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2020년 7월 3일 금요일 성 토마스 사도 축일

Margaret K 2020. 7. 2. 06:04

2020 7 3일 금요일 성 토마스 사도 축일 

 

토 마스 사도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쌍둥이’라고도 불렸다(요한 20,24 참조). 갈릴래아 출신의 어부였던 토마스는 매우 강직한 제자로 드러난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해치려는 유다 지방의 베타니아로 가시려 하자 이를 만류하던 다른 제자들과 달리, 그는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 11,16) 하고 큰 용기를 보였던 것이다. 
부 활하신 주님을 뵙지 못한 토마스는 강한 불신도 보였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25). 그러나 살아 계신 주님을 뵙고서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하고 고백하였다. 이러한 토마스 사도는 인도에서 선교 활동을 펼치다가 그곳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요한 20,24-29)

 

"My Lord and my Go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허규신부-

 

토마스 사도에 대한 평가는 다양합니다. 한때는 오늘 복음의 내용을 ‘토마스의 불신앙’이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예수님의 말씀은 마치 토마스 사도를 질책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토마스 사도의 이야기가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토마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토마스를 통하여 신앙인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토마스 사도는 직접 확인하지 않고서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합니다. 그는 당시 부활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였던, 믿지 못하였던 사람들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부활은 그야말로 초유의 사건입니다. 당시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쉽게 믿지 못한 제자들도 있었습니다(마르 16,11.13 참조). 부활은 그만큼 이해하기 힘든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발현을 통하여 이런 토마스에게, 부활을 믿지 못하는 이들에게 믿음을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토마스 이야기의 결론은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부활을 확인하려 하고 믿지 않았지만, 부활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고 믿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부활을 믿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넘어 예수님의 부활을 받아들이고 믿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부활을 믿는 이들에게 전하는 행복 선언입니다. 이는 당시의 제자들이나 사람들보다 지금 부활을 믿는 이들을 향한 말씀이고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고대 그리스의 회의론자들이 쓰던 용어 중에 에포케(epoche)라는 말이 있습니다. ‘판단 중지’라는 뜻입니다. 언제나 일관되게 옳고 그른 것도,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으므로 매사에 성급하게 판단하지 말고 신중하게 판단을 보류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회의론자를 보통 인생무상의 태도나 허무주의를 내세우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어떤 진리도 무조건적으로 신뢰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회의론자들의 ‘에포케’라는 단어가 참으로 마음에 듭니다. 

사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요즘에는 너무나도 많은 성급한 판단이 난무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빠른 진행을 위해서 빠른 판단이 요구되기는 합니다. 그러나 정확하지 않은 섣부른 판단으로 많은 아픔과 상처를 남에게 남긴다는 점을 떠올리면서 자신의 판단을 멈출 수 있는 ‘에포케’의 상태가 분명히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실 여부를 다시금 살펴보며, 이것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한 번 더 생각해야 합니다. 몇 달 전에 몇몇 신부들과 교회의 일에 관해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다들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런데 한 신부가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판단한다고 해서 결정되지 않잖아. 이런 판단은 멈추고 더 열심히 기도합시다.”

오늘 우리는 성 토마스 사도 축일을 보냅니다. 복음에도 나오듯이, 그는 불신의 상징처럼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토마스 사도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단 한 번의 판단이 지금까지도 내려오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강직하고 타협을 모르는 그의 성격, 옳은 것은 옳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줄 아는 성향이었기에 의심하고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그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향해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이 고백은 지금까지도 예수를 설명하는 그리스도교에서는 가장 완벽한 신앙고백 중 하나로 봅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 한 문장만 가지고 밤새도록 기도하기도 했을 정도였습니다.

그의 의심하고 비판적인 시각이 잘못은 아닙니다. 그러나 잠시 멈출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바로 그 순간이 주님을 만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만나면서 그는 올바른 판단의 길로 나아갈 수 있었으며, 용기 있게 멀리 인도까지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다가 순교의 월계관을 얻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의심하고 비판적인 시각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판단하고 결론을 내는 모습은 주님을 알아뵙지 못하고 또 함께 할 수 없기에 반드시 피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번번이 생각한다. ‘언젠가 나의 길이 시작될거야.’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든 그것이 그 길이다. 당신은 이미 그 길에 올라서 있다(메리앤 윌리엄슨).

 


귀농? 좋을까?


