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23일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오상(五傷)의 비오 신부’로 널리 알려져 있는 비오 성인은 1887년 이탈리아의 피에트렐치나에서 태어났다.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여 1910년 사제가 된 그는 끊임없는 기도와 겸손한 자세로 하느님을 섬기며 살았다. 비오 신부는 1918년부터 그가 세상을 떠난 1968년까지 50년 동안 예수님의 오상을 몸에 지닌 채 고통받았다. 곧, 그의 양손과 양발, 옆구리에 상흔이 생기고 피가 흘렀던 것이다. 이러한 비오 신부를 2002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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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병자를 고쳐 주라고 제자들을 보내시었다.
(루가 9,1-6)
He sent them to proclaim the Kingdom of God
and to heal the sick.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병규신부-
복음 선포와 치유 능력은 쌍을 이루고 함께 나아갑니다. 말하자면 복음 선포는 인문학적 소양이나 객관적 지식의 함양과는 결을 달리하고, 동시에 우리 삶 곳곳에서 직접적이고 가시적인 기쁨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걱정입니다. 대다수의 종교가 현실 도피적 위로의 기능만을 수행하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기우이기를 바라나 많은 신앙인이 성당이나 교회에 와서는 세상사 잊고 그저 하느님 안에 조용히 위로받고 싶어 하는 마음을 지니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사는 것이 팍팍하고 때로는 내려놓고 싶다는 뜻이겠지요.
그럼에도 그리스도교는 세상에 파견되어 세상의 질병을 고쳐 주어야 합니다. 코로나19 사태로 긴박히 돌아가는 세상에서 교회는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요.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홀로 베드로 광장에서 강복하시는 장면을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력함과, 그럼에도 세상을 향하여 무엇이든 해 주시려는 아버지의 사랑을 느꼈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질병을 고쳐 주고 보듬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직접적인 기쁨, 가시적인 치유를 말하기 전에 오늘 복음 한 구절을 다시 묵상하려 합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는 말씀은 언뜻 보기에 무소유의 편안함을 의미하는 듯싶지만 실은 ‘현실주의’에 대한 과감한 저항입니다.
돈이 있어야 성공이든 행복이든 말할 수 있다는 현실에서 돈 한 푼 없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그 현실을 우리는 내려놓고 비워 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은 치유됩니다. 더 쥐려고 경쟁하는 세상을 아무리 치유하고 위로한들 더 큰 질병이, 더 큰 바이러스가 우리를 공격할 것입니다. 질병의 고통은 가난한 이들에게 차곡차곡 쌓이고, 그로 말미암은 부는 사회 상층부에 차곡차곡 쌓입니다. 가난한 이들의 질병을 직접적이고 가시적으로 고쳐 주는 것은, 조금이라도 더 가진 이들이 나눌 때 가능합니다. 복음 선포와 치유 능력은 예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실천만 남았습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위협이 있을 때, 큰 고통과 시련이 있을 때가 오히려 기회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때를 통해서 오히려 더 큰 성장을 가져올 수가 있습니다. 실제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려움을 힘겹게 극복한 다음에야 지금 모습이 가능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성공하길 바란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내가 되길 원한다면 오히려 어떻게 기도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고통과 시련을 제게 맘껏 주세요.”
그러나 고통과 시련을 내려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보다 제발 좀 치워달라는 것에 맞춰져 있습니다. 성공하기를 바라면서도 어렵고 힘든 일은 제발 없었으면 하는 것이 우리의 지금 모습입니다.
진정으로 나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이 부분은 심각하게 묵상할 때, 나의 기도 내용이 바뀔 수가 있습니다. 어떤 상황 안에서도 기쁨을 간직하며 지금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셔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따라서 이 파견은 그들을 영예롭게 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실 때 자기 육신을 위해 아무런 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맨몸으로 보내시면서 오직 수확할 밭의 주인님만 의존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명령을 충실히 따른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전교 여행은 어떠했나요? 실패였을까요? 아니면 성공이었을까요?
