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4월 26일 부활 제3주일

Margaret K 2020. 4. 25. 19:34

2020년 4월 26일 부활 제3주일


 예수께서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 주셨다.

그제서야 그들은 눈이 열려 
예수를 알아보았다

(루가 24,30-31)

 

He took bread, 
said the blessing,
broke it, 
and gave it to them.
With that their eyes were opened 
and they recognized him
,

 


렘브란트, ‘엠마오의 저녁식사'

 

2020년 4월 26일 주일 부활 제3주일 매일미사_손삼석 요셉 주교 집전
https://youtu.be/qfhM4mUW2p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오늘 제1독서는 유다인들이 봄 추수를 감사하며 하느님의 율법 수여를 기념하는 오순절에, 약속된 성령을 받은 직후 베드로 사도가 행한 첫 설교입니다. 베드로는 이 설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핵심적인 신앙을 요약합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보내신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지만 다시 살아나시어 죽음의 힘으로부터 벗어나 영광스럽게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 약속된 성령을 부어 주셨음을 담대히 선포합니다.

복음 속 엠마오의 두 제자도 베드로의 이 확신에 찬 설교를 전적으로 지지하였음에 틀림없습니다. 사실상 파스카의 첫 외침인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베드로)에게 나타나셨다.”는 이야기를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과 함께 공유하였을 뿐 아니라, 자신들이 엠마오로 가던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 부활하신 예수님을 비로소 알아보게 되어 그들 마음이 타오르는 체험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제2독서를 통하여 우리 믿는 이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을 뵙는 뜨거운 체험과 약속된 성령을 받아 가지게 된 담대함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줍니다. “여러분은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영광을 주시어, 여러분의 믿음과 희망이 하느님을 향하게 해 주셨습니다.”
침통한 표정과 두려운 마음으로 살아갈 뻔하였던 지상의 나그네살이를, 마음이 타오르는 믿음으로 하느님을 향하게 하는 희망이 되게 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지금 이 부활 시기만이 아니라 우리 일생 전체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담대하게 이야기해야 할 이유를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찾습니다.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엠마오로 가는 길

-키엣 대주교-


제자들은 하루 만에 엠마오를 갔다 돌아왔습니다. 그럼에도 가고 오는 길은 너무나 달랐습니다. 종교의 중심인 예루살렘을 등지고 엠마오로 향하는 그들은 믿음을 버린 자책감과 스승을 잃은 절망과 두려움으로 비록 밝은 대낮이었지만 어둡고 끝이 보이지 않는 지치고 먼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희망을 안고 돌아오는 길은 어두운 한 밤이었지만 모든 것이 환하게 보여 한 걸음에 돌아왔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이제 어디에도 계십니다. 지금 우리를 보고 계실지도 모르고 바로 옆에 계실지도 모릅니다. 다만 우리가 그 분을 보지 못할 뿐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모든 사람이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먼저 주님의 말씀을 나누고 실천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혼자가 아니라 같이 떠났습니다. 비록 절망속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진 않았지만 그들은 주님을 그리워하며 주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라는 당신의 말씀을 이루셨습니다.

다음은 사랑의 나눔입니다.

주님께서 더 멀리 가시려고 하시자 제자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하며 같이 머무시기를 청하였습니다. 짧은 여정 중에 비록 허름한 여관이지만 한 지붕에 머물기를 청하고 소박한 한 끼를 나누는 것은 참으로 따뜻한 모습입니다. 만일 그들의 나눔의 사랑이 없었다면 주님께서는 그대로 가셨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였기에 그들은 주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성체의 나눔입니다.

주님께서는 식탁에 앉으시어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의 성체 성사 모습 그대로였고 그제서야 제자들은 주님이심을 알아보았습니다. 성체를 통해 주님의 현존하심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후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스승님이 하신 것처럼 주님의 말씀을 나누고 성체 성사를 통해 사랑의 공동체를 건설하였습니다.

성경을 읽은 만큼 저절로 믿음이 쌓이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을 깨닫고 실천해야 합니다. 복음안에서 주님의 신비를 찾고 주님의 존재 속에 복음을 읽어야 합니다. 간절함과 사랑의 마음으로 복음을 보아야 합니다. 말씀 안에서 주님의 희미한 그림자만이라도 뵙기를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복음을 받아들일 마음이 있다면 ‘주님의 말씀’은 희망의 씨앗이 되어 의미와 가치를 지닌 삶이 될 것입니다. 그들이 엠마오로 가는 길에도 주님께서 함께 하셨지만 믿음을 잃은 제자들은 주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을 뜬 그들은 비록 주님께서 옆에 계시지 않아도 언제나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고 있었기에 편안한 마음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성체를 모심으로써 먼 길이 가까워지고, 슬픔의 길이 기쁨의 길이 되고 성체를 모시기에 언제나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바로 희망의 시작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희망의 싹을 키워주는 마음속에 뿌려진 씨앗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는 만큼의 거리입니다. 만일 희망이 없다면 한낮에도 깜깜한 밤과 같이 절망과 시련이 가득한 길로 아주 먼 길이 될 것입니다.

희망이 있다면 그 희망과 기쁨이 어두운 밤을 환히 밝혀주어 먼 길도 가깝게 느껴질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희망이십니다.

주님, 아무리 어려운 고난 속에서도 저희가 가는 길이 언제나 희망의 길이 될 수 있도록 주님께서 함께 하여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마음 속에 솟구치는 열정적인 사랑을 느껴보았습니까?

2) 힘들고 지칠 때 나의 믿음과 희망은 무엇입니까?

3) 엠마오로 향하던 제자들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들을 바꾼 것은 무엇이었는 지 생각해보십시오. 

엠마오 가는 길

-임상만신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말할 수 없는 충격에 빠졌다. 그들은 스승을 잃어버린 죄책감과 상실감 그리고 두려움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오늘 복음은 실망과 좌절을 가슴에 안고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의 여정에 동행하신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었음에도 동행하신 그분이 누구인지 전혀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대화를 듣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루카 24,25)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이 약함을 매우 탄식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성경의 말씀을 풀이해 주셨다. 그것은 당신에 대하여 일어난 모든 일이 모세와 예언자의 글과 모든 성경에 이미 기록된 예언의 내용임을 확신시켜 주신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길을 걸어가며 들은 성경 말씀에 큰 감명을 받게 되지만 그럼에도 고정관념과 선입견 때문에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늘 함께 살던 사람도 면전에서 알아볼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보이는 경우가 있다. 엠마오 길을 가던 두 제자도 예수님께서 동행하실 때에 그냥 같은 방향으로 가는 사람인 줄 알았다. 부활이라는 말 자체를 생각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의 성경 말씀을 듣고, 예수님과 저녁 식사를 하는 중에 비로소 그들의 눈이 열리게 되어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로 알아보게 되었다.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루카 24,30-31)

여기서 ‘그들의 눈이 열리게 된’ 것은 그들의 깨달음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 즉 ‘성령’께서 이뤄주신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서서히 열리면서 어느 순간에 모든 것을 알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32)

이렇게 그들의 마음이 뜨겁게 감동되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들려주었던 성경 말씀과 그 안에 역사하신 성령으로 인한 것이었다. 성령께서는 말씀 속에서, 말씀과 함께, 말씀을 풀어 주심을 통해 우리 안에 역사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그 성령을 온전히 자신의 삶 속에 모시지 못한다면 그냥 한순간의 타오름으로 끝날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엠마오의 조촐한 식탁에서 일어난 일을 생각해야 한다. 두 제자가 엠마오에 도착했을 때 길을 더 가려는 예수님을 청해 저녁을 먹지 않았다면 절대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에게 함께 머물러 주시기를 재차 청하였다. 그리고 함께 기도하고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나눠 주실 때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다. 물론 그 순간 예수님은 사라졌지만, 그들은 마음이 뛸 듯이 기뻤다. 오는 길에서 그들의 마음이 뜨겁게 타오르고 감동적이었던 이유를 그때 비로소 깨달았던 것이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식탁에 우리를 초대하신다. 당신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마련하신 영원한 생명의 식탁으로 오라고 부르신다. 이 식탁에서 나누어지는 예수님의 성체를 통하지 않고서는 말씀의 뜨거움과 동행의 기쁨으로도 온전히 알지 못하며, 오직 당신이신 성체만이 당신 부활의 가장 큰 증거이며 우리가 갖는 유일한 확신이 되기 때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줄 내 몸이다.”(마르 14,22)


부활절, 스무하루 ....알렐루야!

-장재봉신부-


솔직히 이번 부활절만큼 우여곡절을 겪은 적이 있을까 싶습니다. 성전 문이 닫히고 미사참례마저 할 수 없는 낯선 일상을 살아야했으니까요. 홀로 부활 미사를 봉헌하는 사제의 모습이 주님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했을까 생각하면 먹먹할 따름입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아주 색다른 우리의 상황을 감안하시어 살피셨을 줄 압니다. 우리 마음에 더 다양하고 풍성한 묵상을 선물해 주셨다는 것을 압니다.

성전 문이 닫힌 그 때에도, 사제의 외로운 미사 안에서도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 주셨으니까요. 약속대로 온 세상에 당신의 부활을 선포하시며 힘과 용기를 선물해 주셨으니까요.