얼마 전에 읽었던 책을 통해, 한 화가의 귀농 생활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화가가 난생처음 시골에 내려가 살면서 채소를 키우고 나무를 심고, 장작을 패서 화목난로를 사용하는 모습 등등…. 무척 낭만적이고 멋있는 그리고 행복한 삶을 비춰줍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주업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으니 얼마나 만족도가 높겠냐는 생각도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전에 이런 생활을 한번 해 본 경험이 있는 저로서는 이 화가의 말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화단을 꾸미고, 나무 심고 채소도 키워 먹으면서 책 읽고 글 쓰려는 마음은 딱 1주일 만에 사라졌습니다. 할 일이 왜 이렇게 많은지……. 집을 꾸미자니 글을 쓸 수가 없고, 글을 쓰자니 집이 엉망이 됩니다. 

결론은 “나하고 시골 생활은 안 맞아.” 였습니다.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는 가장 행복한 곳이 또 다른 누구에게는 가장 괴로운 곳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남과의 비교보다 나의 행복을 찾는 데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남의 판단보다는 내 판단이 더 중요합니다.                   

 

나의 보물 지도는 어디로 향하는가?

-전삼용신부-

 

인생은 속도보다 방향이란 말이 있습니다. 보물 지도를 찾기 위해 갖은 고생하다 결국 그 보물 지도로 찾는 것은 빈 상자뿐임을 깨닫게 되는 영화도 있습니다. 얼마나 허무할까요? 우리 인생에서도 보물 지도를 가진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평생 헛고생만 하다 인생을 마감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각자는 각자의 보물 지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목적지로 각자는 열심히 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목적지로 누군가를 초대하기도 합니다.

      저희 어머니는 천주교 집안에서 자랐지만, 불교 집안에 시집을 왔습니다. 할머니는 어머니가 성당 다니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어머니를 부르시더니 “꼭 성당 나가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셨습니다. 평생 불교가 참된 길인 줄 알았는데 당신을 데리러 온 사람들의 복장이 왠지 절에서 온 것 같지 않고 성당에서 온 사람들 같아 보인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천사들을 보신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바로 우물에서 바가지에 물을 떠다 할머니에게 마리아란 세례명으로 임종 대세를 드렸습니다. 그 이후로 저희 가정이 모두 성당에 다니게 되었고 저는 사제가 되었습니다.

      누군가 보물 지도를 가진 사람이 되려면 그 보물을 찾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결국, 우리가 찾아야 하는 보물 지도는 천국으로 향하는 길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 지도를 가진 사람만이 참 행복을 주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빈 상자만 발견하게 될 지도들을 가지고 그것이 보물 지도라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성 토마스 사도의 축일입니다. 성 토마스 사도는 사도 중 믿음이 가장 약해서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한 유일한 사도라는 평가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 토마스 사도는 참 보물 지도를 가진 사람이 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명확히 그 길을 알려준 분입니다. 그에게 유일한 보물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면 자신에게 더는 중요한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타나시기까지 끝까지 나머지 사도들 가운데서 머물 줄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소원을 들어주셨고 그는 보물 지도를 가진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인도에서 복음을 전하다 순교하였습니다. 지금 인도의 많은 가톨릭 전례가 토마스 사도의 독특한 전통을 따르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복이 되기 위해 자신이 먼저 참 행복을 만나려고 했던 토마스 사도는 우리 모든 신앙인의 모범입니다.

      영화 ‘왓 어 걸 원츠’(2003)는 토마스처럼 참 행복의 지도를 가진 사람이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영국의 귀족 가문인 한 남자가 여행 중 팝 가수를 꿈꾸는 한 여인과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품격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남자의 가문은 여자를 조용히 떠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약혼녀는 임신 중이었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여자아이가 ‘다프네’입니다. 다프네는 17년간 아버지를 기다린 끝에 자신이 직접 아버지를 찾아 나서기로 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저택으로 숨어들어 아빠를 만나고 자신이 딸임을 증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빠는 이미 자신의 상원의원 당선을 지지해주는 사람의 딸과 동거 중이었습니다. 다프네의 활달한 성격은 영국 사교계에 맞지 않았습니다. 그 환경에서 살아야만 하는 아빠와 더는 함께 있을 수 없었습니다. 다프네는 결국 아빠를 떠나 미국으로 돌아옵니다.

 

      아빠는 자신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이 자신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임을 딸의 순수한 모습 때문에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상원의원후보직을 사퇴한다고 하고 그렇게 아빠와 춤 한 번 춰보는 것이 소원인 딸을 찾아 미국으로 떠납니다. 그리고 딸과 약혼녀를 만나 정식으로 혼인에 골인하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지도를 지니고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 참다운 보물을 발견한 이는 자신의 방향으로 오지 않는 사람들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참 행복을 원하는 방향으로 어떤 사람들을 이끌기도 합니다.

