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15일 연중 제1주간 금요일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마르코 2,1-12)
When Jesus saw their faith, he said to him,
“Child, your sins are forgiven.”
지붕을 뚫고 내려진 중풍병자.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신우식신부-
오늘 복음에서 중풍 병자 한 사람을 치유하려고 네 사람이 예수님께서 계신 집의 지붕까지 뚫고 병자를 들것에 달아 주님께 내려보냅니다. 중풍 병자를 들것에 달아 내린 사람들이 그 중풍 병자의 친척인지, 친구인지 아니면 이웃인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병자가 지붕의 구멍으로 주님께 도달하지는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의 정성과 도움 덕분에 그 중풍 병자는 주님께 치유받고, 죄의 용서도 받습니다. 이렇게 때로는 자신의 믿음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도움으로 큰일을 해 나가기도 하고, 어려움에서 벗어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공동체 안에서 사랑을 나누며 살게 하십니다.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죄와 병으로 중풍 병자처럼 누워 있습니까? 아니면 율법 학자들처럼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부정적으로 보고 나의 주관으로 판단하며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듯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마태 25,40)이라는 말씀을 실천하며 애덕으로 누군가를 구원으로 이끌어 자신 또한 구원의 길로 들어서고 있습니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무대에서 어떤 남자가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릅니다. 이 모습을 보고서 몇 사람은 “너무 멋있어요.”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어쩌면 저럴 수가 있냐는 표정을 지으면서 인상을 쓰고 있습니다.
이는 요즘 시대가 아닌 15~16세기 때의 모습입니다. 그 당시에는 기타를 남자가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들만 연주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그 누구도 남자가 기타 치는 모습을 보고서 멋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생각해보면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아름다움의 기준도 계속해서 바뀌고 있고, 좋아하는 것 그리고 사랑하는 것에 대한 기준 역시 계속해서 바뀝니다.
특히 요즘에는 그 변화가 더 빨라집니다. 문명의 발달로 인해 따라가기가 벅찰 정도입니다. 그래서 이 변화를 부정하려고 하지만 그럴수록 시대에 뒤처지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계속 공부를 하면서 시대의 흐름에 맞춰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그 안에서 자기 역할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시대의 흐름에 맞추기 싫다면서 그것은 틀렸다면서 부정하려고만 한다면 어떨까요? 사람들과 함께 하나를 이루면서 살기가 힘들어집니다.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길에서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열린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 어떤 것도 틀렸다면서 단정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가능성을 열어보고 바라볼 수 있는 폭넓은 시각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예수님 곁으로 데리고 갈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주님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서 들것을 달아 내려보냅니다. 이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주님께서는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용서는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 자신의 구원 행위입니다. 이 사실을 당시의 율법학자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향해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문제는 그들 스스로 예수님을 판단하고 단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자신들이 하느님인 것처럼, 하느님의 영역인 죄의 용서를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보면서 저울질하고 있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정체성은 그의 말이 현실화되면서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즉, 용서받았다는 말과 함께 중풍병자의 병이 말끔히 씻어져 걸어가는 모습에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학자들은 자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깨닫지 못합니다. 하느님을 단죄하려고 합니다.
함부로 판단하고 단죄해서는 안 됩니다. 그 판단과 단죄는 오직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뿐입니다.


무언가에 관한 소중함의 최대치를 100이라고 친다면, 이를 가지기 전에는 소중함 정도가 80이고, 가진 다음에는 소중함 정도가 20으로 떨어진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최신형 스마트폰이 나왔을 때는 이것을 가지고 싶다는 마음과 함께 소중함 정도가 80정도 됩니다. 그러나 이를 구매하고 난 뒤에는 어떻습니까? 소중함 정도는 20으로 떨어지게 되지요.
그렇다면 그 소중함의 최대치인 100에 도달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눈치 채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 물건을 잃어버리게 되면 소중함의 최대치인 100까지 올라가게 됩니다. 즉, 잃어버린 후에 그 소중함을 깨우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통해서도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사랑하고 있는 중도 아닌, 사랑을 소유했을 때도 아닌, 사랑을 잃었을 때 그 가치는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그래서 “있을 때 잘 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사랑을 당연하게 생각하면 소중함을 간직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고 있고 또 사랑받고 있음을 소중하게 간직해야, 진짜 행복과 진짜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천국이든 지옥이든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들과 갑니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네 명이 함께 들고 온 중풍 병자를 치유해 주시는 내용입니다. 분명 육체적 병의 치유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죄의 용서’입니다.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 죄 용서의 권한이 있음을 믿지 않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라고 하시며 그 병자를 치유해 주십니다.
