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7일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라고 하였느냐?
악한 일을 하라고 하였느냐?
사람을 살리라고 하였느냐?
죽이라고 하였느냐?
(루가 6,6-11)
“I ask you,
is it lawful to do good on the sabbath
rather than to do evil,
to save life rather than to destroy i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병규신부-
손을 움켜쥐었다 다시 펼쳐 봅니다. 몇 번이고 움켜쥐고 펼쳐 보고, 그러다 잠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손등을 찬찬히 살펴봅니다. “고생했다, 고생했다 ……. 지금껏 살아온 것만으로도 참 고생했다.”라며 스스로를 토닥여 봅니다.
얼마나 많이 쥐려고 애를 태웠을까요. 얼마나 내려놓으려 참고 또 참았을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더 이상 숨지 마라, 더 이상 기죽지 마라, 그리고 더 이상 너를 다그치지 마라. 그리고 또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
얼마나 우리 자신을 인생의 중심에 선보인 적이 있을까 싶어요. 누구 의 아빠,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들 또는 딸로서 인생의 대부분을 그냥 그렇게 흘려보내고, 정작 무엇인가 움켜쥐었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한 허망한 손 하나만 남은 것은 아닐까요.
안식일에 합당한 일은 제 이름과 모습을 잃어버린 채 살아온 삶에 대한 보상입니다. 그 일은 우리 각자가 먼저 해 나가야 할 일이기도 하지요. ‘손을 뻗어야 하는 일’, 적어도 그 일을 먼저 하여야만 예수님께서 우리 삶 곳곳에 기적을 베풀어 주십니다.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없애려 모여드는 이들은 여전히 손을 꼭 움켜쥡니다.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겠다고 우기듯 손가락 마디마디에 힘을 줍니다. 그렇게 그들은 스스로를 잃어 갑니다. 무엇을 쥐고 있는지, 도대체 왜 쥐고 있는지 모른 채 그들은 하느님을 고백하며 하느님을 죽일 것입니다. 저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며 말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이렇게 생활한 지가 벌써 20년입니다. 그러다 보니 남들은 어떻게 이렇게 시간 맞춰서 사냐고 하지만, 저에게는 시간을 맞추지 않게 되면 너무나 힘듭니다.
한 번은 친한 친구가 밤 9시에 만나자고 연락을 했습니다. 곧 잠을 자야 하는데, 벌써 졸음이 밀려오고 있는데 만나자고 하니까 화가 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친구의 목소리가 이상합니다. ‘무슨 문제가 있나?’ 싶었고, 직접 만나서 친구의 고민을 들으면서 함께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안 만났으면 큰일이 날 뻔했다 싶을 정도로 중요한 만남이었습니다.
만약, “나는 이 시간에는 무조건 자야 해. 다른 시간에 만나자.”라고 했다면 어떠했을까요? 제가 20년째 지키고 있는 원칙이지만, 사랑이 먼저입니다. 사랑의 원칙이 먼저이기 때문에 제 개인적인 원칙은 얼마든지 깨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안식일 논쟁입니다.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려는 예수님을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있다면서 고발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세운 원칙에 벗어나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악의적 해석을 꾸짖으십니다. 그래서 물으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율법이라는 원칙도 사랑의 원칙 앞에서는 고개를 숙여야만 했습니다. 사랑의 원칙이 항상 맨 윗자리를 차지해야 하고, 이 원칙을 따르는 데 최선을 다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고발하려는 바리아시들이 이 사실을 몰랐을까요? 아닙니다. 그들 역시 이 사랑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율법 자체만을 바라보려다 보니 사랑은 잊어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원칙은 무엇입니까? 그 원칙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사랑의 원칙이 실천되지 않는 원칙이라면 좋은 원칙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랑의 원칙을 항상 가장 윗자리에 놓아야 합니다.


옛날에 어떤 책에서 읽은 구절 하나가 생각납니다.
‘인생을 사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많이 벌어 많이 쓰는 삶, 적게 벌어 적게 쓰는 삶.’
