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2020년 7월 28일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Margaret K 2020. 7. 27. 05:24

2020 7 28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자녀를 말하는 것이다.
(마태오 13,36-43)

 

"He who sows good seed is the Son of Man,
the field is the world,

the good seed the children of the Kingdom.
The weeds are the children of the Evil on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허규신부-

 

어떤 사람들은 구약 성경의 하느님과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나시는 하느님께서 서로 다른 분이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구약 성경은 정의를 강조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으로 하느님을 소개한다면, 신약 성경은 하느님을 자비와 사랑이 넘치시는 분으로 알려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구약을 막론하고 성경은 이 두 모습을 모두 보여 줍니다. 구약 성경은 심판하시는 정의의 하느님을 말하지만, 백성과 화해하시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마련해 주시는 자애로운 분으로도 소개합니다. 복음서 역시 사랑과 자비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말하면서도 종말에 있을 심판을 통하여 우리의 죄를 꾸짖으시는 하느님도 이야기합니다. 정의와 자비는 많은 경우에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성경에서 정의를 강조할 때 행간에 담긴 의미는 하느님의 자비를, 자비를 말할 때는 하느님의 정의를 생각하게 합니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도 그렇습니다. 종말에 관한 이 말씀은 불의를 피하고 정의를 실천하라는 경고입니다. 심판 때에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은 분명 벌을 받을 것입니다. 반면에 의인들은 하느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종말과 심판은 아직 오지 않았고 지금 우리는 밀과 가라지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종말과 심판에 관한 말씀이지만, 오히려 지금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정의에 관한 말씀이지만, 우리의 죄를 지금 바로 심판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 역시 꾸준한 성찰과 분별을 통하여 가라지가 아닌 밀이, 곧 의인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기에 밀과 가라지의 비유는 죄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생각하게 합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동창 신부 둘이 저녁 식사를 같이하자고 성지로 찾아왔습니다. 식사하면서 오랜만에 술 한잔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고깃집 갈까?”라고 묻자, “다른 집 없어?”라면서 실망의 표정입니다. 다시 “횟집 갈까?”라고 하니, “거기도 별로다.”라고 말합니다. “중국집은 어때?”라고 하자, “너무 기름지지 않아?”라면서 또 거부합니다.

이렇게 선택을 제대로 하지 못한 우리는 식당이 늘어서 있는 골목 안으로 들어가서, 제가 잘 가는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꼭 한 소리 들었던 찌개 전문집으로 향했습니다. 조미료를 너무 많이 넣는 이 집은 저에게 맛을 모른다는 평을 듣게 해주었던 집입니다. 그래도 친절하고 원하는 것 모두 다 먹을 수 있어서, 그리고 무엇보다 가격이 착해서 자주 찾아갑니다.

의외로 동창들이 좋아합니다. 이제 고기나 회는 먹기 싫다면서, 이런 선술집 분위기가 너무 좋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맞으니 저 역시 기분이 좋습니다. 그 자리가 기쁨의 자리가 됩니다.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은 그 자리를 기쁨의 자리, 좋은 자리로 변화시켜줍니다. 그러나 마음이 맞지 않으면 너무나도 불편해집니다. 그 자리에 산해진미가 놓여 있어도 맛이 없습니다.

나의 자리를 기쁨의 자리로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을 맞출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낮추고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을 때, 마음을 맞출 수 있습니다.

특별히 주님과 만남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묵상했으면 합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편하십니까? 또 기쁨을 얻게 됩니까? 만약 불편하고 기쁨을 얻지도 못한다면 주님과 마음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선과 악의 갈림길에서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는 우리가 되기를 원하는 주님의 마음이 아닌, 나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이 악을 가까이하고 선을 피하기도한다는 세속적인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가라지의 비유 말씀을 통해 세상 종말에 어떻게 될지를 묵상하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와 맺은 계약을 기억하시고 또 깨뜨리지도 않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계약을 자주 잊고, 쉽게 깨뜨리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늘 우리에게 충실하셨지만, 우리는 주님께 전혀 충실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 불편하고 또 기쁘지도 못한 것입니다.

가라지로 비유되는 죄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어야 합니다. 대신 주님의 뜻을 따르면서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는 주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과 함께 있음 자체가 기쁨이며, 또 희망을 간직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어디’에 있는가가 아니라, ‘어느쪽’을 향해 가고 있는가를 파악하는 일이다(올리버 웬들 홈스).