같은 내용이 마태오와 루카 복음에도 나옵니다. 마태오 복음은 그 죄의 용서 권한이 교회에 주어졌다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면, 루카 복음은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닌 분이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런데 그런 초점이 없는 담백한 마르코 복음은 저절로 그를 들고 온 ‘네 명의 믿음’에 맞춰질 수밖에 없습니다. 마르코는 예수님의 직제자는 아니었지만, 바오로와 베드로 사도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은 만큼, 함께 지내는 ‘작은 공동체’의 힘을 가장 잘 아는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니 무엇보다 소공동체의 힘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한 억만장자가 어떤 말을 하는지 들어봅시다.
“당신이 어울리는 사람들이 바로 당신 자체입니다. 당신의 친구들을 보여주세요. 그럼 제가 당신의 미래를 보여주겠습니다. 자존감은 자신감의 일종이죠. 또한, 자기 인식의 일종이기도 합니다. 즉, 자존감이 바로 성공을 위한 초석입니다. 자존감이 모든 것입니다. 그리고 학교에서는 절대 가르쳐주지 않는 것이죠. 자존감은 인생 초반의 7~8년 안에 형성됩니다. 당신은 인생 초반의 7~8년을 누구와 보냈나요? 엄마, 어쩌면 아빠, 손위 형제. 그리고 현자 당신은 누구와 놀러 다니나요? 빌 게이츠는 놀러 다니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스티브 잡스는 놀러 안 다녔어요. 워렌 버핏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일론 머스크도 그렇죠. 원숭이와 어울려 다니면 무슨 일이 벌어지나요? 당신 인생은 망할 서커스가 될 것입니다. 당신이 자존감을 키우고 싶다면 높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들과 어울리세요. 당신이 되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가십시오. 20년 30년 후 당신이 되고 싶은 모습을 찾으세요. 그리고 지금 그에게 가는 겁니다. 당신의 불평에 동의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당신이 가고 싶은 방향으로 이미 가고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십시오. ... 멍청한 이들에게만 인생이 여행입니다. 인생은 모델링입니다. 성공은 반드시 단서를 남깁니다. 당신 자신을 모델링하고 싶은 사람을 찾으세요. 그리고 그 사람이 한 것을 따라 하세요. 플라톤이 소크라테스를 따랐고,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을 따랐던 것처럼. 2,500년 전 그들이 그렇게 했다면, 현재 여러분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출처: 「억만장자가 말하는 스티브 잡스, 일론 머스크, 워렌 버핏의 공통점」, 유튜브 채널, ‘띵언 저장소’]
이분이 말하는 주요 요지는 어렸을 때 부모와 형제들과 어울리면서 평생을 좌우하는 자존감이 형성되었다면, 사람은 성장해서도 자신과 함께 하는 누군가에게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구든 자신이 어울리는 친한 사람들이 가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이 이끄는 그룹과 멀어졌기 때문에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그 사람이 사귀는 사람들이 그 사람의 운명입니다.
제가 로마에서 공부할 때 한 교사 그룹을 안내한 적이 있습니다. 그 속에는 성당 다니는 교사들이 많았습니다. 그중 몇 명이 저에게 오더니 자신들 안에 20년 넘게 냉담한 친구가 한 명 있다는 것입니다. 억지로 자신들이 데리고 왔는데 성지 순례하며 조금씩 마음을 열고 있다고 했습니다. 자신들이 고해성사를 받도록 유도할 테니까 그가 받겠다고 하면 길거리에서라도 고해성사를 편하게 주었으면 좋겠다고 청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하겠노라고 했고 그렇게 오랫동안 주님을 떠나있던 그 교사는 스페인 계단 앞에서 저에게 아주 오랜만에 고해성사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열심히 다니겠노라고 약속했습니다.
오늘 복음의 중풍 병자는 친구 네 명을 잘 만나서 주님께로 인도되었고 병의 치유와 영혼의 치유 은총을 둘 다 받았습니다. 이는 우리가 어떤 친구들과 어울려야 하는지 잘 깨닫게 해 줍니다.
일단 ‘꼭 만나야만 하는 가장 친한 친구들’이어야 합니다. 그 그룹 아니면 자신을 옮겨줄 다른 사람들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니 자신이 속한 소공동체는 일주일에 한 번은 규칙적으로 모여야 합니다. 가족처럼 지내야 합니다. 마치 다른 가족이 없는 것처럼.
그다음은 ‘건강한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영혼은 물론이요. 육체도 건강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도 건강해집니다. 건강한 사람만이 누군가를 건강한 삶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지나치게 먹고, 마시고, 건강을 해치는 삶에 익숙한 집단이라면 그 속에 속한 사람의 미래는 뻔합니다.
