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7월 21일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Margaret K 2020. 7. 20. 05:48

2020 7 21일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마태 12,46-50)

 

For whoever does the will of my heavenly Father
is my brother, and sister, and mother."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허규신부-

 

미카 예언자는 책의 마지막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찬양합니다. “당신 같으신 하느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미카’라는 이름의 뜻이기도 한 이 표현은 하느님의 업적과 그분의 위대하심을 잘 나타냅니다. 대천사 미카엘도 같은 뜻의 이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충실하시며 그들의 죄를 묻지 않으시는, 전능하시면서도 자애가 가득하신 분으로 소개됩니다. 이런 하느님의 업적은 예수님을 통하여 새로운 관계 안에서 지속됩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혈통이 중심이라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과 연결됩니다. 그 뜻을 따르고 실행하는 이들이 하느님의 백성이자 새로운 가족입니다. 그들은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입니다.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은 입으로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마태 7,21 참조), 삶을 통하여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지만 하느님의 뜻을 찾고 실행하는 것이 신앙인들의 정체성입니다. 새로운 관계 안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삶은, 나약하지만 하느님을 향하여 가는 우리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도 이런 우리를 격려하시고 우리에게 자애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느 절의 스님께서 옛 친구들과 만나서 식사를 하고 헤어지면서 복권 한 장씩을 사서 나눠 가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스님이 가지고 있었던 복권이 1등에 당첨된 것입니다. 갑자기 찾아온 난데없는 행운이었습니다. 착실하게 수행을 하던 이 스님은 먼저 은사 스님에게 자동차 한 대를 사드렸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자기도 차를 사는 등 세속적인 물건들을 하나둘 사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세속적인 것에 관심을 두게 되었고,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종교에 관한 생각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결국, 동네 처녀와 눈이 맞아 결혼까지 했습니다.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요? 지금 현재, 택시 기사를 하면서 힘들게 살고 있다고 합니다.

소유가 행복으로 이끌어 주지 못합니다. 소유한 것은 지키면 지킬수록 집착도 커져서 행복이 멀어져 가는 것입니다. 사실 소유한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돌아가는 인간의 삶을 떠올려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부자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신년 인사로 “부자 되세요.”를 최고의 덕담인 것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무소유를 강조했던 법정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자가 되기 보다는 잘 사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잘 사십시오. 부자 부럽지 않게 잘 사십시오.”

맞습니다. 부자가 되는 것보다 잘사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렇다면 잘 사는 것은 무엇일까요? 행복하게 사는 것? 그렇다면 행복하게 사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실 세속적인 기준을 따져서는 도저히 그 정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돈 많이 버는 것이 잘 사는 것이고 행복한 것 같지만 오히려 불행의 이유가 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높은 지위를 얻는 것 역시 그만큼의 책임이 뒤따라오기 때문에 무조건 잘 사는 것이라 하기 힘듭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왔다고 알립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라고 하시지요. 가족과 담을 쌓은 것일까요? 세상의 가족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하십니다.

세상의 관계보다 주님과의 관계가 먼저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법칙보다 주님의 법칙이 더 우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 안에서 잘 사는 법이고,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됩니다.

세상에 속해 있으므로, 세상의 것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머무르면서 주님의 뜻을 따라갈 때 분명히 세상의 것을 뛰어넘는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세상으로부터 받고 싶은 것을 세상에 주어라. 그것이 결국 당신이 받게 될 것이니까(게리 주커브).

 


거울이 스스로 웃을 수 있을까?


큰 거울이 있는 거실로 아들을 부른 아버지가 말씀하십니다.

“네 얼굴을 잔뜩 찡그린 후 거울을 보렴. 어떤 기분이 들지?”

“글쎄요. 제 얼굴이지만 기분이 좋지 않은데요?”

“그럼 거울에 비친 모습을 웃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제가 웃으면 되지요.”

아버지가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을 상대할 때는 언제나 거울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렴. 거울이 스스로 웃을 수 없듯이 상대방도 그냥 웃는 법이 없다. 아들아! 상대방을 웃게 하려면 먼저 미소를 지어야 한다. 어떤 불친절한 사람에게도 미소 지을 수 있다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나를 위해서도 웃음, 미소는 필요합니다. 그래야 내게도 그 웃음과 미소가 돌아옵니다. 인상을 쓰고 화를 내는데 상대방이 웃기를 바란다는 것은 거울 스스로 웃는 것과 똑같습니다.

