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1월 6일 주님 공현 후 월요일

Margaret K 2020. 1. 5. 19:53

2020 1 6일 주님 공현 후 월요일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

( 마태오4,12-17.23-25)

 

Repent, 
for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우리가 받은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시는 것을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알게 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예수님 시대, 갈릴래아는 외롭고 슬픈 곳이었습니다.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 하여 무시당하였고, 가진 것이 없다고 업신여김을 감내해야 하였던 곳이지요.
이뿐인가요? 살다 살다 힘들면 동네 밖 도적 떼라도 되어야 입에 풀칠할 수 있었던 이들이 넘쳐 났고, 급기야 로마의 권력에 저항하는 목숨 건 무장 항쟁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갈릴래아에서는 ‘이렇게 살 바에야 그냥 소리나 한번 지르고 죽자.’라는 심정과 태도가 낯설지 않았습니다.그 갈릴래아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선포하십니다.
더불어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하늘 나라는 이렇게 갈릴래아 곧 세상에서 소외된 이들의 자리에서 선포되고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활동하신 곳은 모두 가난한 지역이었고,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자리는 성공한 이들이 넘쳐 나는 예루살렘이었던 것입니다.
성공한 이들을 탓하거나 비난해서는 안 되지만, 소외된 이들을 외면하고 세상의 성공에만 혈안이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늘 나라와는 거리가 멉니다.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바라볼 때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녀야 합니다.
모두가 축구 경기를 응원할 때도, 축구를 싫어하는 이들이 있음을 인식하고, 과거를 반성하지 않는 이웃 나라에 대해서도 터무니없는 극우주의자들과 선량한 국민들을 구별하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집단주의, 국가주의, 애국주의 …….
‘○○주의’라는 것들, 이것만이어야 한다는 사상들, 그것이 예수님의 보편적 구원을 가로막습니다.
우리는 너무 다릅니다.
너무 달라서 틀렸다 하고 저주하고 심판하고 외면합니다.
올바로 식별하고 다른 것을 다르게 볼 줄 아는 여유, 조금씩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누군가를 어느 장소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약속 시각에 너무 일찍 도착한 것입니다. 혼자 그 안에 앉아 있기가 뭐해서, 같이 들어가기 위해 문밖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기다리면서 주변을 둘러보다가 우연히 그 장소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쓰레기가 산처럼 쌓여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지저분해서 인상이 저절로 찌푸려졌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앞을 지나면서 계속해서 그 자리에 쓰레기를 버리는 것입니다. 쓰레기통이 있는 것도 아닌데, 지나가며 그 자리에 서서 자기 주머니 안의 버릴 것을 꺼내어 버립니다. 왜 이렇게 쓰레기를 버릴까요?

만약 이 자리에 예쁜 화단이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과연 누가 이곳에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겠습니까?

우리의 마음도 이렇습니다. 내 마음이 아름답고 잘 정리정돈 되어 있다면 나 자신도 그리고 남들도 내 마음을 함부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복잡한 마음으로 인해 지저분한 상태라면, 나 자신도 또 남들도 어떤 죄의식 없이 함부로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내 마음을 아름답게 그리고 잘 정리정돈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 또 그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마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의 상태가 바로 회개했을 때입니다.

주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면서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선포하십니다. 이 말씀을 하신 이유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내 마음의 상태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믿음의 눈으로 빛이신 주님을 봐야 합니다. 이 빛은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도 떠올랐습니다. 특별히 선택받은 이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게 비치는 밝은 구원의 빛이었습니다.

이 빛이 비치기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 해야 할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우리는 과연 회개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혹시 여전히 지저분하고 정리정돈 안 되어있는 복잡한 마음으로 인해 주님의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회개를 통해 내 마음을 잘 정리정돈 해서 깨끗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어떤 악도 나를 함부로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깨끗한 마음을 갖춘 사람만이 가까이 다가온 하늘 나라를 차지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 가슴속에 고뇌가 없다면 우리 입술에 노래도 없을 것이다(칼 바르트).



믿음.

유다인들처럼 고통의 역사 속에 살아온 민족이 있을까요? 그들 역사 안에서 영광스러웠던 순간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 외에는 없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로마에 의해 멸망을 하고 나서는 자기 나라를 떠나 세계 곳곳에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중세 때에는 개종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마녀사냥의 대상자가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독일 나치에 의해 무자비한 학살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유일신인 하느님을 섬기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자신의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며 하느님의 존재를 거부하는 경우를 종종 보곤 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민족은 하느님을 버려도 수천수만 번을 버려도 이상하지 않아 보입니다. 그럼에도 하느님을 굳게 믿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는 것에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뜻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뜻을 찾는 모습이 참믿음으로, 그 오랜 시간의 고통 안에서도 꿋꿋하게 살아온 힘이 된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도 이래야 하지 않을까요? 내 뜻을 이루어주시는 나의 마술램프 같은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음을 바라보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행동하지 않으면 아는 것이 아니다

