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12월 1일 대림 제1주간 화요일

Margaret K 2020. 11. 30. 06:20

2020년 12 1 대림 제1주간 화요일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지혜롭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루가 10,21-24)


I give you praise, Father, 
Lord of heaven and earth,
for although you have hidden these things
from the wise and the learned
you have revealed them to the childlik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기석신부-


예로부터 성군은 두 가지 중요한 직무를 수행해야 하였습니다. 첫째는 자기 백성을 원수들에게서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둘째는 백성을 정의롭게, 억눌리고 가난한 이들이 행복하고 만족할 수 있도록 공정하게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느님과 맺은 계약에 불충한 임금들 때문에 남북으로 갈라져 각각 아시리아와 바빌론에게 패망합니다. 이러한 시대적 환경에서 새로운 희망이 떠오릅니다. 특별히 구약의 위대한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다윗 임금에게 내렸던 축복을 새로운 표현으로 언급합니다. 바로 ‘메시아사상’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는 메시아의 출현을 생생하게 표현하고자 나무의 표상을 사용합니다. 사실 햇순과 그루터기는 드문 표현인데, 아시리아와 페니키아 말로 ‘왕홀’을 뜻합니다. 새싹이라는 용어도 다윗의 아버지인 ‘이사이’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하여 그 나라의 왕권을 완성할 후손을 가리킵니다. 지혜와 슬기와 경륜은 다스림의 필수 요소이자 임금의 기본 자질로, 무엇보다 지혜는 하느님의 영에 결부됩니다. 용맹은 백성을 보호하는 평화의 군왕을 상기시키며, 지식과 주님을 경외함은 하느님에 대한 앎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대림 시기에 하느님 나라를 평화와 번영으로 이끄실 분을 기다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언자와 유다의 임금들이 간절히 원하였으나 그들에게는 감추셨던 최고의 특권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된 철부지라면 악하고 패덕하게 행동하기보다 바다를 덮는 물처럼 땅을 가득 채울 주님에 대한 앎으로 응답해야 마땅하고 옳은 일일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우리나라에서 한때 음악 오디션 프로그램이 큰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습니다. 참가자들은 평가단 앞에 나와 한껏 자신들의 실력을 뽐냈었지요. 그리고 평가하는 심사위원들 앞에서 심사평을 들으면서 합격과 불합격 판정을 기다립니다.

사실 이 심사평이 의외인 경우가 참 많았습니다. 너무나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심사의원은 엉망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과 별 차이 없이 뻔한 노래인 것 같은데, 심사위원은 저와 반대로 극찬을 합니다.

전문가니까 당연히 저와 차이가 있겠지요. 그러나 이들의 안목이 항상 옳은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디션에서 우승한 사람보다 중간에 탈락했음에도 대중들로부터 더 큰 인기를 누리는 경우를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문가들도 정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부족함을 가지고 있으므로, 때로는 실수도 하고 잘못된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른 이의 판단에 주저앉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과감하게 버리면서 고유한 ‘나’를 만들어가면 그만인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주님께서도 우리를 함부로 판단하시고 곧바로 벌을 내리지 않으십니다.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있는 시간을 주십니다.

세상의 관점과 주님의 관점에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오늘 주님께서 바치시는 기도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기도를 바치는 부분인데, 어떤 점이 감사하다고 말씀하십니까?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심에 감사하다고 하십니다. 결국 세상에서 지혜롭다는 자들보다 어린아이들이 구원받을 준비가 더 잘 되어 있음을 감사의 기도로 고백하십니다.

실제로 주님께서 뽑은 제자는 능력 있고 재주 많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부족함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을 제자로 뽑으셨고, 그들에게 마귀들을 쫓아내고 나병 환자를 깨끗이 하고 죽은 이를 일으키는 하느님 나라의 권능을 주십니다. 이 하느님의 권능은 많은 예언자와 임금도 받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관점보다 주님의 의지로 주어지는 큰 사랑입니다.

지금을 사는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았으면 합니다. 세상의 기준을 내세우면서 감사할 이유가 없다고 한탄할 것이 아닙니다. 자신은 받은 것이 없다면서 불평 불만할 것도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바라보면서 감사할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철부지와 같은 내 모습도 하느님을 믿고 따르고 있다면 감사할 이유로 충분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며 나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열린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열린 마음은 사람에게 가장 귀중한 재산이다(마틴 부버).


