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29일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너희는 자기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다면
안식일이라고 당장 구해 내지 않고 내버려 두겠느냐?"
(루가 14,1-6)
"Who among you,
if your son or ox falls into a cistern,
would not immediately pull him out
on the sabbath day?"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동포들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라도 했으면 하는 심정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수종을 앓는 사람의 손을 잡고 병을 고쳐 돌려보내신 다음,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감사하는 마음이 우리 삶에 큰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이를 과학자들이 정말로 그런지 다음과 같은 실험을 했습니다.
사람들을 두 집단으로 나누어 일기를 쓰게 했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집단에는 감사함을 느낀 것들을 기록하게 하고, 두 번째 집단에는 귀찮거나 짜증 났던 것들을 기록하게 했습니다. 이제 어떤 집단의 스트레스가 더 높았을까요? 두 번째 집단이었습니다. 감사를 기록한 집단의 스트레스 수준은 그렇지 않은 집단보다 현저하게 낮았습니다.
이런 실험도 있었습니다. 너무 많은 생각과 걱정으로 머릿속이 복잡하다고 이야기하는 대학생들을 모았습니다. 이들은 불면증으로 거의 잠을 자지 못하고 있었지요. 이들에게 잠들기 전 15분 동안 감사하는 것들을 목록으로 작성하게 했습니다. 이 감사일기가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까요? 학생들의 복잡한 생각을 풀어 주었고, 숙면을 할 수 있게 해줬습니다.
감사는 이렇게 과학적으로 볼 때도 자신에게 이롭습니다. 그런데도 감사의 이유를 찾으려 하지 않습니다. 사실 감사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 자리에 다른 감정이 밀고 들어올 수 없다고 합니다. 당연히 긍정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주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는 이유를 오늘 복음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율법 교사, 바리사이들이 있는 곳에 수종병자가 나타났습니다. 이때 이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피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안식일은 거룩한 날로 부정한 사람과 접촉하면 자신 역시 부정한 사람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낼 수 없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런 질문을 던지셨던 것이 아닐까요?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율법의 근본정신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기회가 된다면 오히려 율법을 충실하게 지키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 교사, 바리사이들은 자신의 부정함만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이 수종병자를 고쳐 주지 않아도 뭐라고 할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안식일에 어떤 치유행위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바라보시는 것은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먼저 생각하시고, 사랑을 먼저 실천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다른 생각보다 먼저 사랑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이런 사랑의 주님께 어떻게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 대한 감사 이유를 찾으면서 자기 자신의 이로움도 간직했으면 합니다.


“신부님! 매일 30분씩 묵상하고 있지만, 주님과의 관계가 전혀 좋아지지 않는 것 같아요.”
누구는 하루 몇십 분만으로도 주님 안에서 커다란 위로와 힘을 얻는다고 하는데, 자신은 30분씩 하루도 빠지지 않고 묵상하고 있지만, 전혀 그런 위로와 힘을 얻지 못한다는 하소연이었습니다.
당연히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데이트를 하는데 매일 만나서 30분이 될 때까지 시계만을 바라보고 있다면 애인과 좋은 관계를 만들 수가 있을까요? 그리고 데이트 시간이 30분이면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사랑할 때는 밤새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합니다.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 짧게만 느껴진다고 합니다. 주님과도 그렇게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시간을 딱 정해 놓고 주님을 만나서는 안 됩니다.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의무감으로도 주님을 만나서는 안 됩니다. 그냥 사랑하는 나의 님을 만난다는 심정으로 만나야 할 것입니다. 분명 그 만남 안에서 커다란 위로와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교리가 변질되면 비유부터 사라진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있는 가운데 안식일에 또 수종을 앓는 사람의 병을 고쳐주십니다. 아무래도 그들이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해놓고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지 시험하기 위해 수종을 앓는 사람을 들여보낸 것 같습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그들의 속셈을 아시고 이렇게 물으십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그들은 분명 ‘합당하지 않다.’라고 대답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시험하려 하는 처지에서 왈가불가할 수는 없는 상황이라 침묵합니다.예수님은 그의 손을 잡고 병을 고쳐주신 다음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
그러자 그들은 또 아무 대답도 못 합니다. 이 침묵은 종전의 침묵과 사뭇 다릅니다. 처음에는 속셈이 있는 침묵이었고, 이번 침묵은 이론으로는 반박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침묵입니다.