-전삼용신부-


아테네의 한 극장에서 국경일을 기념하는 연극이 공연되고 있었습니다. 한 노인이 좀 늦게 극장 안으로 들어섰는데, 초만원이라 앉을 자리가 없었습니다. 그 때 두리번거리고 서 있는 노인을 본 아테네인들은 “저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라.”고 여기저기서 수군댔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은 하면서도 누구 한 사람 자기 자리를 양보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노인은 천천히 외국인석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러자 스파르타인들이 벌떡 일어나 서로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모든 사람들이 박수를 쳤습니다. 이때 노인이 말했습니다.

      “아테네인도 선(善)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파르타인은 그 선을 즉시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입니다.”

      알지만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참으로 아는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물에 빠졌습니다. 한 사람이 지나가다 거의 죽어가고 있는 사람에게 “왜 물에 빠지게 됐는지 아는가?”라며 도리를 설명합니다. 어떤 사람은 물에 빠진 사람을 보고 “이편으로 나무 가지를 붙잡고 저편으로 돌부리를 딛고 올라오시오. 내 말을 따르면 틀림없이 당신 생명을 살릴 수 있소.”라고 말합니다. 마지막 사람은 한 마디 말도 없이 물에 뛰어들어 사람을 구해냅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는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대할 때 어떠한 모습이어야 할까요? 두말할 나위 없이 행동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실천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그때부터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라고 말합니다. 분명 예수님의 복음 선포의 시작은 세례자 요한이 악한 자들에게 넘겨진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어찌 보면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는 동안에는 그의 복음 선포를 최대한 존중해주셨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참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들이 가리키는 참 구원의 빛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그 빛은 행동하는 빛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선포하시고,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셨습니다. 그분의 행동 자체가 곧 복음 선포였습니다. 복음 선포가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습니다.

      1982년 일본 NHK 방송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당신이 지금 종교를 갖는다면 어떤 종교를 갖겠습니까?” 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36%가 그리스도교를 갖고 싶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일본의 그리스도교인은 전체 인구의 1%도 채 안 됩니다. 마치 사무라이가 전쟁터에 나가고 싶지만 칼을 가져다니기는 싫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행동으로 드러난 것들만 심판에 영향을 미칩니다.

      한 신부님이 전쟁 중 부상당한 병사들을 방문했습니다. 그는 한 손에 성경을 들고 한 부상병의 이마에 손을 얹으며 말했습니다.

“당신을 위해 기도해주겠소.”

그러자 부상병이 말했습니다.

“저는 지금 목이 마릅니다. 물을 좀 주세요.”

신부님이 병사에게 물을 먹인 후 말했습니다.

“이제 기도를 해드릴까요?”

“제가 지금 너무 추워요. 담요가 있으면 좀 덮어주세요.”

      신부님은 자신의 옷을 벗어 병사를 덮어주었습니다. 그러자 병사가 신부님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당신의 손에 들려있는 것이 그 유명한 성경이군요. 저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그리고 성경을 좀 읽어주세요.”

      복음을 전할 때 말이 아니라 행동이 먼저여야 합니다. 복음을 선포하지 않으면 사랑이 없는 사람으로 심판받습니다. 그래서 교리와 성경 공부를 많이 합니다. 그러나 하루에 한 사람에게라도 하느님 사랑을 실천하고 한 사람에게라도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실천하지 않으면 평생 한 번도 복음을 전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행동으로 나타나야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신문 홍보를 다니면서 좋은 점이 있습니다. 같은 길을 가는 사제를 만나는 겁니다. 다양한 사목의 을 보는 겁니다. 어떤 신부님은 솜씨가 좋습니다. 마치 가위손을 가진 거 같습니다. 성당 마당이 꽃밭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성당에 근사한 카페를 만들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머물 수 있는 피정의 집을 만들기도 합니다. 지칠 줄 모르는 사목의 열정이 어디에서 오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신부님은 미주 지역 매일 미사에 영적인 묵상을 나누고 있습니다. 고향에 가면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고, 그 아래에는 사람이 머물 수 있는 쉼터가 있듯이, 일상에 지친 사람에게 위로가 되어 주시는 분입니다. 하늘은 말하지 않아도 하늘이듯이, 말하지 않아도 힘이 되어 주시는 분입니다.