어떤 삶이 편할까요? 당연히 적게 벌어 적게 쓰는 삶이 편할 것입니다. 나의 모든 불편은 많이 소유하는 데서 나옵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사는 삶은 불편이 아닌 또 다른 자유를 줍니다.
제 차는 경유차로, 내년이면 노후 경유차로 분류가 되어서 도심지에 들어갈 때는 운행제한을 받게 됩니다.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차를 알아보는데, 차 종류가 너무 많아서 어떻게 선택해야 할지를 모르겠더군요. 결국 “그냥 탄다.”라고 결론을 냈습니다. 선택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더군다나 아직 1년이 남았으니까요.
무엇을 하나 소유하려 할 때도 따지고 생각할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소유하지 않으면 그만큼 생각할 것이 줄어드는 편안한 삶이 됩니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많이 벌어 많이 쓰는 삶, 아니면 적게 벌어 적게 쓰는 삶. 당연히 후자인데도 자꾸만 전자에 눈이 가지 않나요? 우리의 욕심을 벗어던지기란 이렇게 힘듭니다.

나를 통제하려는 사람들의 심리
-전삼용신부-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이 자존감이 낮은지, 높은지 쉽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녀나 직장에서 책임자의 위치에 섰을 때는 그것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사람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고 방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마치 나무 분재를 하듯 사람들을 통제하기를 좋아합니다. 이들은 아주 작은 일에까지 간섭하지 않으면 마음을 놓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꼭 필요한 사람임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 앞에서 통제를 당하는 사람으로서는 자존감을 상실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누구에게도 통제받지 않습니다.
『나는 자주 죽고 싶었고, 가끔 정말 살고 싶었다』의 저자 아른힐 레우뱅은 끊임없이 통제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끼기 때문에 누구에게라도 통제되어야 살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통제권을 자기 내면의 폭군이자 자아인 ‘선장’에게 내맡겼습니다. 통제권을 상실한 아른힐은 선장이 시키는 대로 밥 대신 벽지를 뜯어먹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선장은 “내가 없었으면 어쩔 뻔 했니?”라고 다독입니다. 이렇게 벽지라도 뜯어먹으며 배를 채우게 한 선장은 으쓱해집니다.
그런데 선장과 같이 자신을 통제하려는 사람이 주위에 너무 많았습니다. 자주 자해를 하는 덕에 아른힐은 정신병원에서 1년 동안 햇빛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독방에 갇혀 있거나 지독한 통제를 받아야 했습니다. 자기 자유의지로 할 수 있었던 것은 자해하는 것과 약을 거부하는 것뿐이었습니다. 물론 자해할 수 있는 어떤 물건도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른힐은 마지막 남은 통제권인 약을 먹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때마다 간호사들은 그의 목을 누르고 주사를 놓았습니다. 매우 아프기도 했지만 그 굴욕감이 더 아팠습니다. 그래도 마지막 남은 자신의 선택권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른힐이 조금씩 치유되기 시작한 때는 자신의 자유를 존중해주는 사람을 한 명, 두 명 만나면서부터입니다. 한 번은 경찰 두 명과 여섯 명의 간호사가 아른힐을 붙잡고 병실로 옮겼습니다. 아른힐은 아이 한 명에 어른 여덟 명은 좀 비겁한 것 아니냐고 따졌습니다. 그때의 의사는 아른힐을 풀어주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여덟 명의 어른들은 아른힐이 또 자해할까 봐 놓아주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사흘 동안 세 번의 자살 시도를 했으니 그럴 만도 했습니다. 하지만 의사는 아른힐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어른들이 미안하다고 사과하였습니다. 이렇게 느낀 자유는 아른힐에게 조금 더 살아도 되겠다는 희망을 주었습니다.
