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11월 26일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Margaret K 2020. 11. 25. 07:08

2020 11 26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루가 21,20-28)


When these signs begin to happen,
stand erect and raise your heads
because your redemption is at han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허규신부-


예루살렘의 성전은 두 번 파괴됩니다. 기원전 8세기 바빌론에 의해서, 그리고 기원후 70년 로마에 의해서입니다. 성전이 파괴된 사건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큰 충격이었기에, 이를 계기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고 자신들의 죄를 성찰합니다. 요한 묵시록은 이 두 사건을 마치 하나의 사건처럼 연결합니다. 시대적으로 요한 묵시록에서는 로마가 성전을 파괴한 사건을 나타내려고 ‘바빌론’이라는 명칭을 사용합니다. 묵시록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아주 자세하게 묘사합니다. 마치 그 사건을 목격한 사람이 전하는 말처럼 들립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사람들에게 종말을 떠올리게 할 만큼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전쟁으로 많은 이들이 죽어 나가며 포로가 되고 삶의 터전은 무너집니다. 전쟁을 피하기 힘든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은 더 큰 고통을 받습니다. 성경은 이런 재난의 상황을 말하면서 백성들의 행동을 신앙 안에서 성찰합니다. 여기에는 하느님께서 아무 이유 없이 이런 재난을 허락하시지 않으실 것이라는 생각이 자리합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자신 안에서 멸망의 이유를 찾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종말에 관한 말씀이 우리의 잘못이나 죄를 탓하기 위한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지금도 큰 사건들이 생기면 사람들은 ‘왜?’라고 질문합니다. 그 이유를 찾아가는 과정은 우리를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이면서 동시에 하느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종말이 모든 것의 끝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께서 재난의 상황에서도 우리를 속량으로 이끄신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머니를 잃은 슬픔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큽니다. 그런데 어머니를 잃은 상태에서 직장에서 쫓겨나기까지 하면 어떨까요? 직장도 없어서 실업급여로 생계를 꾸려야 한다면, 더군다나 자기 몸 하나만이 아닌 홀로 아이까지 키워야 한다면 어떨까요?

아마 이런 상황에서 희망을 품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아동 문학에 해당하는 글을 써서 출판사에 건넸습니다. 출판사에서 자신의 글을 받아주고 책을 내줘야 숨통이 트일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실망의 연속이었습니다. 출판사에서는 이런 메시지를 보내며 퇴짜를 놓았습니다.

“이 책에는 부사가 너무 많고, 또 너무 길어서 지루하다.”

이런 식으로 12곳의 출판사에서 거절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일까요? J.K. 롤링입니다. 맞습니다. ‘해리포터’ 시리즈의 작가입니다. 그의 인생 스토리를 보면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최악의 상황이라면서 그 자리에 그냥 주저앉아서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책으로 그리고 영화로 ‘해리포터’ 시리즈를 만나게 된 것은, J.K. 롤링이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가 자신의 노력을 키우기보다는 “이런 상황이라서 나는 힘들어!!”만을 사람들에게 설명하려고 합니다. 설명만 하다가는 어떤 상황도 변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어떤 순간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도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세상 종말에 대해 말씀을 하십니다. 이 세상 종말에 대해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공포에 휩싸여서 절망에 빠져 있으라는 것도 아닙니다. 정말로 끔찍하고 괴로운 상황에서도 희망을 발견하기 위한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보면, 종말 설교의 결론으로 사람들이 하늘의 표징들을 보면 구름 타고 오는 사람의 아들을 맞을 준비를 해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구름을 타고 오는 사람의 아들은 십자가의 죽음 이후 부활하신 예수님 자신입니다. 죽음을 이기신 분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 희망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종말이 온다고 해서 무조건 벌벌 떨며 두려워하고 자포자기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지금, 이 순간에 나 자신이 해야 할 사랑의 실천에 집중해야 합니다. 사랑의 실천이 곧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우리의 삶이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노력해야 할 사랑의 실천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가족, 이웃, 그 밖의 사람들에게 어떤 사랑을 보여 줄 수 있을까요?
모든 것을 배우도록 하라. 나중에는 그 어떤 것도 소용없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성 빅토르 휴).


