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2일 사순 제1주간 월요일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마태오 25,31-46)
Amen, I say to you, whatever you did
for one of these least brothers of mine,
you did for me.'
The Judgment of the Nation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 레위기의 이 표현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삶의 기준이자 목표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 맞갖은 생활을 하고자 모든 면에서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하느님의 계명도, 서로 관계를 유지하고 함께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여러 제도들도 이것을 목표로 합니다. 수많은 율법과 규정들도 하느님의 거룩함에 맞게 살아가려는 방편이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율법은 많은 경우에 부정적으로 표현됩니다. ‘하지 마라.’ ‘하면 안 된다.’ 구약의 백성은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그릇된 것을 피하는 것으로 하느님을 따르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조금 달랐습니다. 마태오 복음이 전하는 최후 심판에 대한 내용은 우리에게 또 다른 기준을 상기시킵니다. 우리가 목표로 해야 할 것은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작고 보잘것없는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곧 예수님께 한 것이라는 말씀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이 ‘작은 이’를 일상 안에서 어렵지 않게 만납니다.
하느님을 바라보며 걷는 길은 그나마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 곁에 구체적인 모습으로 계시는 하느님을 찾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최후 심판의 이야기는 우리의 눈이 저 높은 하늘을 향하기 전에 낮은 곳으로, 이웃에게로, 한 명의 작은 이에게로, 우리 곁에 계시는 하느님을 향하게 합니다. 일상에서 마주한, 때로는 무심하게 지나친 그 하느님을 생각하게 합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의 꿈은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죽어야만 합니다. 따라서 당연히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 것이고, 오히려 큰 기쁨을 가지고 죽음을 맞이해야 하지 않을까요?
여기에 불안한 마음이 생깁니다. 하느님 나라에 가는 것은 좋은데, 곧바로 들어갈 수 없다는 불안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회개할 시간이 필요하고,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곧바로 회개하고 사랑하기보다는 뒤로 미루면서 죄와 더욱더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우리 영역이 아닌 하느님의 영역이기 때문에 이러쿵저러쿵 말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죽음을 멀리하고 피하려고만 하면 할수록 더 큰 두려움 속에서 하느님 뜻을 받아들일 수가 없게 됩니다.
죽음을 피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죽음을 통해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그 순간을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못 박혀 돌아가셨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죽음을 죄악시해서도 안 되고 무서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진심 어린 회개와 이웃을 향한 사랑 실천에 집중한다면 죽음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심판 장면을 말씀하십니다.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각 사람의 잘잘못에 따라서 갈라놓으신다고 하시지요. 양이 의로운 사람들을 나타내는 까닭은 아무도 해치지 않고 온유하며 누구에게 해를 입어도 저항하지 않고 견디는 인내 때문입니다. 또 죄인을 염소라고 표현하는데, 변덕, 자만심, 호전성 같은 악덕이 염소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의로운 사람대접을 받기 위해서는 양과 같은 모습을 갖춰야 함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이 양과 같은 모습이 진심 어린 회개를 하는 사람 그리고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 가장 비천한 모습으로 오셨고 또 비천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나 최후의 심판 장면에서도 그럴까요? 아닙니다. 이때에는 영광에 옥좌에 앉으셔서 완전한 다른 모습으로 심판을 하신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영광의 주님 앞에서 나 자신은 어느 쪽에 위치하게 될까요? 양의 자리인 오른쪽에 위치하게 되는 사람은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렸을 때 친구들과 딱지치기, 구슬치기를 참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실력이 괜찮았는지, 항상 집에 들어올 때는 딱지와 구슬을 한가득 들고 왔습니다. 그리고 이 딱지와 구슬이 차곡차곡 모이면서 저만의 보물창고에 넣어두었지요. 왜냐하면, 이 딱지와 구슬은 제게 너무나도 소중한 보물이었기 때문입니다. 혹시 ‘누가 훔쳐 가지 않을까?’라는 불안한 마음에 매일 밤 그 숫자를 일일이 세어 놓을 정도였습니다.
이제 시간이 흘러 흘러 벌써 40년 전의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당시에 너무나 귀하게 여겼던 딱지와 구슬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직도 저의 보물로 여겨서 잘 보관하고 있을까요? 아닙니다.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한때 전부였던 것이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깨닫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게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만약 이 세상의 것들이라면 앞서 저의 딱지나 구슬처럼 언젠가는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특히 죽음 앞에서는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돈, 명예.... 이 세상 안에서만 유용하지, 하느님 나라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쓸모없는 것에 그렇게 많은 시간을 소비했음을 후회하지 않을까요?

