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9월 16일 연중 제24주간 수요일

Margaret K 2020. 9. 15. 06:08

2020 9 16일 연중 제24주간 수요일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고르넬리오 교황은 251년에 교황으로 뽑혀, 로마 박해 시대에 2년 동안의 짧은 교황직을 수행하면서 배교를 선언하였던 신자들을 용서하며 다시 교회로 받아들였다. 그는 이단을 거슬러 교회를 지키다가 유배되어 253년에 순교하였다.

치프리아노 주교는 고르넬리오 교황과 같은 시대의 목자로서 교황의 권위를 강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북아프리카 출신의 그는 늦은 나이에 개종하여 사제품을 받고 훗날 카르타고의 주교가 되었다. 치프리아노 주교는 박해 속에서도 고르넬리오 교황을 도와 교회의 재건에 힘쓰다가 258년에 순교하였다.

 

☆☆☆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32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루카 7,31-35)

 

 “To what shall I compare the people of this generation?
What are they like?
They are like children who sit

in the marketplace and call to one another,
‘We played the flute for you, but you did not dance.
We sang a dirge, but you did not weep.’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병규신부-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이들에게 신뢰를 가지기는 어렵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삶 속에 끊임없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수많은 사건과 사고들에 대한 판단과 식별도 그때그때 달라지고 뒤틀립니다. 고백하건대, 대개의 판단과 식별은 자신의 이익을 먼저 계산하는 이기심으로 그 순수성과 진정성이 퇴색해 가고는 합니다.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외침은 한결같았습니다. ‘태초부터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으로 초대하셨다. 그 구원은 모든 이가 화해와 용서 안에서 더불어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세상은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하고, 사랑하는 가운데 하느님께서 늘 함께 계실 것이다.’라고 요약되는 복음의 가르침은 이제껏 달라진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문제는 수많은 인간들의 다양한 해석에서 비롯합니다. 몇몇 해석들은 타락하여 이단이 되었고, 몇몇 해석들은 감히 근접하기 힘든 고도의 수련으로 뻗어 갔습니다. 모든 해석은 어느 정도 제 삶의 가치관과 이해관계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한 대답이 신앙을 해석하는 방식으로 드러날 때가 많습니다. 좋습니다. 어떤 해석이든 각자 삶의 자리에서 고유하게 다듬어 온 것이니 좋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자신의 고유한 관점에 대한 단단한 신뢰와 사랑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기에 앞서 자신이 가꾸어 온 삶을 사랑하는 것이 먼저여야 합니다. 저 자신을 믿지 못하는 이들은 세상의 흐름에 물결치듯 흔들리며 기회주의자로 전락하고 맙니다.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하는 단순함이 필요한 것이지요.

힘의 논리와 경제 논리 앞에 자기 삶의 가치관마저 포기하는 비굴함이 세상살이의 당연한 이치로 변질되고 신앙을 지키는 것이 교조주의적 계명 몇 가지를 실천하는 것으로 축소된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믿음과 사랑부터 회복해야 할 슬픈 시간을 살고 있는지 모를 일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자기 삶의 마지막 시간을 알고 있다면 어떨까요? 아마 계획을 세워 지켜나가며 그 마지막 날까지 최선을 다해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냥 열심히만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떤 분이 유골함에 담겨 갑곶성지 봉안당에 모셔지게 되었습니다. 안치 전, 그분의 배우자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고인이 생전에 얼마나 열심히 사셨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허망하게 암에 굴복해서 주님 곁으로 가셨다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기억하시는 배우자인 자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펑펑 우십니다.

“좀 놀다가 가지. 그렇게 힘들게 고생만 하다가 가셨어요. 불쌍해서 어떻게 해요?”