피부를 바라보며…….


옷 중에서 가장 튼튼한 옷은 무엇일까요? 이 옷은 시간이 지나도 터지거나 벌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바로 인간의 피부입니다. 이 피부는 다른 인간의 기관과 달리 고장나는 법이 없어서 저절로 터지지도 않고 저절로 벌어져서 새는 일도 없습니다.

이 피부는 진피라는 안쪽 층과 표피라는 바깥쪽 층으로 이루어집니다. 표피의 가장 바깥 표면은 각질층인데, 이를 이루는 세포는 모두 죽은 세포라고 합니다. 우리를 사랑스러워 보이게 하는 것이 모두 죽은 것이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죽은 것이 사랑스럽게 보이고, 또 멋지게 또 아름답게도 보이는 것입니다.

피부만 봐도 하느님께서 얼마나 놀랍게 우리를 창조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죽은 것도 쓸모 있게 만드시는 놀라운 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놀라운 몸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별것 아닌 것으로 생각합니다.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감사할 수 있는 이유가 너무나도 많지 않습니까?

 

지혜롭게 나이 드는 법

-전삼용신부-

 

나이가 50을 코앞에 두다 보니 많은 생각이 듭니다. 무엇보다 그동안 자신 있었던 건강도 이제는 자신이 없어집니다. 더 나아지지 못하고 어차피 고장 날 것이기에 최대한 아껴 쓰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건강보다 더 걱정되는 것은 ‘내가 잘못된 방향으로 달려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달려온 길을 뒤 돌아보고 나아갈 길을 다시 확인해야 하는 때이기에 공자는 이 나이를 ‘지천명’(하늘의 뜻을 안다)이라고 정의했을 것입니다. 이쯤 되면 지혜롭게 나이 드는 법에 관해 정리를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지혜롭게 나이 들어갈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잘못된 방향으로 빠지지 않을까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혜롭게 나이 드는 방법은 ‘죽음을 생각하라!’라는 것입니다. 라틴어로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고 합니다. 죽음을 생각하되 오늘을 마지막 날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이 격언은 “카프페 디엠”(carpe diem)입니다. 오늘을 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오늘을 마지막 날처럼 사는 것만큼 인생을 성공시키는 데 좋은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톨스토이가 한때 생각했던 죽음을 대처하는 방식이어서는 안 됩니다. ‘조던 피터슨’의 『12가지 인생의 법칙』에 톨스토이가 제안한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는 4가지 방식이 실려 있습니다. 1. 어린이처럼 죽음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것, 2. 어차피 죽는 무의미한 인생을 그냥 생각 없이 사는 것, 3. 삶은 고통이기에 더 고통 받지 않고 그냥 자살하는 것, 4. 어차피 무의미한 삶, 그냥 지금 무작정 쾌락을 추구하며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삶, 오늘을 사는 삶이 맞지만 이런 자세는 인생을 성공으로 이끌 수 없습니다.

 

      초나라와 한나라의 대결의 두 주인공, ‘항우’와 ‘유방’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진시왕은 폭정을 일삼다가 죽습니다. 이 틈을 타서 초나라가 들고 일어나 다시 중국의 통일을 이루려 합니다. 이때 두 위대한 인물이 등장하는데 바로 항우와 유방입니다.

      항우는 특급귀족 출신이고 기골이 장대하고 잘생기기까지 하였습니다. 반면 유방은 문지기 천민 출신이었고 서른이 넘을 때까지 한량으로 세월을 보낸 인물입니다. 그의 군대는 오합지졸 그 자체였고 승리도 거의 거두지 못했습니다.

 

      초나라 임금은 이 둘을 경쟁시켜서 중국을 통일하려 합니다. 이 과정에서 항우는 승리를 거듭하지만, 목적지에 유방보다 늦게 도달합니다. 항우는 항복한 군사 20만 명을 자신을 배신할 수 있다는 이유로 몰살시켜버립니다. 반면 유방은 길만 비켜주면 죽이지도 않고 강탈하지도 않겠다고 회유하며 싸우지도 않고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항우는 화가 나서 유방을 죽이려 하지만 실패합니다. 그의 주위에는 언제나 그를 지켜주고 도와주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항우는 초나라로 돌아와 쿠테타를 일으켜 자신이 왕이 됩니다. 그리고 꼴 보기 싫은 유방을 지방으로 보내버립니다.

