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9월 15일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Margaret K 2021. 9. 15. 06:52

2021년 9월 15일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고 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함께하신 성모님의 고통을 기억하는 날이다. 자식의 아픔은 어머니에게 더 크게 다가오는 법이다. 시메온은 성모님의 그 고통을 이렇게 예언하였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4-35). 성모님의 고통을 묵상하고 기억하는 신심은 오래전부터 널리 퍼져 있었으며, 1688년 인노첸시오 11세 교황 때 이 기념일이 정해졌다. 1908년 비오 10세 교황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다음 날인 9월 15일로 기념일을 옮겨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과 연계하여 기억하도록 하였다.  

예수의 십자가 밑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레오파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서 있었다. 
(요한 19,25-27)

 

Standing by the cross of Jesus were his mother
and his mother’s sister, Mary the wife of Clopas,
and Mary Magdalen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신우식신부-

 

 예수님의 부모가 아기 예수님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성전에 들어섰을 때, 의롭고 독실한 시메온은 성모님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이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이라 예언하였습니다(루카 2,34-35 참조).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성모 마리아께서는 시메온이 예언한 시간의 가장 중심에 서 계십니다. 십자가 아래의 성모님께서는 그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구세주의 수난에 동참하고 계십니다. 고통은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이고, 인간은 다양한 삶의 고통을 겪습니다. 그러나 이 고통이 모두 의미 없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 수난 성금요일의 수난 없이 파스카의 부활은 없으며, 그리스도의 희생 없이 우리의 구원은 없기 때문입니다. 아드님의 수난을 두 눈으로 목격하신 성모님의 고통은, 이집트에서 피난살이하며 겪은 고통(마태 2,13-15 참조)이나 어린 예수님을 잃어버려서 헤매던 고통(루카 2,41-51 참조)보다 더 크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이 고통을 피하지 않으시고 그대로 받아들이십니다. 그것은 바로 성모님께서, 우리도 우리의 삶의 고통과 마주하여 하느님께서 주시는 더 큰 계획 안에 함께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복되신 동정녀께서도 신앙의 나그넷길을 걸으셨고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아드님과 당신의 결합을 충실히 견지하셨다. 거기에 하느님의 계획대로 서 계시어(요한 19,25 참조), 성모님께서는 당신 외아드님과 함께 극도의 고통을 겪으시며 당신에게서 나신 희생 제물에 사랑으로 일치하시어 아드님의 희생 제사에 어머니의 마음으로 당신을 결합시키셨다. 마침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는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며 성모님을 제자에게 어머니로 주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요한 19,26-27 참조)”(교회 헌장 58항).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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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탄소년단이 빌보드에서 계속해서 1등을 차지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뉴스에도 자주 등장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들의 노래를 한번 들어봐야겠다 싶었습니다. 우리나라 가수가 전 세계 사람들로부터 큰 주목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세련된 복장과 감미로운 노랫소리를 통해 분명히 좋은 노래라는 것을, 사람들이 왜 좋아하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듣는 데 그렇게 편하지 않았습니다. 제 감성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저는 요즘 노래보다는 7~80년대의 노래가 더 좋습니다. 귀도 편해지고, 마음도 편해집니다.

학창 시절에 ‘가요 톱 10’이라는 프로를 보며 상위권의 노래를 테이프에 녹음해서 듣고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는 분명히 순위의 인기 가요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순위보다는 마음이 편해지는 노래에 더 관심이 갑니다.

이제야 분명히 깨닫게 되는 것은 순위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남과 다른 그 무엇이 나를 이 세상에 살게끔 하는 것 같습니다. 비슷한 가운데 1등보다 다른 나만의 모습을 찾는 것이 더 필요했습니다.

오늘은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목격하시는 성모님을 기념합니다. 사실 우리는 성모님의 아픔에 대해서는 잘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성모님의 영광에만 그리고 성모님의 행복만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아들의 수난과 죽음을 직접 당신의 몸으로 받아들이는 아픔을 이겨내지 않고서는 영광의 자리도 있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는 그 순간, 성모님께서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1등의 자리가 아니라 꼴찌의 자리에 있다고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이 모두를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가브리엘 천사에게 했던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말씀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성모님이시기에 예수님께서는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라면서 십자가에서 제자들을 성모님께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는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라고 하면서, 성모님의 모습을 통해 지금의 어려운 순간들을 이겨낼 수 있게 하셨던 것입니다.

세상의 순위를 쫓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주님의 기준을 철저하게 따랐던 성모님의 삶을 기억하면서 살 때 진짜 행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보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보느냐이다(데이비드 소로).

제대로 봐야 합니다.

갑곶성지에 성체 조배실이 있습니다. 성체 조배실 한가운데에는 십자가가 있는데, 맨 뒤에 서서 이 십자가를 보고는 “여기 십자가는 왜 이렇게 정신이 없어.”라는 말씀을 하시고는 등을 돌려 나가십니다. 앞에 가서 자세히 보려고 하지 않고 말이지요.