죽음 앞에서 사람들 모두 후회합니다. 살아온 인생에 대한 후회, 특히 사랑하지 않았음을 후회합니다. 결국, 자신의 인생을 후회 없이 사는 방법은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 특히 의미를 부여하면서 사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이라 불리는 이 시간, 무엇인가를 할 수 있을 때 그리고 아직 살아있을 때 사랑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주신 사랑이라는 메시지가 더욱더 중요하게 보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 사랑의 중요성을 오늘의 독서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1코린 13,1)

사랑이 없으면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을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엄청난 금욕 생활을 하는 세례자 요한을 보고서는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라고 말하면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해서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고 말하면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계획을 철저하게 거절하는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계획에 맞춰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계획을 제대로 따르지 않습니다. 사랑보다는 미움을, 용서보다는 다툼을, 함께 하기보다는 욕심으로 인해 혼자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하느님의 계획 자체를 알아채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계획을 알 수 있도록, 더욱더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가 되도록 합시다.
당신이 세상으로부터 받고 싶은 것을 세상에 주어라. 그것이 결국 당신이 받게 될 것이니까(게리 주커브).


이런 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 캅(John Cobb), 그리핀(David Griffin)과 같은 신학자들은 신이 다음과 같은 존재라면, 그런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1) 신이 도덕군자로서의 엄한 심판자이기만 하다면, 그런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2) 신이 세상의 고통과 비극에 무감각한 절대자라면, 그런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3) 신이 인간을 인형처럼 조종하고 자유를 박탈하는 통제자라면, 그런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4) 신이 부조리한 현실을 옹호하고 묵인하는 존재라면, 그런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5) 신이 여성을 비하하는 남성성을 가졌다면, 그런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혹시 이런 하느님으로 생각하고 또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요?

어리석음의 자녀와 지혜의 자녀

-전삼용신부-

 

 ‘마리아 발토르타’의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는 제가 사제가 될 마음이 전혀 없었을 때 읽기 시작해 마칠 때쯤엔 사제가 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해 준 책입니다.

   그런데 신학교 들어갔더니 이 책은 거의 금서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놓고 읽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전에 이불 속에서 랜턴을 비추며 몰래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유학을 가보니 로마에서 바티칸 방송국에서 어떤 사제가 이 책을 해설해주는 프로그램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때는 금서였지만 지금은 바티칸 방송국에서도 해설해주는 책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한때 금서였다는 이유로 많은 분이 책 이름만 듣고 그것을 읽는 사람들을 안 좋은 눈으로 바라보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저는 좀 지나친 듯 보이나 그런 분들이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람들과 비슷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우리는 좋은 책과 나쁜 책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좋은 가르침과 나쁜 가르침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열매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열매가 그리스도께서 맺어주시려는 것과 같다면 그 책은 좋은 책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 지혜와 좋은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분별력이 없었고 지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고집불통이었습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제가 이 책을 읽기 전에는 행복의 기준이 ‘돈과 여자와 성공’이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사제가 될 생각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다 읽고 났더니 그런 것들은 행복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의 원인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열매가 지혜의 기준이라 생각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지 않은 것은 구약의 ‘광야’의 삶을 의미합니다. 광야의 삶이란 ‘돈과 여자와 성공’을 떠나는 삶입니다. ‘파라오’를 떠나는 삶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먹고 마신 빵과 포도주는 바로 그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먹고 마신 천상의 ‘양식과 음료’입니다. 광야에서 먹고 마실 것이 없다면 파라오가 제시하는 세속-육신-마귀를 벗어나는 삶은 살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파라오라는 자아를 떠나 삼구를 죽이는 광야의 삶을 당신이 주시는 살과 피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음이 곧 ‘지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

   파라오가 나를 괴롭히는 뱀과 같은 자아임을 깨닫고 그를 떠나 광야로 나오게 하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의 삶을 사는 모든 이들은 지혜의 자녀들입니다.

​   그리고 그 길로 이끄는 모든 것은 지혜를 전달하는 도구입니다. 주님은 그런 여러 도구를 통해 지혜의 자녀를 탄생시키려 하지만 어떤 이들은 귀와 눈을 막고 무조건 안 된다고 말하기만 합니다.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서 부분적인 기억력을 상실한 두 대비되는 환자가 나옵니다. 이 환자들은 어느 시간 이후의 기억이 모조리 삭제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기억도 1분만 지나면 다 사라집니다. 과거의 짧은 기억만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삶은 매우 달랐습니다.