나의 가치

삶에 대해 의문을 품고 해답을 찾아다니던 젊은이가 현자를 찾아가 “저의 존재 가치는 어떻게 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 현자는 보석 하나를 주고는 시장에 나가 값을 알아보고 절대 팔지는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과일가게에 들어가 보석을 내놓으니 오렌지 다섯 개를 주겠다고 합니다. 채소가게에 가서 내놓으니 감자 한 자루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보석상을 찾아가니 “이것은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귀한 보석이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현자는 이 젊은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 자신은 이 보석과 같다. 그대는 자신을 오렌지 5개에 팔수도 있고, 감자 한 자루에 팔 수도 있다. 그리고 최고의 보석으로 자신의 가치를 매길 수도 있지.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그대의 정의가 자신의 가치를 결정한다네.”

우리는 하느님의 창조물로 진귀한 보석과 같은 존재입니다. 따라서 이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의 말을 무시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또 세상의 기준대로 자신의 가치를 함부로 매겨서도 안 됩니다. 나의 가치를 아는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조재형신부-


데이비드 에든버러의 우리의 지구를 위하여를 보았습니다. 93세의 노인은 70년 지구의 곳곳을 다니면서 다양한 생명을 보았습니다아름다운 지구와 다양한 생명은 인간의 무분별한 개발과 자원의 낭비로 파괴되었고사라져갔습니다우주에서 바라본 지구는 아름답게 빛나는 푸른 별이었습니다어두운 우주에서 지구는 에덴동산이었습니다지구밖에는 생명의 다양성을 볼 수 없었습니다하느님께서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인간이 하느님께서 만들어주신 에덴동산을 죽음의 땅으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93세 노인이 태어나던 때보다 지구의 온도는 1도 상승했다고 합니다.

 

지구의 동물 중에 40%는 인간이 차지한다고 합니다나머지 55%는 인간이 양식하는 가축이라고 합니다그중에도 닭이 대부분이라고 합니다나머지 5%만이 자연에 있는 동물이라고 합니다인간이 인간을 위해서 동물을 키우고 있다고 합니다북극의 얼음이 녹으면 얼음에 갇혀있던 메탄이 배출된다고 합니다그렇게 되면 지구의 온난화는 가속화 될 것이라고 합니다인간이 지금처럼 무분별한 개발과 자원을 낭비하면 앞으로 60년 후에 지구의 기온은 4도 가량 상승할 거라고 합니다그렇게 되면 인간이 쌓아놓은 문명이라는 바벨탑은 무너지고인간이 사라진 지구는 다시금 생명의 다양성을 복원할 것이라고 합니다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지구라는 에덴동산은 5번의 멸종이 있었지만 생명의 다양성을 복원하였기 때문입니다.

 

93세의 노인에게 질문하였습니다. “은퇴하셔서 조용히 사셔도 되지 않습니까?” 노인은 대답합니다. “후회할 것 같아서 증언합니다우리가 자연을 돌보면 자연은 반드시 우리를 돌봅니다우리가 자연을 파괴하면 자연은 우리를 대신할 새로운 생명의 다양성을 만들 것입니다.” 노인은 우리와 모든 이를 위해서 증언하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지식이 아닌 지혜를 추구하면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생명의 다양성이 살아 숨 쉬는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에덴동산을 만들 수 있다고 합니다석유와 석탄과 같은 화석연료의 사용을 점진적으로 줄이면서 재생 에너지의 사용을 늘리면 된다고 합니다. ‘태양에너지지열바람을 이용하면 된다고 합니다.

 

인간의 미래를 위해서 만든 연금과 자본을 석유와 석탄을 개발하는데 투자하기보다는 재생에너지를 개발하는데 투자하면 된다고 합니다우리의 땅은 70억 명이 매일 먹는 육식을 제공할 수 없다고 합니다그러기에 우리의 식습관을 바꿔야 한다고 합니다바다의 생명을 보호하는 방법을 찾고삼림을 다시 복원하면 자연은 다시금 생명의 다양성을 복원할 것이라고 합니다우리가 생각을 바꾸면 우리의 기술과 과학으로 생명의 다양성을 복원하며 어두운 우주의 에덴동산이 지구에서 사랑하며 살 수 있다고 합니다이제 우리는 곧 대림시기를 시작합니다시간이 되시는 분은 우리의 지구를 위하여를 보시면 좋겠습니다.

