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11월 23일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Margaret K 2019. 11. 22. 20:22

2019년 11월 23일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하느님께서 죽은 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하느님이시라는 뜻이다.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살아 있는 것이다.”
 (루가 20,27-40)

 

 He is not God of the dead, 
but of the living,
for to him all are alive.”

 


The question about the resurrectio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안티오코스 임금은, 자신이 예루살렘에 끼친 불행 때문에 자신에게 불행이 닥쳤음을 깨닫고, 큰 실망을 안고 죽어 간다고 말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에게,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라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사두가이들은 천사의 존재와 육신의 부활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영혼이 영원히 산다는 것도 부인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원한 생명이나 부활이라는 주제에서 바리사이뿐만 아니라 예수님과도 의견의 충돌이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오늘 복음도 바로 그 내용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부활이 있다면 설명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다며 이성적으로 질문합니다. 곧, 율법은 형제가 죽으면 그 후사를 이어 주려고 죽은 형제의 아내를 맞아들이라고 가르치는데, 만일 부활이 있다고 한다면 죽고 난 뒤 부활하였을 때 그 부인은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이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대답하십니다. 부활이란 지금 현재 세상에서 살고 있는 이 육신의 조건을 그대로 가지고 되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변화된 육신으로 되살아나서 천사들과 같아지기에 더 이상 세상의 연에 매여 있지 않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불교가 말하는 환생처럼 지금과 전혀 다른 존재로 되살아난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각자가 현세에 매이지 않는 온전히 변화된 몸으로 부활한다는 말입니다.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을 칭찬합니다. 아마도 그들은 바리사이들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계셨기에 예수님께 호의를 가집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예수님과 대립각을 세울 것입니다.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조상의 전통보다 당신에 대한 믿음을 더 중시하시기 때문입니다. 곧, 당신을 하느님의 아들로 받아들이라고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은 모두 예수님께 등을 돌리고 그분을 죽입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완전히 다른 몸으로 부활하심으로써, 진정 부활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오늘 제1독서는 역사적으로 유다인들을 가장 괴롭힌 임금 가운데 하나인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4세의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그가 맞은 불행한 죽음의 원인이 예루살렘에 대한 그의 죄 때문이었음을 안티오코스가 직접 입으로 고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크게 실망하고 죽으면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합니다.그렇다면 그도 과연 부활을 누릴 수 있을까요? 원수들의 구원 문제는 우리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판단하실 문제인 듯합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감정이 전염된다는 것은 많은 학자의 공통된 의견입니다.

1984년 오스트리아의 젊은 사업가가 지하철 앞으로 뛰어 들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목숨을 끊으면서 다른 사람도 자신처럼 스스로 목숨 끊기를 바랐을까요? 그저 혼자 외롭고 힘들어서 목숨을 던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 후 1년 동안 매주 평균 5명의 비율로 동조 자살이 이어졌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자가 많은 곳을 떠올려 보십시오. 자살자가 많은 곳은 계속해서 자살자가 나옵니다. 그렇게 주변 환경 조건이 나쁜 것도 아닌데 말이지요. 바로 스스로 생명을 버리려는 감정이 전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 감정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다가서야 합니다. 나 하나에서 끝나는 것이 절대로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느 사무실에 앉아 있는 사장님 표정이 너무나 좋지 않습니다. 그러면 함께 있던 직원들의 표정은 어떨까요? 똑같이 좋지 않습니다. 감정이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떤 생각과 어떤 행동을 하면서 사는가가 매우 중요합니다.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함께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유명한 부활 논쟁입니다. 사두가이파는 영혼의 불사불멸, 육체의 부활이나 천사의 존재를 믿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하느님 심판도 없다고 주장했으며, 현세에서 최대한 즐겁게 사는 것이 그들이 추구하는 바였습니다. 율법에서 명령하는 대로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이하면 죽어서 누구의 아내냐는 질문을 예수님께서 던지면서, 누구의 아내도 될 수 없으므로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사두가이파는 대부분 제관 계급이 주축을 이뤘습니다. 즉, 사두가이는 다윗 시대 대사제 차독의 후예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들의 입김이 결코 작다고 말할 수 없었지요. 그들의 말에 동조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이 사두가이들을 가만히 놔둘 수가 없었습니다. 잘못된 이해를 통해서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사람들이 있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과 같이 설명하셨고, 후에 주님께서는 몸소 부활하심으로써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다시 살아날지 보여주셨습니다.

