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5월 22일 부활 제7주간 토요일

Margaret K 2021. 5. 22. 06:43

2021년 5월 22일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요한 21,20-25)


Jesus said to him,

“What if I want him to remain until I come?
What concern is it of yours? 
You follow m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신우식신부-


 주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 베드로와 안드레아 그리고 요한과 야고보를 제자로 부르시자, 그들은 주님의 부르심에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나섭니다(마태 4,18-22 참조). 오늘 복음에서는 이처럼 모든 것을 지체없이 버렸던 베드로의 모습이 조금 낯설게 느껴집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의 앞날이 궁금했는지 아니면 자신과 비교하고 싶었는지 베드로는 그 제자의 미래에 관하여 여쭙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을 처음 따라 나설 때 가졌던 단순함과 성실함으로 자신의 사명에 충실하라는 말씀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거나 남의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저마다의 탈렌트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의 경쟁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뒤처질까봐 두려워하고, 끊임없이 비교하며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고유한 탈렌트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다 보면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만 하다가 길을 잃게 됩니다. 비교는 그만 멈추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연연하지 말고,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처럼 그분 곁에서 나에게 주신 은총과 사랑이 얼마나 소중하고 중요한지 되돌아보고 감사해야 합니다.
생존 경쟁이 일상화된 현대의 삶에서 남과 비교하여 고통스러워하며 불안하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나는 누구인가?’ 늘 성찰하며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저마다의 소명에 따라 기쁘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운동경기에서 팀워크는 매우 중요합니다. 선수 개인의 기량도 중요하지만, 팀워크가 깨져서 패배하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이 조직력을 위해 합숙 훈련도 하면서 손발을 맞추는 것이지요.


운동경기만이 아닙니다. 우리 삶 안에서도 혼자 하는 것보다 함께 해야 할 때가 더 많습니다. 먼 곳을 여행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면 이 대중교통을 운전하는 사람이 필요하고, 식사해주는 식당 주인이 필요합니다. 잠을 잘 수 있도록 숙박시설을 운영하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조금만 주위를 바라보면 이 세상은 ‘혼자’가 아닌 ‘함께’하는 모임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나’가 아니라, ‘우리’로 모인 조직입니다. ‘개인’이 아닌, ‘공동’의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함께 하셨습니다. 제자들과 함께하셨고,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하셨으며, 세상의 모든 사람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래야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을 믿으면서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참 행복의 길로 모두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너무나 자주 ‘나’만을 이야기합니다. 나만 잘되고, 나만 잘 지내고, 나만 행복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나 혼자 있는 세상이라면 맞는 말이지만, 나와 너 그리고 우리가 함께하는 세상에서는 잘못된 생각이 아닐까요?

베드로가 사랑하는 제자에 관한 질문을 합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일반적으로 사랑하는 이 제자를 사도 요한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즉, 베드로는 사도 요한의 미래를 물어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의 미래를 굳이 말씀해 주시지 않습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고 말씀하셨다고 해서, 요한이 죽지 않으리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의 미래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님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보다 필요한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

이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어느 한 사람을 궁금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누구는 잘되고, 누구는 못 되는 삶이 아닌, 우리 모두가 잘 되는 삶, 우리가 모두 참 행복을 사는 삶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함께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탐욕은 모든 것을 얻고자 욕심내어서 도리어 모든 것을 잃게 한다(몽테뉴).


어린이처럼.

스페인의 입체파 화가 파블로 피카소를 잘 아실 것입니다. 제가 학창 시절 때, 그의 작품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그냥 성의 없이 대충 그린 것만 같았고, 그런데도 그 가격이 엄청나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었습니다.

피카소가 했던 말을 책을 통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가인 라파엘로처럼 그리기 위해 4년이라는 시간이 들었지만, 어린이처럼 그리기 위해서는 평생을 바쳤다.”

어린이 본연의 감성과 예술성을 살리기 위해 그는 평생의 노력을 기울였던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어린이 본연의 감성과 예술성이 원래는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없어졌고, 잊어버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에 젖어 들면서 순수성을 잃었던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도 어린이와 같은 사람만 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나의 어린이와 같은 감성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

 오늘을 충실히 살게 만드는 것은 꿈보다 정체성이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마지막 때에는 순교로 생을 마감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요한의 미래도 궁금해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이때부터 요한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까지 살아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요한도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왜 제자들의 결말에 대해 명확하게 말씀하시지 않고 본인들도 헛갈릴 정도로 모호하게 말씀하셨던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삶의 끝을 아는 것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것만을 믿고 현실에 충실하지 않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운명론의 폐해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운명을 알고 살기를 원치 않으시고 ‘오늘’을 충실하게 살길 원하십니다.
 

