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 13일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마태오 18,21―19,1)
"Lord, if my brother sins against me,
how often must I forgive him?
As many as seven times?"
Jesus answered,
"I say to you, not seven times
but seventy-seven time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기석신부-
예언자들 가운데서도 에제키엘은 상징적인 행위를 많이 보여 주는 이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거슬러 심판을 선언하는 예언자의 활동에서 우리는 이 행위들을 만납니다. 특히 오늘 독서는 에제키엘의 행위 가운데 하나인 ‘유배 짐’을 언급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불충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이스라엘에게 경고하시면서, 그들이 다시 계약에 충실하도록 에제키엘을 ‘이스라엘 집안을 위한 예표’로 쓰십니다. 에제키엘은 이 불충의 결과 가운데 하나로, 유배 짐을 싸서 어두울 때 도시를 떠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그리고 그분과 맺은 계약에 충실하지 않는다면 그 땅에서 내쫓기게 되리라는 암시를 시각적으로 보여 준 것입니다.
사실 ‘예표’란 어떤 중요한 면을 쉽게 이해하고 파악하게 하는 ‘무엇’입니다. 이스라엘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않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않기에 하느님께서 주시는 예표, 곧 행동으로 보일 예언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예언자는 하느님께 명령을 받은 대로 반드시 실행해야 하고 이를 지켜본 이들은 변화하는 반응을 보여야만 합니다.
오늘 복음은 용서에 관한 규범입니다. 먼저 수도 없이 용서하라는 용서의 빈도를, 다음으로 하느님께 엄청난 용서를 받았으니 동료의 작은 허물을 용서하라는 용서의 당위성을 ‘매정한 종의 비유’로 알려 줍니다. 물론 이 비유에 나오는 임금은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종은 매정한 인간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먼저 무한한 자비를 베푸셨으니, 우리도 형제들을 용서하며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유 속 매정한 종처럼 그 어떤 변화도 없이 옹졸하기만 하면, 그 인생이 어두워질 무렵 유배 짐을 싸서 어깨에 메고 이 세상에서 쫓겨날 것입니다. 결국 예표이든 비유이든 주님께서 기회를 주실 때 깨닫고 변해야 합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느 수도원에 밥을 하루에 한 그릇만 먹는 수도자가 있었습니다. 한편 그와 달리 늘 두 그릇을 먹는 수도자도 있었지요. 이 수도원에서는 절제를 가장 큰 덕목으로 여겼기에, ‘두 그릇 수도자’는 동료 수도자들에게 비난을 자주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두 그릇 수도자’가 먼저 주님 곁으로 갔고, 그로부터 몇 년 뒤에 ‘한 그릇 수도자’도 하늘 나라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늘 나라에서 ‘한 그릇 수도자’가 보니 ‘두 그릇 수도자’가 하늘 나라에서 큰 대접을 받는 것입니다. 그에 반해 자신에게는 별다른 상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불편해진 그는 하느님께 따져 물었습니다.
“하느님! 저 수도자는 세상에 살 때 절제하지 못해서 밥을 늘 두 그릇씩 먹었는데, 왜 한 그릇만 먹은 저보다 더 큰 상을 받습니까? 불공평합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얘야! 저 수도자는 본래 밥 세 그릇이 정량이었다. 그런데도 두 그릇만 먹느라고 무척이나 참고 절제했다. 하지만 너는 너의 정량인 한 그릇을 빠지지 않고 먹지 않았느냐?”
누가 더 절제의 생활을 했을까요? 이처럼 나의 기준이 그리 정확하지 않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함부로 판단했다가는 오류의 틀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됩니다.
베드로가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일흔일곱이라는 수는 모든 세대의 모든 죄가 용서되었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용서를 이처럼 여러 번 하라는 것은 용서하지 못하게 하는 분노할 시간을 만들지 말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딴 생각하지 못하게 계속해서 용서하는 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매정한 종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주인이 돈을 갚을 방법을 지시합니다. 이는 종이 얼마나 큰 빚을 탕감받은 것인지를 정확하게 알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그도 동료 종들에게 더 자비롭게 행동할 터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큰 용서를 받고서도 사람이 달라지지 않은 그 종은 자기 동료 종의 멱살을 잡습니다.
