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2023년 2월 23일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Margaret K 2023. 2. 23. 06:11

2023년 2월 23일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루가 9,22-25)

 

Whoever loses his life

for my sake will save i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모세는 백성에게 그들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당신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상대방을 향해 칼이나 몽둥이를 휘둘러 상해를 입히는 사람은 정상일까요? 비정상일까요? 또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폭력을 쓰는 사람과 동조해서 자기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에게 똑같이 칼이나 몽둥이를 휘둘러 상해를 입히는 사람은 어떨까요? 모두 비정상이 분명합니다.

이런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사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에 너무나 많다고 합니다. 바로 익명성이 보장되는 인터넷 공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악성 댓글을 달고, 또 여기에 동조해서 또 다른 악성 댓글을 남깁니다. 이런 악성 댓글이 칼이나 몽둥이를 휘두르는 것과 어떻게 같냐고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악성 댓글을 당하는 당사자들의 뇌에서는 칼에 찔리거나 둔기에 얻어 맞을 때의 똑같은 고통의 경험이 관찰된다고 합니다. 즉, 뇌에서는 칼이나 몽둥이로 맞는 것처럼 엄청난 상해를 받은 것을 깨닫습니다.

악성 댓글뿐일까요? 친구 사이에서도 이상한 소문으로 상대에게 해를 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본인은 말로만 했을 뿐이라 생각하겠지만, 이 역시 칼에 찔리거나 둔기에 맞는 것과 같은 고통을 뇌에서 느끼게 됩니다. 엄청난 폭력입니다.

십계명에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의 말로도 이 계명을 어길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을 늘 마음에 담고 살아야 합니다. 자기만의 정의를 외치면서 살인을 범하는 엄청난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닌, 사랑이 넘치는 세상이 될 수 있도록 나부터가 말과 행동을 조심하면서 사랑 실천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그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벌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모두를 사랑으로 감싸 안아주십니다. 그들 역시 구원의 대상에서 절대로 제외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런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는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과거를 모두 잊고, 자신의 의지를 완전히 주님께 내맡기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의 뜻을 기억하면서 버릴 수 있는 세상의 것들을 과감하게 내려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것에 대한 욕심으로 인해 차마 내려놓지 못하고, 자기를 드러내려는 이기심으로 잘못된 말과 행동을 생산하기도 합니다. 이런 상태로는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어쩌면 주님과 정반대의 길로 가게 될 것입니다.

많은 폭력이 난무하고, 욕심과 이기심이 차고 넘쳐서 더 힘든 세상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더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이 필요할 때입니다. 그래야 온전히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과거 때문에, 혹은 미래 때문에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 과거는 이미 존재하지 않으며, 미래는 아직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알랭).

​사랑은 생명을 투자하는 것

-전삼용신부-

https://youtu.be/_YmSsk_nvA0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라는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틀을 보면 조금 이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투자하면 투자한 것을 후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내어 놓는다는 말은 ‘이웃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생명을 내어 놓음입니다. 피 흘림 없는 사랑은 없습니다. 사랑은 열정(passion)이라고도 하는데 이 열정은 또한 수난(passion)을 전제합니다. 열정이나 수난은 같은 말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살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이무석 교수가 의무관이었을 때 목격한 자해하는 청년은 몸에 피를 내지 않으면 살고 있는 느낌을 가질 수 없어서 계속 자해를 한다고 했습니다. 피를 내는 것은 수난입니다. 하지만 사랑의 열정이 아닙니다.

 

무언가를 사랑해서 그것을 위해 투자하는 마음으로 우리는 살아갑니다. 내 피를 쏟을 목적이 없다면 삶의 의욕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두 주인공은 죽으려고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삶의 의욕을 잃은 사람들입니다. 남자는 고아로 자라서 애인에게 배신 당하여 삶의 의욕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사형 선고를 받습니다. 여자는 가족에게 폭행 당하고 어머니에게 외면 당해서 죽고 싶은 마음 뿐입니다. 가족을 위해서도 내 피를 쏟을 수 없다면 스스로 피를 내야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피 흘림 없는 삶은 열정이 식은 삶입니다. 그래서 어떻게라도 피를 흘려야 합니다. 그 피를 흘리는 것을 우리는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 것들을 위해 피를 흘리면 될까요? 돈과 쾌락과 명예를 위해 피를 흘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평생을 달려온 사람들이 “이게 다야?”라는 마음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경우를 봅니다. 그것들은 마치 공갈 젖꼭지처럼 아무리 빨아도 영양분이 오지 않고 결국 그것이 가치가 없는 것임을 깨달을 때는 삶의 의욕을 잃습니다.

