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3월 4일 사순 제2주간 목요일

Margaret K 2021. 3. 4. 07:20

2021년 3월 4일 사순 제2주간 목요일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루가16,19-31)


If they will not listen to Moses and the prophets,
neither will they be persuaded
if someone should rise from the dea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최종훈신부-


같은 것을 바라보면서도 같은 것을 보지 않습니다. 같은 상황을 겪으면서도 같은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나름대로 생각하고 판단하여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바라보며 선택하고 결정합니다. 자신의 관심사에 집중하느라 주위를 둘러보지도 못하며 자신의 이익에만 몰두합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바라보고 있으며 무엇에 관심이 있습니까? 어떤 가치로, 어떤 생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의 집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있었습니다. 부자는 자신의 집 앞에서 언제나 먹을 것을 구걸하며 너무나 힘겹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라자로를 보았지만, 그런 라자로에게 눈길조차 두지 않습니다. 그의 관심은 자신의 호화로운 생활과 즐거움뿐입니다. 부자는 죽어서도 다른 것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자신의 목마름과 고통, 그리고 자신의 가족들에게만 관심을 둡니다. 주위를 둘러보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 관심이 없으며, 다른 이들과 함께 아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부자의 집 앞을 지나가셨다면 무엇을 보셨을까요? 당연히 라자로를 보시며 가엾은 마음이 드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병을 고쳐 주셨거나, 아니면 먹을 것을 주셨거나, 그것도 아니면 함께 이야기라도 나누셨을 것입니다. 당장 무엇을 하실 수는 없으셨더라도 그의 아픔과 고통에 함께해 주셨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시선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하느님의 나라로 만들어 가려면 예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의 것만을 채우고자 하는 시선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시선으로 주위를 바라보고 있습니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인간의 능력은 무한대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미국에서 두 모자가 차로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외딴 사막을 달리고 있을 때 차가 고장이 났고, 아들은 지렛대로 차를 들어 올려 차체 밑을 살폈습니다. 바로 그때 지렛대가 미끄러지면서 차가 내려앉았고 아들은 뜨겁게 달궈진 아스팔트와 차 사이에 깔리고 말았습니다. 아들을 빼내지 못하면 몇 분 내로 질식사할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어머니는 범퍼를 움켜쥐고 차를 들어 올려 아들이 빠져나올 수 있을 때까지 버텼습니다. 아들이 빠져나오자마자 돌연 힘이 빠졌고 도로 위로 주저앉았지요. 56kg도 안 되는 나이 많은 여인이 수백 kg이 넘는 무게를 적어도 10초 이상 들어 올린 것입니다.

신체 능력뿐 아니라 인간의 지적 능력은 대단합니다. 우리 뇌는 1.5ℓ에 불과하지만, 아주 낮게 잡아도 100억 개 이상의 정보를 저장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를 알아보기 위해, 지금까지 기억하는 것을 종이에 적어보십시오. 우리는 2천 년이 걸릴 정도의 정보량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놀라운 능력을 갖춘 사람이 바로 ‘나’인 것입니다. 할 수 없는 것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할 수 있음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어떤 행동이 미래의 나에게 큰 도움이 되는 결정이 될까요?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이 선택은 바로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잘 아는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에 비참한 삶을 살았던 라자로는 하늘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고, 세상 안에서 호화로운 삶을 살았던 부자는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습니다. 인생 역전이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누구의 삶이 더 비참할까요? 유한한 세상에서의 만족을 누렸던 부자일까요? 아니면 영원한 세상에서의 행복을 누리는 라자로일까요? 당연히 부자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 안에서는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후회하지 않는 삶을 위해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굳은 믿음과 진정한 회개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들으라고 합니다. 즉, 성경, 곧 하느님께서 일관되게 내리시는 가르침을 듣고 따라야 함을 이야기하십니다.

자신의 선택에 이 모든 것이 결정됩니다. 놀라운 능력을 갖추고 있는 우리이기 때문에, 자신의 선택은 분명히 커다란 변화와 함께 나를 가장 좋은 길로 이끌어줍니다.

후회하지 않도록 잘 선택해야 합니다.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가 나오기를 바라는 것은 미친 짓이다(아인슈타인).

감사일기

1,000명의 사람에게 감사 일기를 쓰게 했습니다. 그리고 몇 달 뒤에, 이런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 상황을 파악하는 능력 향상.
- 어떤 일을 할 때 열의를 갖고 일함.
- 숙면하게 됨.
- 면역력 강해짐.
- 타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황을 빨리 알아챔.
- 트라우마, 고통에서 더 빠르게 회복.
- 어떤 상황에서도 스트레스를 덜 받음.

감사하는 마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줍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세상의 관점으로 많은 재산과 높은 지위만을 청하고 있을 뿐입니다. 작은 것에 감사하는 마음 자체를 갖지 못하니, 늘 불평불만만 가득할 뿐입니다.

