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3월 17일 사순 제3주간 화요일

Margaret K 2020. 3. 16. 19:41

2020년 3월 17일 사순 제3주간 화요일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마태 18,21-35)


Lord, if my brother sins against me, 

how often must I forgive him?
As many as seven times?”
“I say to you,

not seven times but seventy-seven time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사랑하는 것이 먼저일까요? 사랑받는 것이 먼저일까요? 아니면 용서하는 것이 먼저일까요? 용서받는 것이 먼저일까요? 대부분 사랑받고 용서받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는 용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과 같습니다. 만 탈렌트는 당시 기준으로 셈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금액인데, 여기에 만 탈렌트를 빚진 종이 있습니다. 주인은 그의 빚을 탕감해 줍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에게는 모질게 빚을 갚으라고 합니다.

자비를 입었지만 자비를 베풀지 않은 종에 관한 이 비유는, 주인 곧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의 빚을 탕감해 주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죄를 용서한다는 것은 내가 용서받은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용서하기 전에 이미 용서받았다는 것을 먼저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실천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이미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하느님의 자비를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종의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은 “가엾은 마음”에서 비롯합니다. 가엾은 마음은 자비를 말하는 다른 표현입니다. 어떤 대가나 조건 없이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용서의 실천은 ‘마음에서’ 시작합니다. 죄를 용서받은 체험은 다른 이들의 잘못을 용서하는 원동력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에게 잘못한 이들을 용서하고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제가 키우는 개는 3마리입니다. 꼬박꼬박 밥을 챙겨주고 같이 놀아주기도 합니다. 또 어디가 아픈 것 같으면 차에 태워 병원까지 다녀옵니다. 성지에 온 지 벌써 5년째이니 5년째 이렇게 챙겨주고 보살펴 주었습니다. 분명히 개들에게 많은 것을 주고 있으며 잘 보살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아플 때, 어려움 속에 있을 때, 개들이 은혜를 갚겠다고 어떤 특별한 행동을 할까요? 5년 동안 제게 밥을 직접 해준 적도 없고, 우울해한다고 제 앞에서 재롱잔치를 한 적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은혜도 모르는 개라면서 개들을 향해서 화를 낸다면 어떨까요? 아마 사람들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기대할 것을 기대하세요.”

개를 향한 보살핌과 정성을 보답받으려는 기대를 당연히 하지 말아야 합니다. 단순히 함께 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이 당연한 생각을 왜 사람에게도 적용해봅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 내게 응답하지 않는 사람을 향해 “어떻게 저럴 수 있어?”라면서 분노합니다. 그러나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이런 생각만 할 수 있다면 내게 다가오는 상처를 조금이라도 줄여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성인 성녀들은 말씀하시지요.

‘사람에게 기대하지 말고 하느님께 기대하라. 사람에게 청하지 말고 하느님께 청하라.’

사람에게 기대고 사람에게 청하기 때문에,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용서하지 못할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일흔일곱이라는 수는 모든 세대의 모든 죄가 용서되었음을 상징합니다. 특히 십자가 안에서 주어진 하느님의 용서라는 충만한 선물을 받지 못한 세대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용서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느님께 특별한 선물을 드렸습니까? 하느님에게 도움이 되는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를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시고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완전히 용서해 주셨듯이, 우리도 서로를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를 위해 매정한 종의 비유 말씀을 해주시지요. 주인이 큰 빚을 탕감해주었으므로, 당연히 그 종도 자기 동료에게 자비롭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은 자비 받은 것은 잊어버리고 동료를 감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자신이 받은 자비는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남이 내게 한 피해에 대해서는 ‘그럴 수 없다.’라고 단정을 지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받은 자비를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자비를 계속해서 받을 수가 있습니다.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체호프).


함께 해야 하는 인간 관계.

간장 게장은 참으로 맛있습니다. 이 맛으로 인해 오죽했으면 ‘밥도둑’이라는 말까지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맛은 인정하지만, 게장을 먹을 때 꽤 불편함을 겪습니다. 딱딱한 게 껍데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맛있는 게장 먹기가 힘들다고 먹는 것을 포기해야 할까요? 아니면 게 껍데기까지 꼭꼭 씹어 먹어야 할까요?(그런 사람이 있기는 하더군요. 딱 1명 봤습니다) 아닙니다. 그 맛을 위해 이 정도의 수고를 충분히 감수할 수 있습니다.