 

​​​비대면 사회는 없다! 

-전삼용신부-

 

포스트 코로나 시대 이후에는 ‘비대면’ 사회가 온다고 합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비대면 사회는 오지 않습니다.

어떤 분들은 굳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인간관계를 확장하고 싶지는 않다고 말합니다. 사실 사람을 만나는 일은 귀찮고 심지어는 두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 코로나 사태를 기회로 직접 만나는 것보다는 전화로, 전화로 하기보다는 문자로 접촉을 피하기도합니다. 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부가 멀리 떨어져 문자로만 대화하는 것과 한집에서 티격태격하면서라도 함께 사는 것은 천지 차이일 것입니다. 어떻게 TV로 미사를 하는 것과 직접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 같을 수 있을까요? 아기를 TV 화면을 통해서만 사랑을 느끼게 하며 키울 수 있을까요?

사람은 귀찮더라도 사람과의 친밀한 관계를 확장해 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사람’의 본성이고 ‘사랑’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관계를 통하지 않고서는 사랑을 알거나 배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제 묵상에서 사랑에 대한 배움의 자세가 곧 삶을 대하는 자세와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인간관계를 통해 삶의 유일한 가치인 사랑을 배울 수 있다면 인간관계를 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저는 중학교 때 사춘기 호기심이 발동하여 성적인 그림이나 책을 보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성에 관해 칠판에 그래프를 그려가면서 친구들에게 설명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실전에서는 숙맥이었습니다. 여자에게 말을 어떻게 붙여야 되는지도 몰랐습니다. 남녀관계가 그저 성적인 관계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대학에 가서 여자를 만나고 나서야 남녀관계가 성적인 것을 훨씬 넘어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그런 것에 집중하면 관계가 쉽게 깨어질 수 있음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분명 인간관계는 아픔을 주지만 인간관계가 아니면 나를 성장시킬 수 있는 것은 없음도 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을 아는 것, 사랑을 아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가치요 목표라면 그 사랑은 지식으로가 아니라 직접 사람을 만나고 접촉하며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도서관에 있는 모든 책을 다 읽었다는 워런 버핏은 자신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것은 한 사람의 강연을 듣고 나서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과 식사를 하려면 수십억 원의 돈을 자선기금으로 내게 합니다. 워런 버핏은 한 번의 만남의 가치를 아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면 「워런 버핏과의 점심 식사」라는 책을 쓴 ‘가이 스파이어’는 2008년 워런 버핏과 한 끼 식사하기 위해 무려 65만 달러, 한화로 약 8억 원을 지급하였습니다. 물론 이것도 추첨으로 된 것이기에 기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가이 스파이어는 명문 옥스퍼드 대학과 하버드 경영대학원을 졸업하여 부자 아버지를 둔 엄친아였습니다. 대학원 졸업 후 입사한 회사는 순진한 일반 투자자들에게 쓰레기 같은 주식을 팔아먹는 정말 쓰레기 같은 회사였습니다. 그렇게 돈을 버는 것이 과연 가치 있는 것인지를 알기 위해 한 번 만나 식사를 하는데 8억을 써가며 워런 버핏을 만나 조언을 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은 참 가치투자의 방향으로 변하였습니다.

한 사람과 만나 식사 한 끼 하기 위해 적게는 수억 원, 많게는 수십억 원을 내야 하는데도 수많은 사람이 몰려 추첨에 당첨되어야만 합니다. 그 사람이 책이나 화면을 통해 주는 정보와 직접 만나서 주는 정보는 그 질이 같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인생을 바꿔줄 주님을 만나기 위해 성체 앞에 얼마나 나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찾아온 어머니와 형제들을 보며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당신으로부터 배우기 위해 당신을 만나러 온 이들을 당신 가족으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족을 하느님이나, 요셉과 마리아로 한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인간과의 관계 확장을 위해 세상에 오시고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부모와의 접촉을 통해 배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루카 2,52)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배움과 대인관계를 위한 직접적 접촉은 하나입니다.