이 십자가를 만드신 작가는 자그마치 8개월 동안 작업을 하셨습니다. 특히 이 십자가에는 많은 성물이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성물은 본당에서 버려진 폐성물입니다. 이 폐성물을 하나하나 깨끗이 닦아서 정성껏 붙인 것입니다. 그래서 폐성물 십자가, 부활하신 십자가로 불립니다.

뒤에서 보면 정신이 없지만, 이 의미를 듣고 앞에서 보면 감동을 하십니다. 그리고 사진도 열심히 찍습니다.

별것 아니라는 생각은 제대로 보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제대로 본다면 하느님의 손길을 얼마나 많이 발견할 수 있을까요? 대단한 것 투성의 세상임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살짝 보고 별것 아닌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한 번 더 보고, 한 번 더 생각할 때 하느님도 보입니다.

 돈만 많이 주면 출산율이 높아질까?

-전삼용신부-

 

오늘은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성모님께서 그리스도와 함께 받으신 고통을 묵상하는 날입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성모님의 고통을 보답해 주시는 것처럼 요한을 당신 아들로 주십니다.   

 

    십자가 신학에서는 예수님은 교회의 신랑이시고 성모님은 신부이시며 요한은 교회를 상징합니다. 성모님께서 교회의 어머니가 되시기 위해 신랑이신 그리스도께 순종하여 교회를 낳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교회의 어머니라 불림을 받으십니다.

     이것은 성모님께서 고통받으신 것의 보답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편하게 지내셨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동참하여 하느님 자녀들을 낳으셨습니다. 그러니 하늘에서 당신 자녀들을 보시며 참으로 행복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요즘에 자녀를 많이 낳는 것이 더 큰 행복이 될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자녀를 더 낳으라고 하면 어머니들은 ‘당신이 키워줄 겁니까?’라고 물을 것입니다. 그만큼 한 자녀를 더 낳는 것은 큰 고통이 따릅니다.

     

    우리가 다 알다시피 우리나라 출산율은 전세계 최하위입니다. 2020년 우리나라 출산율은 0.84명입니다. OECD 국가 중 출산율 1.0 이하인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습니다. 한국은 현 속도로 가면 2100년경 총인구는 1650만 명대로 쪼그라들고 2300년경이면 100만 명도 안 돼 사실상 국가의 소멸입니다.

  

    옥스퍼드 인구문제연구소 데이비드 콜먼 박사는 우리나라 저출산 문제를 연구하고 코리아 신드롬이란 말을 썼습니다. 그리고 “한국이 지구촌에서 사라지는 최초의 국가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우리나라가 극도로 아기를 낳지 않는 이유를 대부분은 돈이 많이 든다는 것에서 찾았습니다. 그래서 주택정책과 교육을 위한 재정지원 정책으로 어마어마한 액수가 매년 투자되고 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집값만 더 오르고 사교육비는 더 증가합니다. 그리고 출산율은 계속 곤두박질칩니다. 그런데 유럽 나라들은 이런 정책들을 하지 않을까요? 합니다. 다만 우리나라는 효과가 없고, 외국은 효과가 있다는 그 차이입니다.    

 

    오늘은 성모님의 ‘고통’을 묵상하는 날입니다. 성모님의 고통은 교회의 어머니가 되시는 고통이었습니다. 왜 다른 사람들이 아닌 성모님께선 이런 고통을 감내하시길 원하셨을까요? 돈을 많이 줘서였을까요? 아무리 많은 돈을 주어도 자녀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고통을 함께할 어머니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모님의 고통에서 자녀를 많이 낳게 만드는 새로운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이태석 신부님이나 마더 데레사와 같은 분들은 많은 하느님 자녀를 낳으신 분들입니다. 그들은 왜 그런 고통을 감내하셨을까요? 단순합니다. 하느님을 알아 행복하셨기 때문입니다.

     

    한 정글 지역에 있는 개신교 학교에 매우 보기 흉한 소녀가 찾아왔습니다. 흉한 몰골의 그 소녀는 코가 없는 기형아였고 심지어 지적장애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학교의 교감은 그를 환대하고 학교에서 지낼 수 있도록 했습니다. 학교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노래 몇 마디를 배우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것이 코 없는 소녀가 가진 유일한 소질이었습니다.

    

     그러나 몇 달이 되지 않아 아이들과 학부모, 그리고 교사들의 반대로 더는 소녀를 가르칠 수 없었고 그래서 교감은 그 소녀를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소녀는 슬퍼하며 다시 정글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그렇게 소녀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차츰 사라졌습니다.

     

    2년 후, 한 선교회에 정글 마을로부터 복음을 전해 달라는 간절한 호소의 편지가 왔습니다. 선교회는 그 마을의 요청을 받아들여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선교사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은 언덕에 모여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가 오자 몇몇 사람들이 그를 맞이하여 주민 가운데로 인도했습니다.