이렇든, 저렇든 우리는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다
-전삼용신부-
두 수도자가 한 번도 다투지 않고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았습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도 세상 사람들처럼 다퉈보세!”
그러자 다른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다툴 줄을 모르네.”
다시 첫 번째 사람이 말했습니다.
“내가 자네와 나 사이에 벽돌을 하나 놓고 ‘이건 내 거야!’라고 말하면 자네는 ‘아냐, 그건 내 거야!’라고 말하는 거야. 그럼 싸움이 시작될 걸세.”
그래서 둘 사이에 벽돌을 하나 놓았고, 첫 번째 사람이 “이건 내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두 번째 사람이 “아냐, 그건 내 거야”라고 말한 뒤에 이내 마음이 편치 않아 “맞아, 그건 자네 거야. 어서 가져가게.”라고 대답했습니다. 두 사람은 도무지 싸울 수가 없었습니다.
사막의 교부들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교부들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요? 싸움을 함도 그럴 수밖에 없는 인간이 하는 것이고, 싸움을 할 수 없는 것도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런 상태는 ‘본성’이라는 것으로밖에는 설명이 안 됩니다. 개의 본성은 두 발로 걸을 수밖에 없는 상태이고 사람의 본성은 두 발로 걸을 수밖에 없는 상태입니다.
현재 이렇게 어려운 시국에서도 훈훈한 이야기들도 들려옵니다. 특별히 대구지역 의료진들이 턱없이 모자라 밤샘을 하는 상황에서 다른 지역 많은 의료인들이 돕겠다고 나서는 것입니다. 일을 해야 해서 직접 돕지 못하는 사람들은 의료진들의 안전을 위해 기부금을 내고 있다고 합니다.
왜 어떤 사람들은 불평만 하면서도 아무 도움도 주지 않는데, 왜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일에 발 벗고 나설까요? 발 벗고 나서는 사람들은 그러지 않으면 마음이 더 불편해서 그럴 것이고, 그냥 있는 사람들도 그럴 수 있으니까 그럴 것입니다. 이렇게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상황에서 우리는 자동적으로 두 부류로 나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람과 그럴 수 없는 사람.
오늘 복음에서 ‘양과 염소’로 나뉘는 심판 이야기가 나옵니다. 양으로 분류되면 천국으로 염소로 분류되면 지옥으로 갈 것입니다. 내가 굳이 선행을 하지 않아도 되는데도 그러지 않을 수 없어서 그렇게 한 사람들은 ‘양’으로 분류될 것이고, 그냥 선행을 하지 않아도 될 때 그러지 않을 수 있었던 사람들은 ‘염소’로 분류될 것입니다.
양과 염소는 각기 자신들이 하는 행동이 예수님을 향한 행동인지 몰랐습니다. 자신들이 언제 예수님인줄 알고 그랬느냐고 반문합니다. 예수님은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이들을 당신 자신처럼 여기십니다. 그들에게 우리가 하는 행동이 곧 당신께 하는 행동처럼 여기십니다. 그렇게 당신과 함께 살 자격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구별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예수님으로 보이지 않아도 도울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는 수밖에 없습니다.
교리서는 “인간은 자신의 자연적 능력만으로는 ‘아버지의 집’에, 하느님의 생명과 지복에 다다를 수 없다.”(661항)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선행은 인간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 태어남을 거쳐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 성자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하는 자녀가 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로마 6,4)”(537항)
사람은 성사로 새로 태어남으로 바뀌는 것이지 바리사이-율법학자처럼 흉내를 낸다고 바뀌지 않습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려고 노력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새로 태어나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됩니다. 이렇게 새로 태어나 선행을 해야만 하고, 그 공로를 자신에게가 아니라 자신을 새로 태어나게 해 주신 분에게 돌릴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분명 ‘양’입니다.
