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11월 6일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Margaret K 2019. 11. 5. 20:33

2019 11 6일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
(루카 14,25-33)  


Everyone of you

who does not renounce all his possessions
cannot be my discipl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짊어지고 당신을 따라야 하며,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당신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이미 예수님께서도 단언하신 바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십니다. 당신을 따르려면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라고 가르치시는 예수님께서 무엇을 미워하라고 가르치시다니 다소 의아합니다.그러나 이 말씀은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자기 목숨을 미워하라는 가르침이 아니라 당신을 그 무엇보다도 더 사랑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마태오는 오해를 살 만한 표현을 조금 바꾸어, 가족들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에 합당한 자격이 없다고 표현합니다(10,37-39 참조).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철저히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뒤 예수님께서는 탑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탑을 세우려고 할 때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계산해 보아야 하듯, 당신을 따르려면 그 경비를 철저히 계산해야 하는데, 당신을 따르는 데 필요한 경비는 자기 자신까지 철저히 버리는 것임을 강조하십니다.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이만 명을 거느린 임금을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먼저 헤아려 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만약 맞설 수 없겠으면, 임금이 아직 멀리 있을 때 사신을 보내어 평화 협정을 청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사실, 우리는 스스로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도, 그분의 마음에 들 수도 없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호의가 필요하기에 먼저 우리 부족함을 고백하며 하느님과 화해를 청해야 합니다. 이렇게 보니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는 길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 호의에 기대며 자신을 철저히 내어놓는 길뿐입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강의 때문에 지방에 내려간 적이 있습니다. 식사를 간단하게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근처 편의점에 들어갔습니다. 컵라면과 삼각김밥 하나가 식사로는 딱 맞거든요. 컵라면 1,300원 그리고 삼각김밥이 1,000원이었는데, 바로 옆에 있었던 삼각김밥이 할인해서 700원입니다.

저는 무엇을 선택했을까요? 좋아하는 맛의 삼각김밥이 아니라 할인되는 삼각김밥을 선택했습니다. 더군다나 동전이 생기지 않는 딱 2,000원이었으니까요. 그리고 300원을 번 것 같기도 합니다.

식사 후에 자동차 주유소에 들어갔습니다. 글쎄 50,000원 이상 주유하면 세차가 무료라는 안내 문구가 적혀 있는 것입니다. 주유를 마치고 세차장에 가서 주유 영수증을 내밀었더니, 하부 세차는 3,000원이라고 하면서 기왕 세차하는 것 3,000원 내고서 하부까지 세차하라는 것입니다. 이 직원의 말처럼 보이지 않는 부분도 깨끗하게 해야 차를 오래 쓸 수 있다는 생각에 흔쾌히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분명히 300원을 벌고 세차를 무료로 했는데, 생각해 보니 별 이득이 없어 보입니다.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삼각 김밥은 시간이 지나면 그냥 폐기처분을 하지 않겠습니까? 그냥 버릴 것에 700원을 쓴 것입니다. 또한, 제가 사는 동네에서는 하부 세차까지 해 주고 세차비로 2,000원 받습니다. 공짜라는 생각에 비가 약간씩 내리는데도 세차했는데 사실 돈 주고 괜히 세차한 것과 똑같습니다.

세상의 상술을 이겨낼 수 있을까요? 알면서도 속을 수밖에 없는 이 세상입니다. 이러한 세상의 기준만을 보고 듣는다면 과연 주님의 뜻을 마음에 간직하면서 제대로 따를 수 있을까요? 아마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닐까요?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물론 우리를 매우 당황스럽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이 세상에 관계되는 것에만 집착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관계되는 것에 충실히 따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에만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지혜에 집중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결국, ‘나보다 더’라는 말은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지 말라는 것은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말씀과 정반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그 어떤 것도 당신보다 더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할 수 있는 우리가 될 때 하느님 나라는 멀리에 있지 않게 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것은 보이거나 만져지지 않는다. 단지 가슴으로만 느낄 수 있다(헬렌켈러).



행복한 삶.