마지막으로는 ‘죄의 용서’를 지향해야 합니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영원한 건강입니다. 세상에 죄를 없애시는 분은 그리스도밖에 안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죄의 용서 권한을 교회에 넘겨주셨습니다. 영혼 구원을 원한다면 죄의 용서가 이뤄지지 않으면 머물기 어려운 공동체에 들어가면 됩니다. 처음엔 힘들겠지만, 어둠으로 향하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훨씬 덜 힘들 것입니다.
우선 이런 기준들로 우리 성당에 어느 소공동체, 어느 단체에 들어가야 할지 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세례를 받는 분들을 의무적으로 한 단체에 가입하게 하였습니다. 나와도 되고 안 나와도 되는 단체는 안 됩니다. 꼭 나오지 않으면 가족처럼 걱정해주는 단체여야 하고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어야 하며 고해성사를 멈추면 동시에 그 단체에 머물 수는 없는 단체여야 합니다. 그 소공동체에 머물려는 여러분의 의지가 여러분 영혼 구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할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작년 이 맘 때입니다. 한국영화 ‘기생충’이 미국의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으며 ‘감독상, 작품상, 각본상, 국제영화상’을 수상하였습니다. 미국에 있으면서 수상 소식을 들었습니다. 한국에서도 보았는데 미국의 극장에서 다시 한 번 보았습니다. 코로나로 힘든 시간을 보내는 국민들에게 ‘봉준호 감독은 영화로, BTS는 노래로, 손흥민 선수는 축구로’ 위로와 용기를 주었습니다. 한국은 코로나19에 대해서도 ‘추적, 검사, 치료’라는 방식을 도입해서 안정적으로 관리하였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잘 몰랐는데 외국에 있으면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2021년에도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일들이 많으면 좋겠습니다.
영화 기생충에서 지하 단칸방에서 사는 가족들은 지상에 있는 건물의 와이파이에 접속해서 인터넷을 사용하였습니다. 외국 여행을 가거나, 출장을 가면 인터넷 접속이 쉽지 않습니다. 데이터를 유료로 사용할 수 있지만 비용이 많이 들기에 가능하면 무료 와이파이에 접속하여서 인터넷에 접속합니다. 제가 있는 신문사에도 와이파이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비밀번호만 입력하면 인터넷에 접속해서 메일을 확인할 수 있고, 정보를 검색할 수 있습니다. 저도 필라델피아에 있는 한인 성당에 갈 때나 코네티컷에 있는 한인 성당에 갈 때면 와이파이에 접속해서 인터넷을 사용합니다. 비밀번호는 한번만 입력하면 다음에는 다시 입력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와이파이에 접속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과 접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과의 접속을 끊고 세상의 것들에 접속하면 신앙생활의 기쁨은 퇴색되고 영적으로 메마르게 됩니다. 세상의 것들은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강력한 주파수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세상의 것들이 우리들의 거짓된 자아와 만나면 접속이 더욱 강력해집니다. 그럴 때면 하느님과의 접속은 희미해집니다. 우리의 거짓된 자아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교만, 인색, 질투, 분노, 음욕, 탐욕, 나태’의 일곱 가지 죄의 뿌리입니다. 직책과 제복으로 세상의 것들과의 접속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성직자도, 수도자도 쉽게 세상의 것들에 접속하기 마련입니다. 그만큼 세상의 유혹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것들에서 벗어나 하느님과의 접속을 이루기 위해서는 ‘회개’라는 백신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것에 접속했던 다윗도 회개하여 하느님께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두려움에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 사도도 회개하여 천국의 열쇠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회개하면 하느님께서는 아무리 우리의 죄가 크다 할지라도 따뜻한 사랑과 크신 자비로 우리를 받아주시고 용서해 주십니다.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과 접속할 수 있는 비밀번호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말씀이 하느님이셨고, 말씀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였던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했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들이 들은 그 말씀은 그들에게 아무런 이득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 말씀을 귀여겨들은 이들과 믿음으로 결합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불순종의 본을 따르다가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없게, 우리 모두 저 안식처에 들어가도록 힘씁시다.” 말씀을 귀하게 여기고,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은 언제나 하느님과 접속할 수 있습니다. 오늘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선을 행하는 사람은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인도할 수 있었고, 중풍병자는 걸을 수 있었습니다. 선을 행하는 사람이 자신들의 와이파이를 중풍병자에게 나누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넘어짐으로 행복하였고 일어섬으로 더욱 행복하였노라!
-양승국신부-
신명나게 특강을 다니던 시절이 이제는 까마득한 옛날처럼 여겨집니다. 강단에 서면 유난히 돋보이는 분들이 계시더군요. 얼굴 표정에 간절함을 넘어 절박함이 잔뜩 묻어있는 분들 말입니다. 심연의 고통과 주체하지 못할 슬픔을 겨우 겨우 감내하면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와계신 분들, 마치 아픈 손가락처럼 느껴집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큰 연민의 정과 강한 측은지심이 솟구칩니다. 하느님께 더 열심히 청하게 됩니다. 꼭 치유해 주시라고, 따뜻히 위로해주시라고, 저 눈물 좀 닦아주시라고, 새 삶을 주시라고...
