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19일 연중 제25주일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마르코 9,30-37)
“If anyone wishes to be first,
he shall be the last of all and the servant of all.”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신우식신부-
그리스도인의 삶은 십자가의 체험과 떼어 생각할 수 없습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마태 16,24 참조)에 대한 성찰은,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정체성대로 살고 있는지 판단하는 ‘척도’가 될 수 있습니다. 때로 끝없이 계속되는 듯한 십자가 체험은 우리를 한숨짓게도 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그러한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다. “의인이 정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도우시어, 적대자들의 손에서 그를 구해 주실 것이다.” 주님께서 함께하시니 우리는 인내로 이 시간을 잘 견뎌 내야 합니다. 제2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이 인내의 열매가 어떻게 드러나는지 알려 줍니다. “의로움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이들을 위하여 평화 속에서 심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십자가의 체험’에 대하여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죽음 뒤 사흘 만의 부활에 대해서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여전히 현세적 명예가 중요한 제자들은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며 서로 논쟁을 벌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하고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말씀 안에서, 성체 안에서, 그리고 어린이와 같은 약한 이들 안에서 당신을 발견하고, 당신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세상 것만을 추구하지 말고, 저마다 자기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인내하여 구원의 길로 들어선다면, 하느님 나라를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
내 이웃은 어떻습니까?
-키엣대주교-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
하느님을 거역한 인간은 점점 오만해졌는데 하느님은 언제나 겸손으로 인도하십니다. 세상에 내려오신 예수님은 언제나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찾아야한다는 것을 몸소 실천하며 보여주셨고 진정한 겸손과 순종을 알려주셨습니다. 자신을 낮추는 겸손과 나약한 사람을 주님의 이름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러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
강요가 아니라 자발적인 섬김이 진정한 사랑의 사회로 변화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특권을 포기할 권리를 가진 사람들이 변화되어야 사회는 변화합니다. 특권층이란 꼭 권력층만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상대적인 것입니다. 나보다 약한 사람에겐 나도 특권층일 것입니다. 강한 사람은 나약한 사람을 이끌고 큰 사람은 작은 사람을 위해 무릎을 굽혀야 합니다. 권력은 권한을 가진 사람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해서만 사용되어야 합니다. 지위란 단지 업무와 책임을 분배할 때만이 합리적으로 사용되어야 하며 각자 주어진 일은 전체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일이어야 합니다. 서로가 경쟁 상대가 아닌 사랑하고 도움을 주는 너와 나의 관계가 될 때 따뜻한 사회가 될 것입니다.
주님의 겸손을 따르는 새로운 사회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나약한 사람은 돌봄을 받아야 하는 관심의 대상이고, 가난한 사람은 사랑과 존경을 받아야 하는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들이 바로 하느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은 실로 많은 깨달음을 주지만 감히 따라 할 수 없는 가르치심입니다. 아직도 내 마음속에는 다른 사람 위에 서고 싶은 마음이 남아있습니다. 더 높은 곳을 보느라 옆과 아래를 돌아볼 수 없습니다. 주님의 자녀이지만 아버지의 길과 다른 권력의 사회로 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멀어져가고 있는 우리에게 주님은 돌아오라고 하시지만 그 말조차도 귀 담아 듣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보다 내 생각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더 이상 멀리가면 돌아오는 길은 지금보다 훨씬 힘든 길이 될 것입니다. 작고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지위를 놓아버림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가져야합니다.
어렵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 지금 내 이웃은 어떤 모습입니까? 힘들고 외롭게 살아가는 이웃에게 잠시나마 따뜻한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그래서 그들이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한번만 더 눈길을 주십시오.
나의 작은 행동과 관심, 따뜻한 마음이 사람들에게 평화를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주님의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온유와 겸손의 주님, 아버지이신 주님과 멀리 떨어져 가고 있는 저희가 아버지 주님의 길로 돌아갈 수 있도록 아버지의 겸손과 사랑을 닮게 하여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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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명절과 성탄절에 고아원과 양로원을 찾아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일은 무엇입니까?
2. 주님의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묵상해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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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세상에서 가장 운 좋은 사람으로 뽑힌 인물이 있습니다. 1929년 크로아티아에서 태어난 ‘프란 세락’이라는 인물인데, 그의 좋은 운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열차가 탈선해서 한겨울 차가운 강에 빠져서 17명이 사망했지만, 그는 팔이 부러지는 상처만 입었습니다.
2) 처음 타 본 비행기가 추락해서 19명이 사망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건초더미 위에 떨어져 목숨을 구했습니다.
3) 그 후에도 버스가 강에서 떨어지거나, 운전하던 승용차가 폭발하는 등 다섯 번의 사고가 있었어도 매번 죽음에서 벗어났습니다.
4) 자신의 다섯 번째 결혼식을 기념하기 위해 복권을 샀는데 1등에 당첨되었습니다.
