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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 18일 사순 제3주간 토요일

Margaret K 2023. 3. 18. 05:49

2023년 3월 18일 사순 제3주간 토요일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루카 18,9-14)

Everyone who exalts himself will be humbled,

and the one who humbles himself will be exalte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호세아 예언자는,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이고,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 비유를 말씀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느 부모님께서 친한 친구로부터 자녀에 대한 조기 교육이 중요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아들이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인 7살 때 스케이팅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것입니다. 1년이 지나 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겨우 스케이트 날로 서 있을 뿐입니다. 결국 다른 운동을 시켰습니다. 이번에는 축구입니다. 그런데 공만 보면 피하기만 할 뿐, 신나게 달리기만 하고 있습니다. 이런 어린이를 본다면 어떤 아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아마 대부분 운동신경이 부족한 아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성장해서 크로스컨트리 국가대표가 되었습니다. 단지 스케이트와 축구만 못할 뿐이었습니다. 사실 운동 종목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도 수많은 운동 중에서 두 종류의 운동을 잘하지 못한다고 운동신경이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판단은 늘 이런 식이었습니다. 몇 가지의 모습만 보고서 ‘그가 틀렸다, 맞았다’라고 정의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단 하나의 모습만 보고서 ‘그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단정 지어서도 안 됩니다.

사람들은 저를 보고서 외향적인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남들 앞에 서는 것을 좋아하고, 또 대화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면서 단정 짓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외향적인 성격만 있지 않습니다. 혼자 있는 것도 좋아하고, 침묵 속에서 묵상하는 것을 너무나 즐깁니다. 이 모습을 보면 제게는 내향적인 성격도 분명히 있습니다.

함부로 판단하고 단정 지어서는 안 됩니다. 몇 개의 모습으로 전체를 판단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사람들은 세리를 향해 ‘죄인’이라면서 손가락질했습니다. 동족에게서 세금을 징수해서 당시에 점령국이었던 로마에 전해주던 세금을 징수하는 사람이 세리입니다. 당시 로마는 이 세리를 도급제로 권한을 부여했기 때문에 일정액의 세금만 바치면 자기 멋대로 금액을 정해서 많은 세금을 거두어도 묵인했습니다. 그래서 더 뭇 백성의 원성을 샀었지요. 그러나 그들이 모두 구원에서 제외되었을까요?

그렇지 않음을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분명히 보여주십니다. 스스로 죄가 없다면서 이상한 감사 기도를 바치는 바리사이보다 자신을 낮추면서 죄인임을 고백하는 세리가 더 의롭다고 말씀하십니다.

함부로 판단하고 단정 짓는 사람이 바로 겸손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모범으로 보여주신 모습은 자신을 낮추어 모두를 받아들이는 사람이었습니다.

신념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는 사실을 명심하라. 신념은 실천하면서 얻어지는 것이지 말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주얼 D. 테일러).

감사와 아첨을 구분하는 법

-전삼용신부-

https://youtu.be/ngEIFLW8ZjQ

 

1971년 12월 25일에 서울특별시 중구 충무로동의 ‘대연각(大然閣) 호텔’에서 발생한 대한민국 최악의 화재 사고가 있었습니다. 세계 최대의 호텔 화재 사고들 중 하나이며 총 사망자가 200여명에 이릅니다. 사건 당일은 크리스마스였기 때문에 호텔에 수많은 인파가 몰려있었던 상태라 엄청난 사망자가 발생했고 사망 자 중에는 주한 대만 대사관 위셴룽(余先榮) 공사와 주한 튀르키예 대사관 무관 파질 유즈바시오글루 대령도 있었습니다.

 

이 화재는 카페에서 사용하던 프로판가스 통에서 누출된 가스가 폭발하면서 발생했습니다. 화재 발생 당시 호텔 내부에서는 안전 규정을 위반하여 화재 경보기나 스프링쿨러 등의 안전장치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화재 발생 직후 호텔 내부로 연기와 불길이 빠르게 번져, 숙박 고객들은 탈출이 어렵게 되었고 옥상 문이 자물쇠로 잠겨 있어 문 앞에서만 2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일의 문제는 불 자체라기보다는 부실 공사 등으로 속이려 하는 자들의 아첨과 아부에 속아 넘어간 호텔 책임자들에게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칭찬과 접대에 기분이 좋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감사가 아니었습니다. 아첨이었습니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면 자신과 이웃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게 됩니다.