오늘 예수님께서도 비슷한 체험을 하십니다. 카파르나움의 한 집에 머무실 때였습니다.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몰려와 집 앞팎은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사람들로 빼곡히 들이찬 거실 한 가운데 앉으신 예수님께서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말씀을 하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한 마디 한 마디에 초집중을 하고 있었습니다. 생수보다 더 시원하고 꿀보다 더 달콤한 예수님의 말씀에 사람들은 울고 웃었으며, 감탄을 하고 박수를 쳤습니다.
그런데 그 어느 순간, 감미롭고 행복한 순간을 깨트리는 작은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고 계신 방 천장 바로 위에서 큰 잡음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쿵쿵, 부스럭 부스럭, 이윽고 개폐식 천장이 벗겨지더니 중풍 병자 한사람이 누운채로 들것에 매달려 내려온 것입니다.
어찌보면 참으로 기가 막히고 어이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해도 해도 너무한 몰상식한 행동이었습니다. 꽤나 위험한 시도이기도 했습니다. 환자를 내려보내기 위해 지붕 위로 올라간 사람들도 자칫 실수하면 미끄러져 다칠 위험이 있었습니다. 3~4미터나 되는 높이에서 줄에 매달려 아슬아슬 내려오는 환자 역시 방심하면 크게 다칠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다행히 중풍병자는 무사히 예수님 바로 앞에 안착되었습니다. 중풍 병자 입장에서도 참으로 송구스럽고 뻘쭘했을 것입니다. 부끄럽기도 하고 난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무례함과 몰상식을 보지 않으시고 그들의 간절함과 강한 믿음을 보십니다. 어떻게서든 중풍병자를 한번 살려보려는 이들의 뜨거운 가족애를 눈여겨보십니다. 마침내 치유의 은총을 선물로 주십니다.
“애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르코 복음 2장 5절, 11절)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과제가 한 가지 있군요. 주변을 살펴보면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살아있지만 진정으로 살아있지 못한 사람, 숨은 붙어있지만 정신이 다 빠져나가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 없는 사람, 스스로 일어서지 못해 늘 바닥에 누워있는 사람...
그들에게 우리의 힘과 에너지를 보태 다시 일어서게 만들어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이웃들의 일어섬에 동참할 것을 강하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삶의 본질은 일어섬입니다. 사실 참된 신앙이란 것은 죄와 죽음의 세력을 떨치고 일어서는 것입니다. 부활이란 말의 히브리어, 그리스어, 라틴어, 영어, 불어, 독일어는 모두 '일어섬'을 뜻합니다.
“길을 걷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거들랑 그 돌 끌어안고 일어서라. 나는 넘어짐으로 행복하였고 일어섬으로 더욱 행복하였노라.”(일어섬에 대하여,손희락)

얘야, 너는 용서받았다
-이영근신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 선언되었습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죄의 용서’를 선언하십니다. 그러나 이 엄청난 사실 앞에, 율법학자들은 어안이 벙벙해져 말합니다.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마르 2,7)
참으로 그렇습니다.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단 한 분, 오직 하느님이 아니고서야 그 누구도 용서할 수가 없거늘, 감히 누가 “죄를 용서받았다.”고 선언할 수 있을까? 유다인은 예로부터 죄의 용서를 하느님의 고유 권한으로 여겼습니다(탈출 37,4;이사 43,25;44,22). 더구나, 하느님께서 용서하셨다는 것을 대체 누가 알 수 있을까? 하느님이 아니고서야 말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마르 2,10)
그리고 그 증거로 중풍병자를 치유하십니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습니다.”(마르 2,11-12)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치유 받은 이들입니다. 이미 용서받은 이들이요, 그러나 그 상처는 지니고 다닙니다. 왜냐하면, 상처는 제거해야할 그 무엇이 아니라, 치유 받았음을 보여주는 표지인 까닭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할례’라는 상처를 ‘하느님 백성의 표지’로 지니고 다녔듯이 말입니다. 야곱이 ‘엉덩이뼈의 상처’를 ‘축복의 표지’로 지니고 다녔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상처’를 ‘구원의 표지’로 몸에 지니고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더 이상 '들것'에 매여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는 기꺼이 들고 다녀야 합니다. 아니, 들것에 아픈 형제들을 태워 들고 집으로 가야 합니다. 마치 내 형제들이 나를 '들것'에 태워 예수님께 데려왔듯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인류를 태워 들고 아버지께로 가셨듯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가 바로 우리의 ‘들것’입니다. 진정, 상처에서 흐르는 용서의 피를 마실 때라야, 우리는 그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그것을 구원의 표지로 지니게 됩니다. 용서야말로 진정한 치유를 가져오는 권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치유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용서하십시오. 용서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하느님께서 용서하셨음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이미 치유 받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우리는 이미 용서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그 영광된 상처를 치유의 표지, 축복의 표지, 구원의 표지로 받았습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르 2,11)
주님!