큰 성공을 거둡니다. 부족한 것이 너무나 많고, 힘든 것투성이였지만, 이 없음이 커다란 성공을 이끌어서 그들을 더욱더 영예롭게 한 것입니다. 뛰어나지도 않고 갖춘 것도 별로 없는 이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복음으로 세상을 정복하실 수 있습니다.
이를 잠언서의 저자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 가지를 간청하며 이렇게 기도합니다.
“제가 죽기 전에 그것을 이루어 주십시오. 허위와 거짓말을 제게서 멀리하여 주십시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잠언 30,7-8)
우리의 기도는 어떠한가요?


저는 일찍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육 남매의 막내로 태어났기에, 큰형의 큰아들이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서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손주를 보니, 조카 때와는 다른 느낌입니다. 더 예쁘고 사랑스럽습니다. 그런데 자주 만날 수가 없습니다. 특히 코로나로 서로 주의를 해야 하는 시기이기에 더욱더 만남이 줄었습니다. 그래서 조카가 종종 아들 사진을 올려 줍니다.
이 사진들을 보면서 깨달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아이는 나날이 어제와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아기였는데, 어느 순간 어린이가 되어있습니다. 빠르게 성장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늘 새로운 오늘을 사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의 나도 늘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맨날 똑같은 삶이라고 말하며 불평합니다. 지금의 새로운 오늘을 생각하지도 또 받아들이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새 물건을 가지게 되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새로운 나를 갖게 된다는 것은 분명히 기분이 좋아지는 일입니다.

이별도 사랑할 때처럼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먼저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쳐주는 힘과 권한을 주십니다. 성령을 의미합니다.
그다음엔 가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 걱정은 성령의 힘을 약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일단 한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만 머물라고 하십니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전해보겠다고 했다가 이도 저도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선교도 사랑이라면 넓게 하는 것보다 좁고 깊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돌 들고 싸우는 사람 수십 명을 만드는 것보다 총 든 군인 한 명 훈련하는 게 낫습니다. 성인 한 사람은 많은 사람을 회개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사도를 거부한다면 보이는 증거로 발에서 먼지를 털어버리라고 하십니다. 사실 당신은 발의 먼지와도 같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먼지 털어버리듯이 매몰차게 떠나는 것이 어떻게 사랑일 수 있느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사실 그렇게 떠날 수 없다면 사랑을 했던 것도 아닙니다.
만약 두 연인이 헤어졌다고 합시다. 그런데 한 사람이 술만 먹으면 계속 기억이 난다고 전화를 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그 사람이 좀처럼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둘이 사랑할 때 누가 더 사랑했었다고 생각이 되나요? 당연히 매몰차게 끊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만큼 사랑했기에 그만큼 끊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하느님께서 왜 인간이 지옥에 가게 내버려 두시는지 조금은 이해가 갑니다. 그만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끝까지 거부한다면 하느님은 더는 그 사람에게 집착하지 않으십니다. 제 생각이지만, 만약 누군가와 헤어졌는데 그 누군가를 아직도 기억하며 잊지 못하고 있다면 그때 그 사람에게 충실하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랑할 때의 자세와 헤어질 때의 태도가 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영화 ‘골든 에이지’(2007)는 무적함대를 지닌 당대 최고 강대국이었던 스페인과 영국으로 망명해 있던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 스튜어트가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를 제거하려 했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 위험을 잘 알고 있던 대신들은 여왕이 밖으로 나오는 것을 말렸지만 여왕은 국민들과의 소통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여왕이 지나가던 때 한 남자가 웅덩이가 있다며 그 위에 자기 옷을 던집니다. 강하게 인상에 남는 남자였습니다. 여왕은 그 남자에게서 호감을 느낍니다. 그는 스페인 해적이라 불리는 라일리 경이었습니다. 그가 여왕의 침실에 드나든다는 소문까지 퍼집니다. 하지만 여왕은 그 사람만은 곁에 두려 합니다.