매주 아버지가 입원해 계신 병원에 가서 주일미사를 가족들과 함께 봉헌합니다. 미사 후 다시 주차장에 가서 차를 타고 성지로 돌아오는데, 글쎄 운전석 쪽으로 다른 차가 너무 바싹 주차해서 문을 열고 도저히 탈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불편을 느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자동차 문이 봉고차처럼 슬라이드로 열린다면 훨씬 더 편할 텐데.’

세상을 살아가면서 불편함을 많이 느끼게 됩니다. 여러분의 욕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 샤워하고 나서 물기가 너무 많아 욕실 바닥이 미끄러운 것.

- 면도할 때 깎은 수염이 세면대 위에 많이 떨어져 있는 것.

- 세면대 위 거울은 왜 이렇게 얼룩이 많은지….

그렇게 크지 않은 욕실만 봐도 불편한 것이 한두 개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 세상 안에는 얼마나 많은 불편함이 있을까요? 만약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 시대에 산다면 어떨까를 떠올려 보십시오. 훨씬 더 불편함의 숫자가 많을 것 같지 않습니까? 과학기술의 발달로 현대가 적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지금이 더 많다고 합니다. 그만큼 요구사항과 불평불만이 많아진 것입니다.

내 마음을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야 불평의 삶보다는 만족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얼굴을 찡그리는 일보다 웃는 일이 더 많아질 것입니다.

어떤 삶이 더 행복할까요?                  

예수민은 내가 가난해지기만을 기다리신다

-전삼용신부-


 베를린 뒷거리 한 모퉁이에서 거지 소녀가 바이올린을 켜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녀의 앞에는 골목의 꼬마들만 몇 명 모여서 구경할 뿐 아무도 거들떠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소녀는 기운이 빠져 힘없이 팔을 내려뜨렸습니다.

      그때 어떤 젊은 신사가 소녀에게 다가가더니 바이올린을 받아 들고는 익숙한 솜씨로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름답고 황홀한 멜로디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연주가 끝나자 구름처럼 몰려든 사람들은 아낌없이 갈채를 보내며 돈을 던졌습니다. 젊은 신사는 사람들에게 조용한 미소로 답례하고 돈과 바이올린을 소녀에게 건네주고 아무 말 없이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이 젊은 신사는 아인슈타인 박사였습니다.

      미하엘 슈마허가 비행기 탑승시간이 늦었을 때 택시를 대신 운전한 사건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택시기사 정도면 그래도 운전을 잘 하는 사람이지만 F1(세계 제1의 자동차 경주)의 황제에게는 안 됩니다. 그러나 자기가 운전을 하겠다고 핸들대를 꼭 잡고 있다면 아무리 슈마허라도 대신 운전해 줄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소녀가 자기가 바이올린을 연주하겠다고 끝까지 우겼다면 아인슈타인도 어쩔 도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도움을 주려는 사람은 그 도움을 받는 사람이 먼저 힘을 빼기를 원합니다. 힘주고 버티고 있으면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 없습니다. 도움을 받으려면 먼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도와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같은 마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제가 강의하다가 예수님 만나면 다 망한다고 하면 크게 놀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는 부자에게 가진 것을 다 팔고 따르라고 하셨고 자캐오도 괜히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모셔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게 되었으며, 예수님의 제자들은 가진 것들을 다 버리고 당신을 따르게 만드셨습니다. 예수님 만나 누구하나 잘 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자칫 예수님을 만나면 세상에서 더 성공하고 부자가 된다고 착각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자신들에게 손해가 나는 일이 생기면 언제든 예수님에게서 돌아섭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가난하게 만들기 위해 다가오심을 명확히 알아야 신앙에 항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소유욕을 끊지 않으면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애정도 소유욕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소유욕을 끊는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 자신도 자신의 소유 중 하나입니다. 자신을 봉헌하는 제단은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예수님은 탑을 세우기 전에 그 탑을 세울 경비가 충분한지 먼저 계산해보는 것처럼, 혹은 전쟁을 하러 나갈 때 싸울 것인지 화평을 청할 것인지 계산해보는 것처럼, 그렇게 먼저 계산해보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계산해야 할 것은 내가 십자가를 감당할 수 있는지, 없는지 입니다. 그 십자가는 결국 자기의 소유를 다 버릴 수 있는지, 없는지로 판결납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자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고, 엄청난 우환이 들이닥쳤다고 믿음을 저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이 세상에서 잘 되게 만들어주는 분으로 착각하고 신앙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이유는 우리 안에서 당신이 대신 핸들대를 잡아주시기 위함입니다. 대신 연주해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려면 우리가 세상에서 망하고 가난해져야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힘이 빠졌을 때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 잊지 말아야하는 것은 그분은 나의 소유를 모두 버리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버릴 수 있는 만큼 그분은 나를 차지하십니다.