삶의 만족도가 올라갈 때

삶의 만족도가 올라갈 때는 언제일까요?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는, 그래서 스트레스가 없는 순간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이때만이 만족도가 올라갈까요?

저 역시 어렸을 때는 그럴 것으로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충족된다고 해서 만족도가 올라가는 것이 아님을 저 역시 나이를 먹으면서 비로소 깨닫습니다. 오히려 약간의 스트레스를 가지고 있을 때, 또 비록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이라도 해도 그 안에서 집중하고 있을 때 삶의 만족도는 올라갔습니다.

하버드 대학교의 필립 스톤 교수는 삶의 만족도를 올리기 위해 사회적 지지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지지를 위해 사회적 관계에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합니다. 이를 위해 타인에게 친절해야 하며, 인간관계 강화를 자기 습관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신뢰의 삶이 중요합니다. 내 행복을 위해서 말입니다.

내가 하는 선행, 철부지가 하는 선행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하느님 아버지께 예수님도 “철부지 어린이”입니다. 그 이유는 아버지께 ‘모든 것’을 받으셔서 전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여기서 철부지라고 하는 대상은 또한 지금까지 복음을 선포하고 온 제자들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주고 마귀를 쫓아주고 돌아와서 예수님께 모든 것을 보고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시며 오늘 이 기도를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철부지들이 받는 상은 이렇습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당신의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그 복음을 보고 들을 수 있게 되기에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통로인데 그 통로는 내가 주는 것으로 차게 되어있습니다. 남을 행복하게 해주려는 이들은 행복합니다.

      그런데 요즘 남을 행복하게 하려다가 많은 이들의 비난을 한 몸에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혜민 스님’입니다. 이분은 자신이 깨달은 행복의 비밀을 사람들에게 전해주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자신이 깨달은 것’을 전해주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전해주는 행복이 자기 생각에 오염이 되고 말았습니다.

      혜민 스님은 법정 스님의 무소유에 대해 이렇게 해석하였습니다.

 

“법정 스님께서 무소유가 가능하셨던 것은 책 인세가 있었기 때문이다. 신도나 주지에게 아쉬운 소리 안 해도 살 수 있어야, 그리고 또 어느 정도 베풀 능력이 되어야 아이러니하게도 무소유도 가능해진다.”

      무소유가 행복임을 주장하였지만, 점점 돈이 많아지자 무소유라는 개념을 자신의 식대로 변질시킨 것입니다. 법정 스님은 모든 인세를 대학생들 등록금 후원하는 등에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본인은 진정 가난을 실천하며 살았습니다.

 

      어떤 유튜브 분석을 보니 근 10여 년간 혜민 스님은 책 인세 약 50억, 강연 약 50억, 애플리케이션 등 부수입이 약 50억 정도 벌었다고 합니다. 기부 형식으로 받는 종교인이기 때문에 세금도 내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자신이 주지로 되어있는 절의 소유로 된 건물에 살면서 세 들어 산다고 말하며 4억이 넘는 외제 차를 탄다고 자랑했다고 합니다.

 

      자신이 번 돈을 자신이 쓰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하지만 평소에 무소유를 주장하며 많이 갖는다고 행복한 것이 아님을 강연 때마다 하고 다녔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사는 것에 그를 믿었던 많은 사람이 분노를 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마 지금은 혜민 스님도 그리 행복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자신의 복음을 전함이 아니라 마치 철부지 어린이처럼 부모로부터 받은 것을 전하라는 말씀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자신의 행복이 아니라 부모의 행복을 먼저 생각합니다. 자신의 행복을 포기하고 부모의 행복을 위해 공부하기 싫어도 공부하러 유치원에 가고 학교에 갑니다. 그리고 좋은 성적을 받았을 때 부모가 좋아하면 부모를 더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더 공부를 열심히 합니다. 그런 삶이 나중에는 세상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게 만드는 바탕이 됩니다. 이것이 큰 가치를 만듭니다.