     

    선교사는 먼저 찬양을 하나 가르치기로 하고 간단한 합창을 하나 소개했습니다. 그러자 300여 명의 원주민은 “우리도 아는데요.”라고 말하며 찬양을 함께 불렀습니다. 선교사는 너무나 놀라 다른 찬양을 불렀는데 역시 그 찬양도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어디서 배우셨나요? 내가 알기로는 지금까지 여러분들에게 복음을 전해 준 선교사는 한 사람도 없었는데 말이에요.” 

 

    선교사는 놀란 듯이 그들을 쳐다보았고, 그들은 한 사람을 손으로 가리켰습니다.

바로 학교에서 쫓겨난 후 모든 사람의 기억에서 사라진 그 소녀였습니다. 그녀는 지적장애인이었지만 자신을 받아준 학교에 대한 감사를 느꼈고 자신이 외운 찬송가를 자기 마을에서 매일 부르고 다녔던 것입니다.

     

    사람은 어떻게 살든 그날그날의 고통을 감내해야 합니다. 누구는 그 같은 고통 속에서도 아이를 더 낳고 누구는 낳지 않으려 합니다. 어쩌면 나와 똑같이 불행한 아이를 더는 낳고 싶지 않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자녀를 많이 낳게 하려면 나라가 나서서 내가 낳는 자녀가 나처럼 행복한 사람이 될 확신을 하게 해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행복한데도 자녀를 낳지 않으면 이율배반이고 수치스럽게 여기는 분위기가 되어야 합니다.

     

    현재 어느 나라가 가장 출산율이 높을까요? 항상 우리나라와 비교되는 이스라엘입니다. 2018년 기준으로 이스라엘이 3.09명이고 그다음이 멕시코 2.13명입니다. 그리고 터키가 1.99명, 프랑스가 1.84명입니다. 꼴찌에서 두 번째가 스페인인데 1.26명이고 한국이 당시 0.98명이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2위 멕시코와의 격차도 상당합니다. 이렇게 가면 이스라엘은 미국처럼 커지고 한국은 지구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복지가 좋을까요? 당연히 좋습니다. 정년이 68세이고 아기를 더 낳으라고 갖은 장려를 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들의 종교와 문화입니다. 그들은 하느님 백성이라는 자존감이 있습니다. 그 자존감으로 똘똘 뭉친 문화 안에서는 자신만 그 행복을 누리고 그래서 또 다른 하느님 백성을 낳지 않는 것을 부끄럽게 여깁니다.    

 

    텔아비브에 유학해 23년째 거주하는 한국 여성 정자은 씨(44)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에는 아이가 삶에 중요하다는 종교적 믿음이 있고 아이를 낳지 않은 여성은 수치스러워하는 독특한 문화가 있다.” 

(출처: ‘출산율 이스라엘 1등, 한국 꼴찌 왜?’, 김세형, 매경 칼럼)

     

    내가 낳은 자녀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에서 영광스럽게 빛나게 될 것을 믿는다면, 그런 확실한 태몽을 꾸었다면 그 아이를 낳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모님도 그렇게 엄청난 고통을 감내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자녀를 낳는 고통을 거부하는 이유는 고통 자체를 원하지 않는 것보다는 그 고통에 대한 확실한 보답이 있을 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녀를 낳아봐야 나처럼 고통만 받으며 살 것 같고, 자녀가 왜 나를 낳았냐고 원망을 할 것 같으니 자녀를 낳지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행복한 사람만이 자신과 같은 행복한 사람을 낳기 위해 고통을 감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행복은 ‘자존감’과 비례합니다. 출산율을 높이려고 아무리 많은 돈을 쏟아부어도 소용없습니다. 그것으로 자존감이 높아지지 않습니다. 자신이 누구냐는 정체성으로 높아집니다. 이는 진화론이 팽배한 나라에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진화론 안에서 우리는 그저 유전자를 나르는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낮은 자존감과 행복감 안에서는 나의 생존이 우선이지 나의 불행을 이어받을 자녀를 낳기 위해 고통을 감내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아무리 선교를 강조해도 선교하지 않을까요?

선교를 강조하며 억지로 고통을 강요할 필요가 없습니다. 먼저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행복을 느끼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도 이 행복을 느끼게 하려고 시키지 않아도 선교할 것입니다. 더 많이 낳게 하려면 그 낳는 사람이 태어난 자녀가 자신처럼 행복해질 수 있다는 확신을 자신이 느끼고 있어야 합니다.

     

    성모님은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영혼 기뻐 뛰놉니다.”라고 노래하셨습니다. 이것이 당신 고통을 감내할 충분한 자존감이었습니다.만약 그렇다면 성모님을 닮은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적어도 그 행복감 안에서 더 많은 자녀가 그 행복에 참여하도록 자신들도 자녀를 낳는 고통을 감내할 힘을 가져야 당연할 것입니다. 내가 너무 받아 행복해서 이 행복을 전하지 않으면 부끄러워 아기를 낳고 선교를 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되어야 합니다.