또 어떤 간호사는 아른힐과 함께 산책을 해 주었습니다. 보통은 간호사가 아른힐의 손을 묶고 그 줄을 자신에게 묶어서 함께 산책하러 다녔습니다. 사람들이 그런 모습을 볼 때는 굴욕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간호사는 자해할 수도 있고 도망칠 수도 있는 자신을 믿어주었습니다. 줄도 풀어주었고 걸으면 함께 걷고 뛰면 잡지 않고 옆에서 함께 뛰어주었습니다. 그 간호사 앞에서는 자해하지도 않고 도망치지도 않았습니다.
병원에는 유리나 사기로 된 접시나 잔이 없습니다. 그것을 깨서 자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랜만에 어머니 집에 갔을 때, 어머니는 “넌 내 딸이다. 난 너를 믿는다”라고 하며 가장 귀한 사기로 만든 잔에 커피를 주었습니다. 물론 아른힐은 그렇게 믿어주는 대로 행동했습니다. 며칠 전 사람들이 실험한답시고 유리잔에 커피를 따라주어 아른힐이 그들의 믿음대로 그것을 깨서 자해했던 것과는 아주 다른 반응이었습니다.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나에게 자유를 줍니다. 그 자유가 나의 자존감이 됩니다.
이렇게 아른힐은 수많은 자살 시도가 성공하지 못한 덕분으로 자기를 믿어주는 몇몇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힘이 되어 불가능하다고만 했던 조현병을 이겼고, 공부를 하여 심리학 교수가 됩니다.
자유는 인간의 존엄성 중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자유를 빼앗기면 존엄성이 빼앗깁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남을 통제하면서 자신들이 유용하고 꼭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과시하려 합니다. 자신의 열등감을 남을 통제하며 극복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통제되는 사람들은 점점 자기가 존중받을 사람임을 잊어갑니다. 믿으면 자유를 주어야 합니다. 그 자유가 자존감을 만듭니다.
오늘 복음에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통제에서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통제를 받아야만 하는 인간이 되어버린 불쌍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를 통제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당신이 통제받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안식일 법으로 예수님을 통제하려고 하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물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율법으로 무조건 통제만 해 왔던 이들은 무엇이 옳은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하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자유로운 사람만이 또 누군가를 자유롭게 해 줍니다. 예수님은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 서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가 자신의 주인이 되라는 뜻입니다. 나를 통제하려는 사람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자유를 주는 분을 따를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는 주체는 나 자신입니다. 예수님은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은 그래야만 한다고 믿는 이들 가운데서 그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손을 뻗습니다.
우리의 통제권을 남에게 넘겨주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복음의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바로 그 오른손입니다. 오른손은 의식을 나타냅니다. 내가 의식적으로 나의 통제권을 자아나 나를 통제하려는 사람에게 맡겨버린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믿기만 하면 우리는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임을 알게 해 주십니다. 나를 통제하려는 것들에서 벗어납시다. 우리는 누구의 노예가 될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 자녀가 하느님 아닌 것에 통제받는 일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폭군들로부터 우리를 해방하러 오셨습니다.

-조재형신부-
2002년부터 2005년까지 교구청 사목국에서 지냈습니다. 당시 교구장님은 정진석 추기경님이셨습니다. 추기경님은 올해 나이가 90이 되셨고, 주교서품 50주년이 되셨습니다. 신달자 시인은 혜화동에 있는 주교관에서 추기경님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소감을 평화신문 지면에 옮겼습니다. 시간이 되시는 분은 미주가톨릭평화신문 홈페이지 8월 9일자 지면을 통해서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발명가가 되고 싶으셨던 추기경님은 6.25 전쟁을 겪으면서 몇 번 죽음의 고비를 넘기셨다고 합니다. 집으로 폭탄이 떨어졌는데 사촌형은 사망하고 추기경님은 살았다고 합니다. 꽁꽁 얼었던 강을 건너는데 추기경님이 건넌 다음 얼음이 깨져서 뒤에 오던 분들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군대에서는 미군의 통역을 하였고, 군종 신부님의 방에서 책을 읽으면서 고레띠 성녀의 책을 번역하였다고 합니다. 성녀의 전기를 읽으면서 발명가의 꿈을 접고 사람 낚는 어부의 길을 선택하셨다고 합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억만인의 신앙을 번역하셨다고 합니다. 세상의 어려움은 하느님께서 주신 자유를 남용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교만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겸손하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추기경님은 최희준의 ‘하숙생’을 부른 적이 있다고 하십니다. 아마도 하숙생의 노랫말이 좋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인생은 나그네 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 인생은 벌거숭이 강물이 흘러가듯 소리 없이 흘러서 간다.’ 우리의 삶이 하느님께로 가는 나그네 길임을 알면 욕심도 버리고 물처럼 바람처럼 살 수 있을 것이라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추기경님의 모습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추기경님은 언제나 기도하셨습니다. 늦은 저녁 교구청 마당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성소자를 위해서, 본당 공동체를 위해서, 교구의 사제들을 위해서,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서 묵주기도를 하셨습니다. 젊은 사제들에게 기도의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추기경님은 기억력이 좋으셨습니다. 특히 정확한 연도와 날짜를 말씀하셨습니다. 50년 전의 사건도 생생하게 기억하셨습니다. 색깔과 맛과 향기까지 기억하셨습니다. 사제성화의 날에 한 말씀 하실 때면 추기경님의 기억력에 모두 놀랐습니다.