힘들지만 더 넓게 관계 맺고 더 깊이 사랑하기 위해 우리 관계를 넓혀가야 합니다. 사랑은 관계를 통해서만 배울 수 있습니다. 관계 확장을 원하지 않는다는 말은 하느님을 알기를 원치 않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인간의 삶에 대한 자세는 ‘배우고 싶은 욕망’입니다. 하버드 대학의 데이비드 맥클란 박사는 25년 동안 사람들이 어떻게 성공했는지 연구했습니다. 그가 알아낸 것은 성공의 99% 이상이 어떤 사람과 어울리는가에 좌우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이 곧 여러분입니다. 진리는 찾는 많은 이들과 어울리십시오. 그러면 진리 안에서 살고 발전하게 됩니다. 하느님과 이웃으로 인간관계를 확장하려 하지 않는다는 말은 진리를 배우고 싶지 않다는 말이고 그러면 영원히 지속할 진실한 삶의 의욕이 생길 수 없습니다. 사랑은 사람과 사람의 접촉 안에서만 제대로 배울 수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산보 길에 들리는 공원이 있습니다공원에는 작은 호수가 있습니다호수에는 거북이도 살고지금은 다른 곳으로 갔지만 거위와 갈매기도 살고물고기도 있습니다며칠 전입니다호수에 새 식구가 이사 왔습니다오리와 새끼들입니다. 15마리의 새끼들이 엄마 오리를 따라다니면서 호수에서 지내고 있습니다코로나19로 삭막했던 공원이었습니다그네에도 철책을 쳤었고놀이기구에도 철책을 쳤었습니다오리 가족이 가져온 선물인지 그네도 탈 수 있게 되었고놀이기구에서 아이들도 놀게 되었습니다오리 가족이 이사를 오니 공원이 밝아졌습니다사람들은 오리 가족을 사진에 담아갔습니다저도 몇 장 찍었습니다새끼들이 하늘을 날 수 있을 때까지 오리 가족은 호수에서 지낼 것 같습니다오리 가족에게 호수는 새끼들이 안전하게 자랄 수 있는 삶의 보금자리가 되었습니다매일 산보 길에서 오리 가족을 보는 것도 제게는 즐거움입니다.

 

세상일은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 많습니다코로나19로 이동의 제약이 있으니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예전에 읽지 못했던 책을 읽고 있습니다규칙적으로 걷고외식의 자리도 적으니 건강에도 도움이 됩니다서양의 철학자 세네카는 화려한 언변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술자리도 자주하게 되었고결국 건강을 잃어버릴 정도가 되었습니다세네카는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어서 섬으로 8년간 유배를 가게 되었습니다답답하고억울한 시간일 수 있었지만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지내면서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명상과 독서를 통해서 화려한 언변을 자랑하는 정치가에서 사색과 철학으로 시대를 선도하는 철학자가 되었습니다다산 정약용 선생님도 18년 동안 유배지에서 지냈습니다자신을 탄핵한 사람을 원망할 수 있고유배를 보낸 왕이 서운할 수도 있습니다그러나 다산 정약용 선생님은 건강하게 지낼 수 있었고많은 저술로 존경받는 학자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빌로니아로 유배를 가야 했습니다예배를 드릴 수 있는 성전도 없었습니다정든 고향을 떠나니 외로웠습니다율법과 계명을 지킬 수 없으니 괴로웠습니다무능한 왕을 탓할 수 있었습니다이스라엘 백성을 버리신 하느님을 원망할 수 있었습니다유배지로 가는 길은 고난의 길이요죽음의 길이 되었습니다그러나 생각을 바꾼 사람들이 있었습니다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이방의 신을 섬겼던 지난날을 반성하였습니다유배지로 가는 길은 정화의 시간이 되었습니다율법과 계명을 지킬 수 없지만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길 수 있었습니다하느님의 손길은하느님의 말씀은 예루살렘 성전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바뀌는 것을 체험합니다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새로운 기준을 말씀하십니다어머니와 형제의 기준입니다혈연으로 맺어진 가족도 중요합니다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가족을 이야기합니다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은 모두 가족이라고 하십니다.