내 생각과 행동이 다른 이들에게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지금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분명해집니다.
사랑은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보는 거지(윌리엄 셰익스피어).



감정 조절

내 감정 사용법의 저자 크리스토퍼 앙드레는 ‘감정이란 말 잘 듣는 하인이자 못 돼먹은 주인이며, 다스리는 법을 반드시 배워야 하는 생물학적 힘이다. 감정이 한껏 활개 치도록 하되, 감정에 대한 조절의 끈을 놓지 마라.’라고 말합니다.

어떤 분이 대형견을 키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훈련이 되어있지 않아서 산책만 하면 천방지축입니다. 워낙 덩치가 크다 보니 활발한 개에 오히려 질질 끌려가기도 했지요. 사람을 좋아해서 사람을 향해 뛰어가니 이 역시 큰 걱정입니다. 그렇다고 산책을 안 할 수도 없어서, 그는 시간을 내어서 하나씩 훈련을 합니다. 이렇게 훈련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 산책을 함께 즐길 수 있게 되었지요.

우리 감정도 그렇습니다. 마구 뛰면 다루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이를 조절하게 되는 것 자체만으로도 재미를 느끼게 됩니다. 낚시할 때 밀고 당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내 감정도 억압하기도 하고 또 풀어주면서 스스로 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리가 부족하면 현세주의자가 되고 은총이 부족하면 인본주의자가 된다

-전삼용신부-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는 일본 돈 만 엔짜리 지폐에도 새겨져 있을 정도로 일본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사람입니다. 그는 폐쇄적인 계급사회의 부조리함을 느끼고 그것이 일본을 망치고 있다고 믿어 어려서부터 견문을 넓히기 위해 영어 공부를 한 사람입니다.

      그는 미국과 유럽을 여행하고 그 곳에서 공부하며 받은 충격적인 사실을 ‘서양 사정’과 ‘학문의 권유’ 등의 책으로 출판해 엄청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는 인간의 평등, 개인의 권리와 자유, 한 인간으로서 개인의 독립과 책임, 관존민비의 타파, 민권의 신장, 국회 개설 등을 주장해 일본인들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버렸습니다. 그의 덕분으로 일본이 빠르게 서양과 같이 근대화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서는 오로지 서양처럼 되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만이 아니라 조선과 중국도 그런 길을 가야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조선을 자신들보다 훨씬 미개한 상태로 여겨 침략을 해서라도 아시아를 유럽처럼 만들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서양보다 먼저 조선과 중국을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잘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우리가 선생이고 조선이 하인입니다.”라는 말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그는 서양 제국주의를 일본으로 끌어들여 다른 나라를 침략하게 만드는 정신적 기틀을 세웁니다.

      ‘힘’만 좋아하고 ‘진리’를 모르면 ‘현세주의자’가 됩니다. 현세에서 잘살면 어떠한 비윤리적인 행위도 용납이 되는 것입니다. 많은 일본인들은 아직도 후쿠자와의 생각을 따르며 자신들의 침략으로 한국이 근대화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진리는 ‘사랑’입니다. 힘은 이 사랑을 위해 쓰여야 합니다. 아무리 잘 살아도 자유가 없다면 지옥입니다. 남의 자유를 빼앗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후쿠자와는 공부는 많이 했을지라도 참 진리에 대해서는 무식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이와 같은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바로 사두가이파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지극히 현세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로마 지배하에 있으면서도 독립보다는 그 힘에 결탁하여 잘 살고 있었던 이들입니다. 그러니 그들 안에 내세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심판이 있다면 현세를 즐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님께 부활은 있을 수 없다고 따집니다.