인간관계도 이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각 사람에게는 장점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래서 함께 어울려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장점만 있는 것이 아니지요. 단점도 분명히 있고 나를 불편하게 하는 점도 분명히 있습니다. 이 단점과 불편함이 있다고 사람과의 관계를 포기하겠습니까? 불편하고 힘들게 해도 함께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으로 인해 상처를 받게 된다면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저 사람은 맛있는 게장이다. 게 껍데기가 불편하다고 게장을 포기하지 않듯이, 나는 저 사람을 포기하지 않겠다.”                  

용서도 거저 받았다고 믿어야 거저 내어줄 수 있다

-전삼용신부-


맥스 루케이도의 『토비아스의 우물』 이야기입니다. 사막 한가운데 자리 잡은 마을 사람들은 물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우물 주인 토비아스가 마을 사람들에게 물을 거저 주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토비아스는 아들과 함께 먼 길을 떠나며 하인에게 “누구에게든지 물을 거저 주라.”며 우물 관리를 맡겼습니다. 처음에 하인은 모든 사람에게 물을 주었지만, 얼마 있지 않아 자신에게 감사를 표현하는 사람에게만 물을 주었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자기에게 잘 보이는 사람에게만 물을 주었습니다. 주민들은 하인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물가에 주인의 아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하인을 꾸짖고 주민들에게 예전처럼 마음껏 물을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주민들은 나쁜 짓을 한 하인에게 물을 주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들은 “하인에게도 물을 주는 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라며 종을 용서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고 있지 못하다면, 내가 무엇을 받았는지 까맣게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악한 종이 됩니다. 물이 아버지의 것임을 알면 누구에게나 내어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처럼, 용서도 내가 무엇을 받았는지 깨닫게 되면 선인과 악인을 가리지 않고 내어주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용서’라는 주제로 말씀하시는 중에 예수님께서 ‘일곱에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성경에서 ‘일흔’이라는 숫자는 하느님의 백성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살기 위해 내려간 숫자가 ‘칠십’입니다. 또 ‘칠’은 성령을 통한 새로운 창조, 곧 신약에서는 ‘칠성사’를 상징합니다. 우리는 성사를 통해 새로 태어난 하느님의 백성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에서 임금이 거저 탕감해준 빚인 ‘만 탈렌트’가 곧 ‘성사’인 것입니다.

      성사의 원천은 그리스도의 옆구리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로 새로 태어납니다. 그 피와 물이 교회에 맡겨졌고 교회는 그 피와 물을 성사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베풉니다. 우리는 특별히 세례-견진-성체성사를 통해 새로 태어났습니다. 새로 태어나면 새로운 본성을 갖습니다. 그리스도는 당신 인성과 결합한 신성을 성체를 통해 우리에게 넣어주셔서 우리도 신성을 입게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요한 1,12)라고 말합니다.

      이 신비는 곧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몫을 선물로 받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없음을 말해줍니다. 만 탈렌트가 바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린 피와 물이고, 우리가 새로 태어나기 위해 교회에서 받는 성사입니다.

      헤밍웨이의 소설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스페인인 아버지가 집을 나가 마드리드로 간 아들과 화해하기로 다짐을 합니다. 아버지는 뒤늦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엘리베랄’ 신문에 광고를 냅니다. “파코, 화요일 정오에 몬타나 호텔에서 만나자. 다 용서했다. 아빠가.”

파코는 스페인에서 아주 흔한 이름입니다. 아버지가 약속 장소에 나가자 파코라는 이름의 젊은 남자가 무려 800명이나 나와서 저마다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받은 물을 나누어주어야 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이렇게 많습니다. 내어주지 못하면 받지 않은 것입니다. 용서는 내가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만 탈렌트, 곧 성사를 통해서만 구원받는다는 것을 믿어야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반면 그렇게 받아놓고도 남을 미워한다면 그 믿지 못한 것 때문에 하느님 자녀의 자격을 잃게 됩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 합니다. 거저 용서하지 못한다면 거저 받은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조재형신부-