이 와중에 메리 스튜어트가 여왕을 암살하려 한 것을 알고 그녀를 사형에 처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제 스페인이 전쟁을 일으킬 명분을 얻게 된 것입니다. 스페인과의 전쟁을 앞두고 엘리자베스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사랑을 라일리 경과 나눕니다. 영국 여왕으로서 자신 나라를 침공하려는 나라의 한 선원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것입니다.
하지만 그 남자는 또 다른 궁실 여인과 사랑하는 사이였습니다. 그 여인은 엘리자베스의 친구이자 하녀였습니다.
배신당한 사실을 알지만, 전쟁이 코앞이라 슬퍼할 여유도 없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죄수들까지 동원하여 무적함대를 무찌르고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상처를 준 친구와 라일리 경을 용서합니다. 둘의 행복을 빌어줍니다.
그 이후 얼굴에 흰 분을 바르고 사람들 앞에 나섭니다. 흰 분을 발랐다는 것은 자신은 이제 세상에서 죽은 사람과 같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평생 결혼하지 않고 살며 유일하게 자신이 사랑했던 그 사람을 한 번도 보지 않습니다.
엘리자베스 때가 영국 역사상 가장 강성했던 때입니다. 무려 40년 동안 영국은 누구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강대국이 됩니다.
엘리자베스는 죽기 직전 숨을 거두며 자신이 평생을 사랑했던 한 남자, 자신의 친구에게 빼앗기 한 남자, 라일리의 이름을 부르며 생을 마감합니다. 여왕으로서 그 남자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으나,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이는 엘리자베스 여왕처럼 더 큰 책임을 어깨에 지고 있습니다. 그것과 반대되는 애정에 휩쓸려서는 안 됩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그 남자와의 애정에 휩쓸렸다면 나라는 약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이도 애정에 휩쓸리기보다는 발에 먼지를 털어내듯 복음을 거부하는 이를 떠나야 합니다.
어떤 때는 모질게 끊는 것이 사랑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개중에 몇 명은 그 사람이 자신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좋은 것을 주려고 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아픔이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잃어봐야 소중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발에 먼지를 털어내는 것은 헤어지는 사람이 마지막으로 줄 수 있는 사랑입니다. 만약 그렇게 단호하게 끊지 못하면 그 사람은 끝까지 자신이 옳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사랑을 할 때 모든 것을 내어놓아야 하고 헤어질 때도 그래야 합니다. 이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조재형신부-
사람들이 문화 인류학자에게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인류의 문명은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그러자 인류학자는 15,000년 된 사람의 치유된 허벅지 뼈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자연의 세계에서 골절된 동물은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움직이기 어렵기에 다른 동물에게 공격당할 수 있습니다. 움직이기 어렵기에 동료들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동물은 골절당한 동료를 도와주지 않습니다. 그런 것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있는 뼈는 치유된 허벅지입니다. 이는 당시의 사람들이 골절된 동료를 도왔다는 증거입니다. 골절되어 움직일 수 없는 동료와 함께 했다는 증거입니다. 인류의 문명은 이렇게 서로를 도와주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동물은 태어나서 곧 걷고, 날고, 뛸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10년은 보살펴야 합니다. 그렇게 10년 동안 사랑받으면서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걷고 뛰지 못하는 시간 동안 말을 배우고, 글을 배우며, 공동체의 삶을 배우게 됩니다. 오랜 시간 보호를 받아야 하는 사람은 공동체를 형성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인류의 문명과 문화의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풍랑에 흔들리는 배에서 사람들은 겁을 먹고 두려워합니다. 모두가 두려워 떨고 있을 때 한 사람이라도 침착하게 방법을 찾는다면 배는 풍랑을 이겨낼 수 있다고 합니다. 두려움과 걱정은 풍랑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풍랑에 흔들리는 배에서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있지 않느냐!