 

    전에 EBS 지식 채널 중 이러한 동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파리 여행을 다큐 형식으로 찍은 것입니다. 자녀들을 위해 평생 미술 교사를 하다 은퇴하여 이제 마지막으로 화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아내와 함께 파리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그림을 그리기 위해 떠난 것입니다.

 

    그는 오랜 계획을 세우고 많은 돈을 써 그림 도구들을 사고 준비합니다.
그러나 막상 파리에서의 화가 생활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도착하자마자 소매치기도 당하며 돈을 다 잃습니다. 길거리에서 비도 맞으며 매일 그림을 그립니다. 그것은 기쁘지만 이미 손은 무뎌질 대로 무뎌져서 그림은 한 점도 팔리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기는 하였지만, 어쩌면 어렸을 때부터 가졌던 화가의 꿈이 그분께는 생계를 위한 수단 외에는 영향을 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 “너는 꿈이 뭐니?”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꼭 되고 싶은 것이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고 여기고 그런 꿈을 이야기합니다. 꿈이 크면 어른들은 칭찬을 해 줍니다.
    하지만 어렸을 때 가졌던 꿈을 이루는 경우는 얼마나 될까요?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성공한 사람 중에 하루하루 그냥 열심히 살았다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유재석 씨 같은 경우입니다.

    미래의 꿈보다 오늘의 삶이 더 중요합니다. 꿈이 오늘을 충실하게 살게 할 힘을 잃었다면 그 꿈은 망상이 되고 맙니다. 

 

    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한 스님과 제자가 가난한 집에 묵은 적이 있습니다.
    그 가난한 집은 암소 한 마리에서 나오는 젖으로 여러 식구가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다음 날 떠나면서 제자에게 몰래 그 암소를 절벽에서 떨어뜨리라고 하였습니다. 제자는 깜짝 놀랐지만 순종하였습니다.

    10여 년이 지났을 때 제자는 다시 그 집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 집은 이전과는 다르게 활기가 넘쳤고 부유해졌습니다.
    그 이유를 물으니 그전까지 암소에게 의존하며 살았는데 암소가 사라지자 어떻게 해서든 먹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더니 그렇게 부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꿈도 이렇습니다. 그 꿈이 너무나 명확하면 그것이 지금을 열심히 사는 원동력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오늘을 허투루 살게 만드는 핑계가 될 수 있습니다.
    어차피 미래에도 부자로 살 수 있는 확신이 있는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부모가 물려줄 재산에 대한 명확한 보장이 있다면 오늘을 허송세월로 보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현명한 부자들은 자녀들에게 재산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미리 선언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미래에 무엇이 되느냐가 아니라 오늘을 어떻게 사느냐입니다. 주님은 운명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충실히 살기를 원하십니다.

    어린아이가 어떤 질문에도 머뭇거림이 없이 현명한 답을 하는 스님을 찾아갔습니다. 자신의 손에 참새 한 마리를 들고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이 새는 살아 있나요, 죽어있나요?”
만약 살아 있다고 말하면 꽉 눌러 죽일 생각이고 죽었다고 한다면 하늘로 날려 보낼 생각이었습니다. 

    스님은 대답했습니다.
    “그 새의 살고 죽음은 너에게 달렸지.”
    아이는 스님의 현명함에 놀라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어제 엄마가 점을 보고 왔는데 제 운명이 아주 안 좋대요.”
    스님은 아이에게 손을 펴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재물선과 운명선 등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주먹을 쥐어보라고 했습니다.
    “네 운명선은 어디 있지?”
    아이는 대답했습니다.
    “제 손안에 있네요.”
 

 

    구약의 요셉이 꾼 꿈은 가족들이 자신에게 절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열린 결말이었습니다. 하지만 분명 가족까지도 그를 존경하는 결실을 볼 것은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꿈이라기보다는 정체성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면 분명 세상에서 존경받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 정체성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그러면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 주님께서 원하셨던 꿈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됩니다.

  

    류시화 시인은 오갈 데 없어서 대학 때 판자촌에서 버틴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비가 많이 와서 물이 새고 심지어 떠내려갈 정도로 위에서 물이 많이 흘러내려 왔습니다.