부디 이 글이 나갈 즈음엔 굴곡지고 매듭져 신음하던 세상이 완전히 치유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래서 아주 평범한, 그래서 더욱 소중한 우리의 매일을 되찾게 해주시기를 간곡히 청하며 이 글을 씁니다. 이 글이 나가는 부활 제3주일에는 우리 모두가 본당에서 신부님의 강론을 듣고 감격하여 감사드리는 은총을 허락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리며 이 글을 적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두어 주간 앞서서 원고를 넘겨야 한다는 게 곤란한 기분도 듭니다. 아마 이 글이 나갈 즈음이면 우리의 상황이 전혀 달라져 있을지 모르니까요. 아니 꼭 그리되기를 희망하며 소원하니까요.

오늘은 부활 제3주일, 부활을 맞고 스무하루 째가 되는 날입니다. 예전에 할머니께서는 출산한 집 대문에 삼칠일 동안 금줄을 치고 외부인 출입을 막는 이유를 설명해 주셨는데요. 서로가 조심조심…, 섣부른 축하 인사마저 삼가는 마음이라 하셨습니다. 선뜻 이해되지 않는 어려운 말씀이었지만 자라면서 그 의미가 마음에 담겼습니다. 이를테면 매사에 하늘의 뜻을 살펴 지내신 조상님들의 예의바른 지혜의 소산이었음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요. 기쁘고 좋은 일에서도 섣부른 축하마저 조심조심히 받으려는 마음가짐이었다는 걸 깨달았던 겁니다.

알토벨로 멜론의 ‘엠마오로 가는 길(1516~1517년)’.


오늘이 바로 부활절의 삼칠일 째 되는 날입니다. 이제 마음껏 부활을 기뻐하고 경축하며 신바람이 나서 동네방네 소문을 내며 즐거워해도 좋은 날인 셈입니다.

그리 생각하니 오늘 복음이 들려주는 이야기도 정겹기만 합니다. 연이어 들려오는 주님의 부활 소식에도 제자들의 마음이 깨어나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는 사실도 언짢지가 않습니다. 부활의 신비를 받아들이지 못한 채 여전히 어두웠던 제자들의 마음도 부활을 체험하지 못한 채 슬픔에 잠겨 늘어져있는 제자들의 모습까지도 덜떨어진 우리를 위해서 격려해주시는 주님의 다독임으로 읽힙니다.

사순시기 내내 우리도 그 때의 제자들처럼 칙칙한 분위기를 견디며 미사봉헌을 꼽아 고대하며 지냈습니다. 더러 예루살렘을 떠나기로 의견을 모았던 제자들처럼 뭔가 석연찮은 생각으로 마음이 혼란하기도 했습니다. 날이 밝기 무섭게 들려오는 코로나 19의 확산 소식에 몸도 마음도 움츠려 들기 일쑤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복음말씀에서 공동체를 떠나려는 이를 누군가가 나서서 강하게 말렸다거나 좀 더 기다리며 함께 기도하자고 권했다거나 서로를 위로하며 힘을 얻었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없다는 게 마음 쓰립니다. 이야말로 함께 있으나 일치하지 못했던 제자들의 썰렁한 분위기를 여실히 전해주니 말입니다. 오늘 두 제자가 떠나기로 결단했을 때에도 어느 누구도 붙잡지도 말리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고스란히 느끼게 해주니 말입니다. 한마디로 ‘갈 테면 가고’ ‘떠날 테면 떠나라’며 서로가 서로에게 방관자였다는 걸 알려주니 말입니다. 결국 제자공동체의 와해는 서로의 무관심이었음을 짚어주는 것이 아닐지요.

때문에 그 와중에도 발 빠르게 제자 두 사람을 뒤쫓으신 예수님이 고맙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무명인 제자를 위해서 정성을 쏟으셨다는 사실에 감격하게 됩니다. 그들이 믿음을 깨우치도록 성경말씀을 일일이 풀어 설명해주신 모습이야말로 복음 전파자의 태도임을 일깨워주신 것이라 싶습니다. 아울러 주님의 말씀으로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그들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예루살렘 공동체로 되돌아갔다는 점에 감동하게 됩니다.

그들을 돌아서도록 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나에게서 들은 대로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기다려라”(사도 1,4)는 주님의 당부를 기억했던 덕이었을 테니까요.

주님 부활의 가장 큰 은총은 이제 우리에게 성령이 선물되어진다는 진리입니다. 그 약속을 믿고 의지하고 살아가는 우리는 공동체를 떠나 엠마오로 향하려는 이들을 붙들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이미 엠마오에서 삶을 꾸려버린 이들에게도 오늘 주님처럼 살갑게 다가가 함께 하는 성의를 보여야 합니다.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은혜로운 이 주간, 주님의 부활을 한껏 찬미 드리는 빼어난 주님의 수제자의 삶을 다짐하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지 삼칠일 째인 오늘, 교회 공동체에 부어주신 축복을 자랑하면 좋겠습니다. 먼저 우리 눈이 밝아지기를, 어떤 것보다 우선하여 우리 마음이 주님 사랑으로 차오르길 원하면 좋겠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교회의 평화와 선에 항구하는 덕을 갖춘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하여 우리 모두가 한층 아름다워진 삶으로 온 세상에 주님의 부활을 보고 만지고 확인시켜주는 귀한 증인이 되면 너무너무 좋겠습니다. 누구에게나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그 증인입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면 진짜로 고맙겠습니다(사도 2장 참조).

긴 시간, 홀로 본당을 지키며 정말 외로웠던 저희 사제들에게 굳건한 믿음으로 힘을 주신 세상의 모든 신자분들께 부활하신 주님의 축복이 흠뻑 쏟아주시길 기도드립니다. 덧붙여, 불 꺼진 성전을 찾아, 묵묵히 기도에 동참해 주신 월평본당 교우님들께도 깊은 감사를 전하고 싶군요. 우리 모두가 부활을 살아냄으로 천천히 조금씩 그러나 열심하고 꾸준하게 이웃을 감동시키는 참된 전교자로 거듭나게 해주시길, 삶의 구석구석을 살펴 축복하는 부활하신 예수님께 청합니다. 


일상으로 돌아옴

-김상우신부-


2020년은 모두에게 잊지 못할 시간입니다. 코로나19 바 이러스로 한국 천주교 역사상 처음으로 미사가 중단되었고, 우리네 일상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얼마나 목말라하는지 돌아보게 하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부활 제3주일 복음은 루카 24,13-35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지 사흘째 되던 주간 첫날, ‘클레오파스’(루카 24,18)라는 제자와 익명의 다른 제자가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를 향해 걷고 있다고 복음서 저자는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1스타디 온은 185m로 60스타디온은 약 11km입니다. 성인이 1시 간 동안 걸을 수 있는 거리가 4~5km 정도인데, 예루살렘 인근 지역의 지리적·기후적 여건을 고려하면 1시간에 3km 남짓 걸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야기 속 두 제자는 예수 님의 비참한 죽음으로 절망과 고통 속에서 3시간가량을 터덜터덜 걷고 있습니다. 망연자실하여 걷는 두 제자의 여정 에 동반하는 이가 있지만, 그들은 그 동반자를 알아보지 못 합니다. 서쪽으로 해가 질 무렵이라 동반자의 얼굴이 가려 졌기 때문인지, 아니면 제자들의 근심이 깊었기 때문인지 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복음서 저자가 전하는 확실한 내용은 그 동반자가 두 제 자의 여정 중에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 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루카 24,27)라는 사실입니다. 


구약성경 속 예언들을 풀 어 설명해 주는 동반자입니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 미 저물어 그 동반자는 두 제자와 함께 밤을 묵기 위해 집 에 들어갑니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 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 게 나누어 주셨다.”(루카 24,30)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고 떼 어 나누는 행위는 최후의 만찬 때 열두 제자에게 명하셨던 예수님의 성찬례, 즉 성체성사인 미사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루카 24,31) 하느님 말인 성경을 해석해 주실 때, 그리고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쪼개어 나누어 주실 때 비로소 두 제자는 고통 의 여정 중에 자신들을 동반해 준 이가 부활하신 예수님이 심을 깨닫습니다. 


복음서 저자는 이 이야기 속 익명의 제자와 동일시하도 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우리는 이제 조심스럽게 일상으로 돌아오려고 합니다. 일상으로 돌아옴은 지난 시간의 고통 과 절망을 잊어버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일상으로 돌아옴은 당연하다고 여기며 살아온 것들에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도록 합니다. 일상으로 돌아옴은 앞으로 다 가올 또 다른 고통과 절망 앞에 좌절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희망을 속삭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곁에서 함께 걷고 계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고 있습니까?


엠마오 길에서

-송명철신부-


오늘의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하는 믿음의 길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뒤를 돌아보 면 감당하기 어려운 시간이 늘 우리를 따라왔습니다. 그러나 다시금 마음을 바로잡고 하루하루 의 앞길을 희망으로 살아가는 것이 부활이 아닐는지요?


엠마오로 가는 길에 동행하셨던 주님을 알아뵙고 그 사랑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이 부활의 삶을 새 롭게 사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엠마오로 가는 길이 어디냐고 묻습니다. 성서에는 예루살렘에서 예 순 스타디온 떨어진 곳, 약 11km 떨어진 지점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지금도 장소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성서 말씀의 내용으로 보아 엠마오란 실망과 좌절을 안고 떠나가는 곳이 맞습니다.