 어린이 때부터 십일조를 교육해야 하는 이유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부자와 거지 라자로’ 이야기입니다. 이는 루카 복음만의 독특한 전통인데, 결국 내어놓음과 믿음은 비례한다는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부자가 지옥에 간 이유는 거지 라자로에게 아무것도 내어놓지 않아서입니다. 아무것도 내어놓지 않은 이유는 하느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자기 형제 다섯에게 라자로를 부활시켜 지옥에 오지 않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이는 그가 착해서가 아니라 형제들이 오면 자신이 더 고통스러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옥은 자신 때문에 지옥에 오게 된 이들이 자신을 더욱 괴롭힐 것이기 때문에 더 고통스러워지는 곳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늘 복음의 핵심을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결국, 구원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믿으면 구원받고 믿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합니다. 부자는 자신이 믿지 못한 것이 표징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믿을 마음이 없어서 믿지 못한 것이지, 믿을 마음만 있다면 성경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믿음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왜 믿을 마음이 없으면 라자로가 부활하는 것을 보더라도 믿음이 생기지 않는 것일까요? 믿으면 그 믿는 분의 뜻을 따라야 하는데 그것이 싫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못해서 표징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자신의 것을 내어놓아야 할까 봐 믿지 않는 핑계를 표징이 없다는 것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저도 스물다섯 살 때 주님의 부르심을 느꼈습니다. 이전부터 불러주셨지만 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혼하고 싶은 마음에 귀를 막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를 불러주시고 있다면 확실한 표징을 좀 주십시오.”라고 청했습니다.

      고민하던 중 술을 마시고 새벽에 성당으로 올라갔습니다. 성당 앞에 있던 성모상에서 푸른 빛이 솟더니 성모상이 성모님으로 변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너무 두려워 무릎을 꿇었습니다. 고개를 들 수 없었습니다. 가끔 성모상 다리를 보았지만 여전히 다리는 사람의 것이었습니다. ‘왜 계속 계시나?’라는 불만까지 생겼습니다. 한 20여 분 동안 그러고 있다고 무릎이 너무 아파져 올 때 즈음 다시 고개를 들어보니 성모상은 다시 대리석이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내려오면서 ‘내 착각이었겠지. 술을 마셔서 그래. 성모님이 나에게 나타나실 리가 있나?’라는 생각을 했고, 계속 “저를 불러주시려면 표징을 좀 내려주세요!”라고 청했습니다. 저는 결혼하고 싶은 마음을 버릴 수 없어서 표징이 주어져도 믿을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믿을 마음만 있었다면 ‘행복’이란 모토를 어렸을 때부터 가지게 해 주셔서 『하느님이시오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를 읽게 하셨고 주님을 따르는 행복을 깨닫게 해 주시어 저를 불러주셨다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나중에 제 일생을 글로 써보고 난 후에야 저 자신을 내어주기 싫어서 스스로 믿기를 거부하고 있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믿기 위해 표징을 요구하는 일은 그만해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믿어서 자기 것을 내어놓게 될까 봐 그냥 믿기 싫은 것입니다. 성경엔 부자가 하늘나라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 통과하기보다 어렵다고 나와 있습니다. 부자는 그게 싫어서 안 믿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어렸을 때부터 내어놓는 법을 가르치면 어떻게 될까요? 라자로는 자신의 종기를 개들이 핥게 했습니다. 내어놓을 줄 아는 사람이었기에 믿을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루카 복음에서 ‘내어놓음’과 ‘믿음’은 궁극적으로 ‘하나’입니다. 이것이 어렸을 때부터 봉헌과 자선을 가르쳐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 습관이 들었다면 커서도 신앙을 잃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왜 어렸을 때는 쉽게 부모를 찾는데 어른이 되면 천상 부모를 찾는 사람이 그렇게 적을까요? 어렸을 때는 자아가 발동하지 않았고 커서는 발동하기 때문입니다. 자아는 생각을 통해 자신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그런데 아기들은 언어가 없으니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쉽게 부모를 찾고 믿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 자아가 생각을 통해 소유욕과 성욕과 교만의 욕구로 자신을 오염시킵니다. 이 욕구들을 잃게 될까 봐 믿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 세 욕구 중, 가장 기본적인 욕구가 소유욕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계기가 바로 하느님께 바쳐야 했던 선악과를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려 했기 때문에 시작되었습니다.

 

따라서 조금이라도 내어놓는 연습을 시킨다면 자아의 영향이 그만큼 줄어들고 그러면 믿기가 쉬워집니다. 내어놓아도 크게 가난해지지 않고 사는 데 지장이 없으며 오히려 기분이 좋아짐을 깨닫기 때문에 주님을 믿어서 자신의 것을 내어놓아야 할 때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세계적으로 존 록펠러만큼 큰돈을 번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는 30대에 이미 세계 최고 부자였습니다. 물론 그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개신교에서 그렇게도 록펠러를 십일조의 모범으로 꼽는 데는 다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는 큰 부자가 되어서도 십일조를 계산하는 직원이 40명이 될 만큼 십일조에 충실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제가 어렸을 적에, 처음으로 일을 해서 번 돈이 1달러 50센트였습니다. 저는 일주일 동안 일하고 받은 돈을 집으로 가져가서 어머니에게 드렸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어머니에게 돈을 드리면서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어머니는 그 돈을 앞치마로 감싸면서 제 눈을 바라보셨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얘야, 네가 주님에게 십일조, 그러니까 15센트를 드린다면 엄마는 아주 자랑스러울 게다.’ 저는 난생처음으로 번 돈의 십일조를 하느님께 드렸고, 그 후 지금까지 빠짐없이 십일조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때 1달러 50센트에서 15센트를 떼어 드리지 못했다면, 제가 처음으로 백만 달러를 벌었을 때 십일조를 드릴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15센트를 봉헌하지 못한다면 10만 달러를 봉헌하는 것은 훨씬 어렵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봉헌하는 습관을 들이고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는 습관을 들이게 한다면 그 아이는 주님께 대한 믿음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내어줄 수 있는 만큼 자아가 줄어들고 자아가 줄어든 만큼 믿기 쉽기 때문입니다. 내어주는 마음과 믿는 마음은 결국 하나입니다. 자녀가 믿음을 잃지 않게 만들려면 내어주는 법부터 가르쳐야 합니다.