당신께서는 치유 받은 이에게
들것이 더 이상은 필요하지 않으나 들것을 가지고 가라 하십니다.
당신께서 십자가의 상처를 가지고 가셨듯이
구원의 표시로 들고 가라 하십니다.
하오니, 주님,
사랑이 흘러나오는 그 상처를 더 이상은 거부하지 않게 하소서.
그 구원의 샘에서 사랑을 퍼내게 하소서.
아픈 이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들것이 되게 하소서. 아멘.

영적 중풍 병자
-반영억신부-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기도를 하지 않는 영혼은 중풍 병에 걸렸거나 손발이 부자유스럽게 된 사람과 같아서, 손과 발에게 아무리 명령을 내려도 듣지 않는 것과 똑같은 이치이다…. 만약에 이런 영혼들이 그 커다란 비참을 깨닫지 못하고, 따라서 스스로 바로 잡으려는 노력을 하지않으면 롯의 아내가 고개를 돌리다가 소금 기둥이 된 것처럼 자기한테서 머리를 돌린 탓으로 소금 기둥이 되어 버리고 말 것”(영혼의 성)이라고 하였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영적인 중풍 병자, 즉 영적인 감각을 상실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성경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접하고도 아무런 깨달음을 갖지 못하고 은총에 감사할 줄 모른다면 장애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가지고 있지만 읽지 않고 보관만 하고 있거나 또 설령 읽었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말씀으로 듣고 그대로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상태가 중풍 병자나 다름없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에게 “얘야,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단다......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르2,5.1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습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그 말씀대로 이루어집니다. 사실 들것에 누워있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일어난다는 것은 부활을 뜻합니다. 그리고 일어나야 할 사람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들것에 누워있습니다. 이제 일어나십시오. 말씀에 따르십시오. 그러면 영적인 감각을 발휘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간 것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넘어야 할 장벽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아서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있는 들것을 달아내려 보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마침내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믿음은 이렇게 위대합니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고 기적을 낳습니다. 그 믿음이 내 믿음이든 다른 사람의 믿음이든, 믿음을 갖고 하는 일에는 그에 상응하는 하느님의 능력이 드러납니다. 그리고‘죄를 용서받았다.’는 선언은 우리에게 큰 희망을 줍니다. 용서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아무리 큰 잘못이라도 언제나 기회를 주십니다. 그럼에도 주님을 심판관으로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자주 심판관 노릇을 하고 살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시인하고 인정하는 것이며 마음과 영혼에, 삶 속에 받아들이는 것이고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맡긴다는 것은 끊임없이 매 순간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근심 걱정을, 인생 여정을, 앞으로의 미래를 온전히 맡겨야겠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믿음을 성장시킬 수 없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은 숨을 곳을 찾아 땅을 파는 두더지처럼 몸과 마음을 땅으로 굽힙니다. 그들은 현세적이고 지나가는 세상 것에 집착하기 때문에 높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지 못합니다”(성 요한 비안네). 열심히 기도함으로써 영혼의 중풍 병자가 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한 신부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무실 중앙에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킨다!”라는 글귀를 크게 붙여놓았습니다. 제가 기도에 너무 소홀했다는 반성이 되었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
-송영진신부-
“며칠 뒤에 예수님께서는 다시 카파르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그분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 보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1-5)”
“그러고 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마르 2,10ㄴ-12)”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불치병을 고치는 권능과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모두 가지고 계시는 분(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믿음을 고백하는
신앙고백과 같은 이야기이기도 하고, “우리는 예수님의 권능을 직접 목격함으로써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같은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라는
증언과 같은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야기 중간에 있는 율법학자들의 의문과 그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별로 중요한 내용은 아니고,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한 상황 설정 같은 것입니다.
(율법학자들에게 당신의 권능과 권한을 증명해 보이려고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신 것은 아닙니다.
율법학자들의 의문과는 상관없이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그 병자를 고쳐 주려고 작정하셨을 것입니다.)
1)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예수님 앞으로 병자를 달아 내린 일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입니다.
그 일은 병자 자신과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과 ‘간절함’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은,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낸 것은, 중풍 병자를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갈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지만,
진짜 이유는 사람들이 비켜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쳐 주신 다음의 장면을 보면,
그 병자는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습니다.
(그는 건강해진 다음에 다시 지붕으로 올라가서 나간 것이 아니라,
사람들 가운데를 지나서 나갔습니다.)