 

오늘은 제게 깊은 울림을 주었던 신부님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신부님은 매 미사 1시간 전에 성체 현시를 하였습니다. 침묵 속에 성광은 빛이 났습니다. 동방박사가 예수님을 찾아 경배하듯이, 교우들은 성체 앞에서 기도하였습니다. 성당은 마치 수도원 같았습니다. 언제고 본당 신부가 되면 저 역시 성체 현시를 하고 싶어졌습니다. 교통사고로 크게 아팠고, 지금도 몸이 불편하신 신부님은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님을 체험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영광과 권능의 왕이 아닌,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는 어린양이 우리에게 왔음을 묵상했다고 합니다. 교회에 어려움이 있다면 사제와 신앙인이 영광의 왕을 따랐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사제와 신앙인이 어린양이 가신 길을 따라간다면 하느님께서 함께하실 거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에 몇 번의 위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첫 번째 위기는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교리 논쟁이었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비인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논쟁이었습니다. 교리는 신앙인이 따라야 할 길과 같습니다. 교회와 다른 교리를 이야기한 사람은 이단이 되어야 했고, 교회는 처음으로 이단을 단죄해야 했습니다.

두 번째 위기는 외부에서 오는 공격입니다. 중동에서 시작된 새로운 종교는 막강한 힘으로 교회의 턱밑까지 밀고 들어왔습니다. 사랑과 평화를 선포하는 종교는 십자가의 이름으로 싸워야 했습니다. 자비와 용서의 종교는 다른 문화와 다른 종교를 포용하지 못하였습니다. 원주민의 삶과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인류와 역사 앞에 용서를 청했습니다.

 

세 번째 위기는 내부의 분열과 갈등입니다. 프로테스탄트가 생겼습니다. 가톨릭교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새로운 교회를 세웠습니다. 같은 배를 탔던 교권과 왕권은 각자의 길을 가야 했습니다. 인간 중심의 새로운 사상과 문화가 도래했습니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인류에게 풍요와 편리함을 주었지만, 인류의 영성과 지성을 물질의 에 가두려고 하였습니다.

네 번째 위기는 신앙과 삶이 다른 겁니다. 교회의 전통과 유산이 사라지고, 세속화의 바람이 들어온 겁니다. 성소의 감소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주일미사 참례자의 수도 줄어들고 있습니다. 가정에서의 기도가 점차 사라지고 있습니다. 삶의 중심에 신앙이 있지 않고, 세속의 가치와 판단이 우선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고령화되고 있으며,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가진 걸 나누고, 함께 기도하는 아름다운 전통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오늘 사도 요한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 주님 안에 머물지 못하는 사람들은 바로 하느님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을 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갈망이 있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자신 안에 있는 나쁜 것들을 버려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회개하여야 한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빛이 있어야 어둠이 밝아지듯이, 빛이신 예수님 곁에 머물러야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과 동행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2020년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열망으로 내 마음 안에 있는 거짓된 것들을 버리고, 하느님의 계명과 주님의 사랑을 담아 빛이신 주님께로 가까이 가야 하겠습니다. 작은 실천이 세상을 변화시키듯이, 신앙 안에서 작은 실천은 영원한 생명의 시작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때 가장 보잘 것 없는 대상이 하느님께는 가장 소중합니다!

 -양승국신부-

 

마태오 복음 4장~18장 사이에는 예수님의 갈릴래아 활동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갈릴래아 지방을 가리켜 이민족들의 지방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가 있더군요. 갈릴래아 지방은 기원전 722년에 앗시리아인들이 침입해서 정착하기 시작했습니다.

 

 토착민들은 어쩔수 없이 이주인들로부터 다양한 영향을 받게 되었겠지요. 종교, 문화, 전통, 혈통 등 제반 측면에서 유다 고유의 순수성이 훼손되었습니다. 성도(聖都) 예루살렘과 멀리 떨어진 지역, 갈릴래아 호수를 배경으로 살아가는 어부들과 농부들이 살아가는 이교도 지역이 갈릴래아였습니다. 자연스레 히브리인들에게 갈릴래아 지방은 눈엣가시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과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곳, 갈릴래아를 최초의 활동무대로 선정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신앙의 본산인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이라든지, 아니면 세례자 요한의 주무대 유다 지방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낙후되고 소외된 지역, 가장 변방이었던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가장 껄끄럽고 부끄러워했던 지역 갈릴래아를 선택하시면서 높이 들어올리셨습니다. 대신 위풍당당·자신만만했던 도시 예루살렘을 부끄럽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습니다. 자칭 큰 사람, 잘 나가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가장 작고 비천한 장소나 사람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생각은 우리 인간의 생각과는 자주 상반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 인간의 시선으로 대단해보이는 것들이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닐 가능성이 많습니다. 반면에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볼떄 아주 작아보이는 것이 하느님께는 엄청나게 위대할 수가 있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곘습니다.

 

 예수님께 역시 작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선택하시어 당신 인류구원사업의 첫째가는 협조자로 삼으셨습니다.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니, 오늘 우리가 꼴찌라 할지라도, 작고 보잘 것 없는 존재로 살아간다 할지라도 너무 낙담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주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변화될지 모르니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메시지는 세례자 요한이 선포한 메시지와 그 내용이 동일합니다. 하늘 나라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설교의 핵심 주제입니다.