 

나뭇잎은 부는 바람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그렇다면 부는 바람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 더욱 지혜로운 것인지도 모릅니다우리는 어디에서 왔는지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태어났습니다신앙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왔으며하느님께로 갈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나뭇잎이 바람에 자신을 맡기듯이 하느님의 자비와 하느님의 사랑에 모든 것을 맡기면 한결 마음의 여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그 모든 것들도 결국은 다 지나가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우리 사회는 분열과 대립이 있습니다소통과 대화가 필요하다고 합니다타협하고 존중해야 한다고 합니다. ‘지역이념세대빈부의 갈등이 커지고 있습니다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것이 아니라나와 다른 이들을 인정하지 않고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상대방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고옳다 하여도 나의 편이 아니라면 무조건 반대하는 때도 있습니다오늘 예수님께서는 참된 소통과 대화를 위한 원칙과 상식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학연지연혈연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세대이념빈부의 잣대로 판단해서도 안 된다고 하십니다오직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원칙과 상식이라고 말을 하십니다지금은 죽고 못 살 것 같지만 그것도 다 지나가기 마련입니다하느님의 뜻이 드러난다면 우리는 모두 한 형제요 자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당신 땅을 어여삐 여기시어야곱의 귀양을 풀어 주셨나이다당신 백성의 죄를 용서하시고모든 잘못을 덮어 주셨나이다당신의 격분을 말끔히 씻으시고분노의 열기를 거두셨나이다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새로운 혈연 관계의 장(場)인 교회를 통해 장차 완성될 하느님 나라를 앞당겨 맛볼 수 있습니다!
-양승국신부-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가족’에 대한 가르침을 끝으로 적대자들과의 격렬한 논쟁을 일단락 짓습니다. 그런데 가르침의 내용이 알쏭달쏭하고 긴가민가합니다. 잘 새겨 들어야 할 말씀이 분명합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오 복음 12장 48~50절)

예수님께서는 먼저 놀라운 질문 한 가지를 던지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사실 둘러서 있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나자렛 사람이고, 그의 어머니와 사촌 형제들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그 부분에 대해서 질문하고 계시는 바는 아닌 것이 확실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출가하신 이후 자신의 어머니와 사촌 형제들과 완전히 결별하였기에, 더 이상 그들을 혈연으로 인정하지 않음을 말씀하시려는 것도 아닙니다.

말씀의 요지는 다른 데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 사가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마태오 복음 12장 49절) ‘가리키시며!’ 이 말의 다른 표현은 “당신의 제자들 위에 손을 뻗치시며 이르셨다.”입니다.

‘손을 뻗치시며!’ 라는 표현은 ‘소유’를 의미하는 동작입니다. 둘러서 있는 제자들이 이제 당신께 속하는 존재라는 표현입니다. 동시에 그들을 축복하신다는 표현입니다.

이제 예수님 주변에 둘러 서 있는 모든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께 속한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 안에 새로운 영적 가족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들은 모두 예수님과 피를 나눈 형제요 자매인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예수님께서 현존하시는 성찬 식탁에 둘러서 있는 우리 모두는 그분 안에 새로운 영적 가족입니다. 예수님의 몸과 피를 나누어 먹고 마시는 참된 가족입니다. 성찬례에 참석한 우리 모두는 이제 남남이 아니라 세상 둘도 없는 가족인 것입니다.

기존의 혈연이나 종족, 가족이라는 자연적 관계, 민족적 단일성, 이러한 것들이 더 이상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데 결정적인 요소가 되지 않습니다. 물론 그런 관계들이 아무리 끈끈하고 강력하다 할지라도, 살아계신 하느님의 절박한 요구는 그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세상 모든 가치들에 앞서 하느님에 대한 우선권을 부여하는 사람들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족이나 친척, 혈연을 무시하거나 소홀히하라는 것을 절대 아닙니다. ‘우선 순위를 어디에 둬야 하는가?’ 하는 화두를 늘 가슴에 품고 살아야겠습니다.

예수님을 가까이 따랐던 열두 사도가 새로운 예수님의 영적 가족이 된 것처럼, 오늘날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을 예수님께 봉헌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그분의 가족으로 수용됩니다.

새로운 혈연 관계가 풍성하게 이루어지는 교회의 영적 가족을 통해 우리는 장차 완성될 하느님 나라를 앞당겨 맛보고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받아들임을 통해 그분의 형제가 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특전이요 은총입니다.

