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칸 성지

프란치스칸의 베들레헴 그레치오의 첫 성탄 구유

Margaret K 2021. 4. 23. 23:15

 

그레치오의 첫 성탄 구유

https://www.youtube.com/watch?v=UrBhlJiQJYY

 

 

성탄미사의 시작과 그레치오 수도원- 프란치스칸의 베들레헴

https://www.youtube.com/watch?v=ApIBKy7fLCU

 

 

 

 

 

 

 

토마스 첼라노 전기1장 제 1부 

 30 

주님의 성탄에 만든 구유

 

84. 프란치스꼬의 가장 높은 지향과 주된 바람과 최고의 결심은 복음을 모든 것을 통하여 실행하는 것이었고조금도 한눈을 팔지 않고열의를 다하여 애타게 갈망하는 온전한 정신과 뜨겁게 타오르는 온전한 마음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치심과 발자취를 따르는 것”20)이었다그는 끊임없이 묵상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말씀을 되새겼고예리한 사고력으로 그리스도의 행적을 되새겼다육화(肉化)의 겸손과 수난의 사랑이 특히 그를 사로잡았으므로 그는 다른 것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영광스러운 죽음이 있기 3년 전,21) 작은 마을 그렉치오22)에서 우리 주에수 그리스도의 성탄날에 그가 한 일은 기억할 만한 거이고경건하게 기억을 되살려 되새길 필요가 있는 것이다그곳에는 요한이라고23)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그는 평판도 좋았지만 또한 평판 이상으로 착한 생활을 하였다복되신 프란치스꼬가 그를 특별히 사랑했던 까닭은 그가 그 고장에서 덕망있고 영예로운 지위에 있었기 때문이었는데그것은 또 그가 자신의 고귀한 신분을 내세우지 않고 영혼의 고귀함을 추구했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복되신 프란치스꼬는 그를 불러 일을 자주 시켰다이번에도 복되신 프란치스꼬는 주님의 성탄 약 15일 전에 그를 불러 말했다.: “ 그렉치오에서 우리 주님의 축제를 지내고 싶으면빨리 가서 내가 시키는 대로 부지런히 준비하시오우선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을 기억하고 싶습니다아기가 겪은 그 불편함을 보고 싶고또한 아기가 어떻게 구유에 누워 있었는지그리고 소와 당나귀를 옆에 두고 어떤 모양으로 짚북더기 위에 누워 있었는지를 나의 눈으로 그대로 보고 싶습니다.” 착하고 믿음있는 그 사람은 이 말을 듣고 급히 달려가  성인이 말씀하신 자리에 성인께서 분부하신 대로 모두 준비하였다.

 

85. 즐거운 날이 다가오고크나큰 환희의 시간이 왔다그 근방에 거주하는 여러 형제들도 초대를 받았다동네의 남정네들과 아낙네들도 형편에 따라 밀초와 햇불을 준비하였다그들은 일년 내내 빛나는 별로써 낮과 밤을 밝혀 줄 바로 그날 밤을 밝혔다마침내 하느님의 성인이 당도하셨고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음을 알게 되었다그분은 보고 기뻐하였다구유도 준비되었고짚북더기도 옮겨졌으며소와 당나귀도 끌려 왔다그곳에서는 단순함이 추앙을 받았고가난이 높여졌으며겸허가 찬양되었다그렉치오는 새 베들레헴으로 꾸며졌다그 밤은 대낮같이 환히 밝혀졌고사람들과 짐승들을 매우 즐겁게 하였다사람들이 몰려 들었고그들은 새로운 신비로 말미암아 새로운 기쁨에 젖었다사람들의 우렁찬 목청에 온통 숲이 울렸고바위들까지도 그들의기쁨에 화답하였다형제들도 노래를 불렀고지금까지 못다 바친 찬미를 주님께 바쳤으며밤새도록 그들의 기쁜 소리가 울려 퍼졌다하느님의 성인이 탄성을 올리며 사랑에 도취되었고말할 수 없는 기쁨에 가득 차서 구유 앞에 섰다이렇게 하여 구유 앞에서 장엄미사가 거행되었고사제는 새로운 영혼의 평화를 체험하였다.