이렇게 잘못된 행동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함부로 판단하는 오류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용서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남에 대한 자기의 용서는 합당할 때에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는 무조건 용서부터 하라고 하시는데 말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해야 합니다. 용서는 하느님께서 간절하게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약점을 지니고 계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려고 또 그 기도를 들어주시려고 나약해지십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어떤 결심.
마음이 많이 아플 때 꼭 하루씩만 살기로 했다
몸이 많이 아플 때 꼭 한 순간씩만 살기로 했다
고마운 것만 기억하고 사랑한 일만 떠올리며
어떤 경우에도 남의 탓은 안 하기로 했다
고요히 나 자신만 들여다보기로 했다
내게 주어진 하루만이
전 생애라고 생각하니
저만치서 행복이
웃으며 걸어왔다.
이해인 수녀님의 ‘어떤 결심’이라는 시입니다. 하루씩, 한 순간씩만 남 탓 안 하고 산다는 결심. 그리고 이 결심이 지켜질 때 분명히 행복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은혜 갚을 절호의 기회, 용서!
-전삼용신부-
우리 대부분은 누군가가 나에게 잘못을 하면 ‘용서’는 해야 하는 줄 압니다. 그렇더라도 용서가 잘 안 되는 이유는 내가 주님께로부터 어떤 죄를 용서받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은혜를 받았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로 용서하려고 하니 용서가 매우 혹독한 고난의 길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평소에 내가 주님께 받은 은혜를 깊이 묵상하고 있었다면 오히려 용서할 기회를 찾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은혜에 보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내 죄를 용서하신 그 은혜를 묵상하면, 감히 ‘나도 용서할 기회가 좀 더 많았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유튜브에 나오는 어느 결혼식 축사의 주요 내용을 약간 각색해 보았습니다. 동업자이며 한 살 어린 나이지만 삼 년 전 결혼한 선배의 결혼식 축사입니다.
“진이 형. 십 년 전 우리는 결혼을 못 하든지, 아니면 축의금도 못 받고 몰래 결혼하든지, 둘 중 하나일 거라 했었지. 그때는 풀리는 일이 없었어. 그런데 결국 나도 삼 년 전에 결혼하게 되었고, 형도 지금 축의금 많이 받고 결혼하네. 앞으로 우리 열심히 일하며 갚아나가자.
형이야 당연히 잘하겠지만, 결혼 선배로서 하나만 얘기할게. 형수랑 싸우면 대체로 형이 잘못한 경우가 많으니까 일단 사과해. 혹시 형이 생각했을 때 형 잘못이 하나도 없는 것 같으면, 그래도 사과해. 그게 남자고 남편이고 가장이며 우리 같은 사람과 결혼해주는 아내에 대한 보답이야. 좋은 기회잖아.
그동안 한 번도 얘기 못 했었는데, 이 자리 빌어 이제야 얘기한다. 십 년 전에 나 오토바이 사고 나서 한 달 병원에 누워있을 때, 병원비 없어서 퇴원 못 하고 간호사들 눈치 보던 그때, 형이 친구니까 도울 수 있으니까 돕는 거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내밀었던 그 봉투, 내가 오늘 다시 가져왔다. 그때의 나는 어리고 철도 없고 자존심만 세서 고맙단 말 못 하고, 그렇다고 안 받겠다는 말도 못 했지. 나중에 열 배, 백 배도 갚겠다고 큰소리만 쳤었는데, 딱 열 배 넣었다. 백 배는 앞으로 같이 벌자. 내가 책임지고 벌게 할게. 진짜로 고마웠다. 그동안 한 번도 잊어버린 적 없다.
형, 형은 참으로 멋있는 사람이다. 주위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사람이고 그런 형이 선택한 형수라, 형수도 같은 사람인 거 같네. 여태 그래왔듯이, 세상 밝게 비추면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결혼 축하해. 잘 살아. 2020년 5월 30일, 형 덕분에 이 자리에 서게 된, 00으로부터.”