      하지만 사랑을 진리로 믿는 이들에게는 부활이 필수적입니다. 사랑은 자신을 죽이는 일이기 때문에 부활이 없는 사랑은 허무한 죽음밖에 남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반드시 그에 대한 보상이 내세에서도 있어야합니다. 사랑을 참 진리로 여기는 이들은 부활을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코를 납작하게 하는 것을 보고 좋아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율법학자,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사두가이들을 반박한 예수님을 두고 “스승님, 잘 말씀하셨습니다.”라며 칭찬해줍니다. 박해할 때는 언제고 지금은 스승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두가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는 데는 서로 일치했지만 자신들끼리는 교리가 달랐기 때문에 항상 싸웠습니다. 하지만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진리는 알았을지라도 은총(힘)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던 이들입니다. 그래서 그 힘을 주러 오신 예수님도 필요 없게 여겼습니다.

      사람은 ‘은총과 진리’로 태어납니다. 은총은 에너지이고 성령이시며, 진리는 말씀이며 성자이십니다. 하느님 아버지는 이 은총과 진리로 인간을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아기가 두 발로 걷기 위해서는 부모로부터 은총과 진리를 다 받아야합니다. 은총은 부모님이 주시는 양식입니다. 그 양식의 힘으로 부모처럼 하려고 걸음마와 옹알이를 시작합니다. 부모에게서 진리를 배우는 것입니다. 음식을 주지 않는다던가, 부모가 어떻게 걷는지 안 보여준다면 아이는 온전한 인간으로 새로 태어날 수 없습니다.

      힘만 강조했던 후쿠자와 유키치는 진리를 몰랐기 때문에 현세주의자가 되었습니다. 사두가이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십계명을 알고 내세도 믿었기 때문에 진리에는 민감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은총의 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사랑을 자신들의 힘으로 지킬 수 있다고 믿었던 ‘인본주의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피인 성령을 힘입지 않고서는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도 할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아기가 부모로부터 양식을 받지 못하면 부모를 보아도 부모처럼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일본이 후쿠자와의 제국주의 사상으로 침략했을 때, 우리나라에서는 의병운동도 많았고 3월 1일 독립선언서에도 발표했습니다. 이때 독립선언서에 빠져있었던 종교가 있었는데 유교였습니다. 당시 유생들도 독립을 위해 많은 노력은 했지만 붓으로만 하였습니다. 이는 ‘마음이 곧 이치다’라는 사상으로 유교가 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유교는 ‘기(氣)’보다는 ‘이(理)’에 치중하던 때였기 때문입니다. 기는 힘이고 은총이며, 이는 말씀이고 진리입니다. 이 은총과 진리는 항상 함께 가야 사람을 온전히 성장시킵니다. 성령님과 예수님이 그러하신 것처럼 둘은 하나이면서도 둘입니다. 그 은총과 진리를 주시는 분과 함께 세 분이 사람의 새로운 창조를 이루어내시는 것입니다.

      힘만 좋아하는 현세주의자는 진리가 부족하여 절제할 줄 모르고 자신의 욕구와 싸울 줄도 모릅니다. 반면 진리만 좋아하는 인본주의자는 은총이 부족하여 알기는 하지만 그 아는 것을 이루기 위한 힘을 청하지 않습니다. 자신들 안에 그 힘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은총도 진리도 다 하느님께서 아드님과 성령님을 통해 베푸시는 은총입니다.

      우리는 이 둘의 균형을 잘 잡고 성장해야합니다. 진리를 명확히 깨달아 현세주의에서 벗어나고 기도로 아는 것을 실천할 힘을 청해야합니다.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가 균형이 맞추어져야하는 것입니다. 말씀(진리)만 강조하면 성사에 소홀해질 수 있고, 성사(은총)만 강조하면 말씀에 소홀해 질 수 있습니다. 성경공부만 해서도 안 되고 기도만 해서도 안 됩니다. 둘 다 해야 합니다.