 

      그러나 그의 안하무인 격의 성격 때문에 위대한 지략가들과 장수들이 지방에 있던 유방에게로 몰립니다. 유방은 끊임없이 책을 읽으며 공부하여 인덕을 닦아나갔습니다. 그의 부하들이 그의 스승이었습니다.

 

      이에 민심은 유방에게로 향했고 군대의 질과 숫자의 열쇠에도 불구하고 결국 항우를 몰아내고 중국을 통일합니다. 한나라가 초나라를 이긴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항우는 스스로 자결을 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31세였습니다. 그때 그의 곁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유방도 천하통일을 이룩하고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와 동네 사람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벌이며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죽게 되었는데 당시 나이가 62세였습니다.

 

      누군가 워런 버핏에게 인생의 성공은 무엇이라 정의하겠느냐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워런 버핏은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사업보다 인간관계를 중요시하여 그의 직원 대부분은 회사를 시작할 때부터 함께 한 사람들입니다. 그는 그들을 가족이라 부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밀과 가라지의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어떤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밀과 같이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어떤 사람은 쓸모없는 사람이 됩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연세가 들고 몸이 안 좋아질수록 더 많은 사람을 모았습니다. 2000년 그 더운 여름 로마로 청년들이 2백만 명이 넘게 모였습니다. 하루에 일사병으로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간 청년만 8백 명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왜 청년들은 그분에게 그렇게 모였던 것일까요? 먹을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삶을 계속 밀로 만들어오셨습니다. 당신 자신이 젊은이들에게 양식이 될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김수환 추기경님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나 밀은 한순간에 익지 않습니다. 매일매일을 밀이 되는 삶을 살아야 마지막 때에 많은 사람을 먹일 밀이 됩니다. 오늘을 가라지로 살면 내일도 가라지입니다. 인생을 성공으로 끝맺으려면 이웃에게 도움이 되는 것으로 오늘부터 나를 채워가야 합니다.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 도움이 되는 것으로 채워야 합니다.

 

      마지막 때 양식이 되는 사람만이 하늘에 살 자격을 얻게 됩니다. 항우처럼 자신의 출세를 위해 타인을 이용하면 결국 쭉정이가 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고 끊임없이 도움이 되기 위해 공부하면 알곡이 됩니다. 오늘을 마지막으로 생각하고 이웃을 위한 양식이 되는 삶을 살기 시작하면 정말 마지막 때에 유방처럼 잔치를 벌이며 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힐러리 클린턴과 도날드 트럼프의 토론을 보았습니다. 4년 전의 토론입니다풍부한 행정 경험논리적인 언변미래에 대한 통찰은 분명 힐러리 클린턴이 앞섰습니다단순함직설적인 화법경제적인 논리는 분명 도날드 트럼프가 앞섰습니다토론이 진행되는 동안 우직하고단순한 트럼프의 말이 귀에는 더 잘 들어왔습니다미국 우선주의경제의 회복일자리 창출과 같은 단순하지만 미국인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말이 효과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4년 전 미국인은 도날드 트럼프를 선택했고도날드 트럼프는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올해는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인 조 바이든과 토론을 할 것입니다어떤 후보의 토론이 더 미국인들의 마음을 빼앗을지 모르겠습니다미국의 정치나 한국의 정치나 복잡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그러나 깨어있는 시민이 결국은 민주주의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아메리카 원주민이 손녀에게 하였던 말이 생각납니다우리의 마음에는 두 마리의 늑대가 있다고 합니다하나는 욕심을 채우고자기만 알고남을 억누르고못된 짓을 일삼는 늑대입니다다른 하나는 겸손하고가진 것을 나누고어려운 이웃을 도와주고선행을 베푸는 늑대입니다손녀가 할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두 마리의 늑대가 싸우면 누가 이겨요할아버지의 대답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그리고 저에게 하는 이야기와 같았습니다. “네가 먹이를 주는 늑대가 이긴단다.” 우리 마음의 밭에도 밀과 가라지가 있습니다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삶으로 실천하는 사람은 밀이 풍성하게 자랄 것입니다불평과 원망으로 자신은 물론 남을 미워하는 사람은 가라지가 넘쳐날 것입니다예수님께서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입니다귀 있는 사람은 알아들으십시오.” 깨어있는 마음이 하느님나라의 영광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매일 물을 주는 텃밭에서 수확을 하였습니다깻잎을 땄고고추를 땄고오이를 땄습니다방울토마토도호박도 열렸습니다직원들과 함께 먹으니 마음이 뿌듯했습니다물을 주고지지대를 세우고줄로 묶어 주었습니다처음에는 언제 자랄지 몰랐습니다매일 물을 주는데도 그대로 였습니다요즘은 몰라보게 자란 텃밭의 친구들을 봅니다잎이 커져서 작은 우산같이 되었습니다자연은 솔직한 것 같습니다정성을 기울이고이파리도 정리해주고물을 주면 쑥쑥 자라납니다사람의 마음은 더 깊은 관심과 정성이 필요합니다어쩌면 우리의 마음은 텃밭에 심었던 모종보다 더 나약한지 모릅니다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보내셨습니다어떤 사람은 예언자의 말을 듣고 하느님께로 나갔습니다그러나 어떤 사람은 예언자를 무시하고죽이려고 했습니다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예수님을 믿고따르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그러나 선택은 우리의 몫으로 남겨 주셨습니다.