진짜로 운 좋은 사람일까요? 교통사고를 아예 당하지 않는 것이 더 운 좋은 것이 아닐까요? 또 다섯 번의 결혼을 했다는 것은 네 번의 이별을 했다는 것인데 어떻게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거액 복권 당첨자의 불행이 자주 소개되는 것을 보면, 복권 당첨도 행복하다고 볼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아무 일 없는 것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사람이고 가장 운 좋은 사람이 아닐까요? 왜 특별한 행복을 찾을까요?
세상의 관점은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에 맞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관점은 세상의 관점과 정반대입니다. 그래서 일상의 평범함에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자들은 누가 큰 사람이냐는 문제로 서로 다투고 있었습니다. 세상의 관점으로만 하늘나라를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관점을 뒤집는 말씀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직접 실천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외 아드님인데도 불구하고 그 고통스러운 수난을 당하시고, 또 발가벗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수치스러운 죽음을 다 받아들이셨습니다. 세상의 어떤 권력자도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사랑이라는 이유로 모욕을 당하고, 매를 맞고, 그것도 모자라서 자신의 생명까지도 내어 주는 권력자가 어디 있습니까?
사랑이 담긴 주님의 관점을 따를 때, 하늘나라에서 첫째 자리에 앉게 될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선택이 남았습니다. 세상의 첫째 자리를 차지하겠습니까? 아니면 하늘나라에서의 첫째 자리를 차지하겠습니까?
세상의 첫째 자리를 얻기 위해서는 각종 조건이 많습니다. 능력도 좋고, 돈도 많고, 또 운을 비롯한 그 밖의 많은 조건이 충족되어야 세상의 첫째 자리를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하늘나라에서의 첫째 자리는 딱 하나, 사랑만 있으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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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아직 못하고 있지만, 매년 국내외 성지순례를 하고 있습니다. 이 순례 중에서 기억나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성지의 주차장에 차를 세워 놓고 성지로 걸어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맞은 편에 순례객으로 보이는 사람 둘이 내려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성지 문이 자물쇠로 닫혀 있어요.”
몇 차례 방문했었던 곳인데, 이곳을 특별히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 늘 문이 열려 있었던 곳으로 기억되었습니다. 그런데 닫혀 있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순례객들과 함께 내려갈까 했는데, 그래도 힘들게 여기까지 왔으니 문 앞까지라도 가야겠다 싶어서 혼자 올라갔습니다.
정보를 알려 준 순례객의 말처럼 문은 닫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혹시’라는 생각으로 자세히 보니, 자물쇠가 걸려는 있지만 문이 움직이지 못하게만 했을 뿐 열려 있는 것입니다. 앞선 순례객은 문에 자물쇠가 끼워져 있는 것만 보고서 그냥 포기했었던 것이지요.
시도도 하지 않고 ‘안 돼’라는 생각으로 포기했던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시도도 해보지 않고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하느님의 일은 더욱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늘 가능한 일을 우리에게 시키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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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자년에게 알려주어야 하는 유일한 인생의 방향: 십자가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외면하는 제자들이 어떤 모습이 되는지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부활에 대해 말씀하시지만,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도 못하고 알아들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당신 수난과 부활은 모든 인간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따라야 할 구원의 표지판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습관상 하늘을 보기보다는 땅을 보며 걷습니다.
하늘엔 죽어야 산다는 표지판이 있고, 땅엔 그저 이전 사람들이 남긴 발자국이 있습니다. 표지판을 따라 사는 사람은 인생의 길에 방향이 분명 있음을 믿는 사람이고, 땅을 보는 사람은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을 믿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길을 만든 사람이라면 표지판을 공중에 달아놓는 법입니다. 발자국을 남긴 사람은 길을 만들지 않아 방향을 모릅니다. 그래서 발자국을 따라가다가는 그 끝이 어떤지 알지 못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마련하신 표지판보다는 이전 세상에 살았던 사람들이 남겨 놓은 발자국을 따르려 합니다. 바닥만 보는 사람은 당장 넘어지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저 지금의 생존을 위해 소유하고 강해지는 것만을 원합니다. 그러며 서로 누가 더 높은지를 두고 다툽니다. 그러다보니 그 생존경쟁 안에서 이웃에 대한 포용력과 이해력을 잃어버립니다.
예수님은 어린이 하나를 그들 가운데 세우신 다음 그런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곧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는 나의 생존에 아무 도움도 안 되고 오히려 신경만 쓰입니다. 당시 어린이는 과부처럼 귀찮은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따라서 어린이를 받아들인다는 말은 그 어린이 때문에 나를 희생한다는 뜻과 같습니다. 십자가로 자기를 죽이는 삶이 아니면 그런 어린이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을 받아들여서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희생을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받아들인 사람이기에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부모는 자녀의 발걸음을 가르치는 스승입니다. 그런데 걸을 때 땅을 보도록 가르치는 부모가 있는가 하면 하늘을 보고 걸으라고 가르치는 부모가 있습니다.