-조재형신부-


불가항력(不可抗力), 중과부적(衆寡不敵)’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준비한다고 하지만, 불가피한 상황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뉴욕으로 온 친구가 캐나다로 단풍 구경 간다고 했습니다. 숙소도 예약했고, 렌터카도 예약했고, 비행기도 예약했습니다. 그런데 미국면허증을 가져오지 않고, 한국 면허증을 가져왔습니다. 한국에 연락해서 미국면허증을 택배로 보냈습니다. 반가운 마음으로 미국면허증을 받았습니다. 다시금 비행기 예약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캐나다 전자 여행 허가(eTA)를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법이 개정되었는데 모르고 있었습니다. 결국, 단풍 구경은 포기하였습니다. 옆에서 바라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속이 상하고, 자신을 탓했지만, 그것도 받아들이니 마음이 편해졌다고 합니다. 덕분에 친구와 며칠 더 뉴욕에서 지낼 수 있었습니다. 가을이 깊으면 겨울이 가까이 온다는 뜻입니다. 피할 수 없다면 받아들이는 것도 삶의 지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두가이파 사람은 예수님과 부활 논쟁을 벌였습니다. 장기에 외통수라는 말이 있습니다.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수입니다. 장기에 질 수밖에 없는 수입니다. 사두가이파 사람은 부활이 있다면 유대의 율법 규정을 들어서 일곱 형제와 살아야 했던 여인의 남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예수님께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은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부활은 존재의 차원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소유의 차원은 중심이 입니다. 그러나 존재의 차원은 중심이 하느님입니다. 소유의 차원은 승자독식, 적자생존, 약육강식, 빈익빈 부익부의 세상입니다. 존재의 차원은 믿음, 희망, 사랑의 세상입니다. 정결, 순명, 가난의 삶입니다. 사자와 어린이가 함께 뛰노는 세상입니다. 사막에 샘이 넘쳐나는 세상입니다. 더는 슬픔도, 아픔도, 고통도 없는 세상입니다. 부활은 생과 사의 문제가 아닙니다. 부활은 인식과 차원의 문제입니다. 이 세상에서 존재의 삶을 산다면 이미 부활의 삶이 시작되는 겁니다.

 

가을이 깊습니다. 예전에 읽었던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험난함이 내 삶의 거름이 되어입니다.

 

기쁨이라는 것은

언제나 잠시뿐.

돌아서고 나면

험난한 구비가

다시

펼쳐져 있는 이 인생의 길

 

삶이

막막함으로 다가와

주체할 수 없이 울적할 때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나

구석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자신의 존재가

한낱

가랑잎처럼 힘없이 팔랑거릴 때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나는 더욱 소망한다.

그것들이 내 삶의 거름이 되어

화사한 꽃밭을 일구어낼 수 있기를

 

나중에

알찬 열매만 맺을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꽃이 아니라고 슬퍼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나는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네. 도대체 내가 이 무슨 역경에 빠졌단 말인가? 가난한 이는 영원히 잊히지 않고, 가련한 이들의 희망은 영원토록 헛되지 않으리라.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자 노력할 때, 우리는 결코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입니다!

 -양승국신부-

 

요즘 자주 접하게 되는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 앞에 할말을 잃을 때가 많습니다. 너무나 슬프고 끔찍한 사건·사고들이 보도될때는 재빨리 외면하곤 합니다.

 

 인생이 채 피어나기도 전인 어린 나이에, 홀로 쓸쓸히, 휘청휘청, 가지 말아야 할 길을 향해 걸어가는 젊은이들의 모습에, 기성 세대로서 가슴을 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겉으로는 멀쩡히 살아 숨쉬고 있지만, 실제로는 살아있지 못한, 이미 무엇인가 그들 안에서 죽어버린 모습도 목격합니다. 생물학적으로만 살아있지 실제로는 살아있지 못한 사람들도 만납니다.

 

 이토록 참혹하고 부끄러운 현실의 배경에 무엇이 자리잡고 있을까? 고민해봅니다. 티비 채널을 돌릴 때 마다, 눈길을 확 사로 잡는 주인공들의 기적같은 성공 스토리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집니다. 어마어마한 대저택에, 우아한 실내 인테리어, 세상 살이에 대한 걱정이나 근심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찾아볼수 없는 행복한 얼굴들...