 제자들도 지금껏 살아왔던 삶의 방식을 접고, 새로운 삶을 찾아 나선 길, 그 길에서 예수님과 함께 걸어갔던 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엠마오로 가는 길이란 모든 것을 잃은 상실감에서 인생의 결론을 자신이 내리지 못하고 가는 사람의 길이라 합니다. 또한, 지난날 삶의 상념 속에 빠져 함께할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길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보면,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30리 길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갔는데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눈이 가려졌다는 뜻은 믿음, 희망을 잃어버 린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도 세상을 살면서 때로는, 너무 허탈하고 실망스러울 때 ‘아무 것도 뵈는 게 없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런 순간에 어떻게 마음을 추스르는지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누군가가 그러더군요. 인생의 행복조건 중에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 3명은 꼭 필요 하다고요. 그래서 힘들 때 두런두런 이야기할 수 있다면 그 어려운 고비를 넘길 수 있는 길이 열린다 고 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도 그런 동행으로서 예수님을 만나 함께했기에, 또 그 예수님과 함께 머물 수 있도록 손을 내밀 수 있었기에 부활의 증인으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사 회적 친구 3명도 필요하지만 참된 생명의 길을 가르쳐주시는 주님과의 동행 및 초대, 그리고 나눔의 삶을 살 수 있을 때 부활을 힘있게 증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분명 변화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하고 있는지를 확인해 보려면 다음과 같은 것을 점검해 보는 것 이 필요합니다. 나는 미사성제에 참여하면서 진정 형제들에게 용서를 청하고, 평화를 나누며, 성체를 모심으로써 사랑 안에 하나 되는 일치의 삶을 살고 있는지 말입니다. 미사성제야말로 주님과의 동행 을 알아볼 수 있는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향하게 해 주셨습니다.

-김율석신부-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영광을 주시어, 여러분의 믿음과 희망이 하느님을 향하 게 해 주셨습니다.”(1베드 1,21)  죽음을 이겨내고 부활하신 주님, 십자가의 죽음을 이겨내고 승리하신 주님,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기꺼이 수난과 죽음을 받아들이시고 승리하심으로써 우리에게 그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엠마오를 향해가는 두 제자의 모습에서 볼 수 있듯이 주님을 믿으면서도 때로 우리는 믿음과 희망을 잃어 버리기도 합니다.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들은 길(희망)을 잃어버렸습니다. 영광의 길이라고 믿었던 그들에게 주님의 수난과 죽음은 큰 상실감을 주었고 이로 인해 눈이 멀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돌아섭니다. 제자들의 그 모습에서 일상생활 속에서 신앙인임을 잊어버리고 방황하며, 주님으로부터 등 돌리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을 뿐 포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길에서 만난 낯선 나그네를 대하 는 그들의 태도를 보면 짐작이 갑니다. 믿었던 주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는 것 을 보여줍니다. 

그들이 주님을 포기하지 않았듯 주님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하 시면서도 주님은 곁에 계십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그 길에 함께하십니다. 그리고 당신 자신을 다시 한번 알려 주십니다. 어둠 속에 빛을 비추어 주듯, 절망 속에 희망을 샘솟게 하듯 말입니다.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이제 그들은 눈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다시 예루살렘을 향해 돌아서는 그들의 발걸음에는 불신과 절망이 사라지고 믿음과 희망으로 가득 채워집 니다.


 포기하지 않는 이들에게 희망의 길을 열어주십니다. 들으려고 하는 이들에게는 들려주십니다. 보려고 하는 이들에게는 보여주십니다. 지금의 순간이 절망처럼 느껴지고 어둠이라 느껴지지만 주님의 부활은 우리 에게 새로운 생명의 빛을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걷는 그 발걸음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함께하실 것 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우리의 믿음과 희망이 당신을 향하게 해 주소서!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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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발명가 조제프 몽골피에가 세계 최초로 열기구를 하늘에 띄웠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반응은 시원찮았습니다. 최초로 하늘을 나는 도구였지만, 불과 8분 정도만 창공에 있을 수 있었고 3km의 거리만 비행했기 때문입니다. 쓸모없는 곳에 돈과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면서, 열기구의 발명을 심하게 비웃었습니다. 그런데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벤저민 프랭클린이 이 열기구가 대단하게 쓰일 것이라며 극찬을 한 것입니다.

몽골피에보다 훨씬 더 유명하고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었던 벤저민 프랭클린이었기에 사람들은 다시금 열기구에 관심을 두게 됩니다. 하지만 이 열기구가 도대체 어떻게 쓰이게 될지를 알 수가 없어서 이렇게 묻습니다.

“저희가 보는 관점과 다른 것 같습니다. 이 열기구는 도대체 어떻게 쓰일까요?”

그는 대답합니다.

“그건 모르지만, 분명히 쓸모가 있을 것입니다. 막 태어난 갓난아기가 어떻게 될지를 아는 사람이 혹시 있습니까?”

실제로 이 열기구가 있었기에 100년 뒤에 라이트 형제의 무동력 비행기가 탄생할 수가 있었습니다.

내가 이해되지 않는다고 섣부르게 판단하는 ‘판단의 오류’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이를 위해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잘 들어야 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들으시고자 말을 거십니다. 하지만 지금 이 두 제자는 바로 그 일 때문에 슬픔에 젖어 엠마오로 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비록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셨지만,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것에 실망하고 있었지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경 기록에 관해 설명해 주면서 당신의 수난과 부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때 두 제자는 비록 주님을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마음이 타오르게 되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리고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하고 말씀드립니다. 이 말을 통해서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식탁에 앉아 주님으로부터 빵을 떼어 받을 때 비로소 주님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만약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또 주님을 초대하지 않았다면 과연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할 수가 있었을까요? 어쩌면 계속해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만 가득했을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라고 초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초대하지 않게 되면 주님을 알아볼 수도 없고, 주님과 함께 할 수도 없습니다.
사랑받고 싶다면 사랑하라. 그리고 사랑스럽게 행동하라(벤자민 프랭클린). 



내리막길의 영성.

헨리 나우웬(1932-1996) 신부님은 가톨릭 사제이며 유명한 신학자입니다. 저도 신학생 때 이분의 글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특히 인간의 심리를 다룬 그의 영성은 사제를 준비하는 제게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신부님은 여러 유명 대학에서 강의했고 또 많은 저서를 통해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제일 자신 있고 또 많은 시간을 사용했던 가르침의 길에서 행복을 얻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소명은 교수가 아니라 봉사라고 생각해서, 캐나다 토론토의 몸이 불편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라르쉬 데이브레이크’라는 공동체에 들어가십니다. 이곳에서 환우의 용변을 치우고 목욕을 도와주는 등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생활하셨습니다.

이런 삶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동안 성공과 권력이라는 외로운 꼭대기를 향하여 오르막길만 걸었습니다. 오르막길에서는 성공과 칭찬에 둘러싸여 ‘나’만 보입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환우들의 고통에 동참하는 삶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더 잘 알게 되었습니다.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인생은 내리막길에서 훨씬 성숙해진다는 것을요.”

신부님께서 말씀하신 내리막길의 영성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낮추는 것이 결코 쉬운 삶은 아닙니다. 그러나 행복한 삶입니다.                   

성경공부는 스승이 전부다

-전삼용신부-


 런던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할머니 한 분이 힘겹게 버스에 오르고 있었습니다. 흰 터번을 두른 시크교인 차장이 할머니를 부축하여 빈자리에 앉혔습니다. 그런데 할머니의 시선은 차장의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버스가 몇 정거장을 지나자 할머니는 내릴 때가 되었고 차장이 다시 할머니를 부축해 드렸습니다. 버스에서 내린 할머니는 차장에게 인사하며 안쓰럽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이고, 얼마나 아플꼬. 그 머리가 빨리 나았으면 좋겠구려!”

      어쩔 수 없습니다. 아는 만큼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믿는 것만 보이는 것입니다. 만약 남편이 외도한다고 믿어버리면 모든 것이 그 증거로 보입니다. 그러니 부활한 예수님도 믿어야만 보고 만날 수 있습니다.

      부활의 기쁨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에게만 주어집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나요? 어디서 예수님을 보셨나요? 바로 성체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매일 만납니다. 그런데도 만나지 못했다고 말한다면 아직 부활의 기쁨을 충만히 느끼지 못하는 상태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 우리는 성체가 예수님임을 미사 때마다 고백하면서 예수님을 만났느냐고 물으면 만나지 못했다고 대답하는 것일까요? 단순히 알 뿐, 믿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는 교리가 완전한 믿음으로 나아가려면 성경을 공부해야 합니다.

      오늘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도 이미 여인들에게서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은 뒤였습니다. 알기는 해도 만나지는 못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두 제자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확증해 줄 수 없었습니다. 비로소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나누어주실 때 그분을 알아보게 됩니다. 성체 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뵙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이 당신을 알아보게 하는 방법은 무엇이었나요? 바로 ‘성경공부’를 통해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부활에 대한 성경 구절들을 가슴 뜨겁게 설명해 주시지 않으셨다면 그들이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주실 때 그분을 알아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혹은 다른 사람이 성경 말씀을 설명해주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만큼 당신 부활에 대한 확신을 지닌 사람은 없었습니다. 예수님만큼 성경을 통해 부활의 확신을 그들에게 심어줄 스승은 없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열심히 공부한다고 좋은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공부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마르틴 루터는 자기 자신을 스승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이는 내 살이다, 이는 내 피다.”라고 하시는 성경 말씀을 자기 식대로 해석하였습니다. 그것 자체가 예수님이라기보다는 예수님께서 그것과 함께하신다는 ‘공재설’을 주장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프로테스탄트들은 그것이 이전에 가톨릭교회가 주장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며 반발합니다. 이에 루터와 함께 종교개혁의 양대산맥은 스위스의 츠빙글리는 예수님께서 “기념하라!”라고 하신 것에 초점을 맞추어 그냥 예수님을 기억하기 위해 기념하면 된다는 ‘기념설’을 주장합니다. 성만찬을 주님께서 함께 계시는 것에서 벗어나 그저 하나의 상징물에 불과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에 둘을 합의시키려 노력한 인물이 칼뱅입니다. 그는 “이는 내 살이다.”에서 “이다”에 집중하였습니다. 현재형이기 때문에 현재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영적 임재설’이라고 말하며 둘의 중간에서 이 예식을 기념할 때 역사의 예수님께서 현재에도 영적으로 임하신다고 말했습니다.