   한 사람은 40대 중반이지만 딱 군대 있을 때까지만 기억합니다. 그러니 쾌활하고 젊었을 때의 삶을 계속 즐기는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은 그때 신앙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도 미사에 참례합니다. 기억이 20대 초반에 머물러있지만, 자기중심이 명확히 잡혀 있습니다. 올리버 색스는 그 사람 안에는 영혼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또 한 사람은 기억이 사라져 버린 것을 사람들이 알아채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자아가 살아있는 것입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자기를 식료품 주인으로 여기며 “어떤 치즈를 드릴까요?”라고 말하고 끊임없는 말을 해 댑니다. 아니면 가상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냅니다. 물론 혼자 있을 때는 잠잠해집니다. 올리버 색스는 이 사람 안에는 영혼이 없는 듯이 보인다고 말합니다.

   두 사람 다 기억력이 소멸하였지만 한 사람은 주님을 주인으로 따르는 삶을 살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을 주인으로 삼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주님을 주인으로 삼으니 정체성이 명확하고 한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자아의 희생양이 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지혜의 자녀이고 한 사람은 어리석음의 자녀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카라바지오는 천재 화가였습니다. 그러나 자아에 지배당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술을 마시고 싸우기 일쑤였습니다. 이때마다 추기경은 그를 감옥에서 빼내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추기경이 그렇게 하는 것이 자기 재능 때문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한 번은 여자 때문에 싸우다가 살인까지 하게 됩니다. 추기경은 더는 그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머지 인생을 나폴리와 말타섬에서 도망자로 살았습니다.

 

   그러다 후회하며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골리앗의 머리를 손으로 들고 있는 유명한 그림을 그립니다. 자신 안의 자아인 골리앗을 이제 죽였다는 뜻으로 추기경에게 용서를 빌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칼에는 “겸손이 교만을 죽인다”는 글을 새겨넣었습니다. 참 행복이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자아인 골리앗의 머리를 자르는 것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 그림을 추기경에게 전해주지 못하고 죽습니다.

   어쨌든 그는 어리석음의 자녀에서 지혜의 자녀로 넘어오게 된 것입니다. 참 지혜는 교만한 자아를 죽이고 겸손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 행복임을 아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우리를 파라오로부터 탈출시켜 광야로 이끌려고 하고 예수님은 우리의 주인이 되려 하십니다.

 

​   이와 같은 가르침을 주는 모든 것들은 지혜의 자녀가 탄생하게 하는 도구들입니다. 하지만 자아를 키우는 것들은 모두 악에서 오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어리석음의 자녀가 아니라 지혜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사랑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양승국신부-

인류 역사상 사랑을 주제로 한 수많은 문학 작품들 가운데, 가장 탁월한 작품으로 손꼽히는 바오로의 ‘사랑의 찬가’는, 묵상할 때 마다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천번 만번 들어도 싫증이 나지 않습니다. 마치 천상에 계신 바오로 사도께서 직접 들려주시는 은혜로운 느낌이 드는 것은 비단 저뿐만이 아니겠지요.

오랜 인류 역사 안에서 한 문장 한다는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사랑을 주제로 노래했습니다. 시나 소설, 연극이나 영화의 빼놓을 수 없는 주된 단골 주제가 사랑입니다. 그런데 사랑을 주제로 한 그 수많은 작품들 가운데 가장 으뜸가는 수작이 곧 바오로 사도가 지은 사랑의 찬가입니다. 

사랑의 찬가는 예수님께서 선물로 주신 사랑의 계명 ‘서로 사랑하라.’를 구체화시킨 불멸의 명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눈만 뜨면 사랑을 외치지만, 그 정확한 실체, 구체적인 의미도 잘 모르면서 외치고 있는 우리를 위해, 바오로 사도는 아주 친절하고 정확하게 의미를 안내해주고 있습니다. 

오늘도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불멸의 선물, 사랑의 찬가를 선물로 건네십니다. 진실된 사랑을 실천해야 하겠는데, 때로 그 정확한 의미도 모르는 우리, 때로 인간적 한계에 부딪쳐 포기하는 우리에게 바오로 사도는 사랑의 찬가를 통해‘이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사랑입니다!’라고 격려하십니다. 