 -조재형신부-

 

챈스 일병의 귀환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이라크 전쟁에서 숨진 미국 해병대 챈스 일병이 가족의 품으로 가는 여정을 그린 영화입니다고인의 부대에서 장교로 있었던 마이클 스트로블 중령은 고인의 유해를 가족의 품으로 인도하는 일을 자원하였습니다영화는 스트로블 중령이 고인의 유해를 가족의 품으로 인도하는 긴 여정을 꾸밈없이 영상으로 보여주었습니다영화는 고인의 유해를 대하는 미국 시민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고인에게 경의를 표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조국을 위해서 숨진 군인의 귀환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국가의 노력도 보았습니다그런 조국과 국민이 있기에 비록 전쟁터에서 젊은 나이에 숨졌지만 위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그런 조국과 국민이 있기에 사랑하는 아들을 전쟁터에서 잃은 부모님도 슬픔을 넘어 자랑스러웠으리라 생각합니다.

 

지난 광복절에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카자흐스탄에서 조국으로 돌아왔습니다홍범도 장군은 일본의 침략에 맞서서 싸웠던 독립군이었습니다일본군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였던 봉오동 전투를 이끌었습니다일본군을 피해서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홍범도 장군은 소련의 이주정책에 따라 멀리 카자흐스탄으로 갔습니다홍범도 장군은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사회의 구심점이 되었고존경받았습니다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던 홍범도 장군은 조국의 해방을 2년 앞두고 1943년 먼 타국에서 사망하였습니다그리고 사망한지 78년 만에 꿈에 그리던 조국으로 귀환하였습니다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모신 수송기가 우리의 영공으로 들어올 때 대한민국의 전투가가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호위하였습니다비록 먼 타국에서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하고 사망하였지만 그리운 조국으로 돌아온 홍범도 장군은 자랑스러운 조국의 모습을 보며 기뻐하였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늘은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입니다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의 어머니시고승천하셨으며천주의 모친이 되셨지만많은 고통을 간직하고 사셨습니다교회는 성모님의 고통을 성모칠고라고 이야기 합니다. ‘괴로움을 당하리라는 시몬의 예언을 들었을 때이집트로 피난 갈 때예수를 잃고 찾아 헤맬 때십자가를 진 예수를 만났을 때못 박혀 죽은 예수 앞에 섰을 때십자가에서 예수의 주검을 내렸을 때와 묻을 때 겪은 고통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만났습니다성모님의 고통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서 기쁨으로 변하였습니다교회는 위령미사 감사송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분이 당신의 어머니십니다.’ 사랑을 받던 제자는 이제 성모님을 자신의 집에 모셨다고 성서는 전해주고 있습니다우리의 삶은 고통의 바다에 떠있는 작은 배와 같습니다우리가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의 아픔과 갈등고통과 절망을 함께 나눌 수 있을 때우리는 힘들지만 고통의 바다를 건널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조국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고인들의 유해가 그리운 조국으로 돌아오듯이하느님을 믿으며 충실하게 살았던 모든 이들은 천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는 것이 신앙인들의 희망입니다우리가 신앙 안에서 함께 기도하면서 함께 나누면서 살아가면 우리는 고통의 바다를 건너희망의 항구에 도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차라리 내가 대신 저 십자가에 매달렸으면!

 -양승국신부-

 

십자가형이 집행되고 있던 골고타 언덕의 상황은 차마 눈뜨고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습니다. 예수님뿐만 아니라 또 다른 두 명의 사형수들이 흘린 피로 사방이 피비린내로 가득했습니다. 사형수들이 극도의 고통으로 인해 내지르는 비명과 신음 소리가 골짜기 전체에 크게 울려 퍼졌습니다.

  

백인대장의 감독 아래 사형을 집행한 로마 군대 소속 병사들은 총 4명이었습니다. 그들은 사형수들의 목숨이 떨어질 때 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사형수들이 빨리 죽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겠지요. 그래야 사형 집행에 대한 수고비조로 죄수들이 입고 있던 옷을 일당으로 받아들고 퇴근할 수 있었으니까요.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는 무심한 얼굴로 옷의 분배에만 골몰하고 있던 네 명의 병사들뿐만 아니라, 또 다른 네 명의 여인이 서 있었습니다. 병사들과는 대조적으로 슬픔으로 가득한 네 명의 여인, 그리고 그분이 사랑하시는 애제자가 서 있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했던 이 사람들, 특히 성모님께서는, 극심한 내적인 고통을 겨우겨우 참아내며 끝까지, 용감하게 십자가 아래 서 있었습니다. 차라리 내가 대신 저 십자가에 매달렸으면, 하는 마음으로, 예수님께서 지금 겪고 계시는 고통에 영적으로 긴밀히 참여하며, 그렇게 서 있었습니다. 