      ‘성경만으로’라는 기치로 가톨릭교회를 나온 대표적인 소위 세 개혁자들도 처음부터 성경해석에서 차이를 보이고 대립했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 성경을 해석할 만큼 완전히 성령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들이 스승이 된다면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 성체가 중심이 될 수 없습니다. 성경을 해석하기는 하지만 성체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게는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 뜨거워진 가슴으로 성찬례 때 진정으로 당신을 알아보게 하시고 당신을 만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굳이 빵을 떼어주실 때 그분을 알아볼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성찬례 때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지 못하는 성경공부는 빗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빗나간 스승으로부터 성경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제 나라의 환공이 어느 날 당상에서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윤편이 당하에서 수레바퀴를 깎아 만들고 있다가 몽니와 끌을 놓고 올라가 환공에게 물었습니다.

“한마디 묻겠습니다만, 전하께서 읽으시는 건 무슨 말을 쓴 책입니까?”

환공이 대답했습니다.

“성인의 말씀이지.”

“성인이 지금 살아계십니까?”

환공이 대답했습니다.

“벌써 돌아가셨다네.”

“그럼 전하께서 읽고 계신 것은 옛사람의 찌꺼기군요.”

환공이 벌컥 화가 나서 말했습니다.

“내가 책을 읽고 있는데 어찌 바퀴를 만들고 있는 목수 따위가 시비를 건단 말이냐? 이치에 닿는 설명을 하면 괜찮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죽이겠다.”

      윤편은 대답했습니다.

“제 일의 경험으로 보건대, 수레바퀴 만들 때 너무 깎으면 깎은 구멍에 바큇살을 꽂기에 헐거워서 튼튼하지 못하고 덜 깎으면 들어가지 않습니다. 더 깎지도 덜 깎지도 않는다는 일은 손짐작으로 터득하여 마음으로 수긍할 뿐이지 입으로 말할 수 없고, 제 자식 역시 제게서 이어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70인 이 나이에도 늘그막까지 수레바퀴를 깎고 있는 것입니다. 옛사람도 그 전해 줄 수 없는 것과 함께 죽어 버렸습니다. 그러니 전하께서 읽고 계신 것은 옛사람들의 찌꺼기일 뿐입니다.”

      장자의 ‘수레바퀴 깎는 노인’의 이야기입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로운 진리가 글 안에 다 담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 글을 쓰신 분이 살아계셔 그것을 설명해 줄 수 있을 때야만 그것이 죽은 자의 찌꺼기가 되지 않습니다. 이런 의미로 성경공부도 스승이 전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살아계신 예수님께서 설명해주실 때 그 빛을 발합니다. 그리고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그러면 그분을 만나 뵙게 됩니다. 예수님은 교회 안에 살아계십니다. 바오로가 교회를 박해할 때 왜 당신을 박해하느냐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살아있는 예수님의 교회와 함께하지 않고 교회로부터 가르침을 받지 않고 성경을 읽으면 죽은 책을 읽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이가 성령으로 충만할 수 없기 때문에 각자의 해석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으로 수많은 이단과 사이비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성경보다 그 성경을 해석해주는 참 스승인 교회를 올바로 찾아야만 합니다. 그 성경해석자는 분명 성체 안에서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있게 만드는 스승이어야 합니다. 성경해석을 통해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성경해석을 통해 성체 안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끌어주는 스승이 곧 그리스도를 닮은 성경해석자입니다.


-조재형신부-


자부심(自負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 또는 자기와 관련되어 있는 것에 대하여 스스로 그 가치나 능력을 믿고 당당히 여기는 마음.”이라고 사전은 정의합니다.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 축구팀은 16강은 물론 4강까지 진출했습니다. 거리를 가득 메운 응원단을 보았습니다.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세계 축구의 변방이었던 한국 축구가 강팀을 이기고 4강까지 올라갔기 때문입니다. 전 국민이 함께 외쳤던 대한민국 짝짝 짝짝짝이라는 응원 구호도 생각납니다. 코로나19로 많은 나라가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에 대한 대응모델로 한국식과 중국식을 이야기합니다. 중국식은 완벽한 통제와 봉쇄였습니다. 한국식은 선제적인 검사, 투명성, 개방성, 자발성이었습니다. 코로나19에 대한 대응으로 세계는 한국식 모델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외국에 살면서 한국이 잘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니 자부심이 느껴집니다.

 

이탈리아에 사는 교민들이 전세기를 타고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이탈리아는 확진자가 많고, 사망자도 많았습니다. 정부는 교민들을 위해서 전세기를 보냈습니다. 국민의 안전과 건강을 책임지기 위해서입니다. 불안하고, 위험한 지역에서 가족들이 있는 고국으로 돌아온 교민들은 자부심을 느꼈을 겁니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 받아 줄 곳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할 일입니까? 국민들도 정부의 정책과 감염 대책을 신뢰하고 있으며 돌아오는 교민들을 따뜻하게 맞이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진단키트는 안전하고 정확성이 높다고 합니다. 미국을 비롯해서 많은 나라가 한국의 진단키트를 수입하거나, 인도적으로 지원해 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진단키트가 코로나19의 확산을 저지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런 소식을 들으니 자부심이 느껴집니다.

 

자괴감(自愧感)’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마음이라고 사전은 정의합니다. 중독으로 고생하며 가족들에게까지 상처를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도박, 게임, , 마약은 중독성이 강합니다. 한번 빠지면 쉽게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후회할 걸 뻔히 알면서도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괴감을 느낄 겁니다. 은전 서른 닢에 예수님을 팔아넘긴 가리옷 유다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따라가기 보다는 자신의 길로 예수님을 따라오게 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놀라운 표징과 힘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주길 바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유다는 받아들이지 못했고 배반하였습니다. 스승을 배반했다는 자괴감에 빠진 유다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버렸습니다.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가 있습니다. 닭이 울자 베드로는 심한 자괴감을 느꼈습니다. 회환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오늘은 부활 제3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가슴 설레는 엠마오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자들은 엠마오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도중에 예수님을 만났지만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자괴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여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믿을 수 없었습니다. 십자가와 무덤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기에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면서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서에 기록된 이야기를 전해 주셨습니다. 예언자들이 했던 말을 전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자괴감에 빠져있던 제자들의 마음은 조금씩 변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날이 저물었으니 우리와 함께 머무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머물면서 빵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가슴이 뜨거워졌고, 사라졌던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엠마오는 장소가 아닙니다. 엠마오는 우리의 마음이 자괴감에서 자부심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공포에서 열정과 희망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두려움에 숨어있던 다락방을 열고 세상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시작됨을 아는 것입니다. 빈 무덤은 텅 빈 것이 아니라 부활의 표징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에서 비록 넘어지셨지만 다시 일어나셨고, 십자가에 달려 죽음에 임박해서도 하느님께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으며, 죽으셨지만 죽음의 어둠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시기를 지내면서 그 부활의 기쁨과 부활의 영광을 우리 마음 안에 벅찬 감동으로 받아들이고, 우리 이웃에게 드러내고 증거해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계획과 예지에 따라 여러분에게 넘겨지신 그분을, 여러분은 무법자들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에 사로잡혀 계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성찬례는 주님 부활의 가장 큰 표징입니다!

 -양승국신부-

 

루카 복음사가는 부활 이야기들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감명깊은 엠마오 길의 두 제자 이야기를 다시 한번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한 부분 한 부분이 다 소중하지만, 엠마오에 도착하신 예수님께서 식탁에 앉으셔서 빵을 떼어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시는 장면, 빵을 손에 받아든 제자들이 ‘앙!’하고 크게 한입 떼어먹자, 비로소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뵙는 장면이 제 눈에 쏙 들어왔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엠마오에서의 식사를 일상적인 식사 차원을 뛰어 넘는 높은 차원에서의 식사, 결국 성찬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빵의 뗌’은 곧 성찬의 거행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루카 복음 24장 30절)

 

 성경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언하지만, 성찬례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살아있는 형상으로 현존케 합니다. 따라서 성찬례는 주님 부활의 가장 큰 표징이요,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시고 현존하신다는 가장 큰 표징입니다.

 

 성체성사는 주님의 죽으심만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부활도 기념합니다. 따라서 이제 부활하신 주님께서 당신 교회 공동체와 함께 머무르시는 것은 성체성사 안에서입니다.

 

 엠마오 길의 제자들과 오늘 우리들에게는 성경과 성찬례! 두 가지가 다 필요합니다. 성경은 그들의 무뎌진 마음에 불을 지폈으며, 성찬례는 그들의 이해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없애 주었습니다.

 

 성경 말씀들이 부활 사건에 비추어 풀이되고, 성찬의 식사가 거행될때, 오늘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활활 불타오르게 될때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이 특별한 장면은 이천 년 세월이 흐른 지금도 지구촌 방방곡곡에서 매일의 성체성사 안에서 쉼없이 재현되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의 고귀한 몸인 성체는 오늘도 나눠지고 쪼개어져 우리 손으로 전해지는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그 옛날 엠마오 길의 제자들에게 하신 똑같은 모습으로 친히 빵을 떼어 나눠주신다 생각하고, 지극히 정성스런 몸과 마음으로 영성체에 임해야겠습니다.