 

 그러다 내 발밑을 천천히 내려다보면, 티비 속과는 너무나 상반되는 내 암담하고 참혹한 현실에 좌절합니다. 이 모든 것이 개발 독재의 구호 아래, 성공지상주의, 물질만능주의, 개인주의가 만들어낸 참혹한 현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 말미에서 주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있음은 축복이라고 강조하십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루카 복음 20장 38절)

 

 때로 의구심이 들때도 많습니다. “오늘 내 삶이 이토록 구차스러운데, 오늘 내 인생길이 이토록 가시밭길 투성이인데, 이런 내 삶이 대체 무슨 가치와 의미가 있을까?”

 

 그래서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노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들의 삶의 질에 대한 지속적 반성과 성찰입니다. 오늘 나는 참으로 살아 있는가? 열심히 숨쉬고 삼시세끼 제때 밥 먹으며, 분명히 살아있지만, 이미 내 안에서 어떤 것들이 죽어버린 것은 아닌지? 육체는 버젓이 살아 있지만, 영혼이나 정신이 이미 소멸되어 버린 것은 아닌지?

 

 그래서 더욱더 노력해야겠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우리들의 육체는 점점 노쇠해지고 소멸되겠지만, 우리들의 영혼과 정신은 더욱 견고해지고 강건해질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나를 둘러싼 주변 환경들이 아무리 열악하고 비호의적이라 할지라도, 또 일어서고 또 넘어서겠노라고.

 

 진정으로 살아있는 존재는 몸도 살아있지만 정신도 살아있는 존재입니다. 육체도 살아있지만 영혼도 살아있는 존재입니다. 결국 주님 안에, 그분의 성령 안에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오늘 내 앞에 펼쳐질 하루하루가 시련과 상처 투성이뿐일지라도, 기꺼이 견뎌내고 이겨내면, 언젠가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광스런 부활의 삶에 직접 참여할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갖고, 또 다시 힘을 내야겠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하느님 앞에 진정 살아있는 자로 굳건히 서 있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하느님은 살아있는 자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은 모두 살아있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조차도 하느님 앞에 있다면 살아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오직 하느님을 섬기고 그분께 영광을 드리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오직 이 목적을 위해 살도록 우리를 부르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언젠가 죽음을 맞이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자 노력할 때, 우리는 결코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입니다.

 

 이제는 돌아가신 삶과 죽음의 전문가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남긴 죽음에 대한 말씀은 위령성월을 지내고 있는 우리를 부단히 격려하고 자극합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십시오. 삶에서 가장 큰 상실은 죽음이 아닙니다. 가장 큰 상실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우리 안에서 어떤 것이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간절히 원하게 될 것, 그것을 지금 하십시오.”


산 이들을 하느님

-반영억신부-

 

 

과거, 현재, 미래가 다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미래를 더 소중히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약속해 주신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과거에 묶여 삽니다. 미래가 없는 것처럼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미래에 잘못 집착해서 오늘을 인색하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과거를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미래를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면서 오늘을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약속된 미래가 오늘을 통해서 오기 때문에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오늘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미래가 없이 오늘에 매여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현실에 밝아 자기 잇속을 챙겼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되었습니다.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셨다”(1코린2,9)하며 약속된 부활의 삶을 확인시켜줍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당신이 몸소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우리에게도 새 생명에 대한 희망을 안겨 주셨습니다. 따라서 부활에 대한 희망 안에 있는 사람은 지금 여기서부터 부활의 생명을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부활을 믿는 이에게는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닥치더라도 견디어 냅니다. 그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그분의 약속을 믿기에 현세적인 것보다도 영적인 것에 더 마음을 씁니다. 현세적인 것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약속된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가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희망하십시오. 그리고 씨를 뿌리십시오. 눈물로 씨 뿌리면 곡식 단 들고 올 제 춤추며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고 약속에 충실하신 하느님으로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그분께서 명령하시면 뜻하시는 바가 모두 이루어지고 아무도 그분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손길을 막지 못한다”(집회39,18)고 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는 그 약속을 믿고 사는 이에게 언제나 살아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산 사람들의 하느님이라는 말은 결국 깨어 있는 이에게 능력의 하느님으로 다가오신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의지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변함이 없으십니다. 다만 우리의 마음이 흔들비쭉일 뿐입니다. 이 시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으로 살아계신 하느님을 영접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하느님을 모시듯 하느님의 피조물들을 존중하고 배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본향은 하늘이고, 지금 이 세상 삶은 소풍입니다. 소풍 끝나는 날 하느님을 대면할 것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20,27-40: 천국에서는 장가드는 일이 없다