 

한 가지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마지막 단말마의 고통을 겪는 순간, 숨이 떨어져가는 순간에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아래 서 있는 어머니, 그리고 사랑하는 제자, 남겨질 교회와 양떼인 우리를 걱정하십니다.

  

자신이 지금 겪고 있는 고통 감당하기도 힘겨우실텐데, 자신에게 휘몰아쳐오는 광풍과도 같은 괴로움에 대해서는 일말의 표현도 하지 않으시고, 그저 자신이 떠나신 후 남겨질 사랑하는 사람들을 염려하십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복음 19장 26~27절)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순간 어머니와 사랑하는 제자를 새로운 모자 관계로 연결시켜주셨습니다. 남겨질 신앙 공동체를 위해 성모님은 중개자 역할, 즉 교회의 어머니로서 역할을 지속해나가실 것입니다.

  

이제부터 성모님은 예수님의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넘어서서, 사랑하는 제자의 어머니,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이들의 어머니, 더 나아가서 교회 공동체의 어머니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은혜롭게도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으로 인해 그분의 어머니를 우리의 어머니로 모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세상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과 성모님의 존재로 인해 모두 한 형제요 한 자매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 신앙 안에서, 예수님과 그분의 어머니 안에서 새로운 영적 가족으로 재탄생한 것입니다.

 어머니의 고통을 거울 삼아

 -반영억신부-

 

성모님은 우리의 어머니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곁에 계신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이어서 그 제자들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습니다. 결국 거룩하신 어머니 마리아는 이제 모든이의 구원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아들에 의해 모든이의 어머니가 되신 것입니다. 성모님은 이제 나의 어머니이십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는 시작부터 끝까지 많은 고통을 안고 사셨습니다.

천사를 통해 주님의 잉태를 예고 받지만, 그 자체가 고통입니다. 시대 상황으로 볼 때 결혼하지 않은 처녀가 잉태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주님의 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 달라’고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루카1,38). 그리하여 한동안, 약혼한 요셉으로부터 간음한 여인이라고 오해를 받으셨습니다(마태1,19). 요셉이 남모르게 파혼 하려고 마음을 먹기까지 했습니다. 누우실 한 평 방이 없어서 마구간 말구유에서 해산을 했고(루카2,7) 또한 이집트로의 피난길에 나서야 했던 어머니이십니다.

 

율법에 따라 출산 후 40일 만에 정결례를 거행할 때가 되어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기를 봉헌하면서 시므온의 예언을 접하게 되었는데, “품에 안긴 아기가 많은 사람의 반대 받는 표징이 되어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루가2,34-35)이라는 고통의 예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의 실현을 30년 이상 기다리며 살아야 했습니다.

 

예루살렘 축제 때에는 예수를 잃고 사흘 만에 성전에서 찾았건만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하여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며”(루카2,41-52) 그 구원의 때를 기다리셨습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술이 떨어진 사실을 알렸을 때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2,4)라고 외면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시며 평정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일찍 남편 요셉을 잃고 홀어머니로서 가정을 꾸려야 했거늘 아들도 집을 떠났습니다. 어떻게 보면 홀로 버려졌습니다.

 

어느 날 소문을 듣고 아들을 찾았으나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자매요, 어머니이다”(마르3,33-35).라는 말을 흘려들어야 했습니다.

 

게쎄마니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하는 아들을 지켜봐야 했고, 가시관을 쓰시고 채찍을 맞으시며 골고타 언덕을 오르시는 아들과 함께 십자가를 가슴에 묻어야 했습니다. 제자들과 새로운 자녀 관계를 맺어주며 죽음을 맞이하는 아들을 침묵 속에 받아들이고 끝내는 피에 엉긴 아들을 무릎에 눕혀야 했던 어머니이십니다. 부활의 소식도 다른 사람을 통해 뒤늦게 알아야 했던 어머니는 인간적으로 보면 그야말로 고통에 묻혀버린 분이십니다.

 

성모님은 모든 것을 희생으로 바치셨습니다. 성모님께는 하느님이 당신의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뜻을 헤아리며 모든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겸손과 순명으로! 그러므로 우리도 성모님을 거울삼아 자진하여 고통을 참아 받으며 주님께 온전히 희생을 바쳐야 하겠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생각은 언제나 성모님께서 울고 계시던 구세주의 십자가 곁에 머물도록 하십시오. 항상 성모님과 함께 울도록 하십시오”(교부 푀멘). 힘들고 어려울 때 성모님의 고통보다 더 큰 아픔을 겪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면 위로가 될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성모통고 신심은

14세기 초에 나타났으며 복음서에 근거하고 있다.

이 신심은 처음에 예수께서 올리브동산에서 피땀흘리시는 장면에서부터 수난 전체로 묵상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드러나게 되었는데 이것이 나중에는 성모 칠고로 발전되었다.

또한 '성모 칠고' 신심이 보편화되면서 점차 수많은 묵상과 기도문 그리고 시들이 쏟아져 나와 이 신심을 더욱 고취시켰다.