 

오늘 묵시록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무너졌다무너졌다대바빌론이바빌론이 마귀들의 거처가 되고 온갖 더러운 영들의 소굴온갖 더러운 새들의 소굴더럽고 미움 받는 온갖 짐승들의 소굴이 되고 말았다.” 93세 노인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우리가 자본과 욕망의 바벨탑을 계속 쌓으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오늘 복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93세의 노인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우리가 무분별한 개발과 생명의 다양성을 파괴하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우리가 사는 푸른 별 지구 외에는 에덴동산이 없습니다우리가 믿음과 사랑 그리고 희망의 탑을 쌓으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계속 될 것입니다우리가 청빈과 정결 그리고 순명의 삶을 산다면 그래서 모든 형제들이 생명의 다양성을 보존한다면 이곳이 하느님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너희는 알아라주님은 하느님이시다그분이 우리를 지으셨으니 우리는 그분의 것그분의 백성그분 목장의 양 떼라네.” 


그리스도 없는 종말은 두려움 뿐이지만, 그분과 함께 하는 종말은 설렘과 기쁨의 순간입니다!

 -양승국신부-

 

오래전 이스라엘로 입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겪었던 일입니다. 비행기 안에는 소위 ‘디아스포라’(dispora) 유다인 청년들이 가득 차리를 채우고 있었습니다. 아미도 평생 처음 방문하는 고국인 듯 했습니다. 착륙이 가까워질수록 분위기가 고조되었고, 큰 목소리로 자신들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흥분과 설렘으로 가득했던 그들의 합창을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유다인들에게 있어 성도(聖都) 예루살렘과 거룩한 성전(聖殿)이 부여하는 의미는 엄청났습니다. 힘들때 마다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었습니다. 자신들 삶을 지탱해주는 든든한 기반이요, 심장이나 목숨같이 소중한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의 영예요 자부심인 예루살렘의 함락과 철저한 파괴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 그때에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나가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루카 복음 21장 20~21절) 

 

사실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예루살렘은 여러번 수모를 겪은 바 있습니다.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BC 175~164)의 군대는 철저하게도 예루살렘과 성전을 짓밟았습니다. 그간 성전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전례를 금지했습니다. 성전 중앙에는 파괴자의 우상인 제우스 제단을 세웠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유다 전쟁(AD 66~70) 중에 예루살렘은 또 한번 큰 수모를 당하게 됩니다. 유명한 유다 역사가 요셉푸스 플라비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백만명 이상의 유다인들이 살해되었고, 십만여명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예루살렘은 처참히 허물어져 폐허가 되었고, 성전은 불타고 말았습니다. 

 

오늘 예수님 예언의 말씀이 현실이 된 것입니다. “불행하여라, 그 무렵에 임신한 여자들와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 이 땅에 큰 재난이, 이 백성에게 진노가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칼날에 쓰러지고 포로가 되어 모든 민족들에게 끌려갈 것이다.”(루카 복음 21장 23~24절)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는 위풍당당하고 견고했던 도시 예루살렘 역시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한때 영원한 보루요 가장 안전한 피신처로 여겼던 예루살렘이 이제는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가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고, 삶의 마지막 보루로 여기는 지상의 것들 역시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겠습니다.

 

파괴와 징벌의 날에 어떤 사람들은 불안과 무기력, 두려움과 공포로 전율할 것입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열렬한 기대와 희망으로 그 시간을 기다립니다. 그리스도 없는 종말은 두려움 뿐이지만, 그분과 함께 하는 종말은 설렘과 기쁨의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에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복음 21장 27~28절)

  

사람의 아들이 타고 오실 구름은 하느님의 전차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인류에게 계시하실 때, 권능과 큰 영광에 쌓여 그렇게 오십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은 하느님의 주권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구름은 예수님의 신적 위엄을 가리킵니다. 인간의 언어로서는 형언할 수 없는 그분의 큰 영광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지상 생애 동안 보여주셨던 약함과 부드러움이 아니라 위엄과 영광 중에 오심을 강조합니다.

  

그간 갖은 박해와 고통 속에 교회는 무거운 짐을 진 사람처럼 잔뜩 허리를 구부리고 머리를 떨어트린 채 세상을 견뎌왔습니다. 언젠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표징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신자들은 용기를 내야 합니다.