      어떤 유튜브에 보니 이런 모습의 혜민 스님과 정반대의 삶을 사는 종교인을 소개하는데 성남에서 무료급식소와 안나의 집, 청소년 쉼터 등을 운영하는 김하종 신부가 나왔습니다. 김하종 신부는 이탈리아 태생으로 한국 국적을 취득해 30년 동안 가난한 이들을 위해 봉사하였습니다. 난독증으로 어렸을 때부터 많은 상처를 지니고 있었고 커서는 사제가 되어 상처받은 이들을 치유해주고자 했습니다. 지금도 오래된 다마스 차를 끌고 다니며 남들에게 구걸해가며 노숙자들과 가출 청소년들을 돕고 있습니다. 지금은 코로나로 문을 닫는 급식소가 늘어나자 더 많은 이들이 한 끼를 때우기 위해 안나의 집을 찾습니다. 안나의 집도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겪는다고 합니다. 봉사자도 줄고, 후원도 줄기 때문입니다. 가장 힘든 것은 동네를 노숙자들로 더럽힌다고 말하는 주위 사람들의 민원과 항의입니다. 그런데도 꿋꿋이 매일 도시락을 700여 분에게 나누어주고 있습니다.

 

      코로나 시대를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를 일기 형식으로 적은 책, 『순간의 두려움 매일의 기적』에서 김하종 신부는 가난한 이들을 친구라고 부르며 “그리스도의 아픈 상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분은 자신의 무언가를 전하는 것으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이런 행위가 그리스도의 아픈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치유해주려는 노력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니 철부지 어린이입니다. 그리스도의 상처를 어루만지면서 그리스도의 뜻에 어긋나는 삶을 살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밤마다 몸이 부서질 듯 아프기도 하지만 또 친구들이 도시락을 받아가는 것을 보며 매일 행복해합니다.

 

      내가 가진 것을 주려고 하는지,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려고 하는지가 좋은 일을 하더라도 그것이 참 행복으로 이끄는 것인지, 안 좋게 끝나게 하는지를 결정합니다. 우리는 철부지 어린이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을 믿으면 오류에 빠지고 오염된 복음을 전하다 자신도 오염되게 됩니다. 우리는 아무리 좋은 것을 준다고 하여도 나의 것이 아닌 아버지의 것을 받아서 나누는 철부지 어린이여야 합니다.


-조재형신부-


지난 11월 1일 위령성월이 시작되는 첫날이었습니다제가 미사를 도와드리고 있는 부르클린 한인 성당에는 같은 날 유아세례와 연도가 있었습니다태어난 지 10개월 된 아이를 위한 유아세례였습니다코로나19로 미사 참석 인원이 10명으로 제한되었습니다아이는 코로나19를 모를 것입니다아이는 해맑게 웃으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유아세례를 받았습니다아이가 세례를 받으면서 가족들도 고백성사를 하였습니다한 아이의 세례가 닫혀있던 가족들의 신앙을 다시 열었습니다아이의 앞날에 하느님의 축복이 함께하시기를 기도했습니다유아세례를 마치고 세상을 떠나신 고인을 위하여 장례식장으로 갔고 연도를 바쳤습니다손에는 묵주를 들고 평온한 모습으로 누워있는 고인을 보았습니다고인의 큰 딸은 아버지의 마지막 가는 길에 함께 해 주신 교우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습니다이제 아픔도고통도슬픔도 없는 곳에서 잘 지내시기를 바란다며 눈물을 흘렸습니다한 아이는 축복 속에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한 영혼은 기도를 받으며 천상의 영원한 나라로 가셨습니다()과 사()는 둘이 아니라 하나인 것 같았습니다.

 

1968년도에 스탠리 큐브릭에 의해서 제작된 스페이스 오디세이 2001’의 마지막 장면이 생각났습니다머나먼 우주에서 생을 마감하는 주인공은 다시 어린아이가 되어서 지구로 돌아가는 모습입니다영화는 철학적인 주제를 영상으로 담았습니다플라톤의 철학니체의 철학을 담아냈습니다표범을 피해서 동굴 속에 있던 유인원은 밖으로 나왔고 도구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도구를 가진 유인원은 표범을 이길 수 있었고물을 차지하려는 다른 유인원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유인원이 도구를 이용하게 된 것은 동굴 속에 있던 모노리스였습니다모노리스는 유인원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존재가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모노리스는 유인원의 지적인 능력을 향상시켰습니다플라톤은 동굴의 비유에서 우리는 허상을 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동굴에서 나오면 참된 진리를 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그의 저서에서 초인(超人)’에 대해 이야기합니다초인이 오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다른 세상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이육사는 그의 시 광야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큰 ()물이 비로소 길을 열엇다지금 눈 나리고 梅花香氣(매화향기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다시 千古(천고)의 뒤에 白馬(백마)타고 오는 超人(초인)이 있어 이 曠野(광야)에서 목노아 부르게 하리라.”

