈았다.

 집 안으로 물이 들어오도록

개울물을 이용해 수도를 놓았다.

불을 지필 때마다 틈새로 연기가 새던

낡은 무쇠난로를 들어내고 새것으로 들여놓았다.

창 바르고 도배할 일이 남았지만

지쳐서 일단 쉬기로 했다.

 

누가 보면 천년만년 살 것처럼 저러나 싶겠지만

일단 내가 몸담아 사는 주거공간은

내 삶의 터전이므로 내 식대로 고쳐야 한다.

오늘 살다가 내일 떠나는 일이 있더라도

오늘 내 마음이 내켜서 하는 일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이 내 가풍이기도 하다.

그리고 수행자가 살다가 간 빈 자리를

누가 와서 살더라도 덜 불편하도록 하는 것이

또한 내 도리이고 지론이다.

 

지난 해 봄 고랭지의 선연한 빛깔에 매혹되어

작약을 1백 그루나 화원에서 사다가 뜰가에 심었는데,

집을 비운 사이

한 포기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캐간 도둑이 있었다.

언젠가도 이야기한 바 있지만

폭설로 길이 막히기 전에

미리 올려다 놓은 취사용 가스를

 모조리 못쓰게 만든 그런 손도 있었다.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같은 사람의 처지에서

인간의 소행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 영조 때

실학자 이중환이 지은 <택리지擇里志>라는 책이 있는데

우리나라 전역에 걸쳐 지형, 풍토, 풍속, 교통,

각 지방의 고사, 인물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그는 사람이 살 만한 조건으로 네 가지를 꼽고 있는데,

자연과 인문사회적인 조건과 함께

그 고장의 인심을 들고 있다.

 그의 말을 들어 보자.

 

사람이 살만한 터를 잡는 데는

첫째, 땅과 산과 강 등 지리가 좋아야 하고,

둘째는 땅에서 생산되는 것이 좋아야 하며,

 셋째는 인심이 좋아야 하고,

넷째는 아름다운 산과 물이 있어야 한다.

이 네 가지 중 어느 하나라도 모자라면

살기 좋은 곳이 아니다.”

 

꿈같은 이야기다.

21세기, 바야흐로 정보화의 물결이 넘치고 있는 이 땅에서는

어느 고장을 가릴 것 없이

황량하고 흉포해진 인심의 평준화를 이루고 있다.

사바세계의 인간 말종의 실상을

그대로 연출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세상은 우리가 의지해 살아가야 할 곳이다.

못된 인심보다는 그래도 착한 인심이 훨씬 많다.

우리 둘레에는 예나 다름없이 철 따라 꽃이 피고,

새들이 찾아오고,

마른 나뭇가지에서 새잎이 펼쳐지고 있다.

그리고 내 오두막에서도

여전히 물이 흐르고 꽃이 피고,

우리 봉순이(박항률 화백이 법정 스님에게 그려 준

단정한 얼굴에 단발머리,

 노란색 웃옷에 보랏빛 스카프를 두른 소녀 상.

봉순이란 이름은

법정 스님이 붙여 준

그림 속 소녀의 이름이다 - 편집자 주)

나를 기다리고 있다.

 

[아름다운 마무리]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