추기경님은 책을 가까이 하셨습니다. 신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책을 번역하셨고, 사제가 되신 후에는 매년 책을 쓰셨습니다. 추기경님의 책은 신앙에 목마른 이들에게는 갈증을 풀어주는 단비와 같았습니다. 사제들에게는 올바른 길을 보여주는 이정표와 같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칼은 음식을 만들고, 사람을 치료하는 도구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칼로 사람을 다치게 하는 무기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칼이라는 도구를 사용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이해하였습니다. “세상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만들어 주셨습니다. 다만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유익하면 취할 것이고,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무익하면 버리면 됩니다.” 안식일은 신앙의 척도를 구분하는 율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는 안식일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기도와 지식과 저술을 통해서 하느님을 찬미하셨던 추기경님께서 건강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굽은 마음을 펴라
-반영억신부-
아침, 저녁으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합니다. 맑고 푸른 하늘은 곡식을 여물게 하는 더없이 좋은 선물입니다. 수확의 때가 되면 수고와 땀의 결실을 맛보게 되는 기쁨이 함께합니다. 우리의 삶의 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최선을 다하고 때를 기다립니다. 약속된 하느님의 나라를 기억하며 지금 여기서부터 수고와 땀의 결실을 기뻐합니다. 기쁨은 희망하는 만큼 확인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시며 당신의 능력을 통해서 오그라든 손을 이전처럼 성하게 하셨습니다(루가6,10). 손을 뻗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 주는 행위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주는 것을 받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손을 뻗어 서로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손을 편다는 것은 본인뿐 아니라 모두가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 기쁨이라면 더 많이 누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생각하는 안식일의 본질적 의미보다는 규정과 규율에만 얽매여 있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이 그 사람들입니다(루가6,7). 그들은 마음이 오그라들어서 예수님의 활동을 방해하고 마침내는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죽일 수 있을 것인지 의논하였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오그라든 자신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손뿐만 아니라 마음도 고치시는 분입니다.
자신의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골을 부리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손이 오그라든 것은 마음이 오그라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을 점검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놀림감이 되어 조롱거리가 되어도(예레15,10) 뼛속에 가두어둔 주 하느님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예레20,9) 아버지의 뜻을 따라, 가실 길을 가셨습니다.
혹시라도 사촌이 땅을 사서 배가 아픈 것은 아닌지? 내가 만들어 놓은 하느님 상 때문에 다른 어느 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아닌지?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 마음을 넣어주며 새 기운을 불어넣어 주시길 청합니다.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내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넣어주시길 희망합니다(에제36,26). 그리하여 안식일은 물리적으로 쉬는 것보다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더불어 향유하는 것이라는 깨우침을 얻길 바랍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일에서든 트집을 잡으려고 합니다. 그는 무엇인가 꼬인 사람입니다. 얽힌 것을 풀면 좋으련만 바른 것도 그릇 것으로 보니 그 사람은 불행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루카7,32). "움직여야할 때 움직이고 멈추어야 할 때 멈추어야 하는 것이 삶이고. 움직여야할 때 움직이지 않고 멈추어야 할 때 멈추지 않는 것이 죽음이다"(이현주).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판단과 사람의 판단에 있어서 어느 판단을 따라야 할까요? 당연히 하느님의 판단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에서 우선시 되는 것은 하느님이시고 동시에 사람입니다.