    두려움 속에서 그는 갑자기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나는 시인이다. 이 순간은 두려워할 순간이 아니라 시를 위한 영감을 찾아내야 할 때이다.”
    이런 생각을 하자 천둥 번개도, 바람도, 새는 비도, 흘러 내려오는 물도 모두 시를 위한 영감을 주는 소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편안한 마음으로 그 순간을 즐길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유명한 시인이 되었습니다.

  

    분명 주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에서 존경받는 삶,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살도록 예정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삶이 오늘의 십자가를 지고 나가게 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망상에 불과합니다.
    나의 꿈이 명확하지 않더라도 정체성만 명확하면 주님께서 바라시는 꿈에 반드시 도달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꿈이 오늘을 어떻게 살아가도록 만드느냐입니다.

  

    꿈은 모호해도 좋습니다. 자녀에게 심어주어야 하는 것은 그 꿈으로 오늘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게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입니다.
    피카소의 말을 들어봅시다.
    “내 어머니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네가 군인이 된다면 장군이 될 것이고 네가 성직자가 된다면 너는 교황이 되겠지.’ 대신에 나는 그림을 그렸고 피카소가 되었다.”​

 -조재형신부-


영화 박하사탕에서 주인공은 철길 위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나 돌아갈래!’ 지금의 현실이 풍요롭지만원하는 것을 얻었지만 그것이 행복함의 이유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응답하라 시리즈의 드라마가 인기가 있었습니다과연 2021년이 33년 전보다 모든 면에서 발전하였습니다인터넷으로 실시간으로 지구촌의 모든 이와 소통이 됩니다카톡으로 국제전화를 무료로 할 수 있습니다컴퓨터와 스마트폰은 원하는 정보를 쉽게 검색할 수 있게 합니다생수를 들고 다니며 마십니다여행이 자유로워져서 지구촌 곳곳을 다닐 수 있습니다그러나 그것이 33년 전보다 행복해졌다는 이유가 될까요?

 

저만해도 꿈과 같은 유년시절의 낭만추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동네에서 해질녘까지 친구들과 놀 수 있었습니다. ‘자치기팽이치기구슬치기비석치기말뚝박기술래잡기다방구땅따먹기와 같은 놀이가 있었습니다누구나 친구가 되었고매일 놀 수 있었습니다성당에 가면 주일학교 친구들이 있었습니다성탄에는 연극도 하고여름방학에는 수련회도 가고교리를 배웠습니다공부에 찌들지 않았습니다기타들고라디오 들고배낭 메고 강촌에도 가고일영에도 갔습니다문명과 발전이풍요와 자본이 행복과 비례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신앙은부활의 삶은 어쩌면 끊임없이 나 돌아갈래!’를 꿈꾸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예전처럼 우물가에서 물을 구하지는 않을 겁니다예전처럼 동네에서 친구들과 놀이를 하지는 않을 겁니다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원두막에서 수박을 먹지도 않을 겁니다청량리에서 완행열차를 타고 동해바다를 가지도 않을 겁니다동네 만화가게에서 꿈을 찾지도 않을 겁니다학교를 마치고 운동장에서 늦게까지 농구를 하지도 않을 겁니다우리는 애벌레가 되어서 끊임없이 어딘가 모를 목적지를 향해서 올라가려 합니다발전과 성장 그리고 풍요와 자본은 우리에게 여유와 쉼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애벌레는 죽음과 같은 쉼이 있어야 합니다고치가 되어서 움직임을 멈춰야 합니다그래야 하늘을 날 수 있는 날개가 생깁니다날개가 있어야 애벌레는 나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7주간 부활시기를 지내왔습니다절망의 끝에서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토마사도는 의심을 버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이 세상이라는 엠마오에서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서입니다부활하신 주님은 착한목자이십니다착한목자는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입니다성공명예권력이라는 가지에 붙어있으면 결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께 의지하고주님의 말씀을 따를 때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주님의 부활로 세상이 변한 것은 없습니다주님의 부활로 제자들이 변하였습니다제자들이 변한만큼 세상이 변하였습니다초대교회는 나눔과 섬김을 실천하였습니다부유한 자도가난한 자도 모두 함께 자유로웠습니다가진 것을 기쁜 마음으로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승천은 우주 너머로 날아가는 것이 아닙니다승천은 절망에서 희망으로 넘어가는 것입니다어둠에서 빛으로 나가는 것입니다다시금 삶의 자리에서 주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하고주님께서 부활하셨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발전과 성장의 패러다임에서 나눔과 섬김의 패러다임으로 변하는 것입니다그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창조질서로 돌아갈 때 가능한 것입니다베네딕토 성인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땅으로 내려온 사람만이 하늘로 오를 수 있습니다.’ 군대에 가면 포복훈련이 있습니다철조망 아래에는 진흙탕입니다철조망 위로는 실탄이 날아다닙니다아무리 힘들어도 군인은 낮은 자세로 철조망을 통과해야 합니다머리를 들면 철조망에 다치기 쉽고 옷이 찢겨 질 수 있습니다자칫 잘못하면 총알에 맞을 수도 있습니다그러기에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는 낮은 자세로 기어가야 합니다삶의 시련도 그렇습니다결국은 지나가기 마련입니다겸손하게 땅을 향하면 언젠가 하늘로 들어 높여질 것입니다. 

