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11월 1일 모든 성인 대축일

Margaret K 2020. 10. 31. 06:24

2020 11 1 모든 성인 대축일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오 5,1-12ㄴ)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허규신부-


누구나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불행을 바라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국제 연합(UN)은 해마다 행복 지수를 나라별로 조사하는데 국내 총생산, 기대 수명, 사회적 지원, 선택의 자유, 타인에 대한 관대함, 사회의 부정부패 수준 등을 고려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기준들로 개인이 느끼는 행복을 모두 표현하기는 어렵습니다.
“행복하여라.” 예수님의 이 선포는 그 당시에도 지금도 여전히 우리를 향한, ‘나’ 자신을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만일 지금 그다지 행복하지 못하다면 아직 마음이 가난하지 못하고, 함께 슬퍼하거나 온유하지 못하고, 자비를 실천하거나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여 평화를 이루는 데 부족한지도 모릅니다. 또한 행복을 위한 의로움의 추구가 부족하거나, 사람들에게 박해를 당할 만큼 주님을 따르는 일에 열성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행복의 기준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행복은 많이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런 이들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시는지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하신 말씀이고 삶에서 실천해야 할 행복의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은 행복에 대한 우리의 기준을 바꾸라는 초대처럼 들립니다. 행복 선언은 신앙인에게 주어지는 행복을 위한 새로운 기준일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모든 성인을 기억하면서 이 말씀을 듣고 성인들의 삶을 생각하게 됩니다. 성인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삶을 살아간 이들입니다.

참 행복의 실현

-키엣 대주교-


오늘 복음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행복과 너무나 다릅니다. 그러나 여러번 읽다보면 아직 우리에게는 많은 희망이 남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행복이라는 희망

자신의 삶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노력해도 행복은 너무나 멀리 있어 평생 잡을 수 없을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 행복을 누릴 자격도 함께 주셨습니다. 비록 지금은 고통과 절망, 가난에 시달리고 있지만 언젠가는 끝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영원한 세상에서 영원한 행복을 주실 것입니다.

  - 하늘나라에 대한 희망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행복은 지금 이 곳이 아니라 하늘나라에서의 행복입니다. 하늘나라에서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자비와 위안을 받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참으로 놀라운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 주님과 함께 하는 희망

주님은 생명의 원천이시고, 삶의 의미이며 우리 인류의 행복이십니다. 위안이신 주님께서는 우리를 슬픔에서 구하실 것입니다. 절대 행복이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풍족함을 주시고 더 이상 목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아들이 되고 주님의 사랑을 받는것보다 더 큰 행복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누구나 주님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 좀더 가까이 가기 위하여 ‘여덟가지 참 행복’을 새기고 마음과 몸을 가다듬고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덟가지 참 생복’을 실천하는 길은 바로 가난과 겸손, 온유함으로 사셨고, 복음을 선포하시고 죽음을 당하신 주님의 길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희생하여 우리에게 하늘나라 행복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모든 성인들께서는 주님을 따라 고난의 길을 가신 거룩한 분들이십니다. 그분들은 어린양의 피로 당신의 생애를 물들이셨기에 눈과 같이 새하얀 옷을 얻으셨습니다. 또한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주님의 고통스런 길을 따라가셨기에 하늘나라의 행복을 얻으셨습니다. 세상의 물질적 유혹에 빠지지 않으셨기에 세상 모든 행복의 원천이신 주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모든 성인 대축일은 기쁨의 축일입니다. 

그분들은 바로 우리의 할아버지이시며 형제들이시기에 그분들이 누리는 하늘나라의 행복은 우리의 기쁨입니다.  

-모든 성인 대축일은 희망의 축일입니다.

그분들 역시 우리와 다르지 않은 나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이었지만 하늘나라의 행복을 얻으셨습니다. 따라서 성인들은 나약한 우리도 하늘나라의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입니다. 

-모든 성인 대축일은 노력의 축일입니다.

하늘나라로 갈 수 있는 비밀은 바로 ‘여덟가지 참 행복’에 있습니다. 

그 길은 나 자신은 물론 내가 가진 지위와 명예 등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의 길을 따라가기 위해 노력해야만 갈 수 있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겸손하게 노력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만일 ‘여덟가지 참 행복’을 실천하며 살아간다면 지금 이 세상에서부터 내 마음 속에 하늘나라를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행복한 세상은 한 사람의 노력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너와 나의 노력, 많은 사람의 노력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행복한 나라로 변화시킬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모든 성인들이여, 저희가 이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작은 초석이 될 수 있도록 빌어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주님의 ‘참 행복’은 나에게 어떤 희망입니까?

2. 성인들의 무엇을 배우고 실천하고 있습니까?

3. 평화로운 사회건설에 기여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세요. 
 

하느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는 사람, 성인

-염수경 추기경-


모든 성인 대축일은 천국에 있는 모든 성인을 기억하며 하느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는 성인들의 모범을 본받고자 다짐하는 날입니다. 또한, 전례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인 11월 위령 성월은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하며 지난 한 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반성하는 시기입니다. 그런데 올해는 지금까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코로나19로 인해 여전히 우려가 깊습니다. 하루빨리 우리 모두가 이 어려움을 잘 극복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복음은 ‘행복 선언’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행복은 세상의 기준과는 다릅니다. 여러분은 행복하십니까? 성인들은 생전에 행복한 분들이었습니다. 그분들은 왜 행복했을까요? 삶의 근본적인 의미를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께 달려 있음을 알기에 오직 하느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였습니다. 자기 생명조차도 하느님께서 주신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산상설교의 행복선언은 하느님의 구원과 은총에 힘입은 사람들이 이 세상 한가운데서 하느님 나라를 추구하는 삶의 근본 지향과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행복이 부귀와 권세, 그리고 세상의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의미를 잘 깨닫는 이들은 세상이 말하는 그 행복이라는 것이 세월만 지나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잘 압니다. 산상설교에서 끊임없이 강조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세상 사람과는 달라야 한다는 점입니다. 기본적인 사고방식과 가치관, 사물을 보는 시각이 달라야 합니다.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돈, 명예, 성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 이상을 추구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과 겸손하고 온유하고 깨끗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무엇보다 가난한 마음은 하느님만 의지하며 사는 삶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인은 언제나 감사하며 고통 앞에서도 하느님께 희망을 둡니다. 우리가 남에게 온유하고 자비를 베풀며,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하느님을 뵙고,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고 행복을 얻을 것입니다.

삶이란 유한하지만 사라질 운명을 간직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삶은 끝을 맞이하지만, 하느님께서 그 삶을 품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참새 한 마리도 당신의 뜻 없이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의 삶을 품어 안으신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그 하늘나라를 향한 염원이 우리를 향해 성인들이 피 흘려 말하고 싶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성인들은 우리에게 사라질 운명이 슬픈 것이 아니라 영원을 향한 갈망 없음이 진정한 슬픔이라고 말합니다.

 

행복을 선택하는 용기가 있는가?

-임숙희-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들로 큰 즐거움을 삼는 이!”(시편 112,1) 이 묵상을 준비하고 있는데 깊은 우울감에 빠진 지인이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선생님은 말씀을 가르치면서 행복하세요? 저는 지금 세상이 뽀얗게 보여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가 우리 삶에 가져온 변화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삶에서 추방했던 주제인 고통, 죽음과 내세의 삶, 부활, 참 행복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하고 함께 나누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행복론」이라는 책을 쓴 것도 건강이 아주 좋지 않아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가족과 함께 집에 머물러야 할 때였습니다. 행복의 본질과 행복에 이르는 길을 가르치는 것은 건강한 자아를 지니고 살도록 돕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산으로 오르시어 여덟 가지 참된 행복을 가르치십니다. ‘참된 행복의 교육자’인 예수님은 우리 신앙 자아, 곧 하느님 자녀의 틀을 빚고, 하느님 자녀로서 우리 행복을 느끼는 능력을 성장시킵니다.