<어제 “성경공부를 좋아하면 이단에 빠질 확률이 크다”란 제목을 오늘 다시 보니 오해의 소지가 있는 신중하지 못한 제목이어서 사과말씀 드립니다. 이는 성경공부를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모든 이단이나 사이비가 성경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시작된 우리 가톨릭교회는 성경공부에 할애하는 시간보다는 교리공부에 할애하는 시간이 더 많아야 한다는 의미로 쓴 것임을 거듭 말씀드립니다. 진리의 기둥은 성경이 아니라 교회입니다.>

-조재형신부-
한국에 있을 때입니다. 사순시기가 되면 본당에서 사순피정을 준비합니다. 부족하지만 제게도 기회가 주어지면 피정 강의를 하곤 했습니다. ‘예수님께 위로를 드린 사람과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에 대해서 강의를 준비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 고난의 길에 예수님의 곁을 떠났던 제자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던 대사제와 율법학자. 예수님의 무죄함을 알면서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도록 했던 빌라도가 있습니다. 예수님께 위로를 드린 사람도 있습니다. 십자가의 길 5처에 나오는 키레네 사람 시몬입니다. 예수님을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고 갔습니다. 십자가의 길 6처에 나오는 베로니카입니다.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수건으로 닦아 드렸습니다. 주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가시면 기억해 달라고 했던 죄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죄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으로 갈 것입니다.’ 사순시기를 시작하면서 나는 과연 어디에 속하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이번 피정에는 ‘가상칠언(架上七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합니다. 가상칠언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을 묵상하면서 사순시기를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먼저 용서를 이야기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고통은 인간으로서 겪을 수 있는 최고의 고통이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고통을 이해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예수님의 사랑을 모르는 우리들 때문에, 여전히 예수님을 배반하는 우리들 때문에 목이 마르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주어진 사명에 충실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순간까지도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시기를 청하였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회개하는 사람에게도 천국의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셨습니다. 어머니에게 제자를 부탁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시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교회를 위해서 전구하십니다. 십자가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사순시기를 지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두 개의 깃발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사탄의 깃발입니다. 사탄의 깃발은 화려해 보이고, 성공과 명예가 주어질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이 사탄의 깃발 아래 모이지만 그 끝은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깃발입니다. 그리스도의 깃발은 초라해 보이고, 힘들고 외롭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깃발은 우리를 하느님과 하나 되게 합니다.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 나라를 시작하며, 영원한 생명에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우리는 어느 깃발 아래 있어야 할까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 지금이 바로 은혜로운 때이며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이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어두운 순간을 지날 때 조차도 우리 안에서, 우리 삶에서 일하시는 성령을 발견해야 합니다!
-양승국신부-
코로나19 바이러스와 하루하루 맞서고 견디느라 다들 얼마나 힘드십니까? 대구에 거주하는 가족들이 걱정이 되서 안부 전화를 드렸었는데, 뭐라 위로의 말을 찾기가 힘들었습니다. 어서 빨리 이 초유의 재난이 정점(頂點)을 찍고 사태가 조속히 진정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고통에 대해 묵상하던 중 존경하는 헨리 나우웬 신부님(1932~1996)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어두운 순간을 지날 때 조차도 우리 안에서, 우리 삶에서 일하시는 성령을 발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늘 일상의 많은 고통과 손잡고 바로 거기서 희망과 새 생명의 시작을 맛보라고 명하십니다. 아픔과 고통과 상처의 한 복판, 바로 우리 삶의 현장에서 말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우리를 위해 고통 받으시는 하느님을 봅니다. 작은 고통이든 견딜 수 없는 고통이든 우리 삶의 모든 고통은 더 큰 그리스도의 고통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고통을 사용하여 나를 빚으시고 당신과 더 가까워지게 하신다는 것을 깨달을수록 우리는 그만큼 고통을 부정하지 않게 됩니다. 이제 아픔을 내 계획의 방해 세력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을 받아들이게 나를 준비시켜줄 그분의 방편으로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상처와 어지러운 마음 가까이 사시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역시 엄청난 고통 앞에 서 있습니다. 정말이지 견딜 수 없는 고통입니다. 최우선적인 과제는 이 혹독한 고통에서 최대한 빨리 벗어나는 일이겠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이 고통을 또 다른 성장과 배움의 기회로 삼아야겠습니다. 고통에 대한 가치와 의미 부여 작업 역시 중요하겠습니다.