 

예수님의 참 가족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 아직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있었다.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당신께 말한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46-50)”

여기서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라는 말씀을,
“그들은(밖에 서 있는 그들은) 나의 가족이 아니다.”로 오해하기가 쉬운데,
예수님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고,
“어떤 사람이(어떻게 하는 사람이) 나의 가족이 될 수 있느냐?”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가족이 찾아온 일을 계기로 삼아서
‘참 가족’에 관한 가르침을 주려고 하신 것입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라는 말씀은, “이들처럼(내 제자들처럼)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나의 참 가족이 될 수 있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당신의 ‘참 가족의 표본’으로 삼으신 것은,
제자들의 신앙생활을 인정하신다는 것을 나타내기도 하고,
지금 말씀하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제자들은 ‘사람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해서, 즉 예수님께서 하시는
구원 사업에 동참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지금 말씀하신 ‘하느님의 뜻’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은,
구원받기를 희망하고, 구원받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은 하느님께서 인류 구원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시면서
당신의 첫 번째 협력자로 선택하신 분입니다.
따라서 성모님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 가운데
첫 자리에 계시는 분입니다.)

‘참 가족’에 관한 예수님 말씀을, ‘영적인 가족’(신앙인 공동체)에 관한 가르침으로
해석하고, 또 ‘영적인 가족’과 ‘육적인 가족’이 대립 관계인 것처럼
설명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당신의 ‘참 가족’에 관한 예수님 말씀은 ‘영적인 가족’에 관한 가르침이 아니라
‘구원받는 일’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나의 참 가족이 될 수 있다.” 라는 말씀은,
“사람들이 모두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참 가족이 된다는 것은 구원을 받는다는 뜻이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참 가족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가족’과 ‘육적인 가족’은 대립 관계가 아닙니다.
신앙인은 이 두 가족이 하나로 일치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큰 가정’이고, 각 개인의 가정은 ‘작은 교회’입니다.)
만일에 두 가족이 하나로 일치되지 못하고 어떤 갈등을 겪고 있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에 무엇인가 잘못된 점이 있다는 뜻입니다.

가족은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의 선물’입니다.
혼인성사를 통해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가정을 이루기 때문에
가정은 ‘혼인성사’의 결과물이기도 하고, 가정 자체가 ‘혼인성사’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성사’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거룩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또 자녀가 태어나면 부모는 세례성사를 통해서
자신의 자녀를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게 합니다.
주일이면 가족이 함께 미사 참례를 하면서 성체성사에 참여합니다.
(다른 성사들도 가족이 함께 참여합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한다면 육적인 가족은 곧 영적인 가족이 됩니다.
두 가족은 대립 관계가 될 수가 없고, 영적인 가족을 위해서
육적인 가족을 버리거나 멀리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성가정 주일에는 육적인 가족을 성가정으로 만들자고 열변을 토하다가,
‘참 가족’에 관한 말씀이 복음 말씀으로 나오는 날에는
영적인 가족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경우를 볼 때가 있는데,
그것은 모순된 일이기도 하고, 어리석은 일이기도 합니다.)

‘하느님 뜻의 실행’에 관한 예수님 말씀은 다음 말씀에 바로 연결됩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이 말씀은 가족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자신의 가족이 모두 세례를 받았다는 것에만 만족하면 안 됩니다.
가족 모두가 구원을 향해서 함께 나아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신앙여정에서, 가족은 가장 중요한 동반자입니다.
(만일에 가족 가운데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래서 하느님 나라에서 이산가족이 된다면,
그것은 참으로 불행하고 슬픈 일이 될 것입니다.
그 경우에 구원받은 사람은 자기가 구원받았다고 기뻐할 틈도 없이
가족 가운데에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생긴 것을 먼저 슬퍼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사랑이신 분”이기 때문에(1요한 4,8),
‘하느님의 뜻’을 ‘사랑 실천’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사랑을 실천하는 생활입니다.
(사랑 실천 없는 신앙생활은 아무것도 아닌 생활입니다.)
그런데 가장 먼저 사랑을 실천해야 할 대상은 바로 가족입니다.
바로 옆에 있는 사람에게 먼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사랑 실천의 올바른 순서입니다.
가족에게(가족을 위해서) 실천해야 할 사랑 실천 가운데 첫 번째 실천은,
모든 가족이 함께 구원받을 수 있도록 서로 격려하고 도와주는 일입니다.
혹시라도 가족 가운데 하나라도 ‘구원의 길’에서 멀어지려 한다면,
즉 죄를 짓고 있다면, 그것을 막고 회개시키는 것이 사랑입니다.
(만일에 가족이라는 이유로, 가족과 함께 죄를 짓는다면,
그러면서 그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크게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웃과 이웃의 가족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격려하고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한 가족이고, 형제입니다.
이웃의 가족을 외면하고 자신의 가족만 생각하는 이기심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입니다.