  

이제 곧 박해와 위협은 종말을 고하게 될 것입니다. 비웃음과 조롱은 희망과 기쁨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이제 허리를 똑 바로 펴고 고개를 쳐들 순간입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이영근신부-


우리는 지금 <전례시기>의 막바지에 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그날에 벌어질 무시무시한 표징들을 듣습니다. 곧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예고’, 곧 종말과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곧 재림에 대한 표징들입니다. 이는 종말 곧 구원은 올 것이라는 사실과 하느님께서 그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그때에 그 어떤 시련을 당하더라도 절망하지 말라는 희망의 메시지이며, 우리를 그리스도께서 오실 길을 준비하도록 이끌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8)

 

이는 그날이 우주의 파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생활이 새롭게 창조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곧 그날의 대재앙은 단순히 미래를 앗아가는 두려움이 아니라, 우리를 “속량”하신다는 위로와 용기를 줍니다. 그래서 떼이야르 드 샤르뎅은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의 종말은 집단적 죽음이나 멸망, 결별이 아니라, 하나의 변형이 될 것입니다. 곧 인간의 종말은 분열과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변화와 새로운 탄생이 될 것입니다. 곧 대재앙이 아니라, 정신적 역전이 될 것입니다. 정신은 역전하고 다른 영역으로 들어갈 것이며, 세계는 순간적으로 변모할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 안에서의 희열일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종말론적인 표현들을 미래의 세상 종말에 대한 지식을 전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현재의 삶에 대한 태도를 말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종말론적인 표징들은 우주론적인 표현이라기보다 신학적인 표현으로 알아들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그분은 먼 미래에 오시는 분이 아니라, 이미 오셨고, 세상은 이미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완성의 때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그분을 맞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이를 헨리 나웬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은 오십니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 내년이 아니라 올해,

우리의 비참함이 다 지나가고 난 뒤에가 아니라 그 비참함 한가운데로,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서 있는 이곳으로 주님은 오십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우리의 삶 안에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통하여 들어옵니다. 곧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질 때, 그 십자가에서 하느님의 영광과 완성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때”에 결정적으로는 드러날 것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이러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8)

 

주님!

새롭게 하소서.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게 하소서.

당신의 속량을 입게 하소서.

당신을 맞아 변형되게 하소서.

제 삶이 역전되고 당신 승리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아멘.


현혹되지 마라 

-반영억신부-


‘코로나19’의 확산으로 걱정이 큽니다. 종식을 위해 기도하며 각자의 건강관리에 소홀함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건강한 몸은 나 자신은 물론 이웃에게도 큰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서민들은 따뜻한 겨울을 바라지만 겨울은 겨울다워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야 병충해가 덜한 봄을 맞이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봄에 씨 뿌리고 여름에 녹음을 즐기고, 가을에 풍성함을 기뻐합니다. 그리고 겨울은, 휴식을 하며 새 생명을 준비합니다. 이처럼 인생여정도 좋은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여러 과정을 거쳐야 하고 때가 되면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하느님의 심판 앞에 서게 됩니다. 분명한 것은,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온 사람과 세상에 매여 산 사람이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심판을 이기지만 그에 걸맞은 준비는 꼭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재앙이 닥칠 때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 나가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에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루카21,21).

생각해 보십시오. 도시는 화려함과 편리함 속에 누릴 수 있는 온갖 것들이 넘쳐나는 곳입니다. 사람의 욕심과 계획이 지배하는 곳이요, 그곳에 맛 들이면, 빠져나기가 어려운 곳입니다. 결국은 도시는 하느님의 다스림보다는 인간적인 생각이 가득한 곳입니다. 인간이 지배합니다. 그러니 주님께서는 그곳으로부터 빠져나가라고 호소하십니다. 그러나 발을 빼기가 왜 그리 어려운지요. 내일 망할 것을 알면서도 예나 지금이나 온갖 죄악이 거기서 사람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이 순간도 달콤하게 다가옵니다.

그에 비해 산과 시골은 순수함과 깨끗함이 거기에 있습니다. 오염되지 않은 맑고 소박한 정겨움이 있습니다. 인위적인 조작이 아니라 자연의 순리와 법칙이 살아있습니다. 흐르는 시냇물에 목을 적시고 발을 담글 수 있어 좋고, 메뚜기가 뛰어놀고 다람쥐가 활개를 치며, 까치밥을 남겨 놓은 감나무가 있습니다. 꽁꽁 얼어붙은 빙판길에 모래를 뿌리시는 할아버지가 계십니다. 그러니 그곳을 두고 성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일입니다. 순리가 살아있는 곳에 생명도 있습니다.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마구 파헤치면 결국은 죽고 맙니다. 혼자만 죽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를 죽게 만듭니다.