만약 그들도 이런 단순한 비유를 떠올렸다면 안식일 법을 그렇게 복잡하게 가르치며 실제로는 그 본질에서 벗어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교리는 복잡해졌고 일반 대중들에게 이해될 수 없는, 무조건 믿고 따라야 하는 뜬구름과 같이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장황한 말씀으로 설득하려 하지 않으십니다. ‘비유’로 간단히 설득하십니다. 언어로 하는 설득은 ‘머리’까지 들어가지만, 비유로 하는 설득은 ‘가슴’까지 들어갑니다. 머리는 사고하는 데 사용되지만, 가슴은 ‘직관’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태극기를 보고 손을 가슴에 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태극기는 하나의 상징이며 비유입니다. 그런데 그 비유는 머리의 단순한 이해를 넘어서서 가슴으로 나라를 사랑하게 만듭니다.
원효 대사의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다는 ‘일체유심조’ 사상을 전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수많은 논문이 필요할까요? 아닙니다. 단지 그가 유학길에 올랐을 때 해골 물을 마신 이야기만 해주면 됩니다. 그렇게 맛있었던 물이 해골 물임을 안 이후로 구토가 올라왔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비유를 통한 가르침은 대중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집니다. 이런 교리는 그 사람들이 모조리 사라지지 않는 한 지구상에서 없어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지상에 존재하는 대형 종교는 이야기식의 비유로 교리를 전달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교리 전달 방식이 어려운 ‘이론과 학문’으로 바뀌는 경향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비유와 상징, 스토리가 사라집니다. 이렇게 되면 어려운 것을 좋아하는 지식층이나 부유층만 좋아하지 민중들의 가슴에 새겨질 수 없게 됩니다.
현재 성탄 트리와 같은 것을 봐도 그렇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로 우리가 먹지 못하게 되었던 생명 나무가 오신 것에 대해 감격해서 눈물을 흘려도 모자랄 지경인데 그것이 무엇인지 잊어버렸습니다. 비유와 상징이 죽은 것입니다.
비유와 상징이 죽는 이유는 ‘돈’ 때문입니다. 얼핏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도에서 불교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이유를 알면 이해가 쉽습니다.
처음 불교 교리는 매우 쉬웠습니다. 모든 고통은 집착에서 나오고 그 집착하게 만드는 자아를 놓아버리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인도가 불교에 심취하였고 나중에는 나라가 불교를 지원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승려들은 큰 절에 머물며 더는 구걸하러 다니면서 민중들에게 불법을 설파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큰 절에서 교리만 더욱 부유층에게 합당하게 만들어갔습니다.
그렇게 단순하던 교리는 평민들은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철학과 같은 학문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자 이슬람이 침범했을 때 대중들 안에 있던 쉬운 종교인 힌두교는 살았지만, 학문으로만 남아있던 불교는 완전히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민중의 심장에 머무르지 않는 교리는 정권과 돈과 함께 사라집니다. 우리나라 의천의 천태종과 지눌의 조계종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천은 말 그대로 금수저였습니다. 왕의 아들이었습니다. 교리의 체계화를 통해 불교가 통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지눌은 어려운 교리보다는 깨달음을 강조하였습니다. 직관입니다. 그 직관적 깨달음을 조금씩 실천해나가면 된다고 믿었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것은 지눌의 조계종입니다. 천태종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민중의 가슴에 교리가 들어가려면 그들이 ‘직관’을 이용하게 해야 하고 그 방법이 비유와 상징과 스토리인 것입니다. 이런 식의 교리교육이 아니면 일 년 동안 가르쳐도 예비 신자들에게 교리의 확신을 안겨줄 수 없습니다.
소리굽쇠가 있습니다. 한 소리굽쇠를 치면 옆에 있는 다른 소리굽쇠가 그 소리를 받아서 진동합니다. 친 소리굽쇠를 손으로 잡아도 그 소리를 받은 다른 소리굽쇠는 여전히 그 진동의 소리를 냅니다. 이렇게 소리굽쇠가 서로 공명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소재와 모양이 같기 때문일 것입니다. 소재가 다르면 아무래도 덜 공명이 일어날 것입니다.