 사람마다 지닌 그릇의 크기가 다르고, 주어진 몫이 다르고, 각자 걸어가야 할 길이 다릅니다!

 -양승국신부-

 

오래 전 한 수도원에 공공의 적처럼 살아가는 수사가 한명 있었습니다. 이름은 베드로였습니다. 몸집이 육중하다보니 동작도 굼뜨고, 공동 작업 시간에 사고만 치지 별 도움이 안되었습니다. 그렇다고 기도를 열심히 하는가?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들 조용히 침잠해있는 묵상 시간에 코까지 골면서 잠들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다가 식사 시간만 되면 얼굴에 활기가 되살아났습니다. 다른 수사들은 더 먹고 싶어도 꾹 눌러참고 딱 밥 한 공기만 먹는데, 이 수사는 평생토록 삼시세끼 단 한번도 안빠지고 꼭꼭 밥 두공기씩 챙겨먹었습니다.

  

겉으로 대놓고 말하지 못했지만 다른 수사들은 주님 앞에 이렇게 여쭙곤 했습니다. “주님, 저 베드로 수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일은 쥐꼬리만큼 하고 밥은 나발처럼 흡입하는 베드로 수사에게 구원이 가당한 일입니까?” 

 

세월이 흐르고 흘러 다들 세상을 떠났습니다. 평생토록 주님 안에 갖은 고행과 보속을 다해온 까닭에 삐쩍 마른 다른 수사들이, 그 결과로 천국의 정원을 산책하고 있는데, 깜짝 놀랄 일이 발생했습니다. 저멀리 맞은 편에 누군가가 천천히 걸어오는데, 얼굴이 낯이 익은 것입니다. 가까이서 봤더니, 아니 글쎄, 베드로 수사였습니다.

  

화가 벼락같이 난 수사들은 하느님께 따졌습니다. 어떻게 이럴수가 있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사람마다 지닌 그릇의 크기가 다르고, 주어진 몫이 다르고, 각자 걸어가야 할 길이 다르다는 것을 왜 모르느냐?”

  

“살아있을 때 저 베드로 수사는 사실 매끼 네 공기씩 밥을 먹어야 할 사람이었는데, 절제하고 또 절제해서 두 공기씩만 먹은 것이란다. 평생 그런 노력한 베드로 사도가 천국에 오지 않으면 누가 천국에 오겠느냐?”

 

수난과 죽음을 앞둔 예수님께서 서서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이제 공생활의 절정기도 지나가고 예수님의 행렬은 초라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그 많던 사람들이 다들 떠나가고, 예수님의 추종자들은 몇명 남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가 돌아서서 보니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수제자 베드로 사도와 경쟁 관계 속에 살아가던 예수님의 애제자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를 지목하며 묻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의 대답이 시원시원합니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사랑받는 제자의 운명에 대해 베드로가 상관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운명, 자신의 영혼의 구원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으면서, 시선은 언제나 이웃들의 결핍과 실수에 가 있습니다.

  

이웃을 향했던 날카로운 시선을 거두어 우리 자신의 발끝을 유심히 살펴봐야겠습니다. 남의 인생은 본인에게 대폭 맡겨두고, 우리 각자의 인생을 더 적극적으로 살아야겠습니다.