[출처: ‘신랑을 울게 한 친구의 반전 축사’, 유튜브 채널 ‘삼남 2인조’]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은혜를 갚을 기회만을 노릴 것입니다. 축사한 동생은 십 년 전의 자신들의 처지를 잘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자신에게 시집와 주는 것도 고맙고 그 결혼을 축하해주러 온 분들께도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군다나 십 년 전 자존심 때문에 고맙단 말도 못 했던, 그러나 한순간도 잊지 못했던 그 은혜에 대해서 형의 결혼식은 정말 ‘원수 갚을’ 절호의 기회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하느님께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습니까?
당연히 지옥 불이 기다리고 있는 우리에게 하느님은 당신 아드님의 피로 그 지옥 불을 꺼주셨습니다. 만약 이 죄의 용서의 은혜를 믿기만 한다면 그 은혜를 갚기 위해 ‘제발 나에게 잘못하는 사람 좀 있어라!’ 하면서 기회를 노리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기회가 있으면 주님께 조금이나마 보답하기 위해 기쁘게 용서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일만 탈렌트를 탕감받았으면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은 감옥에 집어넣는 사람이 나옵니다. 백 데나리온이 약 천만 원이라고 하면 일만 탈렌트는 육조 원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당연히 이 은혜도 모르는 사람을 주님은 하늘 나라에 사시게 할 수 없으십니다. 공감 능력이 전혀 없는 자기만 아는 사람임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남의 잘못을 용서하고 있지 못한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자비를 베풀지 않는 사람은 자비를 받을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유튜브에 보면 하부리그 축구 경기에서 결승 골을 넣은 선수가 하나뿐인 관객 앞으로 달려가 구십 도로 인사하는 감동적인 모습이 나옵니다. 그리고 4시간 동안 응원하러 왔던 그 관객은 엉엉 웁니다. 바로 고양 시민축구단이 평창에 와서 경기할 때의 모습이었습니다. 일곱 경기 연속 패하기만 하던 고양 시민축구단을 응원하러 혼자 평창까지 오는 것은 누가 봐도 어리석은 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라대관씨는 먼 길을 혼자 달려와 목이 터지라고 북을 치며 응원했습니다. 선수들은 골을 넣자마자 하나뿐인 그 관중에게 달려갈 기회만 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억지로 노력해서 용서하는 것도 분명 큰일입니다. 그러나 평소 주님의 은혜에 대해 깊은 묵상을 했다면 용서를 할 기회를 찾는 것은 더 큰 일일 것입니다. 어차피 용서할 것, 주님께 더 보답해드리기 위해 ‘용서를 은혜 갚을 절호의 기회’로 노리며 삽시다.
-조재형신부-
코로나19로 고백소에서 성사를 보는 일이 중단 되었습니다. 가끔 제가 있는 신문사 사무실로 성사를 보러 오시는 분이 있습니다. 모두들 마스크를 쓰고 오십니다. 성사를 보시고, 환한 모습으로 가시는 걸 보면 저도 기분이 좋습니다. 기도는 이론과 방법을 설명해서는 그 깊이와 힘을 알 수 없습니다. 기도는 체험을 통해서 그 깊이와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호수가의 새끼 오리들이 제법 깊이 물속으로 자맥질하는 걸 봅니다. 가르쳐주지 않고, 배우지 않았어도 새끼 오리들은 체험을 통해서 알게 됩니다. 하느님도 우리의 이성과 지성으로 알기에는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의 이성과 지성으로는 하느님을 온전히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몰입하면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엘리야 예언자가 깊은 침묵 속에서 하느님을 느낀 것과 같습니다. 아이들은 부모님을 알면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부모님을 믿으면서 부모님의 사랑과 관심을 알아갑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면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하느님의 선하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은을 제련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숙련된 제련사는 용광로 위에 있는 은을 유심히 지켜본다고 합니다. 은이 얇은 막이 되어서 제련사의 얼굴이 비출 정도가 되면 은은 불순물이 다 빠지고 온전한 은이 된다고 합니다. 그때가 되면 불을 끄고 은으로 작품을 만든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제련사가 용광로의 은을 유심히 지켜본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용서’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용서할 수 있을까요? 숙련된 제련사처럼 자신의 내면을 깊이 바라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분노, 원망, 불신, 미움, 욕망이라는 불순물이 빠지면 마음은 호수처럼 맑아질 것입니다. 호수처럼 맑아진 마음은 굳이 용서를 말하지 않아도 용서가 주는 기쁨을 알게 됩니다.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주게 되고,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주게 되고,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주게 되고, 어둠에 빛을 주게 됩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용서(Forgive)는 '위하여 준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무엇을 위하여 주는 것일까요?