 

86. 하느님의 성인은 부제(副祭)였으므로24) 부제복을 차려입고 거룩한 복음을 낭랑한 목소리로 노래하였다그의 목소리는 우렁차면서도 부드러웠고맑고 낭랑하였으며,25)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최고의 보상을 받게 했다그는 둘렝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였다그는 가난한 임금님의 탄생과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 관하여 재미나게 말을 하였다그는 그리스도 예수를 부르고 싶을 때면 사랑에 불타서 그분을 “베들레헴의 아기”라고 부르곤 하였고“베들레헴”이라는 말을 할 때의 그의 목소리는 마치 어린 양의 울음소리 같았다그의 입은 말로써보다는 차리리 감미로운 사랑으로 채워져 있는 형편이었다그뿐 아니라 “베들레헴 아기”나 “예수”라는 말을 할 때그의 혀는 이 말의 감미로움에 입맛을 다시고 입술을 핥으며 맛과 향기를 맛보는 듯하였다전능하신 분의 은총이 그곳에 충만하였고그 자리에 있던 어떤 한 덕이 있는 사람은26) 놀라운 환시를 보았다그는 어린 아기가 말구유에 생명 없이 누어 있는 것을 보았다그런데 거룩한 하느님의 사람이 다가가서 마치 잠에서 깨어나게 하듯 그 아기를 소생시키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이 환시에는 의미가 없지 않아 있었다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서 아기 예수가 잊혀져 왔었지만은총의 힘으로 아기 예수가 하느님의 종인 프란치스꼬 성인을 매개로 하여 다시 생명을 얻어서 이 동네 사람들에게 강렬하게 기억되었기 때문이다마침내 성대한 축제가 끝났고각자 거룩한 기쁨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다.

 

87. 구유에 놓였던 건초는 보존되었고주님께서는 거룩하신 당신의 자비를 더하사그 건초로 무거운 짐을 지는 짐승들이나 다른 동물들을 구하셨다실제로 그런 일들이 일어났다갖가지 병에 걸린 주위의 많은 동물들이 이 건초를 먹은 다음에 병이 나았다난산(難産)으로 오랬동안 진통을 겪던 여인의 몸 위에 이 건초를 놓으면 순산(順産)하였다그리고 그 고장에 살고 있던 많은 남녀가 갖가지 재난에서 구제되어 그들이 바라던 안정을 얻었다.

후에 구유가 놓여 있던 자리에 주님의 성전이 들어섬으로써 그곳이 거룩하게 되었다프란치스꼬 사부님을 기념해서 궁ㅍㅎ 위에 제단이 마련되었으며또한 성당이 세워졌던 것이다그리고 그 옛날에 주위의 많은 동물들이 이 건초를 먹었듯이 앞으로도 사람들이 영혼과 육신의 건간을 위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흠도 티도 없으신 어린 양의27) 살을 이곳에서 먹을 것이다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 놓은 곳에 거하시고이루 말할 수 없는 사랑에 거하시며당신을 우리에게 내주셨고성부와 성신과 함께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도다하느님께 세세대대에 영원한 영광이 있어지이다아멘알렐루야알렐루야.28)

 

복되신 프란치스꼬의 생활과 행적에 관한

 1부는 여기서 끝난다.

 

 

 

프란치스꼬 성인과 구유

 

크리스마스를 불과 보름 앞두고 프란치스코는 폰테 콜롬보에 있는 그의 은둔소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는 로마에서 교황께 그의 규칙을 승인받고 막 돌아온 참이었다. 삼 년 뒤에 그가 세상을 떠났으므로 이번이 그의 마지막 로마 여행인 셈이었다. 얼마 뒤에 프란치스꼬는 그리스도의 오상(五傷)의 고통까지 겪게 된다.

 

어떻게 성탄을 경축할 것인가? 프란치스꼬는 성지 베들레헴을 방문했을 때를 떠올렸다. “왜 거기서는 구유를 꾸미지 않는 걸까? 그레치코 가까이에는 동굴이 있는데…….”

 

프란치스꼬의 친구로서 군인이자 그레치코의 영주인 죠반니(요한) 벨리타가 십여 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다. 요한은 프란치스꼬가 가진 매력에 흠뻑 빠져 세상 모든 명예를 내팽개치고 프란치스꼬의 삶을 온통 닮고자 했다.