사사건건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며 못마땅해 하는 사람은 어제도 있었고, 오늘도 여전히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부정적인 상황 속에서도 긍정을 찾아내는 삶입니다. 긍정의 주 하느님을 생각하십시오! 행동은 마음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을 잘 가꾸어야 합니다. 무엇이든 주님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마음자세를 굳건히 하여 참 신앙인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손을 뻗어 주님의 손을 꼭 잡으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안식일
-송영진신부-
산상 설교에 있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라는 말씀은, 신앙생활의 중요한 원리입니다.
이 말씀을 ‘안식일’에 적용하면,
“안식일을 지킨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에 합당하게 지키는 이라야 들어간다.”가 됩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 자체만 중요하게 생각했고,
“어떻게 지키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지키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또 “안식일은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선과 사랑을 실천하는 날이고,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 날이다.” 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는 그 어떤 일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기만 하는 것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안식일을 주일로 바꿔서 지키고 있는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주일 미사 참례만 하면 주일을 지킨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미사 참례는 주일을 지키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 가운데 일부일 뿐입니다.
그러니 그것만으로 주일을 지켰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주일을 제대로 지키려면, 주일 전체를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지내야 합니다.
만일에 주일 미사 참례를 한 뒤에
나머지 시간 동안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일을 하면서 지냈다면,
그것은 주일을 안 지킨 것이고, 죄를 지은 것입니다.>
“다른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그곳에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루카 6,6-7).”
아마도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일부러 장애자를 회당으로 데리고 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를 고쳐 주시면,
안식일을 안 지켰다고 고발할 생각이었습니다.
(이야기에 나오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권능과 자비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들이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그날이 안식일이라는 것,
그리고 “안식일인데도 예수님께서 장애자를 고쳐 주실 것인가?”입니다.)
안식일을 어기면 사형에 처하는 것이 율법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이라는 말은,
사실상 “예수님을 죽일 구실”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 하고 이르셨다. 그가 일어나 서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러고 나서 그들을 모두 둘러보시고는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그렇게 하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그들은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서로 의논하였다(루카 6,8-11).”
여기서 “합당하냐?” 라는 질문은, “하느님 뜻에 합당하냐?” 라는 뜻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질문은, “안식일에 어떤 일을 하는 것이 하느님 뜻에 합당하냐?” 라는
질문이고, 이 질문에는 “안식일은 하느님 뜻에 합당한 일을 하는 날이다.”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에는, “안식일은 좋은 일과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하는 날이다.” 라는
뜻이 들어 있고, 또 “좋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과 같다.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죽이는 일을 하는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안식일에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죄를 짓는 일이다.”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은 아예 일을 안 하는 날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의 질문은 그 자체로
잘못된 질문이다.” 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좋은 일이든지 남을 해치는 일이든지 간에,
목숨을 구하는 일이든지 죽이는 일이든지 간에
안식일은 ‘일’을 전혀 하지 않는 날이다.”가 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들은 탈출기와 신명기에 나오는 십계명을 근거로 해서
자기들의 생각이 옳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렛날은 주 너의 하느님을 위한 안식일이다.
그날......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탈출 20,10; 신명 5,14).”
그런데 신명기에는 다음 말씀이 더 있습니다.
“... 그렇게 하여 너의 남종과 여종도 너와 똑같이 쉬게 해야 한다. 너는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를 하였고, 주 너의 하느님이 강한 손과 뻗은 팔로 너를 그곳에서
이끌어 내었음을 기억하여라. 그 때문에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는 것이다(신명 5,14-15).”