-조재형신부-


권선징악(勸善懲惡), 사필귀정(事必歸正), 상선벌악(賞善罰惡), 결자해지(結者解之),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말이 있습니다. 물리적인 법칙에 맞는 말입니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를 알 수 있습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습니다.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사회적인 합의에도 맞는 말입니다. 함무라비 법전, 십계명, 영국 대헌장(마그나 카르타), 세속 5, 모든 헌법과 법률은 상선벌악을 기준으로 하고 있습니다. 결자해지를 기준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질서가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륜과 도덕을 보호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렇게만 살아도 존경받는 사람이 됩니다.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미국 텍사스주의 댈러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여성 경찰관이 실수로 4층인 남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본인의 집은 3층이었습니다. 4층의 주인은 거실에서 편하게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습니다. 자기 집이기 때문입니다. 여성 경찰관은 자기 집에 누가 있다고 생각했고, 집에 있던 사람에게 총격을 가했습니다. 평범하고, 모범적이었던 사람은 본인의 집에서 아무런 이유도 모르고 죽었습니다. 재판에서 당연히 잘못한 여성 경찰관은 처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죽은 남자의 동생이 재판정에 있었습니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남동생은 판사에게 한마디 하겠다고 신청했습니다. 남동생은 형의 죽음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형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경찰을 용서하겠다고 했습니다.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을 믿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했습니다. 하늘나라에서 형도 용서할 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판사에게 형을 죽인 경찰을 안아봐도 되냐고 물었습니다. 판사는 허락했고, 동생은 경찰을 안아 주었습니다. 순간 엄숙한 재판정은 숙연해졌고, 가해자인 경찰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울었습니다. 재판정에 있는 사람들 모두 울었으며, 증오와 심판의 재판정은 용서와 치유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인종차별의 재판이 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지역사회의 분열과 갈등이 더 커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처벌과 심판은 질서를 유지하는 힘이 있지만, 증오와 원망은 남습니다. 용서와 포용은 아픔과 상처를 치유하는 힘이 있습니다. 재판은 문제를 해결할 수는 있지만, 문제를 없애지 못합니다. 문제를 없애는 길은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를 놓아버리는 겁니다. 용서와 포용은 쉽지 않습니다. 문제를 놓아버리기도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물리 법칙에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회의 질서와 규정을 따라왔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물리 법칙을 넘어서는 길을 제시하십니다. 사회의 질서와 규정을 뛰어넘은 길을 말씀하십니다. 용서와 사랑의 길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길입니다. 신앙은 꼭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은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옳고 그름을 가리는 분은 이미 계시니까요. 신앙은 하느님의 사랑을 몸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잘되리라, 후하게 꾸어 주고, 자기 일을 바르게 처리하는 이!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혹시라도 무늬만 제자, 짝퉁 제자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양승국신부-

 

며칠간 연이어 봉독된 복음의 주제는 하느님 나라 잔치 초대였습니다. 오늘 루카 복음사가는 결론을 내립니다. 하느님 나라 잔치상의 초대장을 받기 위해서는, 우선 이곳 지상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에 초대받은 사실에 크게 기뻐하면서도, 예수님의 제자직 초대에는 크게 망설입니다. 그 이유는? 소명에 응답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 너무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은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복음 14장 26~27절)

 