  

예수님 추종의 방식도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 사도의 경우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동일한 방식으로 순교하였습니다. 사랑받는 제자의 경우 평생토록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추종했지만, 성모님의 노년을 동반해드리면서, 순교가 아니라 자연사하였습니다. 모든 길이 다 가치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영근신부-


오늘 우리는 내일 성령강림대축일을 앞두고 부활시기를 마무리 합니다.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인 21장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오늘 <복음>의 앞 장면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호숫가에서 나타나시어 아침을 차려 먹이시고베드로에게 세 번이 사랑을 확인하신 후에 사명을 맡기시고베드로의 장래를 미리 알려주셨습니다곧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요한 21,18)라고 하시며그가 순교 당하여 죽게 될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이제 오늘 <복음>은 사도 요한의 장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자신의 장래에 대한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의 장래에 대해서 묻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요한 21,21)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네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있기를 내가 바란다할지라도 ,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요한 21,22)라고 말씀하셨습니다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이 오해를 불러일으켜 초대 교회 공동체에서는 이 제자가 죽지 않으리라.’는 소문으로 퍼져나갔던 것입니다그래서 요한복음사가는 초대교인들에게 그 진원지를 밝히면서 이러한 소문이 잘못된 오해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우쳐줍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는 참 아이러니하고 재미난 내용을 드러내줍니다곧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그리고 예수님은 그 사랑을 확인까지도 하십니다그러면서도 예수님은 다른 제자를 사랑하십니다그리고 그 사실을 베드로는 잘 알고 있습니다그리고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는 다름 아닌 바로 자신의 오랜 고향 친구입니다그러니 그의 장래가 궁금한 것은 당연할 일일 것입니다그러니 아마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을 것입니다혹은 찬구를 경계하거나 비교하거나 경쟁하는 것도 아니었을 것입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여기서 베드로는 요한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요한을 위해서 묻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그리고 베드로는 요한을 무척 사랑했고또한 그들의 친밀한 관계는 사도행전 2-4장과 요한복음서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고 말하면서본문에서 베드로는 전에 최후만찬에서 배신자에 대해 예수님께 직접 묻지 못하고 요한을 시켜서 물었기에이제 요한을 위해서 호의로 직접 묻고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실예수님께서는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요한 21,22)고 하십니다그러니 중요한 것은 당신을 따르는 일입니다사랑한다고 하면서 따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베드로는 벌써 그렇게 하지 않았는가목숨을 내놓고까지 따르겠다고 하고서 이미 세 번이나 배신하고 도망가지 않았던가사실예수님께서는 그를 호숫가에서 제자로 부르실 때에도예루살렘으로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올라갈 때에도부활하시어 나타나셔서도오늘 <복음>에서도 여전히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라고 하십니다이제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 죽을 것입니다곧 베드로는 증거의 삶을 살 것입니다그리고 요한은 증언의 삶을 살 것입니다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베드로에게는 예수님을 따르는 활동의 사목직을 요한에게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관상의 역할이 주어졌다고 말합니다사실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한 베드로에게는 교회를당신이 사랑하신 요한에게는 어머니를 맡기셨습니다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너는 나를 따라라.”(요한 21,22)

주님!

길을 가다가 멈추지 않게 하소서멈추다가 떠밀려가지 않게 하소서!

떠밀리다가 뒤로 휩쓸리지 않게 하소서휩쓸리다가 가야할 길을 놓치지 않게 하소서!

오로지 당신을 따라 가게 하소서눈길을 돌리느라 옆길로 새지 않게 하소서!

자신을 따르느라 당신을 거스르지 않게 하소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당신과 함께 하고당신만을 따르게 하소서아멘.