주님께서“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21,28). 하고 말씀하시니 이제 우리의 마음을 정리해야 하겠습니다. 화려하고 편리한 인간적인 생각에 머물러 재앙을 자초하거나 세상 것, 이상하고 신비한 일에 현혹되지 말고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지혜, 곧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머리를 들어야 하겠습니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바로 그때가 구원의 때임을 잊지 말고 그 안에서 주님의 뜻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깨어 있는 사람에게는 시련은 은총의 기회일 뿐입니다.

“내 한평생을 예수님 안에, 내 온전하게 그 말씀 안에 내 결코 뒤를 바라봄 없이 그분만을 따릅니다. 모두가 나를 외면하여도 모두가 나를 외면하여도 십자가만을 바라보면서 그분만을 따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쓸리지 라.

-송영진신부-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 그때에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나가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

그때가 바로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는 징벌의 날이기 때문이다.

불행하여라, 그 무렵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 이 땅에

큰 재난이, 이 백성에게 진노가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칼날에 쓰러지고

포로가 되어 모든 민족들에게 끌려갈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루카 21,20-24).”

 

이 말씀에 묘사되어 있는 ‘예루살렘 멸망 모습’은,

실제 예루살렘 멸망 때의 모습과 거의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예루살렘 멸망이라는 이천 년 전 과거의 사건은

중요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과 함께 있다가 죄인들이 멸망을 당할 때

그 멸망에 함께 휩쓸리지 마라.” 라고 강조하십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닌데,

죄인들과 함께 있으면 그들의 죄에 오염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단순히 죄인들과 함께 있다는 이유만으로

죄 없는 사람들이 억울하게 멸망에 휩쓸리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심판은 지극히 공정한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죄가 있는데도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만 하느님의 징벌의 대상이 됩니다.)

 

‘오염’이라는 말에서 ‘누룩’에 관한 말씀이 연상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하고 이르셨다(마태 16,6).”

“그들은 빵의 누룩이 아니라,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의 가르침을

조심하라는 말씀인 줄을 깨달았다(마태 16,12).”

여기서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의 누룩’은 그들의 ‘악한 영향력’을 뜻합니다.

그들의 위선적인 생활 모습, 율법주의, 현세주의적 사고방식과 가르침 등은

사람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쳤고, 사람들을 물들였습니다.

죄인들의 그런 나쁜 영향력에 물들면 죄인이 되는 것이고,

그래서 죄인들이 받는 벌을 함께 받게 됩니다.

(죄에 오염되지 않으려면 단순히 ‘거리두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의 영향력을 완전히 차단해야 합니다.)

잠언 저자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악인들의 길에 들어서지 말고, 악한들의 행로를 걷지 마라.

그런 길은 피하여 발을 들여놓지 말고, 발길을 돌려 비켜 가거라(잠언 4,14-15).”

(“의인들의 선한 영향력으로 죄인들을 회개시키면 되지 않은가?”

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정말로 좋은 일인데,

선한 영향력으로 죄인들을 회개시키기 위해서 죄인들과 함께 있는 것과

그런 노력을 하나도 하지 않고 그냥 함께 있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죄인들과 어울리면서 그냥 함께 있는 것은 죄에 오염되는 지름길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불행하여라, 그 무렵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 이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징벌’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를 강조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임신과 출산은 죄가 아니고 축하와 축복을 받을 일인데,

하느님의 징벌의 날에는 축하와 축복을 받기는커녕

남들보다 더 큰 고난을 겪는 이유가 되어버립니다.

그것은 인간 세상의 평범하고 일상적인 안정감이 모두 사라진 모습입니다.

하느님께서 무자비하신 분이라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이 회개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언급되어 있는 ‘적군’과 ‘모든 민족들’과 ‘다른 민족들’은

실제 역사에서는 로마제국 군대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을 가리킵니다.

신학적으로는 하느님께서 죄인들을 심판하고 처벌하기 위해서

도구로 사용하시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들은 하느님 편인가? 그들은 심판에서 제외되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아무도 심판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또 하느님의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것만으로는

“그들은 의인들이다. 그들은 하느님 편이다.”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을 도구로 사용해서, 다른 죄인들을 처벌하시기도 합니다.