 

참된 예배는 감사이지 아첨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느님께도 예배가 아닌 아첨을 드릴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와 세리가 성전에서 기도합니다. 바리사이의 기도는 아첨이었고 세리의 기도는 감사였습니다. 하지만 겉으로만 보기에는 바리사이가 훨씬 감사의 기도를 많이 드리는 듯 합니다. 세리처럼 죄를 짓지 않는 것에 감사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가슴을 치면서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기도도 주님 때문에 내가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임을 알아서 하는 사람이 있고 자기가 무언가 되는 존재처럼 여기며 자신을 들어 높이는 기도도 있습니다. 나를 죽여주었기 때문에 드리는 찬미가 진정한 감사요 예배입니다.

 

‘시간을 달리는 남자’란 TV 프로그램에 나와 정형돈 씨에게 젊은 시절 엄마를 만나면 꼭 해주고 싶은 한 마디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의외로 덤덤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이거 진짜 잘 들어야 돼요. 길어! 마흔에 고혈압으로 크게 한 번 쓰러지십니다. 그리고 3년마다 고혈압으로 쓰러지시거든요? 그 중간 중간에 쓸개, 자궁, 맹장을 떼 냅니다. 이거 잘 생각을 하셔야 해요. 50대부터는 당뇨, 고혈압으로 고생하시고 60대에는 심근 경색으로 굉장히 고생을 많이 하십니다. 60 중반부터는 인공 관절이라든지 관절쪽으로 수술을 많이 하시고. 70대에는 뇌졸중으로 쓰러지십니다. 이것을 다 견디실 수 있으시다면 ... 또 ... 저를 낳아주시기 바랍니다.”

이 말 안에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이것이 진짜 감사요 예배요 찬양입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은 자신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져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그분이 나의 십자가를 대신 져 주신 것에 대해 눈물을 흘리고 감사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분 아니면 구원은 물론이요, 지금 존재할 수도 없음을 아는 것이 감사입니다. 내 뱀 같은 자아를 당신 피로 죽여준 것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진정한 예배는 이렇게 나의 압제로부터 나를 이기시고 구해주신 분께 드리는 감사입니다. 그러려면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모세로 우리를 파라오로부터 당신 피 흘리심으로 구해주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당신께 도움이 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가 아니라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깨닫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로 주님을 예배합시다.

주님은 새벽처럼 오시리라

-이기우 신부​-

https://www.youtube.com/watch?v=Sx0JVgRwmp4

 

<“가슴을 치며 말하였습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상히 여겨주십시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를 들려주십니다.

 

이 비유에는 대조를 이루는 두 인물, 곧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여기는 죄인인 바리사이와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여기는 의인인 세리가 있습니다.

그들의 가장 큰 차이는 ‘보는 눈’에 있습니다.

첫째는, 그들은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서로 달랐습니다.

 

바리사이의 눈은 자신을 의롭다고 보는 눈이고, 세리의 눈은 자신을 죄인이라고 보는 눈입니다.

곧 바리사이에게는 자신을 높이는 눈이 있고, 세리에게는 자신을 낮추는 눈이 있습니다.

둘째는, 그들은 ‘타인을 보는 눈’이 서로 달랐습니다.

 

바리사이의 눈은 타인을 업신여기는 눈이고, 세리의 눈은 타인을 중히 여기는 눈입니다.

곧 바리사이에게는 꼿꼿이 서서 하늘을 향하는 눈이 있고, 세리에게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눈이 있습니다.

곧 타인의 가슴을 치는 이가 있고, 자신의 가슴을 치는 이가 있습니다.

셋째는, 그들은 눈이 ‘바라보는 곳’이 서로 달랐습니다.

 

바리사이의 눈은 자신을 향하여 있고, 세리의 눈은 하느님을 향하여 있습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는 스스로 의롭다 자신하고 “혼자말로 기도했습니다.”(루카 18,11)

이 말의 원어를 직역하면, “자신을 향해 기도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루카 18,11)라고 말하지만, 실은 긴 독백으로 하느님께 설교하려 들었습니다.

그러니 그는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자신을 위해 있어야 했습니다.

 

곧 하느님이 자신의 가치 확인과 자화자찬을 위해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우러르기보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자신을 앞세웁니다.