 

복음서에 근거를 둔 '성모 칠고'는 다음과 같다.

1.시메온의 예언 (루가 2,34-35)

2.이집트로 피난가심 (마태 2,13-21)

3.삼일 동안 예수를 잃으심 (루가 2,41-50)

4.갈바리아로 오르심 (요한 19, 17)

5.예수,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죽으심 (요한 19,18-30)

6.예수, 십자가에서 내리심 (요한 19,40-42)

7.예수, 무덤에 묻히심 (요한 19, 40-42)

 

예수님의 수난이 곧 성모님의 고통이라 할 수 있다.

<성모님의 고통과 슬픔>

 -송영진신부-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 19,25-27).”

 

1)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 때에 제자들이 모두 떨어져 나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마태 26,31), 그들은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모두 스승님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마태 26,33)”

“베드로가 다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스승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모두 그렇게 말하였다(마태 26,35).”

사도들의 말은 ‘진심’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말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습니다(마태 26,56).

그 일은 우리에게, 신앙생활은 ‘말’만 잘한다고 되는 생활이

아니라는 교훈이 됩니다.

신앙생활은 ‘말’이 아니라 ‘삶’으로 하는 생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서 있었던 사람들은

‘말’이 아니라 ‘삶’으로, 또 ‘행동’으로 예수님을 따른 사람들입니다.

<십자가 곁에서 끝까지 예수님을 지켰던 사람들도,

최후의 만찬 때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들었을 것이고,

사도들이 하는 말도 들었을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사도들이 말과는 다르게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난 일을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또 사도들에게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

아마도 성모님께서는 그러면 안 된다고 꾸짖는 말씀을 하시지는 않았을 것이고,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지를 행동으로(삶으로) 보여 주시는 것으로

그쳤을 것입니다.

십자가 곁에 서 계시는 성모님의 모습은,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무언의 가르침’입니다.>

 

2) 원래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은 ‘성모 칠고’를,

즉 성모님의 일곱 가지 고통과 슬픔을 기념하는 축일이었습니다.

<‘성모 칠고’는 “이집트 피난, 시메온의 예언, 성전에서 예수님을 잃으심,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의 만남,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예수님의 시신을 안으심,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모심”입니다.>

사실 성모님께서는 그 일곱 가지의 고통만, 또는 일곱 번의 고통만

겪으신 것이 아니라, 생애 전체가 고통과 슬픔의 연속이었습니다.

물론 성모님의 생애가 ‘기쁜 일’은 하나도 없는 생애였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성모 칠고’와 대조되는

‘성모 칠락’(성모님의 일곱 가지 기쁨)을 말합니다.

<“주님 탄생 예고, 엘리사벳 방문, 예수님 탄생, 주님 공현,

성전에서 예수님을 찾으심, 예수님 부활, 성모 승천”이 ‘성모 칠락’입니다.>

그런데 ‘성모 칠락’의 내용을 보면, ‘성모 칠고’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분명히 ‘기쁨’이지만, ‘슬픔 속의 기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성모님의 고통은 누구를 위한, 또 무엇을 위한 고통일까?

‘성모 칠고’를 보면, 전부 다 예수님의 생애와 수난과 관련된 고통이고,

사실상 예수님의 고통입니다.

예수님의 고통은 ‘인류 구원’을 위한 희생입니다.

따라서 성모님의 고통도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희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에서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성모님도 그런 기도를 바치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 탄생 예고 때 성모님의 ‘응답의 말씀’인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라는

말씀은, 겟세마니에서의 예수님의 기도와 뜻이 같습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라는 성모님의 말씀은, “제 뜻이 아니라” 라는

예수님의 기도와 같은 뜻이고,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라는 말씀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와 같은 뜻입니다.>

 

4) 우리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고, 승천하셨다는 것을 믿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여전히 ‘십자고상’을 우리 교회의 상징으로 삼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벽에 걸어 놓고서 그 앞에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회개와 구원이 미완성 상태여서,

예수님의 대속과 희생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통을 숭배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과 성모님의 고통을 묵상하고 기념하는 것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5) ‘인간의 시간’으로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이천 여 년이 지난 과거의 일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시간’으로는 계속 반복되고 있는 현재의 일입니다.

(우리가 해마다 사순시기를 반복해서 지내는 것은,

단순한 기념이 아니라, 그렇게 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면, 즉 하느님과 예수님의 구원 사업이

완성되고 완료되면, 더 이상 사순시기를 지낼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회개를 해야 할 때입니다.)

성모님의 고통이 단순히 예수님 때문이라면,

지금은 고통과 슬픔에서 완전히 벗어나셨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인류 구원을 위한 희생이고 고통이기 때문에,

성모님의 고통은 오늘도 ‘현재 진행 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성모님께서는 고통과 슬픔 속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특히 회개하지 않고, 멸망을 향해서 가는 ‘고집스러운’ 인간들 때문에,

성모님께서는 안타까워하시고, 고통스러워하시고, 슬퍼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로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성모님께서는 바로 ‘나 때문에’ 고통과 슬픔 속에 계신다는 것.