사람의 심장은 소재가 같습니다. 내 심장이 공명하면 상대의 심장도 공명합니다. 내가 상대에게 더 잘 전달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 심장을 울려야 합니다.
내 심장이 울려지는 것은 비유입니다. 그것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정말 심장을 짜내는 고통을 감내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심장을 울리지 못하는 것은 누구의 심장도 울리지 못합니다. 이 때문에 어렵더라도 우리는 교리를 비유로 가르쳐야 합니다. 사실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면 비유를 찾아내는 것이 어렵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비유 하나로 평생 안식일을 주제로 공부해 온 사람들의 입을 막아버리셨음을 깊이 묵상합시다. 우리가 쓰는 언어가 그냥 ‘소리’에 불과할 수 있고, ‘말’이 될 수도 있으며, ‘비유나 상징’이 될 수도 있습니다.
소리는 귀에만, 말은 머리에, 그리고 비유는 가슴까지 내려갑니다. 사람의 마음에 도달하는 것은 비유나 상징, 스토리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방식이 사라지는 이유는 돈이나 육체, 권력에 대한 욕심 때문임도 알아야 합니다.

-조재형신부-
2달 전입니다. 통신사에서 스마트폰을 보내왔습니다. 제게는 별로 필요 없기에 서랍에 넣어두었습니다. 신부님들과 함께 산행을 가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동안 쓰던 스마트폰이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산행을 마치고 대리점에 가서 이유를 물었습니다. 대리점에서는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지금 쓰고 있는 스마트폰은 더 이상 서비스가 되지 않기에 통신사에서 새로운 스마트폰을 보내주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새로운 스마트폰은 기능과 성능이 맘에 들지 않았습니다. 방법은 새로운 스마트폰을 마련하는 것이었습니다. 새로 스마트폰을 마련하는 것은 별 문제가 없는데 전에 있던 스마트폰에 있던 사진, 전화번호, 어플리케이션을 새로운 스마트폰에 옮기는 것은 제게는 부담이 가는 일이었습니다. 다행히 대리점에서 새로운 스마트폰으로 대부분 옮겨 주었습니다. 함께 지내는 신부님들이 나머지는 해결해 주었습니다. 대리점에는 저 같은 분들이 많이 오셨습니다. 대부분이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들이었습니다. 친절한 대리점 직원은 하나하나 일일이 설명해 주었습니다. 직업이라서 하는 것이지만, 같은 한국인이라서 더욱 정성껏 설명해 드리는 것 같았습니다.
지난겨울입니다. 추운 날에 안타깝게도 굶주림에, 추위에 돌아가신 분들이 있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언어와 상관없이 힘들고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마련하였습니다. 겨울은 지나갔지만 여전히 힘든 분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언어와 민족은 달랐지만 친절과 따뜻함으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나누어주고 있었습니다. 1년 가까이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봉사하시는 자매님의 얼굴은 날개 없는 천사 같았습니다. 멕시코에서 선교하시는 수녀님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성장이 더딘 아이들이 안쓰러웠다고 합니다. 가정 방문을 다니면서 아이들을 만났고, 미리암이라는 아이에게 명단을 적어달라고 부탁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11살인 미리암은 글을 읽고 쓸 줄 몰랐다고 합니다. 수녀님은 당연히 글을 쓸 줄 알았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고 합니다. 50명의 아이들에게 줄 우유를 마련하기 위해서 지인들에게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지인들은 우유는 물론 빵까지 마련해 주었다고 합니다.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음식을 먹는 것도 기쁨입니다. 사랑하는 이들과 여행을 가는 것도 즐거움입니다. 마음을 풍요롭게 해주는 글과 시를 읽는 것도 행복입니다. 10월도 이제 이틀 남았습니다. 이웃들과 함께 기쁨, 즐거움, 행복을 나누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도 복음의 기쁨을 나누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도들이 목숨을 바치면서 전하려했던 것도 바로 복음의 기쁨입니다. 10월을 보내면서 생각합니다. 오늘도 제가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은, 이웃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 갈 수 있는 것은 무수한 저의 실수와 잘못을 덮어 주시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자비가 있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실수와 작은 잘못이 아니라, 이웃과 하느님의 마음에 큰 상처를 내는 죄를 지었어도, 참고 기다려 주시는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실수와 잘못을 너그럽게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깨닫고, 나또한 나에게 잘못한 이들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이 참된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이것이 의로움의 열매를 맺어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조건 없이 병자를 고쳐 주십니다. 병자가 어떻게 살았는지, 무엇을 했는지, 왜 아픈지 묻지 않고 크신 사랑으로 고쳐 주셨습니다. 작은 일을 하면서 생색을 내고, 자신이 드러나기를 바라는 우리들의 모습과는 다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이웃 사랑의 실천은 날이 궂으나 좋으나, 기회가 좋던지 나쁘던지, 꾸준히 지속되어야 마땅합니다!