 성전에서 봉사하던 레위 지파의 조상 레위는 자신의 부모를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들을 모릅니다.” 그는 형제들과 절대 만나지 않았으며, 자식들마저 모른체 했습니다. 하느님 성전에 봉사하기 위해 가족을 칼처럼 끊어버린 것입니다. 성전 봉사를 이유로 가족에 대한 모든 의무를 부차적인 것으로 격하시켰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은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네번 째 계명을 폐기하거나 무시하려는 의도가 조금도 없으셨습니다. 여기서 미워한다는 것은 셈족어의 표현으로, 어떤 사람, 어떤 대상을 의도적으로 2차적인 자리에 둔다거나 소홀히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의 진의(眞意)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불효하라는 말씀이 절대 아닙니다. 형제자매들과 등지라는 말씀도 결코 아닙니다. 그보다는 이 세상 모든 존재, 모든 대상에 앞서 하느님께 최우선권을 두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육화강생으로 인해 이제 세상의 모든 질서 체계가 뒤바뀌었습니다. 그분은 이제 세상 만사 안에 첫째가 되셨습니다. 그분은 세상 모든 인간들과 존재들이 나아가야 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 그분 존재는 모든 법중에서 가장 첫째가는 법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분의 크심과 완전하심, 새로움 앞에, 이 세상 모든 존재나 대상은 그림자에 불과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삶 안에서 예수님은 최우선적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계신가요? 오늘 우리는 우리의 일상 안에서 예수님의 생애를 기억하고 찬미하는 기도생활, 영적생활에 최우선권을 두고 있는가요? 오늘 우리는 그분께서 간절히 원하시는 사랑의 삶, 사랑의 실천에 최우선권을 두고 있는가요?

 

 혹시라도 일에 대한 욕심, 자리에 대한 욕심, 부차적인 대상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 인해. 예수님은 우리네 삶 속에서 첫번째 자리가 아니라, 가장 가장 자리로 밀려나가 계신 것은 아닌가요?

 

 혹시라도 무늬만 제자는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일 중독 증세, 취미활동 중독에 푹 빠져, 기도생활이나 영적 생활, 사랑을 실천하는 생활에는 무관심한, 짝퉁 제자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김기현신부-


오늘 독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그 말씀을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스스로를 사랑하고 있는지 하는 겁니다. 보통 남에게 주는 희생적인 사랑을 실천하다보면, 어느 순간 고갈되고 지친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희생적인 사랑은 내 것을 내어 주는 행위이기 때문에 바닥나면 지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 힘들고 메마르다고 생각되면, 마음 저장고에 사랑할 힘과 에너지가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만약 바닥이 났다면 그 저장고를 채워줄 수 있는 일, 곧 스스로를 돌보고 사랑하는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저는 요즘 오전 미사 후에 걷는데요. 그 걷는 대부분의 시간이 저에게 큰 위로와 쉼을 줍니다. 그래서인지 오늘도 걸음을 시작하면서 ‘나를 사랑하는 시간이다..’ 라고 혼잣말을 했었습니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그러한 시간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힘을 마련해 주는 것 같습니다.

 

다른 한 가지는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 일은 내 것을 내어주는 일일 거라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자신의 시간이 될 수도 있고, 힘일 수도 있고, 재능일 수도 있고, 가지고 있는 무언가를 나누는 것일 수도 있을 텐데요. 오늘 나누고 싶은 것은 예전에 예수회 신부님들의 체험담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입니다.

 

예전에 예수회에서 나오는 회지를 여러 권 읽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안에 내용 가운데 여러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분들의 체험담이 있었는데요. 비슷한 느낌의 체험들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무엇이냐면..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알고, 완벽해서 줄 수 있는 게 아니라, 지금 부족한 모습 그대로 나누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는 깨달음입니다.

 

어떤 경우에 우리들의 마음속에 ‘이 정도를 나눌 수 있을까..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을 하며, 지금 실천할 수 있는 사랑을 미루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미루다보면 사랑의 일은 먼 미래에만 존재하고, 지금 이 자리에서는 아무 나눔도 아무 사랑도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모습 그대로를 내어 줄 수 있는 것이겠죠.