 

도구를 이용한 인류는 문명과 문화를 만들었습니다도구는 예술이 되었습니다성당과 사원이 되었습니다인류의 이성과 감성은 도구를 만나면서 화려한 꽃이 되었습니다그러나 도구는 총과 칼이 되었고비행기와 군함이 되었고대포와 미사일이 되었습니다도구를 선점한 인류는 유인원과 다른 생명을 하급한 존재로 여겼습니다아메리카 원주민아프리카 원주민도 하급한 존재로 여겼습니다전쟁과 폭력이 난무하였고아름다운 지구는 식민지 쟁탈의 싸움터로 변하였습니다도구는 문명과 문화를 만들어내는 축복이었지만 도구는 욕망과 야만을 드러내는 무기가 되었습니다어쩌면 우리는 아직도 허상이 가득한 동굴에서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여전히 폭력과 전쟁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우리의 후손들이 살아야 할 지구를 심각하게 파괴하고 있습니다가난해서병들어서 죽어가는 사람이 많습니다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피부색 때문에 차별받는 사람이 있습니다종교신념세대민족의 갈등은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오늘의 성서말씀은 우리가 욕망과 야만의 동굴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합니다초인의 눈에는 우리들 또한 저급한 존재로 여겨질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그러기에 우리는 더욱 겸손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이사야 예언자는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충분히 아름답다고 이야기합니다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니 지혜와 슬기의 영경륜과 용맹의 영지식의 영과 주님을 경외함이다그는 주님을 경외함으로 흐뭇해하리라그는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판결하지 않고 자기 귀에 들리는 대로 심판하지 않으리라힘없는 이들을 정의로 재판하고 이 땅의 가련한 이들을 정당하게 심판하리라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예수님께서는 말씀과 표징으로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셨습니다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이미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향한 자녀다운 신뢰와 존경은 바람직한 기도 생활의 두 기둥입니다!

-양승국신부- 

 

예수님으로부터 제자 교육을 이수한 72제자들이 사목 실습을 마치고 돌아와 실습의 결과를 보고하는데, 완전 축제 분위기입니다. 넘치는 기쁨을 감추지 못한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보고를 드렸습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루카 복음 10장 17절)

  

기쁨으로 충만한 제자들의 모습 앞에 예수님 역시 크게 기뻐하시며 대견스러워하셨습니다. 자만심이 하늘을 찌르고 허세로 가득한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과는 달리 순수하고 소박한 제자들의 모습에 예수님께서는 성령 안에 즐거워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루카 복음 10장 21절)

  

참으로 가슴 훈훈한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공적인 사목 실습의 결과물을 안고 환한 얼굴로 달려온 제자들, 제자들의 성공을 자신의 일보다 더 기뻐하시는 스승님의 모습...이 세상이 주는 기쁨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충만한 기쁨이 그 자리에 흘러넘쳤습니다. 

 

성공적인 복음 선포 여행의 결과로 인한 흘러넘치는 충만한 기쁨! 그것은 언젠가 맞이하게 될 주님의 날의 특징입니다. 그 기쁨은 사탄에 대한 주님의 승리로 인한 기쁨입니다.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건너감을 통해서 얻는 기쁨입니다.

  

짧지만 진심이 담긴 예수님의 감사 기도가 돋보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복음서가 전해주는 예수님의 기도는 모두 ‘아버지’라는 표현으로 시작됩니다. 유다 문화 안에서 이 표현은 어린이들이 자신의 아버지를 정겹게 부를 때 사용하던 아람어 ‘아빠’(Abba)라는 단어의 번역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평소 지극히 친근하고 다정한 어조로 아버지이신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하느님이란 존재는 꽤나 멀리 계시고, 무척이나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따라서 그 누구도 감히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있어 하느님은 너무나 편안하고 따뜻한 아버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라는 친근한 인사말에 ‘하늘과 땅의 주님’이란 존경으로 가득 찬 호칭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따지고 보니 예수님의 기도에는 하느님 아버지를 향한 애정과 존경이 동시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는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향한 자녀다운 신뢰와 존경은 바람직한 기도 생활의 두 기둥입니다. 