극심한 고통 앞에서 우리는 고통을 부정하기보다 고통의 한 복판에서 우리 앞에 펼쳐진 구체적인 현실과 우리 각자의 생애에 더 깊이 몰입하는 것이 고통을 통과하는 길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하는 마태오 복음 25장 31~46절은 최후의 심판 광경을 묘사하고 있는데, 분위기는 전혀 공포스럽거나 끔찍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구절은 복음서 전체 가르침의 요약입니다. 복음의 요청을 심판에 비추어 재진술한 것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주었다.”(마태오 복음 25장 35~36절)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데 필요한 유일한 조건은 고통 받는 이들, 이 세상의 소외되고 가엾은 이들을 위한 구체적인 ‘자비행(慈悲行)’을 얼마나 실천하였는가 라고 강조하십니다.
지금 고통 받는 인류는 곧 고통을 받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온갖 고통 속에 현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고통 받고 있는 이웃을 도와주어야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고자 하는 사람은 고통 중인 형제들 안에서 계시는 그분을 섬겨야 마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분께서 형제들 안에서 고통 당하시는 것을 차마 보고만 있지 않습니다.
고통에 대한 동정이나 연민, 비탄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고통 당하는 형제들을 발견한다면 즉시 팔을 걷어부치고 다가서서 도와주어야 합니다.

심판의 기준은 사랑이다
-반영억신부-
허름한 옷을 입고 술에 취한 상태로 성당 앞을 서성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행려자인 듯 했습니다. 은근이 걱정이 되었습니다. 성당에 어떤 해가 되는 일을 하면 어쩌나? 마침 몇몇 신자들이 돈을 주어 보냈습니다.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어떻게 도와줄까 생각하지 않고 귀찮은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아마도 돈 보다 더 귀한 관심과 사랑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부끄러움이 큽니다. 그들이 예수님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가난한 사람들을 동일시 하셨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 그리고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마태25,45-46).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구원과 심판의 기준을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에 두셨습니다.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나그네 등등 가장 작은 이들에게 베푸는 사랑이 곧 주님께 드리는 봉헌이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 심판은 양이냐 염소냐 둘 가운데 하나입니다. 어중간은 없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그러나 막상 실천의 기회가 오면 머리로 계산 하고 따집니다. 말로나 혀끝으로 할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반대의 삶을 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자선을 베푸는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하고 민첩하게 해야 합니다”(성 그레고리오). 그래야 주님의 마음에 들 수 있습니다. 이리저리 재지 말고 그가 새 출발하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베풀면 주님의 평화가 함께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회피하지 마십시오. 사랑은 다가가는 것입니다. 사실 “사랑은 지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글 모르는 시골 할머니가 신학 교수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성 보나벤뚜라). 사랑은 변덕스럽지 않습니다. 허풍을 떨지 않습니다. 사랑은 섬김입니다.
“삶이 끝날 때 우리는 사랑으로 심판 받게 될 것”(십자가의 성 요한). 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기회가 좋든 그렇지 않든 행동으로 사랑하는 날 되시길 희망합니다. 우리가 만나는 수많은 한 사람 한사람이 나그네 된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가장보잘것 없는 사람하나에게 해준것이~"
-이영근신부-
오늘 우리는 <사순 첫 주간 월요일>을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마지막 날의 심판에 대한 말씀을 들려줍니다.
그런데, 이 심판에서 묘한 것은 사랑과 자비를 베풀지 않는 이든 베푼 이든, 그들은 자신들이 행한 사실조차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예수님께 한 것인지조차 더욱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이 둘은 정반대의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사랑을 베풀지 않은 이가 자신이 행한 것조차 모름은 마치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에서처럼, 그들이 자신에게 빠져 타인에게 무관심하여 회개조차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반면에 사랑을 베푼 이가 자신이 행한 것조차 모름은 이기적인 자신을 떠나 온전히 이타적인 사랑을 베푼 까닭에, 자신의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른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해서, 전자는 자신에게 빠진 경우요, 후자는 자신에게서 빠져나온 결과의 차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전자는 자신에게 푹 빠져 어둠에 갇혀 눈이 멀어져 버린 경우요, 후자는 자신에게서 빠져나와 자신이 사라지고 빛이 되어버린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비를 베풀지 않은 이들은
왜 자신에게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자비를 베풀지 않았을까?
결국, 그것은 그들이 죄를 깨닫지 못하고 회개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코라진과 벳사이다와 가파르나움이 심판 날에 불행하게 될 것이라고 꾸짖으실 때도,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11,21-24; 루카 10,13-15).