 -조재형신부-


겨울철 선물로 목이 조금 긴 털신을 얻었습니다잘 신고 다니는데 새 신이라 그런지 발목 근처가 쓸리면서 아팠습니다신발 끈을 조이면 나아질 것 같아서 조였더니 더 아팠습니다이번에는 신발 끈을 느슨하게 해 보았습니다발목이 아프지 않았습니다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습니다오래 걸으려면 쉬었다가는 것이 필요합니다물 한 모금 마시고잠시 쉬면 다시 힘이 나고걸을 수 있습니다고무줄도 너무 잡아당기면 탄성이 약해져서 끊어지기 마련입니다음식도 과식하면 탈이 나고술도 과음하면 생활에 지장을 줍니다줄 것은 주고받을 것은 받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겨울이 가면 봄이 오는 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조건 없이 주는 것은 신앙입니다사순시기는 앞으로 나가기 위해서 신발 끈을 조이는 시간이 아닙니다사순시기는 잠시 숨을 고르는 시간입니다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기 위해서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미국에서 사람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다고 합니다성공한 사람능력 있는 사람은 주로 과거를 돌아본다고 합니다관심은 지구촌이라고 합니다충분히 성공했기 때문에 자신이 성공한 이유를 과거에서 찾는다고 합니다해외여행의 경험이 많기 때문에 관심도 국제적이라고 합니다평범한 중산층의 사람은 주로 미래를 생각한다고 합니다관심은 지금 살고 있는 나라였다고 합니다조금만 노력하면 더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지금 살고 있는 나라의 정책과 정치에 관심이 있다고 합니다정책과 정치가 삶에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가난한 사람아픈 사람은 현재를 생각한다고 합니다과거를 생각하기에는 현재의 삶이 고달프고미래를 생각하기에는 현실이 막막하기 때문입니다관심은 지금 살고 있는 동네라고 합니다지금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 일자리를 찾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문득 생각합니다신앙인은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신앙인은 무엇에 관심을 두어야 할까요신앙인은 과거를 돌아보아야 합니다그 길이 주님을 따른 길이었는지나의 욕심을 채운 길이었는지 보아야 합니다신앙인은 현재에 충실해야 합니다나의 욕심을 채우는 길이었다면 주님을 따르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신앙인은 미래를 생각해야 합니다지금의 고난과 슬픔은 주님의 자비하심을 청하며 희망을 간직해야 합니다지금의 성공과 기쁨에 교만하지 않고주님의 은총에 감사드려야 합니다신앙인은 세상의 재물성공권력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세상이 주는 평화세상이 주는 행복세상이 주는 성공은 결코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를 해 주고 있습니다여기서 주인공은 누구일까요평생 가난하게 살았던온 몸에 종기가 나서 지나가던 개가 그 상처를 핥았던 라자로일까요아니면 세상의 뜻대로 살다가세상에서는 편안하게 살다가 하느님의 품으로 가지 못하고 지옥으로 떨어진 부자일까요저는 라자로처럼 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라자로와 같은 사람을 도와주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주님의 가르침이라 생각합니다오늘의 복음은 교회의 역할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예수님께서 루가 복음 4장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교회는 가난한 이들병든 이들외로운 이들굶주린 이들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부자는 가난한 이들을 도와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교회는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오늘 독서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주는 길을 전해줍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나는 사람마다 제 길에 따라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 갚는다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제때에 열매 맺고잎이 아니 시들어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주님 제게 대체 왜 이러십니까? 어찌하여 저를 이토록 힘들게 하십니까?

 -양승국신부-

 

삶이 고달플 때 마다, 고통이 쓰나미처럼 밀려올 때 마다, 하느님이 원망스러울 때 마다 펼쳐보는 최애(最愛) 성경이 있습니다. 예레미야서입니다. 어린 시절 소명에 불린 예레미야는 평생토록 고통을 친구처럼 끌어안고 살았던 예언자로 유명합니다.

  

예레미야 예언서를 천천히 읽어 나가다보면 저절로 큰 동정심과 측은지심이 밀려옵니다. 자연스레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이 고통은 별 것도 아니로구나, 하는 위로도 다가옵니다.