 

프란치스꼬는 그에게 전갈을 보냈다. “만일 그대가 그레치코에서 주님의 축일을 지내기를 바란다면 내가 시키는 대로 부지런히 준비하여 주시게. 나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을 재현해 보고 싶다네. 나는 소와 나귀들이 서 있는 가운데 건초더미 위에 누우신 아기 예수님이 겪으셔야 했던 그 고초들을 우리 눈으로 직접 보기를 바란다네.”

 

요한은 곧바로 준비를 하였다. 횃불과 촛불들이 밤의 어둠을 밝힐 것이다. 동굴 안에는 구유가 꾸며졌고 소와 나귀도 데려왔다. 수사들의 은둔소에 도착한 프란치스꼬는 매우 기뻐하였다.

 

저녁이 되자 그레치코에서 손에 손에 횃불과 촛볼을 들고 줄지어 모여든 사람들의 노랫소리로 숲 속이 떠들썩하였다.

 

동굴 둘레에 사람들이 모이자 사제가 미사를 시작하였다. 프란치스꼬는 설교를 하였다. 프란치스꼬와 같은 시기 사람으로 전기 작가인 토마스 첼라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하느님의 성자(聖者)가 구유 앞에 서 있었다. 사랑에 가득 차 행복에 겨운 채로…… 그는 사람들을 최상의 선물로 초대하며 낭랑한 목소리로 복음을 낭송하였다. 그리고는 가난하신 왕과 베들레헴 고을에 관해 아름다운 말로 이야기하였다.”

 

오늘날도 그레치코에 가면 사람들은 건초더미 위에 놓인 넓이가 60cm, 높이가 90cm 되는 돌 하나를 볼 수 있다. 아래위가 모두 어두운 갈색을 띤 이 돌의 가운데에는 갈색 줄무늬가 있다. 위는 울퉁불퉁하고 얄은 V자 홈이 파여 있다. 누워 있는 아기의 모습을 조각한 것이다.

 

이렇게 소박하게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한 것이 프란치스꼬가 처음은 아니나 프란치스꼬는 매우 극적으로 이를 기념했다. 프란치스꼬는 무한한 광경을 이러한 모습으로 되살렸다. 그는 예수께서 이미 아기 때부터 고난을 당하셨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하였다. 성 바오로의 대담한 표현처럼 그는 여인에게서 태어나 냉혹하고 거역하기만 하는 세상에 던져진 하느님의 아기의 충만한 영광을 보았다. 프란치스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어떻게 가난을 택하셨는지”를 깨닫도록 사람들을 도와주고자 하였다. 프란치스꼬는 몸소 어떤 자금이나 보호책도 없이 공동체가 겨우 살아갈 정도로 극도의 가난을 택하였다. 성탄날에 그는 하느님께서 신성을 겨우 간직하신 채로 거기에 계신 것을 보았다.

 

프란치스꼬가 끊임없이 몰두한 것은 인간이 되시고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하신 그분의 겸손이었다. 그는 오직 베들레헴과 갈바리아만을 생각하였다.

 

프란치스꼬의 삶의 중심은 가난과 겸손과 순명의 덕이었다. 그는 그의 형제들에게 구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하였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으니, 가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얻어 주신 유산입니다.”

 

“프란치스꼬는 자주 그리스도와 성모님의 가난에 대해 묵상하며 눈물을 짓곤 하였다.”고 첼라노는 말한다. 이 축제를 지낸 다음해에 프란치스꼬는 그리스도께서 입으셨던 것과 똑같은 다섯 상처[五傷)를 그의 몸에 받는다.

 

프란치스꼬 시대 이전, 5세기 초엽에, 로마에 있는 성모 대성전에는 베들레헴의 동굴과 비슷한 기도실이 있었다. 실제로 그 기도실 때문에 이 대성전은 “구유가 있는 성모 성전”이라 불리게 되었다. 관례적으로 교황은 성탄 첫미사를 여기서 봉헌한다.

 

11세기에 부활 시기의 수난극을 본뜬 성탄극이 생겨났다. 프란치스꼬 바로 전 세기에는 성직자들이 산파와 동방 박사, 목동들 그리고 성탄 이야기에 나오는 다른 인물들처럼 분장을 하기 시작했고 살아 있는 동물까지 동원되었다.