그들이 회개하지 못했음은 죄를 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회개는 죄를 깨닫지 못한 것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회개란 죄의 깨달음보다, ‘먼저 베풀어진 하느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죄란 다름 아닌 하느님 사랑을 벗어난 것을 의미하기에 죄보다 앞서 있는 하느님 사랑을 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곧 하느님의 사랑을 벗어난 것이 죄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죄를 보면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보지 못한 채 죄만 본 것이라면 결국, 죄에 대한 뉘우침은 있을지 모르지만 하느님 사랑에로 돌아옴이 없기 마련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란 “뉘우침‘과 ”돌아옴’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죄의 뉘우침은 죄가 없는 진공상태나 죄의 공백상태에 이르게는 하지만, 하느님의 사랑에로 돌아가는 것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결국, “회개”란 하느님 사랑에로의 되돌아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회개는 죄에 대한 깨달음을 넘어 하느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인 것입니다.
곧 죄 없는 상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먼저 입은 사랑으로 돌아가 그 사랑을 베푸는 일로 건너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결국, 먼저 입은 자비를 베푸는 것이 회개의 표시가 됩니다.
그리하여 회개하는 이는 하느님께서 자비로운 것같이 자비로워지는 것이요,
주님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회개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기도>에서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저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 저희를 천상의 가르침으로 회개시키시어,
사순시기에 올바른 마음으로 선행을 하도록 이끌어주소서.”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마태 25,40)
주님!
어느 누구에게나 무관심하지 않게 하소서.
어느 누구든지 하잖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나에게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가 존귀하기에 귀중하게 여길 줄 알게 하소서.
당신의 선물을 보잘 것 없이 여기지 않게 하소서. 아멘.

최후의 심판 - 사랑의 심판
-송영진신부-
‘하느님의 뜻’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마태 18,14).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착한 목자로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잃은 양’을 찾아 나서시는 분이고(마태 18,12),
구제불능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어떻게든 구원하려고 애쓰시는 분입니다(마태 12,20-21).
또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태 10,42).”
이 말씀은, ‘물 한 잔’을 주는 것과 같은 작은 사랑 실천만으로도
심판과 처벌을 면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최후의 심판’은 한 사람이라도 더 처벌하려고 하는
냉정하고 엄격한 심판이 아니라,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려고 하는 자비로운 심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최후의 심판’을 보면,
사랑을 얼마나 잘 실천했는가를 보는 심판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그런 점에서 최후의 심판은 ‘사랑의 심판’이라고 말할 수 있고,
예수님께서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려고 애쓰시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도 최후의 심판은 ‘사랑의 심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심판의 목적은 ‘처벌’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판을 무조건 무서워하기만 할 것은 아닙니다.
‘지금부터’ 잘 준비하면, 즉 회개하고, ‘삶’으로 실천하는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하면, 심판 때에 구원을 선고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기를 거부하는 것이고,
그렇게 사는 사람은 자기가 안 받으려고 해서 구원을 못 받게 됩니다.
‘최후의 심판’ 때에 ‘왼쪽에 서게 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스스로 그쪽을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마태 25,31-33).”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은 곧 인류를 심판하시는 날입니다.
그런데 심판은 순식간에 이루어집니다.
양들은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서 있는 상황은,
심판이 이미 끝나서 선고를 기다리는 상황입니다.
(이렇게 심판이 순식간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심판의 날이 닥쳤을 때, 그때 가서야 비로소 회개하겠다고 허둥대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때는 회개하기에는 너무 늦은 때이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예수님의 재림 전에, 즉 ‘지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때에 임금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마태 25,3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심판 때에 ‘구원 선고’를 받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섬기듯이 ‘작은 이들’을 섬긴
사람들이고, 예수님을 사랑하듯이 ‘작은 이들’을 사랑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구원 선고’를 받는 이들은
자기들이 그런 사랑 실천을 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점입니다(마태 25,37-39).
그것은 사랑을 실천하면서도 자기가 하는 일이 사랑 실천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않았음을 나타내고,
또 그들의 ‘온 삶’이 ‘사랑 실천’과 하나가 되어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사랑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았습니다.
삶 자체가 곧 사랑 실천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랑 실천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이 한 일을 자랑하지도 않고, 생색내지도 않습니다.