사랑의 찬가의 핵심 본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1코린토 12장 4~7절)

 바오로 사도는 지극히 짧은 문장의 나열을 통해 사랑의 속성을 소개하고 있는데, 유심히 읽다보면 문장들은 크게 두 부류로 구분됩니다. 긍정문(~합니다)과 부정문(~하지 않습니다)으로 분류됩니다. 헤아려보니 긍정문도 있지만, 부정문의 수효가 8개로 더 많습니다. 

거센 강물의 흐름을 거슬러 헤엄치려면 강력한 힘이 필요합니다. 막 태동된 코린토 교회를 바라보며 바오로 사도는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코린토 교우들의 개과천선과 새로운 삶을 위해 더 많은 자극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런 연유로 ‘사랑은 ~하지 않습니다!’라고 목청 높여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리스 문화권에 소속되어 있던 코린토는 우상 숭배로 유명한 도시였습니다. 하나의 악은 또 다른 악을 불러옵니다. 코린토 사람들의 우상숭배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도시 전체가 집단적으로 타락했고, 코린토는 문란하고 퇴폐적인 도시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런 배경 속에 태동된 코린토 교회 교우들을 향해 사랑의 찬가를 집필하셨고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 사랑은 세상의 사랑과는 철저히 구별됩니다. 그 사랑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고갈되지 않습니다. 영원 불멸의 사랑입니다. 

코린토 교회를 향한 바오로 사도의 간절한 호소는 바로 오늘 우리를 향한 호소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는 진실된 사랑을 얻기 위해 얼마나 스스로를 다스리고 자제하고 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영원한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얼마나 집중하고 헌신하고 있는지 성찰해보면 좋겠습니다.

어깃장을 놓지 마라

-반영억신부-

 

“제 눈에 안경이라” 는 옛말이 있습니다. 남은 우습게 보는 것도 마음에 들면 좋게 여겨진다는 뜻입니다. 물론 자기는 좋게 생각하는데 남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 다른 모습을 인정하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자기중심으로 사는 고집이 살아 움직일 때가 있어 걱정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가장 나쁜 노예근성 중 하나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집 센 어린이들의 비유를 들으면서 남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루카7,32).는 얘기는 고집을 피우면서 상대편을 그냥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피리를 부니까 장례식 놀이를 하고, 장례식 놀이를 하려고 하니까 결혼식 놀이를 하며 피리를 부는 것은 어깃장을 놓는 행위입니다. 사실 ‘제가 하는 일에 장단을 맞춰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비딱 선을 탄 고집불통의 어린이들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남이 잘되면 축하해 주고 어려움에 처하면 같이 아파하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남이 잘되면 배가 아프고 시기 질투의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잘못되면 고소해하고 그 기회를 이용하여 나의 잇속을 챙깁니다. 그리고는 사람들로부터 현명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습니다. 세상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해 버립니다. 실은 내가 그러기 때문에 세상이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데 세상을 탓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세상을 예수님의 눈으로 본다면 있는 그대로의 모습대로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눈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은 우리를 구원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너무 금욕적이라고 하여 미쳤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거룩하지도 않고 세리들이나 죄인들과 어울리는 세속적인 사람이라고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각자의 잣대를 가지고 판단하고 비판하며 자기 구미에 맞는 메시아, 구세주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작 그분께서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요한1,11). 그러나 구원의 길은 자기 자신을 버리고 하느님께로 마음을 돌리는 데 있습니다. 완고한 마음을 버리지 않는 한 구원의 길은 멀고도 멉니다.