오늘은 진보와 보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진보의 가치는 변화와 개혁입니다. 변화와 개혁은 발전과 성장을 담아낼 수 있지만 때로 시행착오와 모험이 수반됩니다. 보수의 가치는 전통과 질서입니다. 쉽게 흔들리지 않는 안정감을 주지만 때로 새로운 변화와 도전에 적응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한국인은 10년간 진보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정당의 대통령 후보를 선택했고, 다음 10년은 보수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정당의 대통령 후보를 선택했습니다. 정당은 깨끗하고, 투명한 정치를 해야 하고, 국가의 경쟁력을 키우고, 국민을 보호할 수 있는 정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그래야 깨어있는 국민의 선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국민은 바다와 같다. 잔잔한 수면이 되어 배를 앞으로 가게도 하지만, 거센 풍랑이 되어 배를 가라앉게도 한다.’ 현명한 국민의 선택이 진보와 보수의 날개를 조정할 수 있습니다.

 

처음 신학을 배울 때입니다. 윤리신학, 교의신학, 영성신학, 성서신학을 배웠습니다. 교수신부님들께서는 교회의 전통과 교회의 가르침에 충실한 신학을 가르치셨습니다. 한국교회가 바티칸보다 더 바티칸 같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한국 교회는 오랜 박해를 겪었습니다. 변화와 개혁보다는 전통과 질서를 중요하게 여겼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은 목숨을 바칠 수 있는 결단이었습니다. 교리와 법은 엄격했습니다. 그래야 목숨 바쳐 지켜온 신앙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또 다른 방향의 신학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민중신학, 해방신학, 아시아신학, 정치신학, 역사신학입니다. 한스큉, 구티에레즈, 레오나르드보프, 스힐러벡스, 로핑크, 이반일리치와 같은 신학자들이 있습니다. 동아리에서 함께 토론하기도 했습니다. 교회가 나가야 할 방향이 무엇인지, 사목자들이 나가야 할 방향이 무엇인지 고민했습니다. 전통과 개혁의 날개에서 균형을 잡는 것은 기도와 영성이었습니다. 겸손과 희생이었습니다. 겸손과 희생이 없는 전통은 권위주의로 변할 수 있습니다. 기도와 영성이 결여된 개혁은 혼란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예전에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겨울과 봄은 사이가 나쁜 줄 알았습니다.

봄이 싫어서 겨울이 떠나는 줄 알았습니다.

그렇지 않았습니다. 겨울은 봄을 기다렸습니다.

봄은 겨울의 고마움을 알았습니다.

겨울은 봄에게 자리를 내주고

그 자리에 꽃이 피는 겁니다.”

저도 막연하게 겨울과 봄은 사이가 나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작가는 봄과 겨울이 사이가 좋고,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진보와 보수도 그렇습니다. 전통과 개혁도 그렇습니다. 갈등하고, 대립하고, 분열하고,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생하고, 보완하고, 소통하고, 발전하는 겁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자비와 용서입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을 드러내는 겁니다.

 

이제 저희는 마음을 다하여 당신을 따르렵니다. 당신을 경외하고 당신의 얼굴을 찾으렵니다. 주님, 당신의 길을 알려 주시고,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소서. 저를 가르치시어 당신 진리로 이끄소서. 당신은 제 구원의 하느님이시옵니다. 나는 너그럽고 자비로우니 이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용서받아야 할 죄인

-반영억신부-    

 

우리는 살아가면서 가능한 행복하게 잘 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노력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어느 한 순간 걸려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야! 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도 아무의 도움도 필요 없을 만큼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넘어지는 이유를 보면 욕심에서 비롯됩니다.


 야고보사도는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에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에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야고4,1-2).하고 말합니다. 불교에서도 탐욕과 어리석음과 성냄이 인간을 병들게 만드는 독이라고 가르칩니다.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화를 내고 다투는 일이 없을 텐데 욕심 때문에 남과는 물론 심지어 형제와도 등지게 되기도 합니다. 기대가 크면 클수록 서로를 힘들게 하고 자유를 억압하며 담을 높이 쌓게 됩니다.

    

 얼마 전 한 어르신이 자녀들에게 유언으로 유산을 분배하고 세상을 뜨셨는데 자녀들에게 큰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자녀들은 모두 내로라할 만큼 큰 재산을 가진, 그야말로 살만한 사람들이었는데 서로 서운함을 가지고 등지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재산이 없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재산은 분명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인데 재산이 사람을 죽입니다. 그 담을 허물 수 있는 은총을 간구합니다.