 

어차피 무언가를 위해 목숨, 곧 피를 쏟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목숨을 바치라고 하는 것은 새 생명을 탄생 시키는 목적으로 바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어머니가 아기를 낳을 때의 피 흘림, 아기를 기를 때의 피 흘림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삶의 의욕도 잃지 않고 투자한 만큼의 생명을 되돌려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십자가의 피 흘림을 통해 교회를 낳으시고 부활하시어 영원한 생명을 누린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투자는 더 많이 벌기 위함입니다. 투자는 무언가를 사랑할 때 하게 됩니다. 투자로 나의 피, 곧 생명을 바치게 되는데 그 피, 곧 생명을 되돌려 줄 수 있는 곳에 투자하는 게 상책입니다. 투자를 하지 않거나 투자 비용이 회수 될 수 없는 곳에 투자하는 어리석은 일을 하면 회사는 망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피를 흘리지 않거나 생명을 되돌려 받을 수 없는 것들에 투자하면 망합니다. 어차피 투자하며 살아야 한다면 투자 비용이 더 회수 되는 것에 투자하는 게 낫습니다. 생명이 충만하면 행복합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부터 행복이 오는 것에 투자해봅시다.

 

마더 데레사 효과라고 있습니다. 마더 데레사가 가난한 이웃을 위해 피를 흘리는 모습만 봐도 면역력이 증가하고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실험 결과입니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죽는 삶은 이 세상에서부터 투자 효과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웃을 위해 목숨을 내어줍시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부터 행복합니다. 그러다 주님께서 계셔서 영원한 생명도 받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자기 자신을 위해 공갈 젖꼭지에 모든 에너지를 쏟지 맙시다.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을 찾다 보면 하느님 자녀를 낳는 일이 아니면 그 어떤 것도 투자한 만큼 이득이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랑해야 살 수 있습니다. 올바로 투자합시다.

​생명과 행복을 위한 진리

-이기우신부-

https://www.youtube.com/watch?v=v4h-nWOCzC4

 

​-조재형신부-

예전에 어느 성인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현재는 하느님의 은총에, 미래는 하느님의 섭리에 맡겨드립니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 있습니다. 오히려 용서하심이 주님께 있사와 더더욱 당신을 섬기나이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8장에서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의 죄를 묻지 않겠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월간 잡지 ‘꿈’에서 읽은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가난한 이들, 알코올 중독자들, 병든 이들이 모여 사는 달동네에 수녀님들이 왔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수시로 싸우고, 길에서 자고, 물건을 부수면서 지냈습니다. 수녀님들은 그런 마을 사람들을 씻겨주고, 먹여주고, 재워주었습니다. 왜 싸우는지, 왜 길에서 자는지, 왜 물건을 부수는지 묻지 않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조금씩 변하면서 알코올 중독자도 줄어들고, 싸움도 잦아들고, 길에서 자는 사람도 없어졌습니다. 나중에 마을 사람들이 수녀님께 물었습니다. “수녀님은 왜 우리가 싸우는지, 부수는지, 길에서 자는지 묻지 않았습니까?” 수녀님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따지지 않는 분이십니다. 과거의 죄를 들추어내고 허물을 캐내고 응징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진정으로 회개하기만을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런 하느님을 믿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은 우리도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예전에 어른들이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라!”고 하셨습니다. 바른 길로만 가는 학생을 ‘모범생’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모범생만 있지 않았습니다. 다른 길로 가는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저도 초등학교 때 넓고 빠른 길로 학교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 길은 좋은데 재미가 없었습니다. 좁고 먼 길로 학교에 갔습니다. 그 길에는 재미있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입구에는 만화가게가 있었습니다. 떡볶이 가게, 빙수가게, 뽑기 아저씨, 핫도그 아저씨, 구술 게임 아저씨가 있었습니다. 그 길로 가면 학교에 지각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학생들은 그만 결석하기도 했습니다. 모범생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모두 학교를 졸업했고, 지금은 손자를 돌보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오늘 독서는 하느님께 축복을 받는 길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잘 지키고, 이웃을 사랑하고, 자선을 베푸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는 복을 주신다고 이야기합니다. 유혹에 빠져서 하느님과 멀어지고 다른 신을 섬기면 약속의 땅에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을 따를 것인지 다른 신을 섬길 것인지 선택하라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패자부활전’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비록 죄를 지었을지라도 뉘우치기만 한다면, 하느님을 다시 찾기만 한다면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용서하시고 축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순시기는 우리의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시간입니다. 사순시기는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체험하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지금 내가 가는 길이 하느님의 계명을 따르는 길이라면 감사하면 좋겠습니다. 지금 내가 가는 길이 하느님과 멀어지는 길이라면 뉘우치면 좋겠습니다. 밀과 가라지는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면 우리는 밀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과 멀어지면 우리는 가라지가 될 것입니다. 선택은 언제나 우리의 몫입니다.