아무리 은총이 크다 하더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은 담지 못하고 준비된 사람에게서는 하느님의 지혜가 빛나게 됩니다. 지혜서를 보면 “지혜를 찾으러 일찍 일어나는 이는 수고할 필요도 없이 자기 집 문간에 앉아 있는 지혜를 발견하게 된다. 지혜를 깊이 생각하는 것 자체가 완전한 예지다”(지혜6,14-15).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득 차 있는 그릇에는 아무것도 담지 못하는 법입니다. 그릇을 비울 수 있는 지혜를 얻어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을 기꺼이 누리시기 바랍니다. “지혜로운 사람의 눈은 머리이신 그리스도님께 고정되어 있습니다. 빛 속에 거니는 사람이 어둠을 전혀 볼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님께 시선을 고정시킨 사람은 시선을 헛된 것에 둘 수 없습니다”(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하느님은 내가 장악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나 자신을 봉헌해야 할 분입니다.” 나의 법을 내세우지 않고, 하느님의 법을 내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정채봉 @@

진자와 가짜
진짜 사랑의 주머니 속에는 꿈이 들어 있고
가짜 사랑의 주머니 속에는 욕심이 들어있다

장애물 경주
장애물 경주와 같은 것
출발보다 도착이 중요한 것
사랑의 경주

예수님의 복음 선포와 생활 방식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과 일하시는 방식은 하나로 일치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을 보면 예수님의 복음이 무엇인지 알 수 있고,
또 예수님의 복음을 알고 있고, 믿고 있으면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를(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어울려서 식사를 하신 일들이 좋은 예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그 일들에 대해서,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루카 5,30).
그런 비난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31-32).”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사람들과 어울려서 하신 식사는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죄인을 회개시켜서 구원하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한 초대라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또 예수님께 이렇게 충고한 형제들(친척들)도 있었습니다.
“이곳을 떠나 유다로 가서, 하시는 일들을 제자들도 보게 하십시오.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면서 남몰래 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런 일들을 할 바에는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십시오(요한 7,3-4).”
요한복음서 저자는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은 사람들이었다고
기록했습니다(요한 7,5).
믿음 없는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세속의 명예를 추구하면서도
어떻게 해야 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바보로 보였던 것 같습니다.
(그들의 충고가 선의에서 나온 것이라고 해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 없이,
세속의 방식으로 일하라고 충고한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의 방식으로만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은 바로 하느님의 방식입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루카 7,33-34).”

세례자 요한의 ‘삶의 방식’은 그의 ‘회개 선포’와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는 말로만 회개를 선포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으로도 회개를 선포했다는 것입니다.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는 세례자 요한의 엄격한 극기고행은
삶으로 회개를 선포한 일인데, 회개하기를 싫어한(거부한) 사람들은
그의 그런 ‘삶의 방식’에 대해서 시비를 걸었습니다.
여기서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라는 말은, “저자는 미쳤다.” 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는 외면하고, 또 그가 왜 그렇게 살고 있는지는
생각하지 않고, 자기들과는 다르게 살고 있다는 것을 싫어했고,
정상적인 삶이 아니라고 비난했고, 미쳤다고 비웃었습니다.

(“미친 사람의 말이니 들을 필요가 없다.”가 그 사람들의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일상적인 생활 모습’은 세례자 요한과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식사 초대를 기꺼이 받아들이셨고,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사람들과 자주 어울렸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극기고행을 하지 않는 것을 보니 예언자가 아니다.”,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보니 죄인이다.” 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죄인들과 어울리는 죄인이 하는 말은 들을 필요가 없다.” 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하고, 예수님의 복음을 배척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극기고행을 하는 생활을 하지 않으시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생활을 하신 것은 ‘구원의 복음’을 나타내는 생활 방식입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고,
‘기쁜 소식’은 전하는 사람에게도 전해 듣는 사람에게도 기쁨을 주는 소식입니다.
예수님의 생활 방식은 바로 그 기쁨을 나타냅니다.)
회개도 싫고 복음도 싫다는 것은 구원받기 싫다는 것이고,
스스로 멸망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루카 7,31-32)”