첫째, 나를 위하여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어쩌면 용서해야하는 실질적인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 용서하지 못하고 분노가 가득차면 내가 힘들고 너무 괴롭기 때문입니다. 한국인들에게 있는 ‘화병’도 어쩌면 용서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용서하지 않고 무관심한 태도를 보여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용서는 나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말을 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둘째, 상대방을 위해서 줄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수오지심’이 있습니다. 이는 부끄러움을 아는 것입니다. 용서 받지 못한 사람도 가슴에 ‘한’이 맺히기 마련입니다. 많은 것을 가졌어도, 삶이 풍족해져도 자신의 잘못 때문에 깊은 잠을 자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백성사는 이런 부끄러움과 죄책감을 갖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이름으로 용서를 주는 것입니다.
셋째, 하느님을 위해서 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잘못을 해도 뉘우치면 우리를 용서해 주십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면 하느님께서는 기뻐하시고, 우리가 범한 더 큰 잘못도 기쁜 마음으로 용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합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용서하지 못해서 잠을 못 이루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용서받지 못해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용서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으면 좋겠습니다.
은혜를 기억하라
-반영억신부-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많은 은혜를 입으며 삽니다. 부모나 스승의 은혜뿐 아니라 이웃의 은혜도 큽니다. 그리고 자연의 은혜는 더욱 큽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용서의 은혜는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은혜로움에 대하여 잊고 지낼 때가 많습니다.“내가 남에게 베푼 것은 새겨 두지 말고 남이 내게 베푼 것은 잊지 말라”고 말하지만 그 반대로 살 때가 있습니다. 은혜를 입은 것을 생각하면 남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니 마음이 박해 집니다. 뿐만 아니라 은혜를 베풀었으면 그 보답을 바라지 말고, 남에게 주었으면 후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미움이 생기지 않습니다. 기대하게 되면 기대하는 만큼 “네가 그럴 수 있나?”하는 서운함만 커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묻는 베드로에게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억지로 눈감아 주고 참아줄 수 있는 한계를 일곱 번으로 표현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넘어 자비심으로 용서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한없이, 기꺼이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은혜를 입었고, 앞으로도 입게 될 것이고 죽음에 이르러서도 남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남의 허물에 대하여 용서를 베푸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못 박은 원수를 위해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가23,34).하고 기도하시고 용서하기를 하느님 아버지께 청했다면 그분을 따르는 우리 역시 주님의 힘을 입어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것은 선행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믿음 안에서 용기 있는 사람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탈출기34,6-7에는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허물에 대하여 끊임없는 자애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한없는 은혜를 기억하며 나도 은혜를 베풀어야 합니다. 사실 용서는 사랑의 핵심입니다. 하느님 앞에 우리가 용서가 필요한 죄인, 사랑받는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타인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알게 모르게 이미 많은 사랑과 용서를 받았고 은혜를 입었다는 것을 인정할 때 남에게 관대해 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생에 있어서도 허물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나약함을 지녔다는 사실을 안다면 용서 안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말로는 용서한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내가 옳았다는 말을 듣고 싶고, 아직도 사과와 해명을 듣고 싶어 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더 나아가 용서를 베풀어 주었다는 것에 대해 칭찬 받고 싶은 마음까지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용서는 그것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 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콜로3,12-13).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히려‘그대의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대가 숯불을 그의 머리에 놓는 셈입니다. 악에게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12,19-21).