  

내가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이 너무나 극심해 견딜수 없을 것 같을 때, 신기한 해결책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누군가의 더 큰 고통을 목격할 때입니다. 그런데 고통의 가장 끝에 서 계신 분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최초로 소년 예레미야를 부르셨을 때, 그는 너무 두렵고 떨려 완강히 거절하려 했습니다. “아, 주 하느님 저는 아이라서 말할 줄 모릅니다.”(예레미야서 1장 6절) 그래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마음 내켜하지 않는 예언자’로 알려졌습니다.

  

불림을 받자 마자 시작된 예언자로서의 삶은 참으로 혹독했습니다. 친구들은 또래들과 어울려 들로 산으로 놀러다니고 있을 나이에,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고관대작들 앞에서, 수많은 백성들 앞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달해야 했습니다.

  

전달해야 할 하느님의 말씀이 듣기 좋은 말씀, 덕담, 칭찬과 위로의 말이었으면 득달같이 달려가서 예언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전하라고 하신 말씀은 지도층 인사들의 타락과 우상숭배를 고발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거듭된 배신과 불충실에 따른 왕국의 파괴와 멸망을 예언해야만 했습니다.

  

너무 어린 예언자였던지 사람들은 무슨 핏덩어리가 와서 소란을 피우나? 하고 무시했습니다.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애송이가 왜 자꾸 시끄럽게 하는가? 하며 웃었습니다.

  

말빨이 제대로 먹히지도 않고, 가는 곳 마다 천대받고 무시당하던 예레미야 예언자가 하루는 얼마나 괴로웠던지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아, 불행한 이 몸! 어머니, 어쩌자고 날 나으셨나요? 온 세상을 상대로 시비와 말다툼을 벌이고 있는 이 사람을. 빚을 놓은 적도 없고 빚을 얻은 적도 없는데 모두 나를 저주합니다.”(예레미야서 15장 10절)

  

“제가 날마다 놀림감이 되어 모든 이에게 조롱만 받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저에게 날마다 치욕과 비웃음 거리만 되었습니다.”(예레미야서 20장 7~8절)

  

그러나 예레미야는 예언자이기에 겪어야만 했던 그 혹독한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의 말씀에 꾸준히 순명했습니다. 아직 어렸기에 틈만 나면 “주님 제게 대체 왜 이러십니까? 어찌하여 저를 이토록 힘들게 하십니까?” 하고 부르짖었지만, 결코 예언직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그 길을 걸었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의 생애는 거듭되는 고통과 시련 속에 살아가는 오늘 우리에게 큰 위로와 희망이 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거듭된 시련과 실패를 통해 예레미야 예언자를 성장시키셨고, 튼튼한 당신의 종으로 거듭 나게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레미야 예언자의 생애를 통해 실패를 통해서도 성공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하는 동시에, 분명 우리 생애 안에서도 하느님께서는 처참한 실패에서 성공에로 이끄시는 분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실패를 이용해서 우리의 상처를 영광의 배지로 바꿀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있었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의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극단적인 두 인물의 대조된 모습을 통해,

불신과 재물의 올가미에 사로잡힌 우리를 하느님의 말씀에로 초대합니다. 이 비유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루카 16,20)

 

부자는 가련한 라자로를 거들떠보지도 않으며, 자신과 라자로 사이에 골짜기를 파놓고 분리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가 이승에서 파놓고 건너가지 않은 그 분리의 골짜기는 저승에서도 그가 건너갈 수 없는 분리의 골짜기가 되고 맙니다.

사실, 이 부자는 특별한 악행을 저지르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자신의 재물을 자신의 호화로운 생활과 즐거움을 위해 사용하고, 타인에게는 무관심하고 인색했습니다.

곧 자기 자신에 빠져 타인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대문 앞에 누워있는 가난한 라자로를 무시하고 무관심했습니다.

한편 오늘 복음은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해서 할 바를 다한 것이 아니라, 선행과 자비를 베풀지 않음이 곧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하면,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곧 죄라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곧 부유함(부자)=멸망, 가난함(빈자)=구원이라는 등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심판받은 것은 그가 단순히 부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이웃사랑을 하지 않은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음식을 먹되 나누어 먹어야 하고, 마시되 자신의 혀만 적시는 것이 아니라 남의 혀도 적셔주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재물을 소유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소유하되 소유당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나아가서, 자비를 입어 부자가 되었으니, 가난한 이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에서 부자가 죽어서 아브라함에게 한 말,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6,24)라는 간청은 제가 자비를 베풀게 해주십시오.’ 라는 간청으로 바뀌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부자가 대문 앞에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로 누워있어도 못 본 것은 자신의 호사스러움과 즐거움, 탐욕과 인색에 눈이 가려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무시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형제들 사이에, 또 가난한 이들과의 사이에, 냉대와 무시와 무관심의 골짜기를 파놓아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것은 곧 저승에서의 골짜기가 되고 말 것입니다.

한편, ‘라자로라는 이름은 ‘하느님이 도와주시는 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라자로가 구원을 입은 것이 그의 가난하고 고통 받은 삶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도움과 자비를 입은 것임을 말해줍니다.

곧 하느님의 호의와 사랑을 입고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드러내줍니다.