‘징벌의 날’에 심판과 처벌을 집행하는 도구로 사용된 사람들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처벌 대상이 됩니다.)

 

“그리고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5-28).”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심판을 하시고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시는 날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날이 바로 ‘종말이 완성되는 날’이고, 최후의 심판이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이 되면 사람들은 두 부류로 갈라지게 됩니다.

하나는 자기에게 닥칠 일이 너무 무서워서 까무러치는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기뻐하면서’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드는 사람들입니다.

까무러치는 사람들은 너무 일찍 오셨다고 예수님을 원망할 것이고,

하루라도, 아니면 한 시간이라도 시간을 달라고 애원할 것입니다.

어떻든 사람들은 최후의 심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자기가 어느 쪽에 속해 있는지를 이미 알고 있는 상태에서 그날을 맞이합니다.

어떻게 살았는지, 또 무슨 죄를 지었는지, 또 얼마나 성실하게 회개했는지,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날 어떤 표징들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날은 죄인들에게는 굉장히 무서운 날이라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강조하시는 것은,

그날이 되기 전에, 즉 ‘지금’ 회개하라는 뜻입니다.

‘지금’은(‘오늘’은) 회개하라고 주신 시간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마지막 시간이 되기도 하는데,

그 ‘어떤 사람’이 ‘바로 나’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면서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말은,

‘하느님의 영광과 권능’을 온 세상에 떨치면서 오신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지금 ‘재림 예수’ 라고 자칭하는 자들은 모두

백 퍼센트 가짜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복음: 루카 21,20-28: 이 땅에는 무서운 재난이 닥칠 것이고...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예언을 더 분명히 하고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때를 더 구체적으로 알려주신다.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20절) 그런 다음 다시 세상 종말에 관한 말씀을 하셨다. 창조계의 모습이 바뀌기 시작하고 땅의 주민들이 견디기 힘든 공포에 휩싸일 때부터 무서운 환난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신다.

 

죽음의 세계로 떠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장차 올 것들에 대한 견딜 수 없는 공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파멸에 이를 것이다. 임신한 여인들이 불행한 것은 몸이 무거워 위험을 피해 달아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24절)

 

“불행하여라, 그 무렵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 너희가 달아나는 일이 겨울이나 안식일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여라. 그때에 큰 환난이 닥칠 터인데, 그러한 환난은 세상 시초부터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결코 없을 것이다.”(마태 24,19-21) 우리가 주님께 기도하여도 이런 환난에서 이겨나갈 수 있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종말이 우리에게 어떤 모양으로 온다 하여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이런 일은 예언의 참된 결말이요 새로운 신비가 일어나는 계기이다. 세상 도처에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이 포로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들이 믿는 이들에 의해 성령의 쌍날칼(히브 4,12) 아래 놓일 것이다. 해와 달과 별들에 이상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요엘 2,10; 3,3-4; 4,15). 많은 사람이 신앙에서 멀어질 때, 불신의 구름이 밝은 신앙을 가릴 것이다.

 

많은 경우에 자기 믿음에 따라 거룩한 태양(말라 3,20)이 밝아지기도 하고 흐려지기도 한다. 사람들이 하늘의 해를 바라볼 때도, 보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 흐리게 보는 사람과 밝게 보는 사람이 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빛도 믿는 이의 경건함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의 악덕이 거룩한 빛을 가로 막으면, 거룩한 교회 또한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거룩한 빛의 밝음을 빌려 쓸 수 없다. 박해 때는 이 세상 삶에 대한 애착이 하느님의 빛을 차단하는 경우가 많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을 깨어서 지켜보아야 한다. “주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이들을 모두 데리고 오시면 온 세상이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시는 그분을 볼”(즈카 14,5; 마태 24,30)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비밀리에 오시는 것이 아니라, 신성에 어울리는 영광을 떨치며 하느님이요 주님으로 오실 것이다. 그분은 만물을 더 나은 상태로 만드실 것이다.

 

창조계를 새롭게 하시고 사람의 본성을 본래 상태로 돌려놓으실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28절) 그분은 당신을 믿는 이들을 당신처럼 영광스런 몸으로 변하도록 해 주신다.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 28)

-한상우신부-

속량이
희망이다.