 쓸모없는 호기심은 걸림돌이다

 -반영억신부-


“남의 떡은 더 커 보인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자기 것보다도 남의 것이 훨씬 더 좋아 보인다.’ 는 말입니다. 자기 것에 만족하고 산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말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으면 마음의 평화와 자유를 누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남과 비교하며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허세를 떨기도 하고 분수없이 지낼 때가 있습니다. 잘 보이려 하지 말고 지금 최선을 다하여 사는 것이 아름답건만 그것이 마음 같지 않습니다. 나는 나의 삶을 사는 것이고 다른 사람은 그의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너를 인정해 주면 속을 끓일 이유가 없건만 안타까움이 큽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의 운명에 대한 호기심을 가졌습니다. 그 제자는 만찬 때에 예수님 가슴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주님, 주님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입니까?”하고 물었던 사람입니다(요한21,20). 그런데 그 제자는 죽지 않으리라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요한21,21)하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의 일생이고 너는 너의 갈 길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너는 나를 따라라.”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그 제자가 나의 사랑을 받았다고 해서 비교하지 마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각자가 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열어주신 길이 있고 탈랜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길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베드로가 다른 제자의 운명에 관심을 가진 것은 동료애를 발휘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쓸모없는 호기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오늘 여기서 영원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지나친 호기심은 걸림돌일 뿐입니다. 그것은 상관을 넘어서서 간섭과 참견을 합니다. 우리와 상관없는 일을 끌어안고 괴로워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루카9,62) 되지 말고 주님만을 바라보며 흔들림 없는 나의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걷는 발걸음에 복이 넘치시길 기도합니다. 요한복음의 핵심주제는 “서로사랑하자.”로 요약됩니다. 우리 삶을 사랑으로 물들이고 그 길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구원은 다른 사람의 삶에 끼어들어 비교하고 험담하는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따라라”하시는 예수님을 따르는 데 있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복음: 요한 21,20-25: 예수의 사랑하시던 제자

 -조욱현신부-


예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나를 따라라”(19절) 하셨을 때 베드로가 돌아다보았더니 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가 따라오는 것을 보고,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21절) 하고 물었을 때,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22절) 라고 하신다. 베드로에게 주님께서는 당신을 본받으라는 뜻으로 “나를 따라라.”라고 하신다. 행동적인 신앙은 주님의 수난의 본을 보고 완전하게 배웠으니 주님을 따라야 한다. 그러나 지금 막 시작된 관상은 주님께서 오셨을 때 완전하게 될 것이기에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견디어 내는 신심은 그리스도를 구체적으로 따르지만, 지식의 충만함은 그리스도께서 오셔야 채워지며 그때야 완전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요한은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살아있으리라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지만, 요한은 죽었다. 요한은 주님께서 하늘에 오르신 뒤로 73년을 더 살며 트라야누스 황제 때까지 살다가 다른 사도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뒤 평화롭고 평온하게 하늘나라로 떠났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요한이 오래 살아 내가 올 때까지 지상에 남아있기를 내가 바란다 해도 너는 그것에 대해 자세히 알려고 하지 마라. 너는 너의 것, 곧 네 일에 주의를 기울이고 나를 따르기나 하여라.’ 하신 것이다.

 

사도 요한은 온 세상도 다 담아내지 못할 만큼 많은 일을 기록할 수 있었지만, 단 한 권의 복음서만을 남겼다. 요한은 묵시록도 썼으며, 또한 매우 짧은 서간도 한 편 남겼다. 지금 성경에 있는 세 편의 서간은 모두가 요한의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 세 편을 다 합쳐도 100줄이 되지 않는 글이다. 이 복음을 자신이 썼다고 드러내는 이유는 그는 복음을 제일 마지막으로 썼고 복음을 쓴 이유가 그분이 자기를 사랑하셨고 자기 기록이 믿을만한 것이며, 이 일을 하게 된 것은 사랑 때문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다. 그래서 그것들을 낱낱이 기록하면, 온 세상이라도 그렇게 기록된 책들을 다 담아내지 못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25절)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만물을 지혜로 창조하셨으며 그분의 지혜는 한계가 없으므로(시편 147,5 참조) 한계가 있는 이 세상은 무한한 지혜에 관한 이야기를 자기 안에 다 담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한계가 있는 우리 인간의 지성으로 하느님의 지혜를 어떻게 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라는 말이다.

 

이제 우리는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한다. 말씀을 읽고 실천해야 한다. 끊임없이 말씀을 실천할 때 우리는 궁극적인 유익을 얻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악한 것들을 잘라 버리고 선을 실천하여 성숙해짐으로써 자신을 밝게 하고 시야를 넓혀야 한다. 그리하여 구원 자체이신 주님을, 하느님을 차지하여야 할 것이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요한 21, 22)

-한상우신부-


앙심(怏心)과
신앙심 사이에
우리가
살고있다.

더 중요하고
훨씬 더
근본적인 것은

주님과
우리자신의
관계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부르심에
필요한 것은
순명하는
믿음뿐이다.

소명과
정체성은
교만이 아닌
겸손으로
재발견된다.

우리모두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이다.

정직하게
내면을 비추어
주시는
말씀이다.

관계의 눈을
다시금
진실되이
열어주신다.