그렇습니다. 라자로가 은총을 입은 것은 바로 하느님의 자비였던 것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루카 16,20)

 

주님!

마음의 눈을 열어 타인의 처지를 볼 줄 알게 하소서

음식을 먹되 나누어 먹고,

자신의 혀만 아니라 남의 혀도 적셔주게 하소서

재물을 소유하되 소유당하지 않고,

탐욕에 빠지지 않고 인색하지 않게 하소서.

악을 저지르지 않을 뿐 아니라, 선을 베풀게 하소서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아멘.

 온갖 환난을 이겨내는 힘

 -반영억신부-


천국에 대한 희망은 어떠한 시련의 십자가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줍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냐시오 성인도 “천국을 생각하면 이 지상의 집착과 애정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루에 한 번만이라도 천국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고 권고합니다. 우리는 이 땅 위에 살지만 아버지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천국본향을 그리워해야 하겠습니다.

신앙인은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을 때 세상과 타협하게 됩니다. 그러나 부활에 대한 희망은 온갖 환난을 이겨내는 힘이며 능력입니다. 현세의 이익과 행복을 뛰어넘는 고달픔을 차지하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이 세상을 소중히 여기지만 결국은 관리를 하다가 하느님 앞에 서야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매순간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을 용기 있게 선택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기뻐합니다. 천국본향에 대한 믿음을 굳건히 하는 그만큼 우리의 삶은 풍성해 집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의 부와 가난을 견주어 ‘복이 있는 사람’, 복이 없는 사람, 혹은 ‘팔자가 좋은 사람, 팔자가 사나운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복음은 그 생각을 바꾸도록 안내합니다. 부자는 잠시 동안 호화로운 삶을 즐기다가 영원한 고통을 안게 되었고, 반면 라자로는 잠시 동안 고통스런 삶을 살다가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은 특별히 어떤 잘못을 범했다거나 선행을 하여서 그런 결과를 가져온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이 그렇게 살다 보니까 한 사람은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게 되었고, 한 사람은 인간의 한계를 느끼며 오로지 하느님께만 의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부라는 것이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하느님을 멀리하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르10,25). 잠언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잠언30,8-9). 분명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있는 그대로를 보고, 사람들은 보고 싶은 대로 봅니다.

 

혹 지금 누리고 있는 행복에 겨워 이웃에게 눈을 돌리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지금 너무 힘들어 절망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나만 생각하고 살면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무관심이 죄입니다. 무관심한 사람에게는 누구의 가르침도 들리지 않습니다. 결국 그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져야 합니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마태25,46).

지금 힘든 이들도 절망하지 마십시오.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야고1,12). 그리고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요한12,24).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마태10,22). 그러므로 시련을 만나게 될 때 하늘을 바라보며 신뢰를 다지시기 바랍니다.

우리 삶의 여정 안에서 시련도 유혹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끝까지 인내하는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유익한 것입니다. “금은 불로 단련되고 주님께 맞갖은 이들은 비천의 도가니에서 단련됩니다”(집회2,5). 예기치 않은 어려움 속에서도 항상 깨어서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늘 우리를 기다리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한 순간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오늘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고 천국을 장담할 수 없는 만큼 지금 여기서 주님의 마음에 들게 충실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보다 세상을 우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천국은 이 세상에서 열리게 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앵무새를 키우는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날마다 “아이고 힘들다, 아이고 죽겠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습니다. 앵무새도 날마다 “아이고 힘들다. 아이고 죽겠다.”고 따라했습니다.

젊은이는 살기가 너무 힘들어 신부님을 찾아 상담하기로 작정하고 앵무새를 안고 사제관으로 갔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사제관에도 앵무새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젊은이의 앵무새가 “아이고 힘들다. 아이고 죽겠다.”라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사제관의 앵무새가 답례를 하였습니다. “네 믿음대로 될 것이다. 네 믿음대로 될 것이다!”

지치고 힘들 때 “내 힘들다!”고 낙심하지 말고,
거꾸로 “다들힘내!”라고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송영진신부-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그러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루카 16,19-23).”

 

1) 부자가 죽어서 간 곳은 ‘죄인들이 고통을 받는 곳’이고,

라자로가 간 곳은 ‘의인들이 안식을 누리면서 하느님의 위로를 받는 곳’입니다.

부자의 죄는 무엇일까?

성경 해설서나 강론들을 보면 거의 대부분, 부자의 죄는 ‘이웃에 대한 무관심’,

‘사랑 실천을 안 한 죄’, ‘이기심’, ‘자기중심적 사고방식’ 등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죄가 과연 그것뿐일까?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하지 않고, 도둑질을 하지도 않고,

착하고 성실한 노동으로 돈을 모아서 부자가 되었을까?

비유의 내용을 보면, 부자의 죄가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몇 가지 암시가 들어 있습니다.

첫 번째 암시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입니다.

이 옷들은 그 부자가 왕족이거나 지배계층에 속한 귀족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당시의 사회 상황을 생각하면,

그가 부유하게 살 수 있었던 것은 백성들을 착취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암시는 29절과 31절에 언급되어 있는,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은 것”입니다.