 

-조욱현신부-

 

복음마태 12,46-50: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것을 알려주셨다. “보라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마태 12,41). “보라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42)라고 하셨다여기서 마귀는 예수님의 친척들을 등장시켜 그리스도의 신성의 본질을 흐리게 하려고 한다. “보십시오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 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47). 이 말은 예수여그대는 땅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 어째서 하늘에서 왔다고 자랑하는가?”하는 것이며인간에게서 태어난 사람이 하느님의 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48)하고 반문하시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49-50)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게 되면 누구나 가릴 것 없이 예수님의 형제가 되고 자매가 되고 어머니가 된다이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인간적인 혈연관계의 부모와 자녀 간에형제간의 정과 예의를 무시하는 말씀이 아니다오히려 그 본분에 대한 완성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하느님의 가족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라고 말씀하셨다이제 우리들의 모습은 하느님의 자녀의 모습즉 그리스도의 형제자매의 모습이어야 한다는 진리를 밝혀주시는 것이다이제는 하느님의 가족으로 변화되고 성화되어야 하는 것이다오늘 복음을 통하여 우리가 하느님께 감사드려야 하는 것은 죄 많고 부족한 우리를 당신의 형제자매로 받아주셨다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50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당신의 어머니를 극구 칭찬하시는 말씀이 된다왜냐하면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당신의 신앙으로 고백하였기에 말씀이신 하느님의 아들을 이 세상에 낳아 주셨기 때문이다하느님의 아버지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살아온 당신의 어머니를 칭찬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도 이제는 말씀을 따르고 실천함으로써 예수님의 형제도 될 수 있고자매도 된다그 어머니는 어떻게 될 수 있을까그것은 복음을 전함으로써 주님을 낳아줄 수 있을 때복음을 듣는 이들의 마음에 그분을 낳아줄 수 있을 때 그래서 그들의 마음에 주님께 대한 사랑이 생겨나도록 하는 그 순간 주님의 어머니가 된다.

 

이제부터 나 자신의 삶이 마리아가 될 때작은 마리아로써 진정으로 세상에 그리스도를 낳아줄 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우리는 작은 마리아의 삶을 통하여 참다운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이루게 된다이 세상에 성체성사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시듯이왜 성모님께서 계실 수 있도록 하지 않으신 이유를 우리를 통하여 마리아를 보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라고 어떤 분은 말씀하셨다마리아가 되어야 그리스도를 완전하게 전해줄 수 있음을 잘 알고 실천하자.

 

이들이 내 어머니이고 형제들이다.(마태 12, 49)

-한상우신부-

말씀의
탯줄이며
실천의
힘입니다.

서로를
성장시키는
사랑이 참된
사랑입니다.

애착과 집착이
아닌 말씀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과 함께
하지않고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성장은 말씀과
함께 자라납니다.

말씀의 실천으로
사랑하는 법을
다시 배우게 됩니다.

영원한 것은
하느님
말씀뿐입니다.

말씀이 중심이
되어야
모든 관계는
다시 건강할 수
있습니다.

서로를 위한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만나듯
사람을 만납시다.

관계안에 있는
말씀이며
실천입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 나라를 드러내는 새로운 공동체로서 영적인 가족 관계의 핵심을 이야기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마태 12,46)

지금 현재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군중은 그분 곁에 모여 그 말씀을 듣고 있지요. 말씀을 중심으로 예수님과 군중이 통교를 이루는 상태입니다. 가히 하나된 상태라 말할 수 있을 듯하지요.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있었다"(마태 12,46).