 

예수님 시대 학벌을 자랑하면서, 스스로 지혜롭다고 자처하며, 여기저기 떠벌이고 다니던 사람들이 있었으니,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고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콧대높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고, 거들떠 보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철부지들과 보잘것 없는 사람들에게 하늘 나라의 신비를 보여주셨습니다. 너무나 은혜롭고 감사한 예수님의 선택에 큰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이영근신부-


“대림시기”을 시작하면서 <복음>는 예수님의 감사와 기쁨을 노래합니다. 이는 우리가 “대림시기”를 어떤 마음으로 맞이하고 지내야 할 것인지를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파견한 일흔 두 “제자들이 돌아와 기뻐하며 말하자”,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기도를 드리십니다. 마치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합니다.”(루카 1,47)하고, 기뻐 찬미하는 성모님의 노래와 같습니다. 그러니, 기도는 예수님의 마니피캇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대체 무엇에 감사하고 즐거워하실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10,21)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졌음에 드리는 찬미와 감사기도입니다. 여기서 “감사”(Έξομολο-γουμαί)의 원어의 뜻은 ‘억제할 수 없는 기쁨으로 즐거워하는 감격스런 찬양의 고백’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는 “아버지의 선하신 뜻”에 대한 완전한 인식과 동의와 전폭적인 지지를 드러냅니다. 그러니, 우리도 이 “대림시기”에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그 뜻 안에서 찬미와 감사의 노래를 불러야 할 일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루카 10,22)

 

그렇습니다. 오로지 아드님이신 예수님만이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아시며,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이들이 알게 됩니다. 곧 “하느님의 뜻”은 우리의 지혜나 슬기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통해 드러내주시기에 알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드러내 보여주신다.’해서, 모두가 알게 되거나, 모두를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라야 알아듣고, 또한 받아들이는 만큼만 알아듣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알게 된 제자들에게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곧 “하느님의 뜻”의 이루어짐이 제자들에 대한 행복선언으로 드러납니다.

“너희가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들은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루카 10,23)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아버지의 선하신 뜻”과 계시를 받은 복된 이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많은 이들이 보고자 했지만 보지 못했던 것을 그들에게 보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처럼, 아버지께서 우리 안에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심을 믿음과 흠숭으로 고백해야 할 일입니다. “아버지의 뜻”에 전폭적인 지지와 동의로 찬미와 감사를 드려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루카 10,21)

 

주님!

지혜롭다는 자에게서 감추시니, 믿음 안에 저를 가두소서!

철부지에게서 드러내시니, 신비 안에 저를 가두소서!

아버지의 뜻 안에 저를 가두시어, 신뢰하고 의탁하게 하게 하소서.

감사할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보는 눈, 들을 수 있는 귀 

-반영억신부-


세상에는 볼 것도 많고 들어야 할 말도 많습니다. 그렇지만 보고 싶은 것을 다 볼 수도 없고, 듣고 싶은 말을 다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개 사람들은 취향에 따라,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듣고 싶은 것을 듣게 됩니다. 같이 보거나 들어도 자기 시선으로 보고 듣기 때문에 다양한 해석을 낳게 마련입니다. 기왕이면 꼭 볼 것을 보고 들어야 할 말을 꼭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눈을 떠야 하고, 듣기 위해서는 귀가 열려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사람들과 똑똑한 사람들이 아니라 철부지 어린이들이 먼저 알아보고 듣게 된다(루카10,22)는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어른들은 자기가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가르침을 줄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철부지 어린아이들은 계산하지 않고 순수하게 받아들입니다. 어른들은 무슨 얘기를 하면 그 안에 어떤 의도가 담겨 있는가를 신중히 생각하고 온갖 추측과 추정, 상상을 다 합니다. 그러나 철부지는 잔머리를 굴리며 셈을 할 줄 모릅니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합니다. 그래서 “아는 것이 병이요, 모르는 게 약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때때로 제자들에게만 따로 얘기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오로지 예수님만을 바라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루카10,23-24). 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은 바로 예수님 당신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듣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과연 지금 앞에 계신 예수님을 제대로 보고 또 그분의 말씀을 제대로 들었을까요? 혹 마음은 콩밭에 있지는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육신만을 보고 예수님의 육성만 들었다면 참으로 불행합니다.