 

身土不二라는 말이 있습니다몸과 땅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뜻입니다우리는 서양의 철학과 학문을 배우면서 분석하고 나누는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그러나 진리는 어쩌면 통합과 통섭’ 속에서 찾아지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하느님의 사랑을 묵상하고 원리와 기초를 생각하는데 자꾸만 죄가 떠오릅니다죄는 부끄럽고죄는 멀리해야 하겠지만 우리 삶의 발자국에 함께 따라오는 것입니다병은 우리 몸에 깊은 상처를 주지만 우리 마음은 그 병 때문에 오는 근심걱정두려움에 더욱 큰 상처를 받습니다우리가 음식을 먹으면 완전하게 에너지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생명체는 음식을 섭취하고 나서 배설물을 남기게 됩니다이것은 자연스러운 생명현상입니다배설물은 혐오스럽고 피해야할 대상이 아닙니다배설물은 살아있는 생명은 모두 갖게 됩니다굳이 오래 간직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에너지로 사용되고 남은 배설물을 밖으로 배출하는 것입니다.

 

죄란 어쩌면 우리의 몸과 둘이 아닌 것이라 생각합니다우리는 세상이라는 바다를 항해하면서 죄라는 배설물을 남기게 됩니다죄는 버리면 되는 것입니다그러나 죄의식은 우리 영혼에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죄의식은 2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하나는 교만입니다이것은 자신의 약함을 거짓으로 감추는 행위입니다다른 하나는 열등감입니다이 또한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합니다죄인은 회개를 만나면 은총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죄인은 주님을 만나면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예수님을 만났던 많은 죄인들은 죄를 용서받고 새롭게 변화되었습니다사도 바오로도 주님을 만나서 교회의 기둥이 되었습니다사도 베드로도 회개의 눈물을 흘렸고 주님의 길을 충실히 따라갔습니다우리가 아는 많은 성인들도 죄 중에 있었지만 회개를 하였고 신앙의 별이 되었습니다아우구스티노 성인프란치스코 성인도 그랬습니다.

 

우리들 역시 그렇게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저희는 당신께 희망을 둡니다당신께서 이 모든 것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박해와 주님의 위로 그 사이로 난 순례 여정길을 충실히 걸어갑시다!

 -양승국신부-

 

밀과 가라지의 비유 말씀을 묵상할 때 마다 무한하신 주님의 자비와 인내심에 깊이 감사드리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큰 두려움이 밀려오기도 합니다. 사랑빼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 주님이시지만, 끝끝내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주님을 무시하며, 죽어도 삶을 바꾸지 않는 사람들을 향한 경고 말씀이 너무나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오 복음13장 40~42절) 

 

곰곰히 따져보니 제 안에도 가라지처럼 살아가려는 경향이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공동체 안에도 참으로 사악한 사람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앉아 있습니다.