    

 담을 허문다는 것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사실 용서라는 것이 말같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은 사람이 사랑할 수 있듯이 하느님으로부터 진정한 용서를 경험한 사람은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을 성찰해 볼 때 하느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삶을 살아온 날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마음을 다잡으려 하지만 인간의 연약함에 넘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하느님과 이웃으로부터 용서를 받아왔고 앞으로도 분명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자비는 더욱 크게 필요합니다. 내가 용서를 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나의 의지로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할 수 있는 힘의 근원이신 하느님으로부터 힘을 얻어야 합니다.

    

 용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이 용서 덕분에 죄악으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그 자유에 이르기까지 고통을 수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당신을 못박은 사람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하고 기도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에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하고 기도하며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7,60). 하고 애원하였던 스테파노의 마음을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주님으로부터 받아야 합니다.


 용서는 선물로 주어졌지만 만약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담고 있게 되면 하느님과 이웃으로부터 고립되게 되고 영적으로 뿐 아니라 육적으로도 건강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18,22). 용서는 결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아닙니다. 선행도 아닙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먼저 주님의 사랑과 용서를 받은 만큼 우리도 이웃을 용서해야 합니다. 설령 전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나쁜 사람이라도! 어느 날, 내가 용서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가슴깊이 느낄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지길 기도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거나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말고 오히려 축복해 주십시오. 바로 이렇게 하라고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복을 상속받게 하려는 것입니다”(1베드 3,9).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너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마태 18,33)-

-이영근신부-


사순시기의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는 의로움입니다.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맺음입니다.

그리고 그 한편에는 회개가 있고, 또 다른 한편에는 용서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용서입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제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 18,21)라는 베드로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마태 18,22)고 말씀하시고, 많은 빚을 탕감 받고도 작은 빚을 탕감하지 않은 악한 종에 대한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 비유에는 대조적인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한편에는 조금만 참아달라는종의 간청에 대해, 단지 참아 주는 것을 넘어서 청하지도 않은 빚을 그냥 아무런 조건 없이, ‘먼저탕감해주는 자비로운 왕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동료의 간청을 들어주기는커녕 오히려 그 동료를 끌고 가서 빚진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버리는 무자비한 종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 모두가 하느님 앞에서 빚진 자라는 사실입니다.

죄에 있어 빚진 자이고, 사랑에 있어 채무자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더 깊이 명심해야 할 사실은 우리가 이미 그 빚을 탕감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곧 용서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용서의 특성을 세 가지로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용서하되 끝까지 용서하라는 것이요,

<둘째>용서하되 먼저용서하라는 것이요,

<셋째>용서하되 진심으로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첫째>, “용서하되 끝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은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표현됩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도 용서하라.(마태 18,22)


용서하되 무한히, 계속해서, 끝없이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용서에는 한계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몇 번 용서해보고 그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미처 받아주지 못한다 하더라도 끝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렇게 죽기까지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둘째>, 용서하되 먼저용서하라는 말씀은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표현됩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너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마태 18,33)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잘못을 고백하기도 전에, 아니 잘못했노라고 인정하기도 전에, 아니 용서를 청하기도 전에, 당신께서는 먼저우리를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사랑하기도 전에 먼저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가 구원을 청하기도 전에 먼저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우리는 그 자비를 이미 입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용서해야 할 궁극적인 이유는 먼저우리가 용서를 통해 구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 용서를 통해 타인을 구원으로 인도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셋째>, 용서하되 진심으로 용서하라는 말씀은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표현됩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35)


진심으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으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원망도 원한도 없는, 분노도 미움도 보복도 없는, 오직 사랑만으로 하는 용서 말입니다.

결국, “용서란 오늘 <복음>에서, 왕이 빚진 종을 가엾이 여겨 빚을 탕감해주고 놓아 보내는 것(마태 18,26)으로 드러납니다.

이는 용서란 곧 자비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용서에 힘입어 구원을 받았기에, 이제 우리 역시 이웃과 형제들에게 용서와 자비를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곧 이 은혜로운 사순시기에, 우리가 할 일은 바로 이 용서와 자비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되새겨 봅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너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마태 18,33)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주님!