 

그렇지만 단순하고도 강렬한 예식으로 가톨릭 신자들을 감동시킨 이는 프란치스꼬였다. 1226년 그가 죽은 뒤, 성탄 구유를 꾸미는 풍습은 유럽 전체에 널리 퍼져 나갔다.

 

“새 가톨릭 백과사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바로크 시대가 시작됨에 따라 구유는 복잡하고 생생한 풍경으로 치장되고 오늘날처럼 성가정의 인물과 목동들과 동방 박사들과 같은 세속적인 조각물들이 놓이게 되었다. 그래서 구유 만들기는 민간 예술로 발전되었는데 포르투갈, 티롤 그리고 그중에서도 특히 시칠리아의 두 왕국이 그러하였고 부르봉 왕조의 샤를르 3세가 활발히 장려하였다.”

 

“가정 구유는 카푸친회 수사들의 노력에 힘입어 1600년 이후에 유럽의 가톨릭 국가에서 성행됐다고 한다. 경건파 모라비아인들의 구유(‘푸츠’)를 제외하고는 프로테스탄트들은 처음부터 구유 만들기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종교 개혁 이전 영국에는 아기 요람처럼 생긴 긴 타원형의 구유가 있고, 다진 고기가 든 크리스마스 파이를 만드는 고유한 구유 만들기 풍습이 있었다.”

 

프란치스꼬 성인은 멋지게 번쩍이는 오늘날의 구유를 보고 웃을 것이며, 아마도 살아 있는 동물들과 함께 바깥에 서 있기를 더 좋아할 것이다. 그리고 오늘 우리들 앞에 서서 설교를 한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즐거운 광경보다 더 깊은 것을 바라보십시오. 짐승들의 마구간에서 여러분들의 영원한 음식이 되신 여러분의 하느님을 보십시오. 수놓인 옷도 없이 헝겊 조각에 싸인 힘없는 아기를 보십시오. 초라한 옷을 입은 아기의 부모님을 바라보십시오. 작은 불씨만이 비추이는 춥고 더러운 동굴을 느껴 보십시오. 그리고 더할 수 없는 사랑과 처절한 고통을 아는 인간의 마음을 취하시어 죄인과 나병 환자를 팔로 그러안으시고, 볼에 흐르는 눈물을 못에 뚫린 손으로 닦아 주시는 여러분의 하느님을 경배하십시오. 가난하고 겸손하신 여러분의 하느님을 경배하십시오.” (“Catholic Digest” 1990년 12월호에서 배봉한 옮김)

 

 

성탄 구유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레씨오의 크리스마스

1223년 크리스마스 2주일 전, 프란치스코는 앗씨시 서쪽의 그레씨오 마을에서 멀지않은 언덕배기의 작은 암자에 머물고 있었다. 동료인 첼라노의 토마스 형제에 의하면, 프란치스코는 지오바니라는 친구를 불러 다가오는 축제를 특별히 준비하는 일을 도와달라고 청했다. 그는 동물들과 건초를 암자 가까이 있는 동굴 앞에 가져오라고 요청했다. 거기에서 마을 사람들과 형제들에게 예수 탄생의 물리적 조건을 보여주기 위한 준비를 하자고 말했다.

그는 하느님의 아들이 외양간에서 소와 당나귀에, 짚과 추위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 어떤 느낌일까를 사람들이 경험할 수 있게 하였다. 프란치스코의 형제들과 그레씨오 마을 사람들이 성탄절 전야에 동굴 앞에 모여와 횃불을 켜고 성가를 부르며, 구유 위에 설치한 제단에서 사제와 함께 미사를 드린다.

프란치스코는 유다인 랍비처럼 입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하고 감격에 젖어 설교를 한다. 당대 사람인 토마스 첼라노는 마치도 아기 예수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오래 동안 잊혀져 왔다가 그날 밤 살아나는 것 같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 주위 산의 나무와 돌들 모두에 사람들이 부르는 찬미 노래가 메아리로 울려 퍼졌다.