처음에는 사람들 가운데로 지나갈 수 없었던 병자가
병을 고친 뒤에는 지나갈 수 있었다는 것은,
사람들이 조금씩 비키면서 통로를 만들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나중에는 할 수 있었던 일을 왜 처음에는 못했을까?
그것은 분명히, 못한 것이 아니라, 안 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병자의 간절함을 외면하고,
예수님과 그 병자 사이에서 장벽이 되었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과 ‘예수님을 찾는 사람’을 연결해 주는 통로가 되어야 하는데,
통로가 되기는커녕 장벽이 될 때가 있습니다.
제자들도 그렇게 ‘장벽처럼’ 행동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을 쓰다듬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르 10,13-14)”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뜻으로는, “화를 내시며 제자들을 꾸짖으셨다.”입니다.
(만일에 오늘날의 우리가 통로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장벽이 된다면,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엄하게 꾸짖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중풍 병자의 경우에는 내버려두셨을까?
예수님의 속마음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그 일이 병자에게는 ‘믿음의 시련’이 되었을 것이고,
그것을 바라보기만 했던 사람들에게는 ‘믿음의 시험’이 되었을 것입니다.>
2)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라는 말에서 ‘그들’이라는 말은,
중풍 병자 자신과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을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중풍 병자 자신의 믿음입니다.
옆에서 아무리 도와주고 기도해 주어도,
당사자가 믿지 않고 노력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이 말은 가족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부모가 자녀의 신앙생활을 위해서 아무리 기도하고 타이르고 인도해도
자녀 자신이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믿음과 회개를 거부하면) 소용없습니다.
믿음도, 회개도, 남이 도와줄 수는 있어도 대신 해 줄 수는 없습니다.
(아우구스티노를 위해서 모니카 성녀가 긴 세월 동안 눈물로 기도한 일은
유명한 일인데, 분명히 그 기도의 효과도 있었고 은총도 내렸지만,
어떻든 아우구스티노가 신앙인이 되고 성인까지 된 것은,
그 자신이 스스로 깨닫고, 믿고, 회개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중풍 병자의 경우에, 병자 자신이 간절하게 예수님을 찾았을 것이고,
회개했을 것이고,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서라도
예수님 앞으로 갈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했을 것입니다.
3)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라는 말씀은,
‘몸의 치유’와 ‘죄의 용서’를 모두 포함하는 말씀입니다.
(두 가지를 하나로 합하면 ‘구원’입니다.)
물론 그 병자가 죄를 지어서 중풍에 걸린 것도 아니고,
중풍은 안 고쳐도 좋으니 죄만 용서해 달라고 간청한 것도 아닐 것입니다.
아마도 그 병자는 ‘몸의 치유’를 간청하기 전에 먼저
‘죄의 용서’부터 간청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몸의 치유’보다 ‘죄의 용서’가 더 급한 일이어서
용서의 은총부터 먼저 주셨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이 이야기의 핵심 주제는 ‘예수님의 권한’입니다.
하느님만이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는
율법학자들의 말은(마르 2,7),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우리 신앙의 기준으로는 틀린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만이 가지고 계시는 권한과 권능을 가지고 계시는 분,
사람들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는 권한을 가지고 계신 분,
즉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예수님께 기도하고 있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복음: 마르 2,1-12: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신 사람의 아들
-조욱현신부-
예수께서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어느 집에서 가르치시는 동안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2절) 예수께서는 언제나 어디서나 말씀과 행동으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 그때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와서 그분 앞으로 데려가려 했지만, 군중 때문에 데려갈 수가 없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러한 일이 종종 있다.
하느님의 뜻이 아닌 것에 젖어있으면, 천상 은총의 약으로 새로워지고 싶어 해도 묵은 습관이라는 걸림돌 때문에 치유되기가 힘들다. 우리가 달콤한 기도에 빠져 주님과 달콤한 속삭임을 나누는 동안에도 세상의 잡념들이 군중처럼 몰려와 영의 눈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일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는 다른 곳으로 갈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집의 지붕 위로 올라가야 한다. 즉 말씀을 향하여 가야 한다. 밤낮으로 주님의 법을 묵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중풍 병자를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5절) 하신다. 주님께서는 그의 죄를 용서하시고 고쳐 주셨다. 하느님 외에 아무도 죄를 용서해 줄 수 없다.(7절)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고쳐주셨으니, 참으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드님 말씀이심이 분명하다. 그분은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아버지로부터 받으신 분이시다.
그러나 율법 학자들에게는 이러한 말이 하느님만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는 그들 신앙의 본질을 모독하는 신성모독의 발언이었다. 이러한 죄는 레위 24,16에서 돌로 쳐서 죽이는 죄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율법 학자들은 분개하여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7절) 하고 중얼거렸다. 그들은 하느님 밖에 아무도 죄를 용서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분이 그러한 권한을 가지고 계신 것을 모른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9-11절) 하시자 중풍 병자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벌떡 일어나 요를 가지고 걸어 나갔다.