지금 이 상황에 대해서, “사랑 실천만 잘하면, 믿음이 없어도,
또 여러 가지 신심생활을 안 해도 되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작은 이들’이라는 말의 표현만 보고,
심판의 기준인 ‘사랑’을 ‘불우이웃 돕기’만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사랑’은 ‘불우이웃 돕기’를 포함해서 ‘모든 사랑’입니다.
즉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모두 포함하는 사랑입니다.
믿음, 기도, 계명 준수 등은 하느님 사랑이고,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는 일, 이웃을 섬기는 일 등은 ‘이웃 사랑’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하나입니다.
(믿음과 사랑은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6,15).”
이 말씀에는 ‘사랑’이라는 말이 없고 ‘믿음’만 강조되어 있는데,
‘구원을 받기 위한 믿음’에는 당연히 사랑 실천이 포함됩니다.
(믿는다면 당연히 사랑을 실천하게 됩니다.)
“그때에 임금은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마태 25,4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5,45).”
‘영원한 형벌’을 선고받는 사람들은 사랑 실천을 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물 한 잔’을 주는 작은 사랑 실천도 안 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주님, 저희가 언제...?” 라는 질문은, 주님의 굶주림과 목마름과
나그네 되심과 헐벗으심과 병드심과 감옥에 계심을 몰랐다는 뜻이고,
알았다면 자기들은 주님을 위해서 사랑 실천을 했을 것이라고 변명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작은 이들’에게 사랑 실천을 안 했음을 인정하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너희가 무시하고 업신여기고 외면한
그 ‘작은 이들’이 곧 나다.” 라는 뜻입니다.
주님만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것은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왼쪽에 있는 자들은 믿음도 실천하지 않고, 사랑도 실천하지 않아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지 못한 자들입니다(마태 7,21).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25,31-46: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
예수님의 말씀은 이 사순절에 어떠한 마음으로 이 시기를 살고 부활을 맞이할 수 있는 지를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부활에 우리가 함께 할 수 있으려면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면서 하느님의 축복 받는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계시다. 이것은 또한 하느님께서 인간이 당신 앞에 섰을 때, 우리를 심판하시는 기준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고 계시는 말씀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본성 안에서 굶주리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사랑하시는 사람들 안에서 굶주리신다. 또한 당신의 가난한 이들 안에서 목말라 하시고, 당신의 종들 안에서 헐벗으신 분이시다. 모든 병을 치유해 주신 분은 당신의 종들 안에서 병드셨다. 모든 사람을 해방하시는 분이 당신의 신자들 안에서 감옥에 계시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혼자가 아니다. 주님 때문에 이 모든 것을 겪는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도 당신이 사랑하시는 사람들 때문에 이 모든 일을 그들과 함께 겪으신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34절) 주님께서는 옳은 일을 한 그들을 칭찬하셨다. 아버지께 복을 받는다는 것! 이렇게 큰 영예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판단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35절). 얼마나 대단한 영예인가! 얼마나 큰 복됨인가! 그분은 그들에 대한 당신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드러내신다.
그러나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 임금은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의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41절)고 하신다. 영원한 불은 “악마와 그의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것이지, 인간들을 위하여 준비된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아버지께서는 사람들을 저주하시지 않는 분이시다. 다만 그들의 행실을 단죄하신다. 사람들을 위하여 준비한 것이 아닌데 그들 자신이 스스로 그 속으로 던져 넣었다는 것이다. 스스로 그렇게 만든 것이다.
여기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들은 자기들이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들이 단죄 받는 이유는 그들이 저지른 악행 때문이 아니다. 그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너희는 내가 나의 종들 안에서 굶주리고 목말랐을 때 보살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릇된 일을 저지르지 않은 자들이 이런 단죄를 받았다면 악마의 일을 행하는 자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46절)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영원할 것이다. 죄인들은 영원한 벌을 받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우리를 그분께로 인도해 줄 것이고, 그분을 닮게 하고,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게 할 것이다. 이러한 삶을 이 사순시기에 실천하도록 은총을 구하자.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5, 45)
-한상우신부-
우리를 향해
던지시는 아픈
말씀입니다.
사랑의 마음이
없기에 이 시대가
혼돈스러운 것입니다.
사람은 결코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위한
이용물이 아닙니다.