충만한 희망은
충만한 속량이다.

먼저 우리의
절망과
맞닥뜨리면서

더욱
간절해지는
주님의
속량이다.

다시 찾으시는
주님의
속량과 희망은
하나이다.

무너짐과
무력함
사이에

자지러지거나
까무러친 것
사이에

쓰러지거나
죽은 것들
안에서

다시
만나게되는

주님의
새로운
희망이다.

절망의 끝은
언제나 새로운
희망이다.

이별이 있기에
만남이 있고
절망이 있기에
희망이 있다.

흔들리거나
쓰러진 것들
사이로

세상의
재난과 진노
사이로

멈출 수 없는
주님의 권능과
주님의 영광이
드러난다.

우리 삶 전체를
바꾸어놓는
희망의 속량이다.

가까이 온
주님의
속량이다.

속량을
간절히 바라는
주님의
사람들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 안에는 우리에게 들려 주시는 주님의 구원 약속이 들어 있습니다.

"산으로 달아나고 ... 거기에서 빠져나가라. ...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루카 21,2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파괴를 예고하시며, 그 상황에서 제자들이 취해야 할 일들을 알려주십니다. 과거 역사 안에서 수차례 이민족에 의해 무너졌던 예루살렘은 실제로 기원후 70년경 로마군에 의해 다시 한 번 포위되고 점령될 것입니다.

역사적으로도 실제로 벌어질 상황이지만,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산"이나 "예루살렘"의 영적 의미를 간과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예루살렘은 인간의 재력과 기술과 제도로 쌓아올린 한낱 모래성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사람의 재간으로 지은 예루살렘은 무너지겠지만, 영원한 하느님의 도성은 건재합니다. 우리가 달아나야 할 "산"은 변치않는 하느님 현존의 장소를 의미하지요. 이 "산"이 곧 영원한 천상 예루살렘으로 이어질 것이고요.

마지막 날이 오기 전, 우리는 모든 인간적 욕망과 위선과 허세의 장소를 떠나야 합니다. 장소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내적 자세도 포함합니다. 아직 푹 잠겨 있다면 서둘러야 하고, 이미 거리를 두고 있다면 되돌아갈 생각을 아예 말아야 하지요. 우리가 달아나야 할 곳은 "산"입니다. 하느님께서 계신, 하느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라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루카 21,26)

예수님은 현실 안에서 벌어질 파괴 예고와 더불어 천재지변을 동반한 종말적 표징까지 덧붙이십니다. 이로써 언젠가 닥칠 그날이 결국 인간들의 일을 넘는 하느님의 계획임이 명백해집니다. "자지러짐, 공포, 두려움, 까무라침..." 종말의 현상 앞에서 인간이 겪게 될 심상이 그저 참혹할 뿐입니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8)

심판의 그날, 주님은 우리에게 죽음이 아니라 속량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날 우리가 서슬 퍼런 정의의 낫에 잘려 영원한 불로 떨어지리라 하시지 않고, 오히려 죄의 용서와 구원을 약속하시니, 대체 우리에 대한 주님의 믿음은 어디까지인 걸까요!

제1독서에서는 죄악의 거대하고 강력한 표상인 바빌론의 몰락을 예언합니다.

"무너졌다, 무너졌다, 대바빌론이!"(묵시 18,2)

바빌론은 거짓과 탐욕과 폭력을 성공으로 위장하여 우상화하고 선과 악의 경계를 흐리는 현세의 모습까지도 담고 있습니다. 바빌론은 내면의 숨은 악을 부추기고 응원하며, 수치로 감추어도 시원찮을 더러움과 부패를 당당히 주장하게 만들어 세상을 혼란에 빠트리니, 바빌론의 멸망이야말로 곧 하느님 정의의 실현입니다.   