■ 복음의 맥락
행복선언(마태 5,1-12)은 세 가지 구조로 돼 있습니다. 첫째는 행복하여라 선언, 둘째는 행복해지는 데 필요한 태도, 셋째는 이 행복의 근거 입니다. 하느님 현존과 그분의 역사하심은 처음부터 마지막 행복까지 모든 참된 행복의 근본이며 전제입니다. 행복선언은 우리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우리 인생을 인도하는 예수님의 시편입니다. 예수님이 “행복하여라”를 후렴처럼 반복하는 이유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행복에 대한 고정관점이 하느님 판단과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우리를 회심하도록 초대하기 위해서입니다.

■ 행복하여라?
참된 행복선언은 예수님이 창안한 것이 아니라 구약성경의 오랜 전통과 맥을 잇습니다. “행복하여라”로 번역된 그리스어 ‘마카리오스’(μακάριος)는 고전 그리스어에서 신들의 상태, 거기에 참여한 사람들을 가리켰습니다. 신약의 ‘마카리오스’를 이해하려면 행복의 상태를 가리키는 데 사용한 구약 히브리어 ‘아세르’(רשא) 의미를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이 히브리어의 어원은 ‘가다’, ‘앞으로 나아가다’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행복은 주님의 길, 그분 계명을 지키는 삶의 맥락에서 사용됩니다. “저는 꿋꿋이 걷고 당신 길에서 제 발걸음 비틀거리지 않았습니다.”(시편 17,5) 행복선언도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 선택하고 살아야 할 지침입니다.
 

세바스티아노 리치 ‘산상설교’ (일부)


■ 행복하려면 선택해야 할 태도
예수님은 이어 참된 행복을 얻기 위해 실천해야 할 여덟 가지 태도를 가르치는데, 이는 우리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열어야 하는 문과 같습니다. 각자 상황과 은사를 존중하는 예수님은 우리가 ‘저마다 자기 길에서’ 도움이 되는 요소를 실천하며 거룩한 사람이 되기 원했을 것입니다. “행복선언을 실천하는 것이 성덕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63-69항)

제 상황에서 특히 마음에 깊이 남는 것은 세 가지 행복입니다.

첫째,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가난한’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프토코스’(Φτωχóς)의 어원은 ‘거지, 걸인’입니다. 빈손이라 살기 위해 모든 것을 외부에 의존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인간은 가난할 때만 하느님 섭리에 의존하며 산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절절히 깨닫습니다. 마음이 꺾인 사람, 가난한 사람은 우월감을 느끼거나 완고할 수 없습니다. 그는 예수님처럼 온유하고 겸손합니다.

온유와 겸손이라는 말은 구약 역사 안에서 슬퍼하는 이들, 의로움에 굶주리고 목마른 이들, 평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다 박해와 모욕을 당한 이들이 지닌 하느님을 신뢰하는 태도인데, 이는 모든 것을 아버지에게 받았던 최고의 걸인 예수님과 하느님 자녀의 본질적인 상태를 함축합니다. 이런 사람이 행복하다고 불리는 이유는 하느님이 그에게 하늘나라, 곧 하느님 자신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움직였던 것과 같은 영을 갖고 살아가도록 이끌기 때문입니다.

둘째,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8) 우리 마음은 나약함 때문에 하루에도 수십 번씩 더러워질 위험이 있습니다. 내 안에, 다른 사람 안에 있는 하느님을 보려면 매일 마음의 거울을 정성스럽게 닦아야 합니다. 십계명, 성경 말씀, 교회 가르침, 기도, 봉사는 모두 흐려진 양심의 거울을 닦는 수건입니다.

화답송인 시편 24편은 성전에 들어가기 전 문 앞에서 거행하던 전례를 묘사하는데, 하느님 사시는 곳에 가까이 갈 수 있는 이의 조건을 여러 가지로 설명합니다. 제일 중요한 조건은 하느님 얼굴을 찾고 깨끗한 손과 결백한 마음을 지니는 것입니다.(시편 24,3-4) 매일 다윗처럼 기도합니다. “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제게 만들어 주시고 굳건한 영을 제 안에 새롭게 하소서.”(시편 51,12)

셋째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앞서 말한 행복선언의 모든 태도가 필요하니 가장 어렵습니다. 하느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다른 어떤 행복보다 가장 뛰어나고 귀한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평화는 이웃과 조화를 이루는 선한 영혼의 상태입니다. 평화와 반대되는 것은 미움, 분노, 질투, 격분, 위선입니다. 왜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하느님 자녀라고 불립니까? 그는 타인에게 평화를 선물하며 평화를 내려 주시는 하느님을 닮기 때문입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행복한 또 다른 이유는 그가 자신 안에서 육과 영 사이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하느님과 화해하며 하느님과 평화를 누리기 때문입니다.

■ 성인, 행복의 촉진자
모든 성인들의 축일에 행복선언을 자기 삶으로 해석한 성인들 생애를 떠올립니다. 바오로부터 체칠리아, 에디트 슈타인, 성삼의 엘리사벳, 마더 데레사 등 성인들 생애는 대부분 인간적인 시각으로 보면 행복이 아니라 실패입니다. 참으로 메마르고 비극적인 생애입니다.

그러나 고통 안에서 희망을 증언한 성인들은 ‘행복의 촉진자’로서 후세대에 ‘희망하는 것의 행복’을 유산으로 남겨 줬기에 행복합니다. 성인들은 오늘도 우리가 저마다 자기 길에서 행복선언의 길을 선택하도록 용기와 영감, 행동하도록 하는 힘을 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한결같은 동반과 기도에 감사드립니다.

 

이 날에는...

서정민신부-


 이 날에는 진복팔단을 읽습니다. 이 글이 체득되기까지는 지난한 시간이 걸립니다. 그리고 이 시간 속에서 체득한 분들이 있으니, 이분들은 성인이며 모든 신앙인이 닮을 분이 됩니다. 한 사람이 도시에 나와 성당에 나갔습니다. 그곳의 사람들은 그에게 행복에 대해서 이렇게 가르쳐주었습니 다. ‘마음이 가난하면 행복합니다. 하늘 나라가 당신의 것이 됩니다.’ 그는 나누는 것으로 가난해졌고, 하느 님이 하늘 나라를 자신에게 나누어주는 것을 체득하며 행복해졌습니다. 그들은 그다음으로 ‘슬퍼하는 사람 은 행복합니다. 위로를 받게 됩니다.’라는 것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는 슬픈 삶을 자주 찾아갔고, 그들의 슬 픔이 자신의 삶을 위로해 주고 있음을 체득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두 번째 행복에 닿았습니다. 그들은 그에 게 또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는 따뜻한 물처럼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언 것을 녹이고, 더러운 것을 벗겨냈습니다. 세상은 그에게 살 자리를 내어주었습니다. 그는 또 그렇게 행복해졌습니 다. 그들은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는 바르게 마음먹고 바르게 행동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바름이 주는 양심의 자유만으로도 그는 큰 행복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자비로운 사람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라고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는 하느님께 자신에게 죄를 지은 사람들의 죄를 기억 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가 더는 기억을 못하게 되었을 때, 하느님은 그의 죄를 더 이상 기억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행복해졌습니다. 그들은 그에게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라고 가 르쳐주었습니다. 그는 어린 날의 깨끗한 마음을 기억해 냈습니다. 나쁘게 생각할 줄 몰랐던 그 마음을 되찾 자, 나쁜 것과 섞이지 않는 하느님이 보였습니다. 그는 또 그렇게 행복해졌습니다. 그들은 ‘평화를 이루는 사 람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라고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는 타인의 불완전함을 참고 기다려주었습니다. 그의 인내를 보고 사람들은 그가 하느님을 닮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행복해졌습니다. 그렇게 시간 이 흘렀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모욕하고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거짓말과 사악한 말로 그의 삶을 부서뜨리 려 했습니다. 그는 그들이 가르쳐주었던 마지막 행복이 시작되었음을 알았습니다. 이 일이 일어났을 때 그는 그분이 보고 싶었습니다. 모욕에, 박해에, 거짓과 사악에 대한 달관이 마침내 이루어졌을 때, 하느님은 달관 의 삯으로 큰 상을 주시려 하셨습니다. 그는 진정 행복했습니다. 그의 삶은 그분의 향기가 되어갔습니다. ‘모든 성인의 날’은 이렇게 살아온 분들의 날을 기억합니다. 365일의 달력은 이런 분들로 가득 차 오늘이 생겼습니다. 신앙이 겉돌지 않아 우리의 삶도 이렇게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의 입김이 늦가을, 늦은 향 기로 불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인 신자 되세요