사두가이란 보상을 바라고 하느님을 섬기지 않는다고 하였기 때문에 의로운 자라는 뜻으로 불린 명칭이다. 그래서 그들은 부활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것도 하나의 보상심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들은 유대인들 가운데 부활을 믿지 않는 특별한 분파였다.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사람들을 잘못 인도하고 있던 사두가이들이 이 문제를 가지고 주님께로 모여들었다.

 

이 사두가이들이 한 여인이 일곱 남편을 맞게 되는 경우를 들어 예수께 질문을 한다.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33).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부활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마태22,29-30) 고 하셨다. 하느님의 권능은 너무나 크시다.

 

어째서 그럴까? 그들은 두 번 다시 죽지 않는다. 그들은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주님께서는 다가오는 세상의 새로운상황을 알려주신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34-36).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새로운 삶의 모습이란, 부활 자체가 결혼의 목적성을 상실해 더 이상 자손을 낳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즉 부활 때에는 사람들이 천사들과 같아지기 때문에’(36) 죽는 일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36)라고 하신다. 이것은 우리가 부활하도록 되어있고 또 그 부활은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사실에 연결되고 있다. 즉 부활로써만이 완전한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지금부터 하느님의 자녀이다. 지금 어떤 모양으로든지 그분의 생명에 결합되어있기 때문에 장차 부활하도록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루가는 저 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35)에 대해서 말했다. 그러므로 모든 일상의 삶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부활로 가는 진실한 하느님의 자녀임을 체험을 할 수 있는 장이라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체험하기 시작한 사람만이 마지막 부활을 믿을 수 있고 또 갈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37)이라고 한 것은 모세는 그 순간에 이미 수백 년 전에 죽은 그 선조들과 생명의관계에 있고, 신비스러운 친교를 통해 계속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부활은 단순히 육체적인 사실로서가 아니라, 이미 하느님과 우리를 만나게 하는 그분과의 일치된 생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38).

 

즉 그리스도인은 현재 이 순간부터 그분과 사랑의 일치 속에 살아가야 하며, 그 일치가 죽음을 넘어 우리의 육신까지도 살려줄 마지막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되기를 기다리며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분과의 사랑의 일치 속에 사는 것이 참으로 살아있는 사람의 모습이며 하느님의 영광이 되는 인간이다. 이러한 삶을 살도록 결심하며 기도하자.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

느님이시다.(루카 20, 38)

-한상우신부-

산 이들의
하느님께서는
생명의 길을
이야기하시고

하느님을
믿지 못하는
우리들은
죽음의 길을
이야기합니다.

산 이들의
하느님께서
뜨겁게 우리를
맞이하십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으로
살아 있는 우리들
삶이 됩니다.

살아온 시간
살아 있는 시간
살아야 할 시간 모두
하느님께 있습니다.

하느님의
생명이며
하느님의
차원입니다.

살아 있음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입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을 통해
죽음은 삶의 끝이
결코 아님을
알게됩니다.

당신의 생명으로
생명의 길을
열어주십니다.

우리의 죽음을
당신 생명으로
구원하시는
산 이들의 하느님께

생명을 위한 사랑을
지금 여기서 이미
실천하는
사랑의 위령성월
되십시오.

생명을 위해
생명으로
찾아오시는
산 이들의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되살아나는 믿음의
여정 되십시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 말씀들은 생명과 죽음에 대한 풍부한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루카 20,32)

오늘 대화의 발단은 사두가이들이 얼토당토 않은 가정으로 예수님을 떠보면서 시작됩니다. 사두가이들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며 바리사이와 대립하는 분파이지요(사도 23,6-9 참조).

오늘 예수님은 죽음 이후의 생명에 대해 명료히 가르쳐 주십니다.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고"(루카 20,35),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으며"(루카 20,36),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루카 20,36).

그런데 그 대상에는 조건이 붙습니다. 먼저 심판을 통해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루카 20,35)아야 합니다.