​언젠가 반드시 화사한 봄날이!

-양승국신부-

 

참으로 혹독한 시기,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텨나가고 계시는 분들, 얼마나 노고가 많으십니까? 어쩌다 나라가 이 지경에 까지 이르렀는지 참으로 혼란스럽습니다. 몰상식과 파렴치가 일상이 되었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비정상과 난감함이 일상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국격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쳤습니다. 왜 언제나 이 큰 부끄러움과 참담함은 우리 서민들의 몫이어야 하는지.

 

어서 빨리 이 추운 겨울이 지나가고 따뜻한 봄날, 꿈결 같은 봄날을 맞이하기를, 조금이라도 빨리 이 매서운 경제 한파가 지나가고 여유 있는 미소를 지을 수 있는 넉넉한 순간이 오기를, 어서 빨리 이 무덤 속처럼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나가 환한 광명의 땅으로 들어서기를, 그저 기도하고 또 기도합니다.

 

간절히 꿈꾼다면, 끝까지 희망한다면,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생각을 끝까지 유지한다면, 많은 경우 꿈은 현실화 됩니다. 춥다고, 힘들다고, 우울한 얼굴로 앉아있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머지않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이 혹독한 추위가 지나가고 화창한 봄볕이 온통 우리 인생의 창안으로 쏟아져 들어올 것을 미리 그려보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지고 가는 십자가의 무게가 너무 무겁다 느껴질 때는 예수님께서 우리 곁에 바짝 붙어 서서 우리보다 수백 배, 수천 배 더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고 계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은 우리 각자를 향한 각별한 사랑을 지니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각자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녀로 생각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무게에 눌려 비명을 지르며 살아가기를 절대로 바라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메고 있는 갖은 멍에를 던져버리고 자유롭게 살아갈 것을 바라십니다. 우리 각자가 축복받은 행복한 인간으로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내 능력, 내 긍정적 측면, 내 성공 때문이 아니라 나란 인간 그 자체를 존중해주시고 사랑해주시는 유일한 분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내 업적, 내 위치, 내가 하고 있는 일보다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소중히 여기시고 사랑해주시는 분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때로 지긋지긋하게, 때로 한시적으로, 때로 평생 따라다니는 수많은 유형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사랑의 하느님이라며, 왜 이렇게 많은 십자가를?’ 하며 의아해 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언젠가 반드시 친히 당신 손으로 우리 어깨 위에 얹어져 있던 십자가들을 하나하나 내려놓으실 것입니다. 자유롭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때 모든 짐을 내려놓은 우리는 한 마리 어여쁜 나비처럼 너무나 홀가분한 마음으로 하느님 아버지께로 날아오를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보내시지만, 그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보다 큰 선으로, 결국 사랑으로,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품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지금 내가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있다면 축복의 순간이 멀지 않았다는 표시입니다. 내가 십자가의 무게에 힘겨워하고 있다면 보다 큰 도약, 보다 큰 기쁨이 멀지 않았다는 표시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이영근신부-