 

그래서 저도 부족하지만 강론도 하고, 중국 수녀님께 한국어를 가르쳐 드리기도 합니다. 아마 실력을 생각하면 영원히 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또 아무 나눔과 사랑도 일어나지 않을 텐데요. 부족한 모습이지만, 그 모습 그대로를 나누려고 할 때 지금 이 자리에서 주님의 말씀대로 작은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복음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아마도 주님을 따르는 일, 또 사랑을 실천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님을 말씀이 생각하게 해 주는 것 같습니다. 때로 공동체 안에서 상처를 주고받기도 하고 돌아서는 경우도 있죠. 그럴 때 포기하면 쉬운데, 기도와 말씀 안에서 때로는 다가가라고 때로는 회복하라고 이야기 하실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일을 대면하게 될 때 조금은 십자가를 마주하는 것처럼 부담스럽고 외면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한 번 말씀을 덮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마음은 편하지만 그분에게서는 멀어져 있는 자신을 보게 될지도 모르겠죠? 아마도 그분의 길이 어려운 길임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그분이 가시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기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사랑의 실천을 생각해 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사제관에서 식사를 하다보면,

내 말에 자동완성 기능이 생기는 것 같다.

내가 단어를 던지고 멈칫하면,

주변 신부님, 수녀님, 아주머니가

내 말을 완성해 주신다. ^^;


추구해야 할 가치

 -반영억신부-

 

서로의 의견은 다를 수 있고 그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 ‘다르다’는 것이 서로 ‘틀리다’는 것으로 인식되어 서로 등을 돌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그래서 부모와 ‘의견이 틀리다’는 이유로 집을 뛰쳐나가기도 합니다. 이때 우리는 그가 ‘가출’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똑같이 집을 나간 행위이지만 어떤 뜻을 품고 구도의 길을 걷겠다고 나가면‘출가’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그야말로 ‘출가’의 길입니다. 집착을 버리지 않고서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단순히 집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모두를 내려놓고 떠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미워한다는 것은 대립하고 등진다는 것이 아니라 더 곰곰이 더 열심히 추구해야 할 것이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탑을 세우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우듯 우리 신앙인이 추구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민감하게 식별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식별의 결과는 다른 여러 유대관계를 뒤로하고 모든 것에 앞서 주님을 첫째자리에 모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맥에 매이게 되면 자유를 잃고 주님의 뜻을 행하는데 있어서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주님께 집중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랑이신 주님께서 다음 일을 안배하십니다.

 

가출한 사람은 온갖 것에 마음을 쓰며 궁리합니다. 그러나 출가한 사람은 지금 당장은 집을 버린 것 같지만 결코 집안을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주님을 따르는데 어찌 사랑을 외면하고 자기 실속만 챙기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출가한 사람을 존경하고 우러러 봅니다. 어떻게 그 어려운 길을 가시게 되었느냐고 묻습니다. 참 훌륭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자기 자녀의 출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훌륭하다고 한 그 길에 자기 자녀는 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으니 안타깝습니다.

 

제자의 길에 신중함이 있어야 하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에는 단호한 결단과 응답이 요구됩니다. 내 자녀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하느님의 자녀임을 인식하기 바랍니다. 혹 남의 자녀가 출가하는 것은 환영하고 내 자녀의 출가는 막는 이가 있다면 그 집착을 버리기를 희망합니다. 내가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오히려 소유당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출가하는 자녀가 많아지길 기도하며 그 길에 은총 충만하길 빕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에 서 있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더 챙기고 더 채우는 준비가 아니라 더 내려놓고 더 비우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탈란트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버림과 따름

-송영진신부-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

이 말씀은, 실제로 가족과 자기 목숨을 미워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세속적이고 현세적인 것들에 얽매이면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1) 가족은 우리가 가장 먼저 사랑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니까
가족과 함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가서 이산가족이 될 수는 없습니다.
2) 우리는 자기 목숨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과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 가르치셨는데(마태 22,37-40),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려면 우선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자기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은)
‘이웃 사랑’을 제대로 실천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일까?
사랑이란, 가장 좋은 것만 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얻을 수 있는 것 가운데에서 가장 좋은 것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입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스스로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노력하지는 않고
반대쪽으로 가는 것은, 자기 자신을 싫어하는 것이고,
스스로 자기 자신을 망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7).”