      토마스 사도는 참 행복이 그리스도와의 만남임을 아는 사도입니다. 그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며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며 한 신앙고백이 우리가 모두 찾아야 하는 보물입니다.

 

      나는 자녀들을 어떠한 방향으로 이끄는 지도를 가졌나요?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올바른 보물 지도를 가진 사람은 자신도 그렇고 자신을 따르는 사람도 그렇게 따라오게 합니다. 나의 보물 지도의 끝이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란 목적지가 아니라면 나도 나를 따르는 사람도 삶의 허무로 이끕니다. 우리의 방향을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으로 설정합시다. 그러면 나와 나를 따르는 많은 이들을 영원한 행복으로 이끌게 될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카타르에서 우리나라 조선회사에 LNG 선박 100척을 주문했다고 합니다. 선박의 크기는 장충체육관이 5개 정도 들어가는 크기라고 합니다. 100척의 가격은 20조가 넘는다고 합니다. 앞으로 10년간 한국의 조선업에 숨통이 트일 거라고 합니다. 한국의 기술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선박을 수주했다고 합니다. 부품을 좋은 것을 사용하고, 국산화율이 높아서 고객이 원하는 날에 납품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한국의 선박은 고장이나, 불량이 없었다고 합니다. 물론 이런 점이 선박 수주에 큰 장점이 되었을 것입니다.

 

중동 국가는 눈앞에 보이는 이익도 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신뢰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고 합니다. 한번 도움을 받으면 꼭 기억한다고 합니다. 지난 3월 코로나19가 한창 확산되고 있을 때입니다. 카타르 정부는 한국의 가스공사에 진단키트를 부탁했다고 합니다. 한국의 가스공사는 50억 원어치의 진단키트를 신속하게 제공했다고 합니다. 카타르는 한국의 도움을 잊지 않았고, 그것이 이번 선박 수주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매일 마시는 물이 있습니다. 그 물도 현미경으로 보면 많은 미생물이 살아 있습니다. 우리의 피부도 그렇습니다. 현미경으로 보면 세포들이 움직이는 것이 보입니다. 현미경 수준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마실 것도, 먹을 것도 없을 것 같습니다. 이웃과 사랑의 관계를 맺는 것도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보이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물을 마시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웃과 소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그렇습니다. 현미경을 치우면 됩니다. 현미경은 실험실에서 사용하면 됩니다. 일상의 삶에서는 안경이면 충분합니다.

 

하느님께서 현미경의 눈을 주시지 않은 것도 다 이유가 있을 겁니다. 우리의 마음도 눈으로 볼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지만 세상은 더 각박해 질 것 같습니다. 마음은 날씨와 같아서 수시로 변하기도 합니다. 노래 가사에도 있지만 내 마음을 나도 모를 때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나를 위하는 것 같지만 마음은 나를 미워하는 걸 안다면 그것도 괴로움입니다. 굳이 마음을 보지 않고도 믿어주는 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내 마음이 희망으로, 믿음으로, 사랑으로 빛나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 물 위를 걸으셨습니다. 풍랑을 잠재우셨습니다. 중풍병자와 나병환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보지 못하는 사람은 보게 하셨고, 듣지 못하는 사람은 듣게 하셨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겨자씨의 비유, 열 처녀의 비유, 소작인의 비유로 하느님나라를 알려 주셨습니다. 돌아온 아들의 비유에서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알려 주셨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는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인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표징과 말씀이라는 현미경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모든 것을 넘어서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믿으면 죄를 용서 받을 수 있고,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마음을 보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습니다. 물위를 걷다가 그만 의심을 해서 다시 물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행동보다 늘 말이 앞섰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욕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오르면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게 해 달라고 청을 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모두 도망을 갔습니다. 두려워서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있었습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토마스 사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상처를 직접 보고 만져야만 믿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그런 허물을 다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제자들의 나약함도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배반할 것도 아셨고, 두려움에 도망칠 것도 아셨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을 것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믿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수시로 변하는 마음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변하는 마음일지라도 믿음을 간직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은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토마스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토마스야,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주님 부활의 기쁨을 가슴에 안고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의 삶으로 나아갑시다!

 -양승국신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후, 그동안 떠도는 소문에 대해 긴가민가했었는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빵도 드시고 물고기도 드시는 모습을 뵌 사도들의 마음은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간 지니고 있었던 의혹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을 것입니다.