사실 이 지상의 삶은 하느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원죄의 결과로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이 차단되고(창세 3,22-24 참조) 노동과 출산, 죄악과 어두움 속에서 하느님의 완전성과 축복을 갈망하며 그분께 나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느님에게서 떨어져 나온 우리 인간이 저마다 부족하기 때문에 제도의 보호 아래 서로 돕고 살면서 생명의 축복을 이어가라고 엮어 주신 것이 혼인이고 가족, 친족 공동체라면, 그분 완전성에 참여하는 부활의 삶에는 굳이 인간 사이의 결합이나 얽힘, 구속도 필요 없겠지요.

영혼 각자가 하느님 얼굴을 뵈오며 그분 품에서 충만하고 완전한 행복을 누리니 소유나 파벌, 경쟁에서도 자유로울 것입니다. 한마디로 끼리끼리 결집할 이유가 없는 삶이지요. 자기 편도 내 것도 없으니 이기심도 없을 것이고, 하느님와 일치하는 모든 형제자매를 내 목숨처럼 사랑하며 지상에서 아직 남은 순례 여정을 채우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응원하는 것이 그곳의 일상일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불완전한 지상 제도에 비추어 하느님 나라의 삶을 넘겨짚다가 빠지는 오류와 한계를 봅니다. 부활을 믿는 우리는 죽음이 초래하는 이 삶의 불완전성을 토대로 완전하고 충만한 상태를 관상하니까요. 부활을 믿고 안 믿고에 따라 지혜와 희망의 격차는 크게 벌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루카 20,38).

놀라운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죽음은 인간의 언어였습니다. 대부분의 인간을 고통과 두려움으로 몰아넣는 예정된 미지의 관문인 "죽음"이 하느님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떻게 죽음을 맞이해 건너왔건 하느님께 우리 모두는 살아 있는 당신의 모상들, 좀 더 대담하게 말하면 당신의 분신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지상에서 살아 있다면 죽음을 지나서도 하느님 앞에 살아 있는 것입니다. 육신에 얽혀 한시적이고 제한적인 우리의 지상 생명은 하느님 면전에서 한계도 끝도 모르는 영원한 행복으로 선명히 이어질 것입니다.

제1독서는 유다인의 원흉이었던 안티오코스의 실패와 죽음을 다룹니다.

"내가 예루살렘에 끼친 불행이 이제 생각나네 ... 그 때문에 나에게 불행이 닥쳤음을 깨달았네"(1마카 6,12-13).

죽음에 이르러 그는 자신에게 떨어진 불행이 예루살렘과 유다 주민들에게 가한 공격과 살육의 결과라고 깨닫습니다. 그의 이러한 인식이 하느님을 향한 통회와 유다 민족에 대한 죄책감, 후회로 이어졌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한 인간의 가치를 생각한다면 커다란 은총이 아닐 수 없을 듯합니다.

어떤 분은, 입교를 미루는 이유가 실컷 맘대로 살다가 죽기 직전에 세례로 다 용서받고 천국 가기 위해서라고 농담을 합니다만, 죽는 바로 순간 가까스로 통회하기엔 이 세상에서 만나는 하느님, 이 세상에서 누리는 그분의 사랑이 너무 아름답고 충만합니다. 이 하느님 현존과 사랑이 죽음의 용광로를 거쳐 더 완전하고 영원한 삶으로 이어지는 것이기에, 이미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앞당겨 사는 이 기쁨을 포기할 수 없으니까요.

우리는 모두 하느님 앞에 살아 있습니다. 언제 어떻게 닥칠지 모르는 죽음조차도 지상 생명에서 영원한 생명으로의 연장을 막지 못합니다. 여기서나 거기서나 하느님 앞에서 어린이처럼 가난하고 순수한 생명을 감사와 기쁨으로 이어가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하늘의 시민"(필리 3,20 참조)입니다. 죽음도 하느님 허가와 예수 그리스도의 낙인이 찍힌 이 시민권을 어쩌지 못할 것입니다. 아멘

관계가 재편된다면 나는 ?
.-김찬선신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여러 차례 오늘 복음을 가지고 강론을 하며 관계의 재편에 대해 얘기했고,
불과 며칠 전에도 이 강론을 한 바가 있지요.