 

 ‘하늘 나라’라는 표현은 마태오 복음사가만이 사용하는 특별한 표현입니다. 마태오 복음은 ‘하느님’이라는 표현을 직접 사용하기를 꺼리는 유다인들을 주 대상층으로 삼고 있기에, ‘하느님’ 대신 ‘하늘’이라는 우회적인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하늘 나라는 하느님 친히 다스리시는 나라를 의미합니다. 하늘 나라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태도는 회개입니다. 회개란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일,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일, 그분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는 일, 그분이 건네시는 새로운 사랑의 계명을 준수하는 일입니다.

 

 율법의 준수와는 거리가 먼 지역, 유다인들이 가장 혐오하던 지역, 가장 홀대받고 버림받은 지역 이방인들의 갈릴래아를 가장 먼저 선택하신 예수님께 깊이 감사드려야겠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똑같은 악습을 되풀이하는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들을 선택하시니, 깊이 감사드려야겠습니다.


우리의 관심

 -반영억신부-

 

예수님께서 공적인 일을 시작하신 곳은 갈릴래아, 사람들이 육지 속의 섬이라 부르는 변두리, 소외된 땅입니다. 그러나 이 지역은 물이 풍부하여 풍요롭고 아름다우며 살기 좋은 지역이었으나 가장 착취를 받던 곳이 또 갈릴래아 지방입니다. 대부분의 땅은 부유한 사람들의 소유였고 많은 사람들은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희생과 억압을 강요 당해야했습니다. 고통스럽게 착취 받는 땅이 갈릴래아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방인의 땅으로 불리며 무시당하던 이 지역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첫 말씀은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4,17).였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착취한 부자들에게 하신 말씀 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주변에는 부자들은 멀리 사라지고 가난하고, 병들고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이 몰려왔습니다. 뒷전으로 밀려나 하느님밖에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가르치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은 가르치는 일을 하는 교육기관입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병원을 운영하고 사회복지시설을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배려입니다. 이제 우리가 주님의 손과 발, 목소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부유한 사람, 힘 있는 사람, 잘나가는 사람, 멋진 사람, 편안한 사람에게 더 쏠립니다. 이러한 우리의 태도에 주님께서는 무어라 하실까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란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생각과 말과 행위, 자신의 삶을 통째로 바꾸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도둑질하는 사람이 회개했다면 다시는 도둑질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삶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입고도 그것을 모르는 체 외면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십니다. 우리의 삶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길 원하십니다. 우리 삶의 자리가 어디든 어렵고 힘든 사람은 항상 있습니다. 힘겨워 지친 사람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막의 오아시스는 광고를 하지 않아도 온갖 살아있는 것들이 모여들게 마련입니다. 향기가 있으면 벌 나비가 모여드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예수님께 모여든 것은 그분에게 넘치는 사랑이 있었고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있다면 사람들이 모여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또 하나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할 소명을 일깨우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이 큰 빛을 보았다.

-이영근신부-


우리는 아직 <성탄시기>에 머물러 있습니다. <성탄시기>는 두 시기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시기>는 예수님 성탄 대축일부터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까지로,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시기이고, <둘째 시기>12일부터 주님 공현 대축일을 정점으로 하여 주님 세례 축일까지로, 주님께서 세상에 공적으로 드러나심을 기념하는 시기입니다. 이 두 시기를 관통하는 주제는 빛으로 오신 주님입니다.

오늘은 빛의 축제일인 주님 공현 후 월요일 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사야가 예언한 큰 빛이 이미 도래했음을 선포합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마태 4,16)


그 빛은 즈불룬 땅과 납달리 땅,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로부터 비추어 왔습니다. 질곡의 땅 갈릴래아, 버려지고 멸시 당하는 곳, 비참하고 가난한 변방지역, 이민족의 갈릴래아, 이곳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활동을 시작하신 장소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곳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는 당신 사명의 내용을 밝혀줍니다. 곧 당신은 어두움 속에 앉아있는 이들에게 생명을 주는 빛으로 오시는 분임을 밝혀줍니다. 뿐만 아니라, 수도 예루살렘이나 고향인 나자렛을 제쳐두고, 굳이 갈릴래아 땅으로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절망과 비참함에 빠져있는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사랑이 죽음의 어두움에 짓눌려 있는 이들에게 우선적으로 향한다는 사실을 드러내줍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명을 약자들의 동네 갈릴래아에 시작하셨으며,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고쳐주고,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달하는 사랑으로 시작하셨습니다.