바오로 사도의 말대로 악에게 굴복당하지 않고 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이런저런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먼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은혜, 받을 은혜를 기억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용서할 사람은 용서해야 합니다. 아니, 용서를 먼저 청하는 날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인간의 빚을 탕감해 주셨으니 인간이 인간의 빚을 탕감해 주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당신의 은혜를 돌 판에 새기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시는 데에 결코 지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데에 지쳐 버립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다른 이들을 ”일흔 일곱 번“ 용서하라고 말씀하시고 몸소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언제나 우리의 기쁨을 되찾아 주시는 온유함으로, 우리가 고개를 들고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에서 도망가지 맙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포기하지 맙시다. 오직 그리스도의 생명만이 우리를 계속 앞으로 나아가도록 이끕니다!”(프란치스코 교황. 복음의 기쁨3항).
교황께서 선출되고 어느 기자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굽니까? " 교황께서는 "저는 죄인입니다. 하느님의 큰 사랑을 받는 죄인입니다."하고 대답하셨답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18,21-19,1: 매정한 종의 비유
베드로가 주님께 형제가 죄를 지으면 일곱 번까지 용서해 주어야 하느냐고 물었다. 예수님은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22절) 여섯이라는 수는 창조 활동을 암시하므로 수고와 노동으로 가득함을 의미하지만, 일곱에는 용서를 가리키는 휴식의 의미가 있다고 오리게네스는 말한다. 일흔일곱이라는 말은 십자가에서 주어진 용서를 모든 세대가 다 받았음을 의미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완전히 용서해 주셨다.
그러기에 우리도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하느님께서 인류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용서하라고 하시는 것은 분노할 시간이 없음을 보여 준다. “일흔일곱 번”이란 무슨 의미인가? 루카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 그분의 족보를 역으로 기록하였다. 루카가 꼽은 세대는 바로 일흔일곱 세대이다(루카 3,23-38 참조). 하느님께서는 이 세대를 모두 용서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만큼 모두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비유를 말씀하신다. 한 임금이 자기 종들과 셈을 하기 시작하였다. 첫 번째로 일만 탈렌트를 빚진 종이 끌려왔다. 종은 많은 돈을 빌리고 또 빌렸지만, 주인에게 이익도 주지 못하고 모두 잃어버린 것 같다.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26절) 이 말씀은 종을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아내와 자식을 판다’는 것은 하느님의 기쁨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되는 것을 말한다. ‘판다’는 것은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종은 “제발 참아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26절). 주인은 종이 청한 것보다 더 많이 베풀었다. 주인은 그 종이 이 일을 통해서 동료 종들에게 관대해지고, 또한 큰 망신을 당하지 않으면서도 어느 정도 책임을 지도록 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용서를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받았다. 그런데 이 용서의 조건은 우리 동료들이 우리에게 잘못한 백 데나리온이란 사소한 잘못들을 용서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종은 자기 동료 종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형제의 죄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우리도 같은 벌을 받는다는 것을 말한다.