끝까지 용서하게 하소서.

일곱 번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끝까지 용서하게 하소서.

꺾이고 또 꺾이어도, 희망과 믿음과 사랑을 결코 버리지 않게 하소서.

용서받기에 앞서, 먼저 용서를 청하게 하소서. 아멘.


용서 

-송영진신부-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1-22)”

여기서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라는 베드로 사도의 질문은, “일곱 번까지만
해도 됩니까?”일 수도 있고, “일곱 번이라도 해야 합니까?”일 수도 있습니다.
‘일곱 번까지만’으로 생각하면, 그 이상은 하기 싫다는 ‘소극적인’ 말이 됩니다.
그러나 ‘일곱 번이라도’로 생각하면, 한두 번으로는 부족하고 형제가 참으로
변화되어서 회개할 때까지 계속 용서해야 하지 않느냐는 ‘적극적인’ 말이 됩니다.
베드로 사도가 어떤 의도로 질문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예수님의 답변은 확실하고 분명합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는 예수님 말씀은,
“‘몇 번’이라는 한계를 미리 정해 놓지 말고, 거듭 용서해 주어라.”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용서를 해야 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용서를 받아야 하는 입장에서는, 용서가 무제한으로,
또 무기한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 기한은 하느님의 심판이 시작되기 전까지입니다.
하느님의 심판이 시작되면 회개할 기회가 없습니다.
따라서 용서받을 기회도 없습니다.
그리고 끝끝내 회개하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하고,
그 전에 받은 용서도 모두 헛일로 만들어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을 심판하는 일이 주님만의 권한인 것처럼
사람을 용서하는 일도 주님만의 권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용서’는, ‘나의 권한’으로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용서의 은총’을 형제에게 나누어 주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남에게 나누어 줄 수는 없는 법입니다.
주님께서 ‘용서의 은총’을 나에게 주셨다면, 내가 그 은총을 잘 간직하고 있어야
형제에게 그것을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는 말씀 뒤에 이어지는 ‘매정한 종의 비유’는,
주님께서 나에게 얼마나 큰 은총을 주셨는지를 알려 주는 가르침이기도 하고,
내가 받은 은총을 어떻게 형제에게 나누어 주어야 하는가에 관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마태 18,24-27).”

여기서 ‘만 탈렌트’는 사람의 힘으로는 갚을 수 없는 엄청난 액수의 빚인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용서의 은총’이 그렇게 크다는 뜻입니다.
이 말을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용서의 은총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모든 은총은
사람의 힘으로는 갚을 수 없는 ‘무한한 은총’이라는 것을 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지금 비유에서 말하고 있는 상황은,
주님께서 우리를 ‘그냥’ 용서해 주신 상황입니다.
(우리가 회개했기 때문에 용서해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가엾게 여기셔서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백 퍼센트 무조건’ 우리를 용서해 주신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용서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도 남을 용서해야 한다는 조건입니다.
‘매정한 종의 비유’를 보면, 엄청나게 큰 빚을 탕감 받은 종이 자기에게
아주 작은 빚을 진 동료의 애원을 들어주지 않는데, 그것은 남을 용서해야 한다는
조건을 무시함으로써 자기가 받은 용서의 은총을 스스로 버린 일입니다.
(만 탈렌트에 비하면 백 데나리온은 푼돈입니다.)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32-35).”