사실,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께서 공생활의 시작을 알리는 첫 사랑의 외침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리의 응답을 필요로 합니다. 곧 당신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는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건설되도록 자신을 수락하는 것을 말합니다. 곧 하느님 사랑 안에로의 전환입니다. 우리의 사랑으로가 아닌, 그분의 사랑으로 우리의 삶을 건설하는 것입니다.

이는 나에게서 나의 나라가 아니라, 당신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 내가 바라는 나라가 아니라, 당신이 바라시는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 안에 하늘나라가 이루어져 있다면, 곧 하느님의 사랑이 이루어져 있다면 나는 회개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어떠한지요?

내 안에 하느님나라와 그분의 사랑이 이루어져 있는지요?


오늘, 우리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


- 오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이민족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아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마태 4,15)


주님!

당신께서는 어둠이 덮인 곳에 큰 빛을 비추셨습니다.

질곡의 땅, 핍박받는 이들에게 의로움의 빛줄기를 뿌리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는 어둠의 속박을 풀고 묶인 이들을 해방시키셨습니다.

오늘, 저의 오류와 완고함을 뚫으소서.

무지와 어리석음을 밝혀, 진리의 빛 속을 걷게 하소서. 아멘.


희망이신 예수님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래아로 물러가셨다.
그리고 나자렛을 떠나 즈불룬과 납탈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자리를 잡으셨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마태 4,12-17).”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마태 4,23).”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래아로 물러가셨다.”
라는 말은, 세례자 요한의 활동이 끝날 무렵에
예수님의 활동이 시작되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물러가셨다.’ 라는 말은 체포되는 것을 피해서 다른 곳으로 가셨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박해를 피해서 아주 먼 곳으로 가신 것은 아닙니다.
요한을 붙잡아서 감옥에 가둔 사람은 갈릴래아의 영주 헤로데입니다(마태 14,3).
그래서 만일에 예수님께서 단순히 박해를 피하기만을 원하셨다면
헤로데의 통치권이 미치지 못하는 먼 곳으로, 즉 갈릴래아에서 멀리 떨어진
다른 지역으로 가셨을 텐데,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말은, 세례자 요한이 체포되어서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들으셨을 때쯤부터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셨음을
나타내는 말로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붙잡힌 곳에서 조금 떨어진 지역으로 예수님께서 가신 것은
헤로데의 박해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가 방해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왜 갈릴래아일까?
복음서에 나오는 ‘갈릴래아 지역’을,
가난한 민중이나 소외계층 사람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은 너무 좁은 생각이고,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기 위한
‘교두보’로 삼기에 적합한 지역이었기 때문으로 해석됩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이 있는 유다 지역보다
갈릴래아 지역에 이방인들이 더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갈릴래아 지역 사람들은 유다 지역 사람들보다 더 순박하고 열린 마음으로,
더 쉽게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도 한 이유가 될 것입니다.
(유다 지역 사람들은, 특히 예루살렘 사람들은 편협한 율법주의에 빠져 있었고,
교만과 위선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부터 활동을 시작하셨다면,
시작하시자마자 심각한 반대와 박해를 받으셨을 것입니다.)

마태오복음서 저자는,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활동을 시작하신 것은
구약성경의 예언이 이루어진 일이라고,
즉 하느님 뜻에 의한 일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예고된
하느님 말씀에 따르기 위해서이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서 자리를 잡으시고, 갈릴래아 지역에서
활동을 시작하신 것은 바로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항상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시는 분입니다.

‘어둠’이라는 말과 ‘죽음의 그림자’ 라는 말은,
‘희망이 없는 상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 상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라지만 어떻게 해야 얻는지를 모르고,
누구에게서 얻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니까 희망하지 못하고, 희망이 없는 상태로 살고 있었습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희망’은 막연하게 바라는 기대감과는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르거나 안 믿는 사람들도 “영원히 살고 싶다.”,
또는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다.” 라고 말하면서 그 생명을 바랄 수는 있지만,
그 바람은 성경에서 말하는 희망이 아닙니다.
믿음과 하나가 되어 있을 때에만 ‘희망’입니다.
메시아 예수님만이 그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믿고,
예수님께 그 생명을 간청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고,
그렇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준비를 하면서 기다리는 것, 그것이 ‘희망’입니다.