‘히틀러’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까? 그렇다면 히틀러의 아버지는 히틀러에게 어디를 보며 걸으라고 알려주었을까요? 땅일까요, 하늘일까요?
아돌프 히틀러의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는 술을 좋아하고 권위주의적이었으며, 난폭했습니다. 특별히 그는 ‘출세 지향적 성향’의 아버지였습니다.
그는 농부 집안에서 태어나 13살 때부터 구두닦이로 시작해 세관 공무원 과장직까지 오른 사람입니다. 생존만을 위해 산 사람이고 그것을 자녀들에게도 강요했습니다. 그래서 히틀러도 자신처럼 실제적이고 분별 있고 현실적이며, 비종교적이고 비정치적이며 안정적이고 근면한 공무원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는 화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여기에서 마찰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히틀러는 아버지에게 심한 폭력을 당하며 컸습니다.
하지만 히틀러는 여전히 하늘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사망하자 미술의 꿈을 꿉니다. 그러나 미술에 소질이 없음을 깨닫고 결국엔 아버지의 발걸음을 쫓아갑니다.
그 후 아버지의 소원대로 군인이 되어 고위 공무원 자리에 오르고 결국 독일 총통이 됩니다.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그렇게라도 인정받고 싶었던 것일까요? 히틀러가 군대에서 마치 아버지처럼 인정받기 전까지는 무엇을 해도 사람들과의 충돌 때문에 제대로 해내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총통이 되어 수많은 사람을 죽이는 큰일을 벌이게 됩니다.
방향이 없는 길은 없습니다. 인생도 동물처럼 그저 생존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주어진 길이 있다고 믿는다면 하늘을 보게 해야 합니다. 하늘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달려있습니다. 죽어야 부활하여 영원히 산다는 표지판이 있습니다. 생존만을 위한 삶은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길을 만든 사람이 표지판도 만듭니다. 그리고 표지판은 항상 공중에 달려있습니다. 모든 방향은 하늘에 있습니다. 달에도 있고 별에도 있고 표지판도 그렇고 등대도 그렇습니다. 생존을 위해 살라고 가르치는 부모는 자녀에게 삶의 표지판을 보지 못하도록 눈을 가리는 사람입니다.
히틀러와는 반대로 이 시대에 가장 많은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린 ‘마더 데레사’의 부모님은 어땠을까요?
마더 데레사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가 지역 유지였고 교회에 많은 후원을 하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10살 때쯤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십니다. 그 이후로 어머니에게 키워졌는데 그 어머니는 십자가를 지워주는 분이셨겠습니까, 아니면 치워주는 분이셨겠습니까? 대답은 정해져있습니다. 마더 데레사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이렇습니다.
“어머니를 떠오를 때마다 ‘거룩’이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말씀과 행위가 거룩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힘든 생활에도 불구하고 가진 것을 곤경에 처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과 나눌 때 큰 기쁨이 있다는 것을 가르쳤고, 말이 아니라 실제로 알코올 중독 여성, 버림받은 노파를 돌봐줌으로서 행동으로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가난한 사람들이 문간에서 음식을 청할 때 자신이 먹을 것이 모자라도 반을 떼서 주시며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얘들아, 누군가에게 좋은 일을 할 때는 말 없이 하여라. 바닷물 속에 돌을 던지듯 말이다.”
선행하고 알리지 말라는 말은 십자가에 자신을 죽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마더 데레사가 18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께 하느님께 온전히 속하기 위해 선교사가 되겠다고 말했을 때, 어머니는 하루 동안 홀로 기도한 후에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얘야, 예수님의 손을 꼭 잡아라. 죽을 때까지 그분과 함께해라. 하느님만을 위하여 살아가려무나. 성모님은 네가 하느님이 원하시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거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십자가의 삶입니다. 그러나 부활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표지판입니다. 마더 데레사의 부모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이 그리스도임을 믿고 그분을 바라보게 하였습니다. 자기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인간이 무엇이기에 인간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합니까? 길을 만든 사람은 길 위가 아니라 하늘에 방향을 표시합니다.
인도의 ‘디팩 쵸프라’는 자신의 아들 둘에게 어렸을 때부터, “너희는 어떻게 하면 이웃을 행복하게 해 줄지만을 생각해라. 나머지는 아버지가 다 책임지겠다.”라고 가르쳤습니다.
큰아들은 학교도 안 가고 마을 어른들을 도와주다가 큰 사업가가 되었고, 둘째아들은 학교에서 꼴찌들에게 공부 가르쳐 주다가 하버드 교수가 되었습니다.