자기 동료를 감옥에 가두고 자기에게 빚진 백 데나리온을 갚게 하였다는 말을 듣고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34절) 이 말은 그 종이 영원한 벌을 받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결코, 빚을 다 갚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비유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묘사하는 비유이다. 이제 이 사랑을 본받지 않는 사람은 의로운 심판관으로부터 가혹한 벌을 받을 것이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하실 것이다.”(35절) 주인이 종에게 자신과 가족을 팔라고 했을 때, 분노에 찬 말은 아니었다. 자비의 순간이었다. 그때 주인은 화를 내지 않았다. 지금 이 말은 분노와 처벌과 응징이 담긴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너희 아버지”라고 하지 않으시고 “내 아버지”라고 하셨다. 사악하고 악독한 사람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자비를 입은 만큼 우리도 우리 형제들에게 자비로워야 할 것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구원의 조건을 이야기하십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8,18)
이 말씀의 청중을 열두 제자로 한정하면 이는 성사를 통한 직무사제의 사죄권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좀 더 확대해서 보면, 보편사제직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 곧 우리 모두 또한 그 대상에서 제외되지 않음을 알 수 있지요.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마태 18,15)
관계 안에는 갈등 요소가 있게 마련입니다. 서로 생각하는 방향과 가치관, 지향과 욕망의 크기와 결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마찬가지지요. 그래서 제 생각과 방식이 타인에게 상처와 모욕이 될 수 있음을 인식하고 삼가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보다 먼저 자신에게 해를 가한 상대에게 기회를 주라고 하십니다. 그의 반응에 따라 그를 형제로 얻기도 하고 잃을 수도 있지만, 그건 상대의 선택이 될 것입니다. 중요한 건 일단 그에게 기회를 주는 그 자체입니다.
땅에서의 용서는 땅에서 끝나지 않고 하늘에서도 상대를 해방시켜 줄 것입니다. 반면 땅에서의 배척은 결국 상대에게도 심판이 될 뿐만 아니라 그 매듭을 풀지 못한 자기 자신에게도 굴레로 남을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는 사실 권한이라기보다 상대와 자기의 행복을 위한 의무에 가깝습니다.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20)
주님을 모신 공동체의 조건은 외형적 건물이나 조직이기 이전에 '주님의 이름'이라는 구심점을 갖습니다. 아무리 어마어마한 성전이나 힘 있는 단체라도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이 주님의 이름과 그분의 뜻으로 행해지지 않으면 헛껍데기에 불과하지요.
제1독서에서는 매우 공포스런 장면이 펼쳐집니다. 예루살렘이 받을 벌(에제 9,1-7)과 주님의 영광이 성전을 떠나는 고통스럽고 처참한 파멸의 때(에제 10,18-22)가 연이어 편집되어 있지요.
"너는 저 도성 가운데로, 예루살렘 가운데로 돌아다니면서 그 안에서 저질러지는 그 모든 역겨운 짓 때문에 탄식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해놓아라."(에제 9,4)
이마에 표를 받을 이들은 말하자면 환난에서 살아남을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도성 안, 자기들 거처에 살면서, 예루살렘의 죄악을 슬퍼하고 하느님께 탄원을 올리던 평범한 이들, "영과 진리 안에서" 하느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이들입니다.
"'이마에 표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건드리지 마라. 내 성전에서부터 시작하여라.' 그러자 그들은 주님의 집 앞에 있는 원로들부터 죽이기 시작하였다."(에제 9,6)
주님의 말씀에 멈칫, 잠시 숨을 고릅니다. 주님께서 당신이 거하신다고 하는 당신의 성전을, 그 안의 유지들을 제일 먼저 내어 주십니다. 죄가 있어도 성전 안으로 달려들어가 제단의 뿔을 잡으면 목숨을 건질 것 같았던 옛 희망은 온데간데 없이 물거품처럼 사라집니다. 그곳이 어디이건 그 안에 주님이 계시지 않으면 아무데도 아닙니다. 빈 껍데기일 뿐이지요.
부지불식 중에 우리는 교회 안의 신분이나 직책, 세례 증명서와 헌금 액수가 구원으로 연결된다고 생각합니다만, 오늘의 말씀은 새로운 조건을 던지십니다. 주님의 도성에서 살아남아 미래를 경작하게 될 남은 자들의 생명, 즉 구원은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 주님을 중심에 모시고, 주님의 뜻을 행하는 이들에게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용서는 구원을 준비할 축복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가 누구건, 주님께서는 세상과 교회를 염려하며 "탄식하고 괴로워하는" 우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기도는 그래서 주님께 매우 값지고 소중하지요. 이 기도 안에서 용서도 사랑도 흘러 나옵니다. 그러니 우리, 세상과 교회가 마치 내 것인듯 애타게 주님께 매달립시다. 아무리 악의 힘이 득세해도 세상과 교회에 대한 우리의 눈물과 한숨을 이겨내지 못할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죄와 약함으로 질척거리고 비틀대더라도 주님을 모시고 있으면 반드시 그렇게 구원은 올 것입니다. 아멘.