  

입만 열만 공동체를 향한 불평불만이 폭포수처럼 흘러나옵니다. 이웃을 위한 헌신이나 봉사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저 자신의 몫만 챙기기에 바쁩니다. 사목자, 봉헌생활자, 신자라는 말을 입에 담기에 부끄럽습니다. 밀 이삭으로서의 삶과는 거리가 먼 가라지로서의 삶입니다.

 

가라지의 최후는 참혹합니다. 말씀만 들어도 섬뜩섬뜩합니다. 활활 타오르는 불구덩이에 던져질 것입니다. 불구덩이 속에서 울며 이를 갈 것입니다. 육체적 고통도 고통이지만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되고 제외될 것입니다, 영원한 좌절과 실망, 무기력만이 남게 될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가 유난히 강조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입니다. 혼자만 죄를 짓지 왜 남까지 악의 구렁텅이로 끌어들이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어떤 사람은 존재 자체로 이웃에게 죄를 짓게 만듭니다. 그릇된 행동으로 이웃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고 갈등하게 만듭니다. 과격한 말로 이웃들을 분노하게 만들고 불안하게 만듭니다.

 

그러고보니 인간 존재라는 것이 참 묘합니다. 어떤 사람은 머릿 속에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지고 다시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에너지를 받습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머릿 속에 떠올리기만 해도 갑자기 뒷골이 땡기고, 가슴이 벌렁거리고, 스트레스 지수가 급상승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웃들에게 어떤 존재인지 잘 한번 살펴봐야겠습니다. 나란 존재가 누군가에게 고통의 근원이요 스트레스의 단초가 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나란 존재로 인해 누군가가 오늘도 죄를 짓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바라보며 완전성을 기대하지만, 우리 인간의 속성상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지상 순례가 계속되는 내내 우리 교회 안에는 밀과 가라지가 공존할 것입니다. 악과 어둠의 세력이 지속적으로 우리 교회에 도전장을 내밀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교회의 부족함 앞에 너무 실망하거자 좌절하지 말아야겠습니다. 교회가 부족하면 할수록 더 많이 사랑해야겠습니다. 교회가 흔들리면 흔들릴수록 더 열심히 주님을 바라보고 그분을 꼭 붙들어야겠습니다.

 

심판과 최후의 결정은 오로지 주님의 손에 맡기고, 우리는 교회의 일원으로서 세상의 박해와 주님의 위로 그 사이로 난 순례 여정길을 충실히 걸어가야겠습니다.

 

가라지의 비유 
-송영진신부-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마태 13,37-39).”

실제 농사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밀은 밀이고 가라지는 가라지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경우에는 백지 상태로 태어나서 밀이 되거나 가라지가 됩니다.
또 밀이었다가 타락해서 가라지가 되는 사람도 있고,
가라지였다가 회개해서 밀이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당신의 활동 목적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라셔서 복음을 선포하셨고,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바라신 것과는 다르게 탈락자가 생깁니다.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라는 말씀은,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서 복음을 거부하고 악마의 편에 서는
사람들이 있다는 뜻입니다.
‘악한 자의 자녀들’이라는 말은, 스스로 악마를 따르는 자들을 뜻합니다.
(처음부터 악마에 속한 상태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살다가 타락해서 넘어가는 것일 뿐입니다.)

밀이었다가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서 가라지가 된 자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은 배반자 유다입니다.
“사탄이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이스카리옷이라고 하는
유다에게 들어갔다(루카 22,3).”
그는 분명히 ‘좋은 씨’였고, ‘하늘나라의 자녀’였습니다.
그랬는데 마지막에 배반을 해서 가라지가 되었고 ‘악마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악마가 유혹을 했다고 해서 유다의 책임이 줄어들거나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배반은 유다 자신이 자유의지로 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악마의 책임이 줄어드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도를 유혹해서 배반하게 만든 것은 큰 죄입니다.)
조선시대 박해 때에도 ‘밀밭의 가라지’ 같은 배반자들이 있었습니다.
신자들의 명단을 박해자들에게 넘겨주거나 사제의 은신처를 알려 주거나...
그런 일들에 대해서 “밀밭에 가라지가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 세상의 현실이다.” 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악마가 언제나 어디서나 끊임없이 신앙인들을 유혹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3,40-43).”