 

 무관심하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다양한 분심이나 불신 속에 성체를 영한다면,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는 그야말로 돼지 발의 진주로 전락할 것입니다. 그저 한 조각 밋밋하고 영양가없는 빵 한조각뿐일 것입니다.

 

 굳센 신앙으로, 확고한 믿음의 마음으로, 이 성체가 그분 현존의 표지이자 그분 자체임을 굳게 믿으며, 이 성체가 나를 거룩한 영적 존재로 변화시키고 성장시켜줄 영약으로 여기며, 정성껏 영성체에 임할 때, 2천년전 엠마오 길의 제자들이 체험했던, 그 뜨거움이 오늘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 눈이 활짝 열려 우리 인생 여정 가까이 항상 현존하시고 동반하시는 주님의 존재를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동료 이웃들 안에 항상 숨쉬고 살아계시는 주님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습니다

-이영근신부-


오늘은 부활 3 주일 입니다.

오늘 <1독서>는 오순절 날에 베드로가 유대인들에게 한 설교의 일부입니다. 이 설교의 핵심은 한 마디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습니다.”(사도 2,24)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쳐주신 분(사도 2,27)이라고 고백합니다.

<2독서>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약 30년이 지나서 베드로가 소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서간으로,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셨으며(1베드 1,28),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로 만드셨음을 말해줍니다.

<복음>은 당신 부활의 모습을 드러내주시는데,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곧 당신의 제자들이 믿음을 지켜내도록 하기 위해, 얼마나 섬세하게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십니다. 사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은 당신께 대한 믿음을 잃어버릴 처지에 놓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희망을 잃고 슬픔과 절망에 빠져 이전의 자신들의 삶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아마 우리 모두는 실망과 절망에 빠져 본 적이 있을 것 입니다. 가던 길을 중단해버릴 만큼, 희망이 꺾인 적도 있을 것 입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버릴 만큼, 믿었던 바가 의혹과 불신으로 바뀌어버린 적도 있을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 엠마오로 가고 있는 두 제자들이 바로 그러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찾아오시어 길을 함께 걸으시며 동행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루카 24,16)


절망과 슬픔에 빠져,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먼저 말씀을 건네십니다.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루카 24,17) 무슨 일이냐?”(루카 24,19)


사실, 그들은 일어난 일의 표면만 보고서 절망에 빠져, 진정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슬픔과 절망에 빠졌을 때가 가장 위기의 순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장 기회의 순간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때가 우리의 희망, 우리의 믿음을 내려놓아야 할 때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희망, 우리의 믿음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희망과 믿음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눈이 가려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눈이 가려져 있음을 깨달아야 할 때요 우리의 눈이 열려야 할 때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요한 20,25)


그렇습니다. 알아야 할 바를 제대로 알아야 하고, 그것을 믿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설명해 주시며(루카 24,27), 슬픔에 젖은 그들의 어루만지시어 마음이 타오르게(루카 24,32)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루카 24,29)하고 청하자, 식탁에 앉으셔서, 빵을 들어 떼어 나누어주시며(루카 24,30) 사랑으로 응답하십니다. 그토록, 깊고 깊은 어둠 속에서 빛을 비추시니,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루카 24,31).

여기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보는 믿음의 눈이 열리는 과정을 봅니다. 그리고 이는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렉시오 디비나)의 과정에 비길 수 있습니다.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설명해 주심읽기’(lectio), 마음이 타오르게 하심은 묵상(meditatio),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하고 청함은 기도’(oratio), 식탁에 앉으셔서, 빵을 들어 떼어 나누어주시며, 그들의 눈이 열어 예수님을 알아보게 하심은 관상(contemplatio)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말씀의 경청으로 지성을 동반하여 깨달아 알아듣고’(lectio), 알아들은 바를 마음으로 받아들여 믿으며(meditatio), 믿는 바를 그분의 뜻에 따라 응답하고(oratio), 마침내 그분을 뵈오며 일치를 이룹니다(contemplatio).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붙드시고 지켜주시기 위해 감동적으로 우리를 동행하십니다. 오늘도 우리의 슬픔과 절망과 고통 속에서, 당신을 쪼개어 나누어주시며 우리를 동행하십니다. 어려움 속에서 우리를 동행하시는 우리 주님의 깊고 깊은 사랑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동행과 사랑을 깊이 체험하고 꿰뚫어 본 사도 바오로는 이를 참으로 아름답게 표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분께서는 늘 우리를 그리스도의 개선행진에 데리고 다니면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가 우리를 통하여 곳곳에 퍼지게 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피어오르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1코린 2,14-15)


오늘 우리도 눈이 열려야 할 때입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과 부활생명을 보는 눈이 열려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어려움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를 뿜어 나르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고,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 할 때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루카 24,16)


주님!

저는 고통을 없애주기를 바라지만, 당신은 고통을 함께 지라 하십니다.

저는 평화롭기를 바라지만, 당신은 평화를 위해 일하라고 하십니다.

저는 세상의 부패를 비난하지만, 당신은 세상의 부패를 막는 소금이 되라 하십니다.

저는 세상의 어둠을 탓하지만, 당신은 세상의 빛이 되어 밝히라 하십니다.

주님, 당신 빛 안에 걷게 하소서. 아멘.


희망을 잃었을 때

-반영억신부-


사랑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사랑은 하느님과 하나가 되게 합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가운데 하느님을 만나 뵙는 은총에 눈뜨기를 바랍니다. 사랑 받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다면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에 사랑을 더 하십시오. 사랑이신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의 모든 기대와 희망이 무너졌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미워하는 모든 사람들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하시리라고”(루카1,68.71 ;2,38) 희망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에 찬 행동을 보았던 제자들과 수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아, 임금님이라고 환호하였고 (루카19,37-38), 예수님께서 당장에 예루살렘에서 하느님의 다스림을 시작하실 것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루카19,11).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무기력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메시아가 십자가 위에서 비참하게 고난을 받으시며 삶을 마감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에서 죄수로 죽어야 한다는 것은 유다인들이 가지고 있던 메시아에 관한 모든 희망들과는 모순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자신이 원수들에게 예속 당한다면 어떻게 그가 원수들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해낼 수 있다는 말입니까? 제자들과 많은 사람은 영광을 쫓았으니 메시아의 죽음은 절망을 가져왔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더 이상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다는 소문은 절망에 절망을 더했습니다. 낙심과 불안이 커지니 슬픔만 커질 뿐입니다. 그래서 빨리 그곳을 떠나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온 백성은 분명히 알아두시오.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주인 이 예수를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주님이 되게 하셨고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사도2,36.)라고 선포하기까지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았습니다.

그 와중에 예수님께서는 무너진 가슴에 다시 희망의 싹을 틔워주기 위하여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동행하셨습니다. 그러나 눈이 가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도 상관하지 않으시고 함께 걸으셨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인생여정에서도 무거운 시련과 고통 안에 함께 동행하십니다. 그분이 함께 하시지만 내 눈이 가려 못보고 못 느낄 뿐입니다. 문제에만 매여 있으면 다른 것이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사실 돌아보면 은총인데 당장은 은총으로 느끼지 못하고 힘에 겨워합니다. 은총의 순간을 은총으로 느끼는 것은 뒷날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습니다. 정신을 차려 깨어있으면 희망을 잃었을 때, 그때야말로 기도할 때이고 주님을 만날 수 있는 때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이 뜨기 까지는 갈 길이 멉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기적은 문제가 있는 곳에서 믿음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실망으로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던 제자는 날이 저물어 동행하던 사람과 서로 헤어져야 할 때가 왔을 때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하고 그분을 붙들었습니다. 너는 너의 길을 가고, 나는 길을 가면 그만인데 구지‘함께 묵자’고 붙잡았습니다. 여기서 그들의 됨됨이가 드러납니다. 나그네를 외면하지 않는 모습이 창세기 18,1-15의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천사를 만난 아브라함의 모습을 떠오르게 합니다. 결국 집에 들어가서 함께 식탁에 앉아 찬미를 드리고 빵을 떼는 순간에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나그네를 소홀히 하지 않는 사랑의 실천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의 눈이 맑아져서 하느님을 뵐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그리고 사랑의 구체적 실천인 자선은 “하느님의 자비를 우리 위에 내리게 하는 힘이고 우리 구원의 확실한 표입니다.”(성 요한 비안네) 따라서 “자선을 베푸는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하고 민첩하게 해야 합니다.”(나지안즈의 성 그레고리오) 때를 놓치면 그만큼 충분한 효과를 얻지 못합니다.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그 사람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개신교 신자에게도 전화를 많이 받게 되었는데 저에게 전교하는 분도 계셨습니다. 그분이 하시는 말씀은 대략 “오늘도 한 영혼이 지옥불에 떨어지고 있습니다. ……이단에 빠지는 사람이 많으니 설교에서 바르게 가르쳐 주십시오.”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성모님께서는 예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오직 주 예수그리스도만이 섬김을 받으셔야 할 분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제가 미처 받지 못하면 메시지를 남기고 새벽에도 상관없이 전화를 합니다. 어느 날은 미안했던지 “요즘 사제님을 괴롭혀서 죄송합니다.” 하고는 또 시작하더라고요. 정말 지나친 열심도 문제입니다. 열심히 하는 것도 고상하게 열심 해야 합니다. 친절하게도 문의할 것이 있으면 연락하시라고 전화번호까지 알려 주었는데 신자분들에게 알려드릴까도 생각했었습니다. 새벽에, 한 밤중에 시도 때도 없이 문의하면 어떨까요? 그러면 똑 같은 사람되지요!…

이웃의 요구를 잘 받아주어야 하는데 특히 개신교에서 열성을 보이는 이가 이렇게 나올 때 우리가 성모님에 관하여 기본적으로 알려줘야 할 것을 준비하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성모님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자기 어머니는 어떻게 모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마리아. 마리아하고 부르는 사람들이 목사님 부인에게는 사모님, 사모님 하잖아요!