-조중원신부-


높고 푸른 하늘과 형 형색색의 단풍을 뒤로하 고 달력을 넘겨보니 올 한 해도 얼마 남지 않았 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11월의 첫날인 오늘은 모 든 성인 대축일이며, 위 령 성월을 시작하는 날 입니다. 교회는 모든 성 인 대축일을 지내며 하 느님과 함께 하늘 나라의 영광을 누리는 성인들을 기리 고 그분들을 본받아 성덕으로 나아가고자 다짐하는 날 로 보냅니다. 영명 축일이나 사제 성화의 날이면 “신부님! 성인 사 제 되세요.”라는 말씀을 신자분들께 듣게 됩니다. 이 말 씀을 들을 때면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살아야지 하며 자기반성을 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신 자분들께도 ‘OOO 형제/자매님 성인 신자 되세요.’라고 인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신앙의 목 표인 하늘나라의 영광을 신자들과 함께 누려야지 어찌 신부만 누려서야 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 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몇 년 전 모든 성인 대축일 에 “성인이 되는 것은 소수들만의 특권이 아니며 세례 를 통해 성인들의 유산을 물려받은 모든 이들은 성인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성인들은 태어 날 때부터 완벽한 사람으로 영웅적인 삶을 살았던 분들 이 아니라 하느님을 만난 뒤 하느님 곁을 절대로 떠나 지 않았던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성인으 로 살아간다는 것이 나와는 거리가 먼 특별한 사람들만 의 이야기가 아님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성인이 되고자 하는 인생의 목표 가 있어야 합니다. 인생의 목표가 분명하고 올바른 사 람은 오늘 그리고 매일 마주하는 일에 소홀할 수 없고, 그 시간도 무의미하게 흘려보내지 않습니다. 적당히 타 협하거나 자기합리화에 빠지지 않습니다. 쉽게 포기하 지도 낙담하지도 않습니다. 혹여 목표에서 멀어진다고 할지라도 자신을 바로잡아 목표를 향해 나아갑니다. 성인이 되고자 노력하는 우리에게 성인들께서는 이 렇게 격려하실 것입니다. ‘우리도 그대처럼 넘어지고 힘들었습니다. 두려웠고 때로는 절망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과 그분의 도우심으로 다시 시 작할 수 있었고 마침내 이렇게 그분을 마주 뵙고 영원 한 행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힘을 내십시오!’ 성인들의 격려와 전구에 힘입어 인생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이렇 게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참 행복을 누리는 성인이 됩시다

-한건신부-


 ‘모든 성인 대축일’은 하느님의 승 리를 보여주는 모든 성인들을 기리 는 기쁜 날입니다. 이날은 코로나 19의 지속으로 고통 속에 지친 우리 를, 그리고 우울하게 느껴지는 위령 성월 첫날을 희망의 빛으로 환히 밝 혀줍니다. 성인들은 하느님 승리의 생생한 증거이자, 우리의 영원한 희 망의 표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 리가 성인들을 기념하고 기억할 뿐 아니라, 그들을 닮아 성인이 되길 바라십니다. 오늘 감사송은 성인이 되려는 우 리에게 내적 활력의 원천을 주기 위 해 기도합니다. “아버지께서 오늘 저희 어머니인 천상 도읍 예루살렘 을 보여 주시니, 거기서 저희 형제 들은 이미 승리의 월계관을 받아 쓰 고, 아버지를 영원히 기리고 있나이 다. 나약한 저희도 성인들의 뒤를 따 라 영광을 기뻐하며, 그들의 도움과 모범으로 힘을 얻어, 활기찬 믿음으 로 영원한 고향을 향하여, 나그넷길 을 서두르고 있나이다. 그들의 모범 은 나약한 저희에게 힘이 되나이다.” 제1독서 묵시록은 성인들의 미래 를 보여줍니다. 지상에서 날마다 자 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충 실하게 그리스도를 따랐던 이들의 미래입니다. 천상에서 하느님과 어 린양을 에워싸고 끊임없이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성인들과 천사들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런 데 저절로 하늘 나라로 직행하며 성 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103위 성인이 모진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켜냈듯이, 주님을 위한 고 난과 시련 속에서 정화되고 성화되 어야 성인이 됩니다. 복음의 참행복의 산상설교의 가 르침을 지켜야 성인입니다. 8가지 참행복을 누리는 길을 묵상하고 성 찰하면서 스스로 신앙생활을 점검 합시다. 많은 부족함을 느끼며, 더 노력해야 한다는 자극이 생길 것입니 다. 이렇게 참행복을 위해 산상설교 의 가르침 하나하나를 지키려고 노 력하는 이들이, 오늘 지금 여기서 하 늘 나라를 살아가는 성인들입니다. 제2독서에는 요한 사도가 성인이 되려는 우리에게 믿음과 희망, 사랑 과 용기를 북돋우며 격려하십니다. 기도나 전례 때 희미하게 뵙는 주님 이지만, 천국에서는 있는 그대로 그 분을 뵐 수 있습니다. 그러니 주님 께 희망을 두고, 산상설교의 가르침 을 지키며 주님을 닮아 순결해지고 거룩해집니다. 코로나19로 힘들고 지치면서 신앙이 약해지고 있지만, 천상의 성인들을 기리며 우리 역시 참행복을 누리는 성인이 될 수 있다 는 희망을 가져 봅시다. 아멘

진짜 행복

-장경원신부-


‘사막의 라이온’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그 영화에는 이 런 장면이 있습니다. 집단 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는 원주 민들은 그들의 특공대를 위해 식량을 모아줍니다. 그러나 이 사실은 발각되어 그 대가로 7, 8명이 무작위로 뽑혀 처 형을 당하게 되고 그 중에 한 젊은 아기엄마가 뽑힙니다. 그녀는 교수대 위에서 죽음을 바라보며 이렇게 기도합니 다. “하느님 저에게 주셨던 삶에 감사드립니다.” 사실 세 상적 시각으로는 그녀가 하느님께 감사드릴 이유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녀는 지독한 가난 속에서 태어났고, 더군 다나 식민지 백성으로 설움과 부자유 속에서 살았으며, 남편은 일찍 전사하였고, 이제는 어린 자식을 세상에 홀 로 놔둔 채 젊은 나이에 삶을 마쳐야하는 처지인 것입니 다. 그러나 놀라웁게도 그런 처지에서도 그녀는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바라는 복을 달라고 믿고 빌기 도 합니다. 복을 받지 못하면 믿는 것도 내버립니다. 점쟁 이도 찾아가고, 무당도 찾아가고, 산신당도 찾아가고, 사 주팔자 궁합도 믿고, 복을 준다면 아무것이라도 따라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 가운데, 자신이 잘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 면 그 믿음 때문에 구원된다고 하면서, 믿는 것과 사는 것 을 따로 떼어 놓고 온갖 나쁜 짓을 하면서 스스로는 믿는 사람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타인을 경시하 고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자신은 충분히 훌륭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지만, 바로 이 자비와 사랑을 받기에 합 당한 삶을 또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바르게 살려 고 노력하고 바르게 살지 못했으면 뉘우치고 속죄하면서 계속 바르게 살려는 노력의 연속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칩 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길이 아닌 세상이 좋다고 가르 치는 길이 살아가는 기준이 된다면 이는 잘못된 방향의 삶인 것입니다. 오늘은 모든 성인의 날 대축일입니다. 우리가 이 축일 을 지내는 것은 우리 신앙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바로 알 고 믿고 바르게 살다가 간 우리 신앙의 증인이신 성인들 의 삶을 우리가 본받고자 하는 데 있습니다. 또한 하느님 나라의 차원에서 성인들이 우리 눈에서는 사라져 갔지만 영적 세계에 있어 우리와 친교를 맺고 있음을 새롭게 하 는 날이기도 합니다. 사실 성인들의 삶이란 주님이신 예수님을 위해 사는 것 이었고, 예수님의 기쁨을 위해 사는 것이 진짜 행복이라 는 사실을 깨달으신 분들이었습니다. 성인들을 본받는다 는 것은 우리 역시 세상의 가치를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 님의 기쁨을 위해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 참 행복임을 깨 닫고 실천하는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오늘이라는 시간 속에서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 까요?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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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만족도를 높이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 우리입니다. 이 만족도가 높아야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소위 성공이라고 불리는 돈과 지위의 상승을 추구합니다. 그렇다면 돈과 지위의 상승이 삶의 만족도를 높이는 원인이 될까요?