 

오늘, ‘재의 수요일’을 지내고 맞이하는 첫 번째 날의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첫 번째 수난을 예고하시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곧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카 9,20)라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이어,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이신 당신께서 이 땅에 오신 사명, 곧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 죽음을 당하실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었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루카 9,22)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일어날 일 세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반드시”(이백주년 성서; “마땅히”)라는 단어는 이 모든 것이 필연성이나 당위성에 의해 다가오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 일은 첫째, “많은 고난을 겪는” 일이요, 둘째, “배척을 받아 죽는” 일이요, 셋째, “죽었다가 되살아나는”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는 모두 수동형으로 표현되고, 하느님의 권능이 개입할 것임을 시사해줍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루카 9,23)

 

당신을 따르는 길은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지만, 세 가지를 요구하십니다.

첫째는 자기 “자신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요, 둘째는 “제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이요, 셋째는 이를 “날마다” 지속적으로 지는 일입니다.

‘자신을 버려야 한다는 것’은 자신의 주권이 오직 하느님께만 있음을 믿고 오로지 하느님께만 신뢰를 둔다는 것이요,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기꺼이 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버린다거나 자기 십자가를 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왜 버려야 하는지’, ‘십자가를 왜 져야 하는지’에 있습니다.

곧 그것을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해야 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곧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렇게 해야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결국 그것은 사랑이 가져오는 결단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목숨을 내놓은 결단이며, 그렇게 사랑으로 목숨을 내놓으면 오히려 목숨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루카 9,24)

이러한 결단은 제1독서에서 생명과 죽음의 길로 드러나며, 그 생명의 길을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신명 30,20)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을 사랑하여, 사랑으로 그분께 매달려 있고, 생명의 길을 가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루카 9,23)

 

주님!

제 자신을 따르지 않고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제 자신을 붙잡고 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붙잡고 가게 하소서!

아니 당신께 붙들려 가게 하소서!

가고 싶은 데로 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제시한 길을 가게 하소서!

당신을 앞서가는 것이 아니라 뒤따르게 하소서!

그 무엇을 하든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아멘.

​「십자가는 천국의 열쇠」

-반영억신부-

한 사형수의 십자가의 길 묵상입니다. “한없는 자비와 그 크신 사랑으로 저희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를 짊어지신 예수님, 이제 당신의 자녀로서 제 십자가를 지고 당신의 짐을 덜어 이 죄인의 어깨에 메겠습니다. 과거에 큰 죄를 저질렀지만, 이제는 과감히 욕망과 욕정을 버리고 주님이 가신 길을 불평 없이 열심히 따르겠습니다. 삶에 주어진 고통의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묵묵히 따르는 길만이 구원에 이르는 길임을 깨우치게 하소서. 비천한 제가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고 제 십자가를 지며, 다른 사람에게 짐이 되지 않게 해 주시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게 해 주소서. 큰 고난과 시련이 닥칠지라도 두려움과 절망에 빠지지 않고, 제가 짊어지지 못할 십자가는 주시지 않으리라는 것을 굳게 믿고 오로지 주님만을 따르게 하소서”(김 아우구스티노). 죽음을 감당하며 오로지 주님께 의탁하고 기꺼이 십자가를 짊어지고자 하는 마음을 헤아려 주시기를 청합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주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믿음이 십자가를 감당하게 합니다.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십자가는 당신의 사랑스런 자녀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십자가는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이며, 천당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성 요한 비안네).

 