 

반대로 잠깐 다른 볼일 보러 나갔다가 그 자리에 함께 하지 못했던 토마스 사도는 얼마나 아쉽고 답답하고 억울했겠습니까? 토마스 사도는 그 답답함과 억울함을 이렇게 하소연 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 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복음 20장 25절)

  

신앙의 성장에 있어서 아직 갈길이 많이 남아있던 토마스 사도였습니다. 제가 예수님 같았으면 불같이 화를 내며 ‘왜 그리 믿음이 약하냐? 언제까지 그 따위로 살거냐?’며 호통을 칠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발현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나 자상하고 따뜻합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복음 20장 27절)

  

복음서 내에 토마스 사도가 자신의 손가락을 구멍 뚫린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에 넣어봤다는 표현은 없지만, 그의 성격상 끝까지 세심하게 확인해봤을 것입니다. 자신의 손가락을 구멍뚫린 예수님의 옆구리에 직접 넣어봤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이런 신앙 고백을 하게 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복음 20장 28절)

  

토마스 사도의 늦었지만 장엄한 신앙 고백 앞에 예수님께서는 각별한 말씀 한 마디를 덧붙이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복음 20장 29절)

  

사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옛날 토마스 사도를 위한 말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오늘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 가운데 단 한명도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직접 자신의 눈으로 목격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그분께서 주신 믿음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믿음 하나 단단히 붙들고 우리 앞에 펼쳐지는 희미한 안갯속 같은 신앙 여정을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목격한 사도들의 기쁨은 지극히 제한적이고 일시적인 것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의 눈으로 확인한 주님 부활의 그 기쁨을 가슴에 안고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의 삶으로 나아갔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신앙 여정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나가면서 종종 체험하는 강렬한 신비 체험이나 은총 체험들은 평생 지속되지 않습니다. 일생에 단 한번 혹은 두세번 뿐입니다. 그 은혜로운 체험을 가슴에 안고 믿음의 삶, ‘보지 않고도 믿는’믿음의 삶으로 나아가야겠습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이영근신부-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 나타나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마치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사도들과 함께 있지 않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비록 제자들이 당신을 떠나가도, 당신은 결코 제자들을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엠마오의 제자들이 빵 쪼개는 만찬을 보고서 예수님을 알아 본 것처럼, 토마스도 예수님의 옆구리의 상처를 보고서 예수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그것은 당신을 내어주시는 성찬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쪼개지고 찢어지고 구멍 뚫린 당신 몸의 성찬이었습니다. 토마스는 그때서야 비로소 눈이 열리고 마음이 열렸습니다.

어쩌면 토마스는 동료들 중 자신만 주님을 뵙지 못한 것이 마치 자신만이 부활하신 주님을 뵐 자격이 없는 자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동료들이 뵌 주님을 자신은 뵙지 못한 슬픔에 빠졌을 것입니다. 때문에, 오히려 부활하신 예수님 뵙기를 더더욱 원했고 고대했을 것입니다. 더욱 더 주님의 부활을 확인하고 싶었고, 주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가 주님을 다시 보는 일은 곧 주님의 사랑을 보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부활은 곧 주님의 끝나지 않은 사랑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을 아시기라도 하시듯, 예수님께서는 다시 찾아와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토마스는 돌아가신 예수님을 뵌 것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을 뵌 것입니다. 비로소 그 사랑 앞에서 모든 의혹과 자책이 녹아내렸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사랑에 치유를 입었습니다. 손대지 않아도, 보기만 해도, 치유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요한 20,27) 

 

 