성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성모님의 신앙의 모범을 본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천사를 통해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을 겸손과 순명,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구세주의 탄생을 가져오셨고,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주님을 철저히 따르셨던 어머님께 존경을 표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믿음의 대상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시는 구세주의 어머니로서 합당한 공경을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첫 표징을 보여 주셨는데 잔칫집에 술이 떨어진 것을 먼저 알아채신 분이 어머니셨습니다. 그리고 능력을 지니신 아들, 예수님께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어머니는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순명하시며 때를 기다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의 말씀을 지나쳐 버리지 않으시고 마침내 물을 포도주로 만든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어머니의 역할이 이런 것입니다. 곤란한 처지에 있게 된 사정을 미리 알아채시어 그 사람과 공명하시고 그것을 주님을 통해 해결해 주시는 분입니다. 어머니의 전구는 이렇게 소중한 것입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철저히 아들의 삶에 동행하셨으며 십자가 밑에 서 계셨고 아들의 시신을 가슴에 품어야 했던 분이십니다. 요람에서 무덤에까지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직접 갈 수도 있지만 효과적으로 가기위해 어머니의 손을 빌어 예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성모님의 치마폭이 예수님을 가릴 수는 없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고, 오직 예수님을 들어 높이셨습니다. 당신에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신 것도 “당신 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로다”,“능하신 분이 큰일을 하셨음이요, 그 이름은 거룩하신 분이시로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분 마음에는 늘 주님이 모두였습니다. 이런 어머니를 모시고 있음을 자랑으로 여겨야 합니다.

제자들이 나그네를 집안에 모셔드려 대접하고 믿음의 눈이 뜨였듯이 우리가 성모님을 마음에 모셔 들이면 예수님을 어떻게 모셔야 할지를 가장 효과적으로 깨우치게 됩니다. 성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결국 “성모님을 통하여 예수님께로!”가는 것이고 결국은 주님의 능력을 만나는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우리가 직접적으로 만나든 간접적으로 만나든 예수님을 만나길 바란다면 성모님을 잘 모셔야 하고 이웃을 사랑으로 받아드려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함께 하십니다. 실망과 좌절의 늪이라 생각될 때 더 간절히 기도하고 사랑하면 믿음의 눈을 뜨게 되어 비로서 주님과 함께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하십시오. 이웃을 결코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한 가지 질문으로 정리하겠습니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누가 말했을까요? ‘하루살이’가 말했답니다. 하루살이에게는 내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약속해 주신 내일이 있어 행복합니다. 부활한 새 생명의 내일이 있어 기쁩니다. 부디 내일을 희망하는 만큼 오늘을 사랑에 사랑을 더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다. 

-송영진신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심정은 무척 복잡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고(19절),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것이라고(사람들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21절).
그런데 예수님이 너무도 허망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큰 기대’가 ‘큰 실망’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두 제자가 믿음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닙니다.
두 사람은 “왜 메시아가 그런 고난을 당해야 하고, 왜 그렇게 죽어야 하는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라고 생각했는데, 만일에 믿음을 완전히 버렸다면
그런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냥 “속았다.” 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해되지 않아서 답답해한 것은,
그래도 아직은 믿음과 기대가 어느 정도 남아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들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든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여자들의 증언입니다(22절-23절).
두 사람은 여자들의 말이 사실이기를 바라는 마음과 “정말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까?” 라는 ‘반신반의’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를 바라는 희망과 믿어지지 않는 마음과 믿고 싶은 마음과
아직 확실한 상황을 알 수 없어서 답답한 마음이 섞여 있는 복잡한 심정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은 두 제자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면,
두 제자는 예수님의 부활을 희망하면서도
처음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놀라운 소식이어서 그 소식을 믿지 못했고,
그러면서도 희망을 버리지 못했고(믿고 싶어 했고),
예수님께서 성경을 설명해 주신 다음에는 ‘머리로’ 믿기 시작했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본 다음에는 완전한 믿음을(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두 제자의 모습은, 막연한 기대감에서 희망으로, 희망에서 믿음으로,
믿음에서 확신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잘 나타냅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이 ‘두 명’이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두 제자는 ‘체험’을 통해서 확신을 갖게 되었는데, 그 체험은 한 개인의
사적인 체험이 아니라, 두 사람이 함께한 공동체의 체험이었고,
그래서 그들의 증언은 공적인 효력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을까?
두 제자는 예수님께서 특별히 아끼시는 제자들이었을까?
예수님께서 ‘두 제자에게만’ 나타나신 것은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도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또 오백 명이 넘는 신자들이
예수님을 만났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1코린 15,5-8).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싶어 하고,
믿으려고 노력하는 모든 신앙인을 상징한다고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이런 약속을 하셨습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요한 14,18-21).”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다음에 이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약속을 지키고 계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루카 24,25-27).”

여기서 “어찌 이리 굼뜨냐?” 라는 말씀의 표현만 보면,
이해력이 부족한 것을 나무라시는 말씀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그것은 아니고, 이 말씀은 믿으려고 하지 않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라는
말씀의 뜻은, “너희는 왜 성경 말씀을 믿으려고 하지 않느냐?”입니다.
성경 말씀을 믿는 것은 지혜로운 것이고,
믿으려고 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이해력이 부족한 것 자체는 잘못도 아니고 죄도 아닙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성경을 많이 읽었을 것이고, 성경의 내용을 잘 알고
있었을 텐데, 그런데 아마도 그들은 ‘믿음 없이’ 읽었거나,
아니면 자기들이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은 안 믿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그들이 잘못한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 두 제자에게 성경을 설명해 주신 일은, 그들에게 ‘새로운 지식’을
전해 주신 일이 아니라, 그들을 ‘믿음으로’ 인도해 주신 일로 해석됩니다.

성경은 살아 계시는 하느님의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은
‘지금’ 우리에게 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만일에 ‘믿음 없이’ 성경을 읽거나 단순히 지식을 쌓을 목적으로 읽는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옛날이야기를 읽는 것이 될 뿐입니다.
또 이해되지 않는 내용이라고 해서 안 믿는다면,
그것도 역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태도가 아닙니다.
(지금은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도, 먼저 믿으면, 또는 ‘믿음으로’ 읽으면,
언젠가는 깨닫게 되는데, ‘말씀의 뜻’을 깨닫게 될 뿐만 아니라,
그 말씀들이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고 있고, 살아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30-32)”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주실 때 두 제자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본 일을,
그들이 ‘예수님의 사랑’을 통해서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예수님의 현존을 깨닫게 해 주는 최고의 체험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예수님을 알아본 순간 예수님께서 사라지셨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현존을 깨닫고 믿었다면, 예수님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상관없게 됩니다.
두 제자는 ‘말씀’을 통해서 ‘믿음’으로 인도되었고, ‘사랑’을 통해서
‘주님 현존 체험’을 했고, 그리고 그들의 ‘믿음’은 ‘확신’이 되었습니다.
(두 제자의 체험은 오늘날에도 신앙인들 안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파스카의 의미와 부활체험 증거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24,13-35: 엠마오의 제자들

오늘 전례에서도 파스카의 의미를 신앙의 빛에 비추어 알아들으려 하는 노력하고 그 부활체험을 증거하여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베드로 사도는 오순절, 즉 성령강림이 주님의 부활이 참되다는 것을 증명해준다고 한다. 즉 주님이 부활을 통하여 하느님께 올라가 성령을 부어주실 수 있었다는 말이다. 2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그러기에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하느님 사랑의 계획의 도달점은 바로 우리 자신이며 그것이 성경을 통하여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잘 알아듣고 묵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성 예로니모가 성경을 무시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무시하는 것과 같다.”(Comment. in Isaiam. Prol., PL 24,17; 계시 27)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예언하고 준비하는 구약성경 안에서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신비를 구약성경의 메시지로 이해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바로 예수님 자신이 권위 있는 해석을 하고 계시다. 부활 날, 두 제자가 실망에 가득 차 엠마오로 가면서 그때 일어난 일에 대해 말하고 있을 때, 어떤 낯선 사람이 동행하며 대화가 이루어진다. 그때 제자들은 그들이 기대했던 바가 모두 무너져 침통하다는 말을 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사형당함으로써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사흘째나되었다는 것은, 희망이 없다는 의미이다(21). 두 제자와 다른 모든 사람이 어떤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는지 나타나고 있다. 강력한 메시아를 기대하였지만, 십자가의 일은 정반대의 일이었다. 여기에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성경이 어떻게 예언하였는가를 깨우쳐 주신다(25-27). 그러기에 이해할 수 없었던 그 사건은 하느님 계획의 일부였으며,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 시작이라는 것이다. 그 성경의 예언은 하느님의 옳으심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유다인들과 제자들은 성서의 말씀을 왜곡하고 편리하게 해석하여 참 의미를 외면함으로써 멋대로 해석하였다는 것을 꾸짖고 계신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께서는 성경의 참된 의미를 되찾아 주신다. 이렇게 하여 성경의 본래 의미가 되살아난다. 이렇게 신앙의 메시지로서의 성경의 말씀은 오직 믿는 마음을 통해서만이 그 풍부한 의미를 다 드러낼 수 있다.