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제자들은 풍랑을 이겨낼 수 있는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두려움과 걱정은 예수님께 대한 믿음으로 바뀌었습니다. 어두운 밤바다에서 배들이 방향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언제나 변하지 않는 북극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캄캄한 밤바다에서 배들이 육지가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은 멀리서 빛을 비추는 등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역사에 북극성과 같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등대와 같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학자가 있었습니다. 석가모니라는 현자가 있었습니다. 공자, 맹자, 장자, 노자와 같은 사상가가 있었습니다. 성서에는 예언자들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셔서 어떤 예언자도 따를 수 없는 외아들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많은 걱정을 하셨습니다. ‘마치 내가 너희를 이리 때 속으로 보내는 것 같구나!’ 제자들이 가는 길이 결코 쉬운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옷도 지니지 마라.' 현실의 삶에서 꼭 필요한 것들도 가지고 다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사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었다.’ 정말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주님과 함께 지냈고, 주님의 가르침을 들었던 제자들이 파견되어서 주어진 사명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습니다. 소유와 욕심을 버릴 때, 우리는 참된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나의 세례명’은 무엇인지, 나의 성인께서는 어떤 삶을 사셨는지 묵상했으면 좋겠습니다. 내 뜻이 이루어지기 보다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먼저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상(五傷)으로 인한 기적도 큰 기적이었지만, 교회와 장상을 향한 철저한 순명과 지극한 겸손의 삶은 더 큰 기적이었습니다!
-양승국신부-
이탈리아 남부 지방 출신 오상의 비오 신부님(1887~1968)은 이탈리아 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크게 사랑받는 성인입니다. 정식 이름은 피에트릴치나의 성 비오 사제입니다. 피에트릴치나는 ‘작은 돌맹이’라는 뜻인데, 그에 걸맞게 피에트릴치나는 남부 이탈리아 지방, 돌밭 투성이뿐인 가난하고 척박한 지역에 위치해 있습니다.
비오 신부님은 1903년 카푸친 회에 입회하여, 1907년 종신 서원, 1910년에 사제로 서품됩니다. 그의 성소 여정은 험난하기로 유명했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눈에 띄게 병약했는데, 특히 고열에 자주 시달렸습니다.
신학 공부를 시작하자마자 병세는 더 위중해졌는데, 장상은 그를 고향인 피에트릴치나로 요양을 보내고, 그곳에서 특별 신학 교육을 받게 합니다. 종신 서원 이후 어느 정도 건강이 회복된 그는 다시 신학원으로 들어갔지만, 또 다시 건강이 악화되었습니다. 그 당시 주치의는 청천벽력같은 선고를 내렸습니다. “길어봐야 두 달입니다!”
1909년 우여곡절 끝에 기적적으로 부제품을 받았지만, 건강 상태는 늘 아슬아슬했습니다. 그의 가장 큰 걱정은 사제품을 받지 못하고 죽는 것일 정도로 건강 상태는 절망적이었습니다. 밤잠을 못 이루던 그는 소속 관구장께 편지를 써서 사제품을 앞당겨주길 청했고, 그 청원을 즉각적으로 수락되었습니다.
1910년 8월 10일 드디어 그는 베네벤토 주교좌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그는 카푸친회 소속 수도자였지만, 건강 때문에 고향 피에트릴치나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본의 아니게 고향 본당의 보좌 신부로 사목활동을 시작한 것입니다.
사제가 된지 1년이 지난 1911년 9월 7일부터 비오 신부님의 몸에 예수님의 오상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현상이 반복되었습니다. 놀랍게도 그 상흔은 5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오상으로 인해 그의 일생은 그야말로 가시밭길이었으며,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유럽 전역으로부터 구름처럼 비오 신부님에게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비오 신부님은 매일 새벽 5시에 미사를 드렸는데, 사람들은 새벽 1시부터 몰려와서 큰 소리로 기도하며 성당문이 열리기를 기다렸습니다.
교회당국에서는 그의 삶을 통제하기 시작했습니다. 비오 신부님에게 발생한 특별한 현상에 대해 보고를 받은 관구는 1919년부터 의사의 진단을 받게 했습니다.