반면에 세리는 하느님을 향하여 있으며, 자신과 하느님의 거리를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루가 18,13), 그리고 그분 앞에서 자신이 진실로 누구인지를, 곧 죄인임을 깨닫고서 “가슴을 치며 말하였습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상히 여겨주십시오.'”(루카 18,13)

그렇게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에 자신을 맡깁니다.

시나이의 성 이사악은 말합니다.

“자신의 죄를 아는 이가 기도로 죽은 이를 살리는 이보다 위대하다.

~ 자기 자신 때문에 한 시간 동안 우는 이가 온 세상을 통치하는 이보다 위대하다.

자신의 나약함을 아는 이가 천사들을 보는 이보다 더 위대하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겸손’은 하느님 앞에 있기에, 자기를 비하하거나 경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자비가 필요함을 알고 그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낮추되 결코 자신을 하찮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을 중히 여기고 자비를 구하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도 귀중하게 여기고 중시합니다.

그러기에 겸손은 자신을 낮추기만 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우러르며 존경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언제나 주님 앞에 서 있고, 주님을 향하여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분의 자비를 입고서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자비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필요한 것은 당신의 자비, 그 외엔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가슴을 치며 하느님을 향해 기도합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루카 18,13)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루카 18,14)

 

주님!

낮추는 이가 되게 하소서.

타인의 평가나 꾸짖음을 물리치지 않게 하시고, 인정할 줄을 알고 굽힐 줄을 알게 하소서.

타인을 차별하지도, 업신여기지도 않게 하시고, 존중하고 존경하게 하소서.

언제나 당신 앞에 서 있는 자 되게 하소서!

제 자신을 내세우지도, 숨기지도 않게 하시고, 용서를 청하고 자비를 구하게 하소서.

오, 주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아멘.

「밥맛 떨어지는 사람」

-반영억신부-

초등학생의 눈에는 어떤 사람이 제일 싫은 사람일까요? ‘잘난 척 하는 사람, 자기 자랑하는 사람이 제일 밥 맛 없답니다.’ 자기 자랑을 하는 사람은 결코 현명한 사람이 아니며, 사람들은 자기 자랑 하는 사람을 싫어합니다. 자기를 드러내고 남을 깎아내리기 좋아하는 사람은 인정받지 못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그럼에도 자격지심에서 자기를 내세우지 못해 안달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하고 가슴을 치는 세리와, “저는 세리와 같지 않고 일주일에 두 번씩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하고 자랑하는 바리사이 중 누가 하느님께 의롭게 인정받은 사람인가?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집니다.

자기만 옳은 줄 믿는 것은 무지에서 나오는 과오요, 남을 업신여기는 것은 교만에서 오는 죄입니다. 사람들은 겉모양을 보고 ‘의인이다, 불의한 사람이다.’ 판단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속마음을 보십니다. 인간은 겉모양을 보지만 하느님께서는 속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자신을 포장하지 않고 중심을 보시는 주님의 눈에 들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사람에게 기대지 말고 주님께 의탁해야 합니다.

루카 복음에 보면 베드로는 밤새 고기잡이에 실패하였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후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고 그것을 통해서 주님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깊은 곳에 그물을 치라는 한 말씀에 예수님을 모시기에 너무도 부족한 자신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더 이상 고기가 보이지 않고 주님만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루카5,8).하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도 주님 안에서 자신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람들은 장애물이 밖에 있으면 쉽게 피해 다닙니다. 그러나 장애물이 자기 안에 있으면 그 장애물을 피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맙니다. 밖에 있는 큰 장애물보다 안에 있는 장애물이 더 무섭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장애를 거두어 주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나의 장애를 없애 주시고 나를 통하여 당신의 일을 하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뜻에 응답함에 있어서 주저함이 없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행여 자기만 옳다는 과오나 남을 무시하는 죄는 짓지 않기를 바랍니다. 모쪼록 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하는 은총의 사순절이 되길 희망합니다.

‘자기를 높이면 남들이 낮아지고 낮아진 사람들이 그를 또한 끌어내립니다. 자기를 낮추면 남들이 높아지고 높아진 사람들이 그를 더욱 높여 올립니다. 주는 대로 받는 것이 세상의 어김없는 법칙이기 때문입니다’(이현주). 마리아는 외쳤습니다.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 마음 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