"과연 그분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우시다."(묵시 19,2)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심판의 날, 바빌론으로 대변되는 악은 심판을 받고, 그로 인해 고통 받고 무죄하게 피를 흘린 모든 이들은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인내로써 고통을 견디어낸 모든 선한 영혼들, 그리스도의 제자들, 예언자들과 순교자들 모두 주님의 얼굴을 뵙게 될 것입니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행복하다."(묵시 19,9)

천상 예루살렘은 이 혼인 잔치의 영광으로 찬란히 빛나며 기쁨으로 일렁일 것입니다. 방근 전까지 천체를 휩쓸었던 무시무시한 심판은 끝나고, 주님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며 믿음을 지킨 충실한 이들이 신랑이신 주님과 함께 혼인 잔치의 주인공이 되어 영원한 신부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파괴와 환란, 종말의 말씀들이 기쁨과 찬양을 노래하는 시편과 짝을 이루어 미사 안에 울려퍼지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우리에게 심판은 버림받고 내쳐지는 단죄의 순간이 아니라, 속량과 구원, 즉 영원한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행복의 초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 당장의 부족함과 불결함에 무너지지 말고 끝까지 주님의 자비에 의탁하며 나아갑시다. 구원을 꿈꾸며 희망으로 삶을 엮어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자,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고 구원의 축복을 받으십시오!

징벌의 날과 속량의 날    

-김찬선신부-

 

연중 34주간은 전례적으로 한해의 마지막 주간이기에
이 세상의 마지막 날에 대한 얘기의 연속입니다.

오늘도 마지막 날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인데
마지막 날은 징벌의 날이기도 하고 속량의 날이기도 하며.
이 날엔 징벌을 받을 사람도 있고 속량을 받을 사람도 있다고 하십니다.

"그때가 바로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는
징벌의 날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가 되면 대학 합격자도 있지만
불합격자도 있듯이 이 세상 마지막 날에도
하느님 나라의 합격자와 불합격자가 있음을 말하는 거지요.

그리고 대학 입학자가 고등학교를 대학 입학을 준비하며 보내고
불합격자는 대학은 생각지도 않고 그저 당장을 즐기며 보냈듯이
하느님 나라 합격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것을 준비하며
산 것에 비해 불합격자는 하느님 나라는 전혀 생각지 않고
그저 이 세상에 빠져 산 것 때문에 그리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예루살렘이 포위되고 망하게 되면
예루살렘을 빠져나와야지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상하지 않습니까?

난리법석인 전쟁터에 들어갈 사람이 어디 있기에
주님께서는 그런 하나마나한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전쟁터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기라도 하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기에 하시는 말씀입니다.

어렸을 적 가난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한 어떤 사람이 가난이 원이 되어
평생 쓸 것 쓰지 않고 열심히 돈을 모았고 그것을 집안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겨놓았는데 그만 불이 나서 그 재산을 다 날릴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때 그 불구덩으로 뛰어드는 사람이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날 징벌을 받을 자, 하느님 나라 불합격자는
단지 이웃에게 나쁜 짓을 한 자만이 아닙니다.

물론 이웃에게 나쁜 짓 한 자가 징벌을 받게 되고
하느님 나라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되겠지만
설사 이웃에게 나쁜 짓 하지 않았을지라도
하느님 나라에 관심이 없거나 거부한 자들도 들어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외가쪽 저희 친척 중에 아주 착하게 사신 분들이 계셨습니다.
그분들에게 하느님을 믿으시라고 하면 착하게 살면 됐지
꼭 하느님을 믿어야 되느냐고 말씀하신 분들이 있었는데
그분들이 마지막에 어떻게 됐는지는 하느님만 아시기에
제가 함부로 판단할 수 없는 거지만 끝까지 그렇게 살았다면
이 세상을 자기 삶의 전부로 생각하고 산 분들인 것만은 틀림 없습니다.

그렇다면 징벌이 아니라 속량을 받을 자, 곧 하느님 나라 합격자는
어떤 사람이겠는지 우리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웃에게 나쁜 짓 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을 실천하며 산 것은 물론
하느님께서 나타나시기를 다시 말해서 하느님 나라가 도래하기를
갈망하며 산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다른 곳에서 아들의 혼인 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했는데
초대에 거부한 사람은 징벌을 받고 응한 사람은 잔치에 참여하게
될 거라는 비유의 뜻과 같은 맥락이지요.

아무튼, 주님께서 오시는 마지막 날엔 두 부류가 있을 뿐입니다.
마지막 날이 징벌의 날인 자와 속량의 날인 자,
마지막 날에 징벌을 받을 자와 속량을 받을 자.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11월 29일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루가 21,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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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나웬-

“주님은 오십니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 내년이 아니라 올해,

우리의 비참함이 다 지나가고 난 뒤에가 아니라 그 비참함 한가운데로,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서 있는 이곳으로 주님은 오십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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