미국 버펄로 대학 연구팀은 2,100명을 대상으로 이 부분에 관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경제적 성공이 목표였던 사람일수록 삶의 만족도가 낮다는 것입니다. 돈의 가치를 높이 평가할수록 외롭고 단절된 기분을 잘 느끼며, 가까운 지인과 보내는 시간이 적었습니다.

삶의 만족도를 높이는 방법은 경제적인 성공이 아니었습니다. 순간의 만족을 가져다줄 수는 있지만, 오랜 시간의 만족을 가져다주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삶의 만족도는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나를 인정하고 지지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특히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삶의 만족도는 올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과의 관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나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 주님으로만 생각하고 있으면, 주님 안에서 만족도를 높아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대상으로 주님을 받아들이고 또 주님과 함께한다면 삶의 만족도는 높아질 것입니다.

이것이 행복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행복 선언은 세상의 관점과 많이 틀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로운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등등…. 이 행복의 주인공에는 세상 안에서 경제적인 성공을 이룬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늘은 하늘나라의 모든 성인을 기리는 대축일로, 하느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는 성인들의 모범을 본받고자 다짐하는 날입니다. 하늘나라의 모든 성인 성녀들은 세상 안에서 경제적인 성공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주님과의 일치를 먼저 생각했고, 그 일치의 사랑 안에서 행복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제2 독서의 요한 사도는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임을 선포하십니다(1요한 3,2 참조).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분명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세상 뜻이 아닌 하느님 뜻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참 행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삶의 만족도를 높여서 진정으로 행복하길 원한다면 세상의 것이 아닌, 주님의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것은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데 집중을 하지만, 주님의 것은 함께 하는 사랑의 기쁨을 채우는 데 집중을 합니다. 주님을 제외하고서 진정한 행복의 길로 갈 수 없습니다.
할 수 있거나 할 수 있다고 꿈꾸는 일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시작하라. 시작할 용기 안에 천재성과 능력, 기적이 숨어 있다(괴테).


첫사랑

어떤 모임에서 첫사랑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저 역시 경험했던 첫사랑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있던 다른 분의 눈이 엄청나게 커집니다. 한 자매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부님도 첫사랑이 있었어요?”

이 말이 무슨 의미일까요? 제 얼굴과 능력만으로는 연애 한 번 할 수 없었으리라는 것인지, 혹시 신부는 어렸을 때부터 대소변도 보지 않는 거룩한 사람으로만 보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도 첫사랑이 있는 보통 사람입니다.

우리는 섣부른 판단을 자주 합니다. 쉽게 판단하고, 쉽게 단정 짓고, 쉽게 행동을 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일이란 알 수가 없지요. 자기 일도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처럼, 남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늘 옳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판단을 내려놓는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주님의 겸손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곧바로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늘 기회를 주십니다. 주님의 이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자기 자신만 만나다 죽는 사람

-전삼용신부-


오늘 우리는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을 지냅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11월 1일부터 8일까지 묘지를 방문하여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하면 그들에게 전대사가 주어집니다. 전대사를 받으면 연옥의 모든 잠벌을 용서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연옥에서 고통받는 많은 이들을 위해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연옥에 있는 이들은 부족하게나마 이 세상에서 주님을 만나고 간 이들입니다. 그러니 주님께 “나는 너를 안다”라고 인정받은 이들입니다. 한 번을 만났더라도 주님께서 안다고 증언해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처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라는 말씀을 들으면 큰일일 것입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신랑이 올 때 기름을 간직하지 못하고 있어서 신랑을 맞으러 나가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죽음과 그 죽음을 잘 준비한 이들을 기념하며 우리 또한 그 대열에 들기 위해 어떻게 하면 주님으로부터 “나는 너를 안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을지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통사고로 심각한 뇌 손상을 입었음에도 이를 극복하고 TED 강연으로 유명해진 ‘에이미 커디’는 이런 경험을 소개합니다. 그녀가 사고로 인한 지능 저하로 남들보다 4년 늦게야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심리학을 전공하며 박사학위를 준비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때 교수직을 따기 위해 지도교수와 여러 중소 규모의 콘퍼런스에 참여하게 됩니다. 세계적으로 저명한 교수들이 함께 모이는데 박사과정에 있는 이들은 이 교수들에게 아주 짧은 시간에 자신의 매력을 어필해야만 합니다.

      이때 준비해야 하는 것이 ‘엘리베이터 스피치’라고 합니다.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함께 탄 교수에게 약 90초 동안 자신이 연구한 모든 것을 핵심적으로 쏟아내어 그 교수가 자신을 채용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미 박사학위를 취득하고도 몇 년 동안 교수직을 얻지 못해 이런 콘퍼런스를 배회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에이미 커디도 단단히 준비하고 중소도시 평범한 콘퍼런스에 지도교수와 함께 참석하였습니다. 개회 만찬장으로 올라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사회심리학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세 명의 거장이 타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 한 명을 만나는 것도 행운인데 세 명의 스타 교수들을 마주하니 정신이 멍멍하였습니다. 이때 한 교수가 “아하, 우리가 엘리베이터를 함께 탔네요. 연설 한 번 들어볼까요?”라고 말했습니다. 에이미 커디는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리고 입안이 바짝바짝 타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늘의 별과도 같은 사람들이 함께 있는 그 비좁은 공간에서 초긴장한 상태로 연설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단어들이 제멋대로 튀어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첫 문장부터 엉망이었습니다.

 

“그러니까 ... 저, 잠깐만요, 그걸 말씀드리기 전에 ...”

에이미는 말하면서도 ‘아, 이렇게 망하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한 번도 잡기 힘든 기회를 세 번이나 동시에 날려버리는 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들이 아는 다른 교수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할 테니 그녀의 교수직은 물 건너간 것 같았습니다. 또 자신을 여기까지 믿고 데려온 지도교수를 볼 면목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이런저런 걱정 속에 세 스타 교수들의 얼굴을 빠르게 살피며 이런저런 말들을 쏟아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지지한다거나 인정한다거나 공감한다거나 하는 아주 작은 표정만이라도 애타게 갈구하였습니다.

      마침내 엘리베이터는 20층에 도착했고 문이 스르르 열렸습니다. 두 교수는 머리를 숙인 채 내렸고 마지막 교수는 “여태까지 내가 들었던 엘리베이터 스피치 중 최악이었네”라고 말하며 내렸습니다. 에이미는 그들과 함께 내리지 못했고 자궁 속 아기처럼 엘리베이터 벽에 기대어 쭈그리고 앉았습니다. 엘리베이터는 다시 로비로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안도감이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무지막지한 압박감에서 해방된 느낌이었습니다.

 

      ‘4년 넘게 공부한 내용에 대해 어째서 단 한마디도 말하지 못했단 말인가? 게다가 실패하고 나서 안도감이라니? 그리고 왜 이제야 준비한 내용이 떠오르는가?’

 

그녀는 이 경험을 깊이 성찰하며 ‘프레즌스’라는 심리학 용어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프레즌스는 ‘지금 여기 내가 존재하게 할 수 있는 능력’ 정도로 번역하면 될 것입니다. 그녀는 ‘내가 왜 그때 나로 존재할 수 없었을까?’를 깊이 생각한 것입니다.