하늘을 바라보게 한다는 것은 창조의 법칙을 보라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창조자의 본성은 사랑입니다. 사랑 없이 창조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랑은 십자가의 희생입니다. 디팩 쵸프라는 자녀들에게 바로 그것을 바라보도록 교육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녀를 키울 때 무엇을 바라보도록 교육합니까? 이웃의 행복입니까, 당장 나의 행복입니까? 많은 자녀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드는 법을 잊어버립니다. 그렇게 땅만 보고 교육받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자신을 죽이는 십자가를 지게 할 수 있을 때 정말 세상에서도 성공하고 이웃과도 행복하게 지내며 천국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자녀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볼 수 없게 되면 히틀러와 같은 사람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렇게 만든 부모 자신의 책임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제가 군대에 있을 때 상관이 두릅이 많다며 따러 들어가자고 해서 쫓아 들어갔다가 지뢰를 밟아 죽을 뻔한 적이 있습니다. 지뢰밭이라는 표지판을 못 보고 뛰어 들어간 것입니다.
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것을 좋아하면 눈을 들어 표지판을 보지 못하는 눈먼 자녀로 만듭니다. 땅은 생존을 위한 집착의 상징입니다. 하늘은 십자가와 부활의 상징입니다. 죽어야만 살 수 있다는 유일한 진리와 생명의 길을 알려주는 부모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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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신부-
‘끝나지 않은 전쟁, 끝나야 할 전쟁’이라는 내용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4개의 분단국가가 생겼습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전범국가로서 분단이 되었습니다. 아시아에서는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대한민국과 베트남이 분단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는 영세중립국을 선언하면서 1955년 통일하였습니다. 베트남은 미국과의 전쟁을 거치면서 1976년 통일하였습니다. 독일은 1990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통일하였습니다. 대한민국은 1950년 시작되었던 한국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정전상태입니다. 우리는 1945년 이후 76년 째 분단된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통일이 된다면 군사분계선은 생태계가 잘 보존된 평화공원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아이들은 평양으로, 백두산으로 소풍 갈 수 있습니다. 북한의 아이들도 서울로, 설악산으로 소풍 올 수 있습니다. 우리의 수출품은 멀리 배로 돌아가지 않고, 기차로 빠르게 유럽으로 갈 수 있습니다. 북한의 풍부한 자원과 노동력이 남한의 기술과 조직이 만나면 더욱 풍요로운 나라를 만들 수 있습니다.
잠시 생각해 봅니다. 어째서 다른 나라들은 분단의 장애를 이겨내고 통일을 이루었는데 대한민국은 아직도 분단된 나라에서 살고 있을까요? 물론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남과 북으로 갈라놓은 것이 가장 큰 원인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한 답변이 되지 않습니다. 당시에 분단되었던 나라들은 모두 통일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종전협정을 맺지 못하고, 분단된 나라에서 살고 있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민족의 통일보다는 이념의 통합을 이루려했던 내부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세력과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세력 간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해방된 조국이 또다시 강대국들에 의해서 일정기간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념의 벽을 넘지 못한 대한민국은 결국 남과 북이 각자 정부를 수립하였습니다. 물론 지금도 대한민국의 통일을 바라지 않는 강대국들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념의 벽을 넘어, 분담의 담장을 허물려는 의지가 있다면 언젠가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통일된 세상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제1독서는 공동체가 분열되는 모습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의인에게 덫을 놓자. 그자는 우리를 성가시게 하는 자, 우리가 하는 일을 반대하며 율법을 어겨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나무라고 교육받은 대로 하지 않아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탓한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통일을 이루려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북한에는 조만식, 남한에는 김구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김구선생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통일하면 살고 분열하면 죽는 것은 고금의 철칙이니 자기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하여 조국의 분열을 연장시키는 것은 전 민족을 사갱(死坑)에 넣는 극악극흉의 위험한 일이다. 한국이 있고야 한국 사람이 있고, 한국 사람이 있고야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또 무슨 단체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삼팔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그러나 통일된 조국을 꿈꾸었던 사람들은 덫에 걸려 그 꿈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우리가 독립운동을 기억하듯이, 통일을 위해서 노력하였던 분들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의 제2독서는 공동체 분열의 원인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시기와 이기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행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 시기와 이기심 그리고 부당한 욕정 때문에 공동체가 분열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정권을 연장하기 위하여 인권을 유린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체제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정당한 재판도 없이 수용소에 가두고 강제노동을 시키는 일이 있었습니다. 무고한 사람을 간첩으로 조작하여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습니다. 검사는 사건을 조작하였고, 판사는 정권의 입맛에 맞는 판결을 하였습니다. 노동운동, 통일운동, 인권운동은 불온한 사상으로 매도되었고, 언론은 정권의 뜻에 따라서 보도하였습니다. 깨어 있는 시민들의 희생과 노력으로 국가와 민족을 위한 정부를 만들어야만 우리의 후손들에게 자랑스러운 통일된 나라를 보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지금 내 마음에 갈등과 분열의 바람이 분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뜻을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속한 공동체가 대립과 분열을 겪고 있다면 이 또한 예수님의 뜻을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뜻을 따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참된 평화를 누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언젠가 통일된 대한민국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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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떠납니다. 천상에서 다시 만납시다!