이 말은, 그 부자가 십계명을 비롯해서 하느님의 계명들과 율법들을

실천하지 않았음을, 즉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생활을 했음을 암시합니다.

(‘악한 짓’을 하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를 말씀하시기 전에,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 16,13).”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하느님을 섬기지 않고 재물을 섬긴 자’입니다.

그는 재물을 사랑하고 섬기고 떠받들면서

하느님과 이웃은 업신여기는 죄를 지었을 것입니다(루카 16,13).

야고보서 저자는 그런 부자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보십시오, 그대들의 밭에서 곡식을 벤 일꾼들에게 주지 않고 가로챈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곡식을 거두어들인 일꾼들의 아우성이

만군의 주님 귀에 들어갔습니다. 그대들은 이 세상에서 사치와 쾌락을 누렸고,

살육의 날에도 마음을 기름지게 하였습니다.

그대들은 의인을 단죄하고 죽였습니다(야고 5,4-6ㄱ).”

(오늘날에도 노동자들을 탄압하고, 노동자들에게 정당한 임금을 주지 않고,

뇌물, 횡령, 탈세, 장부조작, 기타 여러 가지 부정한 방법들을 다 동원해서

재물을 모으는 나쁜 부자들이 많습니다.

왜 걸핏하면 재벌 회장들이 교도소에 가는 것인지......)

 

2) 라자로가 죽어서 ‘위로를 받는 곳’으로 간 것은 ‘의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가난했다는 이유만으로 그곳으로 간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는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서 구걸을 하면서 살았으니

의로운 일을 할 겨를이 없었는데, 그가 어떻게 의인인가?

꼭 겉으로 보이는 어떤 일을 해야만 의인인 것은 아닙니다.

못하는 것과 안 하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어도 기도는 할 수 있고,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3)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라는

말은, 부자가 가끔 라자로에게 빵 부스러기를 던져 주었음을 암시합니다.

아마도 부자는 어쩌다 한 번씩 라자로에게 빵 부스러기를 던져 주면서,

자기는 ‘사랑 실천’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 부자가 한 일을 ‘사랑 실천’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랑은 ‘하나 되기’입니다.

부자가 한 일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는 일입니다.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던 ‘부자의 삶’과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살았던

‘라자로의 삶’의 거리는 멀어도 너무 멀었습니다.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루카 16,26).”

부자와 라자로 사이에 가로놓인 ‘큰 구렁’은 부자 자신이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저승에서는 서로 건너갈 수 없지만, 이승에서는 건너갈 수 있고,

구렁 자체를 없앨 수도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라자로의 힘으로는 그 구렁을 건너갈 수도 없고, 없앨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인데도 하지 않은 것, 그것은 죄입니다.

 

4)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호소합니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저에게 다섯 형제가 있는데, 라자로가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루카 16,27-28).”

부자가 아브라함을 할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그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을, 즉 하느님을 믿고 있고,

계명들과 율법들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형제들을 걱정하는 것은 그래도 그의 마음속에 조금이라도

사랑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부자의 모든 말과 행동을 무조건 다 나쁜 것으로 보려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정말로 자기 잘못을 뉘우쳤다면, 또 남을 걱정하는 마음이 있다면,

형제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경고해 달라고 부탁했을 것입니다.

(자기 형제들만 생각하는 것은 이기심입니다.

그리고 죽은 다음에 저승에서 뉘우치는 것은 회개가 아니고,

‘뒤늦은 후회’일 뿐입니다.

어쩌면 그 ‘후회’가 그곳에서 겪는 가장 큰 고통일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따로 경고할 필요는 없고,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잘 들으면 된다고 대답하는데(루카 16,29),

이 대답은, 그 부자의 형제들이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사실 부자 자신이 바로 그렇게 살았습니다.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것, 그것도 죄입니다.

 복음: 루카 16,19-31: 아브라함이 라자로를 품에 안고 있었다

 -조욱현신부-


자주색 옷을 입은 부자는 탐욕을 부렸다거나 남의 재물을 빼앗았다거나 간음을 했다거나 다른 무슨 잘못을 저질러서 비난받는 것이 아니다. 그가 잘못한 것은 교만이었다. 그는 라자로라는 거지가 종기투성이로 대문 앞에 누워 있어서 그를 보았지만 가엾은 마음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기 재산을 모두 버리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식상에서 내버리는 것 빵부스러기라도 그 거지에게 주었어야 했다. 아무 동정도 받지 못한 라자로는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먹으려 했다. 게다가 불치의 병이 그를 괴롭혔다. 개들조차 그의 종기를 핥으며, 그를 해치지 않고 돌보고 있다. 짐승들은 아픈 데를 혀로 핥아 고통을 가라앉히고 상처를 낫게 한다. 그런데 부자는 개들보다 잔인했다. 라자로를 가엾이 여겨주지도 않았고 무자비하게 굴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서는 하늘에서의 삶과 영원한 형벌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내가 선택한 삶에 대한 귀결이라고 하신다.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25절)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26절) 라고 하신다. 이 구렁은 서로 반대되는 삶을 선택한 데 대한 심판이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에 역행하는 삶을 선택하면 깊고 가늠할 수 없는 구렁 같은 것을 파고 마는 것이다. 그분은 부유함을 고통으로, 가난은 원기 회복으로, 자주색 옷은 불길로, 헐벗음은 기쁨으로 돌려주셨다. 주님께서 고통을 겪고 있는 부자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으신 것은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 자비를 베풀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자의 탄원을 무시하신 것도 그가 땅에서 가난한 이의 탄원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부자는 살아있을 때 라자로와 그 같은 사람들을 돌봄으로써 그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 두었어야 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고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태 10,42) 이런 사람은 가난한 이웃과 함께 하는 이며, 그는 상을 받을 것이다. 부자는 고통을 겪으며 마지막으로 라자로를 자기 집으로 보내어 다섯 형제가 또 이 고통스러운 곳으로 오지 않게 해 달라고 청한다. “아브라함이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29절)고 대답했을 때, 죽었던 사람이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이라고 하자,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31절)