정말 괴로웠던 일 한 가지는, 안그래도 오상으로 아프고 쓰려 죽겠는데, 의사들은 상처 위 아래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가며 상처 내부를 들여다봤습니다. 그럴 때 마다 비오 신부님은 천상의 비밀이 모독당하는 심한 죄책감에 빠져들곤 했습니다.
비오 신부님은 1923년부터 공적 성무 활동이 정지되어 작은 수도원 경당에서 홀로 미사를 집전하게 되었습니다. 일체의 편지에 대해서도 답장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자 비오 신부님을 간절히 만나고 싶었던 3천여명의 신자들이 격렬한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런 다음에야 비오 신부님은 다시 미사를 봉헌할 수 있게 되었고, 고백성사도 집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교회 당국이 비오 신부님에게 허락한 것은 오직 미사와 고백성사 뿐이었습니다. 비오 신부님은 자신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미사와 고백성사를 온갖 정성을 다해 집전했습니다. 1시간 넘게 지속되는 미사는 늘 감동으로 가득했습니다. 보통 사제들은 1분도 채 안걸리는 거룩한 변화의 기도는 5분 이상 걸릴 때도 있었습니다. 온몸이 피와 땀으로 흥건해진 채 깊은 생각에 잠겨 기도를 드리는 그의 모습은 많은 이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비오 신부님께서 집전하신 미사에 참석했던 한 사제는 ‘머리 털나고 이렇게 감동적인 미사는 처음’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의 본당으로 돌아간 그 사제는 자신이 봉헌했던 성의없던 미사에 대해 크게 반성하면서, 지극정성을 다해 미사를 드리기 시작했답니다.
우리와 똑같은 한 인간으로서 비오 신부님께서 예수님께서 받으셨던 오상을 똑같이 받았다는 것, 참으로 놀라운 기적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 기적보다 더 큰 기적이 그의 생애 안에 이루어졌습니다.
비오 신부님께서 카푸친 수도자로서 보여준 무조건적인 순종과 한없는 겸손의 삶이야말로 가장 큰 기적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오상으로 인해 숱한 오해와 중상모략을 받으면서 깊은 수도원 안에 유폐되곤 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 교회에 대한 신뢰, 장상에 대한 순명의 강도는 점점 더 커져만 간 것입니다.

근본에 충실하라
-반영억신부-
사람들은 자기의 기대와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온갖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수고와 땀을 흘리지 않은 채 좋은 열매만을 기다릴 때도 있습니다. 그것이 잘못인 줄을 알면서도 마음을 다잡지 못할 때가 많아 큰일입니다. “봄에 씨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습니다.”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럼에도 자신은 예외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할 일이 많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의 선포는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는 앉아서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 하느님을 잃어버린 사람들,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안에 갇힌 채 병든 교회가 되는 것보다,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바깥으로 나가 사고를 당하는 교회가 더 낫습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바깥으로 나가십니다. 하느님은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당신 사랑의 계획에서 제외되는 걸 원치 않으시기에, 사람들을 찾아 계속해서 나가십니다. 교회는 이와 동일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언제나 바깥으로 나가야 합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옷도 지니지 마라”(루카9,3). 하시면서 한 눈 팔지 말 것을 신신당부하셨습니다. 근본을 얻으면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그러나 근본을 잃으면 아무리 많은 것을 차지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소용없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걱정하지 말라 하시며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6,33) 하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바깥으로 나가되 우리가 믿고 의지할 분은 오로지 하느님뿐임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세상 것에 의지하지 않고 하느님을 선택하는 순간들에 기쁨이 넘쳐나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 것에 의지하는 동안 하느님의 힘의 가능성을 상실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 삶의 자리에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사는 곳이 하느님의 나라요, 사랑이 없으면 지옥입니다. 그리고 오그라든 마음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회복하는 것이 고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소명을 잊고 세상 것에 더 집착하고 마음을 빼앗길 때가 있습니다. 천상의 축복보다는 현세적인 축복에 목을 매는 것이 현실입니다. 천상은 나중의 일이니 지금 즐기고 인정받길 원하며 가끔은 하늘의 문이 이 지상에서 열린다는 것을 잊고 삽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겠습니다.