-양승국신부-
천주교 박해시대 당시 조선이란 땅은 동방 선교사들에게 '죽음의 땅'이었습니다. 일단 들어가면 100% 죽음이 확실한 사자굴과도 같은 선교지가 조선이었습니다. 따라서 조선에 선교를 지원했던 서방 선교사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조선으로 입국했지요.
조선으로 떠나기 직전 선교사들은 죽음 준비 작업을 하였습니다. 아쉽고 송구스런 마음을 겨우 달래며 부모님과 지인들에게 마지막 편지를 씁니다.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는 작별 편지를 말입니다. 편지지 위로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집니다.
이윽고 떠나기 직전입니다. 동료사제들, 주교님께 마지막 하직 인사를 올립니다. 아무런 말이 필요 없습니다. 이승에서는 마지막이 될 깊고 힘찬 형제적 포옹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서로 말없이 바라보며 고개만을 끄덕이며 마지막 눈인사를 주고받습니다.
“먼저 떠납니다. 천상에서 다시 만납시다!”
“그래요. 먼저 가세요. 저도 준비되는 대로 뒤따르겠습니다. 꼭 뜻을(순교) 이루길 바랍니다.”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들의 발걸음은 그야말로 형극의 길이자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선교사들의 조선행(朝鮮行)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무죄한 어린 양의 발걸음이었습니다. 조선 땅에 발을 들여놓았던 모든 선교사들의 길은 오직 처절한 십자가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음을 뻔히 알면서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예수님의 길과 같습니다.
이런 선교사들에게서 사제수업을 받으셨던 김대건 신부님 역시 동방 선교사들의 전통과 분위기를 잘 파악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김대건 신부님 입국 역시 목숨을 건 길, 일단 들어오면 100%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꿈결에서 조차 그리웠던 고국산천, 입국을 위해 그 숱한 나날들을 기다려왔던 조국인데, 이제 그 고향 땅에 들어가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처참한 죽음이라니…. 참으로 비극적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박해가 가라앉을 때까지 좀 기다렸다가 천천히 입국할 수도 있었습니다. 박해의 세월이 지나가기를 기대하면서 다른 학문을 공부할 수도 있었습니다. 아쉽지만 입국을 뒤로 좀 미루고 중국에서 사목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님 뇌리에는 오직 목자 없이 길 잃고 방황하는 동포들의 고통만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목자가 없어 서러운 민중들 한가운데로 한시라도 빨리 투신할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이번 한 주간, 김대건 신부님과 동료 순교자들처럼 죽기 살기로 하느님께 봉헌된 삶을 살지는 못하더라도 평소보다 좀 더 희생하고 좀 더 자신을 죽이는 '작은 순교'를 실천하는 날들이 되길 기원합니다.
이 시대, 피를 요구하는 절박한 순교상황은 맞이하기 어렵습니다. 순교 기회를 잡기가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순교자 후예로서 어떤 방식으로 순교 영성을 살아야 할까요? 일상(日常)에서 순교입니다. 매일 고통과 십자가를 기꺼이 견뎌내는 일입니다. 매일 좌절과 방황을 훌훌 털고 일어서는 일입니다.
이 시대 순교는 병인박해나 기해박해와 같은 대사건을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 매일의 삶 가운데서 하느님을 증거하고 하느님으로 인해 당하는 고통이나 시련을 기쁘게 참아냄으로써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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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지혜3,1-9 ; 로마8,31-39 루가 9,23-26)
현대의 순교
-반영억신부-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 주셨습니다(1요한4,10-12).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또한 그분의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4장 16절에서는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고 십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기를 바랍니다.
우리 신앙의 씨앗인 순교자들은 주님을 사랑하기에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놓았습니다. 그분들의 신앙을 본받고 지금 삶의 자리에서 순교의 삶을 살기를 기원합니다.
순교란 신앙을 증거하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것을 말합니다.
한국 천주교회사에는 무수한 순교자들이 등장하는 데 그들은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면서 믿음의 가르침을 사랑으로 실천하였고 주님께서 허락하신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며 자신의 목숨을 바쳤습니다. 미래에 대한 확고한 희망이 현재의 모든 시련과 고난을 극복케 하였습니다.
1독서의 말씀 그대로 입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지혜3,9). 그들은 온전히 주님을 의지했고 사랑 안에 살고 은총과 자비를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혹 위험이나 칼입니까? 우리의 처지는 ‘우리는 종일토록 당신을 위하여 죽어갑니다. 도살당할 양처럼 천대 받습니다’라는 성경 말씀대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도움으로 이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 그 어떤 것도 우리 주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로마8,35-37).고 한 바오로 사도의 고백을 몸으로 할 수 있었습니다. 이 마음이 순교자들의 공통마음입니다.