 

이 말씀은 유대인들에게 그대로 이루어졌다. 그들은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고,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예수님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요한 5,46) 모세와 예언자들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실 분이 바로 그분이라고 예언하였다. 아브라함의 말뜻은 바로 이것이다. 부자의 죄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웃의 필요를 보고도 외면한 데 있었다면 오늘의 나 자신은 어떤지 반성하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물을 잘 사용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하겠다.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카 16, 31)

-한상우신부-


돌아갈 곳을
잃어버렸기에
우리의 삶도
아프다.

믿음을
잃어버렸다.

우리가
살고있는
세상의 아픈
모습들이다.

짧은
우리들
삶이다.

짧은 삶의
시간속에서
참으로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삶은 지금부터
믿음을 나누는
시간이다.

믿음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나눔이다.

나눔을 통해
가난한 사람을
만나게된다.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이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람이
다시 살아나도
하느님을
믿지 않을
사람또한 바로
우리자신이다.

삶의
진리는
믿음이다.

믿음은
댓가를
지불한다.

믿음은
삶을
일컫는다.

삶에는
언제나
끝이 있다.

끝은
하느님을
만나는
믿음이다.

올바른 믿음은
우리의
어리석음을
멈추게한다.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삶다운 삶을
사는 것이다.

기쁨과
믿음의
삶을 나누는
것이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믿음을 잃지않는
것이다.

믿음은
우리의
가난함과
우리의
불완전함까지도
하느님께
감사하는 것이다.

주님, 목마름을
통해 찬미받으소서.

우리의 목마름
우리의
허기짐까지
주님과 나누는
것이다.

삶을 다시
일으키는
오늘의
믿음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가난한 이에 대한 하느님의 마음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루카 16,21)

예수님은 부자의 집 대문 앞에 누워 구걸하던 라자로의 심정을 이렇게 묘사하셨습니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존엄이 유지되는 데는 그리 큰 것이 필요하지 않지요. 당시 라자로의 간절한 바람은 작은 빵 한 조각, 시원한 물, 오가며 나누는 짦은 인사와 안부의 물음으로도 충분히 채워질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간절히 바랐다."
예수님의 다른 비유들에서 감성을 자극하는 수식적 표현이 거의 없는데, 이 부분에서 굳이 "간절히"라고 덧붙이신 이유가 있을 듯 보입니다. 그냥 바람도 아닌 간절한 바람. 이 바람이 바로 라자로 안에서 허기지고 목마르고 투명이간 취급을 당하고 계신 하느님의 바람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굶주리는 이 안에서 간절히 바라는 이는 실상 주님이십니다. 지금 고통으로 울며 무너지는 이들 안에서 누군가의 손길을 간절히 바라는 이 역시 주님이십니다. 비유 속 부자는 이기주의와 무관심으로 자기 가족만 즐겁고 호화로운 살면 그만이라 여겼을까요? 모세와 예언자들이 전한 하느님의 가르침은  그에게 악세사리도 못 되었던 것일까요?

제1독서 대목은 마치 부자의 죄목이 담긴 공소장처럼 들립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예레 17,5)

이 세상을 움직이는 하느님의 감추인 신비를 깨닫지 못하거나 애써 부인하는 이들은 자기의 힘과 연줄을 믿고 거기에 공을 들입니다. 비리와 착취 또한 거기서 생겨나지요. 탐욕에 눈이 먼 인간과 주님 사이를 벌여놓기 위해 악마는 종종 세상이 열광하는 성공과 인맥으로 덫을 놓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예레 17,7)

복음의 비유 속 라자로는 세상에서 의탁할 누구도 없이 오직 하느님의 처분에 모든 것을 내어맡긴 이입니다. 하느님은 그의 안에서 그와 함께 신음하시고 허기지시고 바라십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이는 이미 주님과 하나입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카 16,31)

비유 속 아브라함의 입을 빌어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은 단지 부자의 형제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미래를 꿰뚫는 예언입니다. 욕정과 탐욕으로 제 배를 채우며 기득권 유지에 골몰하는 이들은 이미 모세와 예언자의 가르침에 눈과 귀를 막은 것이지요. 그들 앞에 죽은 이가 살아난들, 예수님께서 되살아나신들 그들은 변하지 않을 것을 예수님은 알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벗님! 이웃의 존엄을 회복시키는 데는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 존재의 문간에 혹시 허기와 질병과 소외로 누워 있는 이들은 없는지 살피고 관심을 갖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그의 내면에서 하느님이 간절히 바라시는 바를 묻고 경청하고 손 내밀 수 있으면 더욱 좋겠지요.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화답송)

이 말씀을 오늘 벗님께 격려와 응원의 선물로 드립니다. 받으십시오!