[참조: 『자존감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에이미 커디]

      미련한 처녀들은 분명 그렇게도 기다리던 신랑이 왔지만 그를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상태는 아마도 예수님께서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때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마태 7,22-23)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을 만난다고 하면서 자신들이 만든 금송아지를 경배했습니다. 자신들은 하느님을 만나고 있다고 믿었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만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금송아지는 각자 자신이 섬기는 자기 자신입니다.

      에이미 커디는 그때 ‘나는 세계의 유명한 스타 교수들을 만나고 있다. 나는 나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만나고 있었지 그 교수들을 만나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자기 생각이 우선이고 교수들은 자신을 증명하게 만들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이런 상태로는 누구도 진정으로 만날 수 없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만나려면 ‘그들을 만나고 있는 나를 잊어야’ 합니다. 내가 살아 있으면 그들이 나를 내가 원하는 대로 인정해주지 않을까 봐 불안해하고 초조해집니다. 그리고 그렇게 두려워하는 대로 흘러갑니다. 나의 뜻을 이루려 누군가를 만나면 나를 만나는 것이지 상대를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누군가를 만나려면 상대의 뜻과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주님의 뜻을 만나면 내 뜻은 죽습니다. 내 뜻이 죽을 때 평화가 옵니다. 그런데 내가 죽었다면 누가 나의 주인이 될까요? 바로 주님이십니다. 내가 주님을 나의 지배자로 두면 그분이 나의 주인이 되시고 그분을 위해 나는 봉사해야 합니다. 나의 이익을 챙길 수가 없습니다. 이때 비로소 ‘프레즌스’가 성취됩니다. 자아는 끊임없이 과거의 걱정과 미래의 불안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주님께 집중하면 현재 주님의 뜻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현재에 머물 수 있는 것입니다. 진정 하느님을 만나고 이웃을 온전히 만나려면 자기 생각에 빠져있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뜻에만 집중하고 있어야 합니다. 꾸준한 연습을 할 필요가 있지만, 아주 잠시라도 이 프레즌스가 이루어졌다면 주님은 “잠깐이지만 나는 너를 만난 적이 있다. 나는 너를 안다”라고 증언해주실 것입니다.

 

      프레즌스를 연습하는 방법은 짧은 기도를 통해 자주 주님이 나의 주인이심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자주 짧은 대화를 나누어도 되고 그저 예수님의 이름을 자주 불러도 됩니다. 나의 의식을 나에게 두지 말고 주님의 뜻에만 두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자신을 봉헌할 때 나를 바라보는 사람은 내가 자아의 불안으로부터 해방되었음을 보게 되어 나를 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으로 여기게 됩니다.

 

      사람은 자아에 사로잡힌 사람을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고 그 불안함을 금방 알아챕니다. 속이려 해도 소용없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말하는 내용이 아니라 나의 프레즌스를 먼저 봅니다. 이것은 생존본능입니다. 자아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항상 피해를 봐 왔기 때문에 우리 유전자에 그런 사람들을 회피하도록 시스템 되어있습니다. 아주 짧은 시간이라도 내 안에 계신 주님의 뜻에 집중하는 시간을 갖는 연습을 한다면 이것이 깨어있는 연습이고 죽음과 심판을 준비하는 자세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나를 쉽게 신뢰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 주님 하면서 살았지만 결국 자기 자신만 만나다 죽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조재형신부-


서울 동작동에는 국립현충원이 있습니다어릴 때는 국군묘지로 부르기도 했고나중에는 국립묘지로 부르기도 했지만 지금은 서울 국립 현충원이라고 부릅니다어릴 때 소풍을 갔었습니다현충원에는 대통령의 묘장군의 묘장교와 사병의 묘를 포함해 5만 여명의 이름이 있습니다이름을 알 수 없는 무명용사의 위패가 11만 명가량 된다고 합니다무명용사를 기억하며 세운 탑이 무명용사의 탑입니다이들 무명용사들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는 조국을 지킬 수 있었고자유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103위 성인과 124위 복자를 알고 있습니다그분들의 뜨거운 신앙과 순교를 기억하고 있습니다우리가 기억하는 성인과 복자 뒤에는 이름 없는 순교자들이 있습니다무명 순교자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하게 빨아 희게 하였습니다그분들은 주님 때문에 모욕을 받았고박해를 받았고목숨을 바쳤습니다예수님께서는 순교자들이 하늘에서 상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그래서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오늘은 모든 성인 대축일입니다우리들 또한 천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때까지 지상에서의 여정을 충실하게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지상에서의 여정을 충실하게 살기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바오로 사도는 육체를 단련하듯이 신앙을 단련해야 한다고 표현했습니다. “경기장에서 달리기하는 사람은 모두 달리지만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모릅니까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나는 이미 그것을 얻은 것도 아니고 목적지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그것을 차지하려고 달려갈 따름입니다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이미 나를 당신 것으로 차지하셨기 때문입니다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늘로 부르시어 주시는 상을 얻으려고그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초대 교회는 바오로 사도의 이야기를 심사숙고하면서 신앙생활을 두 가지 방향에서 실천하였습니다하나는 나쁜 습관을 끊어버리는 것입니다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신앙생활은 먼저 악습을 성찰하고그것을 끊어버려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끊어버려야 할 악습 목록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습니다. “육의 행실은 자명합니다그것은 곧 불륜더러움방탕우상 숭배마술적개심분쟁시기격분이기심분열분파질투만취흥청대는 술판그 밖에 이와 비슷한 것들입니다.”(갈라 5, 19- 21) 오늘날 교리서에서 교만질투분노탐식음란게으름인색의 칠죄종을 가르치는 것은 교회가 오랫동안 악습을 끊는 노력을 하라고 강조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세례를 받을 때도 사제는 이렇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마귀와 그 모든 행실과 유혹을 끊어 버립니까?” 세례를 받는 사람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예 끊어버립니다.”

 

초대 교회가 심사숙고했던 또 다른 신앙생활의 실천은 덕행을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교회는 4가지의 덕을 이야기하였습니다지혜는 모든 상황에서 우리의 참된 선을 식별하고 그것을 실행할 올바른 방법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정의는 마땅히 하느님께 드릴 것을 드리고 이웃에게 주어야 할 것을 주려는 지속적이고 확고한 의지입니다용기는 어려움 중에도 단호하고 꾸준하게 선을 추구하는 것입니다절제는 쾌락과 유혹을 조절하고 창조된 재화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이 네 가지의 덕은 우리를 악의 유혹에서 벗어나 하느님께로 나가도록 이끌어 줍니다.

 

교회는 우리를 하느님께로 안내하는 3가지 덕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믿음은 하느님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시하신 것과거룩한 교회가 우리에게 믿도록 제지하는 모든 것을 믿게 합니다희망은 그리스도의 약속을 신뢰하며우리 자신의 힘을 믿지 않고 성령의 은총의 도움으로우리의 행복인 하늘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게 합니다사랑은 하느님만을 위하여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사랑하고하느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이웃을 자신같이 사랑하게 합니다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그 가운데에서 가장 으뜸은 사랑입니다.”

 

낙엽 지는 가을 뒤엔 반드시 눈 내리는 겨울이 오듯이 우리의 삶도 반드시 어떤 종점이 있습니다. 우리들 또한 신앙의 별이 되어서 우리 후손들에게 신앙을 물려 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성모님 발현 목격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덕은 순명이고 침묵이고 겸손입니다!

 -양승국신부-

 

모든 성인의 날 축일을 맞아 성인(聖人)들이 공통적으로 지닌 덕행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성인으로서 갖춰야할 가장 기본적인 덕행은 아무래도 겸손의 덕이요, 사랑과 온유의 덕이겠지요.

  

또 빼놓지 말아야 할 덕행이 있다면 순명과 침묵의 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깊은 침묵에서 우러난 하느님께 대한 순명, 장상에 대한 순명, 동료 인간에 대한 순명, 긴박한 시대의 요청에 대한 순명...