약속을 믿고 그대로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기는 힘이 신앙에 있습니다. 믿음에 따르는 실천과 활동을 위해 수고와 땀을 아끼지 않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복음을 선포하기 위하여 바깥으로 나가십시오. 누구든 만나십시오.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지금은 사랑할 때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다.
-송영진신부-
‘가난’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나는 이미 충분히 가난하다.” 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일이 아니라 남의 일로만
생각하는 이들도 있고, “이천 여 년 전의 가르침은 지금 이 시대의 상황과는
잘 안 맞는다.” 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고, “마음만 가난하면 된다.” 라고
생각하면서 ‘몸의 가난’을 실천하는 일을 외면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들은 언제나 공동체를 지향하는 가르침들이고,
영적인 가르침이면서 동시에 실생활에도 적용되는 가르침들이고,
마음과 몸으로 함께 실천해야 하는 가르침들입니다.
“나는 이미 충분히 가난하다.” 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자신보다 더 가난한 이들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요즘에 교회 안팎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부유한 사람들 사이의 양극화 문제가
자주 거론되고 있는데, 우리는 ‘나의 가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난’도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잘 사는 것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잘 사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고 바꿔서 말할 수도 있습니다.)
‘가난’ 자체는 극복해야 할 고난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고 자주 강조하신 것은,
부유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 사이의 양극화가
‘죄’와 ‘악’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십자가를 짐으로써 극복됩니다.
‘가난’도 가난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실천하려고 노력할 때
극복할 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천 여 년 전의 낡은 가르침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믿음 없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곳에,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마음만 가난하면 된다고 주장하면서
‘몸의 가난’을 실천하는 일을 외면하는 것은 ‘위선’입니다.
<이것은 ‘깨끗함’에 관한 가르침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겉만(몸만) 깨끗하면 깨끗한 것이라는 사고방식에 빠져 있는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신 일이 많은데,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마음이 깨끗하면 몸은 더러워도 된다고 가르치신 것은 아닙니다.
몸과 마음이 똑같이 깨끗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가난을 실천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파견하신 이야기를 보면,
권한과 임무를 주시면서 특별히 지시하신 말씀은 바로 ‘가난’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이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세속 사람들의 사고방식으로는, 성공적인 임무 수행을 바라신다면
제자들에게 더 많은 활동비를 주시는 것이 옳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활동비를 전혀 주시지 않았고,
또 ‘빈 손’으로 가라는 지시까지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신 ‘예수님의 깊은 뜻’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 뜻을 깨닫는다면 능동적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어떻게든 그 지시의 실천을 회피하려고 하는 것은
사실상 예수님의 지시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보내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 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었다(루카 9,1-6).”
제자들이 받은 임무는 ‘복음 선포’입니다.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쳐 주는 일은 복음 선포에 속한 일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처럼 ‘말’로도 복음을 선포했고,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쳐 주는 ‘일’을 통해서도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빈 손’으로 떠난 일은 ‘삶’으로 복음을 선포한 일입니다.
‘복음 선포’를 ‘하느님 나라의 부’를 선포하는 일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하느님 나라의 부’는 ‘하느님 뜻에 합당한 삶’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빈 손’은 세속 재물을 버리고 ‘하느님 뜻 실천’으로 가득 채운 손입니다.
‘빈 손’으로 떠나라는 지시는
“걱정하지 마라.” 라는 말씀에(루카 12,22-32) 연결됩니다.
만일에 활동비와 생활비 걱정을 하면서 복음을 선포한다면,
그 복음은 ‘기쁜 소식’이 아니라 ‘걱정스러운 소식’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빈 손’으로 떠나라는 지시는,
모든 걱정을 내려놓고 ‘빈 마음’으로 떠나라는 지시이기도 합니다.