예수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주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생명을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고통과 슬픔을 주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우리를 온갖 고통과 슬픔에서 해방시켜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십자가’ 라는 말 때문에, 신앙생활을 힘들고 어렵고 재미없는 생활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신앙생활은 그렇게 힘들거나 어려운 생활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기쁨 가득한 생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각자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당신의 뒤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지만, 신앙생활은 결코 ‘사서 고생하는’ 생활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십자가의 길 끝에 부활과 생명이 있음을 믿고,
조금 힘들더라도 참고 견디라는 뜻입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 정말로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만나기도 하지만, 어떻든 십자가가 주는 고통의 크기는
나중에 얻게 될 부활과 생명이 주는 기쁨과 비교하면 아주 작은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그러지 않으면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루카 14,28-30).”

이 말씀은, “마칠 자신이 없으면 시작도 하지 마라.” 라는 뜻이 아니라,
“힘들더라도 중간에 포기하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공사비가 중간에 떨어졌다면 어떻게 하나?
(신앙생활을 계속할 만한 에너지가 다 떨어져 버렸다면 어떻게 하나?)
그럴 때에 해결책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 도와 달라고 청하는 일입니다.
사실 그것은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끝까지 가기가 어려울 정도로 힘든 일을 겪을 수도 있고,
지칠 수도 있고, 어떤 이유로 좌절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에 그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기도하는 생활’입니다.
기도하지 않고서 끝까지 갈 수는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기도의 힘으로 하는 생활입니다.
‘나의 힘’으로만 하는 생활이 아니고, 예수님과 함께 하는 생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절대로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는
그를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
맞설 수 없겠으면, 그 임금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평화 협정을 청할 것이다.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31-33).”
예수님께서는 전쟁 상황으로 표현하셨지만,
이것은 가르침을 좀 더 생생하게 표현하기 위한 것일 뿐이고,
실제로는, 예수님은 우리를 정복하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고,
신앙생활은 예수님과 싸우는 생활이 아니라, 예수님과 한편이 되는 생활입니다.
그래서 뜻에 따라서 예수님 말씀을 이렇게 바꿔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너희는 메시아 없이 혼자서 살아갈 수 있는지 한 번 헤아려 보아라.
메시아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으니
심판의 날이 닥치기 전에 빨리 메시아를 믿고, 회개하여라.
회개한다면, 세속적이고 현세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을 모두 버려야 한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에는 종교와 신앙이 없어도
마음 편하게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무신론자가 아닌데도 종교와 신앙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세례를 받았지만 신앙생활보다는 세속의 일에 더 열중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어떤 경우에 해당되든지 간에 사는 동안에 큰 어려움이 없다면,
예수님 없이도 그럭저럭 잘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생의 마지막이 다가오면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합니다.
(죽을 때가 되어서야 예수님을 찾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물론 끝까지 태도를 바꾸지 않고 생을 마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저쪽 세상에 가서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실제 상황을 보면, 사는 동안에 어떻게 살았든지 간에
임종 직전에 후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병자성사를 집전할 때마다, 또 사람들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볼 때마다,
죽음은 인생의 끝이 아니라, 새 인생의 시작이라는 것을 생생하게 체험합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14,25-33: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26) 이 말씀은 그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모순처럼 들릴 것이다. 주님께서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고 하신다.

 

나보다 더라는 말을 덧붙이신 것은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당신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라 하셨다.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때, 우리는 우리 이웃도, 가족도 참으로 잘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이렇게 하느님을 우리 삶의 첫 자리에 모셔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주님께서는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27)고 하시면서 어떤 마음 자세로 따라야 하는지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마지막 단계는 십자가라는 것이다. 박해 때에는 그분을 따르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십자가였고, 평화를 누리는 이 시대에는 하느님의 뜻에 반대되는 자신의 뜻을 철저하게 죽이는 것이 십자가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십자가를 잘 질 수 있도록 주님께서는 탑과 전쟁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첫째로 탑을 세우려는 사람은 먼저 그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계산하는 것과 같다. 완성하지 못하면 비웃음을 당한다. 예수님의 제자로 살기로 결심한 사람도 우선 충분한 열성을 쌓아 두어야 한다. “얘야, 주님을 섬기러 나아갈 때 너 자신을 시련에 대비시켜라.”(집회 2,1) 이런 다짐이 없다면 어떻게 목적지에 닿겠는가?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는 그를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31) 철저하게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권력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입니다.”(에페 6,12) 여기에 육정, 정욕, 재물욕 등도 우리가 싸워야 할 적이다.