예수님께서는“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9,24).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이 곧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사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자신을 버리면 모두를 잃어버리는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바라보면 답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 앞에서 당신의 뜻을 버렸기 때문에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었습니다. 아니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알퐁소 성인이“당신이 제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십시오. 저는 저의 뜻을 버리고 당신의 뜻에 저를 맞추겠습니다”고백한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뜻에 부합하기 위해서 나의 뜻을 내려놓아야 하겠습니다.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힘들게 고생하면서 따라오라는 말씀이 아니라 매 순간마다 자신의 욕심을 비우면서 주님의 마음에 드는 것,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하라는 요구입니다. 그러나 막상 일상 안에서 주님의 십자가를 선택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주장, 뜻을 양보한다는 것이 정말 마음 같지 않습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내 공로를 내세우지 말고 또 내 생각에 고집을 부리지도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양보하는 것 하나가 뭐 그리 대단하냐고 하겠지만 그 시작이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요까짓 것’ 하는 것이 정말 대단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고까짓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매사에 신중한 선택을 해야 합니다. 어렵고 힘든 것을 선택한다는 것이 지금은 십자가이지만 그 십자가가 더없이 큰 축복임을 알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십자가는 언제나 하느님께서 우리의 사랑을 당신에게 증거 할 방법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고 순종하며 십자가를 짊어져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마지막에는 그 십자가가 우리를 짊어져 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신앙생활』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루카 9,23-25)”

 

이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하신 말씀이고,

‘선택’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믿음’과 ‘희망’에 관한 말씀입니다.

무엇을 믿고, 무엇을 희망하느냐에 따라서

‘삶의 과정’이 다르게 되고, ‘삶의 끝’이 다르게 됩니다.

 

1) 아직 믿음을 갖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이 말씀은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영원한 생명을 주겠다.” 라고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특히 25절의 말씀은,

아직 믿음이 없는 사람들을 겨냥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라는 말씀은, “온 세상을 얻는다고 해도

그것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은,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만

쫓아다니면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입니다.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에 아무런 소용이 없다.”입니다.

이 풀이를 모두 합하면, “이 세상에 속한 것을 얻는 일은 허무한

일이다. 온 세상을 전부 다 차지한다고 해도 허무한 일이 될 뿐이다.

너희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만을 목표로 삼고 살아라.”입니다.

 

23절과 24절의 말씀은, “내가 주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나를 따르다 보면 십자가의 길을 걸을 수도 있지만, 그 길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감수해야 하는 과정일 뿐이다.

그것을 기꺼이 감수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고, 그게 싫어서 피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입니다.

 

2) 이미 신앙인이 되어서 당신을 따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내 뒤를

따라오려면, ‘내 뒤만’ 따라와야 한다.”고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자신을 버리고’는, 예수님을 따르는 일을 방해하는 걸림돌들,

특히 자기 안에서 생기는 속된 욕심과 욕망들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날마다’는 ‘매 순간 순간마다’입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는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나도 감내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는데, ‘끝까지’는 ‘죽을 때까지’입니다.

또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9).”

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포기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너무 힘들어서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 생각을 물리치고 끝까지 인내할 수 있는 방법은 ‘기도’입니다.

‘인내’는 나 혼자만의 힘으로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도와주시기 때문에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24절의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신앙을 지키면서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신앙생활을 중단한 사람입니다.

“목숨을 잃을 것이고”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입니다.

우리 교회 역사를 보면,

박해와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배교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날에도 냉담자가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배교자들보다 순교자들이 더 많고,

냉담자들보다 어떻게든 신앙생활을 계속하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끝까지 가는 사람과 가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의지력의 차이가 아니라, ‘기도를 하느냐, 안 하느냐?’의 차이입니다.

사람마다 각자 다른 사정이 있겠지만,

꾸준히 기도하면서 냉담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믿고 희망하기 때문에

현세의 인생에 대한 욕심과 집착을 버리는 사람입니다.

“목숨을 구할 것이다.”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입니다.

 

그런데 당장 눈앞에 닥친 고통은 생생한 현실이고, 하느님 나라에서

얻게 될 영원한 생명은 막연하게만 생각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희망’이 중요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로마 8,24-25).”

지금 겪는 고난과 시련은 ‘지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희망하는 것은 ‘영원히 남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다음 말씀들에도 연결됩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로 가겠다고 한 번 결심했다면,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합니다.

즉 허무한 것들에 대한 미련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얻기를 희망하는 그 생명 외에는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확신하는 것이 신앙인의 올바른 자세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중간에 포기하고 중단하면,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은 사람과 다르지 않게 됩니다.

배반자 유다가 한때 충실한 사도였다는 것은 전혀 인정받지 못합니다.

‘끝’이 전체를 결정합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그러지 않으면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루카 14,2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