 

<그런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천국은 행복하기만 한 곳이 아니라,

대단히 슬픈(슬퍼하는) 곳일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지금 천국에 있는 영혼들은 지상에 있는 인간들이 죄 속에서 사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워하고,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 요한 19,25-27: 이분이 네 어머니이시다

 -조욱현신부-

 

어제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이다. 교회는 그다음 날인 오늘을 고통의 성모 마리아를 기념한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다음 날에 지내는 이유는 마리아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음을, 즉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깊이 참여하였음을 드러낸다. 이 축일이 오늘로 확정되기 전에는 성지주일 전 금요일에 행해지기도 하였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구원사업에 있어서 “협력자”로서의 역할을 다하신 분이시다. 예수님을 잉태하고 출산하는 것에서부터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 달리신 그 순간까지 어머니로서의 고통을 감수하시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신 성모님의 모습이다. 우리가 작은 마리아가 될 때, 또 다른 구원의 협력자로서 하느님 앞에 서 있을 수 있지 않겠는가?

 

마리아는 자신의 삶을 항상 그 영혼을 찌를 것이라는(루카 2,35) 시메온의 예언된 예리한 칼에 대한 전망 속에서 살았다. 이 칼이 바로 그의 십자가이다. 이는 이미 파스카 축제 후에 성전에 남아있던 예수를 잃어버림으로 시작되었다(루카 2,41-52). 마리아의 생애에서 절정의 그리고 더욱 고통스러운 순간은 그녀가 십자가의 발 앞에 있으면서 예수의 외침을 들을 때였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태 27,46; 마르 15,34). 가장 큰 잃어버림의 순간이다. 십자가 밑의 마리아의 고통은 아들의 고통과 일치한다. 아들의 외침은 당신이 전적으로 하느님과 인류 사이의 일치를 재건하기 위해 당신 자신을 온전히 바치신 사랑의 표현이며 아버지께 대한 영원한 응답이다.

 

마리아의 침묵 외침은 당신 아들의 버림에 대한 피조물의 메아리이다. 이 순간에 그녀의 참 정체성이 실현되었다. 당신 아들의 “동반자”가 되도록 영원으로부터 선택되셨고, 이제 처신이 무엇인지 깊은 곳까지 계시가 되었다. 마리아는 아버지로부터 당신의 아들에게 주어진, 아들이 자신의 버림받음으로 실현할 구원된 새로운 인류와 피조물의 가시적 표징으로 예수 앞에 있다.

 

그러나 예수는 이 승리에서 또한 자신을 떼어놓아야 한다. 그분은 마리아를 더는 어머니로 보지 않는다. 그리고 또 마리아는 가장 위대한 보물, 그녀 안에서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첫 번 잉태의 결실인 아들에게서 떨어져야 한다. 지상에서의 예수의 마지막 행위는 실제로 마리아의 모성을 다른 아들, 전 인류를 대표하는 요한에게로 옮기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 19,26-27). 요한복음이 가리키듯이 마리아에게는 요한과 함께 십자가의 발 앞에 있음으로써 두 번째 잉태가 실현된다. 그녀의 고통 안에서 십자가를 통하여 쇄신되고 예수가 된 모든 사람의 어머니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마리아는 이제 당신의 아들을 잃어야 하는 아픔까지 겪으신다. 아들이 죽는 것보다도 이제 다른 아들을 가지시게 된다. 이것이 두 번째 잉태라는 것이다. 그로써 마리아는 교회의 어머니이며,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신 것이다. 마리아는 이제 예수님의 어머니로만 머물지 않고 새로운 공동체의 어머니가 되심을 암시하고 있다. 이것은 혈연관계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관계에서 형성되는 관계이다.

 

즉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5)라는 말씀의 확인이다. “자기 집에”라는 표현은 단순히 집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모든 소유를 말한다.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모든 삶을 함께했다는 의미이다. “모셨다”라는 표현은 제자가 마리아에게 모든 것을 개방했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마리아와 제자 사이에 새롭게 맺은 가족관계의 의미를 알 수 있다.

 

오늘 이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 자신이 더욱 마리아의 삶을 본받고, 이 어머니의 고통을 우리도 함께하면서 하느님 아버지께 참된 제물을 바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 27)

-한상우신부-


어머니의
삶속에 가득
담겨있는
고통이다.

삶이 있기에
고통이 있다.

잊을 수 없는
어머니의
맑고 아픈
십자가이다.

어머니의
고통은
기도가 되고
생활이 된다.

십자가의
무게와
사랑의 무게는
언제나 같다.

어머니의
사랑은
유통기한이
없다.

어머니는
당신의 삶으로
복음을 읽는다.

복음의
어머니가
되시어

복음을
길러내신다.

사랑이
복음이다.