사랑을 위한
생명입니다.
사랑으로 바라보면
모두가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소중한 생명을
소중하게
하시기위해
예수님께서
먼저 작아지고
작아지십니다.
작은 이들과
끝까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의 참된
사랑입니다.
돌아갈 곳을
잃어버린
우리들에게
작은 이들 하나를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주시며 길을
되찾아주십니다.
사람때문에
사람이 살아나고
사람때문에
사람이 죽어갑니다.
다시 만나게 되는
작은 이들을 향한
진짜 사랑입니다.
사랑을 할 줄 아는
우리들로
바꾸어주십니다.
가장 작은
사랑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사랑의 사순시기
되십시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명확히 제시합니다.
"해서는 안 된다."
제1독서인 레위기 전반에 반복되는 말씀입니다. "해야 한다"라는 표현보다 압도적으로 빈번하게 등장하니 읽는 이를 주눅들게 만듭니다. 자칫 말씀 안에서 주님 마음을 만나기보다 자기 성찰의 곁길로 빠지기 쉽습니다.
그런데 이 무수한 "해서는 안 된다"는, 시작과 끝에 있는 두 문장의 부차적 세부 규정들입니다. 핵심은 다음의 두 문장에 담겨 있습니다.
먼저 그 시작은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9,1)이고, 그 마침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입니다.
하느님과 계약을 맺고 그분의 백성이 된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거룩함을 입어야 하고,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아버지를 닮은 자녀처럼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제시된 무수한 금지 명령들은 거룩함과 사랑이 완성되면 그 안에 하나로 녹아들어 세세한 사항을 열거하는 것조차 무색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은 유명한 최후의 심판 대목입니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마태 25,34).
작은 이들에게 선행을 베푼 이들에게 예수님께서 "와서"라고 하십니다. 반면 작은 이들을 외면했던 악한 자들에게는 "나에게서 떠나"(마태 25,41)라고 하시지요. 이 대비에는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방향성이 입력되어 있습니다.
작은 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손을 내민 이들은 이미 지상에서부터 줄곧 주님을 향했던 것이고, 작은 이들을 피했거나, 적극적으로 나쁘게 대하지 않았더라도 그들을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자들은 줄곧 주님의 반대쪽을 향한 것입니다.
이곳에서 가난한 이들 안에 계신 주님을 섬긴 이들은 그곳에서도 주님을 마주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이곳에서 가난한 이들 안에 계신 주님께 등돌린 이들은 그곳에서도 주님 부재의 현실을 살게 될 것입니다. 지상에서의 방향성이 결국 하느님 나라에까지 이어져, 현세에서 살아온 대로 종말 이후에도 살게 되리라는 뜻이지요.
삶의 가르침은 하지 말아야 할 부정적 범례들을 통해서도, 또 해야 할 긍정적 범례들을 통해서도 제시됩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언어 형식이라는 껍질 속에 담긴 핵심을 알아듣는 것이지요.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
주님께서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창조 때부터 모든 인간은 거룩하고 선하게 사랑의 존재로 지음 받았으므로 하느님 나라가 모든 인간을 위해 준비된 것이고, 하느님 나라는 당연히 모든 인간의 차지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본래 그런 존재인 것입니다. 작고 보잘것없고 약한 이들에 대한 관심과 연민, 사랑은 모든 인간의 본성이고, 그들에 대한 회피나 억압, 소외와 무시는 악을 향한 탓으로 고착되는 어둠의 현실입니다.
그러니 금지 명령들과 최후의 심판 이야기로 엮인 오늘의 말씀들은 우리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려고 배치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원래 어떤 존재이며, 그래서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펼쳐보여 준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내가 주님을 향한 만큼 그날 그분은 "와서 나를 차지하라"고 하실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행복하지요? 국가적 재난으로 잠시 유보된 성체에 대한 그리움과 갈망으로 더 강렬히 주님을 향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사순 1주 월요일- 2016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23144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오늘의 복음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0년 3월 4일 사순 제1주간 수요일 (0) | 2020.03.03 |
---|---|
2020년 3월 3일 사순 제1주간 화요일 (0) | 2020.03.02 |
2020년 3월 1일 사순 제1주일 (0) | 2020.02.29 |
2020년 2월 29일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0) | 2020.02.28 |
2020년 2월 28일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0) | 2020.02.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