  

순명하면 프랑스 파리에서 성모님 발현을 체험한 목격자, 기적의 메달로 유명한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의 사랑의 딸 수녀회 카타리나 라부레 성녀(1806~1876)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성모님과 친밀한 교류를 나눈 이 신비스런 수도자 카타리나 라브레는 지극히 겸손했습니다. 성모님 첫 발현이후 그녀는 46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소중한 비밀을 홀로 간직했습니다. 그 동안 그녀는 파리에 있는 수녀 공동체 병원에서 양로원 병실과 양계장 담당자로의 소임에 충실하며 숨어서 지냈습니다. 

 

교회 당국의 지시에 철저하게 순종한 카타리나 라브레 수녀의 모습은 성모님 발현 목격자로서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밀을 간직하라니 46년간에 걸쳐 비밀을 간직하고 침묵을 지켰습니다. 성모님 발현 목격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덕은 순명이고 침묵이고 겸손입니다. 

 

기적의 메달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중에도 카타리나 라브레 수녀는 침묵 속에 있었기에 고해사제 알라델 신부님 외에 그 누구도, 주변 동료 주차도 그녀가 기적의 메달과 관련된 성모님 목격자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후에 카타리나 라브레 수녀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의 원장 수녀에게 자신이 그 은혜로운 목격자라고 털어놓았습니다. 충격에 사로잡힌 원장 수녀님의 말씀입니다. 

 

“혹시나? 하는 생각도 했지만, 저는 전혀 믿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녀의 생활이라는 것이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환자를 간호하고, 닭모이를 주고, 우리와 똑같았기 때문입니다.” 

 

순명의 덕! 하면 이 분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루르드의 성녀 벨라뎃다 수녀님(1844~1879)입니다. 그녀는 루르드에서의 성모님 발현 목격 이후, 느베르 애덕 수녀회에 입회해서 평생토록 침묵과 기도, 희생과 봉사 속에 수도생활을 해나가셨습니다.

 

1866년 7월 8일, 22세 되던 날 벨라뎃다는 애덕 수녀회 입회하게 됩니다. 바로 다음날, 벨라뎃다는 300여명 남짓한 애덕 수녀회 수녀님들 앞에 서게 됩니다. 

 

원장 수녀님의 부탁으로 수녀님들에게 루르드 목격담을 이야기하기 위해 강단에 선것입니다. 벨라뎃다는 목격담을 시작하기전 청중들에게 이런 말을 건넸습니다.


“루르드 성모님 발현과 관련된 이야기라면,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전제 조건 하에 말씀을 시작합니다.”


그후 벨라뎃다는 평생토록 애덕 수녀회 수녀원 담안에 자신을 감추었습니다. 침묵과 기도, 순명과 적극적인 사랑의 봉사 속에 남은 수도생활을 불태웠습니다. 성모님 발현 목격자로서 참으로 바람직하고 아름다운 처신이 아닐수 없습니다.

 

순명과 침묵은 커녕 철저한 불순명과 과도하고 그릇된 홍보로 선량한 신자들을 현혹시키고 교회를 분열시키고 있는, 나주 ‘마리아의 구원방주’를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봅니다.

  

조금이라도 특별한 영적 체험이나 은사를 받으신 분들이 계시다면, 즉시 카타리나 라브레 성녀나 벨라뎃다 성녀를 바라보셔야 할 것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특별한 은혜, 각별한 사랑에 깊이 감사드려야 할것입니다. 절대로 여기저기 떠벌이지 말아야할 것입니다. 우쭐한 마음도 버려야할 것입니다. 그 특별한 사랑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가야 할 것이며, 더 열심히 이웃사랑의 실천에 헌신해야 할것입니다.


-이영근신부-


마태 5, 1-12(모든 성인 대축일)

 

오늘은 “모든 성인 대축일”입니다. 잘 익어 가는 11월의 가을처럼, 우리 모두에게도 주님의 축복과 자비가 잘 익어 성덕의 열매가 맺혔으면 좋겠습니다.

정녕, 가을은 하나의 기점입니다. 아름다움의 극점입니다. 변화의 극점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건너감이요, 이월입니다. 자신을 찬란하게 꾸며오던 일에서, 이제는 자신을 내려놓고 비우는 일에로의 이월입니다. 그것은 붙들고 있던 나뭇가지에서 떨어져 바람 부는 대로 나뒹구는 낙엽처럼, 매여 있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영의 이끄심에 끌려 다니는 일입니다. 임을 찾아 바삐 달리던 일에서, 이제는 찾아 만난 임과의 속삭임에로의 이월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뒹구는 낙엽처럼, 강해지기보다는 약해지를, 능력을 갖추기보다는 무력해지를, 현명하기보다는 어리석어지기를 배워야 할 때입니다. 부서져 사라지는 것이 생명의 길이요, 옳고도 지는 것이 사랑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비워지고서야 타인의 존귀함이 보이고, 허물을 뒤집어쓰고서야 자신이 비워지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자신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해결 받기를 즐겨해야 할 때입니다. 자신이 해결사가 아니라, 해결 받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자신이 주인공이 되기보다, 주님을 주님 되게 해 드려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는 주님 안의 자신과 홀로 고독할 줄을 배워야 할 때입니다. 지금까지는 공동체에 힘입어 살아왔다면, 이제는 공동체에 거름으로 자신을 내어주어야 할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는 “참된 행복”입니다. 그것은 ‘가난을 사는 일’입니다. 그러면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할 것입니다. 이미 그분을 차지한 까닭입니다.

그것은 ‘슬퍼할 줄을 아는 일’입니다. 그러면 자신과 세상의 죄를 슬퍼하되, 자비 안에서 위로를 받고 기쁠 것입니다. 이미 깨어, 항상 임을 바라보며 기도할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온유해 지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그분의 감미로움에 빠질 것입니다. 진정, 있어야 할 하느님 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하는 일’입니다. 곧 그분 외에는 아무 것에도 목마르지 않는 일입니다. 주님을 극단적으로 필요로 하는 일 외에는 결코 아무 것도 내세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비를 베푸는 일’입니다. 이미 주님의 마음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음을 깨끗이 하는 일’입니다. 그분의 손길에 매만져진 까닭입니다. 그것은 ‘평화를 위해 일하는 일’입니다. 그분의 영에 끌려 다스림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고 모욕을 받으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일’입니다.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진정,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클 것입니다.

 

오늘, 모든 성인의 대축일에, 이토록 우리는 복된 삶에로 초대를 받았습니다. 사부 성 베네딕도의 <수도규칙> 제4장 62절의 성구를 새겨봅니다.

“성인이 되기 전에 성인으로 불리기를 바라지 말고,

참으로 성인으로 불리어지도록 먼저 성인이 되십시오.”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기도 -

행복하여라. ~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12)

주님! 가난을 살게 하소서. 당신을 이미 차지한 까닭에 더 이상 아무 것도 차지할 것이 없게 하소서.

슬퍼할 줄을 알게 하소서. 가엾이 여기는 당신의 마음에 제 가슴이 찔리게 하소서.

온유해 지게 하소서. 당신의 품에 안겨 다독거려지게 하소서.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하게 하소서. 참된 음료인 당신께 맛 들어지게 하소서.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측은히 여기는 당신의 마음을 선사받게 하소서.

제 마음을 깨끗하게 하소서. 당신의 손길에 매만져지게 하소서.

평화를 위해 일하게 하소서. 당신 손이 저를 이끌게 하소서.

의로움 때문에 모욕을 받으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소서. 제가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주님의 것이 되게 하소서. 이 복된 삶이 제게는 참된 행복이 되게 하소서. 아멘.


희 망

-송영진신부-


성경을 몰라도 묵시록에 나오는 ‘십사만 사천 명’은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나는 또 다른 한 천사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인장을 가지고 해 돋는 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땅과 바다를 해칠 권한을 받은 네 천사에게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우리가 우리 하느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장을 찍을 때까지

땅도 바다도 나무도 해치지 마라.’ 나는 인장을 받은 이들의 수가

십사만 사천 명이라고 들었습니다. 인장을 받은 이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지파에서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묵시 7,2-4).”

여기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도 ‘상징’이고, 십사만 사천 명도 ‘상징’입니다.