-양승국신부-
수종병(水腫病)은 혈액 가운데 액체 성분이 신체 특정 부위에 가득 차 몸이 붓는 질환입니다. 환자는 끝없는 갈증에 시달리는데, 갈증을 해소시키기 위해 물을 마시면 더욱 목이 말라지고 증세는 심해진다고 합니다.
의학이 발달된 오늘날에야 여러 가지 검사를 통해 정확한 원인을 찾아내고 대처하면 치료가 가능한 일이지만, 예수님 시대 당시 수종병에 걸렸다 하면 치명적이었습니다. 여기저기 몸이 부어오르니, 그런 상황을 바라보는 본인이나 가족들의 마음을 한없이 찢어졌겠지요.
온 몸이 여기저기 엄청나게 부어오르는데, 마땅한 치료제도 없이, 아무런 회복의 가능성도 없이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던 수종병자였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는 예수님 가까이 더 가까이 나아왔던 것입니다.
당신 양떼가 겪는 고통은 곧 당신의 고통이었던 자비하신 예수님께서 절대로 수종 병자를 보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길이 자동으로 그에게 펼쳐졌습니다. 친히 그의 손을 잡고 치유의 은총을 베푸신 후, 집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그런 다음 꼬투리를 잡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던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해 예리한 성찰꺼리 하나를 던지시며 그들의 입을 막아버리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루카복음 14장 5절)
그 잘난 안식일 규정이라는 덫에 스스로 포박되어, 쫌생이요 찌질이처럼 살아가던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타는 오늘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루카복음 14장 3절)
혹시 우리 역시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고통 받는 이웃들을 향한 나눔이나 사랑의 실천을 끝도 없이 뒤로 미루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주일이니, 오늘은 컨디션이 안 좋으니, 오늘은 날씨가 너무 악천후니, 오늘은 기분이 영 꿀꿀하니 다음에 해야지...그러다가 평생 그렇게 살아갈 것입니다.
고통 받는 이웃들, 절박한 동료 인간들을 대상으로 한 이웃 사랑의 실천은 날이 궂으나 좋으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기회가 좋던지 나쁘던지, 하루 삼시 꼬박꼬박 밥을 챙겨먹듯이 계속되어야 마땅합니다.

모든 법의 기초는 사랑이다
-반영억신부-
법은 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 공동선을 지향하면서 선포한 이성의 명령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법은 존중되어야 하고 지켜야 하며 지켜져야 선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법은 어디까지나 법입니다. 따라서 적용에 있어서 공정해야 하고 형평성을 지켜야 하지만 예외가 있을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인간의 생명이 위협을 받는 것이라면 그 법은 마땅히 거부되어야 합니다. 실정법보다는 하느님의 법이 우선하기 때문입니다.
유다인에게 있어서 안식일은 단순히 쉬는 날이 아니라 하느님께 바쳐드리는 하느님의 날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이렛날에 쉬셨습니다. 창세기 2장 3절에 보면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하느님께서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여 만드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그날에 쉬셨기 때문이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저 쉬는 날이 아니라 감사와 찬미의 날입니다. 일주일을 잘 지내기 위해서 하루 쉬는 날이 아니라 일주일을 잘 보내도록 안배하신 하느님과 함께 머무는 날입니다.
탈출기 20장 10절 11절에 보면, 십계명 중 3번째 계명을 볼 수 있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엿새동안 일하면서 네 할 일을 다하여라.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의 하느님을 위한 안식일이다. 그날 너의 아들과 딸, 너의 남종과 여종, 그리고 너의 집짐승과 네 동네에 사는 이방인은 어떤일도 해서는 안 된다. 이는 주님이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안식일에 강복하고 그날을 거룩하게 한 것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십계명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다음 하느님의 백성으로써 “주님께서 이르신 모든 것을 실천하겠다고 약속”(탈출19,8)한 후 시나이산에서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에는 노예뿐 아니라 가축까지도 일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노예살이했던 옛 상황을 기억하고 해방의 기쁨을 나누기 위한 축제의 날이었습니다.