주인은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조건으로 종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었는데, 종은 그 조건을 실행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에게 베풀어진 자비를 스스로 저버렸습니다.
원래 아무런 조건도 없이, 또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고
베풀어 주는 것이 ‘자비’입니다.
비유 속에서, 주인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런 조건도 붙이지 않고,
또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고 종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조건은 주인 자신을 위한 조건이 아니라,
‘만 탈렌트’나 되는 빚을 탕감 받은 그 종을 위한 조건입니다.
(비유의 내용만 보면, 베풀어 준 자비를 취소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한 번 주신 은총을 취소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 상황은 은총이 취소되는 상황이 아니라, 주님께서 은총을 주셨는데도
받은 쪽에서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지 않은 상황입니다.
너무 늦기 전에 회개하고, 형제에게 자비를 베푼다면,
누구든지 주님의 은총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여기서 ‘너무 늦기 전에’ 라는 말은, ‘심판이 시작되기 전에’ 라는 뜻입니다.
앞에서 만 탈렌트는 사람의 힘으로는 갚을 수 없는 큰 빚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라는 말은,
그냥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겼다.”이지만,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을 생각하면,
“동료에게 진심으로 자비를 베풀 때까지” 라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억울하고 분한 일을 당해서 자기 의지로는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 상황일 때, 더욱이 가해자는 자기가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하지도 않고
마음 편하게(뻔뻔하게) 지내는데 피해자인 나는 억울함과 분함 때문에 먹지도
자지도 못할 때, 용서가 안 되어서 못하는 것인데도 용서를 실천하지 않고 있다는
죄책감까지 더해질 때, 그럴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입니다.
“도와달라고 주님께 간청하는 기도.”
주님은 우리가 할 수 없어서 못하는 것을 탓하시는 분이 아니라,
할 수 있는데도 안 하는 것을 꾸짖으시는 분입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18,21-35: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베드로가 주님께 제 형제가 죄를 지으면 일곱 번까지 용서해 주어야 하느냐고 묻자,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도 용서해야 한다.”(22)고 하셨다. 일흔일곱이라는 수의 신비는 이 특별한 수가 모든 세대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음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여기엔 한 세대도 빠지지 않았으므로, 십자가 안에서 주어진 하느님의 용서라는 충만한 선물을 받지 못한 세대는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완전히 용서해 주셨듯이, 우리도 서로를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용서를 이처럼 여러 번 하라는 것은 분노할 시간이 없음을 보여준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로 우리의 죄를 모두 용서하시기 때문이다. 또 그렇게 많이 용서해야 한다는 의무가 우리에게 면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복음의 은총을 통해 하느님께 한없는 용서를 받았기 때문이다.

 

임금이 그에게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과 셈을 시작한다. 종은 많은 돈을 맡고 또 빌렸지만 주인에게 아무런 이득도 가져다주지 못하고 많은 돈을 잃은 듯하다. 이익을 내기는커녕 엄청난 돈을 잃어 많은 빚을 지고 말았다. 임금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을 팔아서 빚을 갚으라고 하였다. 이것은 그가 탕감 받는 빚이 얼마인지 정확하게 알려 줌으로써 그를 가르치고자 했던 것이다. 그도 그와 같은 자비의 마음을 가지도록 가르친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했는가?

 

아내와 자식을 판다.’는 것은 하느님의 기쁨으로부터 완전히 철저하게 소외되는 것을 뜻한다. ‘판다는 것은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지는 것을 보여 주는 분명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란,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마태 7,23; 루카 13,27)라는 가차 없이 무서운 말을 듣는 사람들이다.

 

종은 무릎을 꿇고 참아달라고 탄원한다.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27) 주인은 종이 이 일에서 배워 동료 종들에게 관대해지고 자신의 불행에서 깨달음을 얻도록 하기 위하여, 그가 큰 망신을 당하지 않으면서도 어느 정도 책임을 지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탕감해주기는커녕 참아주지도 않고 그를 옥에 가두어 빚을 갚게 하였다.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34) 이는 영원히 고문 형리에게 맡겨졌다는 뜻이다. 그는 결코 그 빚을 갚을 수 없기 때문이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35)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아버지라고 하지 않으시고 내 아버지라고 하셨다. 하느님을 이렇게 사악한 사람의 아버지라고 불러서는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마태 18, 32)

-한상우신부-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이기적이고 악한
우리들 마음입니다.

복음은 다시
용서를 가르킵니다.

용서와 자유와
평화와 행복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을
탕감해주시는
하느님의 놀라운
용서입니다.

탕감은 괴로움의
노예가 아닌
일상의
자유인으로 우리를
바꾸어 놓습니다.

용서로 일상의
하느님을
알게됩니다.

하느님을 향하는
용서입니다.

너도 나도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용서가 필요합니다.

우리 인생과
용서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용서를 깨닫고
용서를 체험하고
떠나는 용서의
순례자들입니다.

용서는 분명
하느님적인
것입니다.

용서는 먼저
나자신을
치유합니다.

삶의 무가치함을
치유하는 용서를
하느님께서 먼저
보여주셨습니다.