 

이제 하느님의 자녀로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큰 뜻을 품었으면 결실을 보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돌 하나로는 탑을 완성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계명 하나 지킨다고 온전한 성숙을 일룰 수 없다. 기초를 놓고, “그 기초 위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집”(1코린 3,12)을 지어야 한다. 계명을 지키며 사는 것은 금이나 은보다 소중하다. 시편에 저는 당신 계명을 금보다 순금보다 더 사랑합니다.”(시편 119,127)라고 하신다.

 

이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하늘의 시민으로서 살아가도록 하여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 43)

-한상우신부-

살기위해
버려야 합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버리고 떠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버림으로
얻게되는
내적자유입니다.

버리지 않고서는
신앙의 이 여정을
제대로 걸어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잘 가르쳐주십니다.

내것이라 착각한
자기 소유를
다 버리는 것입니다.

미련과 집착또한
버려야 할 것들입니다.

버려야 얻게되는
새로운 기쁨입니다.

신앙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버리지 못한
지난 시간을
반성합니다.

소유를 버려야
잃어버린 길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가는 위령성월
되십시오.

예수님과
함께하기 위해
내 소유를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버리는 이 여정을
먼저 걸어가셨음을
기억합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우리에게 사랑받기를 원하시는, 사랑이신 분을 만납니다.

"많은 군중이 예수님과 함께 길을"(루카 14,25)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저 우르르 뒤를 따라간다고 다 제자는 아닐 겁니다. 그 중에는 호기심으로 따라붙은 이도 있을 것이고 자기에게 득이 될지 아닐지 탐색하러 온 이도 있겠지요. 예수님께서 그런 군중에게 몸을 돌려 제자의 길을 일러 주십니다.

첫째, "가장 가까운 가족과 자기 목숨까지 미워"(루카 14,26)해야 합니다. 둘째,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따라야"(루카 14,27)합니다. 마지막으로 "자기 소유를 다 "(루카 14,33)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결코 만만치 않은 이 세 조건을 말씀하시면서는 두 개의 비유를 곁들이십니다. 탑을 세우기 전 미리 앉아서 공사 경비를 꼼꼼이 계산하는 사람의 비유, 그리고 제 나라에 쳐들어 오는 임금과 싸울지 말지를 미리 앉아서 가늠해 보고 결정하는 임금에 대한 비유입니다.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겠느냐?"(루카 14,28)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루카 14,31)
공사와 전쟁에 앞두고는 이와 같이 철저한 사전 준비 작업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있으니까요. 예수님의 뒤를 따름, 그분의 제자가 됨, 그분을 닮아가는 길에도 역시 준비가 필요합니다. 오늘 말씀하신 세 가지 조건이 바로 사전 준비 작업이 될 것입니다.

아주 가까운 가족과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라는 말씀은 감정적 증오나 배척이 아니라, 그들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라는 의미입니다. 제 십자가를 짊어지라는 것은 본성적으로 유쾌하지 않은 결점과 장애와 방해 요인도, 그 모두를 허락하신 분과 함께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자기 소유를 다 버리라는 말씀은 영적 갈망과 허기를 망각하게 만드는 물질, 장소, 사람, 기억의 금고를 비우고 그 모두의 주인이신 당신만을 소유하라는 뜻입니다. 결국 제자 됨의 준비조건은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계명과 사랑의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율법에는 하느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해 지켜야 할 계명들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를 거치면서 세부 항목이 점점 늘어 전문가가 아닌 다음에야 모두 기억하고 일일이 삶에 적용하는 일이 적지 않은 부담이었지요.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과 백성의 더 돈독하고 깊은 사랑을 위해 마련된 율법이 오히려 하느님을 더 부담스러운 존재로 여기게 만드는 폐단을 직시하며, 율법을 지키는 가장 지혜로운 길은 제시합니다.