탈출기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엿새 동안 일을 하고, 이렛날에는 쉬어야 한다. 이는 너희 소와 나귀가
쉬고, 너희 여종의 아들과 이방인이 숨을 돌리게 하려는 것이다(탈출 23,12).”
안식일은 ‘종을 쉬게 해 주는 날’,
즉 인권을 보호하고,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날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들과 장애자들을 고쳐 주신 것은
안식일을 원래의 정신대로 지키신 것이고,
아무것도 안 하면서,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것을
반대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을 안 지킨 사람들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는커녕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서로 의논”합니다.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을 보면, 그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한 것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마태 12,14; 마르 3,6).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하고 그 방법을 의논했습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예수님께서 말씀 한 마디로 장애자를 고쳐 주신 일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닌데, 그러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고집스러운 마음을
말씀으로도, 또 기적으로도 변화시키지 못하신 것은 놀랍게 보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하느님의 일을 보려고 하지 않으면서,
자기들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은총을 받기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6,6-11: 손이 오그라든 병자의 치유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행위는 율법에는 분명히 금지된 사항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판단은 달랐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율법과 규칙에 매여 있었지만, 예수님은 사람이 현재보다 더 자유롭고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해주시는데 그 판단의 기준이 있었다. 예수님은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그들 앞에 두고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9절)
이 말씀은 사람을 제도라는 법에 묶어놓으려고 하는 그들을 공박하시는 말씀이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참뜻을 행하기보다는 인간적인 규례를 중요시하는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여기서 명심해야 할 것은 관례와 규칙보다 사람의 생명을 돕는 일과 사람에게 선행을 베푸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기적을 행하신 것은 그들을 자비와 동정으로 이끌기 위해서였다.
예수님의 질문은 저들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참으로 지혜로운 질문이다. 만일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치 않고, 생명을 구하는 일이 법에 금지되어 있다고 대답한다면, 그들은 스스로 율법을 비난하는 자들이 되는 것이다. “어찌하여 내가 안식일에 한 사람의 온몸을 건강하게 만들어준 것을 가지고 나에게 화를 내느냐?”(요한 7,23) 그분은 아담이 금지된 열매를 따기 위해 내밀었던 손(창세 3,6)을 선행의 건강한 힘으로 회복시켜주셨다. 범죄를 저질러 마비된 손이 선행으로 치유되었다.
“손을 뻗어라.”(10절) 손을 뻗는다는 것은 탐욕과 불경으로 오그라든 손을 편다는 것이고, 이제는 자주 손을 뻗어야 한다. 구걸하는 가난한 사람에게 손을 뻗고, 이웃을 돕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불의하게 모욕당하는 사람이 해를 입지 않도록 손을 뻗어야 한다.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십사고 하느님께 손을 뻗어야 한다(이사 1,15.17 참조). 손을 내밀어 뻗으면 치유를 받는다.
우리는 삶의 모든 표준을 예수님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며 그것은 서로의 인격존중과 자유와 선행에 기초를 두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도와 규칙에 앞서 이것이 진정으로 사람을 위하는 일인가, 괴롭히는 일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나올 것이며 그 사랑이 이웃에게로 전해진다.
내가 율법주의자가 될 때, 나 자신만을 규례와 규정에 매어놓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다른 사람들까지 불필요하게 고통을 주는 결과를 낳을 것이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듯이 지금 오늘을 사는 나도 그분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우리 안에서 그분이 현존하시는 것을 방해하고 죽이는 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잘못을 우리는 범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인간의 존엄성, 즉 하느님의 모상임을 항상 기억하며 이웃을 대하는 우리가 되도록 주님께 도움을 구하자.

손을 뻗어라.(루카 6, 10)
-한상우신부-
우리자신을
아프게
하는 것은
우리자신이다.
너무 많은
것들을
움켜쥐어서
두 손이 아프게
오그라들었다.
손이 펴져야
손을
흔들수도 있고
눈물을 닦아줄수도
있다.