스스로 만든
형제를 향한
판단이다.

먼저
우리자신의
참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우리들이다.

은총으로
새롭게
변화되어야 할
대상은 언제나
우리자신이다.

하느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를
깨닫게된다.

은총의 빛으로
우리자신을
보는 것이다.

우리는
메시아가
아니다.

우리자신이
우리자신을
못보는
영적 장애인이다.

주님 앞에서
큰소리 칠
입장이 아니다.

우리가
청해야 할 것은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할 수 있는
은총뿐이다.

피조물이라는
우리 위치를
망각하지 않는
것이다.

여전히
은총과
도움이 필요한
우리들 삶이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판단이 아닌
새로운 변화이다.

가장 아름다운
오월(五月)도
변하고 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를 온전한 자기다움으로 초대하십니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야? 너는 나는 따라라."(요한 21,22)
요한 복음사가가 전하는 예수님의 마지막 목소리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자기에게 닥칠 일에 대해 들은 베드로가 이번에는 요한이 어떻게 될지 궁금했나 봅니다. 예수님은 다른 이에 대해 묻는 베드로에게 아주 간결하고도 냉정하게 답을 주시지요.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냐?"
사실 모든 사람, 모든 피조물은 서로 상관이 있습니다. 서로 유기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하느님의 창조 세계를 이어가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먼저 각자가 저마다 하느님과 고유한 관계성 안에 존재하고, 이어서 서로간에 관계가 생겨나는 겁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하느님과의 관계성을 먼저 주목하라고 이르시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
"너는"에서 "는"은 주어 뒤에 붙이는 일반적인 주격 조사라기보다, 대상을 특정하고 강조하는 대조의 의미를 지닌 보조사로 보입니다. 다른 이가 어떻게 되든, 무엇이 되든 너는 그와 상관 없이 너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당신을 따르라는 의미지요. 

사실 사람들은 다른 이가 어떤지 살피느라 많은 에너지를 소모합니다. 정작 자신이 하느님에게서 어떤 은총을 받고 있는지 헤아리기보다 남이 무엇을 누리는지 곁눈질하고 비교합니다. 그러다 보면 시기와 질투, 분노 아니면 열등감의 늪으로 빠져들기 십상이지요. 그런 줄 알면서도 자꾸만 남에게 관심을 가지고 하느님의 편애의 흔적을 눈에 불을 켜고 찾으려 헛수고를 합니다. 자신이 받은 귀한 선물은 제쳐두고 말이죠.

실제로 베드로와 요한은 다른 길을 갑니다. 베드로는 열정적으로 교회의 기초를 놓으며 그리스도를 증언하다 순교하고, 요한은 자신이 절절히 체험한 사랑의 주님을 글로 꾹꾹 담아내어 세상에 그 사랑을 현재화하지요. 누구나 서로 비교할 필요 없이 각자의 고유한 부르심과 소명이 있는 겁니다. 비교와 질투는 그토록 소중한 소명을 훼손하고 약화시키는 무서운 악이지요.  

성인은 온전히 자기다움을 사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성인은 하느님께서 창조 때 각자에게 심어 주신 모상성을 최대로 충만히 누리면서 이웃을 위해 발휘하고 사는 사람일 겁니다. 타인의 옷을 입고 타인의 가면을 쓰고서는 충만한 자기다움의 경지에 이르기 어렵지요.

제1독서는 사도행전의 끝부분으로 사도 바오로의 로마 체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희망 때문에 이렇게 사슬에 묶여 있습니다."(사도 28,20)
바오로 사도는 이스라엘의 희망인 메시아, 즉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다 동족 유다인들의 질투로 인해 결국 수인의 신분이 되었지요. 잘 나가는 출충한 바리사이였던 그로서는 꿈에도 예상 못했던 처지겠지만, 이미 하느님께서 당신 계획 안에 마련해 두셨던 그만의 소명이었던 겁니다.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쳤다."(사도 28,31)
사도들은 저마다 부르심 받은 곳으로 파견되어 열렬히 주님을 선포하다가 장렬한 순교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합니다. 그리고 사도 바오로를 통해 구원은 로마를 발판 삼아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갑니다. 각자의 소명이 저마다의 발걸음으로 주님의 빛을 온 세상에 퍼뜨리는 놀라운 여정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부활시기가 막바지를 향해 가는 오늘, 우리는 누구의 얼굴로, 누구의 기대에 맞춰, 누구의 옷을 입고 살아가는지 돌아보시면 좋겠습니다. 주님은 우리 각자에게서 다른 이의 모습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온전한 자기다움을 꽃피워 자기 안에서 하느님의 모상성이 충만할 때 우리는 성인이 되어 간답니다. 거룩한 성성의 여정을 걷고 있는 우리 모두를 응원합니다. 