 누가 더 불행할까?

 -김찬선신부-


루카 복음에만 있는 이 이야기는 오해와 논쟁의 소지도 많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복음입니다.

많은 생각 중의 하나는 누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가입니다.

 

이 복음은 라자로가 가난하고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얘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가난하고 고생만 하면 무조건 천당 간다는

그런 얘기를 하려 함은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는 부자가 불행하다는 얘기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부자가 불행한 이유는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동생들이 회개하지 않아

자기처럼 지옥에 떨어질 것을 염려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것은

우리가 이 부자처럼 되지 말라는 것이고

그래서 이 부자가 주인공이고 라자로는 조연임에도

부자는 이름이 없고 라자로는 이름이 있습니다.

 

이름이 없는 사람이 불행하다는 뜻이 담겨 있고,

지옥은 이름 없는 사람들의 처소라는 뜻이겠지요.

그리고 이름이 없음은 아무도 불러주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겠고요.

 

그러면 왜 아무도 불러주는 사람이 없을까요?

그것은 그가 담장 안의 부자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지만

집 대문 앞에 있는 종기투성이의 라자로에게는

빵부스러기도 주지 않을 정도로

자기 가족밖에는 모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담장 안과 밖의 관계는 끊어지고

소통은 완전히 단절되어 버렸으며,

그의 이름을 기억해주는 사람은 담장밖에 아무도 없습니다.

 

죽고 난 뒤에는 그의 집 높은 담장만큼 깊은 심연이

나자로가 있는 천당과 부자가 있는 지옥 사이에 가로놓여

부자가 천당에 갈 수도 없고

나자로가 지옥에 가 부자에게 물 한 방울 줄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관계의 단절, 이것이 부자의 불행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깊은 성찰을 하게 합니다.

돈이 없는 것과 사랑이 없는 것 중 어떤 것이 더 불행한가?

돈이 많은 것과 사랑이 많은 것 중 어떤 것이 더 행복한가?

 

줄 수 있는 돈이 없음도 불행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줄 마음이 없음이 진짜 불행이고

줄 사랑이 없는 사람이 훨씬 더 불행합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3월 12일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가16,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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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는 자신의 집 앞에서 언제나 먹을 것을 구걸하며 너무나 힘겹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라자로를 보았지만, 그런 라자로에게 눈길조차 두지 않습니다. 그의 관심은 자신의 호화로운 생활과 즐거움뿐입니다. 부자는 죽어서도 다른 것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자신의 목마름과 고통, 그리고 자신의 가족들에게만 관심을 둡니다. 주위를 둘러보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 관심이 없으며, 다른 이들과 함께 아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부자의 집 앞을 지나가셨다면 무엇을 보셨을까요? 당연히 라자로를 보시며 가엾은 마음이 드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병을 고쳐 주셨거나, 아니면 먹을 것을 주셨거나, 그것도 아니면 함께 이야기라도 나누셨을 것입니다. 당장 무엇을 하실 수는 없으셨더라도 그의 아픔과 고통에 함께해 주셨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시선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하느님의 나라로 만들어 가려면 예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의 것만을 채우고자 하는 시선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시선으로 주위를 바라보고 있습니까?

-최종훈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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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부자와 거지 라자로’ 이야기입니다. 이는 루카 복음만의 독특한 전통인데, 결국 내어놓음과 믿음은 비례한다는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부자가 지옥에 간 이유는 거지 라자로에게 아무것도 내어놓지 않아서입니다. 아무것도 내어놓지 않은 이유는 하느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믿을 마음이 없으면 라자로가 부활하는 것을 보더라도 믿음이 생기지 않는 것일까요? 믿으면 그 믿는 분의 뜻을 따라야 하는데 그것이 싫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못해서 표징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자신의 것을 내어놓아야 할까 봐 믿지 않는 핑계를 표징이 없다는 것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세 욕구 중, 가장 기본적인 욕구가 소유욕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계기가 바로 하느님께 바쳐야 했던 선악과를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려 했기 때문에 시작되었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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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 대한 희망은 어떠한 시련의 십자가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줍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냐시오 성인도 “천국을 생각하면 이 지상의 집착과 애정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루에 한 번만이라도 천국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고 권고합니다. 우리는 이 땅 위에 살지만 아버지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천국본향을 그리워해야 하겠습니다.

신앙인은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을 때 세상과 타협하게 됩니다. 그러나 부활에 대한 희망은 온갖 환난을 이겨내는 힘이며 능력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이 세상을 소중히 여기지만 결국은 관리를 하다가 하느님 앞에 서야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매순간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을 용기 있게 선택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기뻐합니다. 천국본향에 대한 믿음을 굳건히 하는 그만큼 우리의 삶은 풍성해 집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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