사실 꼭 볼 것을 보고 들어야 할 것을 들었다는 증거는 예수님의 마음을 읽고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확인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볼거리와 들을 거리에는 분주하면서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데는 인색합니다. 주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감실을 찾고 주님을 영접하는 미사참례는 소홀히 합니다. 그러면서도 주님과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모순 속에 있습니다. 이 모순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늘은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바라보아야겠습니다. 귀를 쫑긋 세워 말씀을 들어야겠습니다. 볼 것을 보지 않는데, 눈이 좋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귀가 밝으면 뭐합니까? 들어야 할 것을 듣지 않는데….

요즘 세상의 현실을 보십시오, ‘코로나19’로 많은 이들이 힘겨워하는데 여전히 자기주장만 하고 자기가 최고라고 고집을 피우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이들이 제발 백성을 위한다는 소리나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만이라도 하느님 앞에 철부지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하며 성령의 도움을 청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느님 버지와 

-송영진신부-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10,21)”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셨습니다.

그 구원에는 어떤 차별도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인 것은 아닙니다.

교만한 위선자들은 잘난 체 하면서 예수님을 안 믿었고,

예수님의 복음을 거부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자처하는 자들인데,

사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겸손하고 단순하고 진실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철부지들’이라는 말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기서 ‘철부지들’이라는 말은 나쁜 뜻으로 사용된 말이 아니라,

어린이처럼 순수하고 단순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고,

좋은 뜻으로 사용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감사기도를 드리신 것은,

겸손하고 순수하지만 사회적으로 소외계층에 속한 사람들이

하느님의 구원사업에서는 소외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만한 위선자들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감사기도를 드리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그들에게는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이 됩니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은 아무도 소외되지 않고 모두가 구원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먼 곳에서 와서 예수님께 경배를 드린 ‘동방박사들’을

대표적인 ‘철부지들’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동방박사들이 그 당시에 소외계층에 속한 사람들은 아니었겠지만,

그들의 순수한 마음과 믿음과 열정은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철부지들’의 좋은 예가 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동방박사들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헤로데 임금, 수석 사제들, 율법학자들은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자처하는 교만한 위선자들입니다.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동방박사들로부터 메시아 탄생 소식을 들었고,

또 자신들의 성경 지식으로 메시아께서 태어나신 곳이 베들레헴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면서도, 메시아께 경배를 드리러 가지 않았습니다.

(알면서도 실행하지 않으면,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닙니다.)

헤로데는 경배하러 가겠다고 거짓말을 했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동방박사들만 받아들이시고,

헤로데와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거부하신 것이 아니라,

동방박사들처럼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하는 사람들만 예수님을 만났고,

원하지 않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지 않아서 못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은총을 주시는 분인데,

그 은총은 받아들이는 사람만 받게 되고,

안 받아들이는 사람은 자기들이 안 받아서 못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교만과 위선으로는 만날 수 없는 분, 겸손하고 진실하고

순수한 마음으로만 만날 수 있는 분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성탄절은 겸손하고 순수한 사람들의 축제입니다.

교만한 위선자들이 자기들끼리만 어울려서

세속적으로 흥청망청 즐기는 성탄절은 아무것도 아닌 날입니다.

진정한 성탄절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루카 10,22).”

 

이 말씀은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 예수님이

완전히 하나로 일치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예수님만이 아버지 하느님께로 가는 통로라는 뜻이기도 합니다(요한 14,6-7).

그런데 예수님은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의 모습으로, 즉 세상에서 제일 가난하고,

약하고, 힘없는 아기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10-12).”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는 사람들을 구원하기는커녕

사람들의 보호를 받아야 할 가냘프고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런데도 천사는 그 아기가 ‘구원자’ 라고 선포합니다.