손을 펴고
손을 뻗는 것이
자연스러운
삶의 순리이다.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나면
자유롭고
홀가분하다.
움켜쥐고서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언제나
손을 뻗어
손을 내밀면
손 잡아주시는
하느님을
향하게된다.
움켜잡고
있는 것을
놓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손을 뻗어보는
용기에서
시작된다.
손을 뻗어
함께 나눠야 할
소중한 순간이다.
주님께서
바라시는 삶이란
오그라드는
삶이 아닌
일어나 가운데에
설 수 있는 용기이며
사랑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다시
우리를 건강하게
만드십니다.
오그라들었기에
손을 뻗는
간절한 이기쁨을
맛보게 된다.
은총과 치유는
손을 펴고
손을 뻗는
믿음에 있다.
다시 서로를
위하는 새날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 내면을 돌아보게 이끄십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 지켜보고 있었다."(루카 6,7)
시간적 배경은 안식일, 공간적 배경은 회당입니다. 마침 그곳에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지요.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계십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관심사는 오직 예수님의 일탈 행위입니다. 장애를 지니고 불편하게 살아가는 동족 따위는 그들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루카 6,8)
예수님은 그들의 속셈을 아십니다. 그들의 속은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말한 "악의와 사악이라는 누룩"((1코린 5,8)으로 썩어가는 상태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아프십니다. 그들이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작 예수님을 잡기 위한 올가미나 덫, 인질로 도구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배울 만큼 배우고, 존경 받을 만큼 받는 이들이니 그 심보가 더 안타까우셨을 겁니다.
예수님은 오른손이 오그라든 이에 대해서도 연민이 가득하십니다. 마침 오늘 치유자 예수님이 이 회당에 들어와 가르치시니 운이 좋으면 자신에게도 좋은 기회가 되지 않을까 기대를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칫 오늘 이 자리에서 자기 때문에 예수님이 매우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될까 걱정되기도 했을 겁니다. 그는 이 양가 감정을 오가며 최대한 숨죽여 회중 가운데 있었을 겁니다.
"일어나 가운데로 서라."(루카 6,8)
"손을 뻗어라."(루카 6,10)
사실 그에게 오른손은 늘 감추고 싶은 치부였겠지요. 제일 쓸모가 큰 지체인데도 제 구실을 못하니 자꾸 퇴화되어 갔을 겁니다. 육신의 질병을 죄의 대가나 하느님의 징벌로 여기는 사회 분위기도 한몫 했겠지요.
그런 그를 예수님은 일어서라고, 가운데에 서라고, 손을 뻗으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분의 요구에는 감추어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치유받을 이도 숨을 이유가 없습니다. 음흉하고 간교한 속셈을 잔뜩 품고 있는 율법 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과 큰 대조를 이루는 대목입니다.
예수님 역시 숨을 마음이 없으십니다. 숨어서 속으로 슬쩍 치유해 주시지 않습니다. 혹시 다음에 안식일이 아닐 때 만나면 그때 보자고 미루지도 않으시지요. 오늘의 기적이 당신을 위험에 빠뜨릴 줄 모르시지 않지만 물러서지 않으시는 겁니다.
예수님께는 한 사람의 치유가 "좋은 일"일 뿐만 아니라 "목숨을 구하는 행위"입니다. 당장 생명에 위협을 받는 응급 상황이 아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의 희생으로 그가 누릴 온전함이 안식일 규정을 앞서지요. 아니, 예수님께는 가난하고 아프고 고통 받고 보잘것없는 한 사람의 회복이 곧 안식일 정신의 완성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인 공동체 안에서 벌어지는 불륜을 꾸짖으며, 보다 과감한 조치를 권합니다. 이유는 불륜을 저지른 이에 대한 증오가 아니라 그런 "악"을 공동체에서 치워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고 새 반죽이 되십시오."(1코린 5,7)
누룩은 발효로 빵을 부풀리는 선기능을 하기도 하지만, 부패를 촉진하는 역할도 합니다. 사도는 한 사람에게 스며들어와서 결국 그 존재 전체를, 공동체 전체를 썩게 만들 수 있는 상징으로 누룩의 비유를 든 것입니다.