"그것들은(계명들은) 모두 이 한 마디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됩니다"(로마 13,9).
모든 계명의 골자이며 근본 정신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천명하신 예수님 말씀(루카 10,25-28 참조)을 잇는 가르침입니다.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 그분의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건조하고 냉정한 이성주의적 계명 준수 이상의 무엇이 요구됩니다. 바로 주님 향한 뜨거운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분과 함께 있고 싶고, 닮고 싶고, 따라하고 싶어서 다 버리고 나서는 길이 제자의 길이니까요. 계산만 하고 앉아서는 영영 준비만 하다 근처도 못 가 볼 생생한 현실이지요.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10).
얼마나 담대하고 명료한 말씀입니까! 율법을 주신 하느님이 사랑이시니(1요한 4,8) 사랑은 율법의 완성 맞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함으로써 그 안에 깃든 모든 계명을 완수합니다. 사사롭고 자기중심적이며 이기적인 욕정을 넘어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애착을 내려놓고 십자가를 인내하며 소유를 비우는 제자의 길에 들어선 것을 축하드립니다. 이 길은 분명 사랑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이 길이 곧 사랑입니다.

 자신감이 아니라 믿음과 열정으로  
-김찬선신부-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군중과 함께 길을 가시는 거로 시작합니다.
함께 길을 가지만 주님입장에서는 앞서 가시는 것이고,
군중들입장에서는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때에 많은 군중이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돌아서서 이르셨다.


그렇게 별 생각 없이 가는데 주님께서 갑자기 돌아서서
그리고 느닷없이 폭탄선언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군중들이 엄청 당황하였을 텐데
지금 너희들이 나를 따라오는데 왜 나를 따라오느냐?
나를 끝까지 따를 수 있겠느냐?
끝까지 따르면 십자가 길을 가고,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로 갈 건데
거기까지도 따르겠느냐? 뭐 이런 뜻에서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 말씀을 여러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는데
오늘 저는 성숙의 차원에서 얘기할까 합니다.

제가 청원자들 양성을 할 때 성숙에 대해 얘기하면서
제일 먼저 하는 얘기가 인생의 목적에 대한 얘깁니다.
성숙한 사람은 목적 또는 목적지가 있어서 방황치 않고
흔들림 없이 그 목적지를 향하여 꿋꿋이 가지요.

반면에 미성숙한 사람은 당연히 인생의 목적이 없고
그래서 이리저리 흔들리고 인생을 낭비하지요.
그리고 목적이 없는 것도 문제지만 목적이 잘못된 것도 문제지요.

그러므로 목적이 있을 뿐 아니라 그 목적지가 옳아야 되는데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께서 제시하신 곳이 그 목적지요.
예수를 따라가면 그곳에 틀림없이 갈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그곳이 어디겠습니까?
하느님께서 계신 하느님 나라요, 진리와 생명과 행복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예수께서
하느님께로 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확고히 믿는 사람들이고
그 길을 따라 나서는 사람들입니다.ㅍ
하지만 예수를 확고히 믿고 따라나서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숙한 사람이라면 무턱대고 따라나서서도 안 되기에
오늘 주님도 두 번이나 당신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말씀을 하시고,
집짓는 비유와 전쟁하는 비유에서는 잘 따져보고 시작을 하라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이 따져보고 승산 없으면 시작도 마라는 식으로 들릴 수 있고,
그래서 겁이 많고 그러잖아도 주저하던 사람은 이 말을 듣고 즉시
네 주제 파악하고 일찌감치 포기하라는 말로 알아들을 수 있는데
주님은 포기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각오하라고 말씀하시는 거지요.

정말로 안타까운 것이 수도원에 들어오라고 권하면 젊은 사람들은
수도생활이 아무나 할 수 없는 어려운 삶이기에 자기는 자신없다고 하고,
이걸 보고 어른들은 요즘 젊은 사람들이 패기가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수도생활이든 뭐든 주님을 따르는 것은
자신감으로 하는 것도, 패기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믿음으로 하는 것이고 열정/사랑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자신감이 자기 자신감이라면 그 자신감으로 주님을 따를 수은 없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말씀처럼 나는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뭐든 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나오는 자신감이라면 그 어떤 고통도 무릅쓰고 따를 수 있지요.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불어넣어주셨는데
우리도 각오하고 따르면 주님께서 뭐든 무릅쓸 사랑의 성령을 주실 겁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11월 8일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