그렇습니다. 상처는 당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보여주는 표시임과 동시에, 그분 사랑의 표시였습니다. 상처는 당신을 남김없이 쏟아 부은 그분의 사랑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비로소, 토마스는 눈에 보이는 상처를 통에,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그는 믿음에 대한 확신으로 굳건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확증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을 만지는 것을 허락하시고, 당신의 찢어진 몸을 내어주십니다. 그리고 엠마오의 제자들에게 성체의 성찬을 베푼 것처럼, 토마스에게도 성혈의 성찬을 베푸십니다. 그 순간 토마스의 마음이 열리고 믿음의 눈이 뜨였습니다. 참으로, 복된 성찬입니다. 이 성찬을 통하여, 마침내, 토마스는 고백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오늘 우리도 당신 사랑을 베푸시는 성찬을 통해, 우리의 주님, 우리의 하느님!”을 고백합니다. 신비로운 것은 상처를 만지면, 상처를 받은 이가 아니라 상처를 만지는 이가 치유를 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상처를 통해 다시 살아난 사람들입니다. 이토록, 그분의 상처는 보기만 해도 치유를 입습니다. 그 상처는 당신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사실, 보이는 것들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인식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히브리서>에서 말씀해주듯이,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히브 11,1). 그러니, 토마스가 본 것은 상처였지만, 믿은 것은 주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는 보고서 믿었습니다. 그는 보지 않고는 믿지 못했지만 보고서는 믿었습니다. 그러나 보고도 믿지 않는 이는 불행할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오늘도 보고 또 보고 보지만, 여전히 그분의 사랑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니, 보고 믿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히브리인들이 모세를 따라 홍해를 건너왔지만 그들이 보지 못해서 못 믿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보아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보고도 목이 뻣뻣해져 하느님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그럴지 모르겠습니다. 매일 매일의 삶에서 벌어지는 기적들을 보고도, 특히 성체성사를 매일 영하면서도 여전히 예수님의 사랑을 아직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면 말입니다.

그래서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고뇌는 예수님께서 얼마나 우리 가까이 계신지를 깨닫지 못하는 데서 생깁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찢어진 가슴을 열고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그 지고한 사랑을 말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증거 해야 할 것도 역시 사랑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요한 20,27)

 

 

주님!

당신 옆구리에서 다시 탄생하게 하소서

당신 피로 다시 태어나게 하소서.

거부하고 배척하는 이를 받아들여 옆구리에 간직하고 위로하게 하소서.

상처내고 비난한 이를 끌어안아 옆구리에 품고 용서하게 하소서.

믿어주고 도와주며 제 옆구리에서 흘러내리는 생명의 피를 건네주게 하소서. 아멘.

 

정직한 믿음

-반영억신부-

 

믿음의 생활을 오래 하였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주님을 영접하는 체험이 없어서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주님을 체험한 이야기를 전해주면 부러워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믿어지지 않는다고 하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갖기도 합니다. 그러나 직접체험하지 않았으니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예수님과 가까이 있었던 사람 중에 토마스라는 사람은 주님께서 죽었던 라자로를 깨우러 갈 때 거기에 있었고, 동료 제자들에게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 11,16)라고 말할 정도로 열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고별사를 할 때는 ‘아버지께 가는 길을 가르쳐 달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요한20,25)하고 말하였을 때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믿어지지 않으니 믿지 못하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는 아주 솔직한 답변입니다. 

그렇다면 믿지 못하는 토마스라고 말하는 것보다 정직한 토마스라고 말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여드레 뒤에 토마스도 같이 있는 제자들의 자리에 예수님께서 다시 오셨는데 특별히 토마스에게 “네 손가락을 여기에 대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20,20,27).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미 토마스의 마음을 아시고 그의 마음을 풀어주시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공동으로 받은 은혜에 누락되어 실망할 수 있는 제자를 위한 배려를 볼 수 있고, 앞으로 보지 않고 증언만을 듣고 믿게 될 사람들을 위한 안배를 볼 수 있습니다. 만약 토마스 혼자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였다면 혼자만 왕따가 된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하나가 되는데 장애가 될 요소를 없애주시며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큰 사랑으로 함께해 주셨습니다. 

결국 토마스는 감히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지도 못하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하고 최고의 신앙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사랑을 알아챘고 “네 손가락을 여기에 대보고 내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하신 말씀이 ‘못자국을 직접 보고, 손가락을 넣어보고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다.’고한 토마스 자신의 의문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토마스가 단순히 "진짜네! 주님의 부활하셨어!'라고 하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가 '하느님!'하고 말한 것입니다. 그는 부활 후 그리스도의 신성을 처음 고백한 제자입니다. 

주님께서 한 말씀 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20,29). 그렇다면 보지 않고도 믿는 우리는 행복합니다. 성전과 성경을 통해 전해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있으니 행복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보고 만지고 감각적으로 느끼고 싶어 하지만 그와 상관없이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우리가 믿든, 그렇지 않든 구애 받지 않으시고 세상 끝 날까지 함께하십니다. 우리의 주님은 '임마누엘'하느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있음이 은총이라는 사실을 믿고 또 믿어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거짓으로 믿는 것보다는 정직하게 의문을 제기하는 편이 훨씬 더 주님 마음에 듭니다. 따라서 정직한 믿음을 더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삶의 변화를 통해 믿음을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송영진신부-

 