(‘144,000’은 ‘12 곱하기 12 곱하기 1,000’으로 풀이되는데,

성경에서 ‘12’는 ‘완전함’을 상징하고, ‘1,000’은 ‘아주 많음, 충만함’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144,000’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완전한 행복을 누리고 있다는 것과

그 수가 많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일부 사이비 종파에서 실제 수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는데, 잘못된 해석입니다.)

묵시록에는 ‘십사만 사천 명’을 언급한 뒤에 다음 말이 나옵니다.

“그다음에 내가 보니,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온 그들은,

희고 긴 겉옷을 입고 손에는 야자나무 가지를 들고서

어좌 앞에 또 어린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묵시 7,9).”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 라는 말은,

‘십사만 사천 명’이 실제 수가 아니라 상징이라는 근거가 되고,

또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이라는 말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상징이라는 근거가 됩니다.

 

그런데 ‘구원받을 사람들’에 관해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 13,24).”

이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는

말씀으로 보이기도 하고, 그래서 묵시록의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 라는 말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말씀은, “많은 사람이 못 들어간다.”,

또는 “적은 수의 사람만 들어간다.”는 뜻이 아니라,

“들어가기를 바라면서도 못 들어가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곳에 들어가는 사람의 수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 모릅니다.

이론적으로는, 자격만 갖추면 인류 전체가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격을 갖추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들어가는 사람의 수’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들어갈 수 있는가, 아닌가?”입니다.

“너희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가

하느님의 나라 안에 있는데 너희만 밖으로 쫓겨나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루카 13,28).”

밖으로 쫓겨나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밖에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 ‘밖’을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구원의 초대’에 응답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믿지 않고, 응답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것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겠다고, 즉 밖에 남아 있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라는 말씀은,

밖에 있는 자들의 후회와 절망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과 고집의 결과가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고 있다가

나중에 뒤늦은 후회와 절망에 빠질 것입니다.>

 

묵시록은 ‘안에 들어간 사람들’, 즉 구원받은 사람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묵시 7,14).”

이 말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에 관한 말이기도 합니다.

‘큰 환난’은 종교박해를 가리키는 말인데, 넓은 뜻으로는

지상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겪는 모든 어려움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는 말은,

어떤 어려움에도 흔들림 없이 신앙을 지켰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믿음’만을 강조하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믿음을(마태 7,21) 강조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누리는 행복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어좌 앞에 있고, 그분의 성전에서 밤낮으로 그분을 섬기고 있다.

어좌에 앉아 계신 분께서 그들을 덮는 천막이 되어 주실 것이다.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며, 해도 그 어떠한 열기도 그들에게 내리쬐지

않을 것이다. 어좌 한가운데에 계신 어린양이 목자처럼 그들을 돌보시고,

생명의 샘으로 그들을 이끌어 주실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묵시 7,15-17).”

이 말은, 그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완전하고 영원한 행복과 평화와 안식을 누린다는 뜻입니다.

 

그 행복과 안식은 지상에서의 인생의 고단함과는 완전히 반대쪽에 있습니다.

“저희의 햇수는 칠십 년, 근력이 좋으면 팔십 년.

그 가운데 자랑거리라 해도 고생과 고통이며, 어느새 지나쳐 버리니,

저희는 나는 듯 사라집니다(시편 90,10).”

이 말을 간단하게 줄이면, “인생은 허무한 여행일 뿐이다.”입니다.

오래 살았든지 짧게 살았든지 간에,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든지 그렇게 살지 못했든지 간에,

인생이란 결국에는 먼지처럼 사라지는(시편 90,3-6) 고달픈 방랑일 뿐입니다.

그 허무를 극복하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

 

‘모든 성인 대축일’은 ‘희망의 대축일’입니다.

믿는 사람들의 인생의 끝은 허무가 아니라 ‘영원’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축일이기 때문입니다.

노력하면 누구든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행복과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성인들은 이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그 행복과 안식을 누리고 있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로마 8,18).”

“피조물이 허무의 지배 아래 든 것은 자의가 아니라 그렇게 하신 분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로마 8,20).”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로마 8,24-25).”


-조욱현신부-

 

오늘은 하늘나라의 모든 성인을 기리는 대축일이다. 하느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는 성인들을 기리며, 또한 우리가 성인이 되어야 함을 일깨워주는 날이다. 아무리 많은 성인을 모시고 그분들을 공경한다고 하여도 내가 성인이 되지 못하면 그 성인들과 나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내가 성인이 되도록 결심하는 날이어야 한다.

 

복음: 마태 5,1-12: 참 행복: 산상 설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1절) 산으로 올라가셨다는 것은 사람들을 더 높은 삶으로 데려가시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제자들이 가장 높은 영적 덕을 갖추고서 그분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이다. 우리도 진리의 신비를 배우고자 한다면 교회라는 산으로 올라가야 한다. 거기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르치신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3절)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란 회개하여 어린아이처럼 겸손해진 사람을 말한다. 세상의 부유보다도 하느님 안에서 부유하게 된 사람이 참으로 복된 사람이다. 하늘나라는 이미 덕을 실천하고 있는 이들에게 가장 어울리는 삶이다. 이렇게 복된 사람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가난해진 사람들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4절) 슬퍼하는 사람은 슬픔이라는 고통이 끝남으로써 위로를 받는다. 여기서 ‘슬퍼한다.’라는 말은 죽음이 아니라 죄 때문에 슬퍼한다는 의미이다. 나의 죄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죄 그리고 온 세상의 죄 때문에 슬퍼하는 이들은 더욱 복된 이들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5절) 복음 정신으로 젖은 온유한 사람은 주님의 온유함을 본받는다. 온유한 이들은 모욕하기보다는 모욕을 견디는 사람들이며, 그들은 이 세상과 앞으로 올 세상에서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세상이 타락의 종살이에서 풀려나 하느님 자녀의 영광에서 오는 자유를 얻으면, 살아있는 온유한 이들의 땅이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6절) 이것은 오로지 하느님의 의로움만을 생각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의로움에 대한 목마름은 가난도 배고픔도 두려워하지 않는 참된 부를 낳는다. 하느님을 뵙는 것은 우리가 무로 사라지는 종말이 아니라, 우리가 완전해지는 종말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7절) 하느님께서 주시는 보상은 인간의 선행에 대해 다른 이들이 내리는 어떤 보상보다 뛰어나다. 거지의 목소리를 들을 때면, 나도 하느님 앞에서 거지임을 기억하라.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거지를 대하는 대로 당신의 거지를 대하실 것이다. 참으로 자비로운 사람은 자신의 원수들에게도 자비를 베풀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8절)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죄를 끊고 믿음과 의로움을 실천하여 쌓는 행실로 하느님 마음에 든 사람을 의미한다. 바르게 행동하며 그렇게 하고자 생각하는 이는 누구나 하느님을 본다. 인간의 정의는 하느님의 정의와 닮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느님으로 만족하지 못하면 어느 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한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9절) 평화는 믿음이 빛나고 희망이 굳게 자리 잡고 자비의 불이 타오르는 곳에 있다. 평화를 이루는 이들은 사도들의 가르침, 말씀 아래 하나 되어 교회의 평화를 지키는 이들이다. 이 평화가 있는 곳에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모든 일에 질서가 잘 잡혀있으며, 다툼이 없다. 그들은 하느님의 다스림을 몸소 보여주는 이들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10절)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견디는 이들에게는 불안에 떨지 않고 그것을 견디는 은총이 주어진다. 사도들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의로움을 위하여 받는 박해의 복됨을 가장 잘 보여준다. 이 박해는 외국인에게서 만이 아니라, 자기 백성에게서도 의로움 때문에 받을 수 있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11-12절)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하늘나라를 받는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영광에 걸맞은 동료가 될 수 있도록 어떤 고통이라도 견뎌낼 준비가 되어 있다. 그래서 땅에서 걸림돌에 부딪히면 하늘의 영광을 그것에 비교해 보아야 한다.