세상의 모든
관계는
고통으로
알게되는
참된
사랑이다.

사랑이 삶을
바꾸어 놓는다.

많은 말보다
"어머니!" 라는
한 말씀이
더 강렬히
우리에게
꽂히는 것은

그 사랑을
먹고 사는
우리들이기
때문이다.

고통의
어머니가
행복한
어머니가
되신다.

사랑과
고통은
하나이다.

사랑하기에
고통도
열매가 된다.

여인이
십자가로
어머니가
되신다.

사랑으로
가장 좋으신
우리의
어머니가
되신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성모님의 마음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 ...가 서 있었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을 지낸 바로 다음날에 우리는 그 십자가 아래 머물러 계신 성모님을 만납니다. 교회가 십자가 위에서 창에 찔려 피와 물을 쏟으신 예수님의 성심을 경배하는 "예수 성심 대축일" 바로 다음날에 "티 없으신 성모 성심"을 기념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합니다. 인류를 위한 예수님의 사랑의 순종과 성모님의 믿음의 순종을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당신의 영혼이 칼에 찔리리라."(입당송)
마리아의 고통은 이미 시메온에 의해 예견된 것이었습니다. 영혼이 칼에 찔리는 고통은 대부분 이스라엘에서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된 아들로 인한 것이었지요. 출산 후 이집트 피난이나 베들레헴의 아기들 학살은 물론이고, 공생할 초기 나자렛 회당에서의 위기, 아들이 미쳤다는 소문, 유다인들의 배척, 종교 기득권자들과의 갈등 등등 마리아는 예수님 생애 내내 크나큰 심적 고통을 안고 사셨을 것 같습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요한 19,26)
그런데 그 고통이 절정에 달한 순간에, 아드님께서 어머니를 "여인"이라 부르시면서 인류를 어머니의 아들로 맡기십니다. 어쩌면 또 다른 고통의 씨앗들을 어머니께 왕창 안기신 것이지요.

우리 인간을 고통의 씨앗이라 표현하다니 좀 심하게 들리나요? 이는 인간의 존엄함과 소중함을 부정하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좀 강하다 싶은 표현을 통해, 영적 육적으로 생명을 잉태하고 품고 양육하는 모든 여정이 결코 쉽지 않다는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마리아는 육으로 아들 예수를 잉태해 낳아 기르셨고, 죄에 오염되어 갈곳 몰라 하는 모든 인류를 영으로 잉태해 품고 기르십니다. 마리아의 모성은 이천 년 전 어느 한 시기로 끝나지 않고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모든 이가 영원한 생명으로 구원을 얻을 때까지 지치지 않고 이 세상에 현존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히브 5,8-9)
고난과 순종, 인내와 기도, 경외심과 의탁... 예수님의 삶은 마리아의 그것과 놀랄만큼 닮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리아를 그리스도인의 탁월한 모범이라고 부르지요. 우리가 마리아를 공경하고 사랑하는 건, 그분이 신이라고 우기는 게 아니라, 하느님 구원 계획에 순종하여 아드님 생애의 희로애락을 온전히 당신 것으로 받아안으셨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어떻게 주님을 따라야 하는지 모르는 우리에게 주님을 투명하게 보여 주는 본보기시니까요.

"당신은 주님의 십자가 아래서 죽음 없이 순교의 월계관을 받으셨나이다."(복음 환호송)
가슴이 아리도록 아픈 고백이지요. 사실, 사형수로 몰려 무죄하게 죽임을 당하는 아들을 바라보아야 하는 어머니의 목숨이 어찌 살아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물리적 죽음만이 순교가 아님을 마리아께서 가장 먼저 증언하신 것입니다.

고통을 피하지 않고 십자가 아래서 담대히 아들을 지키신 마리아께서 지금 우리 곁에서 우리의 고통에 울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어머니와 우리를 맺어 주신 순간부터 마리아의 관심사는 이 세상의 모든 자녀들, 바로 우리가 되었습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7)
이 세상을 살아가느라 지치고 부서지고 깨진 우리의 고통을 모르시지 않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 어머니를 내어주십니다. 목숨과 살과 피를 다 내주시더니 어머니까지 주신 겁니다. 당신이 어머니의 사랑과 지혜로 양육되었듯 우리도 담대하고 믿음 깊은 어머니 품에서 생명과 힘과 용기를 얻길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고통의 어머니는 '그것도 못 견디느냐'고 채근하시지 않고 깊이 공감하고 함께 아파하며 위로하는 분이십니다. 바로 그 어머니가 우리 곁에서 인내로이 우리의 길을 지켜주고 계시니, 힘 내어 앞으로 나아가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괜찮아. 수고했어. 더 나아질 거야." 어머니의 속삭임이 여러분에게도 위로가 되길 바랍니다.

 말씀 나누기 - 고통의 성모 마리아 축일-주님 옆에 그리고 우리 옆에도 함께 계시는 어머니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9월 15일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