 아무것도 상관치 않는 자유로움

 -김찬선신부-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부활 시기의 마지막 날이고,

오늘 독서와 복음은 사도행전과 요한복음의 제일 끝부분입니다.

 

사도행전은 바오로 사도가 로마에서 아무 방해를 받지 않고

그리고 아주 담대히 복음을 선포하는 얘기로 끝을 맺습니다.

사도행전의 두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베드로와 바오로가

어떻게 생을 마감했는지는 열어놓은 채로 얘기를 끝내는 겁니다.

 

이는 사도행전의 저자가 베드로나 바오로보다 일찍 죽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일부러 이렇게 마감을 한 것일 겁니다.

사도들의 복음 선포는 계속되어야 하고 이어져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오늘 요한복음도 이런 면에서 비슷합니다.

여기서 저자는 예수께서 하신 일들을 자기가 기록한다고 기록했지만

하신 일들을 다 기록하자면 온 세상도 그 책들을 담아낼 수 없을 거라고,

그러니까 못다 한 얘기가 많다고 열어놓은 채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이 또한 예수께서 하신 일들에 대한 기록은 이어져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그리고 우리는 또 다른 면에서 비슷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다른 제자의 죽음에 대해서 상관하지 말고,

너는 나를 따르는 일에나 신경 쓰라는 투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선을 긋거나 딱 자르는 단호함 같은 것이 보이는데,

다른 사람 문제는 상관치 않는 이 단호함은 제자들,

그중에서도 베드로에게 더 많이 요구됩니다.

 

그러니까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의 엄격함은 병자나 죄인들에게도

율법의 준수를 엄격히 요구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데 비해

주님의 사랑은 이들에게는 무한히 너그러우시고 자유를 주시지만

제자들에게는 매우 엄격하고 단호하신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것은 대부분 당신을 따름이나 복음 선포와 상관이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려면 모든 것을 다 팔고 자신마저 버려야 한다거나

주님을 따르려면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거나

주님을 따르려면 죽은 자의 장례도 죽은 자에게 맡겨야 한다고 하시고,

복음 선포를 위해 나서는 제자들에게도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가라거나

가는 길에 누구를 만나도 노닥거리지 말고 서둘러 가라 하심이 그 예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따르는 일과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 너무도 중요하고

긴박하니 그 일 외에 다른 일들은 아무리 중요해도

상관치 말고 끊으라는 단호함입니다.

 

그런데 바오로가 아무 방해를 받지 않고

담대히 복음을 선포한 것도 같은 뜻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외부적 방해가 왜 없었겠습니까?

외부적 방해는 분명 있었을 텐데 그것을 방해로 여기지 않는

내부적 자유로움이 있었던 것인데 그것이 바로 상관치 않음일 것입니다.

 

북한 사람들과 상대하다 보면 '일없슴다'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되고,

그럴 때 우리의 호의를 매우 단호하게 끊는 차디참이 느껴져 놀라는데

이 말 안에는 그럴 일 없다거나 고맙지만 그럴 필요 없다는 뜻이 있지요.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주님과 우리 사이에 아무도 끼어들어서는 안 되고,

주님의 복음을 즉각적으로 선포하기 위해서는 그 어떤 일로 인해서도

지체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단호함이 우리에게 요구되는데,

요구를 받기보다는 가르침을 받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5월 30일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요한 21,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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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우리가 운명을 알고 살기를 원치 않으시고 ‘오늘’을 충실하게 살길 원하십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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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도 여전히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라고 하십니다이제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 죽을 것입니다곧 베드로는 증거의 삶을 살 것입니다그리고 요한은 증언의 삶을 살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베드로에게는 예수님을 따르는 활동의 사목직을 요한에게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관상의 역할이 주어졌다고 말합니다사실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한 베드로에게는 교회를당신이 사랑하신 요한에게는 어머니를 맡기셨습니다. 아멘.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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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나의 삶을 사는 것이고 다른 사람은 그의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너를 인정해 주면 속을 끓일 이유가 없건만 안타까움이 큽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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