주님께 대한 신앙이 이처럼 기적을 가져올 수 있다. 이 중풍 병자는 자신의 믿음으로 치유를 받았다기보다 친구들을 통하여 기적을 체험하였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이웃의 도움을 통하여 갖게 된 예도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이러한 기적을 체험할 수 있게 지붕을 벗길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 5)
-한상우신부-
용서의 주인은
언제나 자비의
주님이시다.
조건없이
용서하시는
주님을
만나게된다.
사람은
용서를 먹고
살아가는
용서의
존재들이다.
용서와
연민으로
사람이라는
존재를 조금씩
알게 된다.
고통을
동반하는 것이
용서이다.
고통에는 치유가
용서에는 믿음이
필요하다.
고통 없이는
새로운 삶으로
나아갈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아픔
우리의 상처와
함께 하신다.
함께 하는 것이
진정한 용서이다.
그래서 용서는
서로를 끝내
도와주는
존중이다.
용서의 체험은
드디어
들것을 가지고
걸어 가는
평화의 참된
체험이다.
용서는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복음이다.
용서로
우리는
새로 태어나는
것이다.
겸손은
용서와
함께한다.
용서는
아픔을 딛고
하느님께로
가장 가까이
가는 일이다.
그래서 용서는
일어나서
다시 걷기에
하느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죄를
용서받기에
사람이고
사람을
용서하기에
살아있는
복음이다.
복음은
아프지만
놀라운
기쁨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믿음을 촉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마르 2,5)
중풍 병자를 들것에 눕혀 데려온 사람들이 군중 때문에 예수님 앞에 가기 어렵자 지붕을 뜯어 병자를 내려보냅니다. 이 수고를 감수하는 노력 자체가 그들이 예수님의 치유 능력을 확고히 믿고 있다는 증거지요.
예수님은 병자의 상태보다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병자에게 위로를 건네십니다. 육신의 병을 죄에 대한 하느님의 징벌이라고 여기는 이스라엘에서 "죄의 용서"는 육적인 치유 이상의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마르 2,7)
군중 사이에 끼어 있던 율법 학자들이 속으로 생각합니다 .율법 연구와 해석이 업인 그들 입장에서는 신성모독이 분명하니까요. 유일신인 하느님 한 분만을 섬기는 유다교에서 다른 누가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지니고 있다면 자신들의 신앙기반이 흔들려 버릴 수 있으니 잔뜩 긴장하고 경계하는 것 같습니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며"(마르 2,12)
지금 예수님 앞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존재합니다. 믿는 이들과 믿지 않는 이들입니다. 믿는 이들은 치유 기적 앞에서 제 일처럼 기뻐하며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은혜를 입은 당사자는 물론, 믿음 하나로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동료들의 기쁨은 더 말할나위 없겠지요.
반면 믿지 않는 이들은 더 큰 의혹과 불신에 휩싸입니다. 속 안에서는 후일 벌어질 베엘제불 논쟁까지 부글대기 시작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의 똑똑한 머리는 지금 출신과 가문, 지역과 직업 등등 예수님에 대한 앎으로 복잡합니다.
제1독서에서는 믿는 이와 믿지 않는 이의 차이를 보여 줍니다.
"사실 그들이나 우리나 마찬가지로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들은 그 말씀은 그들에게 아무런 이득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 말씀을 귀여겨들은 이들과 믿음으로 결합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히브 4,2)
히브리서 저자는 마치 오늘 복음 속 율법 학자들의 속을 들여다 본 듯이 이야기합니다. 눈 앞에서 펼쳐진 기쁜 소식을 함께 보고 들었건만 그 기쁜 소식이 믿음으로 연결되지 못한 이들의 가련함이 안타깝습니다.
"믿음을 가진 우리는 안식처로 들어갑니다."(히브 4,3)
히브리서 저자는 하느님의 안식처로 들어갈 수 있다는 약속이 계속 유효하다고 말합니다.(히브 4,1 참조) 안식처나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들이 세상 창조 때부터 이미 다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히브 4,3 참조)
믿음은 하느님께서 세상 창조 때부터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안식처에 들어가는 것을 순리로 여깁니다. 이미 이루어 주신 선물을 누리는 결단이기도 하지요.
반면 문자에 매인 완고함은 의심하고 증거를 요구합니다. 나날이 쌓여가는 표징에는 눈을 감고 계속 다른 표징을 주문하지요. 자기들이 믿을 때까지 이 불신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수호한다고 자처하는 그들에게 하느님을 찬양하는 일은 요원할 뿐입니다.