 

예수께서 성경에 대해서 설명해 주실 때에 두 제자는 이 모든 것을 체험한다. 그들은 그 낯선 동행인이 나자렛 사람 예수였다는 것을 알았을 때,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32). 이는 우리가 신앙 안에서 성경을 받아들일 때, 성경은 그리스도와 만날 수 있는 특별한 장이 될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엠마오의 제자들에게서와같이 가장 권위 있는 주석가가 될 것이다.

 

또한, 성경과 더불어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현존하신다는 표지가 바로 성체성사이다. 두 제자에게 낯선 여행자가 초대되어 저녁 식사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은 성체성사를 암시하고 있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30). 성체성사를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이때 제자들이 예수를 알아보고 있다. 그러나 그 순간 예수님의 모습은 사라졌다고 기록하고 있다(31). 제자들은 즉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제자들에게 빵을 떼실 때 그분을 알아보았다.”(35)고 한다. 루카 복음사가는 최후의 만찬의 성체성사와 연결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그 제자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이야기가 그들은 그분이 빵을 떼어주실 때야 그분을 알아보았다라는 말로 끝나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신앙은 인간에게 파스카 신비를 열어 보여줄 뿐 아니라, 신앙은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신 그 행위의 결실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부활과 만남을 전제하면서 동시에 그 부활을 일으키기 때문에 부활의 원인이며 또한 결실이다.”(A. Stöger, Vangelo secondo Luca, Vol. II, Roma 1968, p. 332).

 

우리는 여러 가지 표징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 우선은 성경 말씀을 신앙으로 받아들일 때 그 말씀이 그분을 만날 수 있는 장이 되며, 그 안에서 성경에 대한 주석가는 가장 권위 있는 예수님으로 모시게 될 것이다. 그 성경이 이제부터 나에게 있어 생명의 말씀으로 살아있게 된다면 말이다. 또 하나는 성체성사의 표지이다. 이는 이제 우리가 성체를 이루는 삶을 살면서, 우리 자신을 나누는 삶을 살 수 있을 때, 우리는 그 사랑 안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복음은 이러한 삶을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다.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 보게 된 일을 이야기 해 주었다.(루카 24, 35)

-한상우신부-

가장 가까운
일상에서부터
시작되는 일상의
부활입니다.

우리의 일상을
되돌아보는
시간입니다.

우리의 일상은
주님께 맞닿아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일상이 되었습니다.

감사만이
함께 하는 빵의
기쁨이됩니다.

빵을 떼어 주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우리를 위한
일상입니다.

또 다시
빵을 떼어 주시는
일상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일상에서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내십니다.

울림이 있는
일상은 계속하여
나눔과 감사로
이어집니다.

예수님
눈동자에 비친
일상에는 뜨거운
사랑이 있고
가장 따뜻한
나눔이 있습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기쁜
부활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점점 더 굳건해지는 제자들의 모습이 눈에 확연히 들어옵니다.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루카 24,17).

"침통한 표정." 제자들의 마음 상태를 잘 드러내 주는 단어입니다. 그들의 실의와 열패감, 두려움과 절망을 고스란히 담고 있지요. 예수님과 동행하는 동안 그들을 채웠던 기대감이나 우월감은 온데 간데 없습니다. 구심점이시던 주인을 잃은 그들은 불안하고 초라합니다.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루카 24,29).

비록 눈이 가리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분과 함께 걸으며 말씀으로 차오른 제자들이 예수님을 초대합니다. 집도 절도 없으면서도 마치 주인의 위치라도 된듯, 낯선 이를 환대하는 모습이지요.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루카 24,33).

그분이 빵을 떼어 나누실 때 눈이 열리어 예수님을 알아본 그들은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발길을 되돌립니다. 빵을 나눈 기억이 그들을 일깨웠고, 그 안에 깃든 사랑의 기억이 그들을 돌려 세운 것이지요.

제1독서는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 부분입니다.

"목소리를 높여 말하였다"(사도 2,14).
"내 말을 귀담아들으십시오"(사도 2,14).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사도 2,29).

잡히시던 예수님을 버려두고 도망치고, 그분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십자가 형장에는 가까이 가지도 못했던 이의 변화가 느껴지십니까? 베드로의 목소리는 시종일관 확고하고 자신감이 넘칩니다. 예수님 제자 시절 세속적 욕망과 기대에 들떠 자리싸움 할 때의 자만심과는 확연히 결이 다른 확신입니다.

제2독서에서는 그렇게 변화된 베드로가 신자들에게 권고합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지내십시오"(1베드 1,17).

베드로 사도가 권고하는 "두려워하는 마음"은 징벌을 휘두르시는 피도 눈물도 없는 하느님의 무자비한 심판 앞에서 인간적으로 대처하는 비겁한 처세술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는 거대한 사랑 앞에 섰을 때 존재 밑바닥에서부터 우러나는 경외심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경외심은 충만한 믿음과 확신에 찬 희망을 양분 삼아 자라나지요.

엠마오 제자들이나 베드로에게서 드러난 믿음과 확신의 변화는 그들을 부활의 증인으로 성장시킵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예수님이 보여주신 변화를 눈여겨 봅니다. 복음 안에 드러난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은 시종일관 물흐르듯 막힌 데 없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가까이 가시고, 그들과 걸으시고, 질문을 던지십니다. 그들의 두려움과 실패를 경청하시고 그들에게 성경을 풀이해 주시지요. 마치 주인이라도 된듯 예수님을 붙든 그들의 초대에 기꺼이 응하시지만, 이번에는 당신이 주인이라도 되신 듯 식탁의 기도와 나눔을 주도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제자들 곁에서 당신의 본질을 하나씩 드러내시는 사이, 제자들은 원인도 모르면서 점점 더 눈이 열리고 마음은 뜨거워지고 확신이 차오릅니다. 그들은 차츰 충만해지는 중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이 정화된 자신감으로 차올라 점점 더 단단해지고 성숙해지는 사이,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루카 24,31)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당신을 내주고 또 내주시다가 마침내 "온전한 비움"이 되어 물리적 실재를 거두신 것입니다. 마치 어미가 자식을 먹이고 입히고 거두며 살찌우고 성장시키는 사이, 본인은 작아지고 쪼그라들다가 육신의 흔적조차 스러지듯이 말입니다. 이 얼마나 신비로운 "주고받음"이고, 놀라운 "교환의 신비"입니까!

부활 시기가 무르익어가는 오늘 우리를 놀라게 한 제자들의 확신에 찬 음성과 태도는 그런 스승의 피와 살, 말씀과 기운을 먹고 차오른 겁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점점 더 확고해지고 스승은 점점 더 빈 상태가 되다가 사라지신 것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영과 육의 실존을 안고, 세속 안에서 영과 육의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님의 부활은 이 신비에 동참하라고 초대합니다. 더 충실한 주님의 제자, 더 사랑스런 주님의 신부가 되기 위해 더 채워야 할 것, 더 비워야 할 것이 저마다 있겠지요.

잘 채워나가고 잘 비워나가면서 주님과 더욱 가까워지고 일치하는 신앙의 여정 되시길 축원합니다. 실의와 절망으로 시작된 엠마오의 길은 그래서 참 중요하고 소중합니다.

동행하시는 주님처럼  
-김찬선신부-


오늘 복음은 그 유명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얘기입니다.
그리고 이 얘기는 우리가 <엠마우스 방법론>이라는 것으로
요즘 유명한 양성이나 공동체 방법론의 근거가 되는 얘기입니다.

피양성자나 공동체 구성원들이 성소의 위기를 겪고 있고,
그래서 공동체가 깨어질 위기에 처했을 때 엠마우스 방법론이 유효한데
위기의 원인이 무엇이고 해법이 무언인지를 이 얘기에서 찾는 것입니다.

먼저 성소를 잃고 공동체가 깨지는 원인을 보겠습니다.

이 엠마우스 방법론에서 볼 때 그 이유와 원인은 아주 분명한데
주님을 잃을 때 개인은 성소를 잃고 공동체는 깨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얘기에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예루살렘 공동체에서 이탈하여
자기 길을 가는 것이니 우리로 말하면 성소를 포기하고 퇴회하는 것이며
이렇게 이탈자가 하나 둘 생기면 공동체가 서서히 깨지게 되는 것인데
성소도 잃고 공동체가 깨지는 이유가 다 주님을 잃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요즘 성소를 잃거나 공동체 붕괴의 원인과 이유를 우리는 자주
신앙적인 것에서 찾지 않고 공동체에 비젼이 없다느니 또는 공동체 구성원
간에 소통이 잘되지 않아서 그렇다느니 이런 것에서 원인과 이유를 찾지만
주님을 잃어서 갈 길을 잃고 성소를 잃는 것이고,
주님의 사랑을 잃어서 공동체가 붕괴하는 겁니다.

그런데 왜 주님을 잃습니까?

엠마오로 가는 제자와 다른 제자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 주님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고 더 정확히 풀어서 얘기하면
주님을 따른다고 하였지만 주님을 따른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주님을 따른 것은 주님을 따른 것이 아니라
실은 주님을 통해 자기들의 성취와 성공의 길을 간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일부 제자들은 출세와 성공을 따르지는 않았지만
십자가 길의 주님은 따르고 싶지 않았고
죽음의 길은 더더욱 따르고 싶지 않아서 포기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제자들은 십자가 길을 거부하였지만
예루살렘을 떠나지 못하고 남아있던 제자들이고
엠마오의 제자들은 아마 성공과 성취의 길을 가던 제자들이었을 겁니다.