"순결과 진실이라는 누룩 없는 빵을 가지고 축제를 지냅시다."(1코린 5,8)
"악의와 사악의 누룩"을 완전히 빼 버린, 누룩 없는 빵의 축제가 곧 파스카 축제입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 그 주인공이 되시고, 당신을 누룩 없는 빵으로 내어 주신 새 계약의 축제지요.
주님께서는 우리가 순결하고 진실되기를 바라십니다.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 충실하고 선한 마음, 거짓 없고 겸손한 마음입니다. 하지만 저마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생긴 상처와 어둠, 이기심이 마음 안에서 속셈을 만들고 왜곡을 일으키며 자신과 타인에게 올가미가 되기도 합니다. 치유를 바라면서도 두려움에 숨게도 만들지요.
그냥 방치하면 자기 이익과 신념에 사로잡혀 타인의 온전함과 행복을 차선으로 내쳐 버리는 폭력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먼저 자신의 마음 속 불결한 누룩을 치워 버리고, 공동체와 사회의 스며든 "악의와 사악이라는 누룩"에 대해서도 분별하며 깨어 경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쏟아지는 정보와 자기 주장과 비난의 홍수로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세상 안에서 무엇을 신뢰하고 따라야 할지 헷갈릴 때는,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하시는 예수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좋겠습니다. 가만히 머무르다 보면 예수님 마음이 원하시는 곳에 우리 마음도 가닿을 것이니, 오늘 치유 받은 이처럼 그분 말씀에 순종하며 그대로 따르면 될 것입니다.
"다시 성하여졌다."(루카 6,10)
훼손되고 약해지고 무너진 모든 것이 다시 성해지기를 마음 모아 기도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우리의 기도에 실상 많은 것이 달려있답니다.

사랑의 평정
-김찬선신부-
어제 저는 이웃의 잘못을 옳게 고쳐주는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그의 잘못을 보기보다는 그의 고통을 봐야 하고,
병의 증상을 보기보다는 병의 원인을 봐야 하며,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얘기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놓고
예수님과 반대자들이 보이는 반응도 이 관점에서 볼 수 있을 겁니다.
조금 다른 것이 있다면 예수님이 손이 오그라든 이의 고통을 봤다면
반대자들은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고통은 아랑곳없고
오직 예수님이 안식일의 규정을 어기느냐, 어기지 않느냐만 본 것이겠지요.
그러니까 반대자들의 기준은 오직 안식일인 데 반해
예수님의 기준은 오직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사랑하시기에 다른 것은 보지 않고 오직 장애인의 고통만 보시고,
다른 사람이나 유력자들은 보지 않고 오직 고통받고 있는 장애인만 보시며,
그동안 늘 중심에 있던 유력자를 가운데 세우지 않고
그동안 늘 뒷전이나 구석에 있던 장애인을 가운데 세우십니다.
"일어나 가운데로 서라.“
그리고 모든 것의 기준이 사랑이기에
식별에 모호함이 없고,
판단에 어려움이 없으며,
행위에 망설임이 없고,
아무런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이
그리 복잡하지 않고 단순명료합니다.
해야 할 것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죽이는 겁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러나 안식일뿐이 아닙니다.
언제나 해야 할 것은 사랑이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미움이며,
더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관심입니다.
아주 단순하고 분명하지 않습니까?
복잡할 것이 무엇 있습니까?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우두머리가 사라진 곳에 똘마니들이 저마다 잘났다고 설치다가
우두머리가 나타나면 똘마니들이 잠잠해지듯이
사랑이 없을 때 사랑하지 않을 핑계로 사람들이 법을 들먹이고
안식일을 들먹이며 사람을 어지럽고 복잡하게 만들지만
최고의 가치인 사랑 앞에서 다른 것들은 가치를 잃게 되겠지요.
모든 것을 평정하는 법을 배우는 오늘 우리이고,
사랑의 평정에 돋을새김을 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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