이렇게 안식일은 찬미와 감사, 그리고 해방의 기쁨을 함께하는 하느님의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의 흐름 속에 안식일 안에 담긴 알맹이는 사라지고 법규의 틀만 지키기에 급급해했습니다.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법을 잘 지키기 위한 세부 규정을 만들고 해석한다는 빌미로 이제 절대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고, 자신들의 뜻을 합리화시키는 방법으로 안식일 법이 바뀌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나라도‘국가보안법’이니‘긴급조치 법,‘유신 법’등 정권유지를 위한 방법으로 법의 남용을 많이 해왔고, 지금도 여전히 사형제도라든지 낙태법을 빌미로 살인죄를 용납하고 있고, ‘유전무죄’,‘무전유죄’의 악법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인간의 생명이 모든 것 위에 있고, 안식일과 같은 거룩한 제도보다도 우위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알고 있으면서도 그 취지를 살리지 않았고 오히려 자기 기득권을 누리려고 외면해 온 것뿐입니다. 이렇게 보면 “수종 병자”는 바로 그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섬긴다는 구실을 내세워 자기 자신만을 챙기는 병에 걸려있었습니다. 병중에 가장 무서운 병은 ‘자폐증’이라고 합니다. 자기 안에 갇혀있는 병, 마음이 오그라든 병이 참으로 무섭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쁜 것을 알면서도 바꾸려 하지 않고 오히려 즐기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바리사이, 율법학자가 못된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못된 것이 참 많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잘못을 범할 때 정말 모르고 범합니까? 아닌 것을 알면서도 나의 달콤함을 채우기 위해서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합리화시키려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법은 마땅히 존중되어야 하지만 인간을 앞설 수 없으며 또한 그 근본취지를 잘 살려야 하겠습니다. 주일을 거룩히 지내는 우리의 태도 또한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하는 날, 주님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날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마지못해 억지로 의무적으로 주일미사에 오신다면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수가 없습니다.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주일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의 법은 영원합니다. 법을 집행할 때 사랑이 빠지면 악법이 되고 맙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법보다 위에 있다.>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 일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는데, 마침 그분 앞에
수종을 앓는 사람이 있었다. 예수님께서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은 잠자코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손을 잡고 병을 고쳐서
돌려보내신 다음,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
그들은 이 말씀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루카 14,1-6).”
여기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라는 질문은,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즉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이냐,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를 짓는 일이냐?”
라는 뜻으로 하신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물으신 것은, 몰라서 물으신 것도 아니고,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견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물으신 것도 아니고,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이다.” 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아무 말 없이 잠자코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논리적으로 반박할 자신이 없어서 그랬거나,
아니면 대답할 필요가(가치가) 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떻든 그들이 침묵을 지킨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동의했기 때문은 아닙니다.
만일에 그들이 대답했다면,
앞의 13장에 나오는 회당장의 말과 같은 말을 했을 것입니다.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루카 13,14).”
‘치료를 받으십시오.’ 라는 말은 병자에게 하는 말이기 때문에,
예수님께 하는 말로 바꾸면,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치료를 하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입니다.
예수님께서 단순히 돈을(생계비를) 벌기 위해서 병자들을 고쳐 주는 일을
하셨다면, 안식일에는 안 된다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말은 맞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를 베풀어주려고
병자들을 고쳐 주셨기 때문에 그 말은 틀린 말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베풀어주는 일은
요일과 상관없이 ‘날마다’ 실천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에는 특히 더 실천해야 합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병자 치유에서
‘하느님의 자비’는 보지 못하고, ‘일’만 보았습니다.
보는 능력이 모자라서 ‘하느님의 자비’를 보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들 마음속에 사랑과 자비가 없어서 보지 못한 것이고,
또 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지 못한 것입니다.