어려움이 있기에
가치가 있고
고통이 있기에
용서라는 부활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우리가 잊어버린
용서를
되찾아 주십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독서들 안에는 "자비"라는 말씀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반복됩니다

"저희에게서 당신의 자비를 거두지 마소서"(다니 3,35).

바빌론에 유배 간 유다 청년들이 신상에 절하기를 거부하다 불가마에 던져집니다. 그중 한 명인 아자르야가 불길 한가운데서 주님께 이처럼 기도를 드리지요.

이스라엘에게는 지금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고 민족은 유배로 뿔뿔이 흩어졌지요. 게다가 자신들은 죽을 곤경에 빠진 상태입니다. 이토록 처참한 상황에서 보통 사람이라면 신을 원망했을지도 모르지요. 바로 지금 여기서 우리는 아자르야의 고백을 통해 신앙의 정수를 만납니다.

"저희의 죄 때문에"(다니 3,37)

아자르야는 이 모든 불행의 원인을 자신들에게 돌립니다. 하느님 탓, 조상 탓, 남 탓 하지 않고 자신을 봅니다. 원래 하느님 앞의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당신의 벗, 당신의 종, 당신의 거룩한 사람"(다니 3,35)이었지요. 이제 그 모든 걸 잃은 듯 보이는 생의 밑바닥에서 자신들의 우상숭배와 배반과 타협을 뉘우칩니다.

"당신 호의에 따라, 당신의 크신 자비에 따라 ... 저희를 구하시어"(다니 3,42)

우리가 기대하고 희망하고 간청해야 하는 것은 오로지 주님의 호의와 자비입니다. 구원에 있어서 우리가 주장할 권리는 사실상 없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용서를 화두로 하느님 자비를 가르치십니다.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마태 18,21)

베드로의 이 질문에서 "용서"는 마치 선심 쓰는 행위처럼 느껴지는데,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는 예수님의 대답에서 "용서"는 의무에 가깝습니다. 이 차이는 어디에서 올까요?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마태 18,27)

예수님은 엄청난 빚을 탕감받은 종의 이야기를 비유로 드십니다. 주인의 "가엾은 마음"에서 시작된 용서는 한 사람을 살릴 뿐만 아니라 그 가족과 재산까지 지켜 줍니다. 그런데 그 자비가 그 종에게 이르러 멈추어 버리지요. 그는 제가 입은 자비를 잊고 제 동료를 다그쳐 감옥에 가두어 버렸으니 말입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마태 18,33)

주님은 자비의 연속성을 말씀하십니다. 한번 베풀어진 자비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자비의 길은 이어져야 합니다. 자비의 흐름이 끊기지 않고, 자비의 걸음이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태초에 시작된 하느님의 자비가 온 세상을 돌고 돌아 우리에게까지 다다랐는데 우리게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서는 안 됩니다. 자비를 삼켜버리고 아무 꽃도 열매도 내지 못하는 돌덩이 심장이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마음으로부터 용서"(마태 18,35)

베드로의 질문 안의 "용서"와 예수님 답변 안의 "용서"가 같은 단어, 다른 온도를 담고 있음은 이 차이가 아닐까 합니다. 용서는 가식이나 요식행위가 될 수 없는 심장의 일이어야 합니다.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라고 하시는 이 말씀 안에는 이미 그분이 우리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셨다는 전제가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당신의 자비를 우리 죄에 대한 조건 없는 용서로 표현하십니다.

"주님, 당신의 자비 기억하소서"(화답송).

부족하고 나약한 죄인인 우리는 죄에 떨어질 때마다 주님 옷자락에 매달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해 달라고 읍소합니다. 그런데 사실, 진정으로 그분의 자비를 기억해야 할 존재는 바로 우리들이 아닐까요? 주님은 결코 당신 자비를 잊지 않으시지만 우리가 받은 자비를 종종 망각해 버리고는 그 자비가 필요한 형제와 이웃에게 영 딴소리를 하기 일쑤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받은 자비를 기억해야 합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용서는 이제 우리에게 선심이 아니라 의무니까요.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35). 비유를 맺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괜한 추임새가 아니라, 자비의 길을 이어가라고 한번 더 강력히 촉구하시는 다짐입니다.

있어야 주고, 받아야 있지!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27353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3월 6일 사순 제3주간 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