이 말씀은 회개하는 것도 싫어하고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도
싫어하는 사람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 하니, 제3의 방법은 없는가?” 라고 물을 수도
있는데, 사람들의 비위에 맞추려고 제3의 방법을 찾는 것 자체가 잘못된 일입니다.
만일에 세례자 요한이 극기고행을 하지 않고 예수님처럼 사람들과 어울렸다면,
그러면서도 회개를 선포했다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사람들은 바로 그런 생활 모습을 문제 삼으면서
그의 회개 선포를 거부했을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세례자 요한처럼
광야에서 극기고행을 하면서 찾아오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복음을 선포했다면?
그러면 사람들은 ‘복음’을 ‘기쁜 소식’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자주 ‘혼인잔치’로 표현하셨는데,
혼인잔치는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기쁨의 잔치’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도, 예수님의 복음 선포도,
사람들의 입맛에 맞춘 선포가 아니라, 사람들의 구원에 필요한 선포입니다.
마찬가지로 요한의 생활 방식도, 예수님의 생활 방식도,
사람들의 비위에 맞춘 방식이 아니라,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방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생활 방식을 비난하기 전에
먼저 자신들의 삶을 회개했어야 합니다.
(오늘날에도 신앙생활을 자기 입맛대로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올바른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의 기준은 항상 예수님입니다.
즉 예수님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삶입니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루카 7,35).”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믿고 회개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복음 선포가,
또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가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렇게 살면서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복음이 진리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조욱현신부-

 

복음루카 7,31-35: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혼인놀이와 장례놀이를 들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당시의 바리사이파 사람들율법학자들사두가이들원로들은 요한의 가르침도 예수님의 기적도 믿지 않았을 뿐 아니라사람들이 그들을 따라다니지도 못하게 하였기 때문에 하셨다이들을 두고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31하신다.

 

그러므로 그들은 춤추고 피리를 불며 혼인놀이를 하자고 해도 고집을 부리고 있고반대로 곡을 하면서 장례놀이를 하자고 해도 꼼짝없이 서 있는 아이들에 비유해서 말씀하고 계신다즉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하고 너희는 말한다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33-34). 이런 사람들의 욕구를 어떻게 만족시킬 수 있을까?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35지혜의 자녀들이란 의인들을 말한다(집회 4,11 참조). 우리는 참으로 지혜의 자녀들인가혹시나 우리 자신이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이 가졌던 사고판단고집스러운 비판의 자세는 아닌지 모르겠다우리는 모두 하느님을 알고 그분의 뜻대로 산다고 하면서도 하느님의 진정한 뜻은 모른 채 자기 생각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만일에 그렇다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면서도 십자가를 외면하는 베드로 사도의 모습이 우리에게서 드러나지 않을까 생각해볼 수 있다(마르 8,29-33 참조). 이것이 하느님의 계획을 우리 마음대로 바꾸어보려는 자세일 수 있으며그 때문에 구원의 은총을 거부하는 결과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순간에 내가 이루어야 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여 고집스럽게 서 있는 아이들과 같은 것이 아니라즉시 따르는 그러한 삶이 되어야 한다우리 인간은 하느님 안에서만이 진정 풍요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진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인간은 그를 위해 자신의 자유의지를 사용하여야 할 것이다그 자유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도 거부할 수도 있지만 받아들이는 한에서 자유롭고 지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에게 구원을 주시려고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시지만그것은 인간이 받아들여야 할 준비가 있어야 한다인간은 어떤 면에서 자신의 원의대로 하느님의 계획을 이루고 싶어 하므로구원의 은총을 받아들이지 못하고결과적으로 거부하기도 한다이것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주의에서 연유되기도 한다그러기에 회개는 이러한 이기적인 자신에게서 벗어나 하느님께로 하느님의 뜻으로 향하는 데 있다회개는 우리의 삶의 모든 순간에 드러나야 한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본질을 보라고 촉구하십니다.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루카 7,31)

예수님께서 탄식하듯 물으십니다. 계속 엇박자만 고집하는 장터 아이들의 시끄러운 놀이를 언급하십니다. 안타까움이 잔뜩 묻어나는 음성이지요. 그런데 이천 년 전 세대나 지금 세대나 이 양상이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합니다.