사랑이 사랑을 알아보게 하고, 자비가 자비를 알아보게 한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율법주의’는 사랑과 자비 없는(무자비한) 그릇된 신념입니다.>
지금 이 상황은 율법 해석의 차이에서 생긴 논쟁 상황이고,
서로 다른 두 신념이 충돌하는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일지라도’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가르치시는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병을 고치는 일도 하면 안 된다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 2,27).” 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 가르침은, 자비와 사랑이 법의 근본정신이고,
법보다 위에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즉 사람들에게 구원과 생명을 주려고
계명들과 율법들을 내려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계명들과 율법들로 사람들을 억압하고 압박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왜곡하고 거스르는 죄를 짓는 일입니다.
따라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신념은 ‘잘못된 신념’입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 라는 말씀은, “너희는 너희 자신의 아들이나 소를
구하는 일은 안식일에도 하면서, 다른 사람을 구하는 일은 안식일이라는
핑계를 대면서 하지 않는 위선자들이다.” 라고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것은,
반박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대꾸하기 싫어서였을 것입니다.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 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잘못된 신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설득하고 타일러서
그 신념을 바꾸게 하는 일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모자라서 그들의 신념을 못 바꾸신 것은 아닙니다.
율법주의자들 자신들이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마음을 바꿔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교회법을 비롯해서 많은 규정들이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혼인 문제에 관해서 말할 때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평화롭게 살라고 부르셨습니다(1코린 7,15ㄷ).”
(이 말에서 ‘평화’는 ‘구원, 해방, 행복, 기쁨’ 등을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교회의 혼인법은 신앙인들에게 평화와 행복을 주기 위한 법이지
억압해서 불행과 고통을 주기 위한 법이 아닙니다.
혹시라도 혼인법의 규정만 생각하고 그 정신을 잊어버린다면,
우리도 무자비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같은 율법주의자가 되어버립니다.
사도시대 때에,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때문에 큰 분쟁과 논란이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사도 15,1-2).
사도들과 원로들이 예루살렘에 모여서 그 문제로 회의를 열었는데,
그때 베드로 사도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왜 우리 조상들도 우리도 다 감당할 수 없던 멍에를
형제들의 목에 씌워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 예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습니다(사도 15,10-11).”
여기서 ‘멍에’는 할례뿐만 아니라 유대교 율법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고,
‘그들’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신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느님을 시험한다는 말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다,
또는 하느님의 계획에 반항한다는 뜻입니다.

복음: 루카 14,1-6: 안식일에 대한 논쟁
-조욱현신부-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바리사이의 초대를 받으시고 가셔서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지켜보았다.”(1절) 한다. 그들은 무엇을 왜 지켜보았을까? 그분이 안식일에 금지된 일을 하여 율법의 존엄성을 훼손하지 않을까 하며 올가미를 씌우려고 지켜보고 있었다. 거기서 수종 앓는 사람을 고쳐 주신다. 그는 육체적으로 방탕한 생활로 그 영혼을 더럽히고 영의 빛을 꺼뜨린 사람이었다.
예수께서는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하고 물으셨다(3절). 그들은 침묵하고 만다. 안식일은 합리적으로 잘 지켜야 한다. 안식일은 달콤한 영적인 향기로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죄를 멀리하고, 모든 덕행에서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며 거룩하고 칭찬 들을 만한 삶을 하느님께 바쳐야 하는 날이다.
그들이 나쁜 뜻을 품고 침묵할 때, 예수께서는 그들의 몰인정과 파렴치를 설득려 있는 말씀으로 반박을 하신다.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5절) 안식일에 자비를 베푸는 일을 율법이 금한다면, 어째서 그들은 우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내는가? 그들의 침묵이 잘못되었음을 말한다. 하느님은 사랑을 멈추시는 분이 아니시다.
이 안식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해 자유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면서 그들 자신은 물론 노예나 가축들도 쉬게 하였다(신명 5,14-15). 그러므로 이 안식일이란 하느님께 대한 찬미와 감사의 날이며, 해방과 자유의 날로 기쁜 날이었다(이사 58,13). 안식일은 인간들을 위한 것이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기적을 행하신 것은 기쁨과 구원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큰 표징이다.