그때 저는 죽음 이후의 관계에 대해 고약한 질문을 했지요.
지금의 남편과 아내와 다시 부부가 되겠느냐는 질문과
지금의 아들의 어머니가 되는 것과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는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면 어떤 것을 선택하겠느냐는 질문이었지요.

자매님들의 경우 지금의 남편과 다시 부부가 되고 싶지는 않지만
어머니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보다 
지금 아들의 엄마가 되고 싶다고 하신 분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의하면 관계의 재편이 되긴 되는데
자매님들의 바람대로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미안하게도 관계의 재편은 자매님들의 바람대로 되지 않고
하느님께서 뜻하신대로 되는데 하느님의 뜻이란
머리를 모두 밀어버리 듯이 이전의 모든 관계는 깨끗이 끝내고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그런 식으로 재편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죽고나면 싫건좋건 관계의 재편이 되고,하느님 중심으로 되는데
이렇게 재편되는 것이 좋은 사람은 천국에 갈 것이고,
천국이 진정 행복한 곳이 될 터이지만
싫은 사람은 천국에 가고 싶지도 않을 겁니다.

옛날에 한 선교사가 아프리카에 선교를 가 교리를 가르쳤고,
마침내 세례식을 거행할 날이 되었는데 한 노인이 와서
자기는 세례를 받지 않겠다고 하는 거였습니다.

교육을 다 받고 이제와 왜 세례를 받지 않겠다는 거냐고 묻자
세례받은 사람만 천국에 가고 거기서는 지금까지의 모든 관계가
끊어진다고 하는데 당신은 자기만 세례받아 천당에 가고
조상들과 친지들은 세례를 받지 않아 그들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이 싫고,그런 천국이라면 가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는 거였습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와 천국은 공간적으로는 이 세상이 아닌 저 세상,
시간적으로는 현세가 아닌 죽고 난 뒤가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지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 중심으로 그러니까
하느님의 자녀로 기쁘게 그리고 충실히 살고 있으면 
이 세상이 이미 하느님 나라요 천국일 터이지만
하느님 중심이 싫고 그래서 하느님의 자녀 되는 것도 싫으면
하느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가 될 것이고 
그리고 이런 상태가 이 세상에서건 저 세상에서건 지옥인 겁니다.


그러므로 천국이란 곳으로 말하면 하느님과 함께 있는 곳이고,
상태로 말하면 하느님과 함께 있는 상태이기에
하느님과 함께 있지 않으면 어디에 있건 
천국이 아님을 다시 한 번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그런데 죽고나면 싫건좋건,원하건 원치 않건 어차피 관계가 재편되는데
억지로 재편당하거나 멍하니 있다가 재편당할 것인가,
하느님을 사랑하여 기꺼이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날 것인가,
그 선택이 우리 앞에 있음을 또한 직시하는 오늘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11월 25일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11월 23일 토요일

하느님께서 죽은 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하느님이시라는 뜻이다.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살아 있는 것이다.” (루가 20,27-40)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가 균형이 맞추어져야하는 것입니다. 말씀(진리)만 강조하면 성사에 소홀해질 수 있고, 성사(은총)만 강조하면 말씀에 소홀해 질 수 있습니다. 성경공부만 해서도 안 되고 기도만 해서도 안 됩니다. 둘 다 해야 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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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부활은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부활은 존재의 차원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소유의 차원은 중심이 입니다그러나 존재의 차원은 중심이 하느님입니다소유의 차원은 승자독식적자생존약육강식빈익빈 부익부의 세상입니다존재의 차원은 믿음희망사랑의 세상입니다정결순명가난의 삶입니다사자와 어린이가 함께 뛰노는 세상입니다사막에 샘이 넘쳐나는 세상입니다더는 슬픔도아픔도고통도 없는 세상입니다부활은 생과 사의 문제가 아닙니다부활은 인식과 차원의 문제입니다이 세상에서 존재의 삶을 산다면 이미 부활의 삶이 시작되는 겁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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