세속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에게서 오는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과

거룩함과 속량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자랑하려는 자는

주님 안에서 자랑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1코린 1,27-31).”

스스로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잘난 체 하는 사람들은

나중에 하느님 앞에서 부끄럽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잘난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끄럽게 된다는 말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4,11).”

 

예수님을 만나려면 예수님께서 계신 곳으로 가야 합니다.

그곳은 ‘가장 낮은 곳’이고, 나를 낮추어야만 갈 수 있는 곳입니다.

우리는 구유에 누워 계시는 아기 예수님의 모습에서 하느님을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이신 분이 왜 그렇게 오셨는지,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묵상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 아닌 세속의 명예와 권력 같은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런 것은 하느님 앞에서 전혀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복음: 루카 10,21-24: 예수께서 성령을 받아 기쁨에 넘치신다. 

-조욱현신부-


제자들의 전도사업 보고를 들으시고 예수님 역시 기쁨으로 찬가를 부르신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21절).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이란 이방의 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과 점성가들, 그리고 이스라엘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 학자들을 말한다. 그들은 모두 세상의 비밀과 하느님의 뜻을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과 업적들을 보지도 못했고, 듣지도 못하였다. 자신의 교만과 오만에 빠져 주님의 가르침을 알아듣지 못하였고, 그분을 배척하고 만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당신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말씀하신다. 즉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 학자들은 조상들로부터 전승을 물려받은 데 반해 예수님은 하느님께 모든 계시를 전해 받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 아드님만이 서로를 알고 계시며, 또한 예수께로부터 계시를 받은 사람만이 하느님 아버지를 알 수 있다고 하신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택하신 제자들이 행복하다고 선언하신다.

 

바로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적을 보기 때문에 복되다는 것이다. 이미 예수님의 말씀과 업적으로 하느님 나라가 이룩되었다.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마태 13,16-17) 하신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생각과는 다르다. 그분은 겸손한 사람, 마음이 가난한 사람에게 당신의 진리를 드러내신다. 이것이 복음서의 중심 사상이며 예수님의 본 모습이다. 스승님은 제자들을 ‘철부지들’이라고 하신다. 철부지들이란 어린이들로서 하느님의 뜻을 있는 그대로 따르며 실천하기 때문에,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고 하는 사람들보다 그들이 구원받을 준비가 더 잘 되어 있다는 것이다.

 

바리사이파 사람이나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을 배척하여 죽음으로 몰고 갔다. 얕은 지식으로 신앙을 논하며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신앙의 자유를 이야기하면서 믿음에 관해 이야기하지도 못하게 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모습은 어쩌면 태양 앞에 등불을 켜 놓는 것이거나, 아니면 그 등불을 가지고 그냥 어둠 속으로 숨어버리는 것과 같다. 그래서 결국은 그 빛을 거부하는 결과를 만들고 만다.

 

이제 우리는 그분의 신비를 알 수 있으니, 우리의 눈은, 또 그분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눈은 행복한 눈이다. 우리는 그분의 놀라운 가르침을 들었으니, 우리 삶의 참된 제물로 그분께 흠숭과 영광을 드려야 할 것이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10, 21)

-한상우신부-

예수 성탄의
기쁨으로
초대하는
성탄 성월이다.

하나하나
소중한
12월의
시작이다.

선하신 뜻은
선하신
만남으로
이어진다.

선하신 뜻이
길을 만든다.

선하신 뜻이
우리의 교만을
허문다.

선하신 뜻이
빛이다.

끝내 어둠을
이긴다.

사랑으로
소중한 형제가
되게하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선하신 뜻이다.

선하신 뜻안에
이루어지는
참된 사랑이다.

선하신 뜻이
있는 곳에
신비가 있고
구원이 있다.

선하신 뜻은
선하신 실행으로
드러난다.

선하신 뜻은
먼저 우리를
사람다운
사람이 되게
하신다.

이 모든 것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낸
사랑의
신비이다.

신비는
감추어져 있기에
신비롭다.

신비는
선하신 하느님의
현존을 인정하는
거기에서
다시 뜨겁다.