즉 “안식일”이란 세상의 모든 피조물을 위한 하느님의 선하심과 구원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언제나 구원을 베푸시는 하느님께 대한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날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예수께서는 이 “안식일”에 하느님의 기쁨과 희망을 베풀어주셨다. 즉 문자적이고 법적인 해석 너머 안식일의 근본정신이 바로 “인간의 해방”과 “인간에 대한 사랑”임을 알려주셨다. 즉 안식일의 의미를 인간을 위한 것임을 확인해 주셨고, 안식일의 본래 의미를 회복해 주셨다.
우리도 많은 경우에 계명의 문자에만 얽매여 형식적이고 율법주의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습관적이고 형식적이고 타성적으로 되면 그 신앙생활은 얼마 가지 않아 의미를 찾지 못하고 식어가고 말 것이다. 신앙은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삶이 될 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내가 먼저 보기 위해서 눈을 크게 뜨고 깨어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하느님의 뜻이, 즉 본래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면서 그것을 실천한다면 진정으로 자유로운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 백성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을 보여 주십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루카 14,3)
안식일에 수종을 앓는 사람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이 일이 바리사이의 지도자들 중의 한 사람 집에 초대받으셨을 때의 일이니 앓는 이 역시 손님 중 하나였을 수 있지요.
율법 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이 당신에게서 가장 경계하면서 올가미를 놓으려는 지점이 어디인지 잘 아시면서 이렇게 대놓고 물으시는 것으로 보아, 이 질문은 정면 돌파하시겠다는 예수님의 의지를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이유에서건 창조적 온전함을 누리지 못하는 이를 보시면 당장 그를 고쳐 주고 싶어하십니다. 치유와 회복으로 하느님께서 그에게 부여하셨던 창조 때의 충만함을 되돌려 주시려는 겁니다. 그 온전함과 충만함이 그에게 평화를 되찾게 해 줄 것이고, 그는 행복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율법 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은 앓는 이의 고통이나 갈망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안식일에까지 손을 쓰지 않아도 그는 여태까지 그래 온 것처럼 불편하고 고통스런 채로 꾸역꾸역 살아갈 거라 여길 테지요.
그들에게는 한 사람의 평화와 행복보다 지켜야 할 제도와 형식이 더 중요한가 봅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예수님에게보다 오히려 율법 수호자인 그들에게 올가미일 수 있겠네요. 자칫 그 좋은 율법이 하느님의 마음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냉담해지라고 악이 놓은 함정이 될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루카 14,5)
타인의 고통보다 율법이 먼저인 이들에게 예수님은 아버지로서의 자애, 목자로서의 연민을 일깨우시려 예까지 드십니다. 혹 앓는 이와 관계가 없다고 여겨서 한없이 냉정할 수 있는 거라면, 사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을 중심으로 서로 관계가 있다고 깨우쳐 주시려는 겁니다. 사랑이신 분이 사랑하지 않으려는 애쓰는 이들을 보는 심정이 얼마나 안타까우실지요...
제1독서에서는 사도 바오로가 예수님의 바로 그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커다란 슬픔과 끊임없는 아픔이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로마 9,2)
사도는 세상 어느 민족보다 앞서 하느님의 특별한 선택과 초대를 받았던 동족 이스라엘의 완고한 마음 때문에 슬퍼하고 아파합니다. 동족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저주를 받아도 괜찮다고 할 정도로 동포에 대한 사랑이 크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 영광, 여러 계약, 율법, 예배, 여러 약속이 그들에게 주어졌습니다."(로마 9,4)
유다인들에게 진즉에 주어졌던 이 어마어마한 은총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고착이 더더욱 안타까운 게지요.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여부에 따라 이스라엘이 이미 받은 것들은 자칫 약이 아니라 독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우리 각자가 주님에게서 받은 특별한 은총들이 평화와 행복을 갈망하는 주위의 이웃들에게 사랑으로 흘러나가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하느님 사랑을 막는 법은 없답니다. 하느님의 도구가 되어 사랑의 통로로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말씀 나누기 - 연중 30주 금요일-거절당하는 실패보다 큰 포기하는 실패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오늘의 복음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1년 10월 31일 연중 제31주일 나해 (0) | 2021.10.31 |
---|---|
2021년 10월 30일 연중 제30주간 토요일 (0) | 2021.10.30 |
2021년 10월 28일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0) | 2021.10.28 |
2021년 10월 27일 연중 제30주간 수요일 (0) | 2021.10.27 |
2021년 10월 26일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0) | 2021.10.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