만일에 아무런 걱정을 할 필요 없이 활동비와 생활비를 많이 가지고 간다면,
그 돈에 마음이 쏠릴 수밖에 없습니다.
<가진 돈이 많다면 돈을 도둑맞지 않으려는, 또는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마음이나
걱정이 생길 것이고, 그 마음과 걱정은 복음 선포를 방해하는 걸림돌이 됩니다.
“사실 너희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루카 12,34).”>
예수님께서 나중에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없이 보냈을 때, 너희에게 부족한 것이 있었느냐?” 라고 물으신 일이
있는데, 그때 제자들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루카 22,35).
부족함 없이 모든 것을 채워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으려면,
모든 것을 비워야 합니다.
마음으로나 몸으로나 ‘비어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은 “누군가가 너희에게 숙식을 제공하거든”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제자들을 먹이시는 방법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느님께서 제자들을 도와주실 때, 직접 도와주시거나 천사들을 보내서
도와주실 수도 있고, 마음 착한 사람들을 통해서 도와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 ‘마음 착한 사람들’이 천사입니다. 그들 자신들은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라는 말씀은, “더 좋은 대접을 받고 싶은
욕심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주는 대로 먹어라.)” 라는 뜻입니다.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 라는 말씀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경고하라는 지시입니다.
사실 ‘복음 선포’는 ‘심판 선포’를 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내린 이 모든 지시는,
제자들만 실천하면 되는 일이 아니라, 모든 신앙인이 실천해야 할 일들입니다.
모든 신앙인은 각자의 자리에서 한 사람의 선교사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9,1-6: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의 자세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그들에게 당신의 예언적 가르침과 치유 기적의 능력을 주신다. 즉 악한 영들과 질병들을 제압하는 권한을 주셔서 영광스럽게 하셨다. 이러한 권한은 그들에게 필요했다. 이러한 권능으로 사도들은 사람들을 신앙과 의화로 초대하여 구원과 생명으로 가는 길을 일러줄 수 있었다. 또한, 그 능력을 보고 사람들은 그들의 말씀을 믿을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무것도 지니고 가지 말라고 하신다. 이것은 제자들이 자기들이 먹을 양식마저도 걱정하지 않고 세상의 온갖 염려와 세상일에 대한 걱정으로부터 자유롭기를 바라신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일 외에 다른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들의 영광은 아무것도 지니지 않는 데 있다고 그분은 말씀하셨다. 복음을 전하는데 방해되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는 말씀이다.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양식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말라고 하심으로써, 제자들이 쓸데없는 염려로 마음이 산만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신다. “네 근심을 주님께 맡겨라. 그분께서 너를 붙들어 주시리라.”(시편 55, 23)라는 말씀대로 먹을 것 걱정을 하지 말라고 하신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마태 6,24)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21) 하셨다.
주님께서는 사도들을 돈도, 금이나 은도, 신발도 없이 보내신다. 선을 행하는 사람들이 칭송을 듣는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물건들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뛰어다니며 가져다주는 은총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 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저 발! 평화를 선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며 구원을 선포하는구나.”(이사 52,7) 우리의 발은 복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이 되어야 한다.
또 그렇게 돌아다닐 때 그들은 손님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풍습에서 나그네를 마치 ‘하느님의 천사’처럼 대했다. 즉 필요한 것, ‘먹고 자는 것’을 무료로 제공할 줄 알았으며,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을 섬기는 행위로 알았고 또한, 이를 통해 축복을 받았다. 이집 저집 옮겨 다니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음식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5절) 그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 곳에서 묻은 먼지는 하느님의 백성을 더럽히지 않고 하느님의 집에 더러운 것이 묻어 들어가지 않도록, ‘새 성전’으로 들어갈 때 그 먼지를 털어 버려야 한다.