엠마오의 제자들은 자기들 생각에 주님은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고,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다."
고 실토를 하는데 그 기대가 깨져 떠난 것입니다.
그들에게 주님은 그들의 기대에 못 미치는 분이셨습니다.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제자들 역시 주님을 잃은 자들이지만
주님께 실망한 자들이 아니라 자기들에게 실망한 자들이고,
끝까지 따르지 못한 비겁함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지만,
주님께서 무덤에 계시지 않고 부활하셨다는 여인들의 말에
일말의 희망을 걸고 부활하신 주님을 뵈오려고 기다리던 자들입니다.

이제 공동체를 떠나고 성소를 잃은 사람에게 성소를 되찾게 하는
  해법을 보겠는데 당연히 주님을 잃어 성소를 잃은 것이기에 
해법 또한 주님을 되찾게 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지요.
그렇다면 주님을 되찾게 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엠마오의 제자들에게 하신 그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다가감-동행-동감-감동/깨달음-돌아섬의 방법입니다.

주님께서는 공동체를 떠난 제자들에게 돌아오라고 명령하거나
말로만 오라고 하지 않으시고 몸소 제자들에게 다가가십니다.
사실 오늘날의 육화는 낮춤이 아니라 다가감이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다가가서는 동행을 하는 것입니다.
다가간 것은 다시 데려오기 위함이지만 바로 무리하게 끌고오는 게 아니라
묵묵히 그의 길을 같이 가주며 그들의 얘기를 들어주고 동감해주는 겁니다.

이렇게 충분히 동행과 동감을 해준 다음에 이제 성소의 길을 설명해주고,
같이 빵을 나눔으로써 서서히 깨닫게 하고 ,마음이 움직이게 해야
비로서 주님을 모셔들이고 스스로 공동체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부활의 사랑이고 부활케 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먼저 주님처럼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라야 자신처럼 실망하고
길을 떠난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고 동반해주는 사랑을 실천할 뿐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성소의 길을 깨닫게/감동케 하여 돌아서게 하는 사랑,
부활케 하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내 성소의 길을 동행해주시는 주님처럼 우리도
형제의 성소의 길을 동행해주기를 다짐하는 오늘이 되어겠습니다. 

    -고인현신부 OFM-


    오늘 복음은 엠마로오 가는 예수님과 두 제자와 예수님과 나눈 부활 사건을 전해줍니다. 두 제자는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슬폈습니다. 그들은 엠마오로 가던 길에 그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가까이 오시어 함께 걸으셨지만 그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태어나실 때 빛나던 별이 그분께서 돌아가시자 빛을 감추었듯이,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예수님의 본모습이 감추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클레오파스는 요셉의 아우 클로따스로서, 예수님의 삼촌으로 전해집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다른 한 제자는 클레오파스의 아들 시메온으로 뒤에 예루살렘의 제2대 주교가 되어 서기 70년 이후 예루살렘 교회를 이끌었다고 합니다. 전승에 따르면, 시메온은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당신 제자들의 마음이 죽어 있는 것을 보시고 그들에게 나타나셨지만, 그들의 눈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눈에 분명히 보였지만 그분이 누구신지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루카 복음사가가 알려 주듯이, 그들의 눈이 가리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보는 눈이 가리어 있던 것이 아니라 그분을 알아보는 눈이 가리어 있었던 것입니다.

    두 제지는 주님께서 말씀을 건네시는데도 마음안에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분께서 되살아나셨다는 것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분께서 다시 살아나시리라고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믿음을 잃었고 희망도 잃었습니다. 그들은 죽은 채로, 살아 계신 그리스도와 함께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죽은 채로, 생명 자체와 함께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생명께서 그들과 함께 걷고 계셨지만 그들의 마음 안에서는 아직 생명이 회복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분께서 다른 어떤 곳이 아닌 빵을 떼는 행위 안에서 제자들이 주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이 행위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에게 믿음의 눈을 가지도록 촉구합니다. 참된 믿음을 지닌 신앙이라면 아무 이유없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고 아무 생각없이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과 희망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가난한 이들과 빵을 떼어 나누는 행위에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부재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그런 부재가 아니고 믿음의 눈이 없을 때 오는 부재입니다.

    참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 뵙고 우리 마음속에 기쁨과 사랑의 불이 타오를 수 있도록 주님께 믿음의 눈이 열리는 은총을 청하도록 합시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4월 30일 부활 제3주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예수께서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 주셨다. 그제서야 그들은 눈이 열려  예수를 알아보았다(루가 24,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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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우리는 성체가 예수님임을 미사 때마다 고백하면서 예수님을 만났느냐고 물으면 만나지 못했다고 대답하는 것일까요? 단순히 알 뿐, 믿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는 교리가 완전한 믿음으로 나아가려면 성경을 공부해야 합니다.

 오늘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도 이미 여인들에게서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은 뒤였습니다. 알기는 해도 만나지는 못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두 제자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확증해 줄 수 없었습니다. 비로소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나누어주실 때 그분을 알아보게 됩니다. 성체 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뵙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이 당신을 알아보게 하는 방법은 무엇이었나요? 바로 ‘성경공부’를 통해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부활에 대한 성경 구절들을 가슴 뜨겁게 설명해 주시지 않으셨다면 그들이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주실 때 그분을 알아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성경은 열심히 공부한다고 좋은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공부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 뜨거워진 가슴으로 성찬례 때 진정으로 당신을 알아보게 하시고 당신을 만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굳이 빵을 떼어주실 때 그분을 알아볼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성찬례 때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지 못하는 성경공부는 빗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빗나간 스승으로부터 성경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살아계신 예수님께서 설명해주실 때 그 빛을 발합니다. 그리고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그러면 그분을 만나 뵙게 됩니다. 예수님은 교회 안에 살아계십니다. 바오로가 교회를 박해할 때 왜 당신을 박해하느냐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살아있는 예수님의 교회와 함께하지 않고 교회로부터 가르침을 받지 않고 성경을 읽으면 죽은 책을 읽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이가 성령으로 충만할 수 없기 때문에 각자의 해석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으로 수많은 이단과 사이비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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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오는 장소가 아닙니다엠마오는 우리의 마음이 자괴감에서 자부심으로 바뀌는 것입니다두려움과 공포에서 열정과 희망으로 바뀌는 것입니다두려움에 숨어있던 다락방을 열고 세상으로 나가는 것입니다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시작됨을 아는 것입니다빈 무덤은 텅 빈 것이 아니라 부활의 표징이 되는 것입니다주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에서 비록 넘어지셨지만 다시 일어나셨고십자가에 달려 죽음에 임박해서도 하느님께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으며죽으셨지만 죽음의 어둠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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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설명해 주시며(루카 24,27), 슬픔에 젖은 그들의 어루만지시어 마음이 타오르게(루카 24,32) 하십니다그리고 그들이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루카 24,29)하고 청하자식탁에 앉으셔서빵을 들어 떼어 나누어주시며(루카 24,30) 사랑으로 응답하십니다그토록깊고 깊은 어둠 속에서 빛을 비추시니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루카 24,31).

여기에서우리는 하느님을 보는 믿음의 눈이 열리는 과정을 봅니다그리고 이는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렉시오 디비나)의 과정에 비길 수 있습니다곧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설명해 주심은 읽기’(lectio)마음이 타오르게 하심은 묵상(meditatio)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하고 청함은 기도’(oratio)식탁에 앉으셔서빵을 들어 떼어 나누어주시며그들의 눈이 열어 예수님을 알아보게 하심은 관상(contemplatio)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곧 말씀의 경청으로 지성을 동반하여 깨달아 알아듣고’(lectio)알아들은 바를 마음으로 받아들여 믿으며(meditatio)믿는 바를 그분의 뜻에 따라 응답하고(oratio), 마침내 그분을 뵈오며 일치를 이룹니다(contemplatio).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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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예로니모 성경을 무시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무시하는 것과 같다.”(Comment. in Isaiam. Prol., PL 24,17; 계시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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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성경에 대해서 설명해 주실 때에 두 제자는 이 모든 것을 체험한다그들은 그 낯선 동행인이 나자렛 사람 예수였다는 것을 알았을 때,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32). 이는 우리가 신앙 안에서 성경을 받아들일 때성경은 그리스도와 만날 수 있는 특별한 장이 될 것이며그리스도께서 엠마오의 제자들에게서와같이 가장 권위 있는 주석가가 될 것이다.

또한성경과 더불어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현존하신다는 표지가 바로 성체성사이다두 제자에게 낯선 여행자가 초대되어 저녁 식사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은 성체성사를 암시하고 있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30). 성체성사를 상기시키는 대목이다이때 제자들이 예수를 알아보고 있다그러나 그 순간 예수님의 모습은 사라졌다고 기록하고 있다(31). 제자들은 즉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제자들에게 빵을 떼실 때 그분을 알아보았다.”(35)고 한다루카 복음사가는 최후의 만찬의 성체성사와 연결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리는 여러 가지 표징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우선은 성경 말씀을 신앙으로 받아들일 때 그 말씀이 그분을 만날 수 있는 장이 되며그 안에서 성경에 대한 주석가는 가장 권위 있는 예수님으로 모시게 될 것이다그 성경이 이제부터 나에게 있어 생명의 말씀으로 살아있게 된다면 말이다또 하나는 성체성사의 표지이다이는 이제 우리가 성체를 이루는 삶을 살면서우리 자신을 나누는 삶을 살 수 있을 때우리는 그 사랑 안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오늘 복음은 이러한 삶을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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