가라지는 아무런 쓸모가 없기 때문에 거두어서 불에 태워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종말의 심판과 처벌을 받는 자들도
‘자기 스스로 쓸모없는 존재가 된 자들’이어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은
사람들을 유혹해서 죄를 짓게 만드는 악마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악마들이 최후의 심판을 가장 먼저 받게 될 것입니다.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은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서 죄를 지은 자들로 해석됩니다.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라는 말은, 처벌을 받은 자들의 분노, 절망, 후회 등을
나타내는데, 그들의 분노는 자기들을 심판하신 예수님에 대한 분노일 수도 있고,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분노라면, 그들은 자기들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서,
자기들이 억울하고 부당한 심판을 받았다고 항의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지옥은 “나는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죄인들로 가득 차 있을 것입니다.)

배반자 유다의 경우에는 자기 죄를 뉘우쳤고(마태 27,3),
자기가 죄를 지었음을 인정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마태 27,4).
그러나 그가 뉘우친 일이나 죄를 인정한 일은 ‘회개’가 아닙니다.
그는 죄를 뉘우치면서도 회개하지는 않았고,
자살해버림으로써 더 큰 죄를 지었습니다.
(만일에 그가 회개했다면, 자살하지 않고 사도단에게로 돌아와서
용서를 청했을 것입니다.)
유다의 경우에는 자기가 예수님을 배반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변명하거나, 아니면 예수님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억지 주장을 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가라지에 대한 예수님 말씀은 단순한 예언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경고 말씀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지금 가라지 상태에 있더라도
회개하면 심판과 처벌을 피할 수 있다는 권고 말씀입니다.
그런 점에서 ‘가라지의 비유’를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와 연결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밭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 그 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았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포도 재배인에게 일렀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러자 포도 재배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루카 13,6-9)”
예수님은 열매를 맺지 않는 무화과나무에게
조금이라도 더 기회를 주려고 애를 쓰시는 분입니다.
가라지 같은 사람을 밀과 같은 사람으로 변화시키려고 애를 쓰시는 분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자비’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점은,
예수님의 자비에 우리가 얼마나 잘 응답하고 있는가, 라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라지 같은 사람을 심판하고 처벌하는 시점을
종말로 표현하셨는데, 종말이 될 때까지 회개를 미루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회개할 수 있는 기회는 지금의 인생을 마치기 전까지입니다.
사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고,
그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도 모릅니다.
회개는 ‘바로 지금’ 해야 합니다.
“나는 가라지가 아니다.” 라는 자만심은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틀렸다.” 라고 포기해도 안 됩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13,36-43: 추수 때에 가라지를 추려내어...

예수님은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서 이 세상이라는 밀밭에는 선인과 악인이 현재는 서로 섞여 살아가지만, 이 밀밭도 추수 때는 밀과 가라지가 따로 추려지듯이 밀과 같은 선인이나 가라지 같은 악인도 언젠가는 피할 수 없는 심판을 맞이하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여 준비하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여기서 성급한 판단을 내리는 잘못을 범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판단은 우리의 소관은 아니다. 그것을 가리는 작업은 마지막 날에 하느님께서 하시도록 그분께 맡겨야 한다.

밀과 가라지가 싹트고 자랄 때에는 서로 구별이 안 되듯이 이 세상에서 하느님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엄밀히 구별하기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보기에는 선한 사람으로 보일지 모르나 사실상 가라지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보기에는 가라지처럼 보이지만 하느님 앞에 서는 좋은 밀일 수도 있기에 판단은 우리가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사람의 전부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조급하게 서둘러서 남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쉽게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마태 13,28)하고 쉽게 판단할 수 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경우에 우리 이웃을 이러한 모습으로 판단하고, 쉽게 뽑아버릴 생각을 하면서 살아왔는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내가 그러한 판단을 내리는 순간 나 역시 가라지로 되는 것이다. 남을 쉽게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판단은 오직 하느님께만 유보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가라지가 없는 집안, 공동체를 바라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본성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자신이 각자가 좋은 밀알이었다가 불시에 순간적으로 가라지와 같은 죄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두려운 마음과 함께, 매일 우리의 마음의 밭에는 무엇이 자라고 있고 무슨 열매를 맺을 것인가를 돌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판단보다도 지금 이 순간 충실한 삶으로 언제나 좋은 밀알로서 살아가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는 삶이 중요하다. 또한 지금 내가 올바르게 살지 못한다고 하느님 앞에 나오지 못한다는 어리석은 생각도 버려야 한다. 우리는 순간적으로 그렇게 될 수 있으나, 다시 하느님의 참된 자녀로 즉 좋은 밀알로 변화될 수 있는 우리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노력하는 삶을 원하신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서게 될 때까지 노력하는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항상 깨어 있는 삶이 있어야 한다. 아무도 완전한 자는 없으며 완전을 향해,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에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항상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으로 되돌아가는 삶을 통하여 주님께서 원하시는 좋은 밀알이 되도록 항구할 수 있도록 하자.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43절).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 시선을 어디에 둘 것인지 물으십니다.