"빵을 먹지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 않자"(루카 7,33)

세례자 요한은 광야의 철저한 금욕자로, 또 앞으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예언자의 모습으로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그만의 독특한 양식이라기보다 이스라엘 역사 안에 무수히 족적이 찍힌 수많은 예언자들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을 바라보는 종교 기득권층의 눈초리는 곱지 않습니다. 자신들 계보나 교설과 맥을 같이하지 않는다고 보여서일까요? 일부는 요르단 강으로 요한을 찾아와서 세례를 청하기도 했지만, "독사의 자식들"라는 비판 어린 독설까지 들어야 했지요
(마태 3,7-12 참조). 어쩌면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의 도래를 알리는 요한의 외침이, 자신들이 소유한 공고한 종교 카르텔에 위협이 된다고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루카 7,34)

이번에는 예수님을 향한 비난입니다. 요한의 금욕을 조롱하던 이들이 이번에는 일반인들과 함께하는 모습에 제동을 겁니다. 군중과 똑같이 먹고 마시며 가난한 이들, 곧 율법과 권력과 자본이 소외시킨 이들 곁에 스스럼없이 머무르시는 예수님이 불편한 겁니다.

아무래도 당시 종교 기득권층이라 할 수 있는 바리사이, 율법 학자, 수석사제와 원로, 최고의회 의원들은 하느님의 때가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이 이래도 싫고 저래도 싫은 모양입니다. 진리와 공동선을 위해 지혜를 모으기보다, 사사건건 반대를 위한 반대에 혈안이 되어 있는 모습이 안타까움을 자아내지요. 그래서 장터에서 악다구니를 쓰는 철부지, 고집쟁이 아이들과 다를 바가 무엇인지 예수님께서 묻고 계십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가장 중요한 본질을 밝힙니다.

"사랑이 없으면 ... 아무것도 아닙니다."(1코린 13,2)

사랑은 우리가 구해야 할 "더 큰 은사"이고 우리가 들어서야 할 "더욱 뛰어난 길"입니다. 우리 모두가 뛰어든 이 신앙생활의 정수라고 할 수 있지요. 각자 하느님에게서 받은 능력과 재물과 지혜로 많은 일을 할 수 있겠지만, 그 중심에 "사랑"이 없으면 그저 자기 영광을 위한 세속 활동일 뿐, 하느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이 유명한 코린토1서의 '사랑의 찬가'는 다른 부연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그저 반복해 읽고 듣고 새기는 것만으로 성찰과 감사와 깨달음을 일으키는 아름다운 말씀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지닌 각자의 부족함 때문에 우리는 사랑 앞에서 한없이 초라해지고 작아지곤 합니다. 그래도 희망이 없지 않습니다.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 그때에는 ...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1코린 13,12)

이는 부족한 사랑을 품은 채, 휘청대고 넘어지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부단히 사랑의 길을 걷는 이에게 주시는 엄청난 선물입니다. 그리움에 가득차 관상하던 주님의 얼굴을 마주 뵙는 지복직관, 그리고 그분께서 나를 아시듯 나도 그분을 알게 되고, 그분께서 나를 사랑하시듯 그분을 사랑하게 되는 영원한 행복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이, 본질을 붙잡은 이는 굶거나 먹고 마시거나, 임금의 벗이거나 죄인의 벗이거나, 가난하거나 부유하거나 그닥 중요하지 않습니다. 먹지도 마시지도 않던 세례자 요한도 사랑이고, 먹보요 술꾼에 세리, 죄인들과 어울리는 예수님도 사랑이십니다 모든 사고와 지향과 의지를 지배하는 사랑이 중요할 뿐이지요.

굳은 마음들은 그 사랑을 못 알아봅니다. 그리고 사랑에 무모히 저항할 것이고요. 안타깝게도 사랑은 애써 외면하는 이에게 가려져 있어, 얼굴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니, 사랑을 중심에 품은 이가 바로 하느님을 모신 이, 하느님과 하나된 이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도 부족하나마 애써, 힘껏 사랑의 길을 걷고 있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주님의 얼굴을 마주 뵙고, 그분을 온전히 알게 되어 전율할 그날, 우리는 하느님 얼굴에서 서로를 발견하며 또다시 전율할 것입니다. 이 험한 세상 속에서 말씀의 길벗이 되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나의 사랑의 역사  

-김찬선신부-

 

그 옛날 제가 소신학교에 가 있는 관계로 오랜만에 만난 저의 고향친구가

오늘 우리가 들은 코린토 서간의 사랑찬가를 줄줄이 외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너무 기쁜 나머지 '너 세례 받았니?'라고 물으니 세례는 받지
않았지만 이 내용이 너무도 좋아서 자기가 외우고 있노라는 거였습니다.