예수님만이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다는 점에서, 또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은
오직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만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희망이신 예수님”, 또는 “예수님은 희망이신 분”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없이는 희망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신 일은 ‘희망’을 선포하신 일이기도 합니다.
또 병자들과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신 일은, 그 희망이 먼 훗날의
막연한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생생한 현실이라는 것을
체험하게 해 주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희망은 틀림없이 이루어질 약속이고 ‘살아 있는 희망’입니다.
희망이 없는 상태는(희망의 반대 상태는) ‘절망’이거나 ‘허무’입니다.
예수님을 알면서도 거부하거나, 예수님의 가르침을 악의적으로 거슬러서
죄를 짓는 경우에는, 그 자신이 스스로 희망을 버리는 것이고,
자기 스스로 절망 속에서 생을 마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몰라서 방황하는 경우에는,
희망이 아닌 것들을 희망으로 착각하면서 살거나,
아니면 아무런 희망도 없이 살다가 허무하게 생을 마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둠 속’과 ‘죽음의 그림자 속에’ 앉아 있다는 말은,
사람들이 희망 없이 살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말일 뿐이고,
그 사람들이 전부 다 나쁜 죄인들이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물론 구원의 관점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 속에서 살고 있고,
모든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말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다 지옥에 가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착한 사람들이 분명히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특히 선교활동을 할 때 조심해야 할 점입니다.
비신자들을 무조건 나쁜 악인 취급을 하면 안 됩니다.
선교활동은, 조금 먼저 복음을 전해들은 사람이 아직 복음을 모르는 사람에게
그것을 다시 알려 주는 일, 즉 형제애를 실천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선교활동을 할 때에 자기는 의인이라고 잘난 체 하고,
상대방을 죄인이라고 비하하는 태도는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모든 사람은) 같은 처지의 유한한 피조물일 뿐입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4,12-17.23-25: 회개하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잡힌 것을 아시고 갈릴래아로 가신 것은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우선은 때가 되었을 때, 수난하시기 위해서였고, 우리에게 유혹의 위험에서 피하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이는 주님께서 유혹을 두려워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가 모든 유혹을 다 이겨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능력으로 우리가 그분을 따를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유혹이라는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피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우연히 위험에 빠졌을 때는 이겨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시며, 유대 지도자들의 분노를 가라앉히시려고 카파르나움으로 가셨고 이사 9,1-2의 말씀이 이루어졌다.

 

즈불룬과 납탈리 지파는 맨 먼저 바빌로니아로 끌려간 사람들이었다. 하느님의 분노가 내렸던 사람들이 먼저 하느님의 자비를 입고, 영적 속박에서 풀려나야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율법에 가려져 빛이신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율법 아래에서도 그들은 많은 빛이 있었다. 모세와 아론과 많은 예언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큰 빛이셨고 그 빛이 그 지방을 비추고 있다.

 

여기서 큰 빛은 우리 주 그리스도이시며 밝게 빛나는 복음의 가르침이다. 이 빛은 어둠 속에 앉아있는 백성”(16)을 즉 무지라는 오류 속에 있는 백성들을 비추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16)는 죄로부터 오는 것인데 인간을 타락하게 만드는 죄의 힘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아직 준비도 되어있지 않은 그들을 이미 그 빛이 비추었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붙잡히자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17)고 선포하셨다. 그 선포는 요한의 가르침을 확증해 주시는 말씀이셨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참된 증인임을 알리고자 그의 가르침을 확인해 주신다. 여기서 하늘 나라는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상태를 말한다. 그 상태는 바로 하느님께서 그 가운데 함께 하시는 상태이다. 그래서 하늘 나라는 우리 안에”(루카 17,21) 있다고 한다. 우리가 사랑할 때, 하늘 나라는 우리 안에 현존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려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악마에게 붙들린 육신을 풀어주시고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건강을 되찾아 주신다. “사람들은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24) 사람들을 그분께 데려왔다고 한다. 여기서 질병은 육체의 병을 뜻하고, 고통은 영적 질병을 뜻한다. 예수님께서는 육체의 병은 신성의 권능으로 영적인 병은 자비의 말씀으로 낫게 해 주셨다.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우리도 그분을 따라야 한다. 그분에게 가서 죄의 용서를 청하자. 그리하여 나쁜 습관을 고치도록 하는 것으로 그분께 가도록 하자.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 17)

-한상우신부-

회개의 여정은
하늘 나라의
여정입니다.

사람과 회개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사람의 길이
회개의 길입니다.

회개는
이끌어가시는
하느님을 피조물이
인정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십자가에서
정점을 이룹니다.

십자가가
하늘 나라의
문을 엽니다.

회개는 하느님
사랑을 만나는
가장 큰 기쁨입니다.

우리를 위한
하늘 나라가
아주 가까이
왔습니다.

우리를 향한
조건없는 사랑이
회개를 불러
일으킵니다.

회개로
세상을 새롭게
보게됩니다.

모든 것을
하늘 나라의
은총으로
바뀌게 하는
회개가 있습니다.

회개가 없다면
하늘 나라도
없습니다.

생명이 있는 곳에
회개가 있고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늘 나라가
있습니다.

생명과 사랑
회개와 하늘 나라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우리곁에 가까이
오셨음을 진실로
믿습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 말씀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에 당신을 드러내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래아로 물러가셨다"(마태 4,12).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오실 길을 준비하던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의 손에 붙잡힙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신 뒤의 일이지요.