"밭의 가라지 비유를 저희에게 설명해 주십시오"(마태 13,36).

제자들이 예수님께 여쭙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가라지에 더 꽃힌 것 같습니다. 분명 비유는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마태 13,24)로 시작하는데 비유 속 종들도, 비유를 듣는 제자들도, 그리고 이 복음 대목을 만나는 우리들도 종종 좋은 품종의 밀보다는 가라지에 더 신경이 쓰곤 하지요.

밀과 함께 자라는 가라지를 바라보시는 예수님 마음에 머무릅니다. 그분 어조는 치우치지 않는 시각을 담담하게 담아냅니다. 뽑아버려야 한다고 나서는 종들의 호들갑이나 근심스럽게 받아들이는 제자들의 반응과는 천양지차입니다. 예수님은 그저 밀과 가라지, 그 둘의 공존을 인정하고 바라보십니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마태 13,43).

이것이 결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영원한 행복을 보시는 거지요.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마태 13,41)이 가라지라면, 이를 조장하는 악의 실체와 함께 결국 불에 타 사라져 버릴 것이니까요. 아무리 현실이 악에 시달려 고통스럽고 황폐해져도 이 세상 창조의 원리가 사랑이고 세상의 주인이신 분이 사랑이시니 결국 사랑만 남습니다. 의인은 해처럼 빛을 내면서 결국 사랑이 찬연히 남으리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제1독서에서는 유다의 처참한 현실이 예언자의 애닯은 목소리로 읊어집니다. 침략과 기근, 질병과 두려움으로 비참한 백성의 모습이 낱낱이 드러나지요.

"주님 저희의 사악함과 조상들의 죄악을 인정합니다. 참으로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습니다"(예레 14,20).

어찌할 수 없는 불행 앞에서 예언자는 백성을 대신해 죄를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그렇다고 죄악과 어둠이 사라진 것은 아니고 그 결과인 고통과 시련 역시 질기게 들러붙어 있지만, 그 아비규환 한가운데서 힘을 내어 일어나 주님을 향하는 겁니다.

"그러기에 저희는 당신께 희망을 둡니다"(예레 14,22).

모든 것을 무너뜨린 자기들의 죄악과, 처절히 겪는 결과적 징벌 상황 안에서, 희망이 보이지 않아 희망할 수 없을 때, 희망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희망일 것입니다. 무너진 유다가 예언자의 입을 빌어 희망을 고백합니다.

"당신께서 이 모든 것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예레 14,22).

이 희망은 창조라는 원천적 축복으로 돌아갑니다. 창조는 사랑이며, 그 사랑은 영원히 이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선하신 하느님께서 선하게 만드신 만물이 결국 제 본성을 되찾아 사랑으로 회복될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사랑과 고통, 평화와 두려움, 창조와 소멸, 밀과 가라지... 이 모든 것이 세상을 두루 채우고 있습니다. 한쪽만 볼 수 없고 그렇게 보아서도 안 되지요. 자신과 이웃과 세상 안에서 양편 모두를 바라보고 인정하는 지혜는 영적으로 균형 잡힌 시각을 낳습니다.

벗님! 예수님처럼 봅시다. 예수님은 모두를 아우르십니다. 그분은 잃어버린 우리의 선함을 되찾아 주시고자 스스로 죄인이라 불리길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담담하고 선한 시선에 우리 눈길을 실어 우리 자신과 이웃과 세상을 바라봅시다. 너른 들녘, 밀과 함께 살랑이는 가라지조차 아름답게 보인다면 사랑은 그만큼 지척인 셈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7월 31일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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