 

그러나 “행복한 자들”이라는 이 말씀은 인간적 논리로는 어리석어 보인다. 마음이 가난한 이들, 온유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하느님의 나라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비난받는 사람들은 어디서나, 일터에서, 병원에서, 감옥에서, 실직당하고, 퇴출당하는 사람들, 언어장애인, 걱정이 많은 사람, 표정이 어두운 사람들로 생각하며, 세상은 이들이 아무도 세상에 드러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오직 이들만이 하느님 나라의 가운데 자리를 잡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얼굴에 그들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같이 완전하게”(마태 5,48) 하려고 그들과 고통당하신 주님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 강령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 팔을 벌리고 그들 안에서 영광의 왕의 얼굴을 발견하면서: 마태 25,31-46, 가장 위대한 사랑을 발견한 사람들이다. 자, 이것이 인간들을 바라보는 복음의 주요한 선포이다. 이 행복한 사람들을 묵상하며 우리 자신이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 하늘나라를 얻는 우리, 즉 성인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하겠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를 기쁨과 즐거움으로 초대합니다.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 5,11-12)

예수님께서 당신께 몰려온 군중을 보시고 진정한 행복에 대해 가르쳐 주십니다. 가난, 슬픔, 온유, 의로움, 자비, 깨끗한 마음, 평화, 박해 등 예수님께서 행복하다고 선언하시는 이들의 상태는 당시 예수님께 위로와 희망을 구하러 달려나온 민중의 현실을 대변합니다.

그런데, 잇속에 밝고 탐욕에 관대하며 갑질을 벼슬처럼 여기는 당시나, 또 요즘의 세상에서는 제 뼈도 못 추릴 부류의 사람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외모와 겉치레과 소유에 올인하느라 마음과 영혼을 돌보는 일에는 관심조차 없거나 오히려 경멸하는 이들 틈에서 이리저리 치이면서 살아온 이들, 그런 이들에게 예수님께서 어려움 중에도 귀하게 간직해 온 마음의 중심을 잃지 말라고 위로하고 격려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악의 유혹과 삶의 고통 속에서 주님께 희망을 두고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기쁘고 즐겁기를 바라십니다. 그들이 이미 하느님 나라에 이름을 새겨넣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서 받을 상"은 지상 물질이 주는 잠시의 만족감이나 우쭐함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적 축복이지요.

이 내적 행복에 대해서는 가난하지만 행복한 이들, 박해와 무시를 받으면서도 행복한 이들, 의로움을 갈망하면서 행복한 이들, 그밖에 오늘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이들이 잘 압니다. 알기에 더 바라게 되고 갈구하게 되고, 그밖의 것은 쓰레기로 여기는 이들의 행복이지요.     

제1독서에는 하느님 주변에서 그분을 찬양하는 "희고 긴 겉옷을 입은 사람들"(7,13) 무리가 등장합니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묵시 7,14)

묵시록 저자는 하늘 나라에서 하느님 곁자리를 차지한 이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들이 지상에서 누리던 재산이나 권력, 지위를 언급하지 않고 오히려 수난과 죽음의 어린양을 따른 자취를 이야기합니다.

어린양께서는 자신의 피에 제 존재를 담근 이들의 영혼을 희고 깨끗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기에 그들이 세상에서 겪은 가난과 박해와 무시, 슬픔과 모욕, 음해와 모략은 오히려 그들이 그리스도의 피의 신부라는 증거가 됩니다. 그 피의 잔은 이웃이 겪는 가난과 불의는 아랑곳없이 오직 자신과 가족의 사치와 안위만을 위해 살아온 이들이 스스로 밀어낸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제2독서에서는 세속적 쾌락을 내려놓고 하느님 자녀됨의 신원을 기쁘게 살아가는 이들이 받을 보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요한 3,2)

묵시록에 나오는 하느님 곁의 거룩한 이들처럼 우리도 그분의 나라에서 주님의 얼굴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서로를 응시하고 관상하며 사랑하는 이 "봄"은 그저 시각적 행복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봄"은 "그분처럼 되는 것"으로 옮아갑니다.

바라봄으로써 상대방이 되는 것은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발생할 수 있는 최고의 신비가 아닐까 합니다. 이는 닮음과 따름을 넘는 "동화"와 "일치"입니다. 사랑 때문에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육화의 신비처럼 비록 방향은 달라도 불가능하지 않은 신비입니다. 이처럼 서로에게 물들어 서로가 되어 가는 것은 어쩌면 우리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의 지고의 경지일 겁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그래서 우리는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지금 지고 가는 삶의 무게가 과중하고 버거워도, 세상에 겨우 발붙인 자리가 비천하고 불안해도, 세속의 허영으로 잡아끄는 손길들이 집요하고 모욕적이어도 흔들리지 말고 우리가 이미 선취한 행복을 누려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고 경축하는 하느님 곁의 성인들이 우리보다 앞서 그 길을 가셨지요. 잠시 우쭐하다 사그러질 세속의 허무한 영광 대신 영원한 사랑을 위해 몸을 던진 분들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있으니 힘 내어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주님의 길을 걸어갑시다. 오늘도 결실이 보이지 않는 사랑에 자신을 내어주는 우리에게 "행복하여라!" 하고 예수님께서 격려하십니다.  

누가 성인인가?    

-김찬선신부-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오늘 우리가 모든 성인의 날을 지내는데 이 축일을 경축하면서
성인이란 어떤 존재인지를 생각해 봅니다.
누가 성인입니까?

어린애처럼 죄가 없는 사람입니까?
공맹자처럼 덕이 많은 사람입니까?
슈바이처처럼 자기를 헌신한 사람입니까?

성인이 이런 것들을 포함한 사람이라는 것은 맞는 말입니다.
성인이라면 죄가 없어야 하고 반대로 덕이 많아야 하며
이웃을 위해 아낌없이 자기를 내준 사람이어야겠지요.

뒤집어 생각해보면 즉시 알 수 있습니다.
살인죄, 사기죄와 같이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 성인일 수 없고,
덕이란 하나도 없고 변덕이 죽끓듯 하는 사람이 성인일 수 없으며,
남 위해 자기를 내주지는 않고 자기것만 챙기는 사람이 성인일 순 없지요.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훌륭한 사람이지 성인이라고 할 수 없고,
무죄함이나 후덕함이나 이웃을 위한 헌신,
이런 것들은 성인의 필수 조건이지 충분 조건은 아닌 것입니다.
성인은, 제 생각에, 하느님과 존재와 행동에서 일치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선 하느님과 존재적으로 일치하여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의 행복은 크게 두 가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사는 행복과 원하는 것을 다 이룬 행복입니다.

그런데 성인은 사랑하는 이가 하느님이고 그래서
하느님과 존재적으로 일치를 이룬 분입니다.

제 생각에 인간을 사랑하나 하느님을 사랑하거나
사랑의 행복은 같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사랑이
얼마나 불변하고 참된가 거기에 차이가 있는데
성인들은 이 차이를 알고 하느님 사랑을 선택한 분들이고,
인간 사랑에서 하느님 사랑에까지 올라간 분들이며,
하느님 사랑에서 인간 사랑에로 내려온 분들입니다.

그래서 성인들은 사랑이신 하느님과 존재적 일치를 이루고서
이제 하느님과 사랑 실천에 있어서도 일치를 이룹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사랑이신 분이요 내가 사랑하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하느님 사랑의 자연스러운 발로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인간을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다는 뜻이고, 하느님을 사랑하면 저절로 인간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바라고 또 행복해야 합니다.
다만 성인으로서 행복하냐 그렇지 않냐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행복 선언의 첫 번째 가르침을 잘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저께 <선교적 증거>라는 주제의 동영상 강의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는 번역은 잘못된 번역입니다.

우리의 가난에는 물질의 가난이 있고,
마음의 가난 곧 덕의 가난이 있으며,
영의 가난 곧 성령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소유한 가난이 있는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 살라고 하신 가난과 그 행복은
마음의 가난과 그 행복 정도가 아니고 영의 가난과 그 행복입니다.

성인들은 이 가난과 행복을 산 모든 분들이고
오늘 모든 성인의 축일을 지내는 우리는 이런 성인들을 본받아
같은 가난과 행복을 살기로 지향과 마음을 정해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11월 1일 화요일 모든 성인 대축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