상처받은 이웃이 아니라 용서받은 주님께로
-김찬선신부-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오늘 베드로는 예수님께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몇 번이나 용서해줘야
하는지 묻고는 자기 딴에는 여러 번이라고 생각되는 일곱 번이면
되는지 다시 묻자 이에 주님께서는 무한히 용서해야 한다는 뜻으로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답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묻게 되는데, 왜 우리는 용서의 횟수를 생각하게 될까요?
제 생각에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해주기 싫은 용서이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하기 힘든 용서이기 때문입니다.
본래 용서는 해주기 싫은 것입니다.
나에게 모욕과 상처를 준 인간, 나를 불행하게 만든 인간,
곧 원수인 자를 용서해주기 싫은데 하느님이 용서하라고 하시니
그 인간을 용서해줘야 하느냐, 몇 번 용서해줘야 하느냐 묻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자기 용서해주기 싫은 일본을 생각하면 됩니다.
천벌을 받기를 바라고, 하늘로부터 천벌이 내리지 않으면
내가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데 오히려 용서하라고 하니 용서하기 싫지요.
용서란 이런 것이기에 누가 마지못해 하더라도
용서하려고 마음먹는 것만으로도 훌륭하다 할 수 있는데,
그런데 마음먹었을지라도 마음이 마음대로 되지 않기에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마음으로부터 용서'는 하기 힘든 것이지요.
우리가 자주 경험하는 바가 있지요.
힘들게, 힘들게 용서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인간의 얼굴을 보니 다시 분노가 치솟는 경우 말입니다.
그것은 의지의 용서를 한 것이지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마음의 용서는 아직 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사랑으로 차올라야 하는데 아직 싫은 것이
사랑보다 더 강하기에 용서하기에는 힘이 부치는 것입니다.
달리 얘기하면 지금 나는 좋아해야 사랑할 수 있는 수준이기에
싫어하는데도 사랑하고 용서까지 하는 것이 아직은 힘에 부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은 힘에 부치는 거라고 얘기했지만
내 인간적인 사랑의 힘만으로 원수까지 용서할 수 있을 때가 오겠습니까?
제 생각에 하느님 사랑에 힘입지 않고는 아직이 아니라 영원히
원수를 사랑할 수 없고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우리 신앙인입니다.
오늘 주님 비유에 적용을 한다면 나는 동료 이웃에게 빚진 사람이 아니라
주인님이신 하느님께 빚을 진 사람이기에 이웃에게 빚진 것보다
더 큰 빚을 지은 자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을 탕감받은 죄인인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시선을 내가 상처받은 이웃이 아니라
사랑과 용서를 받은 하느님께로 돌려야 하고,
전에는 몰랐던 그 사랑과 용서가 얼마나 큰지 이제는 알아드려야 하며,
이제부터는 하느님의 사랑을 절대로 흘려버리지 않고 힘입을 것입니다.
그렇게 이웃에게 받은 상처에 꽂히지 않고 하느님 사랑에 눈을 돌림으로써
상처 덕분에 사랑에 눈뜨게 되었음에 원수까지 고마워하게 돼야 할 겁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이렇게까지 얘기하며 초월적인 해법을 제시합니다.
"우리에게 부당하게 번민과 괴로움, 부끄러움과 모욕, 고통과 학대,
순교와 죽음을 당하게 하는 모든 이들이 바로 우리의 벗들입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끼치는 그것들로 말미암아 우리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기에 우리는 그들을 극진히 사랑해야 합니다."(미 인준 회칙 22장)
그러므로 진짜 원수는 나에게 모욕과 상처를 주는 원수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실 하느님께 우리 시선이 향하는 것을 막는
달콤한 원수임을 묵상하게 되는 오늘 우리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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