토마스 사도는 최초로 예수님께 “저의 하느님!”이라고 신앙고백을 한 인물로서
우리 교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 종교입니다.
우리와 같은 하느님을 믿고 있고, 같은 성경을 사용하면서도,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지 않고, 그냥 위대한 예언자로만 생각하는 종교가 있는데,
그들은 그리스도교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존경만 하는 것과 예수님을 믿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그런데 토마스 사도는 어떻게 그렇게 신앙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느님께서 특별히 뽑으셔서 계시를 내려 주셨겠지만,
토마스 사도 자신의 응답과 노력도 있었을 것입니다.
(은총에 응답하는 사람이 은총을 받게 되고,
믿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믿음에 도달하게 됩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 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요한 20,24-25).”

여기서 토마스 사도의 말은, “당신들이 만났다는 예수님이
정말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그 예수님인가?” 라는 뜻입니다.
토마스 사도가 이런 말을 한 이유가 루카복음에 나옵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사도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에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했습니다(루카 24,37).
그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손과 발을 보여 주시면서,
당신이 유령이 아니라는 것을, 즉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신
바로 그 예수님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루카 24,38-40).
그래서 토마스 사도가 예수님의 상처를 언급한 것 자체는,
당시 상황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토마스 사도의 “결코 믿지 못하겠소.” 라는 강한 표현의 말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려는 마음이,
또는 ‘안 믿으려고 하는 마음’이 컸던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전후 상황을 볼 때,
토마스 사도의 말은 ‘믿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표현한 말로 해석됩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를 열망하고 있었던 것 같고,
사도들의 증언이 사실이기를 바라면서, “나도 당신들처럼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
라는 희망을 그렇게 강한 표현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생각된다는 것입니다.
(강한 부정이 뜻으로는 강한 긍정일 때가 있습니다.)
만일에 그가 예수님의 부활을 안 믿고, 또 희망하지도 않고 있었다면,
다른 사도들이 예수님을 만났다고 말했을 때
그 말을 헛소리로 여기면서(루카 24,11) 비웃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처럼 사도단을 떠나서 고향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6-29)”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신 것은 토마스 사도를 위해서인데,
안 믿으려고 하는 그를 설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믿고 싶어 하는 그의 간절한 소망에 대한 응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상처를 직접 만져 보라고 말씀하신 것은,
실제로 그렇게 하라는 뜻이 아니라, 토마스 사도가 바라는 대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신 바로 그 예수님”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신 일입니다.
여기서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라는 말의 원문은
“믿지 않는 사람이 되지 말고 믿는 사람이 되어라.”인데,
“증거가 없다고 믿지 않는 사람이 되지 말고,
증거가 없어도 믿는 사람이 되어라.” 라는 뜻입니다.
(토마스 사도는 증거를 보고서도 의심하고 안 믿은 사람이 아니라,
믿고 싶은데도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못 믿은 사람입니다.)
이 장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왜 ‘증거’를 보여 주시면서도,
‘증거가 없어도 믿는 사람이 되어라.’ 라고 말씀하셨을까?
행동과 말씀이 모순되지 않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지금까지는 증거를 보고 믿었더라도, 앞으로는 증거가 없어도
믿는 사람이 되어라.”로 풀이한다면, 이 모순이 해결됩니다.
(예수님은 “무조건 믿어라.” 라고 윽박지르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믿을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방식으로 친절하게 인도해 주시는 분입니다.)

토마스 사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한 번 만남으로써, 어떻게 그렇게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 신앙으로 곧바로 도약할 수 있었는지, 놀라운 일입니다.
사도들과 신자들은 부활 전에도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지만,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으면서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과
그 믿음 없이 그냥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다릅니다.
하느님으로 믿으면서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님은 내 인생의 주권자로서
내 인생을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신앙고백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 없이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냥 단순한 존칭일 뿐입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 것은, 아버지 하느님과 구분되면서도
아버지 하느님과 동등한 위치에 있는 분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하느님은 삼위일체이신 분’이라는 믿음으로 연결됩니다.
(아마도 토마스 사도는 “하느님은 삼위일체” 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 같고,
그 깨달음에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이라고 신앙고백을 했을 것입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라는 말씀은, 토마스 사도만 꾸짖으시는 말씀이
아니라, 사도들 전체를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다른 사도들도 모두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서야 믿었기 때문입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라는 말씀은,
앞으로 믿게 될 모든 신앙인들을 향해서 하신 축복의 말씀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않아도,
사도들의 증언을 믿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있습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요한 20,24-29: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오늘은 사도 성 토마스 축일이다. 토마스라는 말은 본디 하느님은 완전하시다.”라는 뜻이다. 복음에 나타나는 대로 토마스의 성격을 표현하고 있는 말로 보인다. 쌍둥이라는 것은 형제가 있는 쌍둥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모든 일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토마 사도는 페르시아와 인도에 가서 선교하던 중, 마드라스(: 첸나이)에서 순교하였으며, 그곳에 성 토마스 성당을 지어, 지금 중앙 제대 아래 안장되어있다. 인도에서는 성 토마스가 인도의 사도로 공경을 받고 있으며, 많은 신자가 세례명으로 토마스를 갖는 것을 볼 수 있다. 성 토마스는 건축가의 수호자로 공경을 받는다.