다시 사랑하는
법을 가장
낮은 곳에서
가르쳐주시는
사랑의 선하신
신비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을 아는 행복을 이야기합니다.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루카 10,21)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시며 아버지께 말씀하십니다. 일흔두 제자가 파견에서 돌아온 직후의 일이지요. 각자 다양한 삶을 살다가 예수님의 부르심에 모여든 일흔두 제자는 유대교의 정식 제도 안에 속하지 않은 이들이었을 겁니다. 그들은 소위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이 아니었지요.

율법 전문가나 사제 계급이 아닌 그저 평범한 사람들, 평범하다 못해 단순하고 무지한 철부지들에게 어떻게 주님을 아는 지식이 가능했을까요? 그건 "앎"이 주님께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당신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 아버지의 선하신 뜻입니다.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루카 10,22)

누군가 주님을 알게 된다면, 그건 예수님께서 그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려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당신처럼 아버지도 알기를 예수님께서 간절히 원하신 덕이지요. 예수님의 지향 안에 그가 들어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가 세상 눈에는 잘난 구석 하나 없어 보일지라도 주님 눈에는 특별하고 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보라, 우리 주님이 권능을 떨치며 오시어 당신 종들의 눈을 밝혀 주시리라."(복음 환호송)

볼 수 있도록, 알 수 있도록, 깨달을 수 있도록 눈을 밝혀 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지금은 희미하고 흐릿하더라도 그분께서 오시면 보다 더 선명히, 확실히 아버지를 뵙고 알게 될 것입니다. 그날, 주님과 우리 사이에 가리워진 그 신비의 장막이 걷힐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메시아 시대에 이루어질 평화가 눈에 보이듯 그려집니다.

"그날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이사 11,1)

오늘 독서 대목의 전반부는 메시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사이의 아들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메시아는 주님의 영과 함께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펼칠 것입니다.

"늑대와 새끼 양, 표범과 새끼 염소,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어린아이, 암소와 곰, 사자와 소, 젖먹이와 독사, 젖 떨어진 아이와 살무사"

후반부에서는 메시아 시대를 아름답고 훈훈하게 묘사합니다. 약육강식의 생태계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커플들이 등장하네요. 자신이 살기 위해 타자를 해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그린 것이 아닐까요? 구약의 백성이 갈망하는 메시아 시대는 이처럼 평화와 공존, 조화와 상생, 화목과 존중, 상호적 보호와 돌봄이 피어나는 시대일 겁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선포하시고 우리가 고대하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땅이 주님을 앎으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다."(이사 11,9)

누구도 타자를 해치지 않는 상태는 "주님을 앎"에서 기인한다고 하십니다. 주님을 경외하고 알고 사랑하는 이는 타인을 혹독히 대하거나 그에게 악을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아는 이는 악에 대해 무능해질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누군가 사람, 짐승, 자연 등 타자인 피조물을 착취하거나 공격하거나 소외시킨다면 그는 주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혹 종교의 이름으로 하더라도 그는 실상 자신의 절대자와 아무 관계가 없는 겁니다. 주님을 아는 이는 절대 그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험한 세상살이에서 주님을 진정으로 아는 이는 철부지로 분류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약지도 못하고 잔꾀도 없고 타인을 밟고 올라서지도 못하는 이들, 어려운 이를 외면하거나 제 이익을 위해 타인을 후려치는 일은 꿈도 못 꾸는 이들이 곧 철부지들이니까요.

"주님, 이 시대에 정의와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화답송)

시편 저자와 함께 이 기도를 바칩니다. 철부지라도 좋으니 이 세상이 그런 이들로 가득 넘쳐서, 주님께서 바라시는 정의와 평화가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 철부지라도 좋으니 누구도 굶지 않고 소외되지 않고 낙오되지 않는 세상을 위해 작은 힘들이 모였으면 좋겠습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루카 10,23)

철부지인 우리는 행복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권세가와 재력가들이 보지 못하는 주님의 신비를 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높이와 넓이과 숫자가 아니라 사랑 때문에 다 버리신 주님과 마음을 나누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약삭빠른 손짓에 흔들리지 않고 꿋꿋이 주님의 평화를 추구하는 철부지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태평천하와 천하태평

-김찬선신부-

말씀 나누기 - 대림 1주 화요일-태평천하와 천하태평 (ofmkorea.org)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12월 4일 대림 제1주간 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