이 "물러가심"은 헤로데의 영향력을 피하시려는 동선이 되기도 하고, 또 세례자 요한이 닦아놓은 길 위에서 비로소 이스라엘 백성에게 영혼의 힘을 불어넣어 주시려는 행보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즈불룬과 납탈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자리를 잡으셨다"(마태 4,13).

이 말씀 이후에 인용된 이사야 예언서 대목(이사 8,23-9,1)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자리를 잡으신 곳은 어둠의 땅이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입니다. 그곳 주민들은 가난과 무지, 우상숭배와 절망 속에서 당시 제도와 질서에 희망을 갖기 어려운 처지를 살고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마태 4,17).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하신 일은 그들을 회개로 초대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회개의 이유가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의 주장처럼 율법 준수를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계명을 위한 계명 준수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그랬듯이 예수님께서도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알리시면서, 목전에 도래한 하늘 나라를 누리기 위해 회개를 이야기하신 것입니다.

"병자, 허약한 이들, 갖가지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들, 마귀 들린 이들, 간질 병자, 중풍 병자..."(마태 4,23-24)

예수님의 손길이 미치는 이들입니다. 당장의 치유와 정상 생활과 사람 대접이 시급했던 이들, 구원이 절박한 이들이 주를 이루고 있지요. 번듯한 신분이나 풍요로운 재력, 높은 학식을 뽐내는 이들이 아니라 세상에서 고통 받고 소외된 이들이 지금 예수님 주변으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첫 공현의 증인이 되는 영광은 우리가 동방 박사라 일컫는 이방인들에게 주어집니다. 그리고 공생활을 시작하신 뒤에는 이처럼 세상의 주변부로 밀려난 이들에게 공적으로 드러나시면서, 주님 공현을 목도하는 엄청난 기회가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러 세도가나 권력자, 부자나 학식 있는 이들을 거부하시거나 밀어내신 것이 아닙니다. 아들의 치유를 청한 카나의 왕실 관리(요한 4,43-54 참조)나, 밤에 그분을 찾은 최고 의회 의원이자 바리사이인 니코데모(요한 3,1-21 참조), 종의 치유를 청한 백인대장(마태 8,5-13)등 몇몇을 제외하고는 그들이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았을 뿐이지요.

그분 소문이 퍼졌을 때 치유와 구마가 필요한 이들은 지인들 도움으로 예수님 앞에 나아올 수 있었습니다. 영혼과 육신의 불편이나 결핍을 못 느끼는 이들은 가난한 이들 사이로 들불처럼 퍼져나가는 이 놀라운 손길에 별 관심이 없었고요. 관심이 없으니 그분을 찾을 일도 없을 테지요.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에서 출몰한 "그리스도의 적"에 대한 우려와 더불어 식별 기준이 제시됩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오신 하느님이심을 고백하는 영은 하느님의 영이고, 이를 믿지 않는 영은 하느님께 속하지 않는 영입니다(1요한 3,2-3 참조).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입니다"(1요한 3,6).

우리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 주변에 모여와 있습니다. 그 자체만으로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이지요. 완전하지도 특별하지도 출중하지도 못한 우리는 예수님의 손길이 더 필요한 이들입니다. 저마다 어둠과 그늘의 눅눅하고 피폐한 현실을 모르지 않기에 벗어나려 애쓴 궤적을 훈장처럼 지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온전한 영육으로 서있기 위해서 그분의 신원을 믿고 그분 능력과 사랑에 기댈 수밖에 없는 가련한 인생들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공현은 이런 가난한 우리에게 열리는 선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천 년 전처럼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그런데 스스로 풍족하고 만족스러워 그분께 관심 둘 일 없는 이들에게는 봉인된 공현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지금 주님이 필요하십니까? 그분 말씀과 손길을 간절히 바라십니까? 그렇다면 어서 예수님께로 달려가십시오. 그분은 그대에게 온전히 열려 계시고 그대에게 당신을 온전히 드러내실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 공현의 축제는 가난한 우리를 통해서 오늘도 계속 이어집니다. 아멘.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을  
-김찬선신부-


어제 아기로 당신을 공현하신 주님께서 오늘은
어른으로 그리고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당신을 공현하십니다.

그리고 첫 마디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시는데
이어지는 복음은 주님께서 돌아다니시며 복음을 선포하시고,
복음선포와 함께 일으키시는 기적을 열거합니다.

그러니까 당신의 오심으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인데
당신의 오심이나 하느님 나라의 오심은 사랑이 오시는 거라고
저는 오늘 말씀을 이해하고 그것을 나누고 싶습니다.

아무렴 주님께서 병의 치유나 악마의 추방만을 위해 오셨겠습니까?
사랑이 아니라 치유를 주러 오실 거면 아예 병을 주시지 말지
어찌 병을 주고 약을 주시는 것입니까?