 

예수께서 나타나신 자리에 토마스가 없었다. 토마스 사도는 쉽게 믿으려 하지 않는다. 토마스는 매우 꼼꼼하고 철두철미한 사람으로 보인다. 그는 주님을 보았다는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는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보고 또 그분의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25). 토마스가 그 자리에 없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의심하는 제자가 스승의 몸에 난 상처를 만짐으로써 우리 불신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것이다. 토마스가 주님의 상처를 만짐으로써 우리가 의심 없이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여드레 후에 토마스에게 나타나신다. 왜 곧바로 나타나시지 않고 그렇게 늦게 나타나셨을까? 그것은 토마스가 다른 사도들에게 계속 이야기를 듣고 더 뜨거운 마음으로 주님을 뵙고 믿게  준비를 하시느라 그렇게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토마스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의 소망을 들어주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27) 이제는 주님의 부활을 믿고,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분과 부활하신 분이 같은 분이심을 알게 되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28)하고 고백한다. 이것은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다. 토마스는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던 많은 사람의 모습이며, 이 고백은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게 된 신앙인들의 고백이라고 보아야 한다. 토마스는 그분의 육신을 만지고 그분의 신성을 고백하였다. 그분의 신성은 말씀이며, 그분의 육체를 만지고 말씀을 고백한 것이다. 즉 그분은 사람이 되신 말씀이시다는 의미이다. 우리도 이렇게 고백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9) 오늘의 요한복음에서도 보고 믿는다.”라는 형태가 나온다. 그들은 믿음의 제1세대로서 우리에게 확실히 증언하기 위하여 보아야 했고, 증언하여야 했.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증언을 듣고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신앙은 단지 믿으면서도 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9)고 말씀하신다.

 

우리 신앙의 핵심은 부활 신앙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이 우리 신앙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믿음을 갖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주님의 영광은 십자가를 통해서 얻으신 영광이다. 그 고통이 아니었다면, 예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지 못했을 것이고, 우리도 신앙을 가질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주님을 체험한다는 것은 그만한 대가를 지급할 수 있는 각오가 되어있어야 하며, 기꺼이 지급해야 . 그렇지 않았을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나신다고 해도 우리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가 생각하는 주님과 그분의 본 모습은 전혀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분의 죽음과 부활은 절대로 따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완성하기 위해, 아버지께 대한 사랑으로 모든 것을 바치실 수 있었던 것 때문에 얻으신 영광이다.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한다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의 새로운 태어남을 의미하며, 참된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태어남이다. 이때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께 토마스 사도와 같이 올바른 신앙을 고백할 수 있으며, 우리도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 위에 돌아가시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이제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을 통하여 당신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고 계실 것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면서 우리도 올바른 신앙을 고백할 수 있도록 토마스 사도께 도움을 청하자.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요한 20, 27)

-한상우신부-

가장 잘 보이고
가장 잘
보이지 않는
상처라는 
은총입니다.

잘나낼 수 없는
상처의 
마음입니다.

상처도 지나가는 
여정중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상처를 
입으십니다.

사랑이 상처임을
배웁니다.

상처가
사랑이 됩니다.

상처또한
감사가 됩니다.

상처를 통해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를
알게됩니다.

하느님의 상처로
우리가 다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십자가의 상처
십자가의 
성숙입니다.

함께 이 길을
걷게하는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상처에서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나는 은총과
감사의 날 되십시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우리는 "그래도 괜찮아" 하시는 예수님의 속마음을 듣습니다.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요한 20,24).