이토록 신자가 아닌 사람까지도 좋아하고 저 역시 좋아하는 말씀인데도
저를 돌아보니 이 말씀을 제가 직면하기보다 피해왔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왜 그랬을까 성찰해보니 거울이 우리 모습을 그대로 비추듯
이 사랑의 찬가가 저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 두려워 피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여전히 두렵지만 저의 사랑의 역사를
오늘 서간의 말씀에 비추어 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옛날에 저는 사춘기 때 잠깐 이성에 대한 사랑을 동경한 적이 있지만
그때 이후로 보편적인 이웃 사랑 그러니까 모두를 사랑하겠다는 열정이
컸고 그래서 저는 일찌감치 결혼을 포기하고 수도 생활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일 겁니다. 제 사랑 역사의 시작은 저의 이 사랑의 열정만 믿고
마구 사랑한 시기, 더 심하게 얘기하면 사랑의 횡포를 부렸던 시기였지요.

그런데 사랑의 횡포라니요? 사랑에도 횡포가 있습니까?
예, 그것은 제가 사랑을 한다고 생각하고, 분명 사랑도 했지만
저의 사랑이 상대에게도 사랑이 아니었기 때문이고, 그런데도
사랑했는데 왜 사랑이 사랑으로 받아 들여지지 않느냐고 하며 
사랑이 받아 들여질 때까지 참지 못하고 성을 내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저의 경우,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저의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저의 교만 때문에 저의 사랑에 대한 성찰을 겸허하게 하지 않았고,
겸허하지 않았기에 참을 수 없었고 성을 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바오로 사도는 어떻게 얘기합니까?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은 제가 수련 들어가기 전,
프란치스칸 이상대로 살고 싶은 열망이 너무도 커서
기회만 되면 우리의 가난이랄까 형제애를 부르짖곤 했는데
언제부턴지 사람들이 슬슬 저를 피하여 제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거였습니다.

너무 이상주의적인 제가 너무 이상주의적으로 우리의 이상을 부르짖으니,
그것도 저는 이상을 잘 실천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는 식으로
교만하게 얘기하니 그런 제가 싫거나 적어도 부담스러웠던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고 난 뒤 저는 아무 소리 않고 저만 열심히 이상을 실천하니
수련이 끝나갈 무렵에는 사람들이 제 옆에 모이기 시작하고 농담반진담반
수련을 제일 잘 받은 사람, 제일 많이 변한 사람은 저라고 하는 거였습니다.v
그런데 이 말이 칭찬하는 것 같지만 실은 바뀌기 전의 제가
얼마나 형편없고 교만한 사람이었는지를 말하는 것이었지요.

교만은 죄의 뿌리라고 하는 칠죄종七罪宗 중에서도 제일 나쁜 죄이고,
수덕신학에서는 겸손이 모든 덕의 기초라고 하는 것을 감안할 때
교만은 모든 덕의 기초를 허무는 것이요, 이 교만을 없애지 않고는
어떤 덕도 지닐 수 없고 애덕도 마찬가지로 실천할 수 없게 하겠지요.

교만은 자기중심적이기에 근본적으로 사랑과 반대되고,
그래서 사랑을 할지라도 저처럼 그에게 사랑이 되는 사랑을 하지 않고,
내가 생각하는 사랑을 내식대로 마구 하고는 사랑을 했다고 할 것입니다.

어제는 나이든 성소자를 만났습니다.
아침에 우리 막내에게 나이든 성소자를 만날 거라고 했더니 출근을 하며
선입관 가지지 말고 만나라고 충고를 하는 거였고 저도 그러마 답했지요.

옛날같으면 우리 이상에 미치지 못하는 성소자를 가차없이 쳐냈겠지만
요즘은 제게 오는 사람들이 다 소중한데 제가 조금은 겸손해진 모양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9월 19일 연중 제24주간 수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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