뛰어나지도 않고 갖춘 것도 별로 없는 이 제자들을 통해 이제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정복하실 수 있다. 나 자신도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지만, 주님의 제자로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임을 감사하며 앞으로 나아가도록 하여야 한다.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었다.(루카 9, 6)
-한상우신부-
어디에서나
복음은
복음으로
아름답다.
복음은 뜨겁고
사랑은 아프다.
사랑의 상처와
함께 살아가는
우리들 삶이다.
상처에서
복음이
선포된다.
아픔은
하느님을
만나는
길이 된다.
아픔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상처로 삶을
치유하는
이들이 있다.
상처를
받아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성 비오 사제의
오상은 상처를
품는 사랑이었다.
상처의 주인은
주님이시다.
주님과 함께
아파하고
주님과 함께
피 흘리며
상처를 품는
것이다.
사랑하기에
상처가 있고
치유가 있다.
복음은
주님께 우리의
상처를 보여
드리는 것이다.
복음은
상처에
감사하는
것이다.
상처로 복음을
만드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상처를 대신
할 수 있는 것은
또한 상처였다.
살아있기에
상처와 치유가
있다.
상처가
있는 곳에
복음도 있다.

하느님 일에 내 돈, 내 힘 쓸 필요 없다
-김찬선신부-
오늘 주님께서 복음 선포를 위해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얘기는
공관 복음에 모두 나오는 얘기인데 마르코와 마태오 복음에는
없는 얘기가 오늘 루카 복음에는 나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
그러니까 파견하시면서 힘과 권한을 줘서 보내신다는 얘기인데
이어지는 말씀에서는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가라고 하십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가지고 가야 할 것과
가지고 가지 말아야 할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일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내가 맡긴 일을 어떻게든 네 힘으로 완수하라고 하시는
야박한 분이 아니시고 권한도 주시고 힘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어떤 책임이나 일이 맡겨질 때
그것을 내 힘과 내 능력으로 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일이 아니라 내 일로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처음 양성 책임을 맡게 될 때가 생각납니다.
불과 서른한 살에 공동체와 양성 책임을 모두 맡으라는 거였습니다.
공동체 원장이 되는 것만도 힘드는데 양성 책임까지 맡으라는 거였고,
제가 양성해야 할 형제들 중에는 저보다 나이가 더 많은 형제들도 있는데
그 책임을 맡으라고 하니 여간 걱정이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의 저는 그런 명령이 떨어지면 아뭇소리 않고 순종하지만
그때는 너무 걱정이 되어 한 달을 대답 못하고 고민하고 있는데
저의 선배 중 한 분이 제게 이 소임을 누가 주는 것이냐고 물으시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소임이라면 힘도 주실 거라고 충고하시는 거였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이 선출하든 관구장이 임명하든 어떤 일이 주어졌을 때
그것이 사람이 내게 주고 내가 그것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 일을 주신 거라고 믿는다면 그 일을 할
권한과 힘도 함께 주실 거라고 믿고 수락해야 하고,
더 나아가서 그 일을 할 때도 내 힘은 빼고 하느님 힘으로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복음선포를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선포를 돈으로 하려고 하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돈이 필요할 경우라도 그 돈을 내가 마련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마련하시게 맡겨드려야 합니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제 생각에 그것은 믿음의 가난입니다.
우리는 야훼 이레라는 말을 잘 압니다.
주님의 산에서는 주님께서 마련해주신다는 말로서
이사악이 제물이 없음을 걱정할 때 아버지 아브라함이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해주신다고 한 데서 비롯된 말이지요.
그런데 이 말을 알기는 잘 아는데 막상 이 믿음이 필요할 때가 닥치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믿습니까? 믿고 내가 마련하려는 짓을 멈춥니까?
내가 마련함으로써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해주시는 것을 막지 않습니까?
믿음의 가난이란 꼭 돈이 없는 것만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일을 할 때에는 내 돈, 내 힘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돈이건 힘이건 그 필요한 것을 하느님께서 마련해주심을 믿고
내가 마련하지 않는 그 모든 것을 일컫는 것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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