천주교는 초기에 사교, 곧 사회에 해를 끼치는 못된 종교로 단정 되었고 이 사교를 뿌리 뽑는 것이 나라의 정책이었기 때문에 천주교와 관계를 맺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받아들였고 온갖 희생을 무릅쓰고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성사를 본다든지, 미사참례를 하는 것이 너무도 어려운 상황이었고 박해를 피해 깊은 산골로 가서 교우촌을 형성하며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렸지만 마음만은 풍요로웠고 추호도 하느님을 원망하는 기색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서로 돕고 위로하며 사랑과 인내로써 고난을 이겨냈습니다. 그들은 미래에 대한 신념이 확고했기에 영원한 생명을 고대하며 오늘을 살았습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시편126,5-6). 옛 말에도 ‘봄에 씨 뿌리지 않으면 거둘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풍요로운 수확을 생각하면 지금의 어려움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받지 않을 것이다. ….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지혜3,1-5).
우리도 고통 속에 하느님의 축복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서는 “나는 하느님을 위하여 죽으니 내 앞에는 영원한 생명이 시작할 것입니다” 하며 “부디 서로 우애를 잊지 말고 서로 도웁시다. 몸은 비록 여럿이나 마음으로는 한 사람이 되어 사랑을 잊지 마십시오”하며 하느님을 위한 죽음이 영생이라는 믿음을 지켰습니다. 김성우 안또니오는 박해 속에서 “나는 천주교인이요,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을 것이오.”하면서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이순이 누갈다는 옥중수기에서“앉거나 눕거나 구하는 바는 오직 치명의 은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 순교성인 중 가장 나이 어렸던 유대철 성인은 1814년 기해박해 당시에 스스로 포도청에 찾아가 천주굣ㄴ자라고 밝혔고 옥리들이 담뱃대를 불에 달구어 쇠끝으로 그의 살을 지졌지만 태연자약하게 고통을 이겨냈습니다.
1791년 신해박해로부터 1866년 한불 수호조약으로 종교의 자유를 얻기까지 모진 박해 속에서도 신자수가 늘어갔습니다. 그것은 감옥에 갇히고 처형당하면서도 하느님을 찬양하며 평화롭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배교를 강요당하면서도 그들은 결코 타협하지 않고 영생을 그리며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씨앗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풍요 속의 빈곤입니다. 성경도 있고, 성직자도 많고 신앙에 관련된 자료를 찾고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얻을 수 있지만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타협도 합니다. 신자나 비신자나 구별이 없습니다.‘남들도 다 이렇게 하는데 뭐!’, ‘나만 이러면 손해 보는데?’,‘바보소리 듣는데’하면서 합리화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예’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해야 합니다. 세상과 타협하고 이권과, 재물과 명예와 위신, 체면, 심지어 취미생활과도 타협한다면 그 안에 주님의 모습은 자리할 수 없습니다. 내 삶의 모습 안에 주님이 비쳐지지 않으니 어떻게 신자가 늘어나겠습니까?
오늘 복음을 통해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가9,23-24)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는 것은 힘들게 고생하며 따라오라는 말씀이 아니라 순간마다 자신의 뜻을 비우면서 따라오라는 말씀입니다. 타협하고 싶은 마음들이 십자가 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고 하느님을 선택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사람에게 은총과 자비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지혜3,9).
선조들은 피의 순교를 통해 신앙을 증거하고 지켰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분들이 물려주신 신앙을 땀의 순교로 지켜야 할 때입니다.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주님의 사랑을 전하고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일상 안에서 분명히 ‘예’할 것은‘예’하고,‘아니오’할 것은‘아니오’하면서 주님을 과감히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자, 제가 한마디 하면 ‘그래도 사랑하여라’ 하고 답하십시오.
그가 원수 같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그가 나를 욕하고 다닌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그를 만나고 싶지 않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그를 만나기만 하면 상처 받는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그가 말을 함부로 한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그가 너무 이기적이고 안보면 편하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그를 보면 정말 밥맛이 떨어지고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그를 도무지 사랑할 수 없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정말 내 맘에 들지 않아도 사랑하십시오. 사랑스러워질 때까지 기다리지 마십시오. 어쩌면 그 날이 안 올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지금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모든 사람을 변하게 만듭니다. 사랑은 새로운 사람으로 바꾸는 놀라운 능력을 그 안에 담고 있습니다. 사랑은 그 안에 하느님을 담고 있기에 하느님께서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랑으로 내 의지를 접고, 내 생각을 죽이고 주님의 생각으로, 주님의 입으로, 주님의 손발로 움직인다면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순교입니다. 사랑의 순교입니다.