예수님의 육적 혈연적 가족이 뒤늦게 도착한 것 같습니다. 어머니와 형제들은 미처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 서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나누어지는 현장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이야기하려고" 기다리는 중입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50).

지금 예수님 곁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이들은 "셰마 이스라엘! / 이스라엘아 들어라!"(신명 6,4)라는 유다교 신앙의 핵심을 지금 여기서 실행하는 이들입니다.

들음이 실행과 무슨 관계냐고요? 들음 안에는 실행이 가능태로 녹아 있습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 55,11)는 주님의 말씀이 이를 증명하지요. 말씀은 이루어짐을 전제로 합니다. 진정한 들음은 실행을 품고 있기에 실행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지요. 말씀은 그래야 완성되니까요. 모든 말씀의 들음(lectio divina)은 묵상(meditatio)과 관상(contemplatio)를 넘어 실행(actio)으로 완성된다는 이야기이지요.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 백성이 주님께 과거를 상기시키며 자비를 간청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예루살렘의 기도" 대목입니다.

"옛날처럼 ... 보살펴 주십시오"(미카 7,14).
"먼 옛날 ... 맹세하신 대로 ... 자애를 베풀어 주십시오"(미카 7,20).

상대방에게 과거의 기억이나 추억을 빌어 도움을 청하는 심정이 어떨지 헤아려 봅니다. 지금 내 처지로는 여러 모로 자격이 모자라 면목도 없고 송구스럽지만 그래도 호의와 도움을 간청해야 하는 순간이 닥치면 저도 그럴 것 같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그런 상황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과 자신들의 "과거"를 "현재"로 끌어오는 중입니다. 먼 옛날 조상들에게 하셨던 자애와 보호의 약속이 이 순간에도 변함없이 유효하기를 바라며 호소합니다.

사실 시간이란 인간에게나 과거, 현재, 미래로 규정되지, 시간의 한계에 매이지 않으시는 주님께는 그저 하나의 시간일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 옛날의 말씀, 그때의 기적이 오늘 이 순간 여기서 이루어지고 완성되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말씀 안에 담긴 '가능태'는 시간과 공간의 구애를 받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데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저마다 주님과 사이에 소중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처음 신앙에 들어설 때, 세례 때, 개별적으로 강렬한 영적 체험을 했을 때, 용서받았을 때, 구원을 체험했을 때 등등 ... 아마 우리의 수만큼 다양하고 아름다운 기억이 존재하겠지요. 그리고 우리는 그 과거를 현재까지 이어와서 주님 앞에 머무릅니다. 귀를 기울여 말씀을 듣고 성체를 모시고 더 시간을 내어 사랑에 잠깁니다. 이렇게 형성된 관계는 진행형입니다.

"그분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예수님의 혈연적 가족은 현재 "밖에" 있습니다. 그분과 이야기하고 싶어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누가 당신의 어머니이고 형제인지 밝히신 예수님은 육적인 가족을 부정하신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하느님 말씀 앞에 현존하는 역동적이고 생생한 참여와 일치의 조건을 이야기하시는 듯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드러내는 새로운 가족 공동체는 기존의 편협한 혈연에 기초하는 인맥주의를 넘어서야만 참으로 시작될 테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혹 주님과의 사랑을 현재화하는데 미적대며,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 계속 유예하거나, 마음속 지향만으로 만족하거나, 멀찍이서 안전거리를 확보한 채 바라보는 정도로 나는 그 기억을 과거 또는 미래에 묶어두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주님과의 사랑을 마냥 "왕년에~"나 "언젠가는~"으로 치워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 사랑은 기억을 타고 현재로 넘어와 지금 여기서 생생히 실현되는 동시에 미래의 완성까지 끌어당기는 신비입니다. 지금 주님 앞에서 마음을 열어 말씀을 듣고 머무르는 벗님이 바로 그 사랑을 현재화시켜 실행하는 주님의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입니다. 그런 벗님에게서 완성될 하느님 말씀을 기대하고 또 축복합니다. 나의 형제인 벗님, 나의 누이인 벗님, 나의 어머니인 벗님 하느님 나라 공동체의 일원이 되심을 축하드리며 감사드립니다. 아멘.

 

혈연의 부정? 새로운 인연?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72705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7월 24일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