이러한 단순한 예수의 탄생 장면은 다음 세기에 프란치스코 회원들이 앗씨시를 떠나 움직임에 따라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이제는 전 세계에서 크리스마스 기념 때에 익숙한 장면이 되었다. 상업화로 고통받고, 그 중요성이 때때로 맹목적으로 감상에 젖어버리기도 하지만, 본래 예수의 탄생 장면은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가난한 이들의 매일 삶에, 창조의 세계에, 짚과 바위의 세계에 들어오심을 강력하게 인정하는 선언이었다.

예수탄생, 성찬례 그리고 동정녀

그리스도의 탄생축일에서 프란치스코가 감명을 받았던 것은 단순함, 겸손함과 가난이었다. 많은 방식으로 성탄은 프란치스코에게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 개념을 형성하도록 도와주었다. 토마스 형제는 ‘육화의 겸손’에 관해 프란치스코가 깊은 이해를 했다고 말한다. 프란치스코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가브리엘 천사를 통하여, 하늘의 가장 높으신 아버지께서는 아버지의 이 말씀을 선포하셨다. 너무나 소중하고, 너무나 거룩하며 영광스러운 이 말씀은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동정녀 마리아의 태 속에서 인간의 살과 우리의 연약함을 받으셨다. 말씀은 모든 것 위에 가장 풍요로운 존재이시지만, 이 세상에서 그분은 가장 복 받은 동정녀이신 어머니와 함께 가난을 선택하기를 원하셨다.

그레씨오의 크리스마스 전야 축제는 선택에 관하여 말한다. 거룩한 말씀께서 자발적으로, 마리아와 함께 삶의 한 형태로서 가난을 선택한 것이라고. 이 선택의 드라마는 앗씨시 마을 외곽의 한 언덕위에서 춥고 황량한 가운데 오로지 동물들과 사람들이 함께 따스함을 나누는 모습으로 감명을 일으킨다.

프란치스코는 그레씨오 주민들과 그의 형제들이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복음의 설명과 그 상황을, 또한 ‘아기인 예수님의 필요가 거의 채워지지 않는 상황’을 직접 보기를 원했다. ‘그곳에서는 단순함이 명예를 얻고, 가난이 고양되며, 겸손이 격려를 받는다. 그리고 그레씨오는 말하자면 새로운 베들레헴이 되었다.’

단순함, 가난, 그리고 겸손 이 세 가지는 프란치스코에겐 예수님의 전 삶을 보여주는 표징들이었고, 그런 삶을 따르고자 했다. 이 세 가지를 똑같이 기념하는 것이 성찬례의 기념이며, 단지 그레씨오 동굴의 구유뿐만 아니라, 매 성찬례에서 이루어진다. 프란치스코는 미사가 거행될 때마다 마치 주님의 육화가 다시 확인된다고 생각했던 것과 같다. ‘작은 빵 조각’은 거의 눈에 띄지 않지만 바로 그곳이 하느님의 아들이 ‘숨어 계신 자리’이다.

프란치스코는 유한한 것 안에 담겨있는 이 무한함의 역동성을 ‘하느님의 겸손’으로 보고 있으며, 이 겸손은 단지 찬양의 대상만이 아니라, 또한 모방해야 할 대상이다. ‘우리 자신을 겸손하게 만드는 것’은 다시 말하자면, ‘하느님처럼 되는 것’이다.

프란치스코의 표현대로 하자면, 마리아는 ‘교회가 된 동정녀’이다. 예수님처럼 마리아도 가난하다. 형제들에게 필요가 있을 때 문전에서 문전으로 탁발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권고하면서 프란치스코는 예수님의 모습과 함께 마리아를 겸손과 가난의 모범으로 제시한다. 예수님이 태어난 가난의 상황은 또한 마리아의 삶과 모든 예수님의 제자들의 삶의 상황과 같았다. 이 가난의 상황은 우연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유로운 선택이고, 고양으로 이끌 삶의 방식을 끌어안는 것이었다.

크리스마스기념, 성찬례기념, 마리아의 모범은 모두 프란치스코에게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가난과 겸손을 가리켜 주고 있다. 하느님의 아들의 육화, 인간이 되고 물질이 되는 육화를 프란치스코학파에서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그것은 ‘가난’이라는 말이다.

출처 : 가톨릭일꾼(http://www.catholicworke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