사실 병을 치유하시고 악마를 추방하시는 것도 사랑의 하나이기에
하시는 것이지 사랑으로 하는 치유가 아닌 치유는
의사가 돈 받고 병을 고쳐주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요.

주님은 사랑으로 말씀도 선포하시고, 병도 고쳐주시고,
악령도 추방하시는 것이며 또 어떤 때는 사랑으로
벌이나 병을 주시기도 하시고 고통을 주시기도 하시는 겁니다.

주님의 궁극적인 사랑은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지
이 세상에서 고통 없이 만족하며 살게 하시는 것이 아니며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가 사랑이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하시는 겁니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주님께 우리의 청을 드려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만족을 주는 것을 이기심으로 청하지 않고
하느님의 사랑을 청할 것이고 이웃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랑을 주십사고 청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청하는 것은 그분에게서 다 받게 됩니다.
우리가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계명은 이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라는 오늘 독서의 뜻도 바로 이런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명확하게 알아야 할 것은 내 마음에 드는 것을
하느님께서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마음에 드는 것을
하느님께서는 들어주신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에 드는 것이 아니라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을 
하느님이 들어주시는 것을 하느님의 이기주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만 사랑하십니까?

여기서 관건은 하느님 마음이 무엇이냐 그것일 텐데
비유하면 엄마의 마음이 아닐까요?
그리고 자녀를 향한 엄마의 마음은 무엇일까요?
맛있는 것을 자기 입에 넣고자 하는 마음이겠습니까?

나쁜 것은 자기의 입에 넣고,
자녀의 입에는 좋은 것만 넣어주고 싶은 마음이지요.

병원의 치료에 자신을 맡긴 사람은 약 처방과 식단을
자기가 짜지 않고 병원에서 주는 대로 따르고
엄마의 사랑을 믿는 사람은 엄마를 믿고 따르듯
하느님 사랑을 믿는 사람들은 다른 것을 원하지 않고
하느님 마음에 드는 것을 자기도 원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프란치스코처럼 다음과 같이
자신과 형제들을 위해 기도해야겠습니다.

"당신이 원하신다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바로 당신 때문에 실천케 하시고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을 항상 원하게 하소서.“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6년 1월 4일 주님 공현 후 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 마태오4,12-17.23-25)


 복음을 전할 때 말이 아니라 행동이 먼저여야 합니다. 복음을 선포하지 않으면 사랑이 없는 사람으로 심판받습니다. 그래서 교리와 성경 공부를 많이 합니다. 그러나 하루에 한 사람에게라도 하느님 사랑을 실천하고 한 사람에게라도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실천하지 않으면 평생 한 번도 복음을 전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행동으로 나타나야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메시지는 세례자 요한이 선포한 메시지와 그 내용이 동일합니다. 하늘 나라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설교의 핵심 주제입니다.

 ‘하늘 나라’라는 표현은 마태오 복음사가만이 사용하는 특별한 표현입니다. 마태오 복음은 ‘하느님’이라는 표현을 직접 사용하기를 꺼리는 유다인들을 주 대상층으로 삼고 있기에, ‘하느님’ 대신 ‘하늘’이라는 우회적인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하늘 나라는 하느님 친히 다스리시는 나라를 의미합니다. 하늘 나라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태도는 회개입니다. 회개란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일,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일, 그분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는 일, 그분이 건네시는 새로운 사랑의 계명을 준수하는 일입니다.

-양승국신부-

---

사막의 오아시스는 광고를 하지 않아도 온갖 살아있는 것들이 모여들게 마련입니다. 향기가 있으면 벌 나비가 모여드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예수님께 모여든 것은 그분에게 넘치는 사랑이 있었고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있다면 사람들이 모여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반영억신부-

---

"즈불룬과 납탈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자리를 잡으셨다"(마태 4,13).
이 말씀 이후에 인용된 이사야 예언서 대목(이사 8,23-9,1)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자리를 잡으신 곳은 어둠의 땅이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입니다. 그곳 주민들은 가난과 무지, 우상숭배와 절망 속에서 당시 제도와 질서에 희망을 갖기 어려운 처지를 살고 있었습니다.

"병자, 허약한 이들, 갖가지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들, 마귀 들린 이들, 간질 병자, 중풍 병자..."(마태 4,23-24)
예수님의 손길이 미치는 이들입니다. 당장의 치유와 정상 생활과 사람 대접이 시급했던 이들, 구원이 절박한 이들이 주를 이루고 있지요. 번듯한 신분이나 풍요로운 재력, 높은 학식을 뽐내는 이들이 아니라 세상에서 고통 받고 소외된 이들이 지금 예수님 주변으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오상선신부-

---

주님의 궁극적인 사랑은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지
이 세상에서 고통 없이 만족하며 살게 하시는 것이 아니며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가 사랑이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하시는 겁니다.

-김찬선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