더구나 그들은 안식처가 눈 앞에 있어도 들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가 가진 나름의 신념이 이를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요. 설령 안식처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자신이 세상에서 부정해왔던 모든 것들에 둘러싸여 괴리감과 이질감만 커질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치유받고 기뻐하는 이와, 동료의 치유로 보람을 느끼는 이들, 또 이 기적 앞에서 하느님을 찬양하는 이들을 보시며 함께 기쁘셨을 겁니다. 동시에 여전히 돌 같은 마음에 새겨진 문자에 파묻혀 구원의 기쁜 소식을 거부하는 이들을 보시며 안타까우셨겠지요. 예수님은 그들이 당신을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들이 믿지 않는 이들이라서 안타까우십니다. 믿지 않는 이에게는 얼마나 많은 은총이 손가락 사이의 모래알처럼 사라지는지 아시니까요.
지금 여기, 매일의 삶이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합니다. 세상의 어둠과 죄악, 자신의 나약함과 죄스러움, 타인의 약점과 불화가 매순간 우리의 믿음에 도전장을 던집니다. 우리가 자신을 믿으면 쉽게 넘어지고 좌절합니다.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 이미 다 이루어 놓으신 구원의 안식처를 믿고, 죽음으로 우리 죄를 지고 가신 예수님의 사랑을 믿으며, 넘어져도 다시 깨끗하고 거룩하게 해 주시는 성령을 믿으면, 이 믿음이 우리를 저 휘장 안 거룩한 처소로 데려갈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믿는 이는 기쁨에 찬 찬양을 올리는 이입니다. "지금 여기"를 사는 우리의 몫이기도 하지요. 하느님께 찬양의 기도를 그치지 않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믿음의 찬양으로 주님께도 참 기쁜 오늘이 되실 겁니다. 미어서 복되신 성모님을 닮은 벗님을 축복합니다.

너의 들것에 나의 치유를 맡기고
-김찬선신부-
오늘 복음은 중풍 병자를 다른 사람 넷이 들것에 실어 지붕까지 뚫어가며
주님께 데려가 치유받게 하는 얘기입니다만 이 과정에서 주님께 용서의
권한이 있는지 권한 논쟁으로 번지는 얘기입니다.
구약 때부터 당대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사람들은 병이 죄의 결과,
그러니까 인간의 죄에 대해 하느님께서 벌을 내리신 결과라고 믿고,
그래서 죄의 치유는 벌에 대한 하느님의 용서라고 믿는데 주님께서
용서받았다고 하며 치유하시니 그들에게는 독성죄로 보였던 겁니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오늘 히브리서나 복음 모두
믿음이건 용서건 용서에 의한 치유건 공동체적인 거라는 점을 가르칩니다.
오늘 치유는 합동 작전으로 이루어지는데 합동 믿음으로 이루어진 겁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중풍 병자의 믿음이 아니라 이웃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중풍 병자도 치유받고는 싶었지만 그 믿음이 반신반의 상태였는데
이웃들의 믿음이 그를 설득하였을 것이고 그들의 설득에
중풍 병자는 믿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가게 되었을지 모릅니다.
중풍 병자의 부족한 믿음이 이웃의 확고한 믿음에 결합됨으로써
치유가 이루어진 거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히브리서에는 그 반대의 경우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들이나 우리나 마찬가지로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들은 그 말씀은 그들에게 아무런 이득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 말씀을 귀여겨들은 이들과 믿음으로 결합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같이 복음 말씀을 들었지만 불신자들은 복음을 귀여겨들은 신자들과
믿음으로 결합되지 않아 결국 복음 말씀이 구원과 행복이 되지 못합니다.
신앙 공동체 또는 믿음의 공동체란 어떤 것입니까?
개인의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가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믿음이 공동체의 믿음과 결합되어 함께 주님께 나아가고,
함께 구원을 받는 공동체가 아니겠습니까?
믿음의 공동체라면 치유도 공동체적이어야 합니다.
나의 치유를 너의 들것에 맡기고
너의 치유를 위해 내가 들것이 되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용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들은 용서가 오로지 하느님의 권한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새로운 가르침은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사람의 아들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는 것이지만
꼭 예수 그리스도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들인
우리도 포함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용서의 권한을 위임하신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주님께서는 이 지상 교회에 용서의 권한을 주심으로써 교회 공동체가
하느님의 용서를 사람들에게 베푸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제 생각에 주님께서는 우리의 용서가 하늘에 이르러야 하고,
우리의 용서가 하느님의 용서와 결합됨으로써
완결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주님의 기도 가르침에서 나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시는데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듯
우리가 서로 용서해야 한다는 우리의 단순한 생각과는 정반대이지요.
권한 문제를 떠나서 우리의 용서는 하느님의 용서와 같아야 하고,
하느님의 용서가 우리를 통해 이 땅에서 실현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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