토마스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마침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하필 그 순간에 말이죠... 스승의 죽음 이후 함께 힘겨워하던 동료 제자들이 절망과 두려움을 훌훌 벗고 기쁨과 생기를 찾아갈 때, 그는 여전히 십자가 아래, 무덤 속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저 듣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사랑과 그리움 때문일 겁니다.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요한 20,26)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또 다시 그들을 찾으십니다. 단순히 부활한 존재의 목격 증인을 만드시려는 것이라면 나머지 제자들에게 굳이 다시 당신을 보여 주실 이유는 없을 테지요. 오늘의 방문은 오로지 토마스를 위한 것입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요한 20,27).

예수님은 토마스가 아쉬워하며 항변할 때 마치 곁에 계셨던 것처럼 그의 요구를 하나 하나 기억해 들어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렇게 해야 네가 믿겠다면 당신은 어찌 해도 괜찮다는, 고통의 상처들이 다시 후벼지고 파헤쳐져도 좋다는 뜻입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토마스가 외칩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바로 자기 때문에 이 자리에 다시 오신 걸 알아차립니다. 그의 고백은 "이제야 당신의 부활을 믿습니다"라는 의미 이전에, "당신은 저를 사랑하시는 저의 주님이십니다!"라는 환호입니다. 이 순간 그를 점령한 것은 사랑이지요. 믿음은 그 사랑에 딸려 옵니다.

제1독서는 예수님과 우리의 결합을 건물에 비유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에페 2,21)

예수님께서 모퉁잇돌이시고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기초가 된 수려하고 튼튼하며 잘 생긴 건물이 하느님의 거처로 지어지고 있습니다. 믿음의 후손인 우리가 그 건물을 이루어가고 있지요.

이 건물을 지탱하는 매개체는 사랑입니다. 사랑이 하느님 거처의 기운이고 영감이며 분위기입니다. 사랑은 믿음을 안고 성장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토마스 사도를 위해 다시 오신 주님께서 황송하옵게도 오늘 벗님에게도 다가오십니다. 우리의 부재와 한눈 팔기, 약한 믿음과 왜소한 사랑까지도 괜찮으니 원한다면 와서 직접 만져 보라고 속없이 당신을 내어주십니다. 그분은 믿음을 억지로 명령하지 않으시지요. 결국 사랑이 믿음을 견인해 오리라는 걸 아시니까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하고 토마스 사도처럼 사랑에 찬 환성을 주님께 올리는 축제일 되시길 바랍니다. 다 이해할 순 없어도, 온전히 믿기 어려워도 사랑할 순 있답니다. 사랑이 이해와 믿음을 끌어줄 것입니다.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는 힘은 사랑입니다. 그렇게 믿는 벗님은 참 복되십니다. 아멘.

 

우리의 믿음이 성장치 못함은?     

-김찬선신부-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우리 그리스도교인들은 사도들 신앙고백의 기초 위에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이 신앙을 물려준 모든 사도가 다 고맙지만 제게는
오늘 축일을 지내는 토마스 사도가 특별한 의미에서 고맙습니다.

요한 사도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중요한 진리를 알게 해줘서
고맙다면 토마스 사도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또 다른 중요한 진리를 알게 해줘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이 중요한 진리를 주님 친히 발설케 한 것이 그의 솔직함입니다.
내 눈으로 보지 않고는 주님 부활을 믿을 수 없다고 오늘 솔직히 얘기한
것처럼 토마스는 주님께서 이별을 예고하시며 당신이 어디로 가시는지
너희는 다 안다 하셨을 때도 토마스만은 자기의 모름을 솔직히 드러내어
주님께서 친히 당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천명하시게 했지요.

성찰컨대 우리의 믿음이 성장치 못함은 현재 자기 신앙 상태에
진실하거나 솔직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의 믿음 안에는 믿음과 의심이 같이 섞여 있고,
의심이 섞여 있는 것이 꼭 나쁘다고만 할 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단지 문제는 자기 믿음 안에 의심이 섞여 있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치 않고
자기의 믿음 안에서 의심의 불순물을 걷어 내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토마스에게나 우리에게나 믿음과 의심이 함께 섞여 있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토마스는 의심을 보고 그것을 도려내려고 애쓰는 데 비해
우리는 알량한 믿음을 보고 우리는 잘 믿고 있다고 안심하며
의심을 도려내려고 하지 않고 뭉개버리는 것입니다.

의심에 의심을 더해야 우리의 신앙이 확고해지고 성장하는 것인데
우리는 의심을 끝까지 하지 않아 우리의 신앙이 제자리 걸음을 하지 않는지
위대한 신앙고백자인 토마스 사도를 보며 반성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7월 3일 화요일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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