성 알퐁소는 “당신이 저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라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시오. 저는 저의 뜻을 버리고 당신의 뜻에 저의 뜻을 맞추겠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도 “만일 어떤 사람이 일생을 통하여 자기 의지를 희생으로 바쳤다면 그 사람을 감히 순교자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사랑의 순교자가 되십시오. 일상의 삶의 온전한 봉헌을 통해 땀의 순교자가 되십시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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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순교 성인 대축일
복음: 루카 9,23-26: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
-조욱현신부-
오늘은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피를 흘려 순교하신 이 땅의 순교자들을 기리는 날이다. 순교라고 하는 것은 신앙이나 진리를 증거하기 위하여 죽임을 당하거나 중형을 감내함을 뜻한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형벌이 순교자를 만들지 않고 원인이 순교자를 만든다.”라고 하였다. 즉 당하는 고통 그 자체보다는 그 지향하는 바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이 순교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므로, 하느님을 만물 위에 사랑하는 애덕에 근거를 둔 것이기 때문에 가장 완전한 신앙의 행동이다. 현 지금의 상황은 우리 선조들이 박해를 받던 그러한 시절은 아니다. 지금의 참된 순교 정신이란 나 자신을,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온전히 포기할 수 있는, 나 자신을 죽일 수 있는 그래서 참 부활의 기쁨을 느끼면서 사는 것이다.
우리 한국 교회의 특징은 세계의 교회사상 유례없는 자생적 교회라는 것이다. 선교사에 의해서 전래한 교회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1779년 천진암 주어사에서 광암 이벽을 중심으로 시작된 강학회를 통하여 진리에 관한 연구가 시작되어 1784년 이승훈 베드로가 첫 세례를 받은 후 1836년 프랑스 선교사들이 올 때까지 두 분의 중국인 선교사가 잠시 활동했을 뿐 성직자 없이 오랫동안 신자들만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교회가 가꾸어져 왔다는 것이다. 교회는 그 후 100년 이상 혹독한 박해를 받았다. 여기에서 나온 순교자들이 만 오천여 위가 있다. 그중에 많은 분이 기록이 없이 순교하였기 때문에, 순교 성인의 반열에 들지 못한 분들이 많은 것이다. 지금 다시 교회는 순교자 시복 시성 움직임을 활발히 하고 있다. 이렇게 많은 순교자의 피가 거름이 되어 오늘의 교회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의 자세를 말씀하고 계시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는 조건은 바로 수난당하고 돌아가신 스승을 닮는 것이다. 그 한 가지는 “자기 포기”와 “십자가를 받아들임”이다. 자기 포기라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어서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귀중한 것이지만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 그 귀중한 것을 버리는 것이다. 성직자와 수도자의 서원이 바로 그것이다. 결혼을 포기하는 것이, 만일 나에게 필요 없는 헌신짝을 버리는 것과 같다면 그것은 포기가 아니다. 그냥 필요 없으니까 버리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들은 포기한 것이다. 귀중하고 아름다운 삶이지만, 독신으로 하느님을 선택하기 위하여 다른 하나를 포기하는 것이다. 또 이 자기 포기라는 말은 주님을 따르는데 역행하는 자기를 버린다는 의미이다. 그러기에 우리 인간은 주님을 철저히 따름으로써 자아를 완성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누구든지 주님을 따르려면 자기중심적인 자기를 버리고, 날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예수님은 당신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이루셨고 당신의 영광에 들어가셨듯이 우리 인간은 우리의 십자가 즉 우리 자신이라는 이 십자가를 통하여 나 자신을 완성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하느님과 일치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일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 앞에 자신의 이기가 살려고 한다면 그는 생명을 잃을 것이며, 하느님의 뜻 때문에 자신을 죽이는 사람은 살 것이다(24절). 여기서 우리가 세속적으로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생명을 얻지 못하고 망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25절).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한다면, 거부하는 그것 자체로 이미 우리 자신이 구원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말씀이다(26절).
우리가 오늘 기리는 순교자들의 정신을 이어받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내가 오늘 신앙인으로서 살아가는데, 즉 주님을 따르는데 역행하는 요소가 나에게 어떤 것이 있는가? 나 자신을 성찰하면서 나의 나약한 면을 과감히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죽이는 삶이 바로 그들의 순교 정신을 본받는 것이며, 그들을 올바로 기리는 것이다.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순교자들을 공경한다고 하고, 모든 순교자를 성인품에 올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성인이 되지 못하면, 오늘 기리는 우리 순교성인들과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분들을 기리고 이 축일을 지내는 것은 바로 우리가 그분들과 같은 성인이 될 수 있기 위한 것이다.
이제 우리 이 미사를 봉헌하면서 우리 자신도 순교 정신을 오늘, 이 순간부터 살아 우리도 하느님 앞에서 그들과 함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는 우리 자신이 되기를 결심하고 주님의 은총을 구하면서, 또한 많은 우리 순교자들이 시성 될 수 있도록 기도하도록 하여야겠다.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9, 35)
-한상우신부-
작은 들꽃이
아름다운
계절이다.
가짜가 되는
첫째보다는
꼴찌가 되는
진짜가
더 아름답다.
복음의 기본은
언제나
진실함과
겸손에 있다.
낮아지는
섬김과
우리자신을
제대로 아는
겸손이
예수님을
만나는 참된
기쁨이다.
삶이란
우리자신을
알아가는
겸손의
여정이다.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는
왼편과
오른편이
아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이 자리이다.
주님과
함께하는
오늘이
더 중요하다.
건강한 믿음은
낮아지는
겸손에 있다.
낮아질수록
깊어지는
주님과 우리의
관계이다.
낮아지면
모든 것은
은총이다.
십자가의
겸손이다.
낮아질수록
하느님을
드러낼 수 있다.
하느님을
가리는
장본인이
우리자신임을
알게된다.
낮아지신
예수님의
삶에서
참된 사랑이
겸손임을
다시 만난다.
실패와
아픔을 통해
다시 일어나는
꼴찌들과 함께
꼴찌가 되시는
우리의
주님이시다.
믿음도 희망도
사랑도
낮아지는
기쁨에 있다.
하느님의
피조물임을
다시금 깨닫는
은총가득한
가을 주일이다.
낮아져야
충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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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신부-
한국 교회에 신앙의 초석을 놓은 순교 성인들을 기리며 경축하는 오늘, 미사의 말씀은 의인이 받을 몫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4)
사람이 가장 직면하길 어려워하는 주제가 죽음이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항상 이 죽음이 끼어듭니다. 당신의 신원과 소명을 말씀하실 때에도 수난과 죽음이 늘 언급되고, 당신을 따르려면 십자가와 그 죽음까지 감수해야 한다고 이르시지요.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죽음이란 존재는 어쩌면 참 당연합니다. 죽음이 없다면 지상의 유한한 생명에서 무한의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는 관문이나 경계가 부재하는 것이니까요. 유한한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로서는 하나의 생명을 포기해야만 더 나은 완전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죽음을 건너야만 부활이 있고 영원한 생명이 있으니까요.
제1독서에서는 보통 사람은 깨닫지 못하는 의인들의 행복을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지혜 3,4)
물질과 현세적 안위를 행복의 척도로 보는 사람들 눈에 의인들은 꽤나 기구하고 불쌍한 존재들입니다. 의인들이 신앙과 신념 때문에 포기한 것들이 사실 세상에서 많은 편의를 보장해주니까요. 세상은 의인의 삶을 "죽음, 고난, 파멸"이라 여겨 조롱하거나 업신여깁니다. 육적인 세상의 가치와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행복은 화합하기 어렵습니다.
세속적 자기 영광과 주님께서 주시는 영광, 이 둘을 다 움켜쥘 수 없음은 명백하지요. 육적인 생명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기 위해 "죽음"이라는 관문을 거치듯이, 자기 영광이 죽어야 주님의 영광을 함께 누릴 수 있습니다. 의인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과 희망으로 이를 감행한 사람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지의 영광 때문에 지금 누리는 자기 영광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영원한 생명이 당장은 보이지 않는 까닭이며, 익숙해진 풍요와 안락과 우월감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 죽음이 두려워 아직도 선택의 언저리에서 미적대고 서성이는 이들을 일깨웁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로마 8,35)
죽음처럼 보이는 어떠한 것들도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를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아니, "환난, 역경, 박해, 굶주림, 헐벗음, 위험, 칼" 등등, 이 모든 것은 오히려 그분과 우리를 더 가까이 밀착시켜 주지요. 박해와 순교의 시대에 뜨겁게 타오르던 신앙과 열정이 안정이나 풍요와 더불어 오히려 무뎌지고 온도를 잃어 간 역사가 이를 반증합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영성체송)
주님은 세상에서도 실컷 누리다가 죽음 너머의 영원한 행복까지도 얻고 싶은 탐욕스런 속내를 모르시지 않으면서도, 영적 삶에 발을 들여놓은 이에게는 "증언"을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놀라운 보상까지 마련해 놓으셨지요.
그분께 "제가 당신을 압니다." 한 이는, "나도 너를 안단다." 하는 사랑의 응답을 듣게 될 것입니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 예수님을 증언한 이는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는 성자의 증언을 들을 것입니다. 변호하고 보증하시는 영이 곧 성령이시니, 이 "앎"의 증언이야말로 삼위일체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의 유입이며 영원한 행복입니다.
그때 우리가 듣게 될 "내가 그대를 압니다."라는 주님의 증언은 이 세상의 그 어떤 찬사에 비할 수 없는 영광이 될 겁니다. 이 증언이 바로 잠시 지나는 세상의 쾌락, 안위, 명예와 흔연히 맞바꾸어 얻게 될 몫입니다.
신앙의 초창기에 신앙적 돌봄과 양성을 제대로 누리지 못했음에도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과 사랑 때문에 목숨을 바쳐 주님을 증거한 순교자들께, 나약하고 부족한 우리를 위해 전구해 주십사 청합시다. 우리도 그들처럼 지금 여기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순교의 정신과 결단을 꽃피워 주님을 잘 안다고 증언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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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나누기 - 연중 제25주일-어